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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bs 한국사傳 - 아버지의 눈물, 영조
  2. 한국사傳 -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3. 그것이 알고 싶다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4. 한국사傳 - 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5. 한국사傳 - 조선의 여성 CEO 김만덕
  6. KBS 한국사傳 - 무인(武人) 정조대왕
  7. 한국사傳 -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kbs 한국사傳 - 아버지의 눈물,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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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이산을 재미있게 보면서 사도세자가 왜 죽었는지... 이산의 배경인 영정조시대의 시대사는 어땠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방송이 있어서 보았다.
영조는 궁의 청소를 하는 나인이 어머니여서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고, 그런 상황에서 정말 부지런히 배우고, 근면하게 살아온 정조... 물론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에 올랐지만.. 요즘으로 따지지면 정말 자수성가한 성공 사업가와 같은 영조...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 얻은 사도세자... 그에대한 큰 기대와 조기교육...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두려워하고, 지지세력이 소론이여서 노론과 크게 부딪쳐서 결국에는 간신들의 이간질에 결국에는 자결을 강요받지만 그렇지 못하고 뒤주에 갖쳐서 죽어간 사도세자의 이야기...
서로간의 대화단절로 더욱더 멀어져간 그들... 예전의 이야기이고 극단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크게 다를바가 없어보이는 가슴 아픈 이야기...



[제6회]아버지의 눈물, 영 조



▣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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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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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딸과 사위가 백제에 죽임을 당하자..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신라 김춘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든든한 배후세력이자 동지를 얻고, 뛰어난 외교술로 당나라에게서 12만대군을 얻어서 결국에는 백제를 멸망시키지만, 당나라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고구려의 멸망후에 그 넓은 땅을 빼았겨서 현새에서 욕을 먹지만... 과연 그당시 상황에서 조국의 먼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제15회]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



▣2007. 9. 29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영두 PD
▣작가 : 윤영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한 신라.

그 중심에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있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평생을 바친 치밀한 외교지략가 김춘추!


20여년에 걸친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드디어… 나당동맹으로 달성한 백제 멸망


김춘추는 백제를 멸하고 신라를 지킨 영웅인가?

아니면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시대의 풍운아! 탁월한 외교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구전동화‘토끼전’의 기원 - 김춘추의 탈출기!

구전동화로 잘 알려진 토끼전(별주부전). 이 이야기는 바로 김춘추의 고구려 탈출기에서 비롯되었다.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김춘추는 신라 땅의 일부를 주면 군사를 내주겠다는 고구려 왕의 요구를 거부해 옥에 갇히고 만다. 그때 고구려의 신하인 선도해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꾀를 내어 무사히 빠져나오는데, 바로 이 이야기가 ‘토끼전’이다. 토끼전은 거북에게 속아 용왕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빠진 토끼가 간을 육지에 꺼내놓고 왔다고 속여 무사히 탈출했다는 설화로,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기록되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 김춘추와 김유신

우연을 가장한 계책을 써서 자신의 여동생과 김춘추를 결혼시킨 김유신.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의 신귀족 세력을 형성하며 굳건한 관계를 형성한다.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김유신은 8명의 백제 장군을 포로로 사로잡아 두 명의 유골과 맞교환한다.또한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고구려 외교길에 떠났을 때,

김유신은 신라에 군사조직 ‘별동대’를 준비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고구려 감옥에 갇혀있던 김춘추는 자신의 지혜와 김유신의 군사력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실질적인 신라의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군사력은 훗날 김춘추가 정권을 잡고 개혁을 펼치는 밑거름이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수어지교, 즉 물과 고기의 사귐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김춘추의 첫 번째 위기 : 대야성 패전

딸과 사위의 죽음 … 참혹한 대야성 전투의 기억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한다. 신라 죽죽의 장렬한 전사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대야성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원인은 바로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품석. 그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백제에 항복해, 부인인 ‘고타소’와 함께 참혹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김춘추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김춘추는 온종일 기둥에 기대어 선 채로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춘추에게 닥친 더 큰 위기는 바로 사위인 품석의 행동이었다. 화랑도 정신인 임전무퇴를 저버린 사위의 항복으로 인해 대야성 패전의 책임과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진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 김춘추는 결단을 내린다.


▶김춘추의 두 번째 위기 : 목숨을 건 외교길

목숨을 건 고구려 외교 - 풍전등화의 신라를 위해 앞장서다

고구려가 요구한 ‘마목현과 죽령’ 북쪽 지역

<일본 서기>에 기록된 김춘추

정치적 위기의 극복과 국가의 원수인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선택! 바로 신라의 또 다른 적국인 고구려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로 김춘   추의 고구려 행은 목숨을 건 위험한 외교활동 이었다. 고구려 군사를 빌려 백제를 치려던 김춘추. 그러나 신라땅의 일부를 주면 군사를 내주겠다는 고구려의 입장과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고구려 왕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고구려의 신하 선도해의 지혜로 무사히 빠져나온 김춘추는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고도 신라를 위한 외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왜(일본)로 건너가 신라와 왜의 동맹을 성사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왜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잇따른 두 번의 외교 실패. 풍전등화의 신라를 김춘추는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고도의 외교전략, 김춘추의 나당동맹

외교지략가 김춘추, 나당동맹을 성사시키다!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과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는 백제. 김춘추는 백제 제압을 위해 대당외교에 나선다. 당나라 군사를 요청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당나라를 찾은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계속된 패전으로 신라와의 연합을 원했던 당나라. 그러나 김춘추는 이런 당나라 사정을 이용해 치밀하고 전략적인 외교 전술을 펼친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당 태종을 설득한 김춘추. 드디어 648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동맹’이 맺어진다. 이는 당시로서 파격적인 김춘추 외교의 승리였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정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당나라와의 굳건한 동맹을 바탕으로 한 김춘추의 정치력과 김유신의 군사력은 강력한 신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

평생을 건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드디어 백제가 멸망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통해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으로 즉위한다. 660년. 드디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숙원이 풀리는 날이 찾아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목숨을 다해 싸웠지만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20여년에 걸친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고구려, 왜, 당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펼치고, 신라의 왕으로 등극해 끝내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 김춘추. 외세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 정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치밀한 외교로 돌파한 김춘추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일생을 바친 탁월한 외교가이자 왕위에 오른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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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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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홀리데이라는 호주 비자가 있는데, 영어도 배우면서 일을 할수 있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목표를 제대로 정하고 잘 활용하면 득이되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막연하게 영어 공부도 하고 돈도 번다는 환상으로 그곳에 갔다가 시간과 돈만 낭비를 하게되고, 심지어는 윤략이나 마약쪽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
역시 세상은 어디가서나 마찬가지인듯... 정신바짝차리고, 꿈과 목표를 바르게 세워야 할것이다.


방영일 : 2008-02-23

○ 제 목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 방송일시 : 2008년 2월 23일 (토) 밤 11시 5분
○ 연 출 : 이 동 협 / 작 가 : 신 진 주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 말 그대로 ‘일하면서 즐기는 휴가’란 뜻을 가진 이 비자는 국가 간 협약을 통해 상대 국가의 청년층에게 학업, 노동과 더불어 여행의 기회를 줌으로써 양국의 우호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특별 비자 프로그램이다. 특히 호주의 경우 뉴질랜드나, 캐나다, 일본 등에 비해 비자 발급이 쉽고 빠르며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경제적 여건을 이유로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를 망설이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직접 워킹 홀리데이를 체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말은 상상과 달랐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이하 워홀러)들을 이용하여 임금 체불을 일삼는 악덕 업주와 미숙련 노동자로서 입어야 했던 산업재해 피해, 수시로 찾아드는 카지노의 유혹까지, 제작진에게 전화를 걸어온 제보자들은 호주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이 너무 아깝고 후회스러웠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잃어버린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의 현주소를 호주 현지 취재를 통해 집중 조명해 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 원정 성매매 실태

2007년에만 두 차례, 호주 원정 성매매 여성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었다. 학원 강사, 대학생등 유흥업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평범한 여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구인 정보를 얻어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로 출국, 성매매 업소에서 일했노라고 진술했다. 제작진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국내 알선책들과의 접촉을 시도, 호주로 여성들을 보내는 중간 브로커들을 직접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을 부추기며 “눈 딱 감고 6개월만 참으면 1억을 벌 수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가는 대학생들이 많으니 걱정 말라.”는 식의 감언이설로 여성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또한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이니 합법적으로 성매매를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경험자의 이야기는 달랐다. 세컨드 비자(체류기간이 1년 더 연장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주겠노라는 업소 측의 이야기만 믿고 2만 불을 먼저 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돈만 고스란히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혜민 씨(가명). 그녀는 한인업주가 운영했던 호주 멜버른 지역의 한 업소가 여성들의 여권을 뺏고 폭행과 착취를 일삼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성매매 업소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며, 사건이 일어나도 피해를 호소할 곳이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러한 사실은 간과한 채, 해외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로 몰려들고 있다.


수수료만 200만원, 고액 호텔 인턴쉽의 비밀

취업을 위한 더 나은 경력과 경험을 얻고자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국내 호텔 인턴쉽 업체들을 통해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출국을 결심한다. 대부분의 업체들은 하우스 키핑, 식음료, 프론트 데스크 업무 등 호주 현지 호텔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직무에 대해 거론하며 현지인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며 영어실력과 경력을 확실하게 쌓을 수 있는 기회인 것처럼 호텔 인턴쉽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그러나 실제로 호주에 도착한 한국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대부분 하우스 키핑, 즉 청소나 세탁 업무이다. 그마저도 한국인들끼리 한조가 되어 일을 하기 때문에 영어를 써볼 기회가 많지 않다. 이러한 허드렛일을 소개해주면서 ‘잡 매칭(job matching, 직업소개)’ 비용으로 대행업체에서 요구하는 금액은 대략 200만 원. 호주 현지의 구인, 구직 정보란을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일자리들을 호텔 인턴쉽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워킹 홀리데이를 위한 제언

작년 한해 한국인들의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발급 건수는 세계 2위.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소비의 주체로서도 호주 경제에 기여하는 워홀러들 중 상당수는 유학이나 이민을 통해 호주로 재유입 되며 한국교민 사회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호주 정부와 한인 사회 양측에 워홀러들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워킹 홀리데이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 본래의 긍정적 목적을 실현해 가며 서로 win-win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워킹 홀리데이로 보낸 시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주변에서도 인정받았던 워홀러들의 경험을 통해 성공적인 워킹 홀리데이를 위한 비결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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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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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시도했다가 실패한후에 일본에 망명을 하고, 자꾸만 조선의 심기를 건드리자 그를 암살을 했는데... 수구파가 아닌..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 홍종우라고...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사람... 그러다가 생각이 든것이 바로 소설 리진에서 리진에게 찍접대고, 간접적으로 리진을 비극과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놈... 물론 실제와는 다르겠지만, 그가 프랑스에서 하고다닌 행동들은 소설 리진에서와 많이 중복된다 특히 춘향전이나 심청천을 번역하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고, 왕의 초상을 가지고 다니던 모습 등등...
암튼 김옥균은 왕정을 폐지하고, 개혁을 외치던 사람이고, 홍종우는 왕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자는 사람...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목표를 향해서 달리던 두사람.. 절대로 함께 갈수는 없었던 걸까?

[제9회]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방송 : 2007. 8. 1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PD

▣작가 : 지현주

 

1894년, 중국 상하이에 울린 세 발의 총성!
갑신정변을 주도한 조선의 대표적인 개화파 김옥균이 한 호텔 방에서 암살된다.
범인은 홍종우!
일순간 수구파의 암살자로 낙인찍힌 홍종우.
그러나 그는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주장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왜 홍종우는 김옥균을 죽인 것일까?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
한국사 傳에서 그 전모를 추적한다!





▶ 1894년 3월 28일
세계열강의 이목을 끈 한 사건이 중국 상하이에서 발생한다.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한국사 傳 제작진이 한국-일본-중국-프랑스에 걸친 4개국의 밀착 취재를 통해
당시 역사를 파헤친다!

▶ 홍종우가 최초로 번역한 춘향전, 미하일 포킨의 발레극으로 부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그는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해 ‘향기로운 봄’이란 제목의 책 으로 출판했다. 러시아 안무가의 거장 미하일 포킨은 ‘향기 로운 봄’을 원작으로 ‘사랑의 시련’이란 발레극을 제작했는 데, ‘사랑의 시련’은 현재까지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 연되고 있다.


▶ 김옥균의 일본 망명생활 10년에 대한 증언
김옥균은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진다. 그 중 한명인 도야마 미치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시해한 조직인 ‘겐요사’를 만들어 정계를 장악한 인물. 한국사 傳 제작진이 도야마 미치루의 손자를 만나, 당시 정 황과 관련 사진을 취재했다.


▶ 김옥균의 유작인 한시, 최초 공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그가 죽기 전, 일본에 남긴 한시에는 정치를 벗어난 인간 김옥균으로서의 감정과 생각이 담겨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최초로 김옥균의 유작을 공개한다!

 

 

홍종우가 쏜 세 발의 탄환, 김옥균을 관통하다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의 뚱허양행 호텔. 김옥균은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미리 마차를 빌려놓고 호텔 방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들어온 홍종우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다. 세 발의 탄환은 얼굴과 가슴, 어깨를 관통 했고,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범인으로 붙잡힌 홍종우. 그러나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김옥균은 우리나라의 재상으로 대역부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백 명을 죽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으로 도피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김옥균을 죽여 왕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 것이다.”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죽였을까?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다’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명성을 얻는다. 이런 김옥균의 행동은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개혁시키려 한다는 모의설로 발전돼 朝野新聞에 보도되고, 이는 조선 조정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때문에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은 조선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홍종우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김옥균의 시신은 양화진에서 처참하게 육시돼 홍종우가 직접 쓴 ‘대역부도옥균’이란 글씨와 함께 백사장에 전시되었다.


마흔 한 살.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김옥균 암살 4년 전인 1890년. 홍종우는 마흔 하나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홍종우는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를 쌓고 귀족 모임 에 초대 받는 등 파리의 지식인들을 통해 서구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파리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홍종우의 사진과 명함, 근로계약서 등은 박물관에서 2년 동안 일한 홍종우의 흔적을 말해준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조선을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최 초의 프랑스 번역 소설인 춘향전은 홍종우의 번역으로 출판됐고, 이는 러시아 안무가 미하일 포킨에 의해 ‘사랑의 시련’이란 발레극으로 올려진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프랑스에서의 홍종우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갔다.


홍종우와 김옥균, 두 사람의 엇갈린 평가


홍종우는 고종에게 조선이 황제를 중심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종우는 황제권을 절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간행해 실제 업무에 적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홍종우의 노력과 달리 조선의 운명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우호적이었던 김옥균을 위인으로 세우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를 테러리스트로 매장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이 상실된 지 3년 후인 1913년, 홍종우는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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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조선의 여성 CEO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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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기생이였던 여자가 양인의 신분을 다시 얻고, 제주도의 특산물을 활용해서 커다란 부를 얻고,
제주도에 정조시절에 큰 기근이 일자 전재산을 털어서 제주도 사람을 먹여 살리고,
그 공으로 뭍으로 나와서 정조를 만나고, 금강산 유람을 했다는 이야기...
그녀의 대한 내용보다는 어려운 시대의 시대상황과 제주도의 색다른 모습등을 알수 있었던 방송...







[제7회]조선의 여성CEO
김만덕



▣방송 : 2007. 7. 2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영두PD
▣작가 : 박민경

 


재색을 겸비한 기생에서 제주도 최고의 거상까지,
조선의 상권을 뒤흔든 여인, 김만덕
그가 18세기 말, 제주도 최악의 흉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하다!
시대를 앞서 상도를 실천한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펼쳐진다
 

정조 20년, 1796년 병진년 가을. 한 여인이 임금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제주도의 상인, 김만덕. 일개 평민여성이 직접 왕을 알현하는 일은 조선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제주를 덮친 최악의 흉년, 그리고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


정조 19년. 제주목사 이우현은 초조하게 진휼곡을 실은 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악의 흉년으로 만 여명의 백성이 굶어 죽은 제주도의 실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처참했다. 제주도는 농토가 척박하고 경지면적이 적은데다가 마침 제 주를 강타한 태풍 때문에 수확을 앞둔 곡식은 짠 바닷물에 모조리 말라 죽고 말았다. 관의 허락 없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백성들은 시체를 파먹거나 자식을 내버리는 등 극 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진휼곡을 싣고 제주도 로 오던 12척의 배 중 5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되고 만다.

패닉상태에 빠진 제주도!
그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이 수천석의 쌀가마니를 내놓는다!

미모의 기생에서 제주도 최고의 거상으로…
굶주린 백성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친 여인, 김만덕!
그녀는 어떻게 흉년을 구제할 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양인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를 여읜 후 기생이 된 만덕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천민이란 신분의 벽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싶은 만덕의 꿈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과감히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를 버리고 관에 읍소해 양인 신분을 되찾는다. 김만덕이 객주를 차린 건입 포구 만덕은 제주목 관아 옆 건입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육지 상인들과 거래를 시작한다. 기생시절의 경험으로 특정 상 품의 수요를 잘 알았던 만덕은 제주도의 특산물과 육지 상품의 매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조선의 상권을 거머쥐다! 여성 CEO 김만덕

제주도의 특산물인 미역, 말총, 양태 등은 육지와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당시 미역은 일부 바다와 제주도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따르면 조선백성의 절반이 제주도 미역을 먹었을 정도로 미역의 수요가 높았다. 말의 꼬리와 갈기털로 만드는 말총과 갓의 재료인 양태 또한 제주도의 독점적인 특산품으로 전국적인 수요가 대단했다.

만덕은 미역, 말총, 양태 등과 같은 제주도의 특산물을 판매하고 육지의 쌀과 소금 등생필품을 구매하여 상품 간 시세 차익을 통해 큰 이익을 얻는다.

중개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만덕은 육지와 직거래 를 시작한 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로보다 배를 통한 선 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육지와의 교역이 활기를 띄게 된다. 지역에 따라 가격차이가 조선의 취약한 물류시스템을 잘 알 고 있던 만덕은 강진, 강경 등지까지 직접 배로 물건을 공급 하면서 큰 이익을 얻는다.


만덕의 평생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제주도 백성을 살린 김만덕. 그녀의 선행을 알게 된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묻는다. 김만덕의 소원은 한양에 가 왕을 만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 김만덕은 왜 이런 소원을 말한 것일까?


당시 조선은 제주 여인이 육지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할 정도로 제주도민의 섬 밖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러 나 만덕은 국법을 깨고 육지로 나와 평민여성 최초로 정조를 알현한 후 금강산을 유람한다. 시대를 앞서 계급과 성 역할을 뛰어넘은 김만덕. 그녀의 의기와 선행은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 시와 문장으로 전해진다.


귤 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
                                                                                   -박제가-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였으니 온 천하의 수많은 사내들 중에서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을까.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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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傳 - 무인(武人)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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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이후.. 정말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노론들.. 영조가 정조에게 왕을 물려준다고 할때... 못하게 막느랴고 승지가 글을 쓰는것을 막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런 시련속에 왕에 오른 정조... 하지만 군대권은 거의 노론이 장악하고, 거의 사병과 같은 수준...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어서 점점 키워가면서 그 세력을 키운다...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때 옆에서 음식을 가지고 약을 올리는 자들이 조정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보고만 있었던 그... 그가 드디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고 했다고.. 그리고 한달뒤에 죽었다고 한다... 그냥 딱 생각이 든것이.. 암살 혹은 독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정말 취임식때 했었다고 하는데.. 방송에서도 그냥 대충만든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꽤 많이 반영을 한듯하다.
암튼 그때나 지금이나 붕당정치로 중요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더욱 피폐해져가는 나라꼴이 그저 가슴아플뿐이다...
뭔가 시원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은 없는것인지...
조선은 바로 이뒤를 시작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으니... 오늘 이명박대통령의 취임식인데.. 잘했으면 한다...


[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정조의 어진

                                                       

             개혁군주 武人 정조대왕


어진을 그릴 때 정조는 군복을 입고 세번의 어진을 그렸는데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는게 없고

지금 어진은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이다.

그래서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4,000여 권의 책을 만든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식을 지녔던 정조는 성리학, 문학, 과학, 의학에 이르기 까지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규장각 문신들을 가르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이유로 성군으로 온화하게 그리다 보니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다.


         

                                                 KBS 한국사 "무인 정조대왕"에서 캡쳐

                            선원보략(조선시대 구황실 족보)에 나오는 정조의 무섭게 생긴 모습이다.



           

                                                   원손 시절(8세)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

            숙모님 앞
          상풍(商風, 가을 바람)에 기후(氣候)가 평안(平安)하신지 (숙모님의) 문안(問安)을 알기를 바라며

          (숙모님을) 뵈온 지가 오래되오니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봉서(封書,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정조가 12세에 쓴 글


           "진선폐사위지경"은 맹자에 나오는 글귀로

           왕에게 좋은 것은 권하고 나쁜 것은 막아주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면서 당시 신하들을 의미심장하게 꼬집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포도대장 구선복이 뒤주에 8일을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조롱하고 있다. (캡쳐화면)

                       이산은 이 장면을 몰래 숨어서 보았다.


"존현각 일기(세손 때 일기)"에 뒤주에 갇혀서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힘없어 어찌 할 수없는 자신을 한스러워 하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1775년11월 영조51년, 영조가 82세 되던 해에

모든 신하들 앞에서 세손 이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고 하교를 내리는데 노론의 홍인한은 승지의 기록도 찢어버리고 승지가 듣지도 못하게하는 횡포를 부린다.

존엄한 왕명도 거부하는 냉엄한 현실을 이산은 일찍부터 경험한다.


                         

                                                 명의록  '존현각일기'가 기록된 책


         ★ 존현각 일기

*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하여 알게하기 위해서다.

* 임금을 만날때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끄는 소리를 탁탁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는  

   뜻이 없었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 사관이 기록을 못하는 지경이었다.

   홍인한의 권세가 나라보다 더 대단했다.


                  


노론의 생각은 "죄인지자 불위군왕 -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 없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면 옛날의 연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어떻게든 세손 이산을 막아야 겠다고 다 같이 뜻을 모으는 것이었다.


1776년 3월 10일 많은 신하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이산은 왕위에 오른다.

왕이된 이산의 일성은


     寡人, 思悼世子之 子也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초, 자객이 3번에 걸쳐 궁궐을 침입했는데 정조의 침실까지 온 적도 있었다.

역모와 도둑도 들었다.


구선복으로 말하면 손으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먹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떨리고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정조실록-

하지만 그가 병권을 쥐고 이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


정조는 노론의 나라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장용영고사


           

                                                   무예를 기르치는 정조 (재현) KBS 캡쳐


정조는 총 37번의 무과를 치르는데,

18세기 조선의 전설적인 일당백의 무사 백동수 외 30명으로 정조의 호의 군대 "장용영" 만들어

하루에 3,000발의 활을 쏘게하고 사도세자가 완성한 십팔기로 무장케 한다.

그 때까지의 군대는 권문세가가 거느린 가병이었다.

군대가 임금의 손을 떠나 사병화되어 있어 유사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군대여서

가병(家兵)의 폐단과 다문(多門)을 염려하였다.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기와 마상무예 6기를 합하여 집대성한 책이다.


                                     목판본. 4권 4책. 규장각 도서.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에게 명령하여

                                                  업하게 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1598년(선조 31)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와

                 1759년(영조 35) 간행된 《무예신보()》의 내용을 합하고 새로운 훈련종목을 더한 후

                                                      이용에 편리한 체제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영은 18,000명으로 늘려 나가며 10년을 넘게 군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무인군주가 되었다.

어사고풍첩(정조의 활쏘기 기록)에 정조는 활의천재 신궁이였다.

145m의 표적을 5발을 1순으로 10순 그러니까 50발을 쏘아 50발을 다 맞췄다.

표적이 너무 커  작은 부채,곤봉,편곤에 쏘는데도 작은 부채는 5발쏘아 4발, 곤봉에10발쏘아

10발을 다 맞췄다고 한다.

요즘 국궁 선수들은 50발을 다 맞추는 경우가 1년에 한번쯤 나오고 선수 개인으로 보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라 한다.

특히 진법에 관심이 많아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편찬해서 규장각 학자 정약용,이덕무 등도 진법을 익혔다.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군권을 장악한 정조는 평생 숙원사업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명당 "현륭원"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죽게한 심환지,김종수,이병모 등 노론대신들을 묘앞에 세우고 정조는 오열하니 노론 신하들은 두려움에 떤다.

잔디와 흙을 움켜잡고 울며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실록1794)


           

                                                           정조 화성 행차도


노론은 종로 북촌에 권문세도가를 형성하여 살면서 권력만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

상권을 쥐고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곤궁케 했다.

정조 18년  수원 팔달산에 올라 수원성(6Km)을 지으라 하고 수원을 요즘의 신도시, 상업도시로

발전시켜 노론세력의 바탕을 약화 시킨다.

수원성에는 장용외영 6,000명을 상주 시키며 요새를 만든다.



          

                                                    연거도 (정조의 야간 훈련을 그린 그림)


정조19년  6,000여명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하여 전시도 아닌데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를 조련하고 호령하며 노론세력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품고있는 깊은 뜻을 펼쳐나간다.



                

                                                                   정조 어필


                            

                                                           정조필파초도


                             

                                                             정조필국화도


                                

                                                                      국화도 낙관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



           



정조 자신을 달빛에, 신하들을 구름에 비유...

임금이 백성에게 직접 온정을 베푸는 정치를 꿈꾸었다.

임금 밑에 간신배들이 끼어들어 백성을 곤궁케하고 핍박하는 정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라의 은혜을 주고싶었다.

구름이 끼지 않은 환한 달빛을 백성들에게 비춰주고 싶음을 뜻하고 있다.


* 천하동례(天下同禮) - 임금도 사대부의 하나라는 노론의 사상


도끼로 궐문 기둥을 찍고 혈서를 쓰며 노론은 반기를 든다.

 "임금이 거만하게 성인으로 여기며 신하들을 깔보고 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1800년 정조24년 5월30일


오회연교(五晦筵敎)


- 오늘의 하교는 참다 참다 나온 것.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을 것이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노론세력을 척결하겠다.


신하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한달 뒤 1800년 6월28일,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49세로 정조는 죽는다.

남인들 사이에선 독살되었다 했다.

정조,  그의 꿈은 이렇게 멈춘다.


상께서 승하하던 날 삼각산이 울고  고을에서 벼가 하얗게 죽어 버렸다. (정조실록)


임금 아래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조!

노비제를 혁파하고 서얼 차별을 없애는 등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며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개혁군주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의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국군 전통 의장대 ,정조시대의 십팔기 무술 재현




                                                                        재현사진 ;    KBS '한국사 무인정조' 캡쳐

                                                                         참조 ; 한국사傳 ' 武人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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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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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토정 이지함에 대해서 책을 본적이 있어서 익숙한듯한 이지함...
하지만 도인, 기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방송...
상당한 개혁세력인듣하고, 무엇보다 백성을 위하는 모습이 대단한듯한 모습...
마포지역이 자꾸 언급되어서 시선이 가기는 했지만.. 그다지 참신한 내용은 아닌듯한 방송...












[제12회]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



▣방송 : 2007. 9. 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박건PD
▣작가 : 정윤미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솥갓을 쓰고, 마포강가의 흙집에 산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귀인(貴人)이었다.

▶ '토정비결'의 미스터리, 왜 이지함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미래를 점치는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예견, 가솔을 이끌고 움직여 당대 최대의 정치적 무고사건인 청홍도 사건에서 살아남았으며,

"15년 후에는 이 나라에 피가 천리나 흐를 징조이다."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지함이 백성들의 세상사 고민거리를 풀어주고, 처방하기 위해 지은 책이라 알려진 <토정비결>. 그러나 <토정비결>에는 저자가 기록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풍속서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70%이상이 행운의 괘로써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
<토정비결>. 그 저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안에 토정 이지함에 관한 진실이 담겨있다.


 

기인(奇人)으로만 기억되어야 하는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을 쓰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토정'을 지은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지함은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직접 박 장사를 하여 막대한 부를 끌어 모으게 된다. 대대로 위세를 떨치던 당대 최고 사대부집안의 자손이었던 이지함.
상업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부를 버리고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에 내려간 것이다.
이지함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해주고, 축적한 곡식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 양반인 그가 장사를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빈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를 앞지른 선진적 경제사상을 발휘하다.
쉰일곱이 되던 해, 재야에서 성리학 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이지함에게 드디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선조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이다.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지함.
그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 옥 등의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을 개발, 해외에서 유통 시키자고 주장한다. 소수 지배층들이 독식하고 있는 자원을 국가가 관리해서 외국와의 통상을 통해 부를 축적하자는 것이다. 이 해외통상론은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지함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경제사상가였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토정 이지함-

백성을 가난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지함을 21세기형 복지가로 만든다.
민중들의 가난이 유난히도 가혹했던 조선 중기,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구제기관 걸인청을 설립한다.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였다.



이지함이 죽은 후
백성들을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를 세웠다.


"현감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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