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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명랑히어로 - 두번 살다 정준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사진보기)
  3. 다큐 10 - 나폴레옹의 몰락 (사진보기)
  4. 람사르총회 특집 -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사진보기)
  5. 세상에 이런 일이 - 승합차에 사는 개, 공부할머니, 은개미로봇, 섬마을 혹 할머니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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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 2.0 - 인공감미료, 납치범, 전국방방곡곡의 비밀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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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대신 들어가는 대체 화학제품이 커다란 위험인것 처럼 이야기를 해놓고 막상 결론은 그냥 먹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_-;; 물론 산모나 유아, 일부 부작용자는 제외겠지만... 벌써 몇주째 같은 이야기를 하는듯한 느낌이...-_-;;
결론은 과하게 먹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그 과한 양이 제로칼로리 콜라 캔 40-50개 마시는 정도라고...






스펀지 2.0 200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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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히어로 - 두번 살다 정준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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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살다편은 요즘들어 시간이 짧아져서 그런지 농담따먹기만 하다가 막판에 유서를 읽을때문 잠깐 숙연...
물론 편집을 했겠지만.. 그렇게 웃고 놀다가 갑자기 유서 한장 읽으면서 우는 모습이 참 연기자들 답다라는 생각이...-_-;;

명랑독서토론회는 과연 몇회나 갈련지... 물론 이런 방송에서 심도 깊은 이야기가 나올것 같지도 않지만, 책도 제대로들 안읽고 나와서 부분부분만 가지고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주로 농담따먹기만 하는듯...

근데 이번주에 솔비가 나와서는 무식의 진정함을 보여주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책의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것은 물론이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박목월 작가님이라고 하고...
김구라가 화보집을 냈다는 말에, 외로운 사람들과 국군장병에게 힘을 준다나...
또 수능시험을 봤을때는 이걸 풀라고 낸건지 모르겠고, 내가 찍었으면 모르겠는데, 문제를 다 풀어서 몇점정도인지 예상을 못하겠다고... 한참을 웃었는데... 저건 정말 설정이 아닌.. 진솔한 솔비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는...^^

★ 두 번 살다 - 정준하편 


연예계 인맥의 허브 !

뮤지컬, 개그, 버라이어티, 시트콤, 드라마, 영화까지 !

다양한 장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괴물! 정준하


너무 착해서 욕먹는 ‘정주나 안 정주나 늘 정주는’ 정준하

권상우, 소지섭, 조인성과의 친분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그의 인생 재 점검시간 ! 과연 그를 찾아온 조문객은?


정준하 ‘베이비복스 노래 부르며 울었다?!’

평소 술친구로 친분을 쌓아온 정준하와 심은진 !

그러나 심은진이 남자친구가 생기면 연락을 뚝 끊어버린다는데?

심은진을 향한 정준하의 질투일까? 아님 배려일까?

지인들이 말하는 정준하의 속마음은 ?


“평생 순수한 바보로 살고 싶었다”

영구 맹구를 잇는 21세기 바보 정준하 !

잘 먹고 , 잘 삐치고, 잘 울고 , 잘 웃는

영원한 바보형 정준하의 눈물의 고백 !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바보형의 마지막 메시지는?




★ 명랑독서토론회 - 휘성, 솔비


책 보느라 밤새는 줄 모르는 분도

책은 펼치기만 해도 잠이 오는 신정환 같은 분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신개념 명랑독서토론회


추운 날씨 우리의 심장의 온도를 높여줄

가슴 따뜻한 휘성의 ‘내 인생의 책’

< >


김구라를 변화시킨 감동의 구절과

신정환이 추천한 훈훈한 이야기가 공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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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10 - 나폴레옹의 몰락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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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5 - [방송 iN/다큐 iN] - 특선다큐드라마 - 워리어스 - 타고난 승부사, 나폴레옹
위의 방송은 그가 어떻게 데뷔를 했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방송은 정상에 오른후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잘 보여준 방송...
그가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자신의 야욕과 자신의 나라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고, 독재를 한 인물로 볼수도 있다... 자기나라 병사만 300명이 죽어갔으니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가 야심을 이루어가는것을 교묘하게 국익이라는 미명아래 벌어진 일들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방송...

한인물의 흥망성쇄를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도 됬지만, 그의 역사의 굴곡에서 왜 승리를 했고, 왜 패배를 할수밖에 없었는지를 돌아보면서 또 많은것을 배울수도 있다.
워털루전투와 같은 경우만해도 본인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했고, 여건상 싸우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였을뿐인듯 했고, 러시아 침공때도 오합지졸을 가지고 군대숫자만을 믿고 참여한 전투에서 참패한것.. 이외에도 유배지에 가서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복귀를 하는 과정 등등 에서 많은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찌보면 역사를 보고, 느끼고, 배우는것이 이러한 과정은 아닐지...






<다큐 10+ - 역사>
나폴레옹의 몰락
원제: Napoleon 
방송: 2008년 11월 25일 (화) 밤 11시 10분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의 최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로마의 카이사르라도 되는 양, 스스로를 신과 같은 무적의 존재로 여기게 됐고 제국을 이어나갈 아들을 원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 왕비에게 에게 ‘말메종’을 주고 매년 3백만 프랑의 생활비까지 지급하면서 이혼을 감행한 후 새 아내를 맞아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나폴레옹의 새 아내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살의 ‘마리 루이즈’ 공주였고 이로써 그는 유럽의 왕가인 ‘합스부르크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811년,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고, 오랜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또한 1812년 봄에는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프랑스를 비롯해 그의 제국 곳곳에서 차출한 60만 명의 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가 조직됐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승리를 자신하며 6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고 12월 5일,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남겨둔 채 서둘러 파리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유럽이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가게 된다. 
 지난주에 이어 제2편은 나폴레옹의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EBS <다큐10+>는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18일과 25일 오후 11시10분에 2부작으로 방송한다.

18일 ‘나폴레옹, 유럽을 지배하다’에서는 160㎝도 안 되는 작은 키에 왼손잡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유럽을 제패했는지 알아본다. 1804년 12월2일 35세의 나폴레옹은 최고가 되려던 꿈을 실현한다. 코르시카 출신의 이 젊은 중위는 혁명의 물결에 몸을 던져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사랑하는 여인 조세핀과 결혼한 후 전장에 나가 잇단 승리 끝에 마침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나폴레옹은 1805년 영국 침공 계획을 세우지만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에 이를 포기하고 유럽 대륙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미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25일 ‘나폴레옹의 몰락’에서는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조명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아들을 원하게 된다. 그는 조세핀과 이혼한 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세의 마리 루이즈 공주를 새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는다.

1812년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또한 그해 12월5일 파리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떠난다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혁명 후 혼란기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반도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부분적으로 전쟁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련의 전쟁을 합쳐 대(大)프랑스 전쟁(Great French War)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는 대불(對佛) 대 동맹전쟁(Koalitionskriege)이라고 하고, 1813년 이후 독일 해방을 위한 전투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대동맹전쟁 이래 100년 이상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를 제2차 100년 전 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를 구분 짓는 정설은 없다. 1803년 5월 아미앵 화약의 파기를 경계로 보는 측이 많으나 1796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 개시를 경계로 보는 측과 1799년 11월 브뤼메 쿠데타를 경계로 보는 측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대륙과 세계각지의 식민지도 전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최초, 정확히는 7년 전쟁에서 이어진 2번째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편집] 영향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다시 복고주의, 정통주의를 원리로한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혁명정신은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 등 일부 식민지에까지 퍼져, 프랑스 혁명사상(민주주의, 근대법, 특권계급의 폐지등)이 심어졌다. 구체제의 부활 후에도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한 여러 법전은 각국에 남게 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 역사를 크게 바꿔 이후 100년간 유럽 여러 나라는 봉건영주의 영토를 단위로 하던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의도하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높아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부활하였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보나파르트 간의 심각한 대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계속되지 않고 7월 혁명에서 타도 당했다. 또한 프랑스 영역은 루이 14세 이래 계속된 영토확장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보아와 니스를 제외한 현재의 프랑스 본국영토가 결정되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영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해군을 격파하여 영국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아우르는 제해권을 획득해 패권국으로써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륙 봉쇄령에 대항해 해상봉쇄를 감행해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 무역에도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어 영국의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민족주의가 높아져,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를 시작으로 많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나폴레옹의 공격을 견디고 전후 북이탈리아를 획득하여 대국으로써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서서히 프로이센과의 대립이 깊어져 갔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까지 파견하고, 전후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운동을 봉쇄하여 유럽 구체제의 중심으로써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의 특색이 남은 국내경제는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하여 뒤쳐졌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것이 명백해진 것은 이후 크림 전쟁에서 증명되었다.

[편집] 진행 과정

[편집] 제1차 이탈리아 원정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등에 의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에 나섰다. 곧이어 그때까지 최전선에서 프랑스 군과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 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구원을 위해 반격에 나섰으나 나폴레옹과 대결하여 카스틸리오네 전투(8월 5일), 아르콜레 다리 전투(11월 15일~17일), 리볼리 전투(1797년 1월 14일)등에서 패배했다. 2월 2일 만토바는 항복하고 오스트리아는 정전협정에 나서 4월 18일 레오벤 조약이 성립되었다.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캉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는 남네덜란드와 라인 강 좌측해안을 병합하고, 북이탈리아에서는 치살피나 공화국 등 프랑스의 위성국이 세워졌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편집] 이집트 원정

    이 부분의 본문은 이집트 원정입니다.

프랑스군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에 대해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대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인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총재정부에 요청했다.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항구를 출항해 도중에 몰타 섬을 점령하고 7월 2일 이집트의 아부키르 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해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해전에서 허레이시오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함대에게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 만다.

또한 영국이 몰타 섬을 점령하여 해상의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하던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1800년 제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801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코펜하겐 해전은 4월 2일에 벌어졌다.)그 결과 무장중립동맹은 해체되고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고, 덴마크는 프랑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편집] 제정의 성립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2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8년 1월 스웨덴의 중재에 의해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라슈텐트 회의가 열렸지만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연기하여 대프랑스 동맹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1798년 12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참가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1799년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를 탈환했다. 다시 위험에 빠진 프랑스는 국민들 사이에 총재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와 11월 9일 브뤼멜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권을 장악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출하였다.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고 궁지에 빠졌다가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호엔리덴 전투(12월 3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하여 캄포-포르미오의 조약 내용을 재승인 하였다. 또한 7월 프랑스는 교황 비오 7세와 콘코르다트를 맺어 프랑스 혁명이래의 대립관계를 해소했다. 영국이 홀로 전쟁을 계속했으나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으면서 강화하였다.

이후 평화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체제 회복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3월 21일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프랑스 왕족 앙갱 공이 처형당한 일이 벌어져 유럽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으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했다.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편집] 제3차 대프랑스 동맹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계획하고, 도버해협에 인접한 브르타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해 영국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전투는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7만이 바이에른에 침공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8월 하순에 브르타뉴를 출발해 9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벌어진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나폴레옹은 빈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 잔존부대와 합류하여 결전을 도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이었던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에 대해 후에 예술이라고 평가받은 지휘와 배치를 발휘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한편 해전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빌뇌브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포착되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괴멸 당했다. 다만 이 해전은 곧바로 대륙에 있던 나폴레옹의 패권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게 굴복했다.

다음해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왕,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에 즉위시키고, 7월에는 독일의 서남쪽 여러 연합체를 합쳐 친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전후로써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하게 되었다.

[편집] 제4차 대프랑스 동맹

프로이센은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으나, 라인 동맹의 성립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자, 1806년 7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예나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 후위부대를 격파하고, 아우어슈타트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이 2배의 병력을 갖추고, 다부 군단에게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 당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섰고,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이 발흥하고 있던 영국과 유럽대륙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금지시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허나, 오히려 교역 상대를 잃어버린 유럽 여러 나라측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추적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향했으나,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과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8일)가 벌어졌다. 눈바람속의 전투는 양군 모두 적지 않은 사상자가 속출했고, 결판은 나지 않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하고, 프리트란트 전투(6월 14일)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하여 격멸시켰다.

7월 7일 ~ 9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폴란드 분할로 인해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는 옛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으로 되살아났다.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를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프로이센의 옛 영지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치되고,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프로이센은 철학자 피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한다]라는 강연을 시작하고, 또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군제개혁이 실시되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에르푸르트에서 회담을 갖고,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는 일을 맡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이것으로 인해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하여 패배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할양한 것과 더불어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파리조약) 그 후 스웨덴 국왕 카를 13세는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은 북유럽에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베르나도트는 훗날 배신하고,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게 하였다.

[편집] 진흙탕 싸움 (반도 전쟁)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트라팔가르 해전 및 1807년 포르투갈 침공에도 함께 싸웠으나, 국내에서는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대립하였다. 1808년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유폐시키고,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민중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다. 이 반란은 삽시간에 에스파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11월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침공해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몰아낸 후, 후일을 술트 원수에게 맡기고 귀환했다. 허나 그 후에도 에스파냐 측은 게릴라전과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완강한 저항을 계속했다. 이 반도전쟁은 진흙탕 전쟁으로 변하고, 프랑스는 대군을 몰아넣었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편집] 제5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에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신속히 대응하여 에크뮬 전투(4월 22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5월 13일 빈으로 입성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5월 20일~21일 프랑스군은 빈 근교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인해 가교가 여기저기 파괴되어, 절반쯤 건너갈 때 공격을 받았다. 이 아스펜-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 자신의 지휘에 의한 최초의 패배였다. 그 후 프랑스군은 바그람 전투(7월 5일~6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10월 14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쇤부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1810년 나폴레옹은 황후 조제핀을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별하고 4월 2일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1811년 3월 20일 왕자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여 로마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되어 로마 교황 비오 7세는 유폐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병합하여 프랑스 제국의 기타, 지배하의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가 왕위로 있던 에스파냐, 동생 제롬이 왕위에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의동생 뮈라가 왕위에 있던 나폴리 왕국, 종속적인 동맹국 스위스, 라인동맹, 바르샤바 공국, 그리고 대등동맹국의 덴마크 왕국에 미쳐, 나폴레옹 절정기라고 평하게 되었다.

[편집] 러시아 원정과 몰락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히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거기에다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까지 겹쳐 이러한 연속적인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폰텐느 블로우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편집] 결과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편집] 주요 전역(戰役) 및 전투

    *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년~1797년)
          o 로디 전투
    * 이집트원정(1798년~1799년)
          o 아부키르 만(灣) 해전 (1798년 8월1일)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또는제2차 이탈리아 원정 (1799년~1800년)
          o 취리히 전투 (1799년 )
          o 마렝고 전투 (1800년 6월14일)
          o 호엔리덴 전투(1800년 12월 3일)
    * 오스트리아 전역 (1805년)
          o 트라팔가르 해전 (1805년 10월21일)
          o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2일)
    * 독일-폴란드 전역 (1806년~1807년)
          o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14일)
          o 아일라우 전투 (1806년 2월7일~8일)
          o 프리트란트 전투 (1806년 6월14일)
    * 반도 전쟁(半島戰爭;영어:Peninsular War ; 1808년~1814년)
    * 오스트리아 전역 (1809년)
          o 아스펜-에슬링 전투 (1809년 5월21~22일)
          o 바그람 전투 (1809년 7월5일~6일)
    * 러시아 원정 (1812년)
          o 보로디노 전투 (1812년 9월7일)
    * 독일-프랑스 전역 (1813년~1814년)
          o 라이프치히 전투 (1813년 10월16일~19일)
    * 프랑스 전역 (1815년)
          o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편집] 군사 부문

나폴레옹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국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서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 서는 20만 명을 넘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전쟁 중 최대일 때 프랑스군인수는 150만 명에 달했고, 나폴레옹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동원 제도를 정비한 것은 라자르 카르노였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율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의한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 명 정도의 독립행동이 가능한 작전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빨랐다.

[편집] 군사 기술

보병의 주력병기는 프린트록식 전장총이었다. 라이플도 사용되었지만, 당시 장진시간이 길고 탄환을 생산하는 공업기술도 낮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 독립된 부대로써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부대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아직 철도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군은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하여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였으나 인구가 희박한 러시아나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동력이 둔화되었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기간을 통해 사용되었다. 열기구에 의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 되었다.

[편집] 나폴레옹의 전술

나폴레옹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 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를 얻었다]라고 대륙군 병사들의 말처럼 이 사상이 나타났다. 카스틸료네 전투에서 분산해서 진격하여 2배의 병력을 가진 오스트리아군의 기선을 제압한 기동을 하여 각개격파 했다. 울름 전투에서는 적 주력의 측면에서 배후로 크게 기동하여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포위해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은 아군 일부를 적 주력의 공격을 상대하고, 그 사이 주력을 이끌고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작전을 특기로 삼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프리트란트 전투가 그 성공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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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사르총회 특집 -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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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지나다니다가보면 이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곳은 어디인지 궁금했었는데,
그곳을 잘 보여준 장항습지편.. 군사구역이라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못한다고 하는데, 이런 별천지도 있나 싶었다는 방송.. 근데 군사보호구역임에도 외국산 어류들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서 피폐해져간다는 이야기가 참 안타까웠다.





유도, 시암리 습지, 산남 습지, 곡릉천하구 습지, 출판단지 습지, 고라니, 괭이사초, 그령, 스크령, 개피, 망둥어, 기수역, 펄콩게, 신곡수중보, 김포대교, 버드나무 군락지, 말똥게, 유효인산, 해오라기, 백로 번식지, 세모고랭이, 새섬매자기,
SBS스페셜 람사르총회 특집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
방송일시 : 2008. 10. 26 (일) 밤 11시 10분

■ 기획의도

2008년 10월 28일 경남 창원에서 람사르총회가 열린다. 람사협약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다. 한강하구는 분단 이후 50년 넘게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통제되고 우리나라 4대강 중 유일하게 강 하구가 둑으로 막혀있지 않아 강물과 바닷물이 교류하는 기수역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생태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지난 2006년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한강하구 장항습지를 지난 5개월에 걸쳐 집중 취재, 자연생태보고서를 만들었다. 람사르총회를 앞두고 우리나라에 와있는 세계적인 환경?생태 전문가들과 시청자들에게 장항습지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 주요 내용

습지는 고라니가족의 천국, 강은 어부들의 옥토
100여마리의 고라니가 살면서 식구를 늘리고 있는 습지의 봄, 지천으로 널려있는 벼과와 사초과 식물들이 고라니의 먹이가 되어준다. 장항습지 인근의 한강에는 눈치와 모래무지, 농어 같은 다양한 어종들이 살고 있어 이곳에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의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한다.

습지의 청소부 펄콩게
서해의 바닷물이 조수 간만의 차이에 의해 한강하구까지 거슬러 올라와 한강물과 섞이고 빠져나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형성된 갯벌. 기수역이라고 부르는 이 습지의 갯벌에 사는 펄콩게는 콩알 만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녀석들이다. 갯벌에 무수한 구멍을 내고 살면서 정화작용을 해서 건강한 습지생태계를 떠받쳐 주는 것이다.

버드나무와 말똥게의 사랑
장항습지의 대표적인 식물군인 버드나무와 버드나무 밑둥에 구멍을 내고 사는 말똥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동반자다. 말똥게는 버드나무 뿌리 주변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살아가면서 공기구멍을 통해서 산소를 공급하고 먹이활동을 하면서 유기물을 뱉어내어 버드나무의 빠른 성장을 돕는다.

사라졌던 해오라기의 산란지를 찾다
장항습지에서 산란을 하던 여름철새 해오라기들이 올해는 산란지를 옮겼다. 작년에만 해도 120쌍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던 산란지에는 거미줄만 쳐있고 해오라기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는데, 제작진은 추적 끝에 새로운 산란지를 발견했고 둥지 위에서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80여 마리의 해오라기 새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너구리와 삵의 영역다툼, 그 치열한 생존경쟁을 목격하다
고라니와 함께 장항습지의 중요한 포유동물 중 하나인 삵을 추적하던 제작진은 배설물을 발견하고 삵의 통로로 여겨지는 곳에 잠복하기 시작했다. 야행성인 녀석을 촬영하기 위한 특수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카메라에는 삵 대신 너구리가 서너 차례에 걸쳐 포착되었다. 삵의 배설물 옆에 자신들의 배설물을 늘어놓기 시작하던 너구리들이 결국은 삵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삵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추수가 끝난 논으로 날아와 앉은 큰 기러기를 사냥하고 있음을 새의 사체를 통해 확인하고 잠복장소를 옮겨 삵을 기다리고...

위기의 장항습지, 보전을 위한 관심이 절실하다
장항습지는 일산대교가 건설되면서 퇴적층이 급격히 늘어나 겨울철새들의 먹이자원인 새섬매자기와 세모고랭이들이 밀려나고 줄이 수변구역을 차지하는 식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 철새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래식물인 가시박이나 돼지단풍풀 등이 습지를 뒤덮으면서 습지의 고유식물들을 고사시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철책선을 개방하는데 고양시와 군부대가 합의한 상태여서 개방에 앞서 습지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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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일이 - 승합차에 사는 개, 공부할머니, 은개미로봇, 섬마을 혹 할머니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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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방송...
승합차에 사는 강아지편은 어려운 사정때문에 자신이 키우던 개들을 산밑에서 키우는 아저씨의 이야기.. 결국에는 도움을 받아서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 아저씨도 열심히 잘 사시기를...

은개미로봇은 중학교만을 나온 아저씨가 사업부도후에 인건비절감에도 기여하고, 발명으로 신기한것을 많이 만드는 아저씨.. 필요가 발명의 아버지라는 말이 실감났던 멋진 아저씨의 발명스토리...

공부할머니편은 영어, 한문, 서예, 피아노, 수학 등등 닥치는데로 공부를 하는 할머니... 물론 실력을 그다지이지만, 남편이 죽은후에 슬픔을 잊기위해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모습이 참 대단하신데, 슬픔과 아픔을 공부에 빠져서 이겨내시는 모습이 멋졌다.
그녀가 써놓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글귀가 참 가슴에 남았던 방송...

섬마을 혹 할머니는 40대에 과부가 된후에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느랴고, 혹을 치료를 받지도 못해서 지금은 엄청 커다란 혹을 달고다니시는 할머니.. 아마 조만간 혹을 제거한후에 다시 방송이 되지 않을까 싶다.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517회) 2008-11-27
<승합차에 사는 강아지> - 양주
외딴 길에 서 있는 의문의 승합차에 강아지들이 살고 있다?!
강아지 없이는 못 살아~ 승합차를 강아지 집으로
만든 아저씨의 각별한 강아지 사랑!!


산 속 외딴 길에 의문의 승합차가 세워져 있다는 제보!
어두컴컴한 산 속에서 발견한 승합차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데~
강아지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고~
무작정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작진!
개들의 주인이라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남자가 문을 열어주자 차 안에서는
무려 12마리의 강아지가 쏟아져 나왔다!!
차 밖으로 나온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소승연씨(40세).
강아지 한 마리 한 마리 보살피는 모습이 매우 다정해 보이는데...
원래 이 12마리 강아지는 모두 집에서 키운 것들이라고...
그런데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진 아저씨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강아지들을 데리고 살 수가 없어진 것!!
어떻게 해서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이런 방법으로 강아지들을 기르게 됐다는데...
승합차에서라도 강아지를 키워야만 하는!!
강아지에 죽고 못 사는 아저씨!!
아저씨의 애틋한 강아지 사랑의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공부 할머니> - 부산
칠순의 할머니가 수학 삼매경에 빠졌다!!
집안일 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할머니의 못 말리는 학습 이야기!!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다?!
제작진이 찾아가자 자랑할 게 없어 부끄럽다던 김신자 할머니(70세),
그러나 은근슬쩍 집 안 곳곳에 붙여진
영어 단어며 붓글씨를 직접 쓴 거라며 내보이는데~
한자와 영어부터 시작해서 피아노까지!! 안 해 본 공부가 없다는 할머니!!
그런데 너~무 많은 것을 공부한 탓일까?
공부를 끝내고 돌아서며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한 과목만 공부하면 지겨워서 못한다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요즘엔 수학에 푹~ 빠졌다는데~
학원에서~ 집에서~ 하루 종일 계속되는 할머니의 빡빡한 학습 일과!!
아무리 쉽게 잊어 버려도 절대 공부를 포기할 수 없다는 할머니~
밥보다 공부가 더 좋다는 못 말리는 할머니의 학습 비법을 공개합니다!!






<은개미 로봇> - 금산
사람 대신 보초를 서는 은색 개미가 있다?!
필요한 건 뚝딱뚝딱!! 부지런한 개미 같은 아저씨의 발명품 공장 속으로~


공장 앞에 괴몰체가 있다?!
어른 키 크기의 개미가 사람이 들어오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고를 한다는데~
금산의 한 공장, 빨강 노랑 초록의 빛을 내며 다리를 움직여 대는 은색 개미 발견!!
은개미가 소리를 내자 곧바로 나타나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공장 주인인 황유연씨!!
이 은개미의 정체는 아저씨가 직접 만든 공장 경비 로봇이라고~
공장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안전과 편리를 위한 아저씨의 발명품들이 눈에 띄는데~
버튼 하나로 공장 곳곳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컨트롤 박스부터
옷에 달라붙은 먼지를 떼어주는 바람이 나오는 옷장까지!!
이 모든 것들은 아저씨가 직접 재활용품을 구해다 만든 발명품들이라고~
운영하던 공장이 부도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사람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공장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아저씨, 이제 그 꿈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는데...
아저씨의 수고가 만들어낸 결정체!! 황유선 아저씨의 발명품 공장으로 놀러오세요~





<섬마을 혹 할머니> - 보령
자신의 얼굴보다 더 큰 혹을 달고 사는 할머니,
할머니의 밝은 노래 속에 숨겨진 가슴 아픈 이야기와 함께합니다.


보령의 섬마을, 항상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는 할머니가 있다는데...
마을의 작업장에서 정신없이 일하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일을 하다 더워진 것인지 목도리를 푸는 할머니,
그런데 목도리에 숨겨진 할머니의 얼굴에는 머리 크기만한 혹이 달려 있었다!!
혹 때문에 일하는 게 힘에 겹지만,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일을 하는 김성현 할머니(76세).
고단한 생활이지만 할머니는 그렇게라도 어려움을 견뎌낸다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심한 마음 고생 끝에 혹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할머니.
남편 없이 자식들을 키우느라 혹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힘겨웠던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은 혹을 달고 사는 할머니,
할머니의 밝은 노래 속에 숨겨진 가슴 아픈 이야기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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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The Children of Huang Shi) - 전쟁 한가운데 놓인 아이들을 지켜낸 한 남자의 감동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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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위해서 난징에 어렵게 들어간 기자가 난징 대학살을 직접보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주윤발에게 목숨을 구하게 되고, 황시라는 곳에 가서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고, 점점 전쟁이 격해지자 아이들을 이끌고 피난을 떠나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게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처음에는 고아원에 들어가서 아이들의 반감만을 사지만, 자신이 할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면서 하나둘씩 그의 진심을 알아주고 점점 그에게 동화되는 모습도 멋졌고,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그의 모습과 그의 이타심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개봉 2008년 09월 18일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 주윤발 , 라다 미첼 , 양자경
오스트레일리아 외
제작년도 2008년
홈페이지 http://www.huangshi.co.kr

1937년 2차 세계대전, 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영국인 종군기자 ‘조지 호그’(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일본군에 붙잡히지만 게릴라 부대의 리더 ‘잭’(주윤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그의 권유로 ‘황시’를 찾아간다.

‘황시’는 전쟁으로 가족과 집 모두를 잃고 이제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60명의 아이들이 있는 곳.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지내면서 호그는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지만 전쟁의 참혹함은 ‘황시’까지 드리우고, 전쟁터로 끌려나가게 될 위기에 처하는 아이들.
이에 호그는 60명의 아이들과 함께 ‘황시’를 떠나 새로운 희망을 찾기로 결심한다.

이제, 마지막 희망을 찾아 떠나는 1,000km 감동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중국 대륙을 누빈 <황시>의 로케이션

영화 <황시>의 촬영은 100% 중국에서 진행되었다. 거의 모든 장면들이 시퀀스대로 촬영되지 않고,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의 메모대로 촬영이 진행된 <황시>의 로케이션을 중국 ‘둔황’에서 ‘헹덴’까지 ‘황시’의 작은 기적을 이룬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둔황(Dunhuang) : 가장 첫 번째 촬영이 시작된 곳 ‘둔황’. 중국 감숙성 지방의 한국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한 이 곳은 고비 사막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소로써 영화 촬영팀은 이곳을 ‘오아시스’라고 부른다. ‘둔황’ 근처에 위치한 ‘상단’에는 실제로 ‘조지 호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마지막 영화 속 감정적인 장면들이 촬영되었다.

연성(Liancheng) : ‘조지 호그’와 ‘황시’의 아이들이 1,000km 대장정의 과정을 담은 곳. ‘연성’에서는 극한의 추위와 강설을 견디며 촬영을 해야만 했다. ‘연성’에 위치한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스케일을 소화해야 했던 <황시>팀. 어려운 지형을 따라 끝없이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1,000명 정도의 엑스트라와 50마리의 노새, 그리고 80마리의 낙타, 120마리의 말을 포함한 수백만의 가축들이 총동원되었다.

헝덴(Heongdian) : ‘황시’의 아이들의 머물렀던 고아원과 난징의 거리가 탄생된 곳. 특히 ‘헝덴’에서는 영화의 초반 스펙터클한 전쟁씬과 종군기자 ‘조지 호그’가 일본군이 저지른 처참한 대학살 현장을 목격하는 장면 등 주요 촬영이 이루어졌다. 중국의 노동자 200여명이 투입되어 전쟁 폐허 속의 중국을 완벽히 재현하였다.


2008년 가을, 단 하나의 감동실화!
작은 기적의 영웅, ‘조지 호그’를 만난다


가을의 문턱, 관객의 심신을 달래 줄 단 하나의 감동실화가 찾아온다. 전쟁 한가운데 버려진 60여명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영국 종군기자 ‘조지 호그’의 실제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 <황시>가 바로 그것.

<황시>는 1937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중국에 취재 온 한 영군 종군기자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홀로된 아이들의 유일한 안식처 ‘황시’에 가게 되면서 그 곳 아이들과의 진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인간애를 따뜻한 감성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전쟁으로 인해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찾아 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조지 호그’는 말도 통하지 않은 낯선 이국 땅에서 1,000 킬로미터 대장정의 기적을 이뤄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더욱 큰 감동을 전해주는 <황시>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푸른 눈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조지 호그’와 그로 인해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되찾게 된 아이들을 통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참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중국의 지옥 같았던 그 곳에서 피어나는 ‘조지 호그’와 이이들의 한줄기 희망은 올 가을 단 하나의 감동실화로 관객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할 것이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주윤발&양자경
동서양 최고 배우들이 선택한 <황시>


기적 같은 희망이 시작되는 곳 <황시>를 위해 동서양 최고의 배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남자 ‘조지 호그’와 할리우드의 노장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에 대한 믿음이 최고의 스타들을 ‘황시’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튜더스 - 천년의 스캔들>, <어거스트 러쉬>로 국내 여성관객들 사이에 핫배우로 급부상 중인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그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순수하고 인간적인 남자 ‘조지 호그’ 역을 맡아, 한층더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처음으로 중국에서 로케이션을 경험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낯선 곳에서 ‘조지 호그’가 실제로 겪었을 문화적 장벽과 의사소통의 답답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스타 주윤발과 양자경도 <황시>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작품에 참여 하였다. 주윤발은 오우삼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 <적벽대전>을 마다하고 선택한 작품인 것. 그는 전쟁 속에 또 다른 전쟁을 기
대하는 게릴라 부대 리더인 ‘잭’ 캐릭터의 마초적이고, 직설적인 남성성에 푹 빠져 영화를 더욱 빛낸다.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여배우 양자경 또한 <007 네버다이>의 출연한 인연으로 노개런티로 <황시>에 합류, 로저 스
포티스우드 감독과의 의리를 과시하며, ‘황시’의 아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대부호 ‘마담 왕’으로 열연을 아끼지 않는다. 존재감 만으로도 빛나는 최고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영화 <황시>의 진한 감동은 배가 되어 전한다.


1937년 마지막 남은 희망의 그 곳 ‘황시''가 부활한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작은 기적을 일궈낸 ‘조지 호그’의 실제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황시>. 우연히 ‘조지 호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접한 제임스 맥마너스 작가는 그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탄생시킨다. 그리고 1937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국의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 희망의 기적을 이룬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에 매료된 할리우드의 노장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에 의해 ‘조지 호그’의 감동실화는 스크린으로 부활하게 된다.

완성 되기까지 8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과 캐스팅, 중국 로케이션을 통해 마지막 남은 희망의 그 곳 ‘황시’를 완벽히 재현했다. 특히 <황시>의 제작팀은 ‘조지 호그’가 묻힌 곳이기도 한 중국 ‘연성’과 ‘둔황’ 일대를 중심으로 촬영하였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이가 든 당시 아이들을 찾아서 ‘조지 호그’에 대한 사실적 증언을 바탕으로 영화 속 리얼리티 살리는데 주력했다. 중국의 낯선 땅에서 언어적 장벽과 문화적인 차이점을 몸소 겪으며 촬영에 임한 <황시>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처음 중국 땅을 찾은 ‘조지 호그’가 느꼈을 낯섦과 암담함을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작은 기적을 이룬 ‘조지 호그’의 감동실화는 71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황시>를 통해 세상에 그의 존재가 스크린을 통해 빛을 발할 것이다.


1937년 ‘황시’의 아이들
2008년 감동의 엔딩으로 ‘조지 호그’를 추억하다!


<황시>의 감동은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여운을 계속된다.

호그와 함께 전쟁의 극한 상황을 이겨낸 ‘황시’의 아이들은 세월이 흘러서도 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영화 속 등장하는 ‘황시’의 아이들 가운데 생존하는 사람들은 ‘조지 호그’가 마지막으로 묻힌 곳인 중국 ‘상단’에 기념비를 세우고, 지금까지도 그를 기리고 있다.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남자 ‘조지 호그’의 감동실화는 <황시>의 엔딩에서 이제는 노인이 된 ‘황시’의 아이들의 감동의 인터뷰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들이 말하는 ‘조지 호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대하는 선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편한 친구 같은 소중한 존재로 기억하고 있다. 인터뷰 중에도 ‘조지 호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삼키는 할아버지가 된 ‘황시’의 아이들.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보다 아이들을 먼저 보살폈고, 배움에 대한 열의를 놓지 않았던 ‘조지 호그’를 기리며 그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다.

지금은 그들 곁에 없지만 ‘조지 호그’가 남기고 간 인생의 가르침과 희망 그리고 끝없는 사랑은 눈물의 인터뷰로 마지막까지 훈훈한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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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로 - 자동차정비소의 바가지, 무법천지 동대문 쇼핑몰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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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비소는 두군데중 한군데는 바가지를 씌운다던데, 한마디로 전화가 안되는데 전화코드선은 확인 안해보고 전화기 부품을 교환하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고...-_-;;
재미있던건 한집에 들어가서 수리를 받고, 다음집에 갔더니 또 수리를 하고... 총 4군데를 걸쳐서 250만원정도의 수리비가 나왔다고...-_-;;
견적사기를 최소한으로 피하기 위한 방법은 사진 맨아래에 있음...

동대문 쇼핑몰은 어린 학생들을 강제로 잡아서 강매를 하고, 폭행까지도 일삼고, 만식이, 만순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쒸우는 행태를 고발... 물론 환불도 절대 불가란다.. 싸워볼려면 싸워보잔다...-_-;;
자신들 몇푼 더벌라고, 자신의 미래와 동대문의 미래를 깍아먹는 파렴치한 인간들...







■ [제로맨이 간다] - 자동차 정비소 바가지의 실체

예상 견적의 약 50배! 견적서 7장 날아든 A씨의 기막힌 사연
5개월 전에 받은 자동차 수리만 생각하면 아직도 밤잠 설친다는 제보자 A씨.
오디오 음향의 문제로 정비사를 찾은 A씨의 예상 견적료는 4만 6천원.
하지만 수리가 끝난 후 A씨에게 청구된 비용은 자그마치 240만원!
예상 견적료의 약 50배! 견적서만 7장이 날아든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몰라서 속고, 속아도 모르는 자동차 수리 천태만상!
A씨의 경우처럼 수리 내역을 다시 보고 차량 내부를 뜯어봐도 정비를 제대로 한 건
지조차 알기 힘든 것이 일반 소비자들의 현주소. 이처럼 자동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소비자의 현실을 악용해 필요이상으로 수리비를 청구하는 업체가 많다는
데... 이에 불만제로가 나섰다.   이름 하여 ‘바가지 정비업소 잡기’ 프로젝트! 본격적
인 실험을 위해 일단 멀쩡한 차의 배선 하나를 뽑았다. 과연, 정비소에선 어떤 일들
이 벌어질까?
배선 하나 뽑았을 뿐인데, 멀쩡한 차 폐차직전 상황연출! 최대 견적 125만원!
서울시 정비소 30군데 가운데 절반! 15개 업소 바가지 실태 고발!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의 불편한 진실! 무상점검 서비스의 실체는?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요즘. 본격적인 추위 앞두고 자동차 정기점검을 계획하
는 소비자들이 많다. 때 맞춰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에서는 겨울맞이 무상점검 서
비스 행사가 한창인데... 표준화된 정찰 가격에 무료쿠폰을 비롯한 각종 이벤트, 고
객만족 서비스 앞세운 프랜차이즈 업체들. 일반 정비소는 못 미덥다며 이들의 간판
하나 보고 찾는 분들 많으셨다. 불만제로, 과연 이들 업체는 믿을만한지 확인해보기
로 했다.
불만제로, 같은 차를 이용해 무상점검 서비스로 점검을 받아 본 결과는?
무상점검 결과, 각 업체마다 수리?교체해야 할 부분이 달랐다. 심지어 고친데 고치
고 또 고치고 미션오일만 3번을 연속 교체하는 중복수리까지. 어느 부위에 어떤 문제
가 있는지, 정비업체서 얼마나 명확한 점검을 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이
제 누굴 믿어야 하는 걸까? 운전은 잘해도 차는 모르는 소비자들을 위한 불만제
로의 현명한 조언.
자동차 정비업체의 미끼상품을 내세운 과잉정비와
상습적인 바가지 비용청구를 진단하고 그 예방법에 대해 집중 취재한다!

■ [소비자가 기가 막혀] - 무법천지 동대문 쇼핑몰

강매: ‘지나갔다 하면 무조건 잡고, 길을 막아요. 내가 옷을 자유롭게 살 수 없어요.’

대한민국 쇼핑의 중심, 패션 아이템의 집결지 동대문 쇼핑몰에 대한 충격적 제보. 동
대문의 한 쇼핑몰서 일한 적이 있다는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동대문 상가서 어린 학
생들을 상대로 강매는 기본이요, 옷을 사지 않을 경우 구타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이 어린 학생들은 원하지 않는 옷을 억지로 살 수 밖에 없
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가격: 나이따라 성별따라 천차만별
이 뿐만이 아니다. 같은 옷이라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동대문 쇼핑몰의 가격. 불
만제로는 그 가격차이가 궁금했다. 각기 다른 나이와 성별의 사람들이 같은 옷을 구
입한 후 가격을 비교해보는 실험 실시했는데...10대 남학생, 여학생 팀과 엄마와 아
들 팀 그리고 성인남성이  매장을 방문한 결과 최고 8만 8천원에서 최저 6만원까지.
가격차는 무려 2만 8천원이었다.
두 번째 실험결과도 마찬가지. 최고, 최저가 1만 8천원의 차이가 났다.
국산으로 둔갑한 국적불명 상품: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은 다 잘라버려’
옷을 구입할 때 의심스러운 건 비단 가격 뿐 아니다. 중국산은 절대 안 판다는 상가
들.
그런데 국내에서 제작돼 메이드 인 코리아 표시가 있어야 할 옷에 라벨이 없는 경우
가 많은데...아예 중국산 라벨을 잘라 원산지가 어딘지 모르게 만든다고. 그동안 얼
마나 많은 국적 불명의 옷들이 국산으로 둔갑해 팔렸을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정도다.
환불불가: ‘10분 전에 산 옷인데도 환불이 안 된대요.’
뭐니 뭐니 해도 제보자들이 입 모아 말하는 불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환불거부.
심지어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도 환불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하지만 상가 상인들은 웬만해선 환불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인데다
고객센터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긴 마찬가지.
이에 대해 공정위와 소보원, 해당구청 등 관할당국은 현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행
정적인 고발을 할 수 있는 기준이나 법적인 규정. 강제성이 없다는 입장이고,
해당업체 역시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만 관련법이 없어 관리를 할 수 없다
는 기존의 입장만 고수할 뿐인데... 쇼핑의 중심에서 불만을 외친 불만제로!
국내 최대 패션상권 동대문의 고질적인 문제점과 관행을 되짚어보고
진정한 패션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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