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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vs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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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기간에 같이 본 영화

상당히 비슷한 내용과 구성, 스토리의 영화들이다.

둘 다 한국사람이지만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옆에 참 괜찮은 여자들이 한명씩 있었고...

각각의 주인공에게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역도산과 진창현 모두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부분까지 비슷하다...

단, 역도산의 경우는 영화의 내용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비열해보이고, 그 끝이 안 좋게 끝나가고...

진창현은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역도산영화에도 실망을 느겼고, 별로 재미있는줄도 몰랐다.

그에 비해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은 감동적이였다고 할까...

SMAP 맴버이자 한국에서도 앨범을 발매하고 한국말도 유창한 초난강이 주인공이고,

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김희선과 비슷하게 생긴 칸노미호가 여주인공을 맡았고,

초난강의 아버지는 한국의 유명한 배우인데 이름이 기억이 잘 안난다...

암튼 진창현씨는 최근에 자서전형식으로 책도 발매를 했다고 하던데,

언젠가 꼭 읽어보려고 한다...


내가 영화를 고르면서 주안점을 두는것은 몇가지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웃겨주는 재미있는 영화(나 홀로 집에)

영화내내 팽팽한 긴장감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영화(폰부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아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영화(러브레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희망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와이키키브라더스)

이 영화는 정확하게 어디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자서전적인 영화면서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살아야하나... 현실과 이상... 그 괴리에서... 오늘도 고민을 해본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가 생각이 나는 그런 영화다...



바이올린 명장 진창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꿈의 장인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홀로 남아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던 진창현 씨.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그 곳에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 몸부림친 그의 손에는 항상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 제작자로 인정을 받기까지 바이올린 장인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었다. 그 긴 여정에서 승리한 그는, 지난날의 역경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1976년 12월 진창현 씨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2회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쿨’에 초대됐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다음날 펜실베니아 대학 강당에서 콩쿨이 열렸다. 이 콩쿨은 바이올린·비올라·첼로 각각에 대해서 세공과 음향의 두 부문으로 나눠 총 여섯 개 부문에서 수상자를 선정하게 되어 있었다.

그 중 한 부문에도 해당사항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진씨는 어느새 좌석에 앉은 채로 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이올린을 만들고 연구하는 꿈에 빠져들었다. 꿈의 배경이 서서히 동경문화회관으로 오버랩되면서 넘어갔다. 동경문화회관에서 그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콘서트 마스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지는 못합니다.”

진씨가 아무리 말해도 박수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잠이 깨는 동안에도 박수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졸음이 덜 깨서 얼떨떨한 얼굴로 둘러보니, 강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진씨는 누가 수상했는지도 모른 채 같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무도 단상에 올라오는 이가 없었다. 행사장은 어수선해지고, 청중들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The Winner is Mister 진, 찬, 휸.”

아무도 올라오지 않자, 사회자는 당황하며 다음으로 비올라 부분의 수상자를 발표했다. 그것 역시 같은 이름이었다. 여전히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다음으로 첼로 부문의 수상자를 발표했다. 계속해서 같은 이름이었다.

“The Winner is Mister 진, 찬, 휸. Where is Mister 진, 찬, 휸?”

진씨는 갑자기 머리를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찬휸’은 자기 이름의 영어식 발음이었던 것이다.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그는, 어리둥절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잠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휘청거리며 단상을 향해 걸어나갔다. 웅성거림이 이번엔 소나기와 같은 박수소리로 바뀌었다.

그 대회에서 진씨는 총 여섯 부문 중 무려 다섯 부문을 휩쓸었다. 수상의 감격에 젖어 있으려니,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수도 없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시절과, 밤을 지새우며 미친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던 시절들이 한 순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행사가 끝나고 진씨는 바로 일본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 있는 어머니 묘소로 향했다. 마중나온 누이동생과 나란히 어머니를 향해 절을 올린 그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꺼내 어머니 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큰 상을 받아왔어요. 기쁘시죠, 어머니?”

진씨는 묘 앞에 무릎을 끓고 금메달 다섯 개를 모두 어머니 묘 앞에 묻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대신 하루 종일 아카시아 덤불 속에 파묻혀서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하루해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랐던 때가 더 많았다. 바이올린 거장으로의 그의 행보는 어릴 적부터 그 싹이 보였는지도 모른다.


* 시대에 저당잡힌 꿈을 되찾기 위해

바이올린과의 첫 만남은 일곱 살 때 동네를 떠도는 약장수를 통해서였다. 그 약장수는 손님을 끌기 위해 간간이 바이올린을 켜곤 했는데, 진씨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정신이 나갈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바이올린과의 두 번째 인연은 소학교 4학년 시절, 새로 부임한 일본인 선생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음씨 좋은 그 선생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진씨에게 직접 켜보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으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바이올린은 마치 커다란 함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선생이 떠나자 바이올린과의 인연도 끝이 났다.

중학교 시절 진씨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일본의 약탈이 한창이던 그때, 그대로 있으면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농사일이나 하다가 결국 징용에 끌려가버릴 것 같았다. 진씨는 일본으로 건너가겠다고 결심했다.

전란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진씨의 생활은 그야말로 격변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수시로 벌어지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방에 시커멓게 널린 시체를 치우는 게 일이었다. 살아야 되는 것인지 죽어야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진씨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봐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를 미래로 연결할 그 무언가를 빨리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항구에서 하루 종일 석탄을 나르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갔다.

그 후 진씨는 인력거 끄는 일을 시작했다. 워낙 몸이 허약해서 오르막길에서는 페달을 돌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몇 년간 인력거를 끌어 돈이 모이자 메이지대학 영문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주경야독을 하는 상태에서도 학점을 착실히 취득하여마침내 교직과정을 이수해 교사자격증까지 손에 쥐었다.

이제 일본에서 교사로 근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암울했던 삶이 활짝 필 것 같았다. 그때 담당교수가 진씨에게 한 말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인이 아니면 아무리 자격증이 있어도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젠 됐다고 안심하고 있던 그에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졸업하려면 1년이 남아 있었지만, 졸업하면 오히려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씨는 학교 강당에서 ‘바이올린의 신비’에 대한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그 날 강연을 주재한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는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같은 소리를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던 그의 결론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음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진씨는 ‘불가능’이란 단어를 듣자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꿈은 내가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나와 같은 조선인이 꿈을 이룩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그 꿈이 무엇이든 철저하게 가로막는다. 그렇다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보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면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바이올린 제작에 일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꿈을 좌절당하고 인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신 앞에 가로놓인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보겠다고 한 것이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기보다는 운명에 대한, 인생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을 결심한 것이었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진씨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이타비시의 오오야마에 사는 한 장인의 집이었다. 악기상에서 소개를 받고 찾아왔다는 말에 그 나이 든 장인은 매우 반가워하며 진씨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자네는 어느 지방 출신인가?”

“태어난 곳은 한국 김천이라는 곳입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구들을 다 주겠다고, 이 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일을 배워도 좋다고 흔쾌히 말하던 노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네. 미안하네.”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이었다. 다른 바이올린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어느덧 진씨는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자리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역경이야말로 나를 움직인 원동력’

다른 바이올린 장인을 소개받은 진씨는 마츠모토 지역의 아사히마치에 있는 시로라는 장인을 찾아갔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은, 여지없이 거절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시로는 대신, 키소 후쿠시마에 있는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단순한 정보였지만 진씨에게는 매우 귀중한 정보였다. 진씨는 공장으로 가기 전에 수제 바이올린 장인 몇 사람을 더 찾아가 봤지만, 결과는 달라질 게 없었다.

별 수 없이 공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진씨는 키소로 향했다. 그런데 키소에 도착하고 나서도 공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거기에서까지 거절을 당한다면 이젠 더 이상 두드려볼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곧 바이올린의 꿈을 완전히 접는 것을 의미했다. 사흘이나 망설이다가 마침내 공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역시 공장에서도 진씨를 거부했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는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장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길도, 바이올린 공장에 취직하는 길도 모두 막혔다. 하지만 진씨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머리 속엔 바이올린이 떠나지 않았고, 자신의 손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게 될 날만을 기다렸다.

일단 진씨는 공장 근처에 있는 토목공사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겨울이 되어 공사가 중단되자, 바이올린 공장 창가에 붙어 서서 공장 안을 들여다보며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눈으로 훔쳐보는 것이 진씨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장직원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누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잘 봐두었다가, 퇴근할 때 선물을 주며 말을 걸었다. 일단 친분을 쌓은 뒤, 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면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와 도구를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봄이 되자 산 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오두막집을 만들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 동안 모아두었던 재료와 도구들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첫 바이올린을 탄생시켰다. 주먹구구식으로 익힌 부분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들고 첫 음을 내보았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고 미숙한 출발이었지만 매우 뜻깊은 첫걸음이었다.

제1호를 탄생시키자, 바이올린에 붙은 열정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어보겠다고 벼르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일단 시작하고 나자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공사장에 나가는 일을 줄이고 바이올린 제작에 매달리게 되었다.

회사에서 사람이 모자라 급하게 부탁할 때만 겨우 나가서 일을 거들었다. 대신 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 쏟아지는 자갈을 채취하여 돈을 벌었다. 그 일은 적은 시간으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이 열린다 싶으면, 하던 일을 팽개치고 급하게 뛰어나가곤 했다.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좀 더 많은 시간을 바이올린 제작에 전념하고 싶었던 진씨는, 기회가 오면 무리를 해서라도 많은 돈을 확보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20평방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퍼내기도 했다. 체구가 크지도 않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당시 그의 별명은 ‘100마력’이었다.

이렇게 돈을 벌면서 그는 빠르게 제2호, 제3호 바이올린을 만들어냈다. 새로이 만들 때마다 날로 소리가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 벅찬 흥분을 느꼈다.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밥 먹는 일도, 잠자는 일도 잊고 미친 듯이 바이올린에만 매달리게 되어, 동네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혼자 바이올린을 만들다가 잘 안 되면, 기차역에 진열된 바이올린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봐두었다가 집에 돌아가서 그대로 해보곤 했다.

전시된 바이올린이 아무리 기계로 만든 것이라고 해도 진씨가 만든 바이올린보다는 세련되어 보였다. 소리야 어쨌거나 세공 면에서는 훌륭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세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장식장 앞에 주저앉아 수없이 고민했다.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진씨는 한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결혼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아질 것은 없었다. 수문이 열리면 부부가 함께 댐에 나가 자갈을 퍼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사는 오두막집은 무허가집이라서 수도가 들어올 수가 없었다.

여름이 되자 물에 문제가 생겨 아내는 설사로 한달 가까이 고생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한 진씨는 뭔가 대책을 생각해야 했다. 당시 진씨는 40개가 넘는 바이올린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 중에서 완성도가 높은 것만 몇 점 골라 동경에 가서 팔아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서 진씨는 동경으로 가는 기차편에 몸을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올린이 팔릴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학 졸업 이후 동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한 번쯤은 동경에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면 나중에라도 판로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뿌려진 성공의 씨앗이 어느덧 싹을 틔우고 있었음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3000엔짜리 싸구려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에 입학시킨 신화 창출

바이올린 열 점을 골라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악기상 몇 군데를 돌아보았지만, 바이올린을 사주겠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예상한 바였지만 막상 한 점도 안 팔리자 실망이 컸다.

짐이 많아 더 이상 돌아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별 기대 없이 모교가 있는 스루가다이 악기점으로 갔다. 그 가게에서 만난 악기 브로커 다카키 씨는 진씨의 바이올린을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시노자키 히로츠구 선생을 추천해주었다. 당시 일본의 세 바이올린 거장 중 한 사람이었다.

시노차키 선생은 진씨의 바이올린을 들고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멀리 떨어져 보며 표면의 칠과 광택을 확인하고, 실제로 연주해보면서 울림을 체크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진씨는 침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 바이올린 열 점을 세심하게 살펴본 시노자키 선생의 평가는 간단했다.

“소리가 꽤 좋군.”

그러면서, 한 대에 3000엔으로 좋다면 전부 사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또, 가져오는 대로 다 구입하겠다고 했다. 가격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바이올린이 상품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이 너무 기뻤다. 이제는 바이올린에만 매달려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바이올린을 팔 길이 열리면서 진씨는 마치다로 이사했다. 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힘겨웠다. 손으로 만드는 바이올린의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손이 빠른 장인도, 일주일에 한 대를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일주일에 한 대씩 만들어 팔면 한달 수입이 1만2000엔밖에 되지 않는다. 당시 대졸 샐러리맨의 초봉이 대략 5만 엔이었는데, 진씨의 수입으로는 식비를 대기도 어려웠다. 진씨는 잠을 줄여가며,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몇 대씩, 심지어 많을 때는 여섯 대까지도 만들어낼 정도였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바이올린을 만든 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수의 바이올린을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바이올린 제작 실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가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무수히 들었던 말이 바로 “어쨌든 많은 숫자를 소화해라. 그러면 자연히 보이게 된다”라는 말이었다.

기술은 머리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손가락의 감각으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결국 얼마만큼의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이 기술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진씨는 생활을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땀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바이올린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느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 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그가 제작한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에 합격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동경예대는 일본에서 제일 가는 예술대학으로, 거기에 시험을 치려는 학생들은 대개 유명 메이커의 고가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씨의 바이올린으로 시험을 친 학생이 합격했다는 것은, 그의 바이올린의 음질이 유명 메이커 바이올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알려지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은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판이 조금이라도 두꺼워지면, 바이올린의 생명인 음의 울림이 나빠진다. 음을 좋게 하기 위해서 판을 얇고 가볍게 하면, 이번에는 강도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이것은 바이올린의 수명과 직결된다. 이 모순 사이의 어느 한 점을 선택하느냐가 바로 장인의 능력인 것이다.

진씨는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만든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마침내는 자신이 제작한 악기를 판매점에 당당하게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무명 시절에 만든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이 됐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음색이 어딘가 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되어, 가격은 이미 수만 엔으로 뛰어올랐다.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자꾸만 늘어가더니, 마침내 이곳 저곳의 악기점에서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주문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제목으로 그의 바이올린 제작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판과 한국판에도 번역되어 실렸다. 이를 계기로 그의 바이올린 가격도 점점 올라가서, 한 대에 50만 엔이라는 가격이 붙게 되었다.

197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 경연대회’에서 여섯 개 부문 중 무려 다섯 개 부분을 석권하는 쾌거를 올렸다.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 제작자로 인정받고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수여받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무감사 제작자는 다섯 명에 불과하다.

그가 만드는 바이올린의 가격은 시가 1억 원부터 시작하는데, 그 가치는 마치 문화재 수준의 것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혹은 그의 사후에 얼마나 더 가치가 뛸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이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 당시의 가치보다 현재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과 같다.

돌이켜보면, 그를 세계적인 장인으로 이끌었던 것은 사방으로 가로막힌 암담한 현실이었다. 그 상황에서 우연히 듣게 된, 스트라디바리우스 소리는 재현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의 도전정신을 일깨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한 길이 그로서는 가장 가능한 길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바이올린 제작자로서의 70평생. 그는 바이올린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상식적으로 포기해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주먹구구식으로 바이올린을 만들어 나갔다. 그처럼 정교한 악기를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더없이 힘들었던 길이었지만,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과정이 가져다 준 동기부여는 그의 정열을 금강석과 같은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승화시켰다. 마침내는 그에게 냉소적이던 세상이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왔지만, 그는 그 통로에 들어선다고 해서 누구나 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남겼다.

“누구나 다 시행착오를 거친다고 해서 좋은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가장 큰 관건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집념입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집념이 없이는 고비를 넘길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장인이 되지 못하고 손재주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념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타고난 직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모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 말입니다.”

[INTERVIEW] 진창현 명장

" 난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

- 진창현 선생님의 오늘이 있기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습니다. 만약 진 선생님의 가정환경이 부유했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 곳에 편안히 살았어도 오늘과 같은 크나큰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진창현 : 오늘의 성과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생물도 조건반사적인 면이 있어,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반응도 다릅니다. 저희 집이 부유했다면 저의 개성을 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장인이 되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나쁘고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혹은 사회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2000년 동안 망국의 백성으로서 세계에서 소외와 차별을 당한 유태인들이 인류의 예술·과학·학술·경제 분야에서 얼마나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다들 ‘역경’ 두 글자로 인한 결과입니다. 역경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역경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입니다.

- 자신이 다른 수많은 바이올린 제작자들보다 뛰어날 수 있던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창현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저는 재일교포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장인들과 다르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일본의 장인들과 똑같은 수준의 지식·기술로는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외국인에 배타적인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특성이 저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습니다. 일본의 바이올린 제작자들보다 세 배 더 깊이 생각하고, 세 배 더 실험하고, 세 배 더 연구하고, 잠은 그들보다 3분의 1밖에 자지 않으면서 노력한 결과로 일본 장인보다 두 배 뛰어난 기술을 익혔다고 생각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 애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고 했고, 상상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더 깊이 더 넓게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날카로운 감성을 갖추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른 장인들보다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찾았다 하더라도 상황이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당장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진창현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는 저보다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다들 일본인입니다. 이들 중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곤란을 겪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은 당장 수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러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문제입니다. 벽 앞에서 주저앉으면, 진화론자가 말하듯이 자연도태를 당합니다. 문제는 의지입니다. 의지가 정말로 확고하다면, 성공의 대가를 금전적인 것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돈 버는 것을 우선시하면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물에 대해 항상 호기심을 가져야 되고, 둘째, 대상이 선정되면 그 한 점에 집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 두 요소만 지니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저는 저의 인생경험을 통해 단언할 수 있습니다.

-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는 어떤 부분입니까?

진창현 : 얼마나 좋은 소리가 나는가 하는 것은 제작자의 손재주와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용하게 가끔은 소리가 잘 나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어떤 수준의 소리가 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물리적 현상에 의존합니다. 이 물리적 현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제작자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 항상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보편적 법칙을 발견해 나가야 됩니다. 이에는 제작자의 날카로운 감성이 큰 역할을 합니다. 높은 차원의 기술은 논문에서도 볼 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스스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창현 : 성공이라는 용어는 철학적인 단어라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소기의 목적을 성취했을 때, 사람들은 성공했다 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장르에서는 절대적 성취라는 것은 없고, 상대적 성취라는 것은 있습니다. 저에게 성공은, 완벽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완성했을 때입니다.

저는 성공을 향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장인은 물질적 생활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장인은 재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제가 고생하여 창출한 기술로 많은 연주자들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감사와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 진창현 선생님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바이올린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탓하며 도전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창현 : 한국 사회는 아직도 쉽게 성공하려는 생각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또 남의 이목을 너무 의식하여, 즉 체면을 중시하여 자기의 개성과 가능성을 마음껏 추구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는 물론 운명적인 것도 있습니다. 즉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운명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후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 인생길이 아니겠습니까. 한탄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회피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길이 막히고 장벽이 가로놓여 있으면, 자기 힘으로 조금씩이라도 뚫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벽을 뚫고 빛을 보았을 때의 감격,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고,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쉽게 달성할 수 있는 일은 맛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인생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이 모험을 싫어하고 계산적인 사고방식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떤 길도 다 불확실하게 보이고, 꿈과 정열까지도 상실하게 될지 모릅니다. 인생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만 너무 집착하면, 앞길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손을 못 댄 채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세계의 명장 진창현( 혜림커뮤니케이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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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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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연재중인 Beck이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성장만화이자 음악을 주제로 한 에니인데...

만화를 보면서.. 과연 이런걸 직접 만들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단한 일본사람들이다...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던 음악도 지금까지는 아주 좋다.

만화에서는 상상으로 음악을 들었었는데, 실제로 구현이 되다니...

특히 오프닝 음악인 Beat Crusaders의 HIT IN THE USA라는 음악...

음악도 신이 나지만... 가사가 너무나도 멋지고, 자신감이 넘친다...

I never dream before
난 예전엔 꿈꿔본 적 조차 없었던 
I'm gonna knock the door
그 문을 두드릴꺼야 
Into your world a perfect dream
너의 완벽한 꿈의 세계로 통하는 
You wanna rollick !!
엄청나게 신나겠지 !! 


나도 이런 자신감의 넘치는 나만의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당~~

내 삶의 주제가를 만든다면

뭐라고 가사를 만들어야 할까...

난 무엇때문에 태어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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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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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생각없이 영화를 보고, 뭐야 이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엔딩이 되고나서야...

이 영화가 체게바라의 어릴적 이야기라는것을 알았다...

몇일뒤에 아침에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는데...

KBS TV책을 말하다에서 체게바라평전에 대해 방송을 한다고 해서 봤는데...

멋진 말이 나와서 캡쳐해서 올림...


내가 지금 현재 찾고 있고, 찾으려고 노력하는것...

찾을수 있을지... 찾는다고 해도 실천할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체게바라가 15살에 찾고, 고민하던 일을...

35살을 향해 달려가는 이 나이에 찾는다는게 좀 우습기는 하다...


아무튼 그 나이가 몇살인게 중요한것은 아닐꺼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수 있는 꿈, 목표, 비전을 찾아서...

그 꿈을 향해서 나태하지 않고... 성실하게... 목숨을 바쳐서...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10살의 꼬마나 90살의 노친네나 멋져 보일꺼야...

아니...

남들이 멋져보인다라고 생각하는것 이전에...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이유가 명확한 사람들은...

누구보다고 멋진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계획: 넉달동안 8000킬로를 가는 것.
방법: 즉흥성
목표: 책으로만 봤던 내가 태어난 땅을 둘러보기 위해.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 월터 살레스 감독 브라질 상영시간 2 시간 6분


젊은 시절의 혁명가는 어떤 꿈길을 따라 혁명가가 되는가?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라는 세계 역사에 매혹의 그림자를 남긴 한 낭만적인 혁명가의 발자취를 따라 그 발자국 하나 마저에도 경배를 드리는 한 남미 감독의 순례일지이다.

전 세계가 마음 속 깊이 하나의 카리스마로 받아들이는 혁명가의 젊은 날의 초상은 과연 어떠했을 것인가? 거리는 모터사이클에 몸을 실고 친구를 의지하며 기꺼이 남미의 땅을 무전 여행하는 체와 그 친구를 보자면, ‘체’ 이전의 ‘체’가 오히려 인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비견할 만한 남미의 인물이 있다면 <에비타> 정도? 그러나 헐리우드의 에비타가 마돈나의 말도 되지 않는 자화자찬성 광고물에 불과하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적어도 체의 영웅담을 지나 지켜 내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체가 가장 사랑했던 것들. 남미와 남미의 사람들을 빗겨 가지 말자는 감독의 의도.

영화는 아르헨티나의 고향을 떠나 고대등같은 여자 친구의 집을 거쳐 광산으로 마추피추로 마침내 우루과이의 나병 환자촌에 다다르는 체 게바라의 고된 여정과 함께 한다. 어찌 보면 남미의 가장 가난한 심장지대를 관통하는 체의 발자국은 가난과 기아와 착취에 굶주린 남미 사람들의 삶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 땅을 바라보는 체의 소년같은 감격과 남미의 환부를 대하고도 치료할 수 없는 젊은 의학도 체의 한숨이 함께 하는 여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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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체 게바라도 처음부터 ‘체’는 아니다. 아무 고생 없이 자란 여자 친구는 체에게 자신의 곁에 머물것을 간청하고, 가는 곳마다 여자를 꼬시려 드는 친구는 체에게 툭하면 비상금을 쓰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청년은 타협하는 법이 없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늙은 교수가 자신의 책에 대한 비평을 해달라고 할 때도, 나병 환자를 만날 때는 장갑을 껴야 한다는 의료진의 묵계에도 그는 맨손으로 맨 마음의 진실로 사람들을 대한다. 진정으로 체가 싸웠던 것은 단지 자본주의나 계급 의식 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1950년대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났던 이 사나이를 우리와 묶어 주는 끈이 되는 이유이리라. <중앙역>으로 진한 휴머니즘을 피워낸 월터 살레스 감독은 다시 한번 서정적인 남미의 풍광속에 마음속의 진실을 찾아 꽂꽂이 자신을 지켜내는 한 청년의 순수함을 시적인 영화 언어로 스케치 해 나아간다.

어쩌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의 맥락에서 보자면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지나치게 감격적이고 순진한 평범한 영화일지 모른다. 이야기는 구비구비하고 결국에는 남미 사람들의 고된 손과 발은 살짝 피해나아가는 백인들의 영화 말이다.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는 새로운 남미 영화의 구원이 되기에는 헐리우드 식 이야기 구성과 매끄러운 화면과 거액의 예산과 스타 시스템등 모든 것이 반들반들 하다.

그렇다 해도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 어떤 매혹이 보는 이를 끈다는 면을 거부하기는 힘들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생일 날, 남미가 나누어 졌다는 것을 믿지 말라는 말과 함께 호수 북쪽에서 나병 환자들이 있는 남쪽으로 헤엄쳐 건너는 체를 화면으로나마 다시 영접하는 일은 말이다. 이는 장차 체가 할 일, 남미의 종속을 깨고 남미를 통합하는 그의 운명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평범한 열망을 꿈으로 행동으로 변모시키는 자의 용기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보고나면 천식을 앓는 체의 거친 호흡소리가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체는 아마도 매 순간 자신의 호흡과 싸워야 했으리라. 이 사나이가 그러했으니 당신도 세상과 싸울 힘을 잃지 말라고,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마지막 산소라도 구걸하는 듯 헐떡이는 체의 호흡 소리는 마음속 깊은 무언가를 함께 점화하고 있었다.

남는 것은 빛바랜 사진 속에 함께 하는 남미 사람들의 사진. 그리고 체 게바라의 흑백 사진. 그 사진을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를 싫어할 순 있어도, 이 사나이 ‘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맥스무비 / 깐느=영화평론가 심영섭 chinablue9@hanmail.net







문화관에서 하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았다. 그동안도 사실 대단한 흥행작들을 많이 해주었지만 그 전에 다 봤던 것들이라 굳이 가지 않았는데, 어제 문화관에 가보고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관에서 하는 영화를 보러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터사이클다이어리에 이정도 모이면, 러브 액츄얼리나 실미도 같은건 어마어마했겠는걸.

어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상징이자 우리에게 "가장 가슴 떨리는 혁명가"다. 한때 열풍이었던 체 게바라 평전의 초반에 나오는대로, 24살의 의대생인 에스네르토 게바라는 남아메리카 종단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체"가 그리하여 어떤 계기로 혁명 전선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삶에서 어떤 변혁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이 영화가 웅변하지는 않지만, 분명 한 인간의 삶에 큰 계기가 되어준 특별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대학생이었으니까 분명 별 부족함없이 자랐을 에르네스토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잉카로, 페루로의 긴 여행을 하면서 '아메리카가 하나'라는 이상은 환상에 불과하며 현실은 너무나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짓말은 할 줄 모르고, 자신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되는 푸세(에르네스토). 결국 고지식하고 정의감 충만한 인간은 사회운동가밖에는 할 게 없는가 하는 의문과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자신의 24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상빠블로의 나병 연구소에서 환자들과 함께 축하하고자 천식이라는 지병에도 불구하고 한밤에 깊은 강을 건너 나병 환자촌으로 건너가는 그는 분명 멋있었다. 현실의 불평등은 괴롭고, 거기 대응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약해보이지만, 그런 그의 이상은 분명히 힘이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거기서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생각났던 건 어쩔 수 없었다-_-;;;)

베네수엘라의 까라까스에 남는 친구(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헤어지는 푸세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그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는 뻔한 공식을 답습한다. 어쩔 수 없지, 모든 관객은 이 영화가 그저 '남미를 횡단한 두 청년의 여행기'가 아니라 '혁명가 체게바라의 젊은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또 기대하고 왔으니까. 그렇지만 어차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 뭔가 다른 방식으로 영화가 현실에 힘을 줄 수 없을까. 아예 허구성을 지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평범한 전기 영화인 <프리다>보다 낫고, <송환>을 보고서야 <선택>이 주는 이질감, 연출에서 비롯되는 가식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체의 여행이 마무리되고 크레딧이 뜨기 전에 관객에게 영화가 다루지 못한 체의 여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결국 이 연출된 여행일기가 지닌 허구성을 드러내주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모든 관객들이 떠드는 소리-평전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거나, 게바라 역의 배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잘생겼다든가-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면서도 어쩐지 싫게 느껴졌다. 내가 모터사이클다이어리를 보고 얻고자 했던 것과는 다르게,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고 싶다는 소감만을 남긴 다소 힘이 부족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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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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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원빈인 키무라 타쿠야와 마츠 다카코 주연의 멜로 드라마.

형수가 될 과거의 애인과 현재의 애인사이에서 방황하는 텟배와 리코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재미나 슬픔보다는 서로간의 심리전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너무 뭐라고 할까... 답답한 애정싸움과 설정이 짜증이 나기도...


키무라 타쿠야는 뷰티플라이프를 보고 멋진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면서 영화 러브레터도 다시 생각나게 되었고...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게 되었다...


바람과 정조사이...

잊지못하는 옛여자와 현재의 여자사이...

사람들의 평생의 고민거리가 아닐까 싶어...


주제가를 들으면서 좀 짜증난다 싶었고...

여주인공 리코를 보면서... 참 인물없구만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보면 볼수록 주제가와 리코에게 빠져들게 된다... 역시 여자는 애교가...



1997년 겨울 30 %이상의 시청률을 자랑한 최대의 화제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키무라 타쿠야의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게 해주었고 여 주인공이었던 마츠 다카코를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일본 트랜디 드라마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키무라 타쿠야의 대표작에 손꼽히는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높은 시청률과 잔잔한 사랑이야기가 시청자의 가슴을 파고든 드라마로 90년대를 대표하는 드라마 베스트 10에서 항상 상위에 랭크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랑에 아파하고 고민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그리는 내용은 모두 비슷할 지 모르지만 눈에 뜨이는 것은 여자 주인공의 성격과 일본의 평범한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순종적이고 얌전한 성격의 여자가 아니라 조금은 제멋대로이고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지만 사랑에 있어서 솔직한 모습과 너무나 순수하고 여성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과 함께 영업과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원이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도 묘사하고 있는데, 샐러리맨으로서의 애환과 사회 생활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공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이 작품을 위해 긴 머리의 키무라가 짧은 컷트가 되는 모습은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이 드라마 안에서 자주 비춰지는 크리스탈 사과는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의 증거인양 유행하기도 한 에피소드도 있다. 때로는 경쾌하기도, 때로는 애절하기도 한 배경 음악과 함께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사랑의 아픔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를 아기자기하게 엮어간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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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 if you d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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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콜릿 묻은 너의 입술 같은 영화
내기보다 짜릿한 그녀!!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

나는 줄리앙, 나도 8살! 우리 반 얼짱이며, 게임 짱이다. 공기놀이, 구슬치기, 사방치기가 시시해질 무렵, 소꿉친구 소피를 만났다. 결혼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단어 찾기 수업시간에 도발적인(?) 말들로 선생님을 화들짝 놀래키는 센스만점 소피는 ‘거친 내기의 세계’에 딱 들어맞는 내 친구이다!!

당당하던 소피였는데, 17살이 되면서 나한테 딴 맘이 있는 눈치다. 사실 나도 내기를 핑계로 그녀를 좋아해왔지만, 나의 결혼식 까지도 내기로 망친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다.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사랑게임이 다시 시작된다…

서로 절교를 선언한 지 10년… 도시 설계사가 된 나는 사랑스런 아내와 함께 ‘완벽한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공허함과 외로움은 뭐지?!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어린 시절 소피와 함께 가지고 놀던 사탕상자가 배달되었다. 아무래도 중단했던 소피와의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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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엉뚱하고, 멋진 사랑...

기다림... 인내... 질투... 분노... 이별...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럴수 있을까?

나도 사랑앞에서 저런 용기, 무모함, 열정을 가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도 저런 용기, 무모함, 열정을 갖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을까?

근데... 자신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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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존스, 스트록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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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존스, 스트록의 천재 (Bobby Jones, Stroke Of Genius, 2004)

1930년 - 브리티쉬 오픈 우승
US 오픈 우승
브리티쉬 아마츄어 우승
US 아마츄어 우승

4개 메이저 대회를 한해 동안 모두 우승하는 대기록을 달성한 장본인 이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바비 존스의 자전적 이야기다.
바비 존스는 어린 시절의 각종 질병을 극복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골프에 두각을 나타내며 아마츄어 골프 최고의 자리를 향해 나간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형편없는 매너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만이 최고가 될수있다는 이치를 깨달으며 아마츄어 골프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진정한 신사이자 품위있는 스포츠맨으로 기억되는 바비 존스의 삶을 보면서
그가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 된것은 그가 돈이나 명예 때문에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골프 자체를 사랑했고 즐겼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골프 역사에 수많은 업적과 공로가 있지만 바비 존스는 가족을 진정 사랑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정상에 섯을때 모든것을 포기하는 멋진 남자였다.
골프라는 스포츠를 좋아 한다면 두말할것도 없이 강추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전적인 영화라 경기보다는 바비존스의 내면적인 요소에 치중해 다소 지루함을
느낄수있는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영화류라는 생각으로 봤는데...
고난을 극복하거나, 어려운 상대를 이기고 정상에 오르기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정상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뷰티플마인드가 자꾸 떠오를 정도로 비슷한 영화이다...

뷰티블마인드처럼 전체적인 재미라기보다는 한 인물이 정상에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고뇌등을 그린 영화...
멋진 장면들 보다는 멋진 대사들이 자주 나온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최고가 될수없다.라는 대사와...

주인공의 공이 벙커에 빠져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계속해서 벙커의 벽에 걸려서 몇번이고 계속해서 실수를 하자.
캐디가 멋진말을 해준다...

자넨 지금 이성을 잃었어!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잖아!


이 대사를 듣고 한참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근데...

과연 그 꿈과 희망을 위해서 뭘하고 있을까...

지금과 다른 상황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변 여건이 변하든지...

내 생활이 변하든지...

내가 변하든지...

뭔가가 변해야 할것이다.


나도 꿈이라면 꿈이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과연 그 꿈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과 똑같이 살고, 생각하고, 놀고, 먹고, 마시면서...

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그건 헛된 꿈을꾸는 사람이 아니면, 미친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과 달라져야 한다는건 명확한데...

그럼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를...

그리고 Just DO IT!


꿈만 꾸면서... 매일 똑 같은 삶을 산다면... 평생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준 영화였다...



ps.
뷰티플마인드도 그렇고, 이영화도 그렇고 참 좋은 부인들이 나온다...
예전에 인옥이랑 뷰티플마인드를 보고 나오면서 저런 여자 좀 찾아서 소개시켜달라고 했던적이 있었는데...
좋은 여자는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드는것 같어...
근데... 좋은 여자라...
여주인공의 대사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우승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처럼...
믿고, 의지할수 있고, 힘들더라도 같이 걸어갈수 있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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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추억은 영원히 가슴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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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철수처럼 멋진 뻐꾸기로 같이 살꺼라고 말하겠지만...

현실은 현실... 내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해준다면...


뭐... 그다지 슬프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첫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도 생각나고...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과...

인간이라는것이 대단히 연약한 존재라는것...

추억이라는것이 단지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파일같은 것이구나...

지워지면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은 언제까지나...

영원하길...


 

노래를 링크하고 보니...

예전에 근명여상에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마지막 날에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불러주고 나왔던게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였고,

평생 잊지못할꺼라고 서로 이야기들 했지만...

지나고 나니...

내 머리속의 지우개처럼 되어가고 있는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은 언제까지나...

가슴속 깊이 남아있겠지?


갑자기 이 영화가 대단히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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