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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승부사 김순진, 입맛 몰러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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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대단한 여자이다. 몇일전에 극장에서 광고를 보다가 놀부보쌈이 나와서 예전에 자주가던 서울역의 놀부보쌈이 생각났었는데, 사장이 여자인줄은 오늘 처음알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찟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가출해서 공순이부터 시작해서 과자공장, 옷가게, 각종 음식점을 거치며 망해보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조금씩 쌓아가다가 드디어 보쌈집에서 승부를 내서 성공한 여장부...
음식점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꼭 한번 들어봐야 할것 같고, 그외에 옷가게를 하는 사람들 및 창업을 준비하거나 이미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꼭 봐야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고객관리에 대한 부분은 많은 연구를 해봐야 할정도로 대단한 마인드를 가진 사장님...
최근에 충정로에 창업을 한 동기와 선배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_-;;

 
축적된 경험은 누구도 못 훔친다
놀부의 ‘현장경영+지식경영’

(주)놀부 김순진 대표
놀부는 우리나라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하나로 꼽힌다. 전국 340개 놀부 가맹점에서 하루 10만 고객이 놀부 음식을 즐긴다. 돈으로 따지면 하루 1000만원어치 음식이다. 놀부 김순진 사장은 5평짜리 보쌈집을 이렇게 키워냈다.


놀부를 찾아간 10월 8일, 서울 서초 양재 놀부 본사에서는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놀부지식경영위원회’ 미팅이 진행됐다. 이 모임은 자기 업무와 관련한 분야별 특정지식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학습 동아리. 2003년 첫 미팅인 이 날에는 대구사업소 가맹점주 백서(白書)팀이 놀부 가맹점주 백태(百態)를, 본사 계미고수(鷄味高手)팀이 신브랜드 개발을 위한 맛있는 닭요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놀부의 이 ‘지식경영’ 경연대회(사례 발표)는 2004년 1월 7일까지 월 2회, 총 6회 진행될 예정이다. 고객 서비스와 품질 개발이라는 테마 아래 프랜차이즈 연구팀, 홍보 PR 연구팀, 성공식당 사례연구팀, 수익관리/수익원가 연구팀, 식당 인테리어팀, 외식 마케팅팀 등이 팀별 5명 안팎으로 짜여져 있다. 2002년 시작된 놀부의 지식경영은 직원 직무 능력 향상-직원 지식 창출/공유-회사 성과 제고로 이어져 가맹점주와 소비자의 만족도를 극대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놀부 전략기획실 고경진 차장의 한마디가 명쾌하다.
“회사 노하우는요, 직원들 머릿속에 있습니다.”

▶ 김순진 사장의 석사 학위 논문 제목은 ‘외식산업 서비스 품질이 고객만족에 미치는 영향’. 그이는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업계에 “현장을 경험한 이론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님만이 희망이다
놀부(nolboo.co.kr) 김순진(1952년생) 사장은 마침내 자신의 세 가지 꿈을 다 이뤘다.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낸다, 석사 학위를 받는다, 최고 식당을 만든다는 꿈.
1987년, 김사장은 서울 신림동 신림극장 뒷골목에 보쌈식당 ‘골목집’을 열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5평짜리 가게. 백반집, 돼지갈비집, 곰장어집… 세 차례에 걸친 음식장사에서 연이어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마련한 식당이었다. 가난 덕에 중학 1년을 중퇴한 그이는,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만 했다. 벌어서 최상의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망할 짓만 했어요. 왜 망했나 역산을 해보고, 어떻게 해야 안 망할까 대안을 내보면서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게 오늘날 놀부의 교과서, 지침서가 됐지요. 고객의 소중함도 그때 알았습니다. 쌀은 떨어지고 월세는 밀리고… 신림동 순대시장 골목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되는데, 저 사람들을 손님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안절부절했지요. 손님만이 희망이었어요. 그 절절함이 고객을 섬길 줄 알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98년 방영된 MBC-TV ‘성공시대’는 맛있는 보쌈김치를 만들기 위한 김순진 사장의 줄기찬 노력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담아냈다. 배, 마늘, 참기름 등속을 각기 다르게 버무려 넣은 1번, 2번, 3번, 4번 바가지를 죽 늘어 놓고 맛 보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김사장의 진지한 모습…. 문을 열고 일 주일, 사람들이 식당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런 빛깔에 연하고 담백한 돼지고기, 1인분 2,500원의 저렴한 가격, 배추와 속을 따로 내는 새로움, 커다란 그릇에 된장국을 퍼 담아준 것이 먹혀든 것. 당시만 해도 보쌈집 손님 대부분은 힘겨운 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소주 한 잔을 거저 대접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별것 아닌지 몰라도, 식당이 그저 ‘먹는 장사’로 여겨지던 그 시절에는 상당한 서비스였다. “사흘을 안 먹으면 눈 앞에 빙빙 보쌈이 돈다”는 단골들이 늘어났다. 큰 생굴이 나올라치면, 김사장은 단골이 누구인가? 둘러보며 단골을 챙겼다.
장사 다섯 달 만에 김사장은 가게를 12평 규모로 키운다. 하지만 아무리 잘됐다 한들 5평 식당에서 5개월간 얼마나 벌었을까. 식당을 넓히는 데 들어간 돈은 전 가게 월세 보증금이었다. 가진 것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자신이 있었다. 이때 ‘놀부보쌈’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놀부보쌈은 승승장구, 40평 식당으로 자라났다. 2층에 위치한 가게였지만 역시 자신있었다. 더욱 열심히 뛰었다. 굴 하나 고기 한 점을 더 얹어주며 2층까지 올라와준 대가를 지불했다. 먹던 고기가 남으면 김치까지 쥐어 보냈다. 일하는 아줌마 머리카락이 음식에 빠질까봐 일하는 아줌마도 김사장도 모두들 ‘쇼트 커트’를 했다. 김순진 사장의 머리는 지금까지도 쇼트 스타일이다.
“발목이 퉁퉁 붓고 아랫도리가 주저앉을 정도로 일했습니다. 자식은 친정에 맡기고, 식당 바닥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애를 보면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자식에게도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은 서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뼈빠지게 일해서 키워줬다는 걸 고마워해요.”

▶ 김사장은 식당을 차리고 나서 머리카락이 음식에 빠질까봐 ‘쇼트 커트’를 했다. 김순진 사장의 머리는 지금도 쇼트 스타일이다.
▶ 김사장은 항상 멀리 보고 늘상 한 발 앞서 왔다. 부대찌개, 솥뚜껑삼겹살, 유황오리진흙구이, 순대국 등 새로운 메뉴를 속속 선보이며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100년의 맛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놀부의 마음이다.

제때 다 찾아 먹어가며 일할 수 있나
놀부 프랜차이즈는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주변 어려운 사람들이 가맹점을 내달라고 한 것이다. 89년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가맹 1호점이 들어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도, 맛도, 가격도 본점과 달랐던 것. 이익을 쫓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사장은 아차 싶었다. 약정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 일로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가맹점의 시설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챙겨 나갔다. 놀부 프랜차이즈는 무엇보다 보쌈 조리법을 매뉴얼화했기에 가능했다. 어느 정도 세기의 불에 어떤 부위의 고기를 넣어 얼마 동안 뜸을 들여 무엇을 넣어 조리하는지, 그 방법을 표준화시킨 것이다. 놀부 조리기술서에는 “계절에 따라 바람(수분)이 들어간 정도가 다른 무의 탈수 시간과 그에 따른 채칼의 쓰임새가 밀리미터 단위로 적혀 있다”고 한다. 처음 한식 매뉴얼화를 시도하고 성공시킨 것만 봐도 김순진 사장의 안목과 집념을 가늠할 수 있다.
김사장은 항상 멀리 보고 늘상 한 발 앞서 왔다. 1991년에 가맹점 수가 22개로 늘어나 서울 공장으로는 역부족이던 91년 공장 부지를 물색할 때의 일. 충북 음성에 반듯하게 다듬어진 1,000평 땅이 있었다. 하지만 그이는 주변에서 그만이라던 그 땅을 제껴 두고 2,000평 임야와 산을 매입해 공장을 지었다. 가맹점이 340개를 넘은 지금까지도 놀부 물류가 원활히 돌아가는 것, 놀부가 여타 외식 프랜차이즈보다 먼저 전국망을 갖출 수 있던 것도 이 음성공장 덕분이다. 김사장은 “음성공장은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은 것”이라고 했다. 또 놀부는 부대찌개, 솥뚜껑삼겹살, 시골상차림 놀부집, 유황오리진흙구이, 순대국 전문점 등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며 지속적으로 외식시장을 개척했다.
“지난 16년 동안 3년 주기로 히트 상품이 나왔습니다. 놀부가 새 아이템을 만들어 놓으면,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지방 소도시까지 우후죽순 생겨나고 그래요. 경쟁사회니 어쩌겠어요. 놀부만의 강점을 더욱 강화하고 브랜드 파워를 키워야지요. 식습관 변화는 쉽지 않지만, 요즘 젊은 고객들의 변화는 참 빨라요. 그러니 상품 개발뿐이지요. ‘100년의 맛을 디자인한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놀부의 지식경영은 매일경제&부즈 앨런 ‘지식경영대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었다. 놀부의 지식경영은 가맹점주와 소비자의 만족도를 극대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미친 듯 달리다 보니 커 있더라
“순환의 법칙이라 할까요, 뿌린 만큼, 베푼 만큼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김순진 사장은 ‘나눔의 미학’을 믿고 실천한다. 누구보다 가난을 잘 알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작은 도움도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1989년 KBS 상점경영수기 공모에서 금상을 받자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김사장은 89년부터 여성개발원 창업강좌와 위생교육원(한국음식업중앙회 부설)의 식당경영사례 강사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이는 이러한 강연 활동으로 받은 강사료를 ‘놀부장학회’라는 이름으로 적립, 점포 근무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99년부터는 매년 ‘놀부 외식논문 현상공모’를 통해 보다 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1년에는 ‘사랑의 봉사단’을 설립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 이웃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김사장은 1만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상록회’ 총재이기도 하다. 1970년 결성된 상록회는 자연보호 운동, 수재민 돕기 등을 벌이는 전국 규모 민간 단체다.
김순진 사장의 향학열 또한 남다르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자의 배움에 대한 갈급함이기도 했겠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그이에게는 뜻하지 않은 고민이 생겼다. 영어와 한자가 뒤섞인 직원들의 보고자료를 해독할 수 없어 난감했던 것. “특히 90년대 초반 외부에서 스카우트한 전문인력들이 제출한 보고서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고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김사장은 그러나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96년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패스한 그이는 97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서울보건대학 전통조리과, 우송대학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올해 경원대학교 대학원 관광경영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김사장은 같은 학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석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이뤘습니다. 박사과정은 보너스라고 생각해요. 1인 몇 역을 하면서,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쥐어짜며 살았습니다. 저는 전진하는 스타일입니다. 스스로 도전하면서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자세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벼랑에 선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행동으로 쌓은 경험은 누구도 훔쳐가지 못해요.”
이런 CEO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직원들에게 자극제가 될 터이다. 직원들 스스로들 자기개발의 텃밭을 가꾸게 만들었고, 놀부는 자연스레 지식경영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CEO가 추구하는 ‘현장의 경험과 지식을 발굴, 공유하고 신속히 경영에 반영하는’ 현장 중심 경영을 직원들 또한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김순진 사장이 말하는 놀부 지식경영의 요체는 “본사가 가맹점 경험을 미리한다”는 것. “가맹점 장단점을 분석함으로써 내부의 시행착오를 줄인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놀부의 지식경영은 매일경제&부즈 앨런 ‘지식경영대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누가 시켰나요? 자기들 스스로도 대견해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들에게서 희망을 봤어요. 그걸 보는 사장은 힘이 솟지요. 일등 기업은 누가 만드나요? 직원을 일등으로 만들면 됩니다. 제가 할 일은 그겁니다.”
김순진 사장은 지금 세계 진출을 다지고 있다. 놀부는 90년대 초부터 말레이시아 등지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올해 말부터 중국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세계화를 준비하고 있다. 해외 유수 브랜드의 각축장이 된 국내 외식시장에서 그들과 경쟁을 벌이고 국내 시장을 지켜내는 것도 의미롭지만, 이제는 보다 큰 좀더 큰 파이를 찾아 나설 때라는 것이다. ‘문화사업가’를 자처하는 김사장은 그것을 ‘음식문화전쟁’이라 부르면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메뉴의 개발 여지에 따라 무한 성장이 가능한 기회의 땅”이라고 했다.

지난 9월 27일, 김순진 사장은 ‘21세기 여성 CEO 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21세기 여성 CEO 연합’은 여성 경영인들의 정보 교류와 역할 증대를 위해 창립된 단체. 김사장은 앞으로 이 단체의 활동에 주목해달라고 했다.
“여성의 감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앞으로 여성 경영자들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커지고 활동 영역 또한 넓어질 것입니다. ‘21세기 여성 CEO 연합’은 교육과 연수 등 여성 경영자들이 경영지식을 교류, 공유하고 그것을 일선 경영 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겁니다.”

글 연용호 편집국장 사진 홍덕선 사진팀장
月刊<창업&프랜차이즈> 편집국 www.biz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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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의 귀재 김서기, 축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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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말이... 어릴때 무일푼으로 버스에서 물건을 파는 일부터 시작해서 부산의 명물 영타운을 만들고,
건물주인의 욕심으로 영타운을 접고 서울에 올라와서 허름한 주택가에 호프집을 만들어서 6개월만에 성공 시키고, 본격적으로 체인점사업에 뛰어든 김서기 사장...
중간에 실패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이런 저런 시련이 많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고통은 더 좋은 현실을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인드오 다시 재기하는 그의 삶의 태도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쪼끼쪼끼 돌풍 일으킨 '부산촌놈'
사업 2년 6개월만에 330호점 개설, 아이디어, 도전정신으로 성공
지금으로부터 12년전, 부산 번화가인 서면 1번가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 주인과 김서기 (주)태창가족 사장 (44, 당시 무직)이 마주앉았다.
"건물을 통째로 임대해 주시오, 생맥주집을 차려 부근 땅값을 올려놓겠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한마디로 잘라 거절한 건물주인이 한달쯤 뒤 사람을 보냈다. '지하 1층을 빌려줄테니 한번 해봐라, 서너달 하는 걸 봐서 잘되면 지상4개층도 임대해 주겠다'는 전갈이었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무대로 고기상자 납품업에 손을 댔다가 가진 돈을 거의 날린 김사장 압장에서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생맥주집 '영타운'은 엄청난 판매량으로 부산지역 맥주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하루 2만cc짜리 50통을 꾸준히 팔아 월 3,000만원 정도의 순익을 남겼을 정도로 성공했다.
"별다른 요리기술이 없어 맥주사업에 손을 댔고 '무료 임대 제안'도 사업 실패뒤 사업자금이 없어 제안했다"는 김사장은 99년 6월 서울로 올라왔다. 기왕에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큰물'에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쪼끼 쪼끼 생맥주' 프랜차이즈 사업은 대박을 터뜨렸다. 가맹점 확장을 본격 개시한 2000년 6월이후 1년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330호점을 개설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단순히 양적으로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김사장은 "가맹점 한달 평균순익이 700만~1,000만원대"라고 밝혔다. 가맹점 성공률도 80~90%를 자랑한다.



김사장은 스스로 '부산촌놈'이라고 말할 정도로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서울에 올라온 99년은 아직 IMF의 쇼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쪼끼쪼끼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뭘까.
부산 '영타운'에서 성공했던 것처럼 쪼끼쪼끼 사업도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의이런 정신은 몸에 배어있다. 가령 골목길을 찾아다닐때도 같은 길을 두 번 가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가끔 내의를 뒤집어 입고 다닌다. "똑같은 걸 반복해서는 새로운 것을 찾을수 없다"는 것이 그가 직원들에거 늘 하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보통 맥주전문점의 A급 입지는 직장인들이 많은 사무실 밀집지역이나 대학가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사각지대로 알려진 주택가를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경쟁 체인점들의 매장 크기는 최소한 50평을 넘었지만 20평 규모의 소형 점포를 고집한 것도 같은 경우다.

당시 생맥주 납품업체 관계자들은 "불황엔 목 좋은 곳에서도 힘들어 하는데 주택가 골목길이라니..." 라며 혀를 끌끌 찼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한번 지켜봐 주십시오"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속으론 자신감이 넘쳤단다.
"주변에선 반대했지만 저는 '신대륙'을 발견한 겁니다. 아무도 넘보지 않는 땅에 제가 먼저 깃발을 꽂았다고 할까요, 가령 부부가 저녁에 맥주 한잔 하려고 집을 나섰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다 치킨냄새가 진동하는 동네 맥주집에서 분위기 잡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시끌벅적한 대학가나 시내중심지로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깔끔한 인테리어에 환한 조명,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손님은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적중한 것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생맥주 납품업체에 "일단 5개점포를 연뒤 상황을 지켜보자"고 제안하고 99년 12월 서울 성내동에 1호점을 열었다.
1호점은 유동인구가 적어 2년째 비어있는 최악의 입지였다. 나름의 전략적 고려와 오기기 섞인 선택이었다. 1호점에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였다.
1호점에서 그는 '영타운'의 성공 때처럼 갖가지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우선 가족이 함께 찾을 수 있도록 건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흰색벽과 밝은 조명, 사진액자등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지중해풍의 인테리어를 추구했다.



맥주의 맛을 높이기 위해 맥주통 관의 내부를 씻어내는 살균세척기를 도입하고 잔 자체도 영하 20도에서 꽁꽁얼려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있도록 했다.
그기 전략적으로 사활을 걸었던 1호점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시내 중심가의 업소에서나 가능하다는 하루 5통의 판매량을 거뜬히 해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맥주맛도 만들어냈다.

커피 생맥주, 오미자생맥주,그린생맥주, 한방생맥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신개념의 맥주는 가족단위의 고객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별히 매체광고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쪼끼쪼끼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10여개의 유사상호 브랜드가 버젓이 신문에 광고를 내며 영업을 할 정도로 쪼끼쪼끼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가맹점은 늘리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 짧은 기간에 가맹점을 100~200개로 늘렸다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적지 않았다. 김사장은 요즘 "가맹점주들이 따라와주지 않을때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당연히 가맹점 확대보다 '유지 및 관리'에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수성전략은 한마디로 "폐점할 곳은 과감하게 폐점한다."는 것.
"프랜차이즈 사업은 무엇보다 통일성이 중요합니다. 가령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동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점주가 개별적으로 행동할 경우 경고장을 보내는 동시에 재교육을 하고, 그래도 안 따라오면 폐점을 시키는 것이 다른 가맹점을 살리는 길이라고 봅니다."
사업실패로 인해 빈털털이 신세였던 그가 10년만에 프랜차이즈 업계의 입지전적인물로 자리매김했지만 "아직 꿈이 많다."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그 꿈이란 (주)태창가족을 국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전문기업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간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일류기업으로 발전하는 것" 이 목표다.
그래서 이를 위해 별도의 전담팀을 두고 새로 진출할 업종을 모색하고 있는 김사장은 "고객의 요구에서부터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 며 "조만간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슬쩍 물었더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자만이 성공이든 실패든 답을 얻을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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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사 작가 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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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예전에 MBC 성공시대에나온 이외수씨편을 보면서 끄적여 놓은 메모를 보고 생각나서 메모를 옮긴다.

삶의 구심점 확립
하루 1끼
강한 정신, 강한 의지력
정직
유혹과의 단절
일을 안하면 먹지도 않는다는 다짐
철저한 자기통제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
나를 낮춰라
재능의 천재가 아닌 노력의 천재
함부로 하지마라
머리보다 가슴을 적시는 삶의 낮은 자세


적어 놓은 메모를 보니까... 예전에 보았던 그대로 회상이 된다...
(인터넷에 동영상도 있어서 링크)

생긴것을 봐서는 대충 막 살것만 같은 이외수씨...
그 당시 성공시대를 보았을때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 전혀 몰랐던 상태에서 봤는데,
정말 기인, 초인이라는게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었다.
위에 메모를 해 놓은것만 봐도 대략 알수 있다.
돈이 없어서 라면한개를 가지고 1주일에 걸쳐서 나누어서 먹고,
나중에 소설을 쓸때는 집에다가 감옥을 만들어서 하루에 한끼 혹은 글이 안써지만 한끼도 안먹으면서 소설을 집필하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어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미치지 않고서야, 저정도의 위치에 올라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암튼 나태해지는 요즘 나에게 다시 각성을 느끼게 하는 메모를 보면서.. 다시 한번 반성 도 반성을 해본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성공을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이다. MBC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나왔던 인물 중 반이 나중에 실패한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는 대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실패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한다. [한근태, 서울과학종합대 교수]


■ 6가지 주제로 풀어본 이외수의 문학세계

노숙자, 정신병자, 자살하는 사람, 방화범, 연쇄살인범. 세속적인
잣대로는 인생막장의 비틀린 인간들이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어떤
이에게 그의 소설은 '슬픔과 허무, 고통지옥으로 이끄는 우울한
소설'이며 어떤 이에게는 '진짜 현실을 그리고 있는 가장 투 명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비정상' '악' '기인' '초생세계' '우화' 그리고
'통속'논쟁까지...... 이외수의 문학세계를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여섯
가지 주제로 풀어보았다.


■ 이외수는 기인인가?

긴머리와 깡마른 몸. 정신세계에 대한 천착으로 세간에서 그는
'기인'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외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누구보다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 열린 사람. 심지가 가장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한
다. 이외수는 춘천에 그와 평범한 사람을 위한 성채를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격외선당. 격식없이 노니는 신선의 집이라는 뜻이다. 집필
중일 때를 제외하면 이외수는 그를 찾은 사람과 말을 나누고 사모님은
따 뜻한 밥상을 차려주신다. 한마디로 그의 성채는 만인에게 열려있다.
조정래, 한승수 의장이 이곳을 찾았 고 전유성, 박범신, 이남이, 임지훈
등이 단골손님이며 천상병, 중광 스님의 자취도 남아있다. 하지만 진 짜
단골손님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보통사람들이다. 만인에게 열려있고
만인이 즐길 수 있는 곳 격외 선당에서 사람을 좋아하는 소박한 작가
이외수와 그를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그를 찾은 평범한 사람들 을
만나보았다.


■ 또 하나의 李外秀, 우화

정통소설을 쓰는 보통작가와는 달리 그는 쉬운 글을 많이 쓴다.
시화집, 산문집을 비롯하여 <싸부님, 사부님> <껄껄>
<외뿔>등 그의 우화집이 그것이다. 소설과 달리 그것들은 재기
넘치고 쉽고 따뜻하다. 또 다른 李外秀를 만날 수 있는 그의 우화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다.


■ 이외수는? "책 두 권 쓰고 나왔더니 십년이 지났습디다."

1946년생. 키 165cm. 45kg, 육군병장 만기제대, 춘천교대 중퇴, 강원도
인제 남초등학교 객골분교 소사로 근무, 젊은 시절 다리 밑에서 생활한
적도 있으며 일년에 머리를 평균 세 번 감고, <벽오금학도>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방문에 철문을 달고 4년을 두문불출한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젓가락을 던져 철판을 뚫는 특별한 장기를 가지고
있고, 유체이탈을 경험했다는 그는 일반인에게 특이한 사람
<기인>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외수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내고 있는 전업작가이다. '선혈로
쓴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이외수의 한마디 "내가
벽오금학도를 쓰느라고 방문에 철창 달고 4년을 있었습니다. 그 다음
황금비늘도 그렇고, 책 두권 쓰고 방문 열고 나왔더니 십년이 지
났습디다."


■ 이외수의 작품 ? - 30년 전업작가인생. 단행본만 스무 권이
넘습니다.

중편 <훈장> 1975, 단편 <꽃과 사냥꾼> 1976, 장편
<꿈꾸는 식물> 1978, 단편 <고수><개미귀신> 1979,
창작집 <겨울나기> 1980, 단편 <박제>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붙잡혀온 남자> 1980, 중편 <장수하늘소> 단편
<틈> <자객열전>1981, 장편 <들개>1981, 장편
<칼> 1982, <사부님 싸부님 1.2> 1983, 산문집<내
잠속에 비는 내리는데>1985, 산문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1986, 서정시집 <풀꽃 술잔 나비> 1987, <벽오금학도>
1992, <감성사전>1994, <껄껄>1996, <황금비늘1.2>
1997,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1998, <외뿔> 2001,
<괴물 1.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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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현의 '명동 빨계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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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유투존근처에 라면 하나로 연매출 20억원 이상을 올린다는 김복현씨의 명동 빨계떡에 대한 성공스토리..
고객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약간은 거만한듯한 방식의 디마케팅을 선보인다...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말아라는 식이다...-_-;;
메뉴도 여러가지에서 빨계떡하나와 찬밥 달랑 두가지이다...
하지만 조그만 라면가게에서도 메뉴얼화를 시키고, 현재는 프랜차이즈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어찌보면 김복현씨보다는 김복현씨 누나가 주인공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을 정도로... 누나의 기여도가 컸다...
명동 빨계떡의 디마케팅을 보면서 예전에 톰피터스가 말한 커다란 강당에서 사람을 반만 채워놓고 강연을 하느니... 차라리.. 공중전화박스에서 강연회를 열어서 사람들이 참석하게 하고 싶도록 하라는 말이 쌩뚱맞게 생각났다...
주위에서 디마케팅을 보기가 쉽지는 않은데, 자기 제품에 대한 자신감, 자부심이 없이는 없을수 없는 마케팅기법인것 같다...
그리고 김복현씨가 한말중에 노하우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는것은 나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누가 나에게 어떤 기발한 사업아이템을 준다고 치자... 아니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노하우를 준다고 치자... 그렇다고 내가 성공할수 있을까? 내가 그만큼 땀흘리고, 노력하지 않는이상... 그런 노하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힘든 상황은... 언젠가 내가 성공을 하면 소중한 추억이 되지만... 실패하게 된다면 가슴아픈 한이 된다는 주인공의 말을 뼈속깊이 새기자...



[김사장의 ‘먹는 장사 노하우 5’]

“매력 만점의 주인이 돼라”

1.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선택하라.
김사장이 라면전문점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사장 자신이 라면광이었기 때문이다.

2.한 분야에서 6개월 이상 일하라.
실전 연습이 없으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그 분야에서 이름난 집에 취직해 6개월 이상 근무하면 맛을 내는 법, 서비스 방법, 재료 구입과 재고관리 등을 배울 수 있다.

3.나만의 메뉴를 개발하라.
똑같은 라면이라도 김사장은 독특한 고춧가루 양념을 추가한 틈새만의 라면을 개발했다.

4.주방은 주인이 지켜라.
주인이 주방을 소홀히 하면 음식맛이 달라지고 손님도 들쭉날쭉이다.

5.손님과의 얘깃거리를 늘 만들어라.
김사장은 매일 신문을 한장도 빠짐없이 다 읽는다. 그래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손님과 두루 얘기를 나눌 화젯거리를 이어갈 수 있다. 매력만점의 주인이 손님을 끌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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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위의 보석,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어라, 로만손 세계 진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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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엄길청의 성공시대에서도 접했던 로만손의 이야기...
두개를 동시에 들어보니까... 분석하는 관점이 다르다보니 재미있다...
엄길청의 성공시대는 개인중심.. 그러니까 사장인 김기문씨를 중심으로 성공사례를 들려주며,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재미도 가미되면서 잡다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신화창조는 같은 KBS이지만 좀더 공영방송이라서 그런지 아주 철저하게 분석을 해주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로만손 전체를 다루어 준다.
크게보면 성공시대는 말그대로 개인의 성공담을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신화창조는 기업의 성공사례를 마케팅 방식에서 접근해간다.
암튼 둘다 좋다...^^;;

이번 신화창조를 들으면서는 기업의 마케팅의 전략에 대해서 잘 배웟다..
기존의 업체들이 있는곳을 틈새시장을 찾아서 들어가서 자리를 확보한이후에 사업다변화, 고급화 등을 이루어서 점점 사세를 확장해 나가는 모습에서 앞으로 내가 나가야 할 길을 찾아보게 되었다... 파이팅이다!


 

[ 제 54 편 ]        손목 위의 보석,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어라!


                                 - 로만손 세계 진출기  


      방송일시 : 2004년 12월 3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PD: 오영식  작가: 김경민




시간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준 시계-


과거, 시계의 생명은 그 정확성에 있었지만, 이제 시계는 하나의 패션 상품이다


세계는 지금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기 위한 디자인 전쟁 중, 그 전쟁터에 출사표를 던진 한국의 로만손! 현재 로만손의 기술력은 스위스의 90%, 일본의 95%로 시계 선진국들과 거의 대등한 수준이며, 특히 세계 4대 신흥 강대국으로 초고속 성장해 러시아에서 스위스, 일본의 명품 시계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1988년 4월, 자본금 5천만원과 직원 6명의 단촐한 식구로 출발해 창업 10년 만에 로만손은 시계업계 빅3의 한국의 명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 세계 최초의 컷팅글라스 시계,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하다.


스위스의 세계 최대 시계 전시회인 '바젤 시계 박람회'는 세계 시계 시장을 주도할 새로운 디자인들이 대외적으로 첫선을 보이는 자리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만을 따로 전시하는 명품관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50개국 이상에 수출을 하고 있어야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명품관에 로만손은 좁은 관문을 통과해 당당히 명품 대열에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스위스가 인정하는 세계 명품 로만손이 있기까지는 칠전팔기의 끊임없는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년전, 당시 일본 브랜드의 OEM 주문으로 시계를 만들던 시절-


까다로운 일본의 주문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마저 엔화가 급등하고 일방적인 거래가 중지되면서 로만손은 중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데......


OEM으로서의 설움을 딛고 일어서려면 해외시장을 공략한 자사 브랜드가 필수!


해외에서도 먹힐 수 있는 이름, 로만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로만손 브랜드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시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나선 곳은 중동의 홍콩, 두바이! 당연히 첫 관문부터 호락호락 할 리 없었고, 오히려 밀수꾼으로 오인받는 수모를 견뎌야만 했다. 무수한 박람회를 거쳐 브랜드를 알리겠다는 노력만으론 로만손을 키울 수 없는 상황 속에 결국은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로만손이 자가 브랜드를 선언하고 처음 개발한 세계 최초의 컷팅글라스 시계! 그 탄생은 쉽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로만손도 깜짝 놀랄 정도로 대히트를 기록한 시계의 혁명이었다!




▶ 영원한 히트상품은 없다. 새로운 디자인을 찾아라!


연일 상승 매출을 기록하던 컷팅글라스, 그러나 갑자기 컷팅글라스 주문 오더를 취소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게 된다. 이유인즉슨 저가의 홍콩의 카피제품!


영원히 사그러들지 않을 것 같던 컷팅글라스 시계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사리지고 만 것였다. 이대로 가다간 공들여 쌓은 로만손 브랜드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지 모른다. 새로운 돌파구가 시급한 로만손!


새로운 디자인 개발을 위해 연간 매출액의 10% 이상을 디자인 연구 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컷팅글라스처럼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은 늘 가까운데 있는 법! 코인을 시계에 넣어보자는 아이디어는 둥근 시계판에 제격이었다. 이전에 화폐를 통째로 컷팅해 접착한 제품이 있었기에 로만손은 일반 동전을 컷팅하지 않고, 금궤형상을 컷팅해 다이얼에 접목시켰다. 새로운 형식의 코인 다이얼 디자인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디자인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또 한차례 넘어야 할 산은 바로 도금방식!


이전까지 해온 용액에 담그는 습식방법의 도금은 쉽게 벗겨질 우려가 있었기에 로만손은 건식방법을 개발해낸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발견한 핵심기술은 세계 최초 벗겨지지 않는 도금기술, MGP 공법 시계를 탄생시키는데...




▶ 세계시장을 개척하라!


컷팅글라스와 코인다이얼, MGP 시계가 출시되면서 다시 로만손의 매출은 증가세를 타기 시작했고 디자인 뿐만 아니라 기술력도 인정받는 회사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1991년 1월 17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탈 계기로 발발한 걸프전!


당시 로만손은 대부분의 매출이 해외수출, 특히 70%가 중동지역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이라 걸프전이 가져온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더 이상 중동만을 믿고 사업을 추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만손이 중동에서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이란, 그리스, 흑해 일대까지 연결고리가 될 터키!


그러나 중동 일대에 수출하던 디자인만으로는 터키 시장을 뚫기 어려웠다. 각 나라와 민족마다 선호하는 디자인이 달랐던 것......


로만손은 현지 바이어들을 통한 철저한 사전 조사로 각 국별 선호 디자인을 개발해냈고, 터키의 성공에 힘입어 인도, 동남아시장까지 확대되고


세계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모색한 마케팅 공략법은 중동에서 시작한 로만손의 해외시장을 세계 60여 개국으로 확대시키는 신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  일본과의 한판승부! 러시아를 공격하라!


로만손이 이렇게 세계 각 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해 나가다보니, 오히려 먼저 로만손 측에 손내미는 나라까지 생겨났다. 바로 러시아!


그러나, 당시 러시아 시장은 일본 세이코의 주무대-


세계 시장의 80%를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고, 나머지 20%는 스위스가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러시아 시장을 뚫기란 만만치 않은 상황.......


시장조사를 한결과 한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금의 색깔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붉은 빛이 도는 금을 좋아한다는 것!


로만손이 일본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문제는 붉은 금빛 도금을 어떻게 낼 것인가? 도금업체와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와 도금을 해보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로즈골드의 황금비율을 찾아냈고, 이제 러시아 시장을 공략할 디자인 개발만이 남겨진 상황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여성용 로즈골드 팔찌형 시계! 일본과 스위스가 장악하고 있는 틈새시장을 정확하게 꿰뚫은 제품이었다. 그렇게 또 러시아의 시장을 장악하고 로만손은 일대 변혁을 꾀한다.


스위스와 공동으로 스위스 현지에 시계 조립공장을 세우고 제품 생산은 스위스 공장 OEM으로 넘겨졌다. 그야말로 고급 브랜드 개발에 착수하게 되는데, 그 첫 프로젝트가 바로 엘베! 일명 스킨 슬림 워치라고 불리는 엘베는 로만손을 단숨에 고가브랜드 이미지로 올려놓았다. 작지만 거대한 기업 - 한국의 로만손 브랜드는 이미 세계 시계시장을 주도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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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의 자수성가, 기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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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것이라고는 전 재산을 털어서 250만원을 마련해서 토스트 장사를 시작해서 연간 순이익이 1억이라고 한다...
현재는 프렌차이즈까지 시작해서 매장이 100군데가 넘는다고 함...
토스트장사를 하면서도 단순하게 토스트만 파는것이 아니라.. 고객에게 웃음을 주고,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김석봉씨를 보면서 혀를 내두른다... 김석봉씨가 입원을 하자 단골들이 병문안을 찾아가고, 일본인 단골은 꽃도 보내주고, 선물도 보내주고...-_-;;
거기에다가 이렇게 번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본인은 아직도 전세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고 이 사람에게 놀란것은 자신감, 자기개발, 그리고 자기와의 싸움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장사를 나가야하는 그로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침에 일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지자...
혼자 아침에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점점 자신이 약해지는것이 밉고, 실망스러워서...
이 대목을 들으면서 허구한날 금주, 금연을 남발하고, 다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또 시작하고... 이런 나의 모습이 생각나서 상당히 쪽팔렸다...
역시 성공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아무리 쉽게 성공한것처럼 보여도 그 뒤에는 처절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것이다.
나도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나 자신과 다시 한번 싸울것이다.. 아니 평생동안 싸워야겠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나 자신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생각대로 하지 못하면서 세상에 어떤일을 제대로 할수 있을까...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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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 박형권, 때때옷 팔아 날개옷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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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람이다...
땡전한푼없이 서울로 상경해서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아서 남의 몇배가 되는 얼급을 받았지만,
옷장사로 돈을 버는것을 보고 공장을 그만두고 옷장사를 시작한다.. 그만의 방식으로...
주위에도 옷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다.. 남들 하는 방식데로 하는것 같은데...
대충대충 먹고 살기보다 멋지게 성공하려면 역시 나만의 방법을 가지고, 만들고,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만들어 준다...
그리고 역시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몇년만의 10억을 벌었지만.. 자금관리 미숙과 남을 돕겠다는 마음에 쫄딱 망할정도로 부도를 맞았지만..
다시 재기하는 모습에서 될 사람은 된다는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열심히.. 나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자... 아자! 가자! 파이팅이다!



한 번의 값진 실패로 성공을 얻은 사나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강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실패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긍정적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아동복상설할인점 ‘리틀짱’ 가맹사업을 펼치고 있는 박형권(37) 사장의 성공담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30여 개의 리틀짱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사장의 학력은 동대문 장사를 하며 어렵게 졸업한 야간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그와 같은 연배의 요즘 성공했다는 벤처기업의 사장들에 비하면 정말 별 볼일 없는 학력이다. 그러나 박사장의 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경영마인드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않다. 특히 극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과 판단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만의 장점이다. 박사장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20여 년간 사업을 하며 실패가 주는 인생의 쓴맛과 성공이 주는 단맛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일까.
박형권 사장이 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된 ‘장돌뱅이’ 형을 따라 장사를 다니면서부터.
“아동용 조끼를 팔았는데 정말 불티나게 팔리더군요. 구경 삼아 따라 갔었는데 장사가 너무 잘되니까 제가 더 신이 나서 열심히 팔았던 것 같아요. 단숨에 100만원어치를 팔고 수고했다며 형이 제 몫으로 얼마를 떼어주더군요. 땀 흘려가며 힘든 줄 모르고 번 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군요. 그때 맘먹었습니다. 장사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날로 번창했다. 청춘과 성실함을 담보로 시작한 사업인 만큼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보따리 장사꾼이었던 그를 동대문의 작은 소매점포 사장으로, 도매업 사장으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번의 시련은 찾아오게 마련. 박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래된 어음 수표의 연쇄 부도가 난 것.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 일단 총 8억원의 부도액 중 7억4500만원을 막고 5500만원만을 부도 처리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에 나앉게 됐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정을 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봉고차 한 대를 빌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재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낙 밑바닥부터 시작해 키워 온 사업이었고, 13년 동안 장사를 하며 쌓은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운 회사가 바로 리틀짱이다. 실패 경험을 거울로 삼아 그는 체계적이고 내실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회사의 부채를 없애고 철저한 현금 결제로 지난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가맹점주가 마음 편히 점포를 운영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원활한 재고 처리를 위한 무점포 가맹사업이다.
“옷 장사를 하면서 제일 부담스러운 것이 재고입니다. 그래서 점포 가맹점을 오픈하기 전에 무점포 가맹점을 먼저 모집해 점포에서 남은 재고량을 무점포에서 팔도록 했습니다.”
이밖에 두 번의 실패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는 가맹점 계약 후 이뤄지는 교육과 인테리어 공사를 직접 진행하는 것이나 가맹점 개설에 신중을 기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제게 한 번의 실패는 돈 주고도 얻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그 값진 경험을 바탕으로 가맹점주와 함께 성공을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듯 성공 또한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배가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글 정수현 사진 김경일 기자




내 자녀에 입히고 싶은 옷 팔죠”

박형권 사장(39)에게 하루는 하나의 연속된 시간이 아니었다. 4개의 독립된 시간이 모인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린 하루의 정의였다. 밤과 새벽, 오전과 오후로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서울 동대문시장 인근이다. 밤과 그 다음날 새벽까지는 동대문시장 근처의 리오 오피스텔에서 지방 상인들을 대상으로 옷을 팔았다. 새벽 5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에 그는 동대문 청평화시장으로 향한다. 도소매 판매를 위해서였다.

오전 10시에 일을 마친 그는 서둘러 택시를 탄다. 그의 세번째 일터인 노원구 태릉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순수하게 장사하는 시간만 따져봐도 하루 24시간 중 22시간이나 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동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24시간 일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편안하게 잠자리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따라서 수시로 졸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사업상 만난 자리에서도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자리에 앉았다 하면 3초 내에 고개를 떨구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 별명을 붙여줬다. ‘3초’가 바로 그것이다.

“95년부터 98년까지 3년 남짓을 3초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박형권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살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옷을 파는 기계인간이 있었을 따름이지요.” 박사장을 3초 인생으로 몰아넣은 10억원대의 빚. 동대문시장 등지에서 대규모로 옷장사를 벌이던 박사장이 진 빚은 무려 16억7000만원이나 됐다. 방만한 경영과 관리부족이 원인이었다.

부도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살고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그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는 판단뿐이었다.

일단 시작했다. 명확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빚을 갚을 것인지조차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일했다. 일에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끔 잘 나가던 때를 못잊고 괴로워 했지요.” 일에 전념하면서 다행히 과거는 서서히 잊어져갔다. 빚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부도 이후 1년만인 96년 말이 되자 박사장은 비로소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98년에 박사장은 모든 빚을 정리하게 된다.

“동대문에서 3년 동안 빚은 세상의 전부였고, 내가 사는 명제 역시 빚갚기 였습니다.” 98년 8월. 그는 동대문 시장을 미련 없이 떠났다. 당시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빚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3초 인생에서 탈출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83년에 장돌뱅이로 옷하고 처음 인연을 맺던 18세 청년으로 되돌아갔다. 봉고차 한 대를 가지고 서울 인근의 재래시장 등을 찾아 다녔다. 장돌뱅이 생활에서 그는 점차 활기를 찾았다. 3초인생에서 굳어진 얼굴에도 웃음이 찾아들었다. 옷장사는 잘되었다. 옷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이 빛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입히고 싶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구매를 결정하죠. 그게 바로 시장에서 먹혀들고요.” 이는 ‘제대로 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생산자가 될 수 없다’는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주장과 합치되는 대목이다.

장돌뱅이 생활은 또한 박사장이 사업을 재개하는 단초를 마련해주는 계기도 됐다. 시장을 돌면서 그는 프랜차이즈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이 물결이 앞으로 옷시장을 좌우하는 커다란 흐름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과거처럼 동대문시장에 파묻혀 있으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던 깨달음이었지요.” 2002년 4월 박사장은 서울 양재동에 사무실을 오픈했다. ‘리틀짱’ 아동복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한 것이다. 기존 아동복 프랜차이즈와는 달리 차별화정책을 분명히 했다. 계절마다 2000여 개의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구비,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이는 경쟁업체보다는 많게는 10배나 되는 풍부한 아이템이다. 시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그가 거래선이 남다른 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100% 반품처리도 단행했다. 이는 의류프랜차이즈 시장에서는 획기적인 것. 그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맹점 매출이 단시간에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10평 내외의 매장에 월평균매출이 3200만원을 넘어섰다. 평당 월평균 매출이 300만원을 넘는다는 것은 매장이 활성화됐다는 증거다.

가맹점은 2004년 4월 현재 약40개. 짧은 기간에 후발주자로서는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리틀짱의 성공에 힘입어 박사장은 올 상반기 중 아동복과 관련해 제 2브랜드를 런칭 할 계획이다. 제2브랜드의 성공적인 이륙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 아동복과 감성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박사장은 감성적인 사람입니다. 감성을 마케팅에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사업가라는 말이지요.” 10년 넘게 그를 지켜본 ‘작은가게창업연구소’의 심상훈 소장의 말이다.

굳이 주변의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성공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3년간의 3초 인생이 바로 성공보증수표다. 특히 신용불량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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