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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것이 알고 싶다 - 숭례문 미스터리 그래도 남은 의혹의 실체
  2. MBC 뉴스후 - 병원진료비 알고 보니
  3. 걸작다큐 2000년의 전설, 진시황제
  4. kbs 한국사傳 - 아버지의 눈물, 영조
  5. 한국사傳 -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6. 그것이 알고 싶다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7. 한국사傳 - 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그것이 알고 싶다 - 숭례문 미스터리 그래도 남은 의혹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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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바뀐 진행자.. 하지만 첫방송의 내용에 기존에 알려진것과 거의 다를바가 없고.. 상당히 중구난방인듯한 느낌이 들었던 산만한 방송...
무엇보다도 지금 남대문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것이 참...



방영일 : 2008-03-01

○ 제 목 : 숭례문 미스터리 - 그래도 남는 의혹의 실체
○ 방송일시 : 2008년 3월 1일 (토) 밤 11시 5분
○ 연 출 : 최 성, 임 찬 묵 / 작 가 : 최 경
그것이알고싶다의 새로운 진행자 김상중!
연기자 김상중, 그가 그것이알고싶다의 5번째 진행자로 나선다. 때론 부드러운 이미지로, 때론 한 없이 날카로운 이미지로, 또한 진지하고 때론 코믹한 캐릭터로, 완숙의 연기력을 보이는 김상중. 그가 미스터리한 사건들에 대한 추적과 우리 사는 사회의 큰 이슈에 대한 진실찾기를 강화할 그것이알고싶다 제2의 중흥기를 이끈다.
그가 맡을 첫 번째 소재는..... 국보1호 숭례문 화재 속에 남은 의혹.

숭례문 화재 그리고 2주, 여전히 남겨진 의혹들은?
숭례문 화재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숭례문은 이미 불탔고, 방화 용의자는 사건 하루 만에 붙잡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의문은 남는다. 우리는 왜 숭례문 화재를 막지 못했을까? 그리고 범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숭례문에 불을 놓을 수 있었을까? 숭례문의 불길은 어떻게 총 동원된 첨단 소방장비의 진화작업에도 계속 다시 살아나 결국 숭례문을 무너뜨리고야 말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숭례문 사건은 의혹투성이다.

‘오죽하면 이런 짓을 하겠는가.’
숭례문 방화는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아집에 사로잡힌 한 노인의 사회 증오 범죄인가?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수많은 방법 중 방화를 선택했는가?
노인은 방화시 시너 패트병 두 개를 세워 놓고 한 병을 바닥에 쏟아 도화선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숭례문내 설치된 CCTV 어디에도 그는 잡히지 않다. 70대, 그리고 초등학교 학력뿐인 이 허름한 노년의 방화범이 그렇게 지능적일 수 있는 것일까?
3명의 목격자! 그리고 너무도 상이하게 엇갈리는 진술들의 공방과 화재 속에서도 전혀 그을림 없이 멀쩡했던 범행도구 라이터 두 개... 불길 속에서 일회용 라이터는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용의자 채씨가 검찰로 송치되면서 찜찜한 한마디를 남긴다 “나는 억울하다 검찰에서 진술하겠다.”

‘숭례문! 숭례문! 불났어요!’ ‘화점을 찾았는가!’
최초 신고 이후 3-4분여, 도착해서 누각 2층 바닥 진화까지 5-6분여, 그리고 천정에서 계속해서 새어나온 원인 모를 연기..
그렇게 10분 여 숭례문 지붕 안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단지 패트병에 담긴 시너 3통으로 4미터여의 숭례문 누각 천장에 불길은 어떻게 닿을 수 있었던 걸까?

'기왓장을 뜯으란 말이야!'
불길은 빠른 속도로 숭례문 천정 안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진화에 나선 소방대원들도 목조건물은 시간이 생명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도 미치도록 불을 끄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대원들은 진화에 실패 했고 숭례문은 무너졌다.
지붕을 뜯었다면, 불길은 잡을 수 있었을까? 그 상황에서 기와를 뜯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문화재전문가, 화재전문가 등과 함께 숭례문을 세트로 재현, 화재 상황을 실험을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또한 김상중씨가 소방대원들과 함께 화마와 사투를 벌였던 그날의 시간을 재구성해 보았다. 과연 숭례문의 세트가 불타면서 드러내는 화재 미스터리의 진실은 무엇인가?

폐허의 숭례문, 사람들 감정의 해우소(解憂所)?
불이 난 다음날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눈물을 흘리고 굿판을 벌이는 등 불타버린 숭례문에 대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응어리를 해소한다. 이 특이한 신드롬, 국보1호와 감정의 해우소 사이에서 그려지는 숭례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무엇인가. 화재 후 스무날이 지나도록 이런 신드롬 속에서 불탄 숭례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겨져 가고 있는 것인가.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는 새로운 진행자 김상중씨와 함께 숭례문 화재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어보고, 소실된 후 오히려 부각되는 국보1호 숭례문의 의미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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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후 - 병원진료비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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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불만제로에서 터트렸던 내용보다 좀 더 깊게 들어간 내용...
의사.. 병원이라는것이 정말 돈벌이에 이렇게 치중하면서 살아가야하는지.. 참 어이가없다...
얼마전에 엄마병원비때문에 민원을 넣었다고 병원측에 이야기만을 듣고 취하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뭔가 꿀리는것이 있어서 그런것은 아닌지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던 방송...
암튼 무섭고, 살벌한 세상이다...
일본은 암치료를 받아도 거의 돈을 안낸다지만, 보험료가 훨씬 비싸고, 영국의 사례처럼 문제가 많기도 할텐데... 참...
거기에다가 사보험도 거의 배째라식의 운영이 정말 웃긴다는...

1977년 전국민 건강보험 시대가 열렸다. 진료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
록 국민건강의 안전망이 되어주겠다던 건강보험 그러나...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
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데...
평생 차곡차곡 보험료를 납부하지만 만일의 사태에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진료비 그 숨은 진실을 찾아라....

▶진료비 모르면 당한다?  
무심코 받아넘긴 진료비 영수증. 그 속에 내가 모르는 진료비가 숨어있다?
쓰지도 않는 수술 소모품이 떡하니 진료비 영수증에 청구되어 있고, 보험 적용이  되
는 진료비도 환자에게 청구한다? 보험이 적용되어 진료비가 약5천원으로 정해져 있
지만, 웬일인지 환자는 치료비로 8만원을 부담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부당진료
비와 편법 진료비로 인해 피해를 보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잉 진료비를 심사
하는 건강보험 삼사평가원에는 하루 300통 이상의 진료비 확인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는데... 환자를 속이는 진료비 영수증 그 속에 숨은 진실을 찾는다.

▶ 환자를 등치는 비급여 진료비! 
평생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지만 혹시라도 큰 병에 걸리면 수 백 만원에서 많게
는 수 천 만원의 진료비가 나온다. 그 이유는 바로 비급여 진료비 때문인데... 비급
여 진료비란, 건강보험에서 처리 하지 못하는 항목으로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하는 
진료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매년 비급여 진료비가 늘어나고 있으며, 환자들의 진
료비 부담은 그만큼 높아만 간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비급여 진료비 영역
에 국민의 건강권을 쥐고 있는 공보험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공보험과 늘어나는 사보험!
국민 1인당, 1달에 내는 민간 의료보험비는 약 9만3천원. 전국민의 53%가 민간
의료보험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통계). 더 이상 공보험을 믿지 못하는 국민들은 
점점 사보험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사보험은 고액진료비로부터 우리를 지
켜줄 수 있을까? 위암 말기로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한 A씨. 그나마 암보험에 가입
해 병원비를 보상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그녀에게 일부분
의 보험료만 지급하고, 그녀가 가입한 모든 보험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는데... “가입
할때는 고객님 정작 보상받을 때는 나몰라라 ..” 하는 민간 보험사들의 비양심적인 
행태를 고발한다. 

가난하면 아플 권리도 없다? 돈 없으면 건강하게 살 수 없는 나라 대한민
국, 점점 늘어만 가는 비급여의 영역과 흔들리는 공보험의 현실을 뉴스 후가 집중 분
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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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다큐 2000년의 전설, 진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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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에 왕위에 올라서 30대에 중국을 통일하고, 수많은 암살의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봉건시대를 타파하고, 중앙관료를 파견하고, 만리장성을 쌓기도 한 그의 일생을 그린 두편의 다큐...
나이를 먹어서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불로장생하는 약을 찾기도 하고, 큰 무덤을 만들었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묘는 찾지 못했고, 장수를 위해서 먹은 수은이 중독이 되어서 광인으로 죽어간 그...
대단한 일생을 살았지만... 욕심과 광기에 망쳐버린듯한 말년이 너무 안타깝다...


진,한의 중국 통일

춘추시대의 패자는 서로 격렬하게 싸웠는데 주 왕실과 나란히 7개의 나라가
유력해졌다. 이런 상황은 전국시대라 불리며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진(秦)이 황하중류에서 세력을 떨쳐 다른 나라들은 진과
동맹할 것인가 대항할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진은 주 왕실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는 다른 나라도 평정하여 중국전체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 사업을 완수한 인물이 시황제이다. 그는 강대한 무력을 정비함은 물론
거대한 관료제를 만들어 중앙집권 국가를 완성했다.

진의 통치정책

첫번째 ; 이름만 남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지방제도를
두었다. 전국을 군과 현으로 구분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황제 자신이 시찰하거나 관리나 군대가 왕래하기 위해 도로망을 정비했다.
두번째 ; 정치의 존재형태를 이론화한 것이다. 제자백가가 앞을 다투어
자기 이론을 주장했지만 시황제는 법가(法家)라는 일파의 생각을 따라
엄격한 사회규칙을 중시했다. 반대하는 학자를 생매장 하고 그 책을 불살라
사상 통제를 강화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불리는 언론 탄압은 좋은 예이다.
세번째 ; 중국의 정치 지배 영역의 대외적인 확대와 방위이다. 반복되는 원정에
진의 지배권은 서역에서 중국 남부를 넘어 베트남 북부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그당시 중국의 북방에는 이미 몇몇 유목민이 침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하여 흙으로 성채를 쌓는 나라도 있었다. 시황제는 노동력을 대량 동원,
이런 성채들을 연결하여 황하 상류에서 황해에 이르는 2500Km의 거대한 성벽
을 완성시켰다. 이 만리장성은 인류가 이룩한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한다.


강대한 한 왕조

시 황제라는 정치적 천재의 성과는 , 그가 죽은 뒤에 계속된 반란 때문에
곧 붕괴 되고 말았다. 다시 정권을 둘러싼 유력자들사이에 전란이 일어났
다. 그 전후의 사정은 사마천의 사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뒤에 중국인에
게 많은 교훈을 주게 되었다. 전란의 유력자였던 유방과 항우의 결전은 농
민 출신 유방의 승리로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했다. 이것이 한(漢)이
라는 국가인데 유방은 고조라고 불리게 된다.

고조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고 진의 통치 정책을 완화시켜 군국제를 채택
지방 유력자의 지위를 어느정도 인정했다. 하지만 반세기 뒤에 등장한 무제
는 다시 강력한 관료제로 중국의 통일을 회복했다.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파미르고원에서 한반도 까지 달했다. 무제의 정치에서 두드러진 것은 국가
재정이다. 물자조달제도를 정비하여 물가정책에 착수했다. 소금과 철이라는
기본 물자를 전매하여 수입을 얻으려 했다 . 이것은 이후의 왕조에도 채택
되어 전통적인 재정 정책이 되었다.
한 정권은 기원후 1세기에 무너졌고 , 잠시 신(新)이라는 왕조가 세워졌다가
다시 한 왕조가 부활했다(후한 後漢). 초대 광무제
(후한의 초대 황제;기원후
22년에 병사를 일으켜 신 왕조를 무너 뜨리고 한을 부흥, 낙양에 수도를 정
하고 내정에 힘씀)
부터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 졌다




영국에서 제작한 2000년전 始黃帝에 대한 다큐입니다. 주목해서 볼 부분이 몇개 있습니다.

1. 焚書坑儒에 대한 李斯의 생각

황제가 떠난 황실에서 승상의 위치에 있던 이사는 자신의 전체주의 통치를 마음껏 펼칩니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통제하기로 결심합니다.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식의 공급을 끊는 것이죠. 대나무 서첩에 새겨진 모든 책들이 불태워집니다.

"글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보를 담기 위해서다. 쓸모가 있는 정보도 있다. 더 원대한 뜻을 위한 정보들, 농업, 의학, 그런 것은 남겨둔다. 안전하게 보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가면 된다."

2. 불로장생과 수은 중독

화려한 사후 세계를 위하여 황릉을 만들었으나 죽은 후의 미지의 사후세계보다는 현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원한 시황제는 전설속의 봉래산으로 서불을 보내고, 자신은 서불이 처방한 수은알약을 먹었습니다. 우선적으로 당시 의원들이 처방한 것은 어린 여성들 여러명과의 성관계였고 이는 소녀경이란 책으로 남아 있죠. 서불은 화학적인 처방을 권했는데, 당시 수은은 영언히 변치 않는 영원한 물질이므로 황제가 이 물질을 섭취하면 황제가 무덤에 들어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이 문제였죠. 수은이 장수에 좋다고 당시의 연금술사들은 믿고 있었으니 잘못된 처방은 아니었던 겁니다. 서불이 불로초를 구해올 때까지 수명이 연장되어야 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수은 알약을 섭취하게 된다. 여담으로 봉래산을 찾는 서불의 일행을 돕기 위해 수천명의 남녀가 동원되었다죠.

아무튼 황제는 수은을 섭취하면서 내외의 자신의 안위를 노리를 무리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자신만의 세계로 스스로 가둬놓게 됩니다.

당시 연금술사들은 수은을 분해하면 영원히 변치 않는 순수한 물질인 황금이 나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의 눈에 수은은 거의 초자연적인 물질이였을 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어떤 놀라운 효험을 기대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 죠. 그래서 사람들이 수은을 복용하면 신비로운 성분이 몸에 스며들어 수명을 늘려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순수한 수은은 인체에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소화가 잘 되도록 용해제 형태로 약을 만들었습니다. 시황제는 이것을 몇년이나 꾸준히 복용했던 겁니다. 수은은 어떤 형태로 섭취하는가와 상관없이 먹으면 먹을 수록 위험합니다. 수은이 몸에 쌓이기 시작하면 신경계의 손상이 시작됩니다. 손떨림 증상도 심해지지만 가장 많은 손상을 입는 부위가 바로 뇌입니다. 우선 말수가 늘고 나중에는 공격적이고 사나운 성향으로 변합니다. 게다가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피폐해 졌고 신장의 손상이 가장 심했을 겁니다. 법가는 왕이 나라 그 자체입니다. 황제가 이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게 되자 결국 나라 꼴도 말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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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傳 - 아버지의 눈물,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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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이산을 재미있게 보면서 사도세자가 왜 죽었는지... 이산의 배경인 영정조시대의 시대사는 어땠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방송이 있어서 보았다.
영조는 궁의 청소를 하는 나인이 어머니여서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고, 그런 상황에서 정말 부지런히 배우고, 근면하게 살아온 정조... 물론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에 올랐지만.. 요즘으로 따지지면 정말 자수성가한 성공 사업가와 같은 영조...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 얻은 사도세자... 그에대한 큰 기대와 조기교육...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두려워하고, 지지세력이 소론이여서 노론과 크게 부딪쳐서 결국에는 간신들의 이간질에 결국에는 자결을 강요받지만 그렇지 못하고 뒤주에 갖쳐서 죽어간 사도세자의 이야기...
서로간의 대화단절로 더욱더 멀어져간 그들... 예전의 이야기이고 극단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크게 다를바가 없어보이는 가슴 아픈 이야기...



[제6회]아버지의 눈물, 영 조



▣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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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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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딸과 사위가 백제에 죽임을 당하자..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신라 김춘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든든한 배후세력이자 동지를 얻고, 뛰어난 외교술로 당나라에게서 12만대군을 얻어서 결국에는 백제를 멸망시키지만, 당나라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고구려의 멸망후에 그 넓은 땅을 빼았겨서 현새에서 욕을 먹지만... 과연 그당시 상황에서 조국의 먼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제15회]백제를 멸하리라
-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



▣2007. 9. 29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영두 PD
▣작가 : 윤영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한 신라.

그 중심에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있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평생을 바친 치밀한 외교지략가 김춘추!


20여년에 걸친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드디어… 나당동맹으로 달성한 백제 멸망


김춘추는 백제를 멸하고 신라를 지킨 영웅인가?

아니면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시대의 풍운아! 탁월한 외교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구전동화‘토끼전’의 기원 - 김춘추의 탈출기!

구전동화로 잘 알려진 토끼전(별주부전). 이 이야기는 바로 김춘추의 고구려 탈출기에서 비롯되었다.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김춘추는 신라 땅의 일부를 주면 군사를 내주겠다는 고구려 왕의 요구를 거부해 옥에 갇히고 만다. 그때 고구려의 신하인 선도해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꾀를 내어 무사히 빠져나오는데, 바로 이 이야기가 ‘토끼전’이다. 토끼전은 거북에게 속아 용왕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빠진 토끼가 간을 육지에 꺼내놓고 왔다고 속여 무사히 탈출했다는 설화로,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기록되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 김춘추와 김유신

우연을 가장한 계책을 써서 자신의 여동생과 김춘추를 결혼시킨 김유신. 김유신과 김춘추는 신라의 신귀족 세력을 형성하며 굳건한 관계를 형성한다.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김유신은 8명의 백제 장군을 포로로 사로잡아 두 명의 유골과 맞교환한다.또한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고구려 외교길에 떠났을 때,

김유신은 신라에 군사조직 ‘별동대’를 준비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고구려 감옥에 갇혀있던 김춘추는 자신의 지혜와 김유신의 군사력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실질적인 신라의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군사력은 훗날 김춘추가 정권을 잡고 개혁을 펼치는 밑거름이 된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수어지교, 즉 물과 고기의 사귐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김춘추의 첫 번째 위기 : 대야성 패전

딸과 사위의 죽음 … 참혹한 대야성 전투의 기억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한다. 신라 죽죽의 장렬한 전사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대야성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원인은 바로 대야성의 도독이었던 품석. 그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백제에 항복해, 부인인 ‘고타소’와 함께 참혹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김춘추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김춘추는 온종일 기둥에 기대어 선 채로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춘추에게 닥친 더 큰 위기는 바로 사위인 품석의 행동이었다. 화랑도 정신인 임전무퇴를 저버린 사위의 항복으로 인해 대야성 패전의 책임과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진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 김춘추는 결단을 내린다.


▶김춘추의 두 번째 위기 : 목숨을 건 외교길

목숨을 건 고구려 외교 - 풍전등화의 신라를 위해 앞장서다

고구려가 요구한 ‘마목현과 죽령’ 북쪽 지역

<일본 서기>에 기록된 김춘추

정치적 위기의 극복과 국가의 원수인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선택! 바로 신라의 또 다른 적국인 고구려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로 김춘   추의 고구려 행은 목숨을 건 위험한 외교활동 이었다. 고구려 군사를 빌려 백제를 치려던 김춘추. 그러나 신라땅의 일부를 주면 군사를 내주겠다는 고구려의 입장과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고구려 왕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고구려의 신하 선도해의 지혜로 무사히 빠져나온 김춘추는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고도 신라를 위한 외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왜(일본)로 건너가 신라와 왜의 동맹을 성사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왜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잇따른 두 번의 외교 실패. 풍전등화의 신라를 김춘추는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고도의 외교전략, 김춘추의 나당동맹

외교지략가 김춘추, 나당동맹을 성사시키다!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과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는 백제. 김춘추는 백제 제압을 위해 대당외교에 나선다. 당나라 군사를 요청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당나라를 찾은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계속된 패전으로 신라와의 연합을 원했던 당나라. 그러나 김춘추는 이런 당나라 사정을 이용해 치밀하고 전략적인 외교 전술을 펼친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당 태종을 설득한 김춘추. 드디어 648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동맹’이 맺어진다. 이는 당시로서 파격적인 김춘추 외교의 승리였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정권을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당나라와의 굳건한 동맹을 바탕으로 한 김춘추의 정치력과 김유신의 군사력은 강력한 신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

평생을 건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드디어 백제가 멸망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통해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으로 즉위한다. 660년. 드디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숙원이 풀리는 날이 찾아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목숨을 다해 싸웠지만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20여년에 걸친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가 드디어 끝이 난 것이다. 고구려, 왜, 당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펼치고, 신라의 왕으로 등극해 끝내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 김춘추. 외세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 정치적 상황을 꿰뚫어 보고 치밀한 외교로 돌파한 김춘추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일생을 바친 탁월한 외교가이자 왕위에 오른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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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 싶다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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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홀리데이라는 호주 비자가 있는데, 영어도 배우면서 일을 할수 있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목표를 제대로 정하고 잘 활용하면 득이되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없이 막연하게 영어 공부도 하고 돈도 번다는 환상으로 그곳에 갔다가 시간과 돈만 낭비를 하게되고, 심지어는 윤략이나 마약쪽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
역시 세상은 어디가서나 마찬가지인듯... 정신바짝차리고, 꿈과 목표를 바르게 세워야 할것이다.


방영일 : 2008-02-23

○ 제 목 :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실태 보고 - 호주 워킹 홀리데이
○ 방송일시 : 2008년 2월 23일 (토) 밤 11시 5분
○ 연 출 : 이 동 협 / 작 가 : 신 진 주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 말 그대로 ‘일하면서 즐기는 휴가’란 뜻을 가진 이 비자는 국가 간 협약을 통해 상대 국가의 청년층에게 학업, 노동과 더불어 여행의 기회를 줌으로써 양국의 우호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특별 비자 프로그램이다. 특히 호주의 경우 뉴질랜드나, 캐나다, 일본 등에 비해 비자 발급이 쉽고 빠르며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경제적 여건을 이유로 해외여행이나 어학연수를 망설이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직접 워킹 홀리데이를 체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말은 상상과 달랐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이하 워홀러)들을 이용하여 임금 체불을 일삼는 악덕 업주와 미숙련 노동자로서 입어야 했던 산업재해 피해, 수시로 찾아드는 카지노의 유혹까지, 제작진에게 전화를 걸어온 제보자들은 호주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이 너무 아깝고 후회스러웠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잃어버린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의 현주소를 호주 현지 취재를 통해 집중 조명해 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 원정 성매매 실태

2007년에만 두 차례, 호주 원정 성매매 여성들이 무더기로 적발되었다. 학원 강사, 대학생등 유흥업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평범한 여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구인 정보를 얻어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로 출국, 성매매 업소에서 일했노라고 진술했다. 제작진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국내 알선책들과의 접촉을 시도, 호주로 여성들을 보내는 중간 브로커들을 직접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을 부추기며 “눈 딱 감고 6개월만 참으면 1억을 벌 수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가는 대학생들이 많으니 걱정 말라.”는 식의 감언이설로 여성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또한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이니 합법적으로 성매매를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경험자의 이야기는 달랐다. 세컨드 비자(체류기간이 1년 더 연장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주겠노라는 업소 측의 이야기만 믿고 2만 불을 먼저 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돈만 고스란히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혜민 씨(가명). 그녀는 한인업주가 운영했던 호주 멜버른 지역의 한 업소가 여성들의 여권을 뺏고 폭행과 착취를 일삼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성매매 업소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며, 사건이 일어나도 피해를 호소할 곳이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한국 여성들이 이러한 사실은 간과한 채, 해외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로 몰려들고 있다.


수수료만 200만원, 고액 호텔 인턴쉽의 비밀

취업을 위한 더 나은 경력과 경험을 얻고자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국내 호텔 인턴쉽 업체들을 통해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출국을 결심한다. 대부분의 업체들은 하우스 키핑, 식음료, 프론트 데스크 업무 등 호주 현지 호텔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직무에 대해 거론하며 현지인들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며 영어실력과 경력을 확실하게 쌓을 수 있는 기회인 것처럼 호텔 인턴쉽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그러나 실제로 호주에 도착한 한국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대부분 하우스 키핑, 즉 청소나 세탁 업무이다. 그마저도 한국인들끼리 한조가 되어 일을 하기 때문에 영어를 써볼 기회가 많지 않다. 이러한 허드렛일을 소개해주면서 ‘잡 매칭(job matching, 직업소개)’ 비용으로 대행업체에서 요구하는 금액은 대략 200만 원. 호주 현지의 구인, 구직 정보란을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일자리들을 호텔 인턴쉽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워킹 홀리데이를 위한 제언

작년 한해 한국인들의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발급 건수는 세계 2위.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소비의 주체로서도 호주 경제에 기여하는 워홀러들 중 상당수는 유학이나 이민을 통해 호주로 재유입 되며 한국교민 사회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호주 정부와 한인 사회 양측에 워홀러들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워킹 홀리데이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 본래의 긍정적 목적을 실현해 가며 서로 win-win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워킹 홀리데이로 보낸 시간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주변에서도 인정받았던 워홀러들의 경험을 통해 성공적인 워킹 홀리데이를 위한 비결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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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 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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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시도했다가 실패한후에 일본에 망명을 하고, 자꾸만 조선의 심기를 건드리자 그를 암살을 했는데... 수구파가 아닌..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 홍종우라고...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사람... 그러다가 생각이 든것이 바로 소설 리진에서 리진에게 찍접대고, 간접적으로 리진을 비극과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놈... 물론 실제와는 다르겠지만, 그가 프랑스에서 하고다닌 행동들은 소설 리진에서와 많이 중복된다 특히 춘향전이나 심청천을 번역하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고, 왕의 초상을 가지고 다니던 모습 등등...
암튼 김옥균은 왕정을 폐지하고, 개혁을 외치던 사람이고, 홍종우는 왕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자는 사람...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목표를 향해서 달리던 두사람.. 절대로 함께 갈수는 없었던 걸까?

[제9회]내가 김옥균을 쏜 이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방송 : 2007. 8. 1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PD

▣작가 : 지현주

 

1894년, 중국 상하이에 울린 세 발의 총성!
갑신정변을 주도한 조선의 대표적인 개화파 김옥균이 한 호텔 방에서 암살된다.
범인은 홍종우!
일순간 수구파의 암살자로 낙인찍힌 홍종우.
그러나 그는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주장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다.
왜 홍종우는 김옥균을 죽인 것일까?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
한국사 傳에서 그 전모를 추적한다!





▶ 1894년 3월 28일
세계열강의 이목을 끈 한 사건이 중국 상하이에서 발생한다.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한국사 傳 제작진이 한국-일본-중국-프랑스에 걸친 4개국의 밀착 취재를 통해
당시 역사를 파헤친다!

▶ 홍종우가 최초로 번역한 춘향전, 미하일 포킨의 발레극으로 부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그는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해 ‘향기로운 봄’이란 제목의 책 으로 출판했다. 러시아 안무가의 거장 미하일 포킨은 ‘향기 로운 봄’을 원작으로 ‘사랑의 시련’이란 발레극을 제작했는 데, ‘사랑의 시련’은 현재까지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 연되고 있다.


▶ 김옥균의 일본 망명생활 10년에 대한 증언
김옥균은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진다. 그 중 한명인 도야마 미치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시해한 조직인 ‘겐요사’를 만들어 정계를 장악한 인물. 한국사 傳 제작진이 도야마 미치루의 손자를 만나, 당시 정 황과 관련 사진을 취재했다.


▶ 김옥균의 유작인 한시, 최초 공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그가 죽기 전, 일본에 남긴 한시에는 정치를 벗어난 인간 김옥균으로서의 감정과 생각이 담겨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최초로 김옥균의 유작을 공개한다!

 

 

홍종우가 쏜 세 발의 탄환, 김옥균을 관통하다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의 뚱허양행 호텔. 김옥균은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미리 마차를 빌려놓고 호텔 방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들어온 홍종우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다. 세 발의 탄환은 얼굴과 가슴, 어깨를 관통 했고,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범인으로 붙잡힌 홍종우. 그러나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김옥균은 우리나라의 재상으로 대역부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백 명을 죽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으로 도피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김옥균을 죽여 왕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 것이다.”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죽였을까?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다’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명성을 얻는다. 이런 김옥균의 행동은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개혁시키려 한다는 모의설로 발전돼 朝野新聞에 보도되고, 이는 조선 조정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때문에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은 조선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홍종우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김옥균의 시신은 양화진에서 처참하게 육시돼 홍종우가 직접 쓴 ‘대역부도옥균’이란 글씨와 함께 백사장에 전시되었다.


마흔 한 살.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김옥균 암살 4년 전인 1890년. 홍종우는 마흔 하나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홍종우는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를 쌓고 귀족 모임 에 초대 받는 등 파리의 지식인들을 통해 서구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파리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홍종우의 사진과 명함, 근로계약서 등은 박물관에서 2년 동안 일한 홍종우의 흔적을 말해준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조선을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최 초의 프랑스 번역 소설인 춘향전은 홍종우의 번역으로 출판됐고, 이는 러시아 안무가 미하일 포킨에 의해 ‘사랑의 시련’이란 발레극으로 올려진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프랑스에서의 홍종우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갔다.


홍종우와 김옥균, 두 사람의 엇갈린 평가


홍종우는 고종에게 조선이 황제를 중심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종우는 황제권을 절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간행해 실제 업무에 적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홍종우의 노력과 달리 조선의 운명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우호적이었던 김옥균을 위인으로 세우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를 테러리스트로 매장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이 상실된 지 3년 후인 1913년, 홍종우는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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