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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민국 길을 묻다 - 기업 생존의 길, 인간존중 - LG인화원 이병남 사장
  3. PD수첩 - CCTV의 문제점, 이명박 정부 낙하산 논란
  4. 원격데스크탑(터미널 서비스) 접속시 컴퓨터가 리부팅이 되는 경우 6
  5. 조카의 첫번째 침대 오르기 신공의 동영상
  6. 더 레슬러 (The Wrestler) - 존재의 가벼움과 삶의 무거움
  7. 시청자와 함께한 1박 2일 엔딩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강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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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했던

스트브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식 강연...


짧지만 간결하고, 강력한 메세지가

평소에 스티브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이 생각났던

정말 뜻깊은 내용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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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하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갈구하라. 우직하라.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갈구하라. 우직하라.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구하면서, 우직하게 살아가십시오.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영문 번역 원문은 http://allenjeon.tistory.com/212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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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을 묻다 - 기업 생존의 길, 인간존중 - LG인화원 이병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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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경영과 인간존중이라는 기본적인 맥락속에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간에 힘을 합치고 존중하며, 개개인은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해야 지금의 위기를 탈출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약간은 상투적이고, 개인에게 어떠한 실천적인 메세지를 주기보다는 커다란 틀만을 이야기했던 강연... 좀 더 개개인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나 싶다. 개이들에게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움직여라라고 말하기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법을 제시했다면 더 괜찮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던 방송...

◎ 방송 : 2009. 2. 22 (일) 밤 11:30~12:20(50분) 1TV

◎ 출연자 : 이병남 사장 (LG 인화원 사장)

금융위기가 빠르게 실물로 전이되면서 기업들이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기업들의 위기는 곧 일자리의 위기다. 유례가 드문 경제위기속에서 우리 기업들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LG 인화원의 이병남 사장.

국내에선 보기 드문 인사 전문가로서 그동안 획기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하며 ‘LG의 인재 인큐베이터’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이병남 사장이 제시하는 위기 극복 방안은 바로 ‘사람’!

생태계 속에서의 기업

 기업 생존의 길- 고객 가치 실현

 기업 경영의 근본- 인간존중

 인간존중 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이병남 사장이 제시하는 대한민국의 길

 <브리지1.>

기업은

시장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영하고자 하는 생명체다

 <브리지2>

기업은 고객과 사회에

유익함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고객과 사회는

이윤이란 선물을 기업에게 되돌려 준다.

  <브리지3.>

고객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배려하는

인간존중 경영이 가장 중요하다

 <브리지4.>

배려를 통해 존재감을 심어줄 때

구성원들의 창의성이 발현되고

고객가치도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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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 CCTV의 문제점, 이명박 정부 낙하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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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의 문제점은 요즘은 범죄자들이 CCTV를 무시하거나 알아도 감시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녹화용 정도로 인식하고 범행을 그냥 저지르는 문제부터, 촛불시위와 같은 경우에 무차별적으로 CCTV로 촬영을 해서 인권침해의 요소가 있다고...
그저 CCTV의 긍정적인 기능만을 생각했었는데,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관리적인 면에서 부족한 부분도 많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이 인권을 무시한채로 무리하게 체증을 하는 모습등을 보면서 부정적인 면도 생각해보고, 개선해 나가야 할듯하다.

낙하산 인사문제는 비단 이명박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정권이 들어올때마다 생기던 문제...
차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오면서 욕심을 버리고 멋지게 법을 제정해 줬으면 하는 바램을 해보았는데, 법은 현재 있단다.. 문제는 그 법을 개무시해버리고 낙하산을 뿌려대고, 아직 임기가 남은 사람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짤라내고, 해당기업체와 관련성이나 전문성이 전무한 사람이 그저 인수위 출신, 낙선자, 지인이라는 이유로 마구 뽑히는것이 문제인듯...
더군다나 참여정부시절에 독설을 뿜어대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마디로 유구무언이고, 인터뷰를 죄다 피해버리는 낙하산 인물들... 가족들 자식들 보기 쪽팔리지 않을까?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멘스도 아니고...-_-;;
그러고보니 예전에 회사를 다닐때 김대중대통령이 취임을 하던 날짜로 기존에 사단장출신 사장은 짤리고, 새로운 사람이 사장이 됬던 기억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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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강력범죄, CCTV가 해결사?
최근 강력범 검거에 CCTV(폐쇄회로텔레비전)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사례가 증 가하자, 경기도를 비롯한 지자체 곳곳에서 강력범죄 예방의 일환으로 방범용 CCTV 설치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수억 원의 설치비와 차후 유지비용에도 불구하고 일 반 시민들은 CCTV설치를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폭발적 증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도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 CCTV 열풍, 과연 흉악 범죄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최선의 해결책인지 짚어본다.

■ 이명박 정부 낙하산 논란
PD수첩은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정권 교체 시 마다 단행된 정 부의 인사 방침에 대한 방송을 다뤄왔다. 이명박 정부 1년, 공기업 선진화를 내건 현 정부의 공공기관 인사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PD수첩은 2006년 한나라당 낙 하산인사 조사특위에서 밝힌 참여정부의 '낙하산' 인사 선정 기준을 토대로 지난 1 년 동안 공공기관 302곳에 대한 현 정부의 공공기관장과 감사, 이사들의 임명은 어떻 게 이뤄졌는지 심층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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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데스크탑(터미널 서비스) 접속시 컴퓨터가 리부팅이 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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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주 요긴하게 써왔는데,
어느순간부터 접속만 하면 접속하려는 컴퓨터가 아무런 메세지도 없이 그냥 컴퓨터가 리부팅이 됩니다.

윈도우 자체의 이벤트 로그를 봐도, 그저 갑작스런 리부팅이 있었다는 메세지만...-_-;;
인터넷을 검색을 해봐도 딱히 내경우와 같은 증세는 없고...-_-;;

가장 빠른 방법이야 다시 XP를 설치를 하는것이겠지만,
우선 원인을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아무래도 프로그램 충돌외에는 없다라는 가정아래 테스트를 시작...

처음에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죽여보고,
메신저 프로그램을 죽여도 보고,
그러다가 1시간만에 찾았는데,
엉뚱하게도 Ultramon 이라는 듀얼모니터 구성 유틸리티...

그것도 트레이에 있는 아이콘만 죽여서는 안되고,
작업관리자에 있는 2개의 Ultramon 프로그램을 죽여야 제대로 된다는...

평소에는 듀얼모니터를 거의 사용을 안해서 하나만 사용을 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중에 하나는 그래픽카드쪽 드라이버 업데이트를 안해봤는데,
이것도 마저 테스트를 해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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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카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를 했더니 Ultramon이 실행되있어도 잘된다...
나 같은 경우는 아마도 그래픽드라이버의 버그가 아니였나 싶다...T_T;;

결론
완전히 엄한 이야기지만...
터미날 서비스 사용시 대책없이 리부팅이 될경우에는
그래픽 드라이버를 최신버전으로 받아서 설치해 보십시요...-_-;;
아래 댓글을 봐도 이런 경우에 드라이버 업데이트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듯 합니다...^^

nvidia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는 여기에서 http://kr.nvidia.com/Download/index.aspx?l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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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의 첫번째 침대 오르기 신공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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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내려가서 신기하다고 박수를 친것이 몇일전인것 같은데,
이제는 혼자서 침대에 어렵지만 기뜩하게 올라가는 조카 연서의 동영상...
연서야~ 조심해라.. 힘주다가 똥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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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The Wrestler) - 존재의 가벼움과 삶의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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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 화려한 레슬러로 살다가 나이를 먹은후에 남은것은 망가진 몸밖에 없는 노년의 레슬러...
심장이 안좋아져서 더이상 레슬링은 안된다는 의사의 말에 은퇴를 결심하고, 딸과도 화해를 하지만, 잠깐의 유혹으로 모든것은 원래데로 돌아가고 최후의 은퇴전을 위해서 마지막 시합에 나서는 주인공의 이야기...

이번에 아깝게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미키루크의 재기작... 얼마전에 그의 망가진 사진을 보고 이제 다시는 얼굴보기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시금 노력해서 멋지게 재기를 하신듯....
뭐 화려한 레슬링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한 남자의 망가지고, 망가져가는 모습속에서 희망보다는 애절함이, 존재의 가벼움이 삶의 무거움으로 이어지는 모습속에서 삶에 대한 비애 등이 느껴졌던 영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프라이드만은 놓치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발악과도 같은 모습이 씁쓸하면서도 도대체 사는게 뭔지.. 삶이 뭔지를 생각해보게 해 준 영화...


개봉 2009년 03월 05일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미키 루크 , 마리사 토메이 , 에반 레이첼 우드 
상영시간 109분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제작국가  미국
제작년도  2008년 
 

링에서 모든 걸 잃었고, 모든 걸 얻은...
“나는 레슬러입니다”



현란한 테크닉과 무대 매너로 8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스타 레슬러 ‘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 20년이 지난 지금, 심장이상을 이유로 평생의 꿈과 열정을 쏟아냈던 링을 떠나 식료품 상점에서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던 ‘랜디’는 단골 술집의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와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에반 레이첼 우드)을 통해 평범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에게 더욱 큰 상처로 돌아온다.
결국,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뒤로한 채 그의 생애 최고의 레슬링 매치를 위해 링에 오를 준비를 한다!!

당신 생애 잊혀지지 않을 최고의 감동이 펼쳐집니다!!

국제 영화제 수상 및 후보 내역

제 81회 아카데미 –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노미네이트
제 66회 골든글로브 -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주제가상 수상
제 62회 영국 아카데미 –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
제 65회 베니스 영화제 - 황금사자상 수상
2009년 캔자스시티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각본상
2009년 플로리다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2009년 워싱턴D.C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9년 시카고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9년 보스턴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9년 라스베가스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9년 토론토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2009년 샌디에고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여우조연상
2009년 캔사스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2009년 미국 작가 조합 시상식 – 최우수 작품상 노미네이트
2009년 영화 배우 조합 시상식 – 최우수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
2009년 런던 영화비평가협회 – 올해의 배우 노미네이트


천재 감독 대런 아로노브스키, 3년에 걸친 준비기간으로 탄생시킨 ‘랜디’를 통해 진짜 레슬러의 세계를 이야기하다

1998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숫자를 찾는 수학자가 벌이는 스릴러 <파이>로 전세계 영화제를 휩쓸며 혜성처럼 등장했던 하버드 출신의 천재 감독 대런 아로노브스키는 이 후 <레퀴엠>, <천년을 흐르는 사랑> 등 스릴러와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독창적인 영상 언어와 연출력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이번엔 8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프로 레슬러의 모습을 통해 열정과 꿈, 희망과 순수함을 담은 감동 드라마 <더 레슬러>로 관객들을 찾아간다. 프로 레슬링 열광적인 팬은 아니지만 프로 레슬러하면 ‘헐크 호건’의 과장된 동작을 따라하며 놀았던 우리 모두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떤 감독도 프로 레슬링에 대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6년 전부터 <더 레슬러> 제작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전작을 함께했던 파트너이자 프로 레슬링의 열혈 팬인 제작자 스콧 프랭클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D 시겔과 함께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3년 간 각종 프로 레슬링 시합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 현직 프로 레슬러 들을 인터뷰하고 많은 시합들을 직접 관전한 그들은 기본적인 프로 레슬링 용어에서부터, 레슬러의 어떤 몸동작에서 관중들이 흥분하고 즐거움을 느끼는지까지 세심한 연구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또한 프로 레슬러가 무대에서는 화려한 매너와 쇼맨십, 그리고 과장된 몸동작으로 관객들을 흥분시키는 스포츠맨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무대에서 느낄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감동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가족들과 연락조차 안되거나, 결혼 실패 등 무대 이면에서의 성공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오로지 링 위에서만 슬픔과 기쁨, 영광과 아픔이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더 레슬러>를 단순한 레슬링 영화가 아닌 인생에 관한 한 편의 감동 드라마로 틀을 잡아간다.

<더 레슬러>를 위해 3년을 함께 하며 시나리오와 캐릭터, 카메라와 배우의 움직임까지 완벽한 준비를 한 대런 아로노브스키를 비롯한 이들 세 명의 열정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이다.


미키 루크, 치명적 위험을 무릅쓴 혹독한 지옥 훈련!
‘배우’ 미키 루크가 아닌 ‘레슬러’ 랜디로 태어나다

<더 레슬러>의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전직 스타 프로 레슬러와 만나고 실제 경기를 관람하면서 무엇보다 <더 레슬러> 속 프로 레슬러의 모습은 과장된 액션과 거짓이 아닌, 진짜로 그들의 모습과 아픔을 표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최고의 스타 ‘랜디’ 역을 맡은 미키 루크에게 실제 레슬러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신체 조건과 화려한 기술은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였다.

몇 년간 실제 프로 복서로서 활동을 했던 미키 루크였지만 실제 레슬러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야했다. 게다가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복싱과 프로 레슬링은 완전히 반대인 스포츠였다. 복싱이 민첩함을 기본으로 한 스피드에 기반을 둔다면, 프로 레슬링은 모든 하나 하나의 동작에서 관객들을 흥분시켜야하는 에너지와 파워가 필요했다. 또한 관객들은 랜디의 몸을 보면서 한 때 최고였던 프로 레슬러의 모습과 동시에, 시간과 세월 속에 지치고 상처받은 모습을 느껴야만했다.

겉모습을 위해 몇 개월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트레이닝을 통해 15Kg의 근육을 만들어낸 미키 루크는 전직 WWF 월드 태그팀 챔피언으로 유명한 WWE의 스타 ‘더 와일드 사모안스’ (The Wild Samoans) 중 한 명인 ‘아파’ (Afa The Wild Samoan)을 비롯, 현직 UFC 심판 등과 함께 체육관에서 프로 레슬링의 기본부터 훈련을 받았다. 프로 레슬링의 용어조차 하나도 몰랐던 미키 루크는 진짜 프로 레슬러를 위한 훈련 코스를 밟으며 조금씩 링 위에서 천둥과도 같은 효과음과 함께 몸을 던지고, 상대방을 공격하면서도 보호해야하는 진짜 선수로 변해갔다.

이미 50살을 넘긴 그에게 실제 선수들조차 치명적인 부상을 종종 입는 훈련은 세 번의 MRI 촬영 등 끊임없는 부상과 맞서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도전에서 믿을 수 없는 끈기와 열정을 보인 미키 루크는 촬영이 시작될 때 즈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한 랜디 “더 램” 로빈슨이 되어 있었고, 제작진은 이 위대한 배우의 혼신을 담은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대배우의 탄생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실제 WWE에서도 러브콜을 보낼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구가하는 미키 루크의 모습은 영화 <더 레슬러>를 보는 내내 당신을 에너지가 넘치는 실제 사각의 링 위로 초대할 것이다.


수천명의 관객들 앞에서 WWE 레슬러와 실제 빅 매치!
혼돈과 에너지의 공간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내다

배우 미키 루크가 완벽한 랜디 “더 램” 로빈슨으로 완성되었을 때 제작진은 <더 레슬러>를단순한 레슬러의 이야기가 아닌 진짜 살아있는 레슬러의 모습을 담기 위해 다른 스포츠 소재의 영화와는 다른 과감한 촬영 방식을 택했다. 바로 한 두 명의 스턴트맨으로 레슬링 장면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기를 주최하고 그 속에서 예상하지 못햇던 장면과 에너지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 제작진은 진짜 ‘레슬러’가 된 미키 루크의 실제 경기를 프로모션해서 관객들을 모았다. 수천 명의 관객들은 진짜 레슬러 미키 루크와 상대 선수와의 시합을 위해 모였던 것. 실제 미키 루크와 상대 선수와의 경기를 찍고, 그 후에 다시 3~4번의 다른 선수들간의 시합을 추가로 담아서 이를 적적하게 편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처음에 실제 관객들의 함성과 실제 시합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미키 루크도 나중에는 경기를 실제로 즐기면서 예상하지 못한 액션 장면을 연출하며 제작진을 만족시켰다. 특히 시합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올 때면 실제 프로 레슬러들은 ‘배우’ 미키 루크가 아닌 ‘프로 레슬러’ 랜디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냈고, 대본에 없었던 그 장면은 <더 레슬러>에 그대로 담겼다.

특히 영화 속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랜디와 숙적이였던 아야톨라와의 경기는 2008년 3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Ring of Honor” 이벤트로 실제 로 치뤄졌고, 현장의 분위기와 관객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프로 레슬러들의 진짜 모습, 그리고 수천 명 관객들의 함성은 <더 레슬러>를 보는 관객들에게 뜨거운 에너지와 함께 감동을 더할 것이다. 또한 WWE를 비롯, NWA, CZX, TNA, WXW 등 전세계 각종 프로 레슬링 매치의 최고 스타인 ‘어니스트 “더 캣” 밀러’ (Ernest ''''The Cat'''' Miller), ‘론 “더 트루스” 킬링’ (Ron “The Truth” Killings), ‘네크로 “더 부쳐”’ (Necro “The Butcher”), ‘마이크 밀러’ (Mike Miller), ‘쟈니 발리안트’ (Johnny Valiant) 등이 영화 속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 관객들에게 현실감과 함께 또 하나의 즐거움을 제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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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와 함께한 1박 2일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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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가다가 보게되는 1박2일... 평소에는 그다지 재미있다라는것을 못느꼈는데, 이번편은 정말 재미있었다는...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다시금 삶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말이 너무나 멋지다는 생각에 캡쳐를...

특히나 가끔은 떠나보자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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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삼천리금수강산, 대한민국 방방곡곡 아름다운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강호동, 김C, 은지원, 이수근, MC몽, 이승기 그리고 상근이의 배낭여행기

 

흰 도복 안에 숨은 부드러운 매력!! ‘한국체육대학교 여자유도부 팀’에 강호동!!

평균연령 55.2세의 수줍은 여고생!! ‘늦깎이 여고생 팀’에 이승기!!

딸 여덟에 사위 여덟!! ‘8공주8사위 팀’에 MC몽!!

더욱 큰 사랑으로 당당하게 산다!! '행복한 싱글맘 팀'에 김C!!

남자 간호사의 편견을 깬다!! ‘남자 간호사 팀’에 이수근!!

상큼 발랄!! 우린 끼 넘치는 얼짱 여고생!! ‘국립국악고 무용과 팀’에 은지원!!

4세부터 74세까지 총 6팀 80여명의 시청자가 함께 한

<시청자와 함께 하는 1박2일>

 

캠프의 하이라이트!! 캠프의 백미!! 장기자랑!!

걸~걸~헤이 유도걸~!! 이효리의 '유고걸'은 잊어라!!

깜찍하고 파워 넘치는 한 판!! '한체대 여자유도부'의 유도걸!!

낭랑 19세!! 파릇파릇 청초한 여고생!! 우리가 진짜 소녀시대!!

국립국악고 무용과의 '소녀시대'!! 그리고 조장 은초딩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무대!!

'시청자와 함께 하는 1박2일'을 위해 특별히 찾아 온 초대 손님!!

당일 섭외에 스케줄을 조정하고 달려 온 '우유빛깔의 피부를 지닌' 백지영!!

그리고 이수근이 직접 섭외한 게스트는??

 

1박2일의 역사!! 복불복의 역사!!

까나리부터 통레몬, 매운호빵까지!! 역대 모든 복불복재료가 한 자리에 모였다!!

코를 찌는 비린내와 매운 냄새가 가득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고...

영하의 야외!! 잘 하면 입도 돌아갈 판!!

야생에 적응되지 않은 조원들을 밖에서 재울 수 없다!!

역시 1박2일 애청자는 다르다!! 까나리보다 독하고 캡사이신보다 징~한 참가자들!!

모두를 경악하게 한 까나리 원샷의 주인공은?

전무후무한 최악의 잠자리복불복이 펼쳐진다!!

 

웃음도 배고픔도 추위도 함께 나눈 1박2일!!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나누는 것

1박2일 동안이면 충분합니다!!

<시청자와 함께 한 1박2일>

그 마지막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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