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양학자였던 그가 교통사고로 목 아래를 전혀 못쓰게 되었는데, 6개월만에 학교로 복귀를 하고 다시금 도전하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이야기에 대한 강연...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이라고 할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현명한 선택을 하셨다고 할까?
사고가 일어난것은 불행이지만, 이후 자신의 장애를 불행으로 보지 않고, 그 장애를 가지고 할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시다보니 주위의 도움으로 많은 지원을 얻게되고, 이전에는 정상인으로써 학자로써 부담감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감을 내려놓으니 진정으로 학문을 할수 있다는 생각까지...
지금의 이런 장애까지도 하늘의 계시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장애를 받아들이고, 이곳에도 길이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좋은뜻을 가지고 노력을 했더니 도움이 생기고, 기회가 생겼다고...
한마디로 궁즉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궁하면 통한다는 의미보다는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바라며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절대절명의 진리를 이상목교수에게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방송...
0.1 그램의 희망 - 강인식 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
■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 이상묵 교수
위대한 장애인보다는 뛰어난 과학자로 기억 되고 싶다는 서울대학교 지구환경 과학부 이상묵 교수!
세계 곳곳을 탐사하러 다니던 그는 2006년 미국 지질조사 도중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목 아래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목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오대양을 누비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던 나의 삶은 전동 휠체어 안에 갇히고 말았지만 늘 그래왔듯,
이 역시 나는 새로운 도전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겨낼 것이다.
" 전 세계가 주목하던 과학자가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6개월 만에 다시 강단에 서는 기적을 일으켰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뇌를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연구도 계속할 수 있고, 강단에도 다시 섰으니까요”
연구할 수 있는 뇌와 심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상묵 교수!
좌절과 포기를 모르는 그에게서 발견한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
이상묵 교수의 성공키워드 1 - 희망의 나비효과
윤태익 교수 - 희망의 나비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vs 그렇기 때문에’
이상묵 교수의 성공키워드 2 - 행운을 가져오는 기운
허은아 박사 - 판을 뒤집은 과학자, 행운을 가져오는 기운
이상묵 교수의 성공키워드 3 - 네 가지의 정
송진구 교수 - 위기 극복의 비밀, 뇌 근육을 단련시켜라!
0.1 그램의 희망 - 강인식 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
이상묵 서울대 교수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는 어깨 아래를 전혀 쓸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이상묵 교수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은 2003년 12월이었다. 이상묵 교수가 사고를 당한 것은 2006년 7월 2일이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진행한 야외 지질연구의 마지막 코스였던 데스밸리(Death Valley)로 향하던 중 사막 한가운데에서 차가 전복된다.
이 사고로 이상묵 교수는 네 번째 척추가 완전 손상되어 전신이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고를 당한 지 6개월 만인 2007년 1월 2일에 학교로 복귀한다. 이상묵 교수는 장애를 인정하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고 말한다.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팔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만 집착했다면, 그는 학교에 복귀할 수도, 과학자로서의 삶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육체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지은이는 이 책이 장애인을 위한 실질적인 정보를 줄 수 있는 책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많은 장애인들이 세상 속으로 돌아올 용기를 낼 것이라는 믿음을 다지고 있다.
이상묵 - 2008년 현재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69년 해외근무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강중학교와 성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진학한 뒤, 어릴 적부터 꿈꾸어 온 해양학자가 되기 위해 해양지질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6년 국비유학생 시험을 통과하는 동시에 MIT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듬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MIT-우즈홀 공동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우즈홀의 연구원과 영국 더램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세계적인 학자들과 함께 연구 및 탐사 활동을 펼쳤다.
1998년 국내 연구기관장의 강력한 권유로 당시 전 지구적 대양연구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들어와 한국해양연구원 선임 및 책임연구원을 지내면서 한국 해양학의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첨단 해양탐사선 온누리호의 수석과학자로서 대양연구를 진두지휘하며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고, 과학 외교에도 앞장섰다. 1년에 평균 3개월 이상을 바다에서 지내며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03년 새로운 길을 찾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도전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라는 생각으로 교육에 힘썼다.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과 공동으로 진행한 미국 야외지질조사 프로젝트 역시 학생들에게 과학자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그가 추진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 연구조사 과정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목 아랫부분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가 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고 후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하면서 또 다시 어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기적을 이룬다.
비록 전동휠체어에 갇혔지만 자신의 세계가 조금도 좁아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교수로서, 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장애인의 재활과 독립을 돕는 여러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