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다큐, 시사 '에 해당되는 글 1100건

  1. 시사메거진 2580 - 미네르바 그는 누구일까?
  2. 박지성 - 다시뛰는 두개의 심장 (사진보기)
  3. 하얀 연기의 재앙 – 이제는 예방이다 (사진보기)
  4. 다큐 10 - 나폴레옹의 몰락 (사진보기)
  5. 람사르총회 특집 -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사진보기)
  6. 불만제로 - 자동차정비소의 바가지, 무법천지 동대문 쇼핑몰 (사진보기) 2
  7. 알파맘 VS 베타맘 당신의 선택은? (사진보기)

시사메거진 2580 - 미네르바 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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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는 누구이고, 얼마나 그의 의견이 적중했는지를 살펴본 방송...
뭐 잘맞춘다는 사람도, 신뢰가 안가고 그냥 우연히 맞았다고 하는 사람도...

김학주 삼성증권리서치센터장은 사이비교주라는 말까지 동원을 하던데...
이분은 얼마전까지 주식이 폭락하기 시작할때도 지금 주식을 살때라고 주장하던분인데...-_-;;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 9월말경 인터뷰 사진...
2008/09/24 - [방송 iN/시사 iN] - 시사메거진 2580 - 김정일 이후, 장안동에서는, 내 주식과 펀드는..?

그리고 우리는 뭐 못맞춰서 그러는줄 아냐.. 할말 다하면 다치기때문이라는 업계사람은 또 뭐야...
이럴줄 뻔히 알면서 주식을 사라고 부추겼는지...-_-;;

거기다가 오늘자 조선일보에도 미네르바가 기초적인 경제상식에도 못미치는 부분이 있고, 고장난 시계로 몇번은 맞는다는 경제관료의 이야기를 보고는 왜 그럼 당신들은 제대로 현상파악도 못하고 있는지, 아니면 뻔히 알면서 숨기고 있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http://agora.media.daum.net/profile/list?key=yzcyxX5kuoE0&group_id=1
위의 사이트가 미네르바가 글을 올린 사이트의 주소인데,
뭐 나도 그의 말이 전적으로 다 맞다거나 그가 신출귀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비판적인 의견을 무시해버리고, 그냥 마냥 걱정할것없다라고 말하고, 미네르바를 법적으로 조치를 취하느니 어쩌니 하는 발언들이 참 얼마나 우습고, 무서운 발언인지...
암튼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일이다.






1. 즐거운 인생 후반전
찰보리빵을 만드는 할머니들과 명품지팡이를 만드는 할아버지들... 환갑을 넘긴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종잣돈 5천만원으로 만들어진 회사에서 땀을 흘리며 인생 후반전을 활기차게 꾸려나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2. 엄마와 딸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꺼야.", "너 같은 딸 한 번 낳아봐라." 누구보다 애틋하면서도 미워하기도 하고.. 늙으면서는 결국 친구가 돼간다는 오묘한 관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3. ‘미네르바’, 그는 누구일까?
“한국의 주식 시장은 예언자로 인해 떨고 있다” 최근 독일의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얼굴 없는 경제논객 미네르바의 예측 때문이다. 주가 지수 오백에 부동산 값 반토막.. 미네르바의 불길한 전망은 추락하는 한국 경제와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인터넷 경제 대통령이다, 또 하나의 사이비 교주다.. 극과 극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의 미네르바, 그는 누구일까?

4. 뽀샵과 조작 사이
포토샵이 생겨나면서 사진 가공기술은 그야말로 상상이상을 뛰어넘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다는 사진이 오히려 현실을 가공하기도 한다. 얼굴은 작게, 다리는 길게.. 사진 속 모습은 실물과 너무도 다른데.. 조작과 뽀샵의 차이는 무엇인지, 사진의 힘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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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 다시뛰는 두개의 심장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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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 [독서 iN] - 멈추지 않는 도전

예전의 그의 책을 보고나서 참 대단한 선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래간만에 그에 대한 다큐를 보다보니 또 가슴이 벌렁벌렁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방송...






MBC ESPN 연말특집 EPL 박지성을 기다리며

공차는 걸 워낙 좋아했던 '미키마우스' 박지성(24)은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도 건장한 체구(175㎝ 70㎏)는 아니지만 안용중을 거쳐 수원공고에 입학할때까지도 체격은 여전히 작았다.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은 "박지성에게 1학년 때까지는 공을 가지고 노는 수준의 가벼운 훈련 정도만 시켰다"고 한다.

심한 훈련이 성장에 장애가 될까봐서였다.

이 감독은 "충분히 쉬고 많이 먹게 하려는 배려 차원에서 집에 자주 보냈더니박지성의 아버지가 '축구를 그만두게 하려는 게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왔을 정도"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이 감독은 박지성에 대해 "지능적이고 발전 속도가 빨랐다.

무엇보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나 욕심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박지성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해 동안 가장 빼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에게 주는'차범근 축구상'(5회)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고교를 졸업할 때엔 그의 왜소한 체구때문에 눈길을 주는 대학팀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던 이 감독의 추천으로 명지대에 진학했다.

현재 포천축구센터 총감독을 맡고 있는 김희태 당시 명지대 감독은 "처음에 입학했을때는 정말 유소년이나 다름없었다"며 "하지만 경기를 치를 수록 발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력이 좋고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했다"고 전했다.

박지성은 대학 1학년 때인 99년 3월,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끌고 있던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했다.

한달 전 박지성이 올림픽대표팀과의 몇 차례 연습경기에서 좋은활약을 보였고 김 감독은 허 감독에게 그의 발탁을 권했다.

처음엔 연습생 정도로 테스트를 해 보겠다던 허 감독은 결국 박지성을 정식 멤버로 발탁했다.

체구도 작고 별 특징도 없는 선수를 왜 뽑느냐는 말도 많았지만 크게 될 선수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2000년 일본 프로축구 교토 퍼플상가로 진출했다.

박지성의 기량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다.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는 등 박지성은 축구팬들에게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 그해 J2의 교토 퍼플상가를 1부리그로 올려놓은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부름을 받고 2003년 초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에 입단, 빅리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2년 6개월 만에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박지성의 어머니는 박지성을 임신했을 때 용 한마리가 자신의 목을 감고 승천하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박지성이 한국 축구사에 길이 빛날 쾌거를 이룰 것이라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맨유 입단으로 전세계 축구 팬의 주목을 받는 박지성과 아버지 박성종

“축구로 대학만 들어갔으면 했는데… 맨유에서 제의가 왔을 때는 지성이나 저나 믿기 힘들었어요. 황당했죠”



맨유 입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축구선수 박지성. 그의 뒤에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 박성종씨가 있다.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영국 출국을 앞두고, 그에게서 박지성과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대부분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아들 때문에 유명세 치르고 있어

장면 하나. 그에게 날아온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한다. 수비수 한 명이 그의 슛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왔다. 트래핑 한 볼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의 오른발은 볼을 수비수의 머리 위로 튕겨낸다. 순간 방향을 못 잡은 수비수를 앞에 두고, 날린 강력한 왼발 슛. 그의 발을 떠난 공은 골 네트를 향해 날아갔다. 한국인 어느 누구도 세계적인 축구 강호 포르투갈을 이길 것이라고 섣불리 예상하지 못했다. 2002 월드컵, 한국과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새로운 스타 탄생의 전조였다.



장면 둘. 세계 최강의 축구 클럽팀이 모인다는 2005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과 세계적인 축구클럽 AC 밀란전. 전반전 시작한 지 9분, 왼쪽 날개 공격수로 출전한 그 선수가 동료 공격수에게 패스. 문전 앞에서 공격수와 수비수가 뒤엉켰다. 그 선수는 문전으로 쇄도해 골 네트를 흔들었다. 마치 벼락 같은 슛이었다. 관중을 향해 그는 환호성을 더 이끌어내는 듯한 골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골을 넣은 선수라는 기록을 남기는 순간이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몸을 아끼지 않는 투지, 뛰어난 발재간과 경기장 전체를 볼 줄 아는 넓은 시야.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상대 선수의 허를 찌르는 패스와 슈팅까지. 그라운드를 질풍노도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은 중원의 지략가이자 해결사처럼 보인다. 그의 모습은 축구종가 영국의 축구 팬들까지 매료시켰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었고, 실현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던 일이다. 한국선수 최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로 기록을 남기게 된 박지성(24). 한국은 물론, 세계의 축구 팬들을 놀라게 한 ‘쇼킹’한 소식이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등에 업고 이후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했다. 축구 팬들은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의 활약상을 기대했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은 등이 뛰어난 성적으로 위상을 떨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계 축구의 벽은 높기만 했다. 해외 진출 선수들이 적응에 실패하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채 한국으로 유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역시 한국 축구는 아직 멀었다’라는 자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 4강 신화는 그냥 이대로 묻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축구 팬들을 환호하게 하는 소식이 네덜란드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에인트호벤의 박지성과 이영표였다. 두 선수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골과 신기한 드리블은 에인트호벤을 네덜란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최강 축구 클럽팀이 모여서 진정한 영웅을 가리는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에인트호벤은 4강에 진출했다. 박지성의 투지와 이영표의 성실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더욱 벅찬 것은 한국 축구선수 최초로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을 한 것. 박지성의 멋진 세레모니 장면은 세계에 타전 됐다. 연이어 박지성 선수는 세계적인 명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제의를 받게 된다. 박지성은 이제 한국 축구선수가 아닌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박지성 선수가 만들어낸 신화를 보고 빙그레 웃는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언론에는 극도로 노출되기 싫어하는 아버지 박성종씨(47)가 그 주인공이다. 박지성 선수의 맨유 입단 이후 수원의 집으로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다. 기자들을 피하느라 거의 전화도 받지 않고, 외출도 삼가고 있을 정도다. 박지성의 인기만큼이나 박성종씨 역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박성종씨는 “영국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 같다”며 기자와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개구리’로 아들 체력 보강

박성종씨는 얼마 전 함박 웃음을 지었다. 지난 7월 12일 압구정동의 한 모발센터에서 3천가닥의 자가모낭이식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쪽 머리카락을 앞쪽으로 이식하는 수술인데 박지성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머리카락 빠지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거든요. 수술을 받고 난 후에는 마음이 편해졌죠. 이식한 모발은 평생 빠지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또 수술을 받을 것인가는 아직 결정 하지 않았는데,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지성이한테 고맙죠.(웃음)”



박지성 선수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수원산남초등학교 3학년 말이었다. 그런데 팀이 1년 만에 해체되고, 코치 선생이 세류초등학교로 가시면서 재능을 보이는 박지성을 데리고 갔다. 당시 집에서 세류초등학교까지는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어린 나이에 버스를 타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힘에 부치고 피곤한 일이었다. 아침마다 책가방과 축구용품을 스스로 챙기면서 6개월을 다녔다. 집에 와서 피곤에 쓰러져 자는 아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저러다 말겠지!”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



박성종씨는 아들이 축구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축구로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남들처럼 대학 가고 취직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아버지와 아들은 축구 때문에 의견 대립이 많았다. 중간에 있는 어머니 장명자씨가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켜줬다.



“지성이는 원래 야구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축구에 재미를 붙이니까 못말리겠어요. 그 어린 나이에 버스 타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다행히도 6개월이 지난 후에 선생님 배려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그 고생이 끝났죠. 저도 아들이 6학년에 올라간 이후에는 반대를 안 했어요. 축구로 대학에만 들어가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성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감독님께 제발 대학만 보내달라고 했으니까요.(웃음)”



박지성은 안용중학교를 거쳐 수원공업고등학교에서 축구 잘하는 선수로 이름을 높였다. 하지만 체격이 크지 않은 것이 단점이었다. 박성종씨가 아들의 체격을 불리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개구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풍족하게 뒷바라지 해주지 못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이키 축구화를 한 번도 사주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용돈도 적어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어머니가 몰래 만원씩 챙겨준 적도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흔한 호프집 한번 출입하지 않을 정도로 착하게 커준 것이 고맙기만 하다. 박지성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 게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였을 정도.



“잘살았다면 운동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겠죠. 다른 면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지성이가 축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일본에서 뛸 때 월급을 보면서 그말을 하더라구요. 1억원을 가지면 뭘 살 수 있냐고? 지성이는 정말 순진해요.”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 간의 연습 경기로 인생 달라져

하지만 재능에 비해 박지성을 알아주는 팀은 드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팀으로 가려고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고, 그를 찾는 대학도 없었다. 고등학교 감독의 도움으로 명지대학교에 진학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재목을 알아본 것은 당시 올림픽대표팀 허정무 감독이었다. 1999년 3월 올림픽대표팀과 명지대 간의 연습 경기 중 그라운드를 누비던 박지성이 눈에 띈 것. 장래성과 재능을 보고 과감하게 올림픽대표팀으로 차출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박지성이 가장 막내였다.



“지성이가 친구들하고 MT를 갔을 때 전화를 받았나 봐요. 당시에 지성이는 휴대폰이 없어서 허 감독님이 지성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성이와 통화를 했어요. 조용히 서울로 빨리 올라오라고. 당시에 지성이도 대표팀 선수가 됐다는 이야기를 믿지 못했데요.(웃음)”



그후부터 박지성은 탄탄대로였다. 청소년대표(19세 이하), 올림픽대표(23세 이하), 그리고 국가대표까지 모두 뛸 수 있는 영예를 얻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대만전에서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됐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일본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최연소 한국 선수로 입단했다.



일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선수 박지성. 그는 교토 퍼플상가에 큰 족적을 남겼다. 2부 리그에 떨어진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2002-2003 시즌까지 11득점을 했다. 2002 월드컵 경기에서 팀을 4강까지 올려놓은 모습에 일본인들까지 감동했을 정도. 월드컵이 끝난 후 교토부에서는 박지성에게 ‘스포츠상, 특별영예상’을 선사했고, 교토시에서는 ‘월드컵 특별상’을 수여했다.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대단한 극빈 대접을 받았어요. 구단주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건희 회장 정도 되는 대단한 사람인데요. 박지성을 너무나 아껴줬죠. 지칠 줄 모르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이 너무 좋았나 봐요.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박지성이 일본에 온다면 교토 퍼플상가에서 뛰게 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2003년 교토 퍼플상가를 떠나 박지성은 꿈에 그리던 유럽에 진출한다. 2002년 자신을 키워준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고 있는 PSV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한 것.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낸 감독 히딩크

지난 7월 20일 수원월드컵 경기장에서는 피스컵 대회에 참가한 올림피크 리옹과 PSV에인트호벤의 경기가 있었다. 박성종씨는 이날 수원경기장을 찾아가 히딩크 감독을 만나고 돌아왔다. 박지성 선수에게 히딩크는 제2의 아버지 같은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있을 때는 매일 봤는데, 챔피언스리그 끝난 후에는 처음이네요. 참 고마운 분이죠. 지성이가 좋지 않을 때도 계속 지켜봐주고, 기용해주고. 경기가 안 풀린 날에도 저를 보면 등을 툭툭 치면서 괜찮다고 격려해줬어요.”



하지만 에인트호벤에서 1년간은 박지성에게 큰 시련을 줬다. 자신의 기량을 맘껏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팀 동료와 팬들로부터 많은 욕을 얻어 먹을 정도였다. 박지성을 돌보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간 박성종씨는 아들의 부진한 모습 때문에 맘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1년 동안은 세 식구가 집에 오면 거의 말이 없었죠. 아들은 아들대로 고생하고 있어서, 함부로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오히려 아내와 제가 많이 싸웠어요. 아내가 아들을 위한다고 격려해주는 말들이 저는 싫었거든요.(웃음)”



팬들과 선수들의 반발에도 박지성을 계속 기용한 것은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의 믿음대로 1년이 지나면서 박지성은 예전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적 첫해에는 아무런 득점도 못 올렸지만, 이듬해에는 6득점을 올리면서 팬들과 동료 선수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2004-2005 시즌에서는 7득점을 올렸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골을 넣었다. 박지성의 모습을 눈여겨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박지성의 이적을 제의했다.



“맨유가 지성이에게 입단 제의를 한 것은 정말 큰 사건이었거든요. 챔피언스리그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하루 전날에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성이도 그렇고, 나도 그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죠.(웃음) 그런데 지성이는 히딩크 감독이 걸렸나봐요. 저는 이런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내년에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죠. 에인트호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영국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 꿈이 이뤄진 거죠.”



현재 박지성은 영국에서 극빈 대접을 받고 있다. 공항에 가면 직원이 출입구까지 와서 안내를 해주고, 한국에 갈 때는 보디가드의 보호도 받는다. 월세 6백만원 한도 내에서 맘껏 집을 고를 수도 있고, 전용 차량도 받았다. 박성종씨와 장명자씨는 영국에 집이 구해지면 8월 초 건너갈 예정이다.



“맨유에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죠. 다만 지성이가 자기가 가진 능력만 잘 발휘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제는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어요. 중매보다는 아들이 직접 만났으면 합니다. 저는 독일 월드컵 끝나면 결혼하라고 하는데…(웃음). 지성이가 결혼하게 되면 저는 그때부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 아이들이 아직도 많거든요.”



박지성을 임신했을 때 장명자씨는 용이 목을 휘감고 올라가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박지성은 현재까지 축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실력을 맨유에서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다. 그의 화려한 성공 소식이 영국에서 날아와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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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연기의 재앙 – 이제는 예방이다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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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6 - [방송 iN/다큐 iN] - 하얀 연기의 재앙 - 금연합시다! (사진보기)

1편은 좀 감정적으로 접근을 했다면, 이번편에서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담배가 얼마나 해로운지를 보여주고, 잘못된 마케팅 관행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펴져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피우는사람을 끊게만드는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안피우는 사람들에게 피우지 않게하는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정말 와닿는다... 나도 고3시절 우연하게 한대 피우게 되어서 지금까지 피우고 있는 담배.. 그때 그순간 안피웠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암튼 마지막에 한분이 말씀해주신 절제의 미덕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위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새겨들어야 할것이다.





2008 금연캠페인 Say No, Save Life!입니다.

 

2008년 11월 25일, 27일 밤 12시 45분에 SBS 특집 다큐멘터리 "하얀 연기의 재앙 1,2부"가

방영될 예정입니다.

담배연기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왜 비흡연자들이 NO!NO!NO!라고 외쳐야 하는지,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1부 : 11/25(화) 밤 12시40분 <하얀 연기의 재앙 – 이외수, 금연을 말하다>
- 2부 : 11/27(목) 밤 12시40분 <하얀 연기의 재앙 – 이제는 예방이다>

청소년 어린이 흡연!!! [..

담배회사들의 그냥지나칠수 ..

담배피해사진을 넣은 담배값!

담배에 들어있는 물질들!! ..

청소년 흡연의 심각성!!!!

전자담배?!![하얀연기의재앙..

실내금연법을 처음 시작한 아..

간접흡연 제로!! 금연아파트..

금연에 앞장서는 영국! 홍콩..

이외수 금연!하얀연기의 재앙..

금연에 좋은 음식!

학생들이 직접만든 금연UCC

청소년 흡연,해결책은 있나?

금연캠페인

대낮 교복입고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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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10 - 나폴레옹의 몰락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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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5 - [방송 iN/다큐 iN] - 특선다큐드라마 - 워리어스 - 타고난 승부사, 나폴레옹
위의 방송은 그가 어떻게 데뷔를 했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방송은 정상에 오른후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잘 보여준 방송...
그가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자신의 야욕과 자신의 나라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고, 독재를 한 인물로 볼수도 있다... 자기나라 병사만 300명이 죽어갔으니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가 야심을 이루어가는것을 교묘하게 국익이라는 미명아래 벌어진 일들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방송...

한인물의 흥망성쇄를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도 됬지만, 그의 역사의 굴곡에서 왜 승리를 했고, 왜 패배를 할수밖에 없었는지를 돌아보면서 또 많은것을 배울수도 있다.
워털루전투와 같은 경우만해도 본인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했고, 여건상 싸우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였을뿐인듯 했고, 러시아 침공때도 오합지졸을 가지고 군대숫자만을 믿고 참여한 전투에서 참패한것.. 이외에도 유배지에 가서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복귀를 하는 과정 등등 에서 많은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찌보면 역사를 보고, 느끼고, 배우는것이 이러한 과정은 아닐지...






<다큐 10+ - 역사>
나폴레옹의 몰락
원제: Napoleon 
방송: 2008년 11월 25일 (화) 밤 11시 10분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의 최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로마의 카이사르라도 되는 양, 스스로를 신과 같은 무적의 존재로 여기게 됐고 제국을 이어나갈 아들을 원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 왕비에게 에게 ‘말메종’을 주고 매년 3백만 프랑의 생활비까지 지급하면서 이혼을 감행한 후 새 아내를 맞아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나폴레옹의 새 아내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살의 ‘마리 루이즈’ 공주였고 이로써 그는 유럽의 왕가인 ‘합스부르크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811년,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고, 오랜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또한 1812년 봄에는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프랑스를 비롯해 그의 제국 곳곳에서 차출한 60만 명의 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가 조직됐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승리를 자신하며 6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고 12월 5일,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남겨둔 채 서둘러 파리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유럽이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가게 된다. 
 지난주에 이어 제2편은 나폴레옹의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EBS <다큐10+>는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18일과 25일 오후 11시10분에 2부작으로 방송한다.

18일 ‘나폴레옹, 유럽을 지배하다’에서는 160㎝도 안 되는 작은 키에 왼손잡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유럽을 제패했는지 알아본다. 1804년 12월2일 35세의 나폴레옹은 최고가 되려던 꿈을 실현한다. 코르시카 출신의 이 젊은 중위는 혁명의 물결에 몸을 던져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사랑하는 여인 조세핀과 결혼한 후 전장에 나가 잇단 승리 끝에 마침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나폴레옹은 1805년 영국 침공 계획을 세우지만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에 이를 포기하고 유럽 대륙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미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25일 ‘나폴레옹의 몰락’에서는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조명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아들을 원하게 된다. 그는 조세핀과 이혼한 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세의 마리 루이즈 공주를 새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는다.

1812년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또한 그해 12월5일 파리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떠난다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혁명 후 혼란기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반도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부분적으로 전쟁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련의 전쟁을 합쳐 대(大)프랑스 전쟁(Great French War)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는 대불(對佛) 대 동맹전쟁(Koalitionskriege)이라고 하고, 1813년 이후 독일 해방을 위한 전투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대동맹전쟁 이래 100년 이상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를 제2차 100년 전 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를 구분 짓는 정설은 없다. 1803년 5월 아미앵 화약의 파기를 경계로 보는 측이 많으나 1796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 개시를 경계로 보는 측과 1799년 11월 브뤼메 쿠데타를 경계로 보는 측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대륙과 세계각지의 식민지도 전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최초, 정확히는 7년 전쟁에서 이어진 2번째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편집] 영향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다시 복고주의, 정통주의를 원리로한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혁명정신은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 등 일부 식민지에까지 퍼져, 프랑스 혁명사상(민주주의, 근대법, 특권계급의 폐지등)이 심어졌다. 구체제의 부활 후에도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한 여러 법전은 각국에 남게 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 역사를 크게 바꿔 이후 100년간 유럽 여러 나라는 봉건영주의 영토를 단위로 하던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의도하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높아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부활하였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보나파르트 간의 심각한 대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계속되지 않고 7월 혁명에서 타도 당했다. 또한 프랑스 영역은 루이 14세 이래 계속된 영토확장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보아와 니스를 제외한 현재의 프랑스 본국영토가 결정되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영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해군을 격파하여 영국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아우르는 제해권을 획득해 패권국으로써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륙 봉쇄령에 대항해 해상봉쇄를 감행해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 무역에도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어 영국의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민족주의가 높아져,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를 시작으로 많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나폴레옹의 공격을 견디고 전후 북이탈리아를 획득하여 대국으로써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서서히 프로이센과의 대립이 깊어져 갔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까지 파견하고, 전후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운동을 봉쇄하여 유럽 구체제의 중심으로써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의 특색이 남은 국내경제는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하여 뒤쳐졌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것이 명백해진 것은 이후 크림 전쟁에서 증명되었다.

[편집] 진행 과정

[편집] 제1차 이탈리아 원정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등에 의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에 나섰다. 곧이어 그때까지 최전선에서 프랑스 군과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 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구원을 위해 반격에 나섰으나 나폴레옹과 대결하여 카스틸리오네 전투(8월 5일), 아르콜레 다리 전투(11월 15일~17일), 리볼리 전투(1797년 1월 14일)등에서 패배했다. 2월 2일 만토바는 항복하고 오스트리아는 정전협정에 나서 4월 18일 레오벤 조약이 성립되었다.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캉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는 남네덜란드와 라인 강 좌측해안을 병합하고, 북이탈리아에서는 치살피나 공화국 등 프랑스의 위성국이 세워졌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편집] 이집트 원정

    이 부분의 본문은 이집트 원정입니다.

프랑스군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에 대해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대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인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총재정부에 요청했다.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항구를 출항해 도중에 몰타 섬을 점령하고 7월 2일 이집트의 아부키르 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해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해전에서 허레이시오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함대에게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 만다.

또한 영국이 몰타 섬을 점령하여 해상의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하던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1800년 제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801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코펜하겐 해전은 4월 2일에 벌어졌다.)그 결과 무장중립동맹은 해체되고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고, 덴마크는 프랑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편집] 제정의 성립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2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8년 1월 스웨덴의 중재에 의해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라슈텐트 회의가 열렸지만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연기하여 대프랑스 동맹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1798년 12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참가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1799년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를 탈환했다. 다시 위험에 빠진 프랑스는 국민들 사이에 총재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와 11월 9일 브뤼멜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권을 장악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출하였다.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고 궁지에 빠졌다가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호엔리덴 전투(12월 3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하여 캄포-포르미오의 조약 내용을 재승인 하였다. 또한 7월 프랑스는 교황 비오 7세와 콘코르다트를 맺어 프랑스 혁명이래의 대립관계를 해소했다. 영국이 홀로 전쟁을 계속했으나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으면서 강화하였다.

이후 평화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체제 회복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3월 21일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프랑스 왕족 앙갱 공이 처형당한 일이 벌어져 유럽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으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했다.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편집] 제3차 대프랑스 동맹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계획하고, 도버해협에 인접한 브르타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해 영국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전투는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7만이 바이에른에 침공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8월 하순에 브르타뉴를 출발해 9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벌어진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나폴레옹은 빈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 잔존부대와 합류하여 결전을 도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이었던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에 대해 후에 예술이라고 평가받은 지휘와 배치를 발휘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한편 해전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빌뇌브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포착되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괴멸 당했다. 다만 이 해전은 곧바로 대륙에 있던 나폴레옹의 패권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게 굴복했다.

다음해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왕,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에 즉위시키고, 7월에는 독일의 서남쪽 여러 연합체를 합쳐 친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전후로써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하게 되었다.

[편집] 제4차 대프랑스 동맹

프로이센은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으나, 라인 동맹의 성립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자, 1806년 7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예나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 후위부대를 격파하고, 아우어슈타트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이 2배의 병력을 갖추고, 다부 군단에게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 당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섰고,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이 발흥하고 있던 영국과 유럽대륙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금지시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허나, 오히려 교역 상대를 잃어버린 유럽 여러 나라측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추적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향했으나,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과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8일)가 벌어졌다. 눈바람속의 전투는 양군 모두 적지 않은 사상자가 속출했고, 결판은 나지 않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하고, 프리트란트 전투(6월 14일)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하여 격멸시켰다.

7월 7일 ~ 9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폴란드 분할로 인해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는 옛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으로 되살아났다.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를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프로이센의 옛 영지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치되고,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프로이센은 철학자 피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한다]라는 강연을 시작하고, 또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군제개혁이 실시되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에르푸르트에서 회담을 갖고,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는 일을 맡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이것으로 인해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하여 패배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할양한 것과 더불어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파리조약) 그 후 스웨덴 국왕 카를 13세는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은 북유럽에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베르나도트는 훗날 배신하고,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게 하였다.

[편집] 진흙탕 싸움 (반도 전쟁)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트라팔가르 해전 및 1807년 포르투갈 침공에도 함께 싸웠으나, 국내에서는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대립하였다. 1808년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유폐시키고,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민중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다. 이 반란은 삽시간에 에스파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11월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침공해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몰아낸 후, 후일을 술트 원수에게 맡기고 귀환했다. 허나 그 후에도 에스파냐 측은 게릴라전과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완강한 저항을 계속했다. 이 반도전쟁은 진흙탕 전쟁으로 변하고, 프랑스는 대군을 몰아넣었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편집] 제5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에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신속히 대응하여 에크뮬 전투(4월 22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5월 13일 빈으로 입성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5월 20일~21일 프랑스군은 빈 근교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인해 가교가 여기저기 파괴되어, 절반쯤 건너갈 때 공격을 받았다. 이 아스펜-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 자신의 지휘에 의한 최초의 패배였다. 그 후 프랑스군은 바그람 전투(7월 5일~6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10월 14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쇤부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1810년 나폴레옹은 황후 조제핀을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별하고 4월 2일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1811년 3월 20일 왕자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여 로마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되어 로마 교황 비오 7세는 유폐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병합하여 프랑스 제국의 기타, 지배하의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가 왕위로 있던 에스파냐, 동생 제롬이 왕위에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의동생 뮈라가 왕위에 있던 나폴리 왕국, 종속적인 동맹국 스위스, 라인동맹, 바르샤바 공국, 그리고 대등동맹국의 덴마크 왕국에 미쳐, 나폴레옹 절정기라고 평하게 되었다.

[편집] 러시아 원정과 몰락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히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거기에다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까지 겹쳐 이러한 연속적인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폰텐느 블로우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편집] 결과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편집] 주요 전역(戰役) 및 전투

    *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년~1797년)
          o 로디 전투
    * 이집트원정(1798년~1799년)
          o 아부키르 만(灣) 해전 (1798년 8월1일)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또는제2차 이탈리아 원정 (1799년~1800년)
          o 취리히 전투 (1799년 )
          o 마렝고 전투 (1800년 6월14일)
          o 호엔리덴 전투(1800년 12월 3일)
    * 오스트리아 전역 (1805년)
          o 트라팔가르 해전 (1805년 10월21일)
          o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2일)
    * 독일-폴란드 전역 (1806년~1807년)
          o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14일)
          o 아일라우 전투 (1806년 2월7일~8일)
          o 프리트란트 전투 (1806년 6월14일)
    * 반도 전쟁(半島戰爭;영어:Peninsular War ; 1808년~1814년)
    * 오스트리아 전역 (1809년)
          o 아스펜-에슬링 전투 (1809년 5월21~22일)
          o 바그람 전투 (1809년 7월5일~6일)
    * 러시아 원정 (1812년)
          o 보로디노 전투 (1812년 9월7일)
    * 독일-프랑스 전역 (1813년~1814년)
          o 라이프치히 전투 (1813년 10월16일~19일)
    * 프랑스 전역 (1815년)
          o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편집] 군사 부문

나폴레옹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국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서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 서는 20만 명을 넘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전쟁 중 최대일 때 프랑스군인수는 150만 명에 달했고, 나폴레옹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동원 제도를 정비한 것은 라자르 카르노였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율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의한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 명 정도의 독립행동이 가능한 작전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빨랐다.

[편집] 군사 기술

보병의 주력병기는 프린트록식 전장총이었다. 라이플도 사용되었지만, 당시 장진시간이 길고 탄환을 생산하는 공업기술도 낮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 독립된 부대로써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부대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아직 철도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군은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하여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였으나 인구가 희박한 러시아나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동력이 둔화되었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기간을 통해 사용되었다. 열기구에 의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 되었다.

[편집] 나폴레옹의 전술

나폴레옹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 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를 얻었다]라고 대륙군 병사들의 말처럼 이 사상이 나타났다. 카스틸료네 전투에서 분산해서 진격하여 2배의 병력을 가진 오스트리아군의 기선을 제압한 기동을 하여 각개격파 했다. 울름 전투에서는 적 주력의 측면에서 배후로 크게 기동하여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포위해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은 아군 일부를 적 주력의 공격을 상대하고, 그 사이 주력을 이끌고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작전을 특기로 삼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프리트란트 전투가 그 성공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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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사르총회 특집 -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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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지나다니다가보면 이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곳은 어디인지 궁금했었는데,
그곳을 잘 보여준 장항습지편.. 군사구역이라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못한다고 하는데, 이런 별천지도 있나 싶었다는 방송.. 근데 군사보호구역임에도 외국산 어류들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서 피폐해져간다는 이야기가 참 안타까웠다.





유도, 시암리 습지, 산남 습지, 곡릉천하구 습지, 출판단지 습지, 고라니, 괭이사초, 그령, 스크령, 개피, 망둥어, 기수역, 펄콩게, 신곡수중보, 김포대교, 버드나무 군락지, 말똥게, 유효인산, 해오라기, 백로 번식지, 세모고랭이, 새섬매자기,
SBS스페셜 람사르총회 특집
강과 바다의 사랑 - 한강 장항습지
방송일시 : 2008. 10. 26 (일) 밤 11시 10분

■ 기획의도

2008년 10월 28일 경남 창원에서 람사르총회가 열린다. 람사협약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다. 한강하구는 분단 이후 50년 넘게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 출입이 통제되고 우리나라 4대강 중 유일하게 강 하구가 둑으로 막혀있지 않아 강물과 바닷물이 교류하는 기수역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생태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지난 2006년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한강하구 장항습지를 지난 5개월에 걸쳐 집중 취재, 자연생태보고서를 만들었다. 람사르총회를 앞두고 우리나라에 와있는 세계적인 환경?생태 전문가들과 시청자들에게 장항습지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 주요 내용

습지는 고라니가족의 천국, 강은 어부들의 옥토
100여마리의 고라니가 살면서 식구를 늘리고 있는 습지의 봄, 지천으로 널려있는 벼과와 사초과 식물들이 고라니의 먹이가 되어준다. 장항습지 인근의 한강에는 눈치와 모래무지, 농어 같은 다양한 어종들이 살고 있어 이곳에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의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한다.

습지의 청소부 펄콩게
서해의 바닷물이 조수 간만의 차이에 의해 한강하구까지 거슬러 올라와 한강물과 섞이고 빠져나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형성된 갯벌. 기수역이라고 부르는 이 습지의 갯벌에 사는 펄콩게는 콩알 만한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는 녀석들이다. 갯벌에 무수한 구멍을 내고 살면서 정화작용을 해서 건강한 습지생태계를 떠받쳐 주는 것이다.

버드나무와 말똥게의 사랑
장항습지의 대표적인 식물군인 버드나무와 버드나무 밑둥에 구멍을 내고 사는 말똥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동반자다. 말똥게는 버드나무 뿌리 주변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살아가면서 공기구멍을 통해서 산소를 공급하고 먹이활동을 하면서 유기물을 뱉어내어 버드나무의 빠른 성장을 돕는다.

사라졌던 해오라기의 산란지를 찾다
장항습지에서 산란을 하던 여름철새 해오라기들이 올해는 산란지를 옮겼다. 작년에만 해도 120쌍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던 산란지에는 거미줄만 쳐있고 해오라기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는데, 제작진은 추적 끝에 새로운 산란지를 발견했고 둥지 위에서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80여 마리의 해오라기 새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너구리와 삵의 영역다툼, 그 치열한 생존경쟁을 목격하다
고라니와 함께 장항습지의 중요한 포유동물 중 하나인 삵을 추적하던 제작진은 배설물을 발견하고 삵의 통로로 여겨지는 곳에 잠복하기 시작했다. 야행성인 녀석을 촬영하기 위한 특수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카메라에는 삵 대신 너구리가 서너 차례에 걸쳐 포착되었다. 삵의 배설물 옆에 자신들의 배설물을 늘어놓기 시작하던 너구리들이 결국은 삵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삵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추수가 끝난 논으로 날아와 앉은 큰 기러기를 사냥하고 있음을 새의 사체를 통해 확인하고 잠복장소를 옮겨 삵을 기다리고...

위기의 장항습지, 보전을 위한 관심이 절실하다
장항습지는 일산대교가 건설되면서 퇴적층이 급격히 늘어나 겨울철새들의 먹이자원인 새섬매자기와 세모고랭이들이 밀려나고 줄이 수변구역을 차지하는 식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 철새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래식물인 가시박이나 돼지단풍풀 등이 습지를 뒤덮으면서 습지의 고유식물들을 고사시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철책선을 개방하는데 고양시와 군부대가 합의한 상태여서 개방에 앞서 습지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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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로 - 자동차정비소의 바가지, 무법천지 동대문 쇼핑몰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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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비소는 두군데중 한군데는 바가지를 씌운다던데, 한마디로 전화가 안되는데 전화코드선은 확인 안해보고 전화기 부품을 교환하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고...-_-;;
재미있던건 한집에 들어가서 수리를 받고, 다음집에 갔더니 또 수리를 하고... 총 4군데를 걸쳐서 250만원정도의 수리비가 나왔다고...-_-;;
견적사기를 최소한으로 피하기 위한 방법은 사진 맨아래에 있음...

동대문 쇼핑몰은 어린 학생들을 강제로 잡아서 강매를 하고, 폭행까지도 일삼고, 만식이, 만순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쒸우는 행태를 고발... 물론 환불도 절대 불가란다.. 싸워볼려면 싸워보잔다...-_-;;
자신들 몇푼 더벌라고, 자신의 미래와 동대문의 미래를 깍아먹는 파렴치한 인간들...







■ [제로맨이 간다] - 자동차 정비소 바가지의 실체

예상 견적의 약 50배! 견적서 7장 날아든 A씨의 기막힌 사연
5개월 전에 받은 자동차 수리만 생각하면 아직도 밤잠 설친다는 제보자 A씨.
오디오 음향의 문제로 정비사를 찾은 A씨의 예상 견적료는 4만 6천원.
하지만 수리가 끝난 후 A씨에게 청구된 비용은 자그마치 240만원!
예상 견적료의 약 50배! 견적서만 7장이 날아든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몰라서 속고, 속아도 모르는 자동차 수리 천태만상!
A씨의 경우처럼 수리 내역을 다시 보고 차량 내부를 뜯어봐도 정비를 제대로 한 건
지조차 알기 힘든 것이 일반 소비자들의 현주소. 이처럼 자동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한 소비자의 현실을 악용해 필요이상으로 수리비를 청구하는 업체가 많다는
데... 이에 불만제로가 나섰다.   이름 하여 ‘바가지 정비업소 잡기’ 프로젝트! 본격적
인 실험을 위해 일단 멀쩡한 차의 배선 하나를 뽑았다. 과연, 정비소에선 어떤 일들
이 벌어질까?
배선 하나 뽑았을 뿐인데, 멀쩡한 차 폐차직전 상황연출! 최대 견적 125만원!
서울시 정비소 30군데 가운데 절반! 15개 업소 바가지 실태 고발!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의 불편한 진실! 무상점검 서비스의 실체는?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요즘. 본격적인 추위 앞두고 자동차 정기점검을 계획하
는 소비자들이 많다. 때 맞춰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에서는 겨울맞이 무상점검 서
비스 행사가 한창인데... 표준화된 정찰 가격에 무료쿠폰을 비롯한 각종 이벤트, 고
객만족 서비스 앞세운 프랜차이즈 업체들. 일반 정비소는 못 미덥다며 이들의 간판
하나 보고 찾는 분들 많으셨다. 불만제로, 과연 이들 업체는 믿을만한지 확인해보기
로 했다.
불만제로, 같은 차를 이용해 무상점검 서비스로 점검을 받아 본 결과는?
무상점검 결과, 각 업체마다 수리?교체해야 할 부분이 달랐다. 심지어 고친데 고치
고 또 고치고 미션오일만 3번을 연속 교체하는 중복수리까지. 어느 부위에 어떤 문제
가 있는지, 정비업체서 얼마나 명확한 점검을 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이
제 누굴 믿어야 하는 걸까? 운전은 잘해도 차는 모르는 소비자들을 위한 불만제
로의 현명한 조언.
자동차 정비업체의 미끼상품을 내세운 과잉정비와
상습적인 바가지 비용청구를 진단하고 그 예방법에 대해 집중 취재한다!

■ [소비자가 기가 막혀] - 무법천지 동대문 쇼핑몰

강매: ‘지나갔다 하면 무조건 잡고, 길을 막아요. 내가 옷을 자유롭게 살 수 없어요.’

대한민국 쇼핑의 중심, 패션 아이템의 집결지 동대문 쇼핑몰에 대한 충격적 제보. 동
대문의 한 쇼핑몰서 일한 적이 있다는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동대문 상가서 어린 학
생들을 상대로 강매는 기본이요, 옷을 사지 않을 경우 구타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이 어린 학생들은 원하지 않는 옷을 억지로 살 수 밖에 없
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가격: 나이따라 성별따라 천차만별
이 뿐만이 아니다. 같은 옷이라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동대문 쇼핑몰의 가격. 불
만제로는 그 가격차이가 궁금했다. 각기 다른 나이와 성별의 사람들이 같은 옷을 구
입한 후 가격을 비교해보는 실험 실시했는데...10대 남학생, 여학생 팀과 엄마와 아
들 팀 그리고 성인남성이  매장을 방문한 결과 최고 8만 8천원에서 최저 6만원까지.
가격차는 무려 2만 8천원이었다.
두 번째 실험결과도 마찬가지. 최고, 최저가 1만 8천원의 차이가 났다.
국산으로 둔갑한 국적불명 상품: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은 다 잘라버려’
옷을 구입할 때 의심스러운 건 비단 가격 뿐 아니다. 중국산은 절대 안 판다는 상가
들.
그런데 국내에서 제작돼 메이드 인 코리아 표시가 있어야 할 옷에 라벨이 없는 경우
가 많은데...아예 중국산 라벨을 잘라 원산지가 어딘지 모르게 만든다고. 그동안 얼
마나 많은 국적 불명의 옷들이 국산으로 둔갑해 팔렸을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정도다.
환불불가: ‘10분 전에 산 옷인데도 환불이 안 된대요.’
뭐니 뭐니 해도 제보자들이 입 모아 말하는 불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환불거부.
심지어 제품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도 환불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하지만 상가 상인들은 웬만해선 환불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인데다
고객센터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긴 마찬가지.
이에 대해 공정위와 소보원, 해당구청 등 관할당국은 현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행
정적인 고발을 할 수 있는 기준이나 법적인 규정. 강제성이 없다는 입장이고,
해당업체 역시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만 관련법이 없어 관리를 할 수 없다
는 기존의 입장만 고수할 뿐인데... 쇼핑의 중심에서 불만을 외친 불만제로!
국내 최대 패션상권 동대문의 고질적인 문제점과 관행을 되짚어보고
진정한 패션의 메카로 발돋움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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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맘 VS 베타맘 당신의 선택은?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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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스페셜 다큐인데 알파맘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거의 경영자 마인드로 키우는 엄마들이고, 베타맘은 알파맘에 반기를 들고 아이들은 적당히 그대로 두는것이 좋다라는 의견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쉽게 표현해서 알파맘은 강남엄마들이고, 베타맘은 대안학교 엄마들이라고 할까?
방송에서는 양쪽을 균형적으로 다룬다고 하기는한것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알파맘의 아이들이 참 피곤해보인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방송중에 아이들과 인터뷰는 베터맘의 아이들만 나왔는데, 한국의 한 알파맘의 딸은 중학생인데 벌써부터 아이비 대학에 진학을 해서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는 계획아래 모든면에서 계획을 세워놓고 연습중인데, 그 아이의 표정이 원래그런지 모르겠지만, 참 안되보였다는...

물론 좌파우파를 가르는것처럼 어느편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베타맘과 알파맘의 장점을 취하거나, 내 아이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아이와 함께 자주 이야기를 하면서 맞추는것이 좋을것이다.

이 방송을 보고 무엇보다도 자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중요한것은 엄마의 욕심이 아니라, 자녀의 생각이고 자녀의 미래일것이다...
이게 아이에게 좋을꺼야라는 생각은 아마 자기 자신이 어릴적 싫어했던 그 모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만 글을 쓰다보니 교육적인 면으로만 이야기가 흘렀지만, 다양한 부분에서 알파맘의 긍정적인 모습도 볼수 있고, 자녀를 가진 모든 부모들은 꼭 한번 자녀와 같이 시청해보면 좋을듯한 멋진 방송이였다.




알파맘 VS 베타맘 당신의 선택은?
방송일시 : 2008. 10. 19 (일) 11시 10분


■ 기획의도
자녀 교육은 모든 엄마들의 주 관심사. 하지만 어떤 식으로 자녀 교육을 하는 게 옳은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최근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의 두 가지 방법이 관심을 받고 있는데.... 자녀교육에 기업 경영적 요소를 가미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이른바 [알파맘]과 자녀에게 자유를 주고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게 하는 [베타맘]이 그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들 [알파맘]과 [베타맘]을 70년대 전업주부와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 사이에 붙었던 논쟁을 [엄마전쟁]이라고 불렀던 것에 빗대 [제2의 엄마 전쟁(Mommy war)]라고까지 한다. 교육열이 유달리 높은 한국에서 서로 극명히 대비되는 이 두 가지 엄마상은 각각 어떤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알파맘은 기존의 이른바 ‘강남엄마’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베타맘식]으로 느슨하게 키운 아이들이 입시지옥의 거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 현실에서 [베타맘식] 교육이란 보편적일 수 없는 특수한 선택일 뿐인 것일까? 이 프로그램에서는 알파맘과 베타맘의 교육 방법을 살펴보고 진정 아이에게 적합한 교육법은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한다.

■ 주요 내용

알파맘 열풍 “탄탄한 정보력으로 아이의 인생을 로드맵한다.”
월스트리트에서 10년간 일했던 이사벨. 최고의 금융전문가였던 그녀는 처음 엄마가 되면서 겪은 충격을 인터넷을 통해 극복했다. 능력있는 여성, 알파걸에서 완벽한 엄마로 변신한 알파맘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알파맘TV를 설립한 이사벨은 알파맘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엄마가 되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둘째 엄마가 되면서 겪는 어려움을 인터넷을 통해 해결한다. 셋째 누구보다 정보에 빠르다. 넷째 정보를 나눈다. 엄마가 되는 것을 제 2의 직업으로 여기며 육아 및 교육에 업무 경영 능력을 발휘하는 알파맘들! 막강한 정보 탐색능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정보를 나누는 알파맘의 영향력은 이미 기업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알파맘 한 명이 기존 엄마 200명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조사되면서 알파맘을 향한 마케팅열풍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한국에 불어온 알파맘 열풍
알파맘은 한국에도 있다. 블로그 방문자 하루 2000명을 넘는 젤리맘과 마리안은 ‘육아’를 주제로 한 대표적인 스타블로거. 많은 엄마들은 육아문제에 대한 고민이 생겼을 때 먼저 그들의 블로그를 찾는다. 6살 서준이를 엄마표 조기영어 학습으로 가르치고 있는 김은주씨,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딸 유진이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4개 국어를 가르치는 건 물론 예체능과 봉사활동 경험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계획을 세운 임정민씨도 탄탄한 정보력으로 아이의 미래를 설계하는 한국의 알파맘이다. 이제 단순히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엄마들. 한 발 더 앞서가는 엄마, 알파맘이 되기 위해 엄마들은 외국 사이트에서 직접 교재를 수입하고 자녀코칭학습법을 배우며 영어지도전문가강좌를 듣는다.

베타맘의 반격 “자녀의 ‘행복’이 우선이다.”
한편, 알파맘 열풍에 제동을 건 엄마들이 나타났다. 엄마들의 경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자고 외치는 이들, 이들은 알파맘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베타맘이라불리운다. 아이들에게 성공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 보다 스스로 행복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진정 엄마의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베타맘들. 딸 시드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있는 그대로 딸의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는 베타맘 트레이시의 가정을 만나본다

엄마의 작은 용기가 아이를 웃게 만든다.
전문가들은 아이의 잠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알파맘들도 베타맘식의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들 스스로 재능과 열정을 찾을 수 있는 기회와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 그렇지만 특수 목적고, 명문대 합격이 사회적 성공으로 직결된다고 믿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 속에서 엄마들의 고민은 크다.

그런 가운데 선홍이 엄마 한지원씨는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기다려주는 여유를 갖기로 한 것. 더불어 그녀는 아들의 미래를 세우는데 인생을 모두 쏟아붓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지원씨의 아들은 지금 전라도의 한 산촌 분교로 유학을 떠나있다. 스스로 텃밭을 가꾸고 흙에서 뛰어노는 가운데 웃음을 찾아가는 선홍이를 보며 지원씨는 엄마로서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고 말하는데. ‘알파맘 vs 베타맘’, 엄마들의 전쟁 속에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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