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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변화 경영, 희망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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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아는 사람이 나와서 반가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구본형씨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방송중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약간은 좀 두리뭉실하고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꿈과 비전 등을 중요시하시는 분입니다. 제 생각에는 잘못된 경우 안정된 길을 걷고있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에 혼란스러워서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본형씨가 변화나 자기경영등의 생각을 말 하지만 본인 자신의 경험담이라기 보다는 회사에서 격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온 내용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땀냄새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저는 좀 거리감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구본형씨의 책은 두권정도 읽었던것 같은데 읽을때는 그래 변해야되, 나 스스로 경영을 하면서 사는거야라고 다짐을 하게 되지만, 저의 부덕이겠지만 저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와도 같았습니다.
근데 이번 방송을 들으면서 내가 너무 어느 한쪽면만 보았거나, 안좋게 생각을 하면서 그쪽으로만 생각을 좁혀간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좋았다는 이야기지요...^^;;
북한산 탕춘대매표소 아래의 부촌에 살고 계신것 같던데, 가장 부러운 것은 구본형씨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암튼 이 방송을 듣고 연휴동안에 구본형씨의 익숙한것과의 결별을 읽기로 했습니다.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 씨가 제시하는‘사장님’되는 원칙 7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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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샐러리맨에게 평생 직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고와 퇴출의 위험에 무겁게 눌려 있다. 직장을 나와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는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일곱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첫째,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떠남은 가혹한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기 전에 꼼꼼하게 준비한 사람들에겐 떠남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떠나라'는 말을 듣기 전에 떠나라. 그러나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회사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즉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회사를 버려라. 무기력과 무능함이 회사 전체를 감싸고 있을 때, 주위에 온통 유능한 상사와 동료들이 가득하여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을 때, 부패가 만연되어 관행이 되고 더러운 관계에 연루된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기업문화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때 적극적인 버림이 중요하다.


둘째, 어리석은 일관성을 버려라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갈 곳을 정해야 한다. 보통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난관에 봉착한다. 교사가 퇴직하고 다른 일을 해보려 할 때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경력사항이 모두 교육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 앞에 주저앉게 된다. 20년간 은행원이었던 사람은 은행을 나오면 그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일관성에 갇혀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관성에서 탈피할 때 우리 앞에는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간 길에는 내 길이 없다

창업을 결심한 사람들의 첫 번째 질문은 거의 예외가 없다. '뭐 좋은 것 없을까?'. 그래서 모든 창업 가이드는 유망 직종을 다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맞는 유망 직종은 없다. 단지 유행 직종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에게 맞는 유망 직종은 무엇인가?”라고.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나만의 방식이 없으면 돈과 재물도 없다. 모방과 추종은 유행의 치명적 약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가장 나다운 것만이 안정적인 나의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고 기존의 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가장 까다로운 고객, 아내를 동지로 삼아라

비즈니스의 첫 번째 고객은 자기 자신이다. 두 번째 고객은 아내다. 아내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다.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고객들을 설득하기는 오히려 쉽다. 남편의 퇴직과 해고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내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아내의 지원을 얻는다면 사업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낙관해도 좋다. 더 나아가 아내와의 동업도 좋다. '남편은 바깥일을 하고 아내는 안살림을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라. 아내가 사교적이고 대인관계가 좋다면 영업을 하고 남편이 꼼꼼하면 안에서 기획, 관리 등의 지원 역할을 맡아도 좋다. 아내의 재능이 눈에 띄면 아내를 아낌없이 지원하라. 이것이 가족기업의 시작이다.


다섯째, 현장 확인을 통해 철저하게 준비하라

준비는 아무리 꼼꼼해도 지나치지 않다. 철저히 준비해도 현업에 뛰어들면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은 법이다. 준비는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다. 시작할 때 이미 성공과 실패가 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초보 창업자는 우선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이때 신문, 잡지, 방송에 나오는 기사나 광고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시장 변화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주요 핵심 정보는 현장에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정보의 원천이 신뢰성 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물리가 트이게 마련이다. 본인에게 맞는 유망 직종이 정해지고 나면 기본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한 후에 다른 사람이 경영하는 현장이나 유사 현장에 가서 일일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보완하라.


여섯째, 비즈니스는 고객이다

비즈니스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고객이다. 고객 없는 비즈니스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이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비즈니스는 한 번의 거래가 아니다. 비즈니스는 고객과의 지속적인 관계다. 가격, 제품, 서비스, 접근성 그리고 체험은 기업이 일반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고객의 요구사항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다섯 가지 특성 요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제이다. 이 다섯 가지 분야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분야에서 허용수준을 지키되 한 분야에서 최고수준(100점 만점)인 지배수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성공적인 기업들은 한 분야에서는 지배수준을, 다른 한 분야에서는 차별수준(100점 만점에 80점 정도), 그리고 나머지 세 분야에서는 허용수준(100점 만점에 60점 정도)을 추구해왔다. 두 가지 이상에서 지배수준을 확보하려는 것은 비용의 낭비임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사업을 구상하던 간에 제품, 가격, 서비스, 접근성, 체험의 다섯 가지 요소 중에서 무엇을 지배수준으로 만들지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일곱째, 나만의 비즈니스 룰을 확립하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면 인생은 재미없다. 자신만의 비즈니스 룰이 지배하는 작은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우선 불법과 부정, 부패를 성공으로부터 확실하게 격리시켜라. 더 나아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법과 도덕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삶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학습이나 체험을 통해 체득한 비즈니스 룰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원칙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는 기둥과 등불이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 원칙을 전복시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당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원칙이 없다면 대세와 주류에 편승하게 되고 이것은 자신을 창조적으로 차별화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창업할 때 가장 먼저 손질하고 보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획력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지해야 하는 자신만의 비즈니스 룰이 소중한 것이다.


정리 신경원 참조 내가 직업이다(북스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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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칠, 토종 등산화에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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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만나본 무대포 정신의 사장님...^^;;
도 아니면 모 정신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잘되신것 같습니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주위에서 인정을 받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주위의 도움으로 창업을 해서 여러 어려움을 격었지만 개발에 개발을 거듭하는 도전끝에 현재의 트랙스타라는 메이커로 국내시장점유율 50%에 이제는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들은 이정도면 됬지.. 이제 이걸로 먹고사는거야라고 할때... 다시 시작하는 모습에 혀를 네둘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권동칠사장의 사회초년기 모습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싹수를 보면 그 끝이 보이는듯 합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것은 아니겠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력하고 열심히하는 사람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성공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방향없는 노력은 소용없다는것... 확고한 신념... 핏빛처럼 뚜렸한 목표...

한가지 덧붙이자면... 사양산업이란 없다는것... 언제나 최고의 자리는 없다는것... 그래서 희망이 있다는것.... 잊지 말자...


[중소기업 성공학] (주) 성호실업 권동칠 사장

형형색색 '맞춤신발'로 이끈 신발혁명

대표적인 사양업종인 신발산업에 겁없이 뛰어든 중소기업인이 있다. 은행빚 한푼 얻지 않고 공장을 돌려 1억4000만달러어치의 신발을 수출한다. '신발의 힘'은 창의력에서 나온다.

곽희자 자유기고가


    80 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한국 신발산업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부산에서는 500여개에 달하는 신발공장이 엄청난 수출물량을 소화해 내느라 밤새 불야성을 이뤘고, 각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이들 업체는 해마다 40억달러어치가 넘는 신발을 해외로 수출, 세계 신발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인건비가 급상승하자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에만 의존해왔던 많은 신발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어렵게 살아남은 기업들도 인건비가 싼 대만이나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갔다. 그 결과 현재 부산에 남은 신발업체는 80여개. 총수출액은 8억달러, 세계 신발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 가운데 대부분을 대만이 생산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신발산업의 사양화가 극명해진 지금,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 바닥에 뛰어든 작은 거인이 있다. (주)성호실업의 권동칠(權東七·44) 사장이다. 권사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일 수 없다. 신발 수출국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겠다”며 ‘21세기 신발혁명’을 야무지게 다짐한다.


부채비율 0%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388-2번지 1000여평 부지에 자리한 성호실업 마당 앞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수입해온 원단을 하역하거나, 각국으로 실려나갈 수출용 신발을 싣는 컨테이너 차량들로 붐볐다. 사무실이 있는 4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의 2층과 4층에선 중국 공장에서 재단해 온 신발 밑창들이 윗부분과 부착돼 완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등산화만도 하루에 2000켤레. 같은 크기의 컨테이너에 컬러 TV를 가득 실은 쪽보다 신발을 실은 쪽의 수출가격이 더 높다고 한다. 신발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성호실업은 88년 창업 이래 신발 외길을 걸었지만 지금껏 실패를 맛보지 않고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한 푼의 부채도 없이 출발, 설립 첫해에 500만달러 수출탑을 안았고, 이듬해엔 100% 성장해 1000만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00%를 넘는 성장세를 과시한 성호실업은 누구랄 것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간 ‘IMF 시절’에도 전과 다름없이 신입사원을 뽑았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겨 적극적인 공격경영을 펼친 것.

성호실업의 지난해 수출액은 1억4000만달러. 회사규모는 커졌지만 아직도 은행 부채비율은 0%다. 설립 10년 만에 한국 신발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선두기업으로 부상했다.

권동칠 사장은 55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2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줄줄이 다섯이고, 그는 여섯 번째다.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 당시 이들 열 식구의 ‘밥줄’은 논 여섯 마지기가 전부였다.

“하루 세 끼를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10시 반쯤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지요. 밥도 고구마나 감자가 주였고, 사이사이에 보리나 쌀이 몇 톨씩 섞인 정도였어요.”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기는 다반사였고,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가난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장남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보냈다. 대신 딸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걸핏하면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이 집 저 집을 돌며 돈 빌리기에 바빴다.

“수업료를 빌리러 스물여덟 집을 돌아다닌 날도 있어요. 이미 돈을 빌린 적이 있는 집은 아직 갚지 못해 염치가 없어 못 가고, 안 빌린 집만 골라 다녔죠.”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권씨는 그렇듯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밖에 몰랐던 20대

수업에 자주 빠진 데다 집에서도 차분하게 공부할 여건이 못 된 탓에 기초가 부족했던 그는 삼수 끝에야 어렵사리 동아대 경제학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이번엔 학비가 문제였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는데, 밤에 공부할 시간을 내려면 공무원만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산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부산시 서구청 수도과. 여기서 몇 달 일하다 동사무소로 옮겨 2년간 근무했다. 그때 봉급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댄 것은 물론, 대학입시에 떨어진 동생을 데려다 재수를 시키기도 했다. 형의 뒷받침 덕분에 동생은 경북대에 진학했다.

그는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면서 사표를 내고 공무원직을 그만뒀다. 말단 공무원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데다,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공무원 노릇이 자신의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 후 남은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중견 신발업체인 (주)세원에 해외영업 공채 1기생으로 취업을 했다. 신발과는 이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말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5분 대기조 돌격대원 같았죠. 자고 나면 총알같이 튀어나와 7시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근무 시작 전에 외국어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면서 스스로를 계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무가 끝난 후에는 거의 매일 바이어를 접대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 후 6년 반 동안 그는 일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바깥에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구내 식당에서 눈이 맞은 영양사와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끌려 결혼을 마음먹었다는 아내 성정임씨(42)는,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둔 후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남편이 ‘하숙생’이 돼버리자 말을 잃어 버릴까 봐 혼자서 책을 소리 내어 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아 선택한 남편에게 일 좀 그만하라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권씨는 철저한 영업맨이었다.

“업무에 관한 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다그쳐대니까 나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그만둔 직원도 많았어요.”

5%를 더 받아내려고 바이어들과 몇 시간씩 붙어 싸웠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매사에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장은 권씨의 능력을 인정, 그가 소신을 펼 수 있도록 누구에게보다도 많은 배려를 해줬다. (주)세원은 그가 입사할 당시 직원 1000명에 수출액이 1000만달러 정도였지만, 그가 회사를 나올 무렵엔 직원이 4000명, 수출액이 1억2000만달러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외국 업체들, 잇따라 사업 제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한 그에게 어느 날 거래처였던 영국 등산화 업체 하이텍사(社)가 함께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해 왔다.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한창 회사도 커나가고 영업책임자로서 일에 재미를 느끼던 때라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그때 거래하던 바이어 중에 하이텍은 그다지 비중 있는 회사도 아니어서 마음을 두지 않았죠.”

그러나 하이텍의 권유는 끈질겼다. 한국 업체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제대로 신발을 만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신발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가진 권씨를 붙드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하이텍은 30만 달러를 회사 설립자금으로 무상 지원하겠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거의 떠밀리다시피 독립해 나오게 됐다.

“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세원에서 뒷조사를 시켰나봐요. 그때만 해도 영업하던 사람이 공장을 차려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사정이 있나 싶었던 거죠. 뒤에 내가 정말로 회사를 차린다는 걸 알고 나서는 ‘빨리 망하고 돌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때껏 모아둔 전재산 3000만원을 공장 전세금으로 걸었다. 하이텍이 준 자금이 그때 우리 돈으로 2억 5000만원쯤 됐는데, 이런저런 생산설비를 구입하는 데 1억7000만원을 쓰고, 8000만원은 은행에 예치했다. 88년 사무직 6명, 생산직 60명의 직원들과 공장문을 열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처음부터 부채 없이 사업을 시작한 덕분에 물건을 만들어 납품한 만큼 이익금은 그대로 은행계좌에 입금됐다. 회사는 이후 5년간 해마다 100%씩 성장했는데, 그 사이에 공장에 세 차례나 불이 났다. 92년의 첫 화재 때는 창고가 불타 2억원의 피해를 보았고, 그 이듬해엔 쓰레기장에 불이 나면서 건물 일부를 태웠다. 그 몇 달 후에 다시 큰 불이 났는데, 이때 하역을 기다리고 있던 신발들을 고스란히 태워 5억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권사장이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공항에 내려서 회사에 별일 없느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불이 났다고 해요. 헐레벌떡 뛰어와 보니 공장 2, 3층이 모두 탔는데, 납품할 흰 운동화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 재로 변해 있더군요.”

출장길에 동행했던 아내는 타버린 공장이 눈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둥둥 걷고 잿더미가 된 신발들을 치우고 있더란다.

“이미 ‘상황 끝’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빨리 수습하고 새 출발하는 방법밖엔 없어요.”

권사장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이를 뛰어넘을 길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다.

매사를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헤쳐가는 사람에겐 하늘도 길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그 해 5월 스키 전문업체인 미국의 K2사 바이어가 찾아와 자신들이 개발중인 인라인 스케이트(일자형 롤러스케이트)를 성호실업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제의했다. K2사가 유수의 신발업체를 제쳐놓고 성호실업을 택한 것은 일찍부터 성호의 등산화 제조기술을 눈여겨봤기 때문.

권사장은 그 무렵 시판되던 일자형 롤러스케이트들이 모두 스키 부츠처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딱딱하고 무거운데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발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성호가 만들던 경등산화 재질을 이에 접목시키자고 제안했다. 시험 삼아 플라스틱을 경등산화 재질로 바꾸고 내피를 없애니 신발이 훨씬 가벼워진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고 발이 편했다. 결과에 흡족한 K2는 즉각 권사장과 계약을 체결했다. 제품은 성호가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권사장은 이 기술로 국제특허를 냈고, 그때껏 꾸준히 성장해온 성호실업은 K2에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를 독점공급하면서 ‘수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독자 브랜드 ‘트렉스타’ 개발

성호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라인 스케이트는 생산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국내 공장만으로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제때 대기 어려워지자 95년 중국 톈진(天津)에 대지 8000평, 종업원 25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현재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는 세계 롤러스케이트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장 곳곳을 구석구석 보여주던 성호실업의 홍보담당자는 단 한 곳만은 외부인 접근금지 구역이라며 출입을 막았다. 개발실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을 개발, 관리하는 방이라고 했다. 미국의 K2 본사 직원들이 제품의 기술 보안을 위해 그 방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성호실업은 매출의 80%를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로 올리고 있다.

창업 계기가 된 하이텍 제품 생산은 5년 만인 93년에 그만뒀다.

“노사분규가 심화되면서 인건비가 해마다 가파르게 올라갔죠. 우리 회사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이텍 제품은 중급이었는데, 임금이 계속 높아지다 보니 우리도 하이텍도 모두 타산이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옮겨가게 하고, 우리가 지원받았던 장비와 기술도 모두 이전해줬습니다.”

하이텍이 철수한 후 성호실업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자체 브랜드 개발이었다. 94년 권사장은 자체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OEM에만 의존해왔던 회사 경영형태를 새로운 생산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브랜드가 바로 ‘트렉스타(TREKSTA)’. 트렉스타는 ‘TREK(여행)’과 ‘STAR (별)’의 합성어로, ‘험난한 산행을 할 때나 눈 위를 달릴 때 길을 밝혀주는 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인건비 상승으로 외국 기업들이 임금이 싼 대만이나 동남아 국가로 하청생산 공장을 옮기자 신발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사라져갔다. 이처럼 신발산업은 이제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모두들 물러날 때, 권동칠 사장은 오히려 더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되 특수화 분야를 집중 공략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고 연구인력을 집중 투입, 질 좋은 등산화와 스노보드화를 만들어냈다.

스노보드화의 경우 그 전까지는 안쪽과 바깥쪽이 분리된 투 피스 구조로 되어 있어 신고 벗기가 불편하고 손질과 보관 또한 어려웠다.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보완, 원 피스 형태의 스노보드화를 만들었다. 투 피스 형태를 불문율처럼 고수하던 당시 스노보드화업계에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전세계 시장의 60%가 원 피스 형태로 바뀌었다. 성호의 스노보드화는 일본의 스키용품 전문업체인 나라스포츠가 판매를 대행하고 있는데, 일본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제품 개발을 선도해온 권사장은 완전 방수가 되는 등산화인 고어텍스도 국내 업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고어텍스 개발은 중(重)등산화를 경(輕)등산화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 등산화 생산업체는 10여개사. 그 중 트렉스타의 등산화 점유율은 50% 정도다. 다른 등산화에 비해 값이 비싸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있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다시 찾는다고 한다.


꿈에도 신발만 생각한다

성호에서 생산하고 있는 등산화는 모두 50여종. 그중 30여종이 국내에서 시판된다. 트렉스타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은 등산화, 스노보드화, 스케이트화, 샌들 등인데, 수출이 30%, 내수가 70%를 차지한다. 수출국은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등 10여개국. 앞으로 30여개국으로 늘려 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 성호실업은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의 이름을 딴 등산화 ‘비로봉’을 내놓았다. 가격을 기존 제품들보다 저렴한 6만원대로 낮추고, 금강산 관광객 중에 고령자가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신발 무게도 켤레당 640g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금강산 관광객의 20%가 이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권사장은 트렉스타가 고가여서 중급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97년에는 ‘레저타임’이라는 중저가 상품을 개발했다.

권사장이 여느 중소기업인과 달리 실패를 모르고 성장을 거듭해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해수욕장에 피서 가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 발만 살펴보다 오지요. 달리는 기차 바퀴를 보면 저 모양을 어떻게 신발로 옮겨 볼까, 절에 가면 탱화의 색채와 문양을 어떻게 신발에 담아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신발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신발만 잔뜩 나오는 꿈까지 꿔요.”

권사장은 “신발사업의 관건은 창의력인데, 이 창의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아이디어를 낚아챌 준비가 돼 있을 때 살이 붙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날 세 살짜리 조카의 발이 자라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신발도 발에 따라 커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게 됐다. 신발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신발은 연구단계에 있는데, 내년 봄쯤이면 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개발중인 제품은 왼쪽과 오른쪽 모양이 다른 신발이다. 따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짝 같지만 함께 놓으면 잘 어울리는 한 켤레의 신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옷은 좌·우가 달라도 전체적으로는 잘 어울려 보이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권사장은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이 뒤따르지 않으면 가뜩이나 여건이 좋지 않은 신발산업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호실업은 매년 매출액의 5∼10%를 연구개발비로 지출한다. 98년 정식 연구소 등록을 마친 성호실업 연구소에서는 40명의 연구원들이 매년 두 종류 안팎의 새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연구중인 가장 큰 프로젝트는 ‘맞춤신발’.


맞춤신발의 대중화

“4000만 국민의 발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칼처럼 길쭉한 발이 있는가 하면, 마당쇠 발처럼 넓적하고 뭉툭한 발이 있고, 발바닥이 편평한 발이 있는가 하면 오목한 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팔리는 신발들은 발 모양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사이즈만 달리한 것이에요. 그러니 발이 편할 리 없죠. 이제는 각자 특유의 발 모양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주자는 겁니다.”

맞춤신발이란, 매장에 온 소비자들의 발 모양을 컴퓨터로 스캐닝해서 공장으로 전송하면 24시간 안에 제품을 만들어 48시간 안에 소비자들이 신발을 받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캐주얼화를 만드는 영국의 클라크사나 골프화를 만드는 풋조이사가 이런 맞춤신발을 생산하고 있지만, 가격이 켤레당 1000달러 정도로 매우 비싼데다, 제작과 배달에 소요되는 기간도 2주일이나 돼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없애 값은 100달러 미만으로 하되 이틀 안에 소비자에게 택배가 가능한 맞춤신발을 대중화시킬 생각이다.

성호의 현재 기술력으로는 정상적인 발 모양을 가진 사람을 위한 맞춤신발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사고를 당했거나 날 때부터 기형적인 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직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권사장은 이에 대한 연구가 끝나는 내년 상반기에는 소비자들이 자기 발에 맞는 맞춤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품은 등산화에서 평상화까지 어떤 신발이든 다 가능하다는 것.

그는 “맞춤신발의 대중화는 신발산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성호실업에는 맞춤 신발 기술과 관련한 계약을 맺으려는 외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사장은 맞춤신발 시대가 열리는 21세기에는 1조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대비해 중국 톈진에 대지 1만5000평, 직원 2500명 규모의 제2공장을 건립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권사장은 언제나 자신이 진두에 나서 회사를 이끌었다. 직원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큰 방향만 제시하고 직원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회사를 꾸려가게 유도한다. 그랬더니 혼자 해왔던 과거 10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힘이 느껴진다고 한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권사장. 회사가 성장해도 신발산업 바깥으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그는 두 개의 꿈을 갖고 있다. 자식과도 같은 트렉스타를 국제적인 명성의 브랜드로 키워내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 최대 신발 수출국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하면 문이 열리고 길이 보인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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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처녀 장정윤, 스물 일곱살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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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의 나이로 닭꼬치장사로 나름대로 성공한 젊은 처자의 이야기...
인터뷰를 듣다가 보면 엄청난 자신감을 가진 또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배울점도 엄청많은것 같습니다. 특히 Just Do It! 이라고 할까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바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에서도 혀를 두르게 만듭니다.
총각네 야체가게의 이영석씨와 아주 비슷한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저도 이만 분발해 보도록 해야 겠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주)COF 장정윤 대표


노점상에서 닭꼬치를 한 달에 3천만원씩 팔아치우고 20대에 40여 개의 가맹점을 낸 ‘꼬지필’의 장정윤 사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성공신화를 이뤄가고 있다. 그의 경쟁 상대는 ‘맥도날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맥도날드를 넘어설 것이라 자신한다. 당찬 부산 아가씨의 자신만만 창업 성공기.

“맞아요?” “오 마이 갓” “당근이죠!” 하이톤의 낭랑한 목소리로 표준어에 아직 남아 있는 부산 사투리, 영어까지 섞어가며 얘기하는 장정윤 대표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구관조 같았다. 조금은 정신이 없고 말이 많은 것도 솔직하게 인정한 그는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게 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사업가보다는 영락없는 20대 젊은 여성이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자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될성부른 떡잎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자신의 첫 사업으로 우유배달을 시작했던 꼬지필의 장정윤(28) 사장은 그야말로 ‘될성부른 떡잎’이다. 우유를 받는 집 앞 대문마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우유를 꼭 먹어야 하는 호소문을 적은 메모를 붙이는 등 자신만의 마케팅을 그 때부터 펼쳤기 때문이다. 그 작은 메모 한 장은 신통하게도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유업계의 비수기에도 그의 고객은 한 명도 우유를 끊지 않았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 학비와 어학 연수비를 위해 우유배달에서 닭꼬치 판매로 사업을 전환했다. 그의 첫 번째 사업장은 다름 아닌 그의 모교 앞.
“저도 물론 부끄러웠죠. 지나가다 알아보는 선생님들이 뭐하냐고 물으시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인근에 대학도 있어 젊은 세대들의 유동이 많은 곳이라 욕심이 났어요.”
수레 110만원에 오븐 등 장비 50만원으로 시작. 장사를 위해서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뼈 없는 닭꼬치를 개발했고 고기 사이에 떡을 넣은 ‘쫀득꼬지’,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화끈꼬지’, 갈비양념을 맵게 만들어 바른 ‘맵싹꼬지’ 등 다양한 맛의 꼬치들을 개발했다. 모두 손님들이 일러준 양념 비법을 귀담아 들어 개발한 것들이다. 여성들도 예쁘게 먹을 수 있도록 꼬치용 막대기를 빼 은박지에 싸주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천원짜리 닭꼬치가 하루 7백개에서 천개까지 팔렸다. 한 달 매출이 3천만, 순수익은 1천만원에 이르렀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였다.
혼자 하기 벅차 친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써가며 새벽 2시까지 팔았다. 하지만 노점상의 천적은 단속반. 단속반을 피해 점심장사를 과감히 접고 오후 5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면 닭꼬치를 먹던 손님들까지도 같이 수레를 끌어 골목으로 도망도 다녔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의 밑거름이고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렇게 6개월간 힘들게 번 돈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동안은 장사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맡겼다. 하지만 4개월 후 귀국했을 때는 이미 가게는 망한 상태. 복학 후 다시 장대표가 리어커를 잡았다.

노점상이 프랜차이즈를?
“한창 장사 잘되고 있는 데 맞은편에 30평짜리 치킨집이 생긴 거예요. 도저히 경쟁이 안 되겠더라고요. 자극이 됐는지 좀 무리를 해서 저도 어엿한 가게를 마련했죠.”
겁도 없이 사채까지 빌려 노점상에서 4평짜리 가게로 발전한 것도 역시 그답다. 콜라 서비스는 물론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번데기까지 제공했다. 물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때부터 장사에 대해 물어오고 가맹점을 내 달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자를 하겠다며 프랜차이즈를 동업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무리한 투자에 빨리 승부를 내려는 욕심 때문에 결국 수억원의 손실을 보고 동업은 1년 만에 깨졌다.
남은 빚 정리도 모두 장대표의 몫이었다. 힘들게 빚을 정리하고 또 다시 3억원을 대출 받아 또 다른 도전으로 서울행을 결심, 그대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국에서 전국적 브랜드로 성장하고 나아가 해외 진출의 목표를 위해 서울 진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해 부산에 물류 공장도 세웠다. 전국 모든 매장에서 같은 크기, 같은 맛의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맥도날드가 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회사가 됐는지 아세요? 바로 어디를 가나 똑같을 수 있도록 완전한 가공·물류 시스템과 매뉴얼을 갖췄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공장에서 한 번 튀겨낸 닭꼬치를 냉동 상태로 공급하는 체제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부산·경남에서만 32개 가맹점을 내고 서울에 입성, 대학로점을 필두로 목동점, 일산점 등 3곳을 오픈 했을 때 마침 조류독감이 터졌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짐을 싸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자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직원의 나이 평균은 스물넷. 대부분 부산에서 함께 고생한 초기 멤버 그대로다. 모두 그를 믿고 서울까지 올라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어 서울에 집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본격적인 가맹사업을 펼치기 위해 하루하루 바쁘기 때문에 지금은 안타깝게도 남자 직원은 고시원행, 장대표를 포함한 여직원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상황. 젊어서일까, 직원 모두 지금의 이 힘든 상황을 재미있게 즐기며 일한다고 한다.

“성공? 제겐 아직 먼 얘기에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20대에 전국 40여 개의 가맹점을 가졌음에도 그는 아직 성공은 먼 얘기라고 말한다.
올해 4월 안에는 미국 보스턴 캠브리지 대학 앞에 꼬치빌 해외 1호점이 연다. 다음은 중국과 일본.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것은 없다는 장정윤 대표. 무엇이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를 믿기 때문에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첫 번째 꿈은 어학연수였다. 물론 닭꼬치 노점상으로 그 꿈은 이뤘다. 두 번째 꿈은 맥도날드를 넘어설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이 또한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이냐고 묻자 정대표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제 인생의 마지막 꿈은 장애우, 노인 할 것 없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그런 사업적 공단을 만드는 것과 동물보호재단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우리 사람이 쓰는 모든 바디 제품에는 동물들의 비명 소리가 담겨 있거든요. 동물 임상실험을 하지 않은 바디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동물 애호가가 많아서 아마 대박 나겠죠?”

月刊<창업&프랜차이즈> www.biz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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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전쟁사 2차 세계대전-승리의 조건 & 승리의 대가, 전쟁을 통해 배우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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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받아 놓은 KTV의 전쟁사중에 2차 세계대전사중에서 승리의 조건과 승리의 대가를 보았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2차대전 시작부분, 승리의 대가는 2차대전 막판과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전쟁다큐나 동물의 왕국같은것을 보다보면 전쟁이나 사는거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른이나 애나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격과 규모만 다를 뿐...

시작하자 마자 아주 멋진 말이 나오더군요...

전쟁이 끝나면
승자는 자신들이 이긴 방식을 다음던에도 사용하면 다음 전쟁에서도 이기게 될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패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린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예전의 낡은 방식은 거부한다.

이런한 공식에 의해서 1차대전의 승자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기존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차대전의 패자였던 독일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후에 2차대전이 개전되자 마자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도 엄청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격은것 만큼은 안되지만 프랑스도 독일에 5년동안 점령당하면서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대가는 책으로 봤던 "삶의 의미를 찾아서"와 TV시리즈인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영향으로 상당히 이해가 잘 가더군요...

암튼 앞으로는 전쟁다큐도 자주 찾아서 보게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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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 이충섭의 묵사발인생 역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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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시작한 사업에서 큰 실패를 보고 집도 날리고, 13년전에 빛만 1억 5천만원...-_-;;
갈곳이 없어 재개발동네에 숨어 살다가, 죽으려고 친구가 준 돈으로 소주에 수돗물을 안주삼아 먹다가 죽으려던 주인공...
빚이 많아서 어쩔수 없다는 하소연을 하지만, "그럼 평생 그렇게 살꺼냐"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전한다.
처음에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장사를 하는것을 보고 시작한 묵장사...
첫날부터 남들은 베터랑도 하루에 5상자를 파는것을 순식간에 팔아치우고, 보통 하루에 50상자를 팔아서
2년만에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_-;;;

그리고 점차 성장해서 판매상을 거쳐, 제조까지 시작해서 이제는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고, 장인정신을 가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어려움은 화가 될수도 있고 복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이충섭씨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왔고, 남들을 따라하기 보다는 남들과 다르게 하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보란듯이 깨고 일어난것이 정말 감동적이였습니다...


"묵사발 인생 묵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묵사발 된 인생을 묵으로 보란듯이 일으킨 사람이 있다. 국내 1위의 묵 전문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이충섭(41) 사장. 그는 유복한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볼트 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은 서울 장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막내인 이씨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 아무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런 이씨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다닐 무렵이다. 평소 놀기 좋아하는 둘째형에게 부모님은이 사업을 맡긴 것이다. 돈은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둘째형이 사업을 하면서 어느새 그 많던 재산도 다 날리고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게 됐다.

충격을 받은 이씨의 부친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사업 실패로 13평 작은 집에서 열명 남짓한 가족들이 모여 살았죠. 등록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이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완구회사 경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7개월 가량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틀에 박힌 생활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죠.”요정에서 웨이터 생활도 하고 구두닦이, 때밀이 등 먹고살기 위해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군대 제대 후 이씨는 건강보조 식품회사에 영업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지금의 부인 강민정(36) 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장님 딸이라 부담은 있었지만….”

친구와 동업한 무역업 부도로 자살기도

안정된 직장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만다. 친구와 무역업을 동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친구가 해외 영업을 담당하고 저는 국내 영업을 담당하기로 하고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사업자금이 필요했던 이씨는 집문서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사귀고 있던 강씨에게 경리 일을 맡기는 등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지만 1년 만에 부도가 났다. “사업이란 것이 열정만 가지고는 안되더군요”부도가 나자 사채업자들은 이씨의 집에 찾아가 갖은 협박을 하게 되고 급기야 뇌경색을 앓고 있던 부친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자살을 결심하고 보름동안 술만 먹었습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더니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여기저기 방황하던 그는 아내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강씨가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결혼하자고 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처지였는데….”

처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나온 부인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입은 옷 그대로 숟가락 하나만 갖고 여관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이씨 부부는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시장에서 묵을 파는 부부를 봤다. “몇 시간 동안 지켜봤더니 장사가 꽤 잘 되더군요. ‘바로 이거다’생각하고 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양복을 입고 머리에는 무스를 바른 채 묵 장사에 나섰다. 마케팅 전략으로 묵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 팔았다. 하루 50만원씩 벌어들이면서 1년 반만에 5,000만원의 빚을 다 갚고 본격적으로 묵 사업에 뛰어들었다. “허리를 다쳐 트럭 노점상을 그만두게 됐죠. 할 수 없이 노점상에게 묵을 대주는 중간 유통상을 시작했습니다.”결혼 3년 만에 이씨는 처갓집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양복입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묵 팔아

중간 유통상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 왔다. 유통업이 잘 되자 묵을 대주던 제조업자가 본인이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이다. 이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든다. 직접 묵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씨는 전국의 묵집이란 묵집은 다 돌아다니며 비교 검토해 강원도 화천에 묵 공장을 세웠다. 직접 여러 가지 묵을 개발한 이씨는 새로운 판매처도 개척한다.“거래처를 개발하려 백화점에 갔는데 처음엔 쳐다 보지도 않더군요. 1년 가까이 끈질기게 따라 다닌 후 입점할 수 있었습니다.”이씨의‘묵’은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기존의 유명 메이커 제품이 하루 10만원 가량의 매상을 기록하는 데 비해 이씨의 제품은 하루 100만원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이씨는 다른 유명 백화점에도 납품을 할 수 있었고 모정식품은‘묵’판매 1위를 기록하게 됐다.

이씨는 지금 3개의 공장을 거느리면서 4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명실상부한 사장이 됐다. 열정을 중시하는 그는 록 그룹 출신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기업문화도 독특하게 가꾸어 나가고 있다. 회사 한쪽에 록 그룹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 정도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씨는 조암면 시우리에 대지 1,200평, 건평 200평 규모의 묵 요리 전문음식점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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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원으로 승부하라! - MP3 플레이어의 명품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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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를 처음접한것은 1996년도... 정말 신기하면서 좋다는 생각을 했었고... 처음으로 mp3플레이어를 가진것은 2000년에 사람들 50명을 가입시켜서 경품으로 받은 거원 esound 32메가 짜리... 그 다음에 잡지사 다니는 후배의 조작으로 경품으로 받은 mpeye의 256메가 짜리... 지금은 그냥 mp3폰으로 대체...
왜 이런 구차한 이야기를 나열하냐 하면.. 나는 그동안 와~ 좋다.. 더 좋은 기계없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업그레이드를 해왔다...
근데... 코원의 사람들은 좋다라는 생각뿐이 아니라... 그 좋은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된 사람들이다...
그것도 최고의 기능, 성능을 가진 기계를...

이 방송을 듣기전에는 아이리버가 정말 명품이고 제일 좋은줄로만 알았는데, 코원이라는 회사가 어찌보면 후발주자이기는 하지만 정말 명품에 정말 필요한 All-in-one 제품을 만들고 있는것 같다...
처음에는 제트오디오를 만들어서 기술력으로 인정을 받은후에 그 기술로 mp3p를 만들어서 세계를 재패해가며 매년 100%의 성장을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기 그지 없다...
그리고 항상 정도를 걷기위해서 노력하면서도 시장의 상황이나 미래를 잘 파악해서 발전해 나가는 모습도 정말 배울만 하다...
근데.. 그런 우려도 있다.. 코원처럼 잘되서 성공을 해야 미래를 잘 본다고 하는것이지.. 실패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많은 mp3p제조업체를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암튼 여기에서 성공한것은 이유가 없을수도 있지만, 실패한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라는 말을 가슴에 세기고 나나 내 주위에서 실패할만한 이유를 찾아서 없애도록 노력해야 겠다.. 성공할때까지...



[제91편]

                          올인원으로 승부하라!

           - MP3 플레이어의 명품 프로젝트


  방송일시 : 2005년 9월  30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PD: 손원수  작가: 조선미


 휴대용 오디오 시장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일본. 그 일본의 아성에 도전해 당당히 1위로 인정받은 한국의 벤처 기업 코원시스템. 코원시스템이 만든 MP3플레이어가 단일상품으로는 월간 판매량 1위를 기록! 워크맨의 종주국인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코원은 일본시장뿐 아니라, 세계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97년, MP3플레이어를 세계최초로 개발하면서 한국은 첨단 디지털오디오의 종주국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이 주도해온 세계 오디오시장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MP3 플레이어 시장에서 한국의 코원시스템은 전세계 최고의 명가(名家)로 꼽히고 있다.


▶  세계 최강의 소프트웨어, 제트오디오의 신화

 1995년 컴퓨터 한 대로 대학교 동창이 손을 잡고 창업을 시작했다. 무엇하나 두려울 것이 없었던 젊은이들의 야심찬 도전은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부터 시작됐다. 당시 컴퓨터상에 쓰여 지는 오디오와 비디오 관련 파일의 형식이 갑작스럽게 늘어나 복잡하고 다양해진 상황. 파일마다 재생방식이 달라 원하는 것을 보고 듣기 위해서는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해야만했다. 이를 해결해 줄 만능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1997년 7월, 이들의 첫 번째 야심작 <제트오디오>가 2년여의 진통 끝에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기능과,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까지 갖춘 제트오디오는 PC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발이었다.

 제트오디오는 국내보다 해외시장을 염두 해두었다. 개발이후 어떻게 제품을 알리느냐가 중요해졌다. 수억원이 들어가는 홍보비용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코원은 온라인상에서 마케팅을 벌이기로 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라인 IT 전문 사이트인 ZDNET, CNET 등에 테스트용 버전을 한 달 동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올려놓았다. 네티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시장에서 명품으로 인정받은 제트오디오 하지만 국내시장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인기만큼 매출은 오르지 않았다. 이는 정품을 사지 않고 해킹으로 프로그램을 무단복제해 가기 때문이었다. 해킹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목에 거는 오케스트라, MP3 업계를 평정하다 (CW200)

 회사 설립 후 1년. 당시 인터넷은 전화선을 이용한 천리안 서비스가 유일했다. 어느날 우연히 천리안에서 MP3 파일을 다운받은 박남규 사장. MP3 플레이어 시장의 가능성을 직감했다.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를 동원해 철저한 분석에 들어갔다. 당시 시중에 나와 있는 MP3 플레이어 모델들은 겨우 10곡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 디자인이나 음질 역시 형편없었다. 침체된 시장을 일으킬 수 있는 획기적은 모델을 고민하던 코원은 장장 6개월간의 자료조사 끝에 코원시스템이 기획한 제품은 ALL IN ONE! 고객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하나의 기기에 담아보자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만한 크기의 라디오를 만드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황.

 제품 크기를 줄이기 위해 부품을 개발하는 힘든 과정을 거치고 드디오 CW200이 출시됐다. 고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최대 온라인쇼핑몰인 아마존과 IT 전문평가단 CNET 리뷰 등, 미국 내 소비자 및 전문가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 코원시스템의 새로운 기획은 극찬을 받았다. CW200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홍콩에 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 워크맨의 종주국, 일본시장에 도전하라! (하드형 M3, X5)

 한국과 미국에 걸쳐 승리를 했던 코원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워크맨의 종주국, 일본시장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수입품에 대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대형유통업체들은 한국에서 온 벤처기업의 물건에 무관심했고 특히 플래시 메모리 형태의 제품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당시 일본의 MP3 시장은 우리와는 달랐다. 초소형의 플래시메모리 형태의 제품이 인기인 우리시장과 달리, 당시 일본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두거운 하드형태의 제품들이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 1조 2천 억 가지의 음색, 아날로그 사운드를 구현하라!

 2003년 12월. 경쟁업체가 내놓은 MP3 플레이어가 판매고를 올리며 약진에 약진을 고듭하던 중. 양사는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코원시스템으로서는 경쟁사의 약진에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시장의 붐을 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회심작 아이오디오4는 출시 전부터 3천여대의 예약판매고를 올리며 폭발적인 인기로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출시된지 15일반에 버그가 발견되고 판매된 전 제품 리콜을 실시한다. 넉달이 지난 후에야 위기 상황이 일단락 됐으나 엎치락 뒤치락 해오던 경쟁업체는 이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엇다. 코원시스템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강의 음질을 구현하는데 남은 힘을 모두 쏟았다. 디지털이지만 아날로그의 음색이 살아있는 MP3를 위한 코원의 도전은 계속되고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 남는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말이다.
 
급속도로 변하는 정보기술(IT)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지난 10년 동안 매년 두배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박남규 코원시스템 사장(41). 박 사장의 유연한 사고와 겸허함은 날이 갈수록 의사결정이 어려워지는 이 시대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전범이 될 만하다.
 
# 초고속 성장기업
 
코원시스템은 아이오디오(iAUDIO)라는 브랜드로 각광받고 있는 MP3플레이어 전문업체다.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최근 사명을 거원시스템에서 코원시스템으로 바꿨다.
 
"1995년 설립 이래 단 한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고 매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지난 해에는 40만대의 MP3플레이어를 판매했지만 올해에는 10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코원시스템은 최근 `한국의 고속성장 기업50'(Korean Technology Fast 50)에서 유일하게 3년 연속 수상 기업으로 선정될 만큼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01년 84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02년 168억원으로 늘어났고 2003년 264억원, 2004년 785억원으로 매년 약 2배 이상 성장해 왔다.
 
코원시스템은 올해 매출액 1550억원과 국내 시장점유율 20%를 달성해 MP3플레이어업계에서 2위에 도약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주력해온 국내 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활발한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 법인에 이어 일본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중국에도 생산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소를 개설했다. 유럽에도 올해 안에 지사를 설립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한국을 비롯, 미국,유럽, 일본과 중국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해외 수출에 매진할 계획이다.
 
# 기술기업의 꿈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석사 출신인 박 사장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코원시스템을 설립했다. 그는 벤처업계에서는 많지 않는 편인 LG전자 연구원 출신이다. 그렇게 일찍 창업을 결행한 배짱과 용기가 부러워 창업을 결심한 계기를 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미국의 애플사나 HP사처럼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을 일구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금은 없지만 기술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박 사장은 그 꿈과 비전을 현재 미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대학 동창생인 정재욱 사장과 공유했다.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은 멀티미디어 사업으로 설정했지만 초기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시작했다.

창업 당시 투자한 돈은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돈 2000만원이 전부였다. 그 돈도 대부분 사무실 얻는데 쓰고 집에서 사용하던 컴퓨터와 기타 장비로 사업을 시작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일단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느긋함이 제 성격의 장점"이라며 답을 대신했다.
 
# 행복한 CEO
 
박 사장의 프로필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깔끔한 프로필 만큼이나 그의 비즈니스 여정 또한 순탄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시련이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이야기할 만한 우여곡절은 없더군요." 자신의 인생과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이 정도로 담담히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CEO`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역경과 난관을 이겨낸 기업인의 성공 스토리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롭겠지만 당사자가 겪었을 고통까지 이해해주는 것은 아닐테니까.
 
40대 초반에 매출 1000억원짜리 회사를 일궜다면 `성공`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저는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정한 `성과`를 이뤘다는 정도의 표현에는 동의하겠습니다." 겸손한 대답이지만 한편으로는 박 사장의 성취욕이 이 정도로 만족할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5년 후인 2010년에 매출 1조원을 기록하는 것이 현재의 목표입니다. 그 때쯤이면 성공했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박 사장이 자신의 경영자적 자질은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물었다. "저는 늘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비자의 감각을 읽어내는 직관력이 경영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조화와 타협을 중시하다보니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경영자의 그릇의 크기와 포용력에 달려 있을 테니 그 또한 `능력`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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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켜라! - 스팀청소기 세계 진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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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엄길청의 성공시대에서도 소개된 한경희씨의 스팀청소기 이야기...
오래간만에 들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무일푼에서 창업을 한지 6년만에 세계 시장 점유율 60%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것에 찬사를 보낼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제품의 수정, 보완...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 졌다고 해도 사람들이 무조건 구매를 할리가 없다...
그것을 이겨내는것이 마케팅이라는것이지만.. 이외에서 하늘의 도움.. 운도 따라야 할것이다...
암튼 블루오션을 개척해서 40명의 직원이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바라본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시행착오를 격는 모습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겼다고 할까...
아니.. 내가 감히 그들과 비교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의욕이 느껴진다.. 파이팅이다!
 

[제 92편]

        『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켜라!

         - 스팀청소기 세계 진출기』

 

▣ 방송

   2005년 10월 7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PD : 김상우       작가 : 박소희


▣ 기획의도

  평범한 한 주부의 아이디어가 세계시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세계 최초, 바닥용 스팀청소기 개발에 성공한 한영베스트. 이들은 지난 한 해 15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데 이어 올해는 천 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카펫용 스팀청소기의 본고장 독일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시장 등으로 그 무대를 넓혀 가며 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렇게 스팀청소기 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선 '한영베스트'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제작내용

 1. 세계 최초의 스팀청소기를 개발하라!

 입식생활을 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좌식 생활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보송보송한 바닥 청소는 언제나 주부들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다. 물걸레 청소로 살균소독까지  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래서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물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던 한경희씨는 새로운 형태의 청소기를 고안하게 되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스팀다리미에 걸레를 붙이고, 봉을 달아 스팀청소기를 만들자고 생각한 것.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제품을 완성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청소기는 다리미보다 더 많은 양의 스팀을 요구하기 때문에 스팀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더군다나 흡착력과 밀림력을 갖춘 걸레개발과 걸레 부착 방식 등 각각의 구성요소들 또한 새로운 방식을 요구했다. 결국 스팀청소기 개발은 맨땅에서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2.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고의 애프터 서비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스팀청소기 '스티미'가 탄생했다. 하지만 유통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한영베스트. 이들은 좋은 제품만 만들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갈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소한 이 제품을 소비자들은 선뜻 바라봐 주지 않았고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판매에 발 벗고 뛰었으며 조그만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고객의 집을 방문했다. 중소기업에게 취약한 애프터 서비스 부분을 강화한 것이다. 또한 고객들의 불편사항을 모두 귀 기울이고 보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청소까지 해주며 최고의 애프터 서비스를 선사했다. 이러한 직원들의 정성에 소비자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3. 세계시장을 향한 도전

 소비자들의 불편사항을 보완하여 재 탄생한 '싹스팀'. 밤낮 없이 연구, 개발한 직원들의 노력이 진가를 발휘하며 싹스팀은 한국 시장에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또한 다다미를 사용하는 일본과 웰빙 열풍으로 카펫 걷기에 나선 유럽까지 그 시장이 넓어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한영베스트는 더욱 박차를 가해 전 세계시장에 뿌리내리는 그 날까지 힘차게 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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