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iN /성공 & 강연 '에 해당되는 글 561건

  1. 글로벌 마켓 제3부 최고의 브랜드 - 수퍼스타
  2. 유통시장의 젊은 신화, 옥션 이재현
  3. 86 키위재벌 정운천의 참다래 망다래 이야기
  4. 은근둔, 진간꼭의 신화, 김동환
  5. 맛의 승부사 김순진, 입맛 몰러 나가다
  6. 상술의 귀재 김서기, 축배를 들다
  7. 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사 작가 이외수

글로벌 마켓 제3부 최고의 브랜드 - 수퍼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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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스타를 이용한 브랜드 마케팅이 얼마나 큰 시장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다큐...

야오밍, 레알마드리드, NBA, NFL 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NBA, MLB 등으로 우리나라에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의 인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이런 것들이 NBA나 MLB 등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것...

올림픽에 NBA 드림팀이 출전해서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한것도 금메달을 따기위한것이 아니라 세계로 NBA를 알리기위한 로비의 결과였다는것...

그동안 생각했던 상식적인 나의 생각들이 깨져버렸다...

지금 NBA로 타격을 입은 스페인의 농구팀은 NBA에 합류를 하려고 NBA와 교섭을 벌이려고 한다...

그리고 NBA 휴스턴의 야오밍에 대해서 많이 다루어 주는데...

지금 야오밍은 예전에 마이클조던이나 샤킬오닐을 능가하는 상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해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야오밍을 잡으려고 한다는것이다.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다가 야오밍측에서도 야오밍을 상품화하기 위해서 미국의 글로벌 마케팅 전공인 대학교수까지 합류해서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있다.

그냥 단순히 돈을 얼마 더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야오밍이 운동을 할 수 있는 10년을 지나서 평생동안 야오밍을 이용해 브랜드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 야오밍을 농구 이외의 분야까지 활동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말들을 했었다.. 운동 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지금 세상에서는 택도 없는 소리인것 같다...

운동은 당연히 기본이고, 그외에 해야할 활동들, 마케팅, 홍보 등등...

레알마드리드의 반지의 제왕 라울이 잠깐 인터뷰를 하는데.. 본인들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마케팅계획에 맞추어서 쇼도 해야 한다고...

마케팅..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그 속은 깊고 깊기도 하고... 멀고 멀기도 하다... 그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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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시장의 젊은 신화, 옥션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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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요즘 옥션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전에는 물건값이 싼맛에 자주 들렸는데, 요새는 최저가 검색 사이트덕인지 그다지 싼것도 아니고, 이 드라마를 듣다보면 수수료가 9% 수준이라고 하는데, 최근에 수수료가 개편되서 더욱 말이 많고, 주위에 옥션에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궁시렁데는 소리를 종종 듣게된다.

뭐.. 암튼 30대 유학파 CEO로 두루넷에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고 옥션에서 재기한 이재현 사장...

거추장스러운것들 불필요한것들은 잘라내고 핵심부분만으로 나가자는 그의 경영방침과

그가 고교 시절 레스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을 하던 모습 등...

외유내강 스타일의 경영자... 한국 옥션을 잘 이끌어서 얼마전에는 이베이 아시아 총괄을 맞았다고 한다.

암튼 그다지 큰 내용이 없이 옥션의 광고와 같았던 조금은 실망이였던 성공컨설팅 이재현사장편.

국내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로 자리매김한 옥션의 이재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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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키위재벌 정운천의 참다래 망다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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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를 가지고 큰부를 이룬 사업가의 이야기.. 온갖 역경을 이기고 지금의 자리까지 오면서 대단한 의지력을 가지고 온듯하다.
상당한 무대포정신으로 밀고 붙치는 모습과 항상 좋은 기회를 만들기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성공할만한 대단한 사람중에 한명인듯하다.


[벤처 농사꾼] 참다래사업단 정운천 회장
키위농업에 '이건희식 경영' 접목
생산~유통 전과정 한 사업단으로 묶어
"개방이 대세라면 차별화만이 살 길"

‘키위 재벌’로 잘 알려진 한국참다래유통사업단 정운천(51) 회장은 ‘벤처 농업계의 이건희’로 불린다.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발상의 전환, 품질 차별화를 통한 특화된 고객층 확보, 시대를 한 걸음 앞서나가는 과감한 미래 투자….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연간 35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정씨의 전남 해남군 화산면 키위단지는 농업에 ‘이건희식 경영’을 접목시킨 기업형 영농 현장이다.

정 회장이 처음 키위와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초반. 고려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키위 묘목 수입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한 키위야말로 장래성 있고 돈 되는 품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전남 해남에 터를 잡고 직접 키위 농사를 시작했다. 만 5년5개월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먹고 자며 키위 재배에 매달리던 정씨에게 첫 위기가 찾아왔다. 87년 태풍 셀마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큰 피해를 입은 것. 설상가상, 89년엔 키위시장 개방이란 날벼락이 떨어졌다.

위기 속에서도 정씨는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대응해 나갔다. 첫째는 국내 키위산업의 일원화였다. 다국적 키위 기업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키위 생산부터 선별·포장·저장·유통·가공·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사업단으로 일원화해 의사 결정과 조직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탄생한 참다래사업단은 국내 최초의 농민주식회사였다.

둘째는 ‘적과의 동침’. 외환위기로 키위 판매량이 줄어들었을 때 경쟁국인 뉴질랜드와 과감히 손을 잡았다. 11월~다음 해 4월은 국산 키위를 생산·유통시키고, 5~10월까지는 뉴질랜드산을 수입·유통시키는 방식으로 계절과일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셋째는 차별화된 품질을 앞세운 유통망 장악. 키위를 따서 그냥 파는 게 아니라, 딴 후 숙성시켜 더 달고 부드럽게 만드는 ‘후숙(後熟)’ 과정을 개발했다. 이렇게 수입산과 차별화 한 품질을 가지고 백화점·할인점에서 직판 행사를 꾸준히 벌였고, 그 결과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넷째는 과감한 미래 투자와 신규사업 진출이다. 정씨는 외환위기 직후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마를, 키위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택했다.

3년을 매달린 끝에 그는 고구마의 신선도와 품질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저장법과 세척 이후에도 붉고 싱싱한 고구마 본래의 색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고구마는 이제 변비·콜레스테롤 제거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고부가가치형 작물로 탈바꿈했다. 고구마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년 만에 사업단 전체 매출액의 40%를 웃돌 정도로 급성장했다.

정 회장은 “농산물 시장 개방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의 자연여건과 첨단기술을 활용한 차별화·고급화 전략만이 살 길”이라며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와 국민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 농업인들의 독립정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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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둔, 진간꼭의 신화,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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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고졸중퇴라는 컴플렉스를 가졌지만,

그것에 한탄하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택시기사에서 출발해서 건설회사, 영업, 경찰용품사업, 불빛이나오는 팬 등을 개발해서

현재 연매출 80억원 이상을 올리는 업체를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 반성, 노력, 끈기, 도전정신, 비전... 배울것이 상당히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실패하는것보다 노력하지 않을까봐 두렵다는 김동환씨의 말...

가슴깊이 간직하고...

좀 더 이사람에 대해서 분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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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부자 K씨의 인생 이력서


이 이력서를 읽어가다 보면 여러분은 그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에서 학교생활이나 직장,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이력서야말로 평범한 사람들도 생각과 습관을 바꾸면 성공과 행복,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신체장애, 짧은 학력, 가난 등 3개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의 편안한 삶에 안주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57년 출생
1965년 ( 8살) 초등학교 1학년, 소아마비 장애
1972년 (15살) 친척 도박빚으로 빚쟁이에 시달림. 계란장사, 떡장사 나섬(중학교 2학년)
1975년 (18살) 고등학교 2학년 중퇴(생활궁핍)
1978년 (21살) 영업용택시 운전
1979년 (22살) 방송통신 고등학교 입학
1982년 (25살) 건설회사 소사로 일함, 방송통신대 농학과 진학
1985년 (28살) 건설회사 퇴사
1986년 (29살) 액서서리 사업시작, 6개월뒤 실패
1987년 (30살) 단돈 4만원으로 가스총 외판원
1989년 (32살) 결혼
1992년 (35살) 반디펜 개발
1996년 (39살) 도로표지병 개발
현 재 (46살) 연간 매출액 80억원 이상 달성



계란과 떡을 팔았던 어린소년


1,000만원에서 출발해 1억원을 모은 사람과 10억원에서 시작해 1억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교해 보라. 전자는 자신감을 밑천으로 백만장자가 될 것이고, 후자는 상실감으로 가난뱅이가 될 것이다.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된 사람, 고등학교 2학년 중퇴, 계란장사, 떡장사, 가스총 외판원, 택시기사, 사업실패, 그리고 재기에 성공해 연간 8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 사장으로 변신.
삶의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우뚝 선 사람의 성공이력서다. 길라씨엔아이 김동환(46) 사장의 인생 이력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과 한번 비교해보라! 대부분의 독자들은 김사장보다 평탄한 삶을 살아 왔을 것이고, 가정환경이나 주변여건도 훨씬 좋았을 것이다. 김사장이 험난한 인생의 질곡에서 벗어나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성공 X파일은 무엇일까? 김사장의 성공스토리를 듣다 보면 그가 뿜어내는 정열과 결단력에 감동하게 된다. 나보다 못한여건에서 출발해 행복과 성공을 쟁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꼭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다면.



에스키모인의 늑대사냥
김사장의 성공 X파일을 열어보기 전에 현실에 그냥 만족하는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에스키모인들의 늑대사냥 방법에서 알아보자. 에스키모인들에게는 선조대대로 내려오는 늑대사냥 방법이 있다. 얼음바닥에 가축의 피를 가득히 묻힌 칼을 꽂아 놓으면 후각이 좋은 늑대가 어슬렁 어슬렁 칼주위로 몰려든다. 그리고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칼에 묻은 피를 핥기 시작한다. 피맛을 알고, 먹는 속도가 빨라진다. 피를 다 먹은 늑대는 이윽고 혀로 날카로운 칼을 핥게 된다. 자신의 혀에서 피가 나오고, 늑대는 추위로 혀에 감각이 없어져 이것이 자신의 혀에서 나오는 피인지도 모르고 계속 먹어댄다.
감각이 무디어지고 늑대는 결국 그렇게 자기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에스키모인들의 저녁식사 반찬감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데도 자기자신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를 노래하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우리들도 늑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현실의 가난에서, 지금의 나태와 게으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늑대와 같이 날카로운 칼날에 혀를 베이고 말 것이다.


이제 길라씨엔아이 김동환 사장이 어떻게 가난과 고교중퇴, 신체장애라는 3개의 커다란 핸디캡을 딛고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 성공 X파일을 들추어보자.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변화를 시도했다. 피덩어리가 주는 현실의 달콤함에 취해있었던 늑대와는 달리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항상 변화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교중퇴라는 학력을 보완하기 위해, 신체장애라는 단점을 이겨내기 위해 그가 눈물과 깡으로 살았던 과거로 돌아가보자.


그는 57년 전북 익산의 부자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어릴적부터 장애인이었어요. 그때는 방을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뒤척이며 굴러다녔죠. 어머니는 방에 동아줄을 매달아 놓고 제가 줄을 잡고 걸어다니도록 훈련을 시켰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제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어요. 넘어져서 울고, 어머니도 울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신체장애에 시달렸던 그는 이번에는 가난이라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재산을 관리하던 친척이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집이 빚쟁이들에게 넘어가게 되었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어요.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죠. 어머니와 저는 또 한번 울었어요.
부자집에서 잘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는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같은 1억원이라도 가치가 다르다고 말한다. 1,000만원에서 출발해 1억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10억원으로 시작했던 사람이 돈을 잃고 1억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 차이는 엄청나다. 돈의 현재가치는 1억원으로 모두 같지만 미래가치는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1,000만원으로 시작한 사람은 자신감이라는 백만대군을 얻어 더욱 열심히 삶을 살고 돈을 모아가게 된다.
반면 10억원에서 돈을 잃은 사람은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 오히려 재산을 탕진한다. 그만큼 자신감은 우리에게 삶의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활력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실패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는 것이 두렵다
중소기업 단체중 팔기회(八起會)라는 모임이 있다. 대기업이나 원청업체에게 제품을 공급하고 어음을 받았는데 이들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면서 부도가 났거나 경영상태가 힘든 중소기업 사장들이 만든 단체다. 부도를 당했지만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정신으로 일어서자'는 의미에서 팔기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 팔기회 회장과 인터뷰를 한적이 있다. "자신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기업이 잘 나갈 때에는 무서울 것이 없지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바로 좌절하게 되지요. 자신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그대로 망한 회사로 남아있고, 자신감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재기를 하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문제는 자신감이예요." 이는 꼭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삶과 바로 직결된다. 입사시험에서 떨어지거나,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집안이 갑자기 기울거나, 사기를 당할 경우 우리는 자신감을 잃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있다가 자살이라는 극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언제나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잠시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초조해 하거나, 자기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다시 힘을 내어 자신을 연마하고 재도전해서 성공하면 되지 않는가? 세계적인 농구스타 마이클조던은 '실패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김사장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시골시장을 돌아다니며 계란과 떡장사를 했다. "주변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방해를 했죠. 텃세라고 있잖아요.
어느 날은 시장경비원이 다가와 계란과 떡이 담긴 바구니를 발로 걷어 차버렸어요. 땅에 떨어진 계란과 떡을 먹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머니는 경비원의 발을 잡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시 그의 소원은 남에게 쫓기지 않고 장사할 수 있는 시장 한켠의 1평 땅을 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했다. 잠을 잘 곳이 없어 남의 집창고에서 몰래 자다가 쥐한테 물어 뜯기기도 하고,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음식찌꺼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난지도에 가서 쓰레기를 줍는 일도 했다. 그야말로 삼류 밑바닥 인생 그 자체였다.
"20대 초반이었을 때 영업용 택시를 몰았어요. 지도책을 사다가 서울은 물론 전국의 길거리를 외웠어요. 손님들이 가장 빠른 길로 갈수 있도록 했죠." 그러던 어느날 유명 국회의원이 그의 택시를 타게 되었다. 그의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성을 알아보았던 국회의원은 자기차를 몰아달라고 부탁한다. "영업용택시에도 신용이 있고, 서비스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고객입장에서 차를 몰았어요. 그분이 저를 잘 본 것 같아요." 이후 그는 영업용 포니 승용차에서 그라나다 고급차를 몰게 되었다.


6개월만에 사업 실패
당시 대기업 초임이 19만원 이었는데 그는 개인운전사로 있으면서 3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준비를 하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가난 떄문에 못배운 것이 한(恨)이었다.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했어요. 또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이어갔죠.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저녁에는 공부를 했어요." 그가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한 국회의원은 그를 굴지의 건설업체인 S사에 소개시켜준다. "거기서 소사로 일했어요. 복사하고, 심부름하고, 허드렛일을 했는데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대학을 나온 같은 또래 직원들은 정식사원으로 넥타이를 매고 있었죠." 그는 소사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식직원 시험을 치고 결국 S기업에 정식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83년부터 85년까지 S기업에서 일을 했다. "아무도 저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출신대학별로 파벌이 있었어요. 대학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저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참 열심히 일했어요. 내가 사업을 할 수 있는 노하우와 경험은 거의 이곳에서 배웠죠." 그는 회사를 나와 86년 그동안 한푼 두푼 모은 돈 5,000만원으로 액세서리 수출사업을 시작했다가 6개월만에 폭삭 망했다. 다시 가스총 외판원으로 나서면서 돈을 모았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업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부자들은 핸디캡을 극복한 사람
"한번 실패했지만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후로 저는 발명과 신제품 개발에 제 운명과 미래를 걸었어요. 이후 신제품을 잇따라 개발하고, 발명특허를 내면서 서서히 운명의 여신은 제 편으로 돌아왔어요. 포기하지않은 댓가였죠." '마쳐야 성공한다'는 가르침이 그의 성공 X파일에 쓰여져 있다. 그 당시 범인들이 휘두르는 칼에 경찰관들이 맞아 다치게 되자 칼이 안 들어가는 조끼를 만들었다. 또 범인들이 수갑을 풀고 도주하는 사건이 빈발하자 풀리지 않는 수갑을 개발해 히트를 쳤다. 그는 92년 '반디펜' 개발로 성공의 길로 들어선다. "우연히 야간에 경찰이 교통위반 스티커를 발부하는 현장을 봤어요. 어깨 사이에 손정등을 끼고 불편하게 스티커를 떼는 것을 보고 어두운 곳에서도 쓸 수 있는 펜을 개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반디펜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볼펜위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볼펜 불 주위에서 빛이 나와 깜깜한 밤에도 글을 쓸수 있는 반디펜은 해외로 수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25개국에 600억원 가량 수출되었다. 또 열린음악회나 유명 가수들의 공연장에서 사용되는 빛이 나는 막대기(라이트 스틱(Light Stick))를 개발해 방송3사에 공급하고 있고, 이 한 제품만으로 1년에 3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있다. 그는 꾸준히 연구하고 개발하면서 250개 이상의 특허를 가지고 있다.


가난과 신체장애, 고교중퇴라는 3개의 핸디캡을 모두 이겨내고 김사장은 정상에 서 있다. "아직도 갈길이 멀어요. 정상이라뇨! 말도 안돼요.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용감하게 도전하세요.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워 보일 뿐이지, 도전하고 한걸음씩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또 평생동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한걸음만 더
필자는 성공한 백만장자 50명에게 '최종학력을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물었다. 그들은 어디까지 정규교육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대학교까지'가 23명(46%)으로 가장 많았고, '대학원까지'가 10명으로 20%를 나타냈다. 하지만 '고등학교까지'가 11명으로 22%를 차지했고, '중학교까지'도 6명으로 12%를 나타냈다. 필자의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남들과 달리 집념과 도전정신으로 부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어느날 김사장은 필자와 한정식 집에서 약주를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시 하나를 들려주었다. 전부 외우고 있었다. 사회운동가 백기완씨의 '한걸음만 더'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난다. '한걸음만 더, 한걸음만 더, 한걸음만 더, 한걸음만 더, 한걸음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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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승부사 김순진, 입맛 몰러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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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대단한 여자이다. 몇일전에 극장에서 광고를 보다가 놀부보쌈이 나와서 예전에 자주가던 서울역의 놀부보쌈이 생각났었는데, 사장이 여자인줄은 오늘 처음알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찟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가출해서 공순이부터 시작해서 과자공장, 옷가게, 각종 음식점을 거치며 망해보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조금씩 쌓아가다가 드디어 보쌈집에서 승부를 내서 성공한 여장부...
음식점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꼭 한번 들어봐야 할것 같고, 그외에 옷가게를 하는 사람들 및 창업을 준비하거나 이미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꼭 봐야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고객관리에 대한 부분은 많은 연구를 해봐야 할정도로 대단한 마인드를 가진 사장님...
최근에 충정로에 창업을 한 동기와 선배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_-;;

 
축적된 경험은 누구도 못 훔친다
놀부의 ‘현장경영+지식경영’

(주)놀부 김순진 대표
놀부는 우리나라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하나로 꼽힌다. 전국 340개 놀부 가맹점에서 하루 10만 고객이 놀부 음식을 즐긴다. 돈으로 따지면 하루 1000만원어치 음식이다. 놀부 김순진 사장은 5평짜리 보쌈집을 이렇게 키워냈다.


놀부를 찾아간 10월 8일, 서울 서초 양재 놀부 본사에서는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놀부지식경영위원회’ 미팅이 진행됐다. 이 모임은 자기 업무와 관련한 분야별 특정지식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학습 동아리. 2003년 첫 미팅인 이 날에는 대구사업소 가맹점주 백서(白書)팀이 놀부 가맹점주 백태(百態)를, 본사 계미고수(鷄味高手)팀이 신브랜드 개발을 위한 맛있는 닭요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놀부의 이 ‘지식경영’ 경연대회(사례 발표)는 2004년 1월 7일까지 월 2회, 총 6회 진행될 예정이다. 고객 서비스와 품질 개발이라는 테마 아래 프랜차이즈 연구팀, 홍보 PR 연구팀, 성공식당 사례연구팀, 수익관리/수익원가 연구팀, 식당 인테리어팀, 외식 마케팅팀 등이 팀별 5명 안팎으로 짜여져 있다. 2002년 시작된 놀부의 지식경영은 직원 직무 능력 향상-직원 지식 창출/공유-회사 성과 제고로 이어져 가맹점주와 소비자의 만족도를 극대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놀부 전략기획실 고경진 차장의 한마디가 명쾌하다.
“회사 노하우는요, 직원들 머릿속에 있습니다.”

▶ 김순진 사장의 석사 학위 논문 제목은 ‘외식산업 서비스 품질이 고객만족에 미치는 영향’. 그이는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업계에 “현장을 경험한 이론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님만이 희망이다
놀부(nolboo.co.kr) 김순진(1952년생) 사장은 마침내 자신의 세 가지 꿈을 다 이뤘다.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낸다, 석사 학위를 받는다, 최고 식당을 만든다는 꿈.
1987년, 김사장은 서울 신림동 신림극장 뒷골목에 보쌈식당 ‘골목집’을 열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5평짜리 가게. 백반집, 돼지갈비집, 곰장어집… 세 차례에 걸친 음식장사에서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마련한 식당이었다. 가난 덕에 중학 1년을 중퇴한 그이는,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만 했다. 벌어서 최상의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망할 짓만 했어요. 왜 망했나 역산을 해보고, 어떻게 해야 안 망할까 대안을 내보면서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게 오늘날 놀부의 교과서, 지침서가 됐지요. 고객의 소중함도 그때 알았습니다. 쌀은 떨어지고 월세는 밀리고… 신림동 순대시장 골목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되는데, 저 사람들을 손님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안절부절했지요. 손님만이 희망이었어요. 그 절절함이 고객을 섬길 줄 알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98년 방영된 MBC-TV ‘성공시대’는 맛있는 보쌈김치를 만들기 위한 김순진 사장의 줄기찬 노력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담아냈다. 배, 마늘, 참기름 등속을 각기 다르게 버무려 넣은 1번, 2번, 3번, 4번 바가지를 죽 늘어 놓고 맛 보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김사장의 진지한 모습…. 문을 열고 일 주일, 사람들이 식당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런 빛깔에 연하고 담백한 돼지고기, 1인분 2,500원의 저렴한 가격, 배추와 속을 따로 내는 새로움, 커다란 그릇에 된장국을 퍼 담아준 것이 먹혀든 것. 당시만 해도 보쌈집 손님 대부분은 힘겨운 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소주 한 잔을 거저 대접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별것 아닌지 몰라도, 식당이 그저 ‘먹는 장사’로 여겨지던 그 시절에는 상당한 서비스였다. “사흘을 안 먹으면 눈 앞에 빙빙 보쌈이 돈다”는 단골들이 늘어났다. 큰 생굴이 나올라치면, 김사장은 단골이 누구인가? 둘러보며 단골을 챙겼다.
장사 다섯 달 만에 김사장은 가게를 12평 규모로 키운다. 하지만 아무리 잘됐다 한들 5평 식당에서 5개월간 얼마나 벌었을까. 식당을 넓히는 데 들어간 돈은 전 가게 월세 보증금이었다. 가진 것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자신이 있었다. 이때 ‘놀부보쌈’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놀부보쌈은 승승장구, 40평 식당으로 자라났다. 2층에 위치한 가게였지만 역시 자신있었다. 더욱 열심히 뛰었다. 굴 하나 고기 한 점을 더 얹어주며 2층까지 올라와준 대가를 지불했다. 먹던 고기가 남으면 김치까지 쥐어 보냈다. 일하는 아줌마 머리카락이 음식에 빠질까봐 일하는 아줌마도 김사장도 모두들 ‘쇼트 커트’를 했다. 김순진 사장의 머리는 지금까지도 쇼트 스타일이다.
“발목이 퉁퉁 붓고 아랫도리가 주저앉을 정도로 일했습니다. 자식은 친정에 맡기고, 식당 바닥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애를 보면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자식에게도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은 서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뼈빠지게 일해서 키워줬다는 걸 고마워해요.”

▶ 김사장은 식당을 차리고 나서 머리카락이 음식에 빠질까봐 ‘쇼트 커트’를 했다. 김순진 사장의 머리는 지금도 쇼트 스타일이다.
▶ 김사장은 항상 멀리 보고 늘상 한 발 앞서 왔다. 부대찌개, 솥뚜껑삼겹살, 유황오리진흙구이, 순대국 등 새로운 메뉴를 속속 선보이며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100년의 맛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놀부의 마음이다.

제때 다 찾아 먹어가며 일할 수 있나
놀부 프랜차이즈는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주변 어려운 사람들이 가맹점을 내달라고 한 것이다. 89년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가맹 1호점이 들어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도, 맛도, 가격도 본점과 달랐던 것. 이익을 쫓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사장은 아차 싶었다. 약정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 일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가맹점의 시설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챙겨 나갔다. 놀부 프랜차이즈는 무엇보다 보쌈 조리법을 매뉴얼화했기에 가능했다. 어느 정도 세기의 불에 어떤 부위의 고기를 넣어 얼마 동안 뜸을 들여 무엇을 넣어 조리하는지, 그 방법을 표준화시킨 것이다. 놀부 조리기술서에는 “계절에 따라 바람(수분)이 들어간 정도가 다른 무의 탈수 시간과 그에 따른 채칼의 쓰임새가 밀리미터 단위로 적혀 있다”고 한다. 처음 한식 매뉴얼화를 시도하고 성공시킨 것만 봐도 김순진 사장의 안목과 집념을 가늠할 수 있다.
김사장은 항상 멀리 보고 늘상 한 발 앞서 왔다. 1991년에 가맹점 수가 22개로 늘어나 서울 공장으로는 역부족이던 91년 공장 부지를 물색할 때의 일. 충북 음성에 반듯하게 다듬어진 1,000평 땅이 있었다. 하지만 그이는 주변에서 그만이라던 그 땅을 제껴 두고 2,000평 임야와 산을 매입해 공장을 지었다. 가맹점이 340개를 넘은 지금까지도 놀부 물류가 원활히 돌아가는 것, 놀부가 여타 외식 프랜차이즈보다 먼저 전국망을 갖출 수 있던 것도 이 음성공장 덕분이다. 김사장은 “음성공장은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은 것”이라고 했다. 또 놀부는 부대찌개, 솥뚜껑삼겹살, 시골상차림 놀부집, 유황오리진흙구이, 순대국 전문점 등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며 지속적으로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지난 16년 동안 3년 주기로 히트 상품이 나왔습니다. 놀부가 새 아이템을 만들어 놓으면,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지방 소도시까지 우후죽순 생겨나고 그래요. 경쟁사회니 어쩌겠어요. 놀부만의 강점을 더욱 강화하고 브랜드 파워를 키워야지요. 식습관 변화는 쉽지 않지만, 요즘 젊은 고객들의 변화는 참 빨라요. 그러니 상품 개발뿐이지요. ‘100년의 맛을 디자인한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놀부의 지식경영은 매일경제&부즈 앨런 ‘지식경영대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었다. 놀부의 지식경영은 가맹점주와 소비자의 만족도를 극대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미친 듯 달리다 보니 커 있더라
“순환의 법칙이라 할까요, 뿌린 만큼, 베푼 만큼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김순진 사장은 ‘나눔의 미학’을 믿고 실천한다. 누구보다 가난을 잘 알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작은 도움도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1989년 KBS 상점경영수기 공모에서 금상을 받자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김사장은 89년부터 여성개발원 창업강좌와 위생교육원(한국음식업중앙회 부설)의 식당경영사례 강사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이는 이러한 강연 활동으로 받은 강사료를 ‘놀부장학회’라는 이름으로 적립, 점포 근무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99년부터는 매년 ‘놀부 외식논문 현상공모’를 통해 보다 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1년에는 ‘사랑의 봉사단’을 설립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 이웃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김사장은 1만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상록회’ 총재이기도 하다. 1970년 결성된 상록회는 자연보호 운동, 수재민 돕기 등을 벌이는 전국 규모 민간 단체다.
김순진 사장의 향학열 또한 남다르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자의 배움에 대한 갈급함이기도 했겠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그이에게는 뜻하지 않은 고민이 생겼다. 영어와 한자가 뒤섞인 직원들의 보고자료를 해독할 수 없어 난감했던 것. “특히 90년대 초반 외부에서 스카우트한 전문인력들이 제출한 보고서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고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김사장은 그러나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96년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패스한 그이는 97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서울보건대학 전통조리과, 우송대학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올해 경원대학교 대학원 관광경영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김사장은 같은 학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석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이뤘습니다. 박사과정은 보너스라고 생각해요. 1인 몇 역을 하면서,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쥐어짜며 살았습니다. 저는 전진하는 스타일입니다. 스스로 도전하면서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자세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벼랑에 선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행동으로 쌓은 경험은 누구도 훔쳐가지 못해요.”
이런 CEO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직원들에게 자극제가 될 터이다. 직원들 스스로들 자기개발의 텃밭을 가꾸게 만들었고, 놀부는 자연스레 지식경영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CEO가 추구하는 ‘현장의 경험과 지식을 발굴, 공유하고 신속히 경영에 반영하는’ 현장 중심 경영을 직원들 또한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김순진 사장이 말하는 놀부 지식경영의 요체는 “본사가 가맹점 경험을 미리한다”는 것. “가맹점 장단점을 분석함으로써 내부의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놀부의 지식경영은 매일경제&부즈 앨런 ‘지식경영대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누가 시켰나요? 자기들 스스로도 대견해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들에게서 희망을 봤어요. 그걸 보는 사장은 힘이 솟지요. 일등 기업은 누가 만드나요? 직원을 일등으로 만들면 됩니다. 제가 할 일은 그겁니다.”
김순진 사장은 지금 세계 진출을 다지고 있다. 놀부는 90년대 초부터 말레이시아 등지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올해 말부터 중국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세계화를 준비하고 있다. 해외 유수 브랜드의 각축장이 된 국내 외식시장에서 그들과 경쟁을 벌이고 국내 시장을 지켜내는 것도 의미롭지만, 이제는 보다 큰 좀더 큰 파이를 찾아 나설 때라는 것이다. ‘문화사업가’를 자처하는 김사장은 그것을 ‘음식문화전쟁’이라 부르면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메뉴의 개발 여지에 따라 무한 성장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라고 했다.

지난 9월 27일, 김순진 사장은 ‘21세기 여성 CEO 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21세기 여성 CEO 연합’은 여성 경영인들의 정보 교류와 역할 증대를 위해 창립된 단체. 김사장은 앞으로 이 단체의 활동에 주목해달라고 했다.
“여성의 감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앞으로 여성 경영자들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커지고 활동 영역 또한 넓어질 것입니다. ‘21세기 여성 CEO 연합’은 교육과 연수 등 여성 경영자들이 경영지식을 교류, 공유하고 그것을 일선 경영 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겁니다.”

글 연용호 편집국장 사진 홍덕선 사진팀장
月刊<창업&프랜차이즈> 편집국 www.biz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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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의 귀재 김서기, 축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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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말이... 어릴때 무일푼으로 버스에서 물건을 파는 일부터 시작해서 부산의 명물 영타운을 만들고,
건물주인의 욕심으로 영타운을 접고 서울에 올라와서 허름한 주택가에 호프집을 만들어서 6개월만에 성공 시키고, 본격적으로 체인점사업에 뛰어든 김서기 사장...
중간에 실패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이런 저런 시련이 많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고통은 더 좋은 현실을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인드오 다시 재기하는 그의 삶의 태도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쪼끼쪼끼 돌풍 일으킨 '부산촌놈'
사업 2년 6개월만에 330호점 개설, 아이디어, 도전정신으로 성공
지금으로부터 12년전, 부산 번화가인 서면 1번가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 주인과 김서기 (주)태창가족 사장 (44, 당시 무직)이 마주앉았다.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 주시오, 생맥주집을 차려 부근 땅값을 올려놓겠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한마디로 잘라 거절한 건물주인이 한달쯤 뒤 사람을 보냈다. '지하 1층을 빌려줄테니 한번 해봐라, 서너달 하는 걸 봐서 잘되면 지상4개층도 임대해 주겠다'는 전갈이었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무대로 고기상자 납품업에 손을 댔다가 가진 돈을 거의 날린 김사장 압장에서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생맥주집 '영타운'은 엄청난 판매량으로 부산지역 맥주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하루 2만cc짜리 50통을 꾸준히 팔아 월 3,000만원 정도의 순익을 남겼을 정도로 성공했다.
"별다른 요리기술이 없어 맥주사업에 손을 댔고 '무료 임대 제안'도 사업 실패뒤 사업자금이 없어 제안했다"는 김사장은 99년 6월 서울로 올라왔다. 기왕에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큰물'에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쪼끼 쪼끼 생맥주' 프랜차이즈 사업은 대박을 터뜨렸다. 가맹점 확장을 본격 개시한 2000년 6월이후 1년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330호점을 개설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단순히 양적으로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김사장은 "가맹점 한달 평균순익이 700만~1,000만원대"라고 밝혔다. 가맹점 성공률도 80~90%를 자랑한다.



김사장은 스스로 '부산촌놈'이라고 말할 정도로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서울에 올라온 99년은 아직 IMF의 쇼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쪼끼쪼끼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뭘까.
부산 '영타운'에서 성공했던 것처럼 쪼끼쪼끼 사업도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의이런 정신은 몸에 배어있다. 가령 골목길을 찾아다닐때도 같은 길을 두 번 가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가끔 내의를 뒤집어 입고 다닌다. "똑같은 걸 반복해서는 새로운 것을 찾을수 없다"는 것이 그가 직원들에거 늘 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보통 맥주전문점의 A급 입지는 직장인들이 많은 사무실 밀집지역이나 대학가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사각지대로 알려진 주택가를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경쟁 체인점들의 매장 크기는 최소한 50평을 넘었지만 20평 규모의 소형 점포를 고집한 것도 같은 경우다.

당시 생맥주 납품업체 관계자들은 "불황엔 목 좋은 곳에서도 힘들어 하는데 주택가 골목길이라니..." 라며 혀를 끌끌 찼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한번 지켜봐 주십시오"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속으론 자신감이 넘쳤단다.
"주변에선 반대했지만 저는 '신대륙'을 발견한 겁니다. 아무도 넘보지 않는 땅에 제가 먼저 깃발을 꽂았다고 할까요, 가령 부부가 저녁에 맥주 한잔 하려고 집을 나섰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다 치킨냄새가 진동하는 동네 맥주집에서 분위기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시끌벅적한 대학가나 시내중심지로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깔끔한 인테리어에 환한 조명,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손님은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적중한 것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생맥주 납품업체에 "일단 5개점포를 연뒤 상황을 지켜보자"고 제안하고 99년 12월 서울 성내동에 1호점을 열었다.
1호점은 유동인구가 적어 2년째 비어있는 최악의 입지였다. 나름의 전략적 고려와 오기기 섞인 선택이었다. 1호점에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였다.
1호점에서 그는 '영타운'의 성공 때처럼 갖가지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우선 가족이 함께 찾을 수 있도록 건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흰색벽과 밝은 조명, 사진액자등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지중해풍의 인테리어를 추구했다.



맥주의 맛을 높이기 위해 맥주통 관의 내부를 씻어내는 살균세척기를 도입하고 잔 자체도 영하 20도에서 꽁꽁얼려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있도록 했다.
그기 전략적으로 사활을 걸었던 1호점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시내 중심가의 업소에서나 가능하다는 하루 5통의 판매량을 거뜬히 해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맥주맛도 만들어냈다.

커피 생맥주, 오미자생맥주,그린생맥주, 한방생맥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신개념의 맥주는 가족단위의 고객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별히 매체광고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쪼끼쪼끼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10여개의 유사상호 브랜드가 버젓이 신문에 광고를 내며 영업을 할 정도로 쪼끼쪼끼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가맹점은 늘리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 짧은 기간에 가맹점을 100~200개로 늘렸다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적지 않았다. 김사장은 요즘 "가맹점주들이 따라와주지 않을때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당연히 가맹점 확대보다 '유지 및 관리'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수성전략은 한마디로 "폐점할 곳은 과감하게 폐점한다."는 것.
"프랜차이즈 사업은 무엇보다 통일성이 중요합니다. 가령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동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점주가 개별적으로 행동할 경우 경고장을 보내는 동시에 재교육을 하고, 그래도 안 따라오면 폐점을 시키는 것이 다른 가맹점을 살리는 길이라고 봅니다."
사업실패로 인해 빈털털이 신세였던 그가 10년만에 프랜차이즈 업계의 입지전적인물로 자리매김했지만 "아직 꿈이 많다."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그 꿈이란 (주)태창가족을 국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전문기업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간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일류기업으로 발전하는 것" 이 목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별도의 전담팀을 두고 새로 진출할 업종을 모색하고 있는 김사장은 "고객의 요구에서부터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 며 "조만간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슬쩍 물었더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자만이 성공이든 실패든 답을 얻을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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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사 작가 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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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예전에 MBC 성공시대에나온 이외수씨편을 보면서 끄적여 놓은 메모를 보고 생각나서 메모를 옮긴다.

삶의 구심점 확립
하루 1끼
강한 정신, 강한 의지력
정직
유혹과의 단절
일을 안하면 먹지도 않는다는 다짐
철저한 자기통제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
나를 낮춰라
재능의 천재가 아닌 노력의 천재
함부로 하지마라
머리보다 가슴을 적시는 삶의 낮은 자세


적어 놓은 메모를 보니까... 예전에 보았던 그대로 회상이 된다...
(인터넷에 동영상도 있어서 링크)

생긴것을 봐서는 대충 막 살것만 같은 이외수씨...
그 당시 성공시대를 보았을때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 봤는데,
정말 기인, 초인이라는게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었다.
위에 메모를 해 놓은것만 봐도 대략 알수 있다.
돈이 없어서 라면한개를 가지고 1주일에 걸쳐서 나누어서 먹고,
나중에 소설을 쓸때는 집에다가 감옥을 만들어서 하루에 한끼 혹은 글이 안써지만 한끼도 안먹으면서 소설을 집필하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미치지 않고서야, 저정도의 위치에 올라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암튼 나태해지는 요즘 나에게 다시 각성을 느끼게 하는 메모를 보면서.. 다시 한번 반성 도 반성을 해본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성공을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이다. MBC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나왔던 인물 중 반이 나중에 실패한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는 대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실패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한다.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 교수]


■ 6가지 주제로 풀어본 이외수의 문학세계

노숙자, 정신병자, 자살하는 사람, 방화범, 연쇄살인범. 세속적인
잣대로는 인생막장의 비틀린 인간들이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어떤
이에게 그의 소설은 '슬픔과 허무, 고통지옥으로 이끄는 우울한
소설'이며 어떤 이에게는 '진짜 현실을 그리고 있는 가장 투 명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비정상' '악' '기인' '초생세계' '우화' 그리고
'통속'논쟁까지...... 이외수의 문학세계를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여섯
가지 주제로 풀어보았다.


■ 이외수는 기인인가?

긴머리와 깡마른 몸. 정신세계에 대한 천착으로 세간에서 그는
'기인'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외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누구보다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 열린 사람. 심지가 가장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한
다. 이외수는 춘천에 그와 평범한 사람을 위한 성채를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격외선당. 격식없이 노니는 신선의 집이라는 뜻이다. 집필
중일 때를 제외하면 이외수는 그를 찾은 사람과 말을 나누고 사모님은
따 뜻한 밥상을 차려주신다. 한마디로 그의 성채는 만인에게 열려있다.
조정래, 한승수 의장이 이곳을 찾았 고 전유성, 박범신, 이남이, 임지훈
등이 단골손님이며 천상병, 중광 스님의 자취도 남아있다. 하지만 진 짜
단골손님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보통사람들이다. 만인에게 열려있고
만인이 즐길 수 있는 곳 격외 선당에서 사람을 좋아하는 소박한 작가
이외수와 그를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그를 찾은 평범한 사람들 을
만나보았다.


■ 또 하나의 李外秀, 우화

정통소설을 쓰는 보통작가와는 달리 그는 쉬운 글을 많이 쓴다.
시화집, 산문집을 비롯하여 <싸부님, 사부님> <껄껄>
<외뿔>등 그의 우화집이 그것이다. 소설과 달리 그것들은 재기
넘치고 쉽고 따뜻하다. 또 다른 李外秀를 만날 수 있는 그의 우화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다.


■ 이외수는? "책 두 권 쓰고 나왔더니 십년이 지났습디다."

1946년생. 키 165cm. 45kg, 육군병장 만기제대, 춘천교대 중퇴, 강원도
인제 남초등학교 객골분교 소사로 근무, 젊은 시절 다리 밑에서 생활한
적도 있으며 일년에 머리를 평균 세 번 감고, <벽오금학도>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방문에 철문을 달고 4년을 두문불출한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젓가락을 던져 철판을 뚫는 특별한 장기를 가지고
있고, 유체이탈을 경험했다는 그는 일반인에게 특이한 사람
<기인>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외수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내고 있는 전업작가이다. '선혈로
쓴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이외수의 한마디 "내가
벽오금학도를 쓰느라고 방문에 철창 달고 4년을 있었습니다. 그 다음
황금비늘도 그렇고, 책 두권 쓰고 방문 열고 나왔더니 십년이 지
났습디다."


■ 이외수의 작품 ? - 30년 전업작가인생. 단행본만 스무 권이
넘습니다.

중편 <훈장> 1975, 단편 <꽃과 사냥꾼> 1976, 장편
<꿈꾸는 식물> 1978, 단편 <고수><개미귀신> 1979,
창작집 <겨울나기> 1980, 단편 <박제>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붙잡혀온 남자> 1980, 중편 <장수하늘소> 단편
<틈> <자객열전>1981, 장편 <들개>1981, 장편
<칼> 1982, <사부님 싸부님 1.2> 1983, 산문집<내
잠속에 비는 내리는데>1985, 산문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1986, 서정시집 <풀꽃 술잔 나비> 1987, <벽오금학도>
1992, <감성사전>1994, <껄껄>1996, <황금비늘1.2>
1997,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1998, <외뿔> 2001,
<괴물 1.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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