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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KBS 한국사傳 - 무인(武人)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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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한국사傳 -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5. 사이언스 21 - 우주, 그 끝은 어디인가?
  6. 불만제로 - 애물단지 비데, 해외 구매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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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조선의 여성 CEO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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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기생이였던 여자가 양인의 신분을 다시 얻고, 제주도의 특산물을 활용해서 커다란 부를 얻고,
제주도에 정조시절에 큰 기근이 일자 전재산을 털어서 제주도 사람을 먹여 살리고,
그 공으로 뭍으로 나와서 정조를 만나고, 금강산 유람을 했다는 이야기...
그녀의 대한 내용보다는 어려운 시대의 시대상황과 제주도의 색다른 모습등을 알수 있었던 방송...







[제7회]조선의 여성CEO
김만덕



▣방송 : 2007. 7. 2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영두PD
▣작가 : 박민경

 


재색을 겸비한 기생에서 제주도 최고의 거상까지,
조선의 상권을 뒤흔든 여인, 김만덕
그가 18세기 말, 제주도 최악의 흉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하다!
시대를 앞서 상도를 실천한 조선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펼쳐진다
 

정조 20년, 1796년 병진년 가을. 한 여인이 임금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제주도의 상인, 김만덕. 일개 평민여성이 직접 왕을 알현하는 일은 조선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제주를 덮친 최악의 흉년, 그리고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


정조 19년. 제주목사 이우현은 초조하게 진휼곡을 실은 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악의 흉년으로 만 여명의 백성이 굶어 죽은 제주도의 실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처참했다. 제주도는 농토가 척박하고 경지면적이 적은데다가 마침 제 주를 강타한 태풍 때문에 수확을 앞둔 곡식은 짠 바닷물에 모조리 말라 죽고 말았다. 관의 허락 없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백성들은 시체를 파먹거나 자식을 내버리는 등 극 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진휼곡을 싣고 제주도 로 오던 12척의 배 중 5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되고 만다.

패닉상태에 빠진 제주도!
그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인이 수천석의 쌀가마니를 내놓는다!

미모의 기생에서 제주도 최고의 거상으로…
굶주린 백성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친 여인, 김만덕!
그녀는 어떻게 흉년을 구제할 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양인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를 여읜 후 기생이 된 만덕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천민이란 신분의 벽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싶은 만덕의 꿈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과감히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를 버리고 관에 읍소해 양인 신분을 되찾는다. 김만덕이 객주를 차린 건입 포구 만덕은 제주목 관아 옆 건입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육지 상인들과 거래를 시작한다. 기생시절의 경험으로 특정 상 품의 수요를 잘 알았던 만덕은 제주도의 특산물과 육지 상품의 매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조선의 상권을 거머쥐다! 여성 CEO 김만덕

제주도의 특산물인 미역, 말총, 양태 등은 육지와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당시 미역은 일부 바다와 제주도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따르면 조선백성의 절반이 제주도 미역을 먹었을 정도로 미역의 수요가 높았다. 말의 꼬리와 갈기털로 만드는 말총과 갓의 재료인 양태 또한 제주도의 독점적인 특산품으로 전국적인 수요가 대단했다.

만덕은 미역, 말총, 양태 등과 같은 제주도의 특산물을 판매하고 육지의 쌀과 소금 등생필품을 구매하여 상품 간 시세 차익을 통해 큰 이익을 얻는다.

중개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만덕은 육지와 직거래 를 시작한 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로보다 배를 통한 선 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육지와의 교역이 활기를 띄게 된다. 지역에 따라 가격차이가 조선의 취약한 물류시스템을 잘 알 고 있던 만덕은 강진, 강경 등지까지 직접 배로 물건을 공급 하면서 큰 이익을 얻는다.


만덕의 평생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제주도 백성을 살린 김만덕. 그녀의 선행을 알게 된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묻는다. 김만덕의 소원은 한양에 가 왕을 만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 김만덕은 왜 이런 소원을 말한 것일까?


당시 조선은 제주 여인이 육지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할 정도로 제주도민의 섬 밖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러 나 만덕은 국법을 깨고 육지로 나와 평민여성 최초로 정조를 알현한 후 금강산을 유람한다. 시대를 앞서 계급과 성 역할을 뛰어넘은 김만덕. 그녀의 의기와 선행은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 시와 문장으로 전해진다.


귤 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
                                                                                   -박제가-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였으니 온 천하의 수많은 사내들 중에서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을까.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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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傳 - 무인(武人)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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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이후.. 정말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노론들.. 영조가 정조에게 왕을 물려준다고 할때... 못하게 막느랴고 승지가 글을 쓰는것을 막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런 시련속에 왕에 오른 정조... 하지만 군대권은 거의 노론이 장악하고, 거의 사병과 같은 수준...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어서 점점 키워가면서 그 세력을 키운다...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때 옆에서 음식을 가지고 약을 올리는 자들이 조정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보고만 있었던 그... 그가 드디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고 했다고.. 그리고 한달뒤에 죽었다고 한다... 그냥 딱 생각이 든것이.. 암살 혹은 독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정말 취임식때 했었다고 하는데.. 방송에서도 그냥 대충만든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꽤 많이 반영을 한듯하다.
암튼 그때나 지금이나 붕당정치로 중요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더욱 피폐해져가는 나라꼴이 그저 가슴아플뿐이다...
뭔가 시원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은 없는것인지...
조선은 바로 이뒤를 시작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으니... 오늘 이명박대통령의 취임식인데.. 잘했으면 한다...


[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정조의 어진

                                                       

             개혁군주 武人 정조대왕


어진을 그릴 때 정조는 군복을 입고 세번의 어진을 그렸는데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는게 없고

지금 어진은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이다.

그래서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4,000여 권의 책을 만든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식을 지녔던 정조는 성리학, 문학, 과학, 의학에 이르기 까지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규장각 문신들을 가르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이유로 성군으로 온화하게 그리다 보니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다.


         

                                                 KBS 한국사 "무인 정조대왕"에서 캡쳐

                            선원보략(조선시대 구황실 족보)에 나오는 정조의 무섭게 생긴 모습이다.



           

                                                   원손 시절(8세)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

            숙모님 앞
          상풍(商風, 가을 바람)에 기후(氣候)가 평안(平安)하신지 (숙모님의) 문안(問安)을 알기를 바라며

          (숙모님을) 뵈온 지가 오래되오니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봉서(封書,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정조가 12세에 쓴 글


           "진선폐사위지경"은 맹자에 나오는 글귀로

           왕에게 좋은 것은 권하고 나쁜 것은 막아주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면서 당시 신하들을 의미심장하게 꼬집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포도대장 구선복이 뒤주에 8일을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조롱하고 있다. (캡쳐화면)

                       이산은 이 장면을 몰래 숨어서 보았다.


"존현각 일기(세손 때 일기)"에 뒤주에 갇혀서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힘없어 어찌 할 수없는 자신을 한스러워 하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1775년11월 영조51년, 영조가 82세 되던 해에

모든 신하들 앞에서 세손 이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고 하교를 내리는데 노론의 홍인한은 승지의 기록도 찢어버리고 승지가 듣지도 못하게하는 횡포를 부린다.

존엄한 왕명도 거부하는 냉엄한 현실을 이산은 일찍부터 경험한다.


                         

                                                 명의록  '존현각일기'가 기록된 책


         ★ 존현각 일기

*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하여 알게하기 위해서다.

* 임금을 만날때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끄는 소리를 탁탁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는  

   뜻이 없었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 사관이 기록을 못하는 지경이었다.

   홍인한의 권세가 나라보다 더 대단했다.


                  


노론의 생각은 "죄인지자 불위군왕 -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 없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면 옛날의 연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어떻게든 세손 이산을 막아야 겠다고 다 같이 뜻을 모으는 것이었다.


1776년 3월 10일 많은 신하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이산은 왕위에 오른다.

왕이된 이산의 일성은


     寡人, 思悼世子之 子也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초, 자객이 3번에 걸쳐 궁궐을 침입했는데 정조의 침실까지 온 적도 있었다.

역모와 도둑도 들었다.


구선복으로 말하면 손으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먹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떨리고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정조실록-

하지만 그가 병권을 쥐고 이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


정조는 노론의 나라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장용영고사


           

                                                   무예를 기르치는 정조 (재현) KBS 캡쳐


정조는 총 37번의 무과를 치르는데,

18세기 조선의 전설적인 일당백의 무사 백동수 외 30명으로 정조의 호의 군대 "장용영" 만들어

하루에 3,000발의 활을 쏘게하고 사도세자가 완성한 십팔기로 무장케 한다.

그 때까지의 군대는 권문세가가 거느린 가병이었다.

군대가 임금의 손을 떠나 사병화되어 있어 유사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군대여서

가병(家兵)의 폐단과 다문(多門)을 염려하였다.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기와 마상무예 6기를 합하여 집대성한 책이다.


                                     목판본. 4권 4책. 규장각 도서.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에게 명령하여

                                                  업하게 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1598년(선조 31)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와

                 1759년(영조 35) 간행된 《무예신보()》의 내용을 합하고 새로운 훈련종목을 더한 후

                                                      이용에 편리한 체제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영은 18,000명으로 늘려 나가며 10년을 넘게 군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무인군주가 되었다.

어사고풍첩(정조의 활쏘기 기록)에 정조는 활의천재 신궁이였다.

145m의 표적을 5발을 1순으로 10순 그러니까 50발을 쏘아 50발을 다 맞췄다.

표적이 너무 커  작은 부채,곤봉,편곤에 쏘는데도 작은 부채는 5발쏘아 4발, 곤봉에10발쏘아

10발을 다 맞췄다고 한다.

요즘 국궁 선수들은 50발을 다 맞추는 경우가 1년에 한번쯤 나오고 선수 개인으로 보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라 한다.

특히 진법에 관심이 많아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편찬해서 규장각 학자 정약용,이덕무 등도 진법을 익혔다.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군권을 장악한 정조는 평생 숙원사업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명당 "현륭원"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죽게한 심환지,김종수,이병모 등 노론대신들을 묘앞에 세우고 정조는 오열하니 노론 신하들은 두려움에 떤다.

잔디와 흙을 움켜잡고 울며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실록1794)


           

                                                           정조 화성 행차도


노론은 종로 북촌에 권문세도가를 형성하여 살면서 권력만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

상권을 쥐고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곤궁케 했다.

정조 18년  수원 팔달산에 올라 수원성(6Km)을 지으라 하고 수원을 요즘의 신도시, 상업도시로

발전시켜 노론세력의 바탕을 약화 시킨다.

수원성에는 장용외영 6,000명을 상주 시키며 요새를 만든다.



          

                                                    연거도 (정조의 야간 훈련을 그린 그림)


정조19년  6,000여명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하여 전시도 아닌데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를 조련하고 호령하며 노론세력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품고있는 깊은 뜻을 펼쳐나간다.



                

                                                                   정조 어필


                            

                                                           정조필파초도


                             

                                                             정조필국화도


                                

                                                                      국화도 낙관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



           



정조 자신을 달빛에, 신하들을 구름에 비유...

임금이 백성에게 직접 온정을 베푸는 정치를 꿈꾸었다.

임금 밑에 간신배들이 끼어들어 백성을 곤궁케하고 핍박하는 정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라의 은혜을 주고싶었다.

구름이 끼지 않은 환한 달빛을 백성들에게 비춰주고 싶음을 뜻하고 있다.


* 천하동례(天下同禮) - 임금도 사대부의 하나라는 노론의 사상


도끼로 궐문 기둥을 찍고 혈서를 쓰며 노론은 반기를 든다.

 "임금이 거만하게 성인으로 여기며 신하들을 깔보고 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1800년 정조24년 5월30일


오회연교(五晦筵敎)


- 오늘의 하교는 참다 참다 나온 것.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을 것이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노론세력을 척결하겠다.


신하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한달 뒤 1800년 6월28일,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49세로 정조는 죽는다.

남인들 사이에선 독살되었다 했다.

정조,  그의 꿈은 이렇게 멈춘다.


상께서 승하하던 날 삼각산이 울고  고을에서 벼가 하얗게 죽어 버렸다. (정조실록)


임금 아래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조!

노비제를 혁파하고 서얼 차별을 없애는 등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며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개혁군주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의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국군 전통 의장대 ,정조시대의 십팔기 무술 재현




                                                                        재현사진 ;    KBS '한국사 무인정조' 캡쳐

                                                                         참조 ; 한국사傳 ' 武人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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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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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토정 이지함에 대해서 책을 본적이 있어서 익숙한듯한 이지함...
하지만 도인, 기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방송...
상당한 개혁세력인듣하고, 무엇보다 백성을 위하는 모습이 대단한듯한 모습...
마포지역이 자꾸 언급되어서 시선이 가기는 했지만.. 그다지 참신한 내용은 아닌듯한 방송...












[제12회]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



▣방송 : 2007. 9. 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박건PD
▣작가 : 정윤미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솥갓을 쓰고, 마포강가의 흙집에 산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귀인(貴人)이었다.

▶ '토정비결'의 미스터리, 왜 이지함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미래를 점치는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예견, 가솔을 이끌고 움직여 당대 최대의 정치적 무고사건인 청홍도 사건에서 살아남았으며,

"15년 후에는 이 나라에 피가 천리나 흐를 징조이다."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지함이 백성들의 세상사 고민거리를 풀어주고, 처방하기 위해 지은 책이라 알려진 <토정비결>. 그러나 <토정비결>에는 저자가 기록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풍속서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70%이상이 행운의 괘로써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
<토정비결>. 그 저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안에 토정 이지함에 관한 진실이 담겨있다.


 

기인(奇人)으로만 기억되어야 하는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을 쓰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토정'을 지은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지함은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직접 박 장사를 하여 막대한 부를 끌어 모으게 된다. 대대로 위세를 떨치던 당대 최고 사대부집안의 자손이었던 이지함.
상업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부를 버리고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에 내려간 것이다.
이지함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해주고, 축적한 곡식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 양반인 그가 장사를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빈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를 앞지른 선진적 경제사상을 발휘하다.
쉰일곱이 되던 해, 재야에서 성리학 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이지함에게 드디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선조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이다.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지함.
그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 옥 등의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을 개발, 해외에서 유통 시키자고 주장한다. 소수 지배층들이 독식하고 있는 자원을 국가가 관리해서 외국와의 통상을 통해 부를 축적하자는 것이다. 이 해외통상론은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지함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경제사상가였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토정 이지함-

백성을 가난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지함을 21세기형 복지가로 만든다.
민중들의 가난이 유난히도 가혹했던 조선 중기,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구제기관 걸인청을 설립한다.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였다.



이지함이 죽은 후
백성들을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를 세웠다.


"현감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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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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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sbs에서하고 있는 방송드라마의 실제 인물...
연산군 이전부터 5명째의 왕을 모셔온 내시의 최고자리인 상선인 내시인데...
연산군이 폭정을 휘두르자 죽음을 각오하고 그에게 직언을 했다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내시...
연산군이 이후에 모든 문서와 말에 처짜와 선짜가 들어가는것을 없애고, 심지어는 과거에 처,선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람은 낙방을 시키기도 했다는....-_-;;
김처선이 용감하고, 바른것은 인정하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이 없는곳에서 왕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흥청이라는 기생들과 놀고 있을때... 또 죽어가면서 많은 신료들이 보고 있을때... 그런 면박을 당했으니.. 거의 광기인 연산군이 아~ 미안하오.. 라고 할리는 전혀 없을텐데... 현재적으로 보면 화술의 기본이 안되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14회]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 방송 : 2007. 9. 22 (토) 20:10~21:0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 연출 : 송철훈 PD
■ 작가 : 정종숙


"처(處)자는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쓰지 말라."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처참하게 죽이고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도대체 연산군과 김처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목숨 걸고 지켜내었던
진정한 "왕의 남자"였다.


▣ 영화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연산군의 곁에서 평생을 걸고 눈과 귀어 되어주었던 영화<왕의 남자>의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왕의 그림자로서 왕을 독살할 수도, 왕의 생명을 지켜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 상선내시였다. 지금 '내시 김처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 傳"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시부 지침서 '내반원기' 등의 사료와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내시의 전문 직업적 면모를 파헤치고, 김처선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밝혀낸다.


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남자,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분의 임금을 모셨던 내시, 김처선. 성종과 연산군 대에는 왕의 건강을 돌보고, 그의 지시와 명령을 전하는 상선내시로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선내시는 왕의 신임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자리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서 왕을 대신해 성종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시릉내시로 근무한 김처선.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이자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의 그림자였다.



왕의 독이 될 것인가. 왕의 생명이 될 것인가!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연산군은 기생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날마다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 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어 벼 수확을 하러 금표(군사훈련지역이나 왕의 사냥터에 세우는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문)안으로 들어왔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연산군은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내시가 승명패를 차고 지나갈 때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내시들 중에는 대낮에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이도 있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거라."

口是禍之問 舌是斬身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은 "신언패"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궁궐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가운데 김처선은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위해 마지막 충성의 길을 선택한다. 내시의 본분은 왕을 바른 길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던 김처선. 1505년 4월 1일, 그는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 채 목숨 걸고 왕의 앞에 선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펴셔야 합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
      김처선에 대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다.




[전의면 옛지도
- 김처선의 집을 파헤쳐 연못을 만든 흔적]
왕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 그의 직언에 분한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린다.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이름을 고쳐야 했고, 공문서에 '처'자를 사용했다가 국문을 당한 이도 있었다.

또한 김처선이 나고 자란 전의현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리고, 그의 고향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처절하게 김처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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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21 - 우주, 그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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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간존재의 미미함.. 나약함.. 허무함을 느끼고는 한다...
기존의 방송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데.. 우주의 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던 방송...-_-;;
다만 언제가 사라질 지구, 다른 은하계와 충돌하게 될것 같은 우리은하...
하지만 그런것에 굴하지 않고,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 그들은 자신이 하는 하나하나가 우리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긍정적으로 믿고 연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멋졌다는...

우주에 외로이 떠있는 한 점,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2003년 KBS 10대 기획 사이언스 21

▥ 우주, 그 끝은 어디인가?

*방송일시 : 2003년 4월 30일 밤 10시
*CP : 고희일
*담당 PD : 송대원
*작가 : 이영옥
 


우주.. 그 끝은 어디인가?
광활한 밤하늘, 그 속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들..
그러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렵게 설명되어 있는 책 속에서 답을 찾기엔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다. 천문학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알려진 허블 망원경. 우주의 창, 허블을 통해 우주를 만나다.
 


1. 우주의 처음을 상상하다.

빅뱅! 팽창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지름 24cm 정도의 아주 작은 영역으로 시작해 순간, 대폭발한다. 그로부터 38만년 후, 최초로 빛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최초의 별이 생겨나기까지 또 몇십만년이 흐른다. 은하계를 구성하는 물질들, 우주 속의 물질들... 고작 우리가 알고 있는 건 4%뿐. 나머지 96%는 미지의 물질, 다크 에너지. 전세계 과학자들에게 내려진 난제. 다크 에너지를 밝혀라!
 


2. 우주는 얼마나 클까?

우리 태양계를 야구장에 넣어본다면? 태양의 위치는 홈 플레이트 중앙, 수,금,지,화성의 4개 행성은 모두 홈 플레이트 주변에 몰려 있다. 그리고 혜왕성과 명왕성은 야구장 담장을 넘는다. 이 우주를 야구장에 넣는다면? 우리 은하는 야구공 위의 한 점일 뿐이다.
 


3. 우주에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

초당 1만 킬로미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속도보다 빠르게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이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빨라지고 있다. 100억년 후에는 가장 근접해있는 은하계만 겨우 관측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주에는 암흑만이 존재한다는데... 우주가 팽창하는 이유는? 현대 과학은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4. 그렇다면, 우리의 최후는?

¤우주 시나리오
1 : 앞으로 50억년 후 태양은 소멸하기 직전, 적색거성으 로 커져 수성, 금성, 지구를 삼킬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태양궤도를 거의 차지해버리게 된다.

¤우주 시나리오
2 : 우리 은하는 초속 300km로 접근하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70억년 후 충돌하게 된다. 우리 인류는 어떻게 될까? 전우주적 위기를 대비하여 과학자들은 우주 이민을 생각한다. 어디로 가야 할까?
 


 

(사진)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충돌할 때에
우리 은하에서 보이는 모습을 그린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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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로 - 애물단지 비데, 해외 구매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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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을 보면서 불만제로가 소재가 떨어졌나.. 대부분이 휴가를 갔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방송...
비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좋았으나... 일부 물건이 그런 하자가 발생한것을 가지고 전체 비데를 애물단지로 만드는것은 문제이고, 소비자에게 어떻게 체크를 하고, 대응을 할지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몇몇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약속받는것으로 끝...-_-;;
해외보석은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외국에서 사기마케팅을 이용한 여행업체와 보석업체의 단합에 의한 사기를 보여준 방송... 역시 싼것만 믿고 찾는것이 정보없이 속기딱 좋다라는것을 잘 보여준다...


한국소비자원 기준, 비데 관련 상담건수
2006년 340건에서 2007년 이래 400건으로 증가!!
국내 비데 보급률 28%, 시장 규모 4000억 원을 훌쩍 넘기며
소비자 불만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비데!! 

불만제로로 접수된 한 건의 동영상 제보. 원인 미상의 화재 사고 현장에 제로맨이 출
동했다. 제보자가 주장하는 화재원인은 바로 비데!! 비데와 변기는 이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상태였는데. 분진이 온 집안을 뒤덮은 화재현장. 제보자
는 지난 11월 사고 후, 집근처 숙박업소에 머물며 사고현장을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
었다. 제작진은 현장 취재 및 별도의 스펙터클한 실험을 실시, 비데 화재 상황
을 직접 재연하여 그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공개한다.

2년여 전, 30만 원짜리 비데를 구입 설치한 K씨는 잦은 오작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간 받은 AS 비용만 10만원을 훌쩍 넘는다는데.
1년여 동안 혼자 제멋대로 작동되는 비데 때문에 입주 1년 만에 새집 바닥이 물이끼
로 흉하게 변해버린 B씨의 집. 그리고, 비데에서 찌릿찌릿 전기를 느낀다는 상당수
의 제보자들!! 심한 경우에는 통증을 느낄 정도라는데. 
믿고 사용했던 비데에서 이러한 감전, 화재, 오작동은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
까? 


문제의 비데들을 수거, 분석에 나선 불만제로!!
방송 최초 공개되는 비데의 내부 구조는?

365일 습기와 열기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비데. 불만제로가 전격 해부해본다.
녹슬어 가루가 된 나사부터 내부 깊숙이 침투한 습기와 오물 때까지.
문제는 이들이 각종 오작동과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비데 사용은 불가능한 걸까? 

2007년 한 해 해외여행자 수 1,332만 5천 명!!
이들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패키지 여행상품!! 
패키지여행에서 비싸게 구입한 보석 때문에 속 앓고 있는 소비자들을
불만제로가 전격 취재했다.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한다는 희귀한 진주. 100만 원 주고 동남아에서 산 이 보석. 
알고 보니 5만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S씨의 사연은?
주인공 J씨의 중국산 30만원 자수정세트는 길에 버려도 주워가지도 않을 보석이라는
데. 착용하기만 하면 피나고 고름난다는, 희한한 14k금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난 11월, 태국 패키지신혼여행에서 120만원 상당의 루비반지를 구입한 신랑C씨
는 5배 이상의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때문에 뒤늦게 환불 요청을 결심했다. 불만제로
의 끈질긴 추적 끝에 겨우 현지 업체와 연결되었는데. 과연 환불을 받을 수 있을까?

불만제로는 수십만 원에서 700여만 원대까지 약 20여종의 진주와 유색보석들을 직
접 수거, 품질 및 가격 확인에 나섰다. 
놀랍게도, 국내 확인 가격은 해외 구입 가격의 1/3에 불과했는데!!
이들 보석은 품질 또한 가공 처리되거나 불순물이 섞인 것으로 국내에서 매우 하급
에 속하는 제품으로 확인되었다. 

70층이 넘는 최대 규모의 보석매장건물, 그 실체는?
동남아의 꽃, 태국 패키지여행의 필수 코스 보석쇼핑. 
백화점을 압도하는 분위기, 삼엄한 경비까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이곳.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인 패키지관광객은 누구나 둘러봤단다. 한국인 관광객
을 실어 나르는 차량만 수십 대, 패키지관광객들만을 상대로 제품을 판매하는 업체
들, 알고 보니 판매원도 모두 한국인?! 친절한 상담은 기본. 환불 교환, 서울 협력업
체의 특별 서비스를 서슴없이 약속하는 이들은 과연 믿을만한 것일까. 
불만제로가 그 실상을 낱낱이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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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공부의 제왕 - mp3로 클래식이나 가요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를 할때의 학습효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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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으면서 공부를 할때 집중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테스트를 해본 방송
가요는 가사때문에 방해를 받을듯하고, 락음악은 시끄러워서 집중력이 떨어지는듯하고,클래식이 제일 좋다고...
물론 개인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참고해 볼만한 내용...

다른 내용은 별 내용은 없었지만, 이번주의 스폰지와 일맥상통한 내용의 방송인듯



국내최초!! 성적향상! 리얼 버라이어티 <공부의 제왕> 그 열세 번째 이야기!!
자신의 학습스타일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학습계획을 세워 실천 중인
공부의 제왕 3기 경호, 윤구, 성민!

공부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한다! 제왕실험실!!
음악을 들으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대한민국 학생 모두를 긴장시킨 놀라운 궁금증!!
음악과 집중력의 상관관계 집중해부!!
산만한 그룹의 대표주자! 슈퍼키드와 함께한 특별한 실험!
과연 어떤 음악이 공부에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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