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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가의 전설, 메가스터디 손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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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후에 과외를 시작해서 보습학원, 대형학원을 차례로 성공적으로 이끈후에 현재 메가스터리를 크게 성공시킨 손주은씨의 이야기... 이런 사람을 보면 볼수록 성공할 사람은 성공할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잡기가 능한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객인 학생을 위하고.. 죽기로 노력하는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수밖에 없었다... 학원선생에서 경영자로 넘어가면서도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기로 노력한다면 뭐든지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모습등... 불도저같은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학생을 위하는 모습등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라는것도 느껴졌고... 돈을 벌어서 다른 분야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 등 기업가적인 측면에서도 보통 사람과는 생각하는 마인드가 다르다.. 다만 너무 일에만 빠져사는 워커홀릭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대충 살기보다는 뭔가 하나에 미쳐서 열심히 살아가고 성취한다는것은 아름답고 멋진 일인것 같다...
나도 한번 엉덩이로 열심히 일해보고.. 죽기살기로 다시 한번 일어서 보자!


안녕하세요, 김광일입니다. 제가 그동안 써왔던 릴레이인터뷰코너는 2000년초 inews24 출범과 동시에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72회 유인택 사장'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3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간 업데이트가 늦은 점, 사과 말씀 드립니다.

유인택 사장이 바통을 넘긴 다음 주자는 최근 스타기업으로 급부상한 온라인교육사이트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사장입니다. 유 사장은 “닷컴기업의 성공모델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기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워낙 파워풀한 수익모델을 자랑해 과감하게 추천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사장이 어떤 면에서 인터넷비즈니스 성공모델의 전형이고, 얼마나 파워풀한 수익모델을 자랑하는지, 그의 창업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창업한지 단 3년여만에 연매출 650억원대, 순이익 200억원대의 폭발적인 성공신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벤처기업이 등장,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 회사는 ‘밑빠진 독’이라는 비난과 함께 벤처산업계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인터넷비즈니스분야의 닷컴기업으로 밝혀져, 그 성공비결에 벤처산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온라인교육사이트를 운영중인 메가스터디.입시전문 오프라인 학원을 온라인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입시과목별로 장안에서 최고로 꼽히는 초특급 강사들이 대거 포진, 전국 고교생 사이에선 ‘넘버 원’으로 통하는 온라인 입시학원이다.

이 회사 손주은(42) 사장 역시 강남 일대 학원가에서 최고인기를 누리고 있는 강사출신.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손 사장은 인심좋은 아저씨같은 느낌을 준다. 커다란 얼굴에 약간처진 눈매, 두툼한 입술은 그저 맘씨좋고,우직할것 같은 동네아저씨 모습 그대로다.

그의 첫 인상은 강남 일대 최고인기 학원강사라는 유명세를 믿기 어려울만큼 수수하다. 하지만 뛰어난 화술과 예리하고 날카로운 표현력, 강인한 카리스마 등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경지를 자랑한다.

그는 전국 고교생들사이에서 손사탐(손주은 사회탐구의 줄인말로 그의 별칭이다)으로 통한다. 그의 강좌는 개설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마감이 끝날만큼 인기 ‘짱’이다.

실제 그는 과외, 입시학원 등 사교육에 관한한 손꼽히는 최고전문가다. 입시강의도 강의지만, 과외경력 16년째인 그가 쏟아내는 사교육의 방향과 문제점, 대안 등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오프라인 강사지만, 인터넷 사업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는 여느 CEO못지 않은 열정과 비전을 갖고 있었다. 실제 손 사장은 엄청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메가스터디는 2000년 7월 설립된 신생 벤처기업.서비스개시 3년여만에 선두주자로 떠오른 온라인교육시장의 다크호스다. 2001년 43억원의 매출에 9억원의 흑자를 기록한데 이어 2002년에는 매출 205억원, 90억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올해 계획은 매출 650억원에 영업이익만 무려 200억원을 바라볼만큼 폭발적이다. 올 하반기 코스닥에 입성예정이다.

◆ 운명처럼 다가온 과외강사

“학생, 제발 2년간만 더 가르쳐줘. 어차피 유학가려면 돈도 좀 필요할텐데,한 2년만 더 가르친후 돈좀 벌어 유학가면 좋잖아. 돈은 달라는대로 맞춰볼께요”

87년 10월, 딱 6개월만 하기로 마음먹고 과외강사를 시작했던 손주은은 손을 부여잡고 통사정을 하는 학생 어머니의 애절한 요청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 어머니가 그토록 목을 메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하다는 과외선생을 숱하게 붙여봐도 늘 반에서조차 중하위권이던 고 2학년 딸이 손씨로부터 과외를 시작한 지 단 5개월만에 반에서 2등, 학년 전체석차 15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던 것.

그 일이 있은 후 학생부모는 손주은에게 죽자사자 매달렸던 것. 손주은은 경남 창원출신으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87년 3월 2일. 평범한 학생이던 손 사장의 운명이 바뀌는 각별한 날이다.

가을 학기 졸업후 손주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국내에서 대학원을 마친후 유학을 갈것인지, 아니면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인지를 놓고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87년 3월, 이미 결혼한 손주은은 생계비를 벌 요량으로 우연찮게 대학생 과외아르바이트를 하게된다. 그 때가 바로 87년 3월 2일. 그의 운명은 이때부터 한 방향으로 엄청난 속도를 내며 질주를 시작한다.

훗날 장안의 학원가에서 ‘지존’으로 불릴만큼 최고인기 학원강사로 이름을 떨치게되는 ‘손사탐’의 역사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 딱 한학기 6개월만 하리라던 과외는 결국 첫 고객의 어머니가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2년을 더 끌게 된다.

“솔찍히 공부에 대한 열망이 그리 크지 않았죠.공부에 목을 매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88년 1월, 첫 제자의 오빠를 포함해 5명의 멤버를 구성, 두번째 과외강사에 나섰다.

이때부터 손주은은 과외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두번째 수강생들은 모 대학 분교에 다니다가 다시 재도전에 나선 3수생을 포함,일류대진학이 어려운 수준의 학생들.

계약조건은 혼자서 전과목을 모두 맡는다는 것. “한 두 과목 잘해서는 성적이 안오르죠.성적을 올리기 위해 무작정 전과목을 한다고 했죠” 자신도 배워가며 가르쳤다. 숙식을 같이 하며 매달렸다. 결과는 대성공.

분교를 다니던 친구들은 연세대, 고려대 본교에 입학했고, 첫 제자는 이화여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 해 총 10명을 맡아 9명을 대학에 합격시켰다. 소문이 나면서 그 다음해는 신청자가 엄청나게 몰렸다. 원하는 가격대의 학생 15명만을 선발, 가르쳤다.

2년간의 과외를 통해 손주은은 자신에게 과외강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갖고있음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돈도 꽤 모을수 있었다.

손주은, 그는 누구인가
61년생.경남 창원생.서울대 서양학과 81학번.강남일대 학원가 최고인기 강사.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화법이 강점.부드러운 성격에 친화력이 뛰어나다는게 주위의 평.입시예상문제에 관한한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는 입시전문가.뚝심과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
취 미 수업하는 것(학원강의를 하면 그렇게 힘이 솟는다. 스스로 체질이란다)
전혀 안함. 담배는 하루 반갑
운 동 헬스,골프
존경하는 CEO 특별히 없다.
10년후 모습 그려본 적이 없다. 낙관적인 생각은 잘 못한다. 깨끗한 장사꾼이 돼있을 것이다.


◆ 놀라운 발견, 주머니 속의 송곳

손주은은 목포여고 9회 동창 아줌마들과 묘한 인연이 있다. 첫 과외를 한 학생의 모친이 목포여고 9회 졸업생이었던 것. 손주은의 탁월한 능력을 발견한 그 모친은 고교동창들에게 손사장을 소개시켜주면서 그는 목포여고 9회 동창생 자녀들만 집중적으로 맡게됐다.

손주은은 타고난 과외강사였다. 강사로서의 표현력, 칠판에 쓰며 정리를 하는 판서능력 등이 남달랐고, 특히 학생들을 휘어잡는 강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과외체질인 ‘명강사’였다.

아이들을 확 휘어잡은 후 머리속에 쏙쏙 들어가게 설명하는 그의 이런 천부적 소질은 그냥 나온게 아니다. 전 과목을 혼자서 가르치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에서 시작됐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과외라 하면 영어, 수학 등 특정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두 과목 가르쳐서는 성적이 안올라갑니다.전과목을 골고루 잘해야 성적이 올라가죠. 성적이 올라가야 원하는 액수의 강사료를 받을수 있거든요”

그런 발상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모든 과목을 다 섭렵해야하기 때문에 강사로서도 매우 부담스런 방식. 결과적으로 손주은은 입시 전과목을 꽤뚫는 전문가가 되었고, 이는 훗날 최고의 ‘스타강사’로 떠오르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다.

손주은이 강남 일대 부유촌에서 최고 인기강사로 떠오르게 된 대표적인 에피소드하나.과외기간도중 그는 늘 ‘지옥훈련’을 실시한다. 만사제쳐두고 9박10일간 공부만하는 프로그램.

하루목표를 달성해야만 잠을 재우는 일종의 극기훈련. 목표달성을 위해 72시간을 꼬박 샌 적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부모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 과목을 꽤뚫고 있는 지식탱크에, 학생들을 휘어잡는 특유의 카리스마, 그리고 탁월한 강의기법으로 손주은은 강남에서조차 모시기 어려운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 도전,그리고 가슴에 묻은 두아이

2년이 지난 90년초,손주은은 결심한대로 과외강사를 그만뒀다. 유학은 포기하고,사법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3개월만에 고시공부가 체질이 아님을 절감했다. 그러던 차에 목포여고 9회 졸업생으로부터 요청이 들어왔다.간곡한 부탁이었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길로 손주은은 본격적인 전문 과외강사의 길로 접어든다. 그해 여름, 손이 모자라 보조강사 2명을 채용했다. 급기야 90년말,학원을 차리기에 이른다. 양재동에 60평짜리 학원을 마련했다.

“학생이 늘다보니 어쩔수 없었습니다. 오래할 일은 아닌데 하면서도 일을 벌리고 말았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손주은은 인생의 승부를 몽땅 학원강사에 건 상태는 아니었다.

손주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 그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손주은으로 하여금 강의하는 일에 몸을 던지게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세사람 모두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며칠이 고비입니다”

91년 가을, 손주은은 갑자기 닥친 불행이 믿기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가던 아내와 자녀 둘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 아들은 사고 1주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고, 9개월된 딸애 역시 위독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또한 사경을 헤매며 한달째 의식불명상태였다.

뇌에 인공장치를 넣어 겨우 생명을 부지했던 딸 역시 수차례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채 꽃도 피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9개월사이 두 아이를 잃어버린 손주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딸애 장례를 치르고 난 손주은은 그날 저녁,학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미친듯이 강의를 시작했다.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을 잊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인생이 그렇게 고통스럽더라구요” 고통을 잊기위해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강의에 매달렸다.

그렇게 2년간 모든 열정을 학원에 쏟아부었다. 학원은 나날이 발전했다. 개인수입 역시 월 3000만원을 넘어설 정도로 늘어났다. 고통을 잊기위해 죽자살자 매달리다보니, 학원은 승승장구했고, 손 사장은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되었다.

◆ 거칠것 없는 세월, 손주은의 성공시대

“선생님,혼자 전과목을 강의하는 것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좋지만,선생님한테는 마이너스입니다.강사로서 수명도 금새 끝납니다. 빨리 대중강사로 전환하세요” 97년, 틀림없이 대중강사로 성공할수 있다는 후배의 끈질긴 제안에 손주은은 과감히 대중강사로 변신한다.

한달에 3000만원이상의 개인수입을 포기하고,한두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대중강사로 변신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엄청난 벽을 실감했다.

“학원을 뚫기로 하고, 직접 다리품을 팔아 강남일대 주요학원에 이력서를 쭉 넣었죠. 근데, 모두 문전박대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죠”

학원들이 받아주질 않으니, 대중강사로 변신할 방법이 없었다. 인맥을 동원,우여곡절끝에 강남 D학원에 자리를 하나 얻을수 있었다.

강좌를 개설한 97년 2월,신청자는 3개반에 걸쳐 고작 8명에 불과했다. 총 수강료 32만원중 16만원이 강사몫이었으니, 월 3000만원수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초라했다. 학원에서는 낙하산으로 들어온 손주은을 짜를수도 없었다.

손주은의 사업가적 기질은 이 대목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8명을 데리고 목숨 걸고 강의를 했다. 과목은 사회탐구.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110% 발휘했다. 그로부터 5개월후인 97년 7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5개월전, 8명에 불과하던 수강신청자가 무료 2000명으로 늘어났기 때문. 8명의 입소문이 빠르게 펴져 손주은의 사회탐구강의를 들으려는 수험생들의 지원이 쇄도했다.

한 달후 손주은의 사회탐구장좌는 개설하기가 무섭게 전 강좌가 마감되는 최고의 인기강좌로 떠올랐다. 급기야 손사탐 강의신청을 위해 학생들이 신청 이틀전부터 학원에서 밤새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5개월만의 대성공.그의 강좌는 그 이후 내리 3년간 매진행진을 이어가며,수험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남일대 학원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계속해 강좌개설 학원을 넓혀갔고, 학원들 또한 너도나도 인기스타 손주은의 강좌를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승승장구하던 손주은은 97년 새해 첫 날 중대한 결심을 한다. 2000년, 연매출 1000억원을 넘으면 계속 학원업을 하고, 미달하면 학원계를 떠난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계속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함을 느꼈습니다. 명예도 없고, 사회에 봉사하는 성격의 사업도 아니고, 가정도 완전히 희생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91년 교통사고로 자식 둘을 잃은 손주은.96년까지 잠수, 고통의 세월을 보낸 그는 97년 그렇듯 엄청난 청사진을 만들었다. 이미 3개의 학원을 거느리고 있던 손주은은 단순한 학원강사가 아닌 사업가로서 사업적 기반을 하나둘씩 갖춰가기 시작한다.

메가스터디,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 2000년 7월
종업원 80명
자본금 23억원
연락처 (02)521-8625, www.megastudy.net
사업영역 온라인 입시강의
경영계획 2003년 8월 코스닥 예비심사청구
매출목표 2003년 650억원


◆ 손주은의 승부수,대변신

“합작 법인설립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직접하는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교육전문사이트인 모 회사와 합작법인설립에 합의하고, 다음날 조인식 및 주금납입을 약속했던 손 사장은 조인식 바로 전날밤, 단독으로 온라인입시교육 전문회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증자 몇번하면 경영권은 금새 넘어가겠더라구요.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향후 운영상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겠더라구요.다음날 모든 걸 취소했죠”

월 수천만원의 안정적인 수입에 최고 인기를 누리며 학원계 최정상에 우뚝선 손주은은 오프라인의 최정점에서 과감히 온라인사업에 뛰는 대결단을 내렸다.

2000년 7월, 손 사장은 강남에서 잘나가는 학원 강사와 원장들을 끌여들여 메가스터디를 설립했다. 자본금은 3억원. 사이트운영 및 기술지원을 위해 모 휴대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잘나가던 동생, 손성은 현 공동대표이사를 끌여들었다.

손주은이 입시전문 온라인교육사업을 구상한 계기는 97년,우연히 접한 케이블TV 홈쇼핑채널때문. “홈쇼핑을 보는순간 20년후 백화점이 없어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홈쇼핑이 엄청나게 뜰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 개념을 학원에도 적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정보화사회는 공간,시간개념이 없어질 것입니다.때문에 학원은 인터넷으로 옮겨갈 것이며,오프라인 학원은 향후 10년내 망할 것입니다”

“인터넷 강의를 이용할 경우 강의내용을 모르면 반복해 듣고, 알면 뛰어넘을수 있죠.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들을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강의현장감을 그대로 살려주고, 화질은 더욱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학원에 가는 문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온라인교육사업에 대한 손주은의 자신감은 매우 현실적이다. “강사의 질과 최고품질의 동영상을 제공하는 기술력 두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는 경쟁업체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포진해있는 강사를 보면 저는 그 사이트 강의품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본금 수십억원규모의 모 회사를 비롯해 대형 포털,모 위성방송사업자 등 전혀 신경안씁니다. 그런 수준의 강사로는 절대 저희와는 경쟁이 안되기 때문이죠”

손주은의 평가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경쟁사가 준비한 형태의 강사진을 포진해서는 절대 학생들에게 먹히지 않음을 그는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다.

직원 5명, 3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시작한 메가스터디는 그해 9월 15일 첫 서비스를 시작했다. 손 사장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철저히 연계, 처음부터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메가스터디에 신청하는 학생에 한해 오프라인 손사탐강의에 우선 등록시켜주는 특전을 부여하고,오프라인의 강의 마지막 부분은 온라인으로 제공, 온라인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도록 조합을 한 것.

기존의 경쟁업체들의 경우 강사들 참여도가 낮은 이유를 철저히 분석한 것도 그만의 성공노하우다. “강사들은 온라인에 강의내용을 올리고 난후 신경을 안씁니다.그러다보니 사후관리가 엉망이죠.업데이트가 자주안되고,문의가 들어와도 답변이 제대로 안되죠”

그는 보통의 강사들이 인터넷강의에 주력할 경우 오프라인 밥줄이 떨어질 것을 우려, 인터넷강의를 소홀히 하는 점을 감안, 과감히 주요 강사를 주주로 끌어들였다.

강남 일대 학원가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손주은 선생이 인터넷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학원 강사들사이에 메가스터디쪽에 빨리 줄을 서야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급기야 장안의 손꼽히는 초특급 강사들이 대거 메가스터디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메가스터디에는 고교학생들사이에선 이름만 대도 금새 아는 쟁쟁한 대가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대표적인 스타강사로는 손주은(사회탐구)을 비롯해, 언어영역의 이만기, 최성진 강사, 수리영역의 박장준, 소순영, 이상익 강사, 과학탐구의 이범, 현용수 강사 등이 이들. 2001년 6월, 현장동영상을 내보내기 시작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국의 수험생 회원은 무려 30만명.

서비스 첫 해인 2000년에는 고작 연 몇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2001년 7월 한달 매출이 10억원대에 이르렀다. 말그대로 대박이 터진 것. 메가스터디는 2001년 43억원의 매출에 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메가스터디는 최악의 경기상황을 보이며,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숨죽인 2002년, 군계일학처럼 떠올랐다. 연매출 205억원에 9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돌풍 그 자체였다. 단 2년여만에 선발주자를 제치고, 온라인교육시장의 절대강자로 떠오른 것.

메가스터디의 올해 목표는 매우 보수적으로 잡아, 650억원의 매출에 200억원규모의 순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메가스터디는 최악의 경기상황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신데렐라로 화려하게 떠오르고 있다.

◆ 손주은의 성공론, 그리고 꿈

그의 성공론은 간결하다.세가지 키워드중 첫번째는 ‘목숨론’.“성공하려면 사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두번째는 실패할수 있는 위험요인을 최대한 줄이는 일입니다”

그는 대중강사로서 7년간 장수를 하고있는 비결 역시 늘 다음번 강좌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치고,강의준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소개한다. 언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실패요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핵심키워드다.

세번째 요소는 변화를 빨리 읽어야한다는 ‘변화 대응력’ “학생들 색깔이 해마다 변하고 있습니다. 이젠 강한 카리스마와 감동을 주는 강의로는 안통합니다. 고객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는게 매우 중요하죠”

그는 답습만해서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반드시 경쟁사와 차별화할수 있는 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성공할수 있다고 강조한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메가스터디의 최대주주인 손주은이지만, 그는 요즘이 위기라는 뜻밖의 처방을 스스로 내린다.

“요즘 잘되다보니,조직 전체가 나태해지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분명한 위기죠” 10개 가맹학원을 직영점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주이기도 한 가맹점 학원장들이 코스닥등록시 몇 십억원의 돈을 만질수 있게 되자, 엄청 해이해져 있기 때문이죠”

손주은의 꿈은 소박하다. 엉뚱하게도 사교육이란 말의 ‘사’자(字)를 떼내는게 꿈이란다. 인터넷교육을 통해 사교육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보고 싶단다.

“현재 공교육과 사교육사이에는 확실히 대립적 관계가 있습니다. 분명 공교육이 패배감에 젖어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애써 부정하는 분위기죠. 하지만 사교육은 사회적 역기능도 크지만, 순기능도 많습니다. 인터넷교육은 특히 순기능을 더욱 극대화하는 수단입니다”

그는 그런 맥락에서 인터넷교육사업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넓여가는 또다른 꿈을 키워가고 있다. 올 연말 코스닥상장후 확보 가능한 700억원대의 자금으로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들 계획이다.

개인적으로는 젊고 유능한 인재에 투자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집중 투자할수 있는 문화재단을 세우고 싶단다.

거친 학원계에서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교육전문가 메가스터디 손주은. 그는 이제 인터넷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닷컴비즈니스의 새로운 신화를 이뤄낸 성공벤처 CEO로 우뚝 서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손 사장은 스스로 행복한 강사라고 소개했습니다.지금도 서초,송파,목동 등을 오가며 쉴새없이 강의를 하지만,그렇게 편할수 없다고 합니다. 동료강사들은 늘 힘들어하지만, 자신은 하루 10시간 강의를 해도 거뜬하다고 소개했습니다. 예전에 교통사고로 두자녀를 잃었지만, 그 이후 새롭게 두 자녀를 얻어 가정적으로도 이젠 평온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엘리트 과외선생 성공기-손주은] 목숨을 파는 강의 장사꾼
“공부는 머리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 어린 딸 장례날엔 눈물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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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학원가 20년 생활 동안 ‘야행성’ 인간으로 돌변한 그를 만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작은 체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음성에서 전달되는 첫인상은 평범함 그대로였다. 하지만 7시간에 걸친 마라톤 인터뷰를 마치고 밤 12시가 다 돼서 자리를 떠날 때 그를 바라보는 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괴물’ 혹은 ‘거인’으로 비쳤다.
그는 정말 ‘남달랐다’. 국내 온라인 교육의 절대지존으로 등장한 메가스터디 손주은(46) 사장. 입시학원가의 대스타인 ‘손사탐’(사회탐구영역의 명강사라는 의미의 별명)이 e러닝 사업의 맹주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고비마다 운명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한 남자의 운명을 이끄는 여성이라면 그에게 그들은 ‘여신’일 것이다.

첫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의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친할머니 최무선(1992년 작고) 씨와 어머니 최성례(66) 씨다. 그중 친할머니는 손 사장이 지금도 주저 없이 살아오면서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 존재다. 이 두 사람에게서 그는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배웠다. 할머니에게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저력을, 어머니로부터 강골 기질을 이어받았다.

1961년 경남 창원군 동면 무성리에서 2남4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총명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영재임을 알아본 담임의 권유로 3학년으로 월반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여동생 은희(44) 씨는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여동생 은실(42) 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셋째 남동생인 성은(40) 씨는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의 온라인사업부문 부사장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넷째 여동생인 은정(37) 씨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목사가 됐다. 막내 여동생 은진(35) 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 커뮤니케이션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손 사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왔다.

할머니·어머니 그리고 또 다른 ‘여신’들

손 사장은 자시을 장사꾼으로 표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고객만족 서비스를 제공하는 떳떳한 장사꾼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태어난 6남매가 모두 명문대를 나와 사회에서 한몫하는 위치로 성장하기까지는 청교도적 가정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가 형제들을 회사에 끌어들여 중요한 일을 맡긴 이유는 단순한 가족이기주의 때문이 아니다. 그들 형제만큼 청교도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친할머니는 가끔 1주일씩 금식기도하는 것으로 흩어지기 쉬운 손주들의 정신세계를 바로잡아 갔다. 손 사장은 “할머니가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자동으로 공부하는 분위기로 들어갔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세에 시집온 어머니는 결혼 후 수퍼마켓, 피혁사업 등을 하며 남편과 함께 부를 일궈 갔다. 특히 겨울 한철 여러 지역에 동시에 지점을 차려 가며 벌인 피혁사업은 큰 돈벌이가 됐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 장사가 끝나면 큰 마대자루에 담아 온 돈을 세느라 바빴다.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아무리 조그만 가게를 하더라도 아랫사람 열 몫은 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을 늘 되뇌었다.

아버지 손용택(71) 씨는 양돈업과 육류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아버지가 30대 후반에 정치에 뜻을 두어 모아놓은 재산을 다 없애 버리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더 큰 부자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업가적 수완이 뛰어난 부모 덕에 여섯 자녀는 넉넉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손주은 사장의 타고난 능력은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승부사적 기질이다. 어릴 때 한창 축구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14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었다. 대학 시절 당구를 배울 때는 44시간 동안 계속 당구대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집중력은 2~3년은 공을 들여야 갖게 될 실력을 한두 달 만에 갖추는 ‘괴력’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가 과외라는 일과 인연을 맺게 해 준 재수생 시절의 연인 ‘424일간의 그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그녀는 그가 삼수 끝에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는 1981년 3월3일까지 단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난 ‘424일간의 사랑’이다.

‘손사탐’ 명성을 얻게 해 준 어느 여제자

손주은 사장은 초등하교 1학년 때 3학년으로 월반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손 사장이 다섯살 때,집 근처에서.
1980년도 대학입시에서 보름 남짓 남은 본고사 준비기간에 손 사장은 같은 재수생으로 성적이 자신보다 못했던 그녀를 가르치느라 정작 자신은 시험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합격했지만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또 떨어져 후기인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들어갔다.

첫 학기를 보내고 난 뒤 휴교령이 떨어져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가난했던 그녀의 2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는 다시 서울대에 도전하기 위해 삼수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단 두 달 만에 국보위에서 과외 금지조치를 내려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동안 여자친구 등록금의 2배 정도 되는 돈을 모았고, 모두 그녀에게 건넸다.

1981년 3월3일 그가 서울대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던 날,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 그녀는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고, 그는 1984년에야 가슴으로부터 그녀를 떠나보낸 뒤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다. 그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서정의 시대였다.
세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과외 선생이 천직임을 알게 해 준 첫 제자 임모 씨다. 1987년 결혼 후 손 사장은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던 동생 성은 씨를 돌보는 조건으로 부모로부터 생활비 80만 원을 지원받았다. 세 식구가 넉넉히 먹고살 정도의 액수였다. 하지만 동생이 대학에 합격해 신촌 쪽으로 자취방을 옮기자 생계가 막연해졌다.

그 무렵 그의 돈벌이 사연 하나.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5,000원어치 인스턴트 커피를 사고, 동네 아주머니에게 커피포트를 빌려 장사에 나섰다. 다른 커피장수들은 부스 속에서 손님을 기다렸지만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포트를 들고 찾아다니며 몇 배의 수익을 올렸다. 한 잔에 500원씩, 그날 두세 시간 만에 그는 무려 3만 원을 벌었다.

커피장사를 계기로 그는 이제 가장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1987년 3월2일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면서 그는 고2 여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이 여학생이 바로 임씨다.
의사의 딸인 그 여학생은 공부와 삶에 다 의욕이 없는 학생이었다. 반에서 중간도 안 되는 실력에 얼굴이 몹시 어두운 그녀는 처음 마주앉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손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와 수업을 하러 왔지만 너무 충격받았다. 내가 지금부터 딱 5분만 말할 테니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해라.”


그는 그녀에게 공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힘들여 설명했다. 그렇게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돈으로 싸서 시집보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창녀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독설’도 퍼부었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며 펑펑 울었다. 그 뒤부터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실력은 중학교 2~3학년 수준밖에 안 됐던 그녀는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수업할 때는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그녀는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참아 냈다. 과외 두 달 만에 치른 중간고사에서 그녀는 반에서 10등을 차지했다.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성적은 놀라울 만큼 나날이 향상돼 마침내 전교 10위권 안에 들 정도가 됐다.

그녀의 실력 향상은 그에게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불어넣는 확실한 계기가 돼 과외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어머니가 “한 2년 더 벌어 유학자금을 마련하라”며 그룹과외를 제안했다. 그가 부전공인 철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을 그녀의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지방대에 다니던 아들까지 학업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맡겼다. 1988년 1월 그녀와 그녀의 오빠, 그리고 다른 학생 3명으로 구성된 5인 그룹과외는 그렇게 시작됐다. 첫 제자 임씨는 그해 이화여대에 합격했고, 그녀의 오빠 역시 일류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네 번째 ‘운명의 여신’은 아내 김정미(46) 씨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내는 두 아이를 사고로 잃는 비극을 함께 이기며 그가 ‘손사탐’으로 등장할 때까지 묵묵히 동반해 준 고마운 존재다. 그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4년 만난 동갑내기 아내는 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구애에 냉정했던 그녀는 그가 밤을 새워 쓴 2m 길이의 연애편지를 받고는 감동해 그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1986년 7월 결혼했다. 내조에 충실하겠다며 교사직을 버리고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안정돼 갔다.

그러나 그 평화는 결혼 5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1991년 9월15일 일요일. 주일이면 아내는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워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가 차를 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가족들은 택시를 이용하게 됐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태운 택시가 교각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이다.
이 사고로 뇌간을 다친 아내는 한 달 만에 깨어났지만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9월22일 세상을 떴다. 생후 9개월이었던 딸은 뇌 속에 보조기구를 끼고 살아야 하는 장애아가 됐으나 다음해 5월 연이은 사고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아이 잃고 다시 얻은 두 아이

손 사장은 어릴 적 청교도적 가정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아내가 퇴원하자 비극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양재동으로 이사를 했다. 지방에 있는 일가친척들이 이사를 축하한다며 새집으로 찾아왔다. 1992년 5월 5일이었다. 그런데 딸아이를 안고 있던 한 친척이 그만 아이를 떨어뜨렸고, 그 와중에 딸아이의 보조기구가 깨지면서 어떤 조치를 취해도 회복하지 못한 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는 양재동에서 입시 전문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새벽 3시에 병원에 들러 잠든 딸아이를 면회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막 눈을 붙이려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날 오전 딸의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눈물을 삼키며 바로 학원으로 나가 강의를 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생들의 흐느낌으로 강의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 이후의 삶은 차마 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은 강의할 때뿐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그는 1주일에 60시간을 강의하는 초인적 스케줄을 소화해 냈다. 그 사이 축복처럼 다시 아이들이 태어났다. 1993년에 딸 희소, 1996년에 아들 희재를 낳으면서 그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운명의 여성들의 손에 이끌려 삶의 방향이 제시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타고난 두뇌와 열정을 엔진으로 그 길을 질주해 왔다. 전 과목 과외선생으로 한창 뛰던 36세 당시 그의 재산은 이미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1997년부터 대중강사로 나서 ‘손사탐’으로 한창 주가를 날리던 2003년에는 150억 원이 되어 있었다. 2004년 메가스터디가 코스닥에 상장되자 그가 보유한 주가총액만 1,200억 원(31%)을 넘어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룹과외 선생으로 나선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88년 1월이었다. 그해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한 그는 음악교사 출신인 아내에게 피아노 학원을 열자고 제의한다. 부부가 힘을 합해 좀 더 빨리 재산을 불려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들 사이에는 이미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전셋집을 정리하고 그간 모은 돈을 합해 2,500만 원을 들여 작은 방이 딸린 학원을 인수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 운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우연히 아들이 가정부에게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돈보다 자식 돌보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 재산을 쪼개 월셋집을 얻고 남은 1,750만 원으로 서울 삼성동에 있는 독서실을 인수했다. 150석 규모 독서실의 한 달 순수익은 150만 원. 이 돈을 활용해 서울 역삼동에 있는 80석 규모의 독서실을 또 인수했다. 2년 뒤 삼성동 독서실 운영권을 3,100만 원에 팔아 적지 않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88년 그룹과외를 처음 시작할 때 그는 1인당 전 과목 과외수업비로 월 25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5명으로 시작한 전력투구 과외가 소문나면서 곧 10명으로 불어나 수익도 두 배로 늘었다. 그는 이들을 모두 대학에 합격시켜 다음해에는 1인당 100만 원을 받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지옥훈련을 통해 9명을 합격시켰다.

그해 과외비는 그의 목표대로 1인당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모든 돈벌이는 치밀한 사업적 목표를 토대로 추진되었다.1995년 그는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 근처 빌딩 두 개 층을 얻어 ‘진리와 자유’라는 보습학원을 열었다. 송파에는 대학친구 강주승(46) 씨와 함께 ‘참배움터’라는 학원을 열었다. 1990년에 경인학원을 세운 이후 5년 만에 3개의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된 것이다.

그는 그 무렵 고3 학생 1인당 전 과목 과외비로 200만 원씩을 받아 한 달 평균수입이 3,000만~4,000만 원대에 이르렀다. 당시 강남 유명 학원가의 초특급 강사에게 들어가는 과외비는 과목당 300만~400만 원 정도, 1년에 과외비로만 4,000만~5,000만 원이 들어가는 살인적 규모의 과외시장이 열려 있을 때였다.
‘손사탐’이 된 1997년을 그는 ‘신화 창조의 원년’이라고 부른다. 그즈음 그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삶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 뒤 남은 인생의 원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31일,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방의 한 호텔에서 밤을 새우며 1997년 새해를 맞았다. 곧 닥칠 2000년이면 그의 나이 마흔,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과외선생이었고, 재산도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지만 고향에도 못 내려가는 ‘부끄러운 아들’이 돼 있었다.

“과외선생 하는 아들 고향 내려오지 말라”

손 사장의 부모님은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어렵던 시절 6남매를 키우느라 늘 정신이 없었지만,시간이 날 때마다 자녀들 교육에 보탬이 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판검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서울대를 나온 자랑스러운 아들이 결국 과외선생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직업을 택하자 아버지는 그가 서울대를 졸업한 다음해인 1988년 추석부터 “고향에 내려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 후로 10년, 그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반드시 고향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사람들과 부닥치지 않도록 밤 12시에 도착했다가 다음날 새벽 4시면 집을 나섰다. 그는 명절에 고향에 못 가는 서러움을 하루 18시간씩 수업으로 잊으려고 했지만 그 무엇인가 늘 가슴 속에 멍처럼 남아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30시간 동안 호텔방에 처박혀 식사도 거른 채 아버지의 인생 역정과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전 재산을 투자해 사립 고등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으로 취임하면 부친이 원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방법이야말로 돈으로 명예를 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지난 인생을 글로 정리해 봤다. 그러자 세 가지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만큼 떳떳하게 살지 못했다. 다른 학원과 마찬가지였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었지만 세무 문제도 깨끗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했다. 과외는 혜택받는 사람들에게는 선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으로 치부되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자식을 잃어 가면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었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정했다.

이 두 가지 생각 끝에 그는 “삶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의야말로 내 체질”이라는 소신을 굳혔다. 고등학교 때 부흥회 찬양시간을 이끌면서 목사가 되려고도 했던 그는 자신이 대중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한정 힘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었다. 그는 지금도 “강의는 내 목숨과 같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한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결론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강의와 장사”라는 것이었다. 대신 ‘깨끗한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인생과 사업을 1997년의 각성에 두겠다는 의미로 ‘ROOT 97’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Resonable(합리적으로), Organic(조직적으로), Open-minded(열린 마음으로), Together(다함께)’라는 의미였다. 그는 이 슬로건을 늘 가슴에 되새기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마다 아크릴 판에 새겨 걸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굳히자 아버지도 변했다. 그 즈음부터 아버지는 평생 거르지 않는 새벽기도 때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손 사장은 자신을 ‘장사꾼’이라고 표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1997년 벽두의 각성 이후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떳떳한 ‘투명 세무’를 지켜 왔고, 메가스터디의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다. 또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떳떳하게 경쟁하는 장사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낸 일화는 수없이 많다. 서초동에 낸 학원 ‘진리와 자유’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의 일이다. 그는 수강신청 조건으로 어머니들이 1주일에 두 번씩 자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들을 경우 자녀의 학원비를 10% 깎아 주겠다고 했다. 또 대학에 떨어질 경우 다음해에는 수강비의 50%를 깎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했다.

두 개 층 중 한 층의 절반을 음악감상실로 만들고는 어머니들을 상대로 클래식·미학·철학·국사 등을 강의했다. 또 30명의 학생 어머니들에게 돌아가면서 밤 11시에 30명분 간식을 싸 오게 했다. 이렇게 할 경우 고객인 어머니들과 자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의 강의 실력을 확인시킬 수 있으므로 학생들의 동생들까지 뒤를 이어 등록시키기 때문이다.

학원 운영하다 대중강사 일에 ‘올인’

온라인 강의를 하고 있는 손주은 사장.
또 고객인 수험생 어머니로부터 문의전화가 오면 전화로만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테스트 용지를 들고 직접 집으로 찾아갔다. 학부모와 상담하는 동안 학생은 시험을 봤고, 채점한 뒤 공부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방법을 썼다. 보통 3~4시간이 걸릴 때도 적지 않지만 그의 성의에 감복해 대부분 수강 등록을 했다. 그의 사업철학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늘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또 ‘본질’로 승부했다. 다른 학원들은 학원차량을 마련해 심야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래다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그는 부모들에게 직접 데리러 오라고 했다. 대신 그 비용으로 최상급 강사들을 영입했다. 또 평일에는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수업을 계속했다. 주말에는 오후 1시에서 새벽 1시까지 수업을 했다. 쉬는 날은 없었다. 새벽 2시30분에 수업이 끝나도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새벽 4~5시까지 혼을 낸 뒤 귀가시켰다.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은 차 안에서 몇 시가 되든 자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이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의 열정적인 수업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 역시 질긴 엉덩이로 해냈다. 그가 22시간 연속 강의로 두세 달 걸릴 국사 등 암기과목을 하루에 끝내는 수업을 했던 것은 학원가의 유명한 일화로 떠돈다.
지옥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방학 중 9박10일간 한 학생의 집을 빌려 매일 한 과목씩 암기과목을 끝내는 프로그램이다. 함께 밤을 새우며 25점 만점에 20점 이상 받아야 잠을 허락했다. 이렇게 공부시킨 학생들은 대부분 명문대에 합격했고, 강남 어머니들 사이에서 그의 몸값은 나날이 올라갔다.

이렇게 되니 ‘배짱 장사’가 가능했다. 그는 어머니들에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니 두 명씩 조를 짜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율학습을 감독해 달라”고 했다. ‘당번’에 걸린 어머니는 아침 8시까지 나와 교실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다. 모두 강남의 ‘사모님’들이었지만 자식의 일이기에 순응했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손사탐’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기회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1997년 초, 당시 그가 운영하던 학원 ‘진리와 자유’의 기획실장이었던 이모 씨는 그의 열강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원장님은 작은 학원에서 썩어서는 안 된다”며 대중강사로 나설 것을 설득했다. 이 실장은 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력서를 들고 서울 시내 유명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외면했다. 대중강사들은 모두 단과반으로 승부를 거는데 그는 전 과목 과외선생이라는 인정할 수 없는 경력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경력을 중시하는 대중학원가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다. 결국 그는 지인의 추천을 받고서야 강남의 모 학원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었다. 3개 반을 맡았는데 등록생은 모두 8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 수에 개의치 않고 열강을 했다.

그즈음 여전히 3개 학원을 운영하던 그가 대중강사 일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벌어진다. 그해 5월 검찰이 고액과외를 문제 삼아 학원을 덮쳤다. 그는 약식기소되었고, 벌금형을 선고받아 1년간 학원 운영 자격을 박탈당하게 됐다. 이것이 그가 수능 단과반 대중강사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4년부터 도입된 수능시험은 무조건 외우기만을 주입하던 일반 강사들보다 큰 그림으로 설명하는 명문대 출신의 강사들을 주류로 등장시켰다. 덕분에 과외로 실력을 다진 그는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데뷔 5개월 만에 그의 강의는 등록 첫날 2,000명의 좌석이 매진되는 대박 행진에 나서게 된다. 연간 20억 원을 버는 스타 강사 ‘손사탐’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메가스터디 출범의 계기도 사소한 것 하나 그냥 놓치지 않는 그의 현실감각에서 시작됐다. 1998년께 그는 홈쇼핑 채널을 보고 인터넷 강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한다. 이런 그에게 모 기업에서 전자칠판 방식의 강의를 제안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인터넷 강의의 성공 가능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00년에는 당시 잘나가던 정보기술(IT)업체 대표로부터 10대를 대상으로 한 ‘틴 스터디’를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해 만든 후 대표이사로 경영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몇몇 학원장을 만나 공동 출자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조인식 바로 전날 만난 투자 전문가 후배는 “증자 과정에서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차라리 직접 회사를 설립하라고 권유했다. 그것이 바로 메가스터디를 독자적으로 출범시키는 계기가 됐다.

입시 사이트 메가스터디 인기 폭발

점심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직원과 학원 운영에 대해 상의 하고 있는 손주은 사장.
2000년 7월 그는 틴 스터디 투자를 위해 모인 학원장들과 함께 자본금 3억 원으로 메가스터디를 창립했다. 잘나가는 회사에 다니던 동생 성은 씨도 고액 연봉을 버리고 5%를 출자하며 초기 주주로 참여했다. 손 사장의 당시 지분은 68%였다. 준비기간이 겨우 2개월밖에 안 된 상태에서 서비스를 개시했지만 고등학생 타깃의 입시교육 사이트인 메가스터디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고액 스타강사의 강의를 한 강좌에 2만~8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강점으로 5년 만에 유료회원 20만 명을 달성했다. 이런 저력을 몰아 2004년에는 코스닥 등록에도 성공했다. 2002년 매출 203억 원, 2003년 매출 460억 원, 2004년 매출 502억 원, 2005년에는 매출 710억 원을 달성했다.

메가스터디가 이렇게 빨리 기반을 다지게 된 데는 오랜 현장경험에서 나온 그의 사업전략 덕분이다. 사업 초기 다수 강사들은 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개념을 접목한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본질’이 경쟁력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손 사장은 강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원칙이 통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타강사 영입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손사탐으로 ‘등극’한 자신의 위치를 십분 활용해 이 또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보통 수강생들은 학원에서 2과목 이상을 듣는다. 스타강사의 강의 앞뒤에 배치된 강의가 일찍 마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메가스터디에 참여하는 강사에게 자신의 강좌 앞뒤 시간을 배정해주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대형 강사는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직접 섭외에 나섰다. 5명으로 시작한 온라인 강사는 현재 100명이 됐다. 그중 최상위급 10명은 연봉 10억 원이 넘는다.

손 사장의 다음 꿈은 메가스터디를 종합 e러닝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성인들까지 교육 연령대를 수직계열화하는 형태로 확대해 나가고, 이와 함께 오프라인 학원을 함께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2003년 자회사를 설립해 런칭한 중등부 사이트 ‘엠베스트’는 이미 중학생 온라인 교육시장에서 1위를 기록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7, 9급 공무원시험에서 공인중개사시험, 토익·토플, 치의대·법대 등 전문대학원 등의 온라인 교육부문으로도 사업을 확장 중이다. 2005년 3월에는 공무원 고시 전문 사이트인 ‘메가고시’와 자격증 전문 사이트 ‘패스메카’ 등 2개의 사이트를 오픈했다.
직영 오프라인 학원도 확장 중이다. 지난해 말 노량진 학원의 문을 엶으로써 모두 7개의 오프라인 직영 학원을 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00억 원 들여 교육문화재단 만드는 것이 꿈

그는 연예인과 다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회원이 7,000명에 이르는 막강한 팬클럽인 ‘손사모’를 갖고 있는 인기 스타다. 손사모가 유지되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손사모 회원인 김지원(23) 씨는 “손 선생님은 ‘정모’가 있을 때면 아무리 바빠도 나타나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연구실이나 집에 데려가 재울 정도로 세심하게 보살핀다”고 했다.

바로 옆에서 그의 성장사를 지켜보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성공한 요인으로 명석한 머리와 승부사적 기질,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을 꼽았다. 여기에 살인적인 학원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설득력,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는 용인술까지 갖췄다고 한다.

사업 확장을 위해 그는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강의를 곧 접을 것이라고 한다.
“안 되면 목숨을 건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하다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추진 중인 교육사업에서 1조 원 이상의 매출이 달성되는 단계에 가면 2,000억 원 정도를 투자한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꿈이라는 손주은 사장. 이 ‘열혈남아’가 교육시장을 정복한 후 내딛게 될 다음 행보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늦은 밤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 3층에 자리 잡은 사장실을 나설 때 그의 사무실 밖에는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흩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족히 여섯 팀은 넘어 보였다. 늦은 시간 강의를 끝낸 강사들과의 면담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남들이 꿈나라를 헤맬 시간, 손 사장은 이들과 면담을 하며 밤을 하얗게 새울 것이다.

손주은 사장이 제시하는 성공의 5대 원칙
사업에 뛰어든 사람 10명 중 9명은 실패하는 것이 현실이다. 살아남은 ‘한 명’, 그중에서도 대박을 터뜨린 몇 안 되는 사업가인 손주은 사장. 그에게는 철저한 경영원칙이 있다.

첫째, 발상을 유연하게 가져야 한다 = 사업을 머릿속에서 그린 그림대로 하면 안 된다. 변화하는 흐름에 한발 앞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둘째, 무모한 고집을 버려야 한다 = 자신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고집을 부리는 사업가는 성공할 수 없다. 자신의 단점을 지적받으면 이를 수긍하고 즉각 궤도를 수정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셋째, 현실적이어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 메가스터디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지난해 오프라인 학원 중 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부하직원에게 현장의 원인을 진단하라고 했더니 그 직원은 문제를 일으킨 원장을 만난 후 보고서를 써 왔다. 문제는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현장은 고객인 학생과 교사였다. 그는 직접 현장에 가서 고객을 만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결과 나온 답대로 문제를 시정했다. 그 지점은 현재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고 있다.

넷째,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늘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

다섯째,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 늘 예상대로 안 되었을 경우를 상정해 리스크를 줄이는 준비를 해야 한다.


손주은 사장은…
1961년 3월 경남 창원 출생
1979년 부산 동성고 졸업
1987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1990년 경인학원 설립
2000년 7월 메가스터디(주) 설립
2004년 12월 메가스터디(주) 코스닥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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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초의 유혹 - 산업디자인계의 마이더스 김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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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꿈꾸었던 학자로서의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펼쳐보이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한 김영세씨...
그가 처음부터 성공을 거둔것은 아니였다.
첫번째가 골프가방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었는데, 그 아이디어로 직접 제품을 만들어서 제작, 마케팅, 판매까지 모두 하려고 했지만.. 자본부터 제대로 아는것이 없던 그는 큰 어려움에 부닥친다. 그때 어떤 사장이 김영세씨에게 당신이 모든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만드는것에 집중하라는 말에 크게 깨우치고, 지금의 방향으로 사업을 다시 재구성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아이리버, 화장품케이스, 랍스토처럼 생긴 휴대용 가스렌지, 가로본능 핸드폰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 냈다.
어떻게 보면 누구든지 생각해낼수 있는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모든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힌트를 얻으면 곧바로 메모하고, 목각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고객(업체)이 디자인을 의뢰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목각제품으로 만들어서 특허를 낸후에 업체에 직접 다가가서 판매를 하는 기법은 획기적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디자인 업체같으면 수주를 받은후에 아이디어를 짜내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불편함, 아이디어를 만들어 파니.. 게임이 될리가 없지...
암튼 그의 창의적인 생각.. 지적 호기심..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자세.. 디자인 분야에만 집중하는 모습 등 본받을 점이 많다.
얼마전까지는 미국의 일과 대한민국을 디자인 강국으로 만들다가 최근에는 중국기업의 요청을 받고 그들을 도와서 대단한 노트북을 만들어냈다고 하던데.. 약간 씁쓸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노베이터 책내용

http://www.kbs.co.kr/1tv/sisa/myth/vod/1391319_15468.html

                             0.6초의 유혹

            - 산업디자인계의 마이더스 김영세 - 

▶ 방송일시 : 2006년 4월  16일 (일)  밤 11시 00분 ∼ 12시 00분 KBS 1TV▶ CP : 김영묵 (781-1956)
▶ 제작 : 타임프로덕션  PD: 김완진, 작가: 송현숙 

▶ 세계를 놀라게 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실리콘벨리에 우뚝 선 디자이너김영세

 그의 독창적인 디자인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슬라이드형 팩트는 독일 iF 디자인상을 받았고 스마트폰은 2000년 미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상품디자인'에 뽑혔다. 휴대용 가스버너는 IDEA 금상을, 목걸이형 MP3는 독일의 레드닷어워드 디자인상을 받았다. 한국의 척박한 디자인 풍토에서 0.6초에 결정되는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디자인을 수출해 로열티를 받기까지 동, 서양을 가로지르는 김영세의 성공신화를 만나본다.   

▶ 실리콘밸리에 우뚝 선 이노디자인 !

  16살에 우연히 디자인 잡지를 보고 디자인을 업(業)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지 20년 만에 설립한 '이노디자인'. 이노디자인이 설립되기까지는 김영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 있었다.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미국 유학을 택했고, 대학 교수로 성공했지만 진정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을 수 없어 과감하게 사업에 도전. 직원 2명으로 출발했던 이 작은 회사는 한국, 미국, 중국에 법인을 둔 글로벌 디자인 회사로 성장한다.   

▶ 블랙박스에 담긴 디자인 우선주의 !

  사업차 1년에 10회 정도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김영세. 비행기를 타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그는 하늘에 떠 있는 기체만큼이나 혁신적인 디자인을 그린다. 이렇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종이가 아닌 실제 모형으로 제작되어 블랙박스에 담겨지는데 고객사에 주는 선물 같은 이 블랙박스가 바로 그가 시도한 '디자인 우선주의'다. 디자이너가 이미 개발된 상품의 외관만 포장하는 것이 아닌, 기술부터 디자인까지 상품 기획 전반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그가 시작한 '디자인 우선주의'는 이제 한국의 디자인 풍토를 흔들고 있다. 

▶ 국경을 넘어 세계를 디자인하다 !

  최근 김영세는 디지털 TV 겸 노트북인 TCL의 '베론'을 디자인했다. 새로운 멀티 디바이스를 탄생시켜 디지털 트렌드를 창조한 것. 중국 최대 전자 회사인 TCL은 '베론' 디자인으로 중국의 첫 번째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동 서양 문화와 만난 김영세는 디자인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디자인 바이 이노, 디자인 바이 코리아'를 새기고 디자인을 팔아 로열티를 벌어들이는 디자인계의 이노베이터. 그와 함께 한국의 디자인 역사는 오늘도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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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미나 - 독점의 기술 - 비즈니스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독점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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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이라.. 과연 이것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가지말까?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이상권기자가 강연을 한다니 들어보기로 하고 오래간만에 북세미나에 참석을 했다.
시작하기전에 틀어주는 인터뷰에서 정말 멋진 말을 들었다.
"그들이 간과하는것(보지 못하는것, 무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저 독점이라면 큰 회사들만이 하는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세미나에서 그 생각이 많이 깨졌다.
이것을 상황적 독점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틈새시장과 같은 맥락인것 같다.
책을 주문해서 다시 볼것인데.. 그다지 많은것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많은것을 느꼈다.
현재 기자에서 미래에셋으로 옮긴 이상건연구원이 무슨 시황에 대해서 책을 내기로 했는데.. 그 사고 과정도 좋았다.
자신들이 이 일을 시작하고, 돈이 된다면 대기업이 쫓아 올것이다. 그리고 될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단다.. 삼성이 자신을 쫓아온다면 기획하고 준비해서 몇달만에 2권정도의 책을 낼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회사 고위층에게 이를 설명하고, 자신들은 진입장벽을 갖추기 위해서 한꺼번에 5권의 책을 내버렸고, 현재 30만부정도가 팔렸다고 한다.
별것 아닌듯한 일에도 사고과정의 단계를 밟아가면서 희소성의 원칙을 지키기위해서 진입장벽을 높이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도 다시 한번 그처럼 사고의 과정과 틈새와 독점..그리고 진입장벽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좀 보이는듯 하기는 하다...:)

강연자료

강의후기

<강의내용정리>
관습적 지혜, 관습적 시작을 피하라... 남들처럼 해가지고 잘되는 놈들을 본적이 없다.
드비어스 - 독점적인 자워을 독점하고 관리해서 희소성을 소유했다.
독점은 어떠한 양적인 개념이기보다는 독점力이라고 생각...
전략은 곧 차별화이다.
지속적 경쟁우위는 우선 독점을 한후에 그 다음에 경쟁우위를 차지하는것이다.
월마트는 5만명 이하의 도시에 들어가서 80% 이상을 차지하는 독점.. 남들은 안된다고 했지만 샘월튼은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
독점기업은 광고를 하지 않는다.(마트, 스타벅스)
농심과 까르푸와의 싸움.. 신라면때문에 소비자가 다른 마트에 가자 까르푸가 항복.. 농심의 브랜드 독점의 힘
독점의 성공비결 1. 경쟁자가 없는냐? 2. 진입장벽이 있느냐? 3. 소비자가 그것을 살것이냐?
노스웨스트-저가라는 상황적인 독점. 광고안함
스타벅스의 독점하는 분야는 막연하다는것이 진입장벽중에 하나이다.
트로트가수 - 나이를 먹어도 할수 있다. 존경받는다... 콘텐츠의 독점력
케이블, 시멘트, 코카콜라, 농심은 자산(자본)의 독점...
상황적독점-엔더프라이즈(렌트카를 배달해주는 서비스), 신흥(치과), 서해건설(3D)->장소, 시간, 상품, 서비르를 독점하는것
새로운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다.
타임지는 직원들에게 최대의 서비스를 배풀어 준다고... 이러한 조직이나 기업의 문화도 희소성이 가능하다.

독점에 대한 다섯가지 질문
1. 우리 기업의 고객들은 우리 기업만 찾는가?
2. 우리 기업은 경쟁업체의 눈에 잘 띄지 않는가?(월마트-중소도시)
3. 우리 기업의 시장 바깥에 진정한 경쟁자가 있는가? (월마트가 은행업에 진출<->은행)
4. 우리 기업은 독점 기업처럼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가?
5. 우리 기업은 높은 이익, 즉 독점적 지대를 누리고 있는가?

독점의 기술이라는 책에 나오는 독점에 대한 다섯가지 질문입니다. 이중에서 대부분 YES라는 답을 할 수 있다면 독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글쎄요, 자신 없습니다만.. 이런 문제를 만나게 되면 늘 느끼는 것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영자는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우겨본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보입니다.
오늘도 제게는 많은 일정들이 있습니다. 복잡한 일.. 그래도 풀어야 할 일..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만, 이럴 때마다 객관적이고 냉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업이 성공하는 진짜 이유를 밝혀라
“매출은 높은데 이익이 없다.” 많은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이다. 80년대 이후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무한경쟁으로 돌입한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는 더 이상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이 적자에 허덕이며 고전을 면치 못할 때에도 어떤 기업은 승승장구 흑자를 낸다. 이들의 성공에는 어떤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동안 다양한 이론들이 그 비결을 분석하기 위해 주장되었다. 이 주장들은 무엇이건 경쟁우위와 전략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정말로 기업이 성공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 왜냐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기업은 다른 기업과 맞서지 않고도 시장을 차지하는 `독점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사우스웨스트 항공, 델컴퓨터, 렉서스, 렌터카회사 엔터프라이즈, 휴대폰회사 노키아, 대형 할인점 월마트 등 수많은 기업들이 쟁쟁한 기존 업체들이 각축하는 틈바구니에서 경쟁우위 없이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성공은 낡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앞으로 기업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점`뿐이다.

독점은 나쁘지 않다. 그건 옛 이야기다.
독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소비자에게 손해를 주는 나쁜 경영 방식을 생각한다. 그러나 독점의 기본적인 개념은 단지 “이익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소유할 만한 사업 영역이나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독점, `상황적 독점`이다.
상황적 독점은 `소비자의 새로운 요구를 기존 업체가 채워주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채우지 않을 때, 어떤 기업이 유일하게 그 요구를 채웠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회사인 혼다는 좌석을 눕혀 짐칸을 넓게 쓸 수 있는 미니밴시장을 5년 동안 독점하며 다른 회사들보다 24억 달러나 더 벌 수 있었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독특한 사내 분위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저가 항공 시장을 독차지하며 엄청난 고수익을 누리고 있다. 스타벅스의 세련된 분위기는 `맛있는 커피` 독점으로 입지를 다진 후에야 부각되었다. 성공한 기업들은 모두 어떤 종류든 상황적 독점의 영역을 하나씩은 보유하고 있다.
현재 새로운 독점을 가진 기업은 아무리 경쟁이 심한 시장에서도 점점 더 번성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10년간은 상황적 독점을 알고 차지하고 지키는 기업은 남보다 많은 이익을 내며 살아남을 것이고 낡은 경쟁 논리에 매달려 제 살 깎기 경쟁을 하는 기업은 “매출은 높아도 남는 게 없는” 속 빈 강정으로 남거나 아예 사라질 것이다.

독점을 모르는 기업 vs. 독점을 아는 기업
이미 그 현상은 현재 진행중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기업들이 독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쓰러져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저자가 분석한 많은 기업의 예들은 충격적이다. 리눅스의 가능성을 놓친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델컴퓨터가 왜 성공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컴팩컴퓨터, 렉서스의 공격을 무시한 벤츠는 물론이고, 철옹성 같아 보였던 코닥과 아멕스는 모두 독점을 무시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반대로 자기가 가진 독점 영역을 명확히 알고 적극적으로 이용한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CNN 같은 독점기업은 지금도 남들보다 4배, 5배 혹은 10배 이상 수익을 내고 있다.
독점을 알고 독점을 지키는 기업은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살아남을 뿐 아니라 확실하게 수익을 낸다. 그래서 위대한 경영자들은 무의식중에 독점을 찾고 활용해왔다. 주식 투자로 성공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독점을 찾아왔다. 독점 영역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반드시 고수익을 내고 그 기업의 주식은 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의 신화를 이룩한 워렌 버핏은 언제나 `투자 대상의 독점력`을 우선적으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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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미나 - 현장에서 발로 찾은 한국형 귀족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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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참석을 했는데... 듣기 시작하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나에게 맞지도 않으면서 재미도 없고, 강사의 자질도 의심이 될정도...
하지만.. 월드컵이야기와 충성고객을 나에게 적용한다는 마인드를 가지면서 몇가지를 건진 세미나가 되었다.
강사가 물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려면 우선 무엇부터 해야할까?라고.. 사람들은 우수선수 양성, 리그활성화, 심판매수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강사는 우선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는것이 우선이라고 말해주었다. 예전에 들었던 인디언의 기우제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선 목표를 잡고, 현실을 파악하면 그 사이의 갭이 나타날것이고 그것을 메우기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가보면 결국에는 그날이 올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정말 기우제와 같은 방식의 마인드였다. 나의 현실도 분명한 목표를 잡고, 현실을 인식하고, 그 차이를 매꾸기위해서 열심히 일해나가야 할것이다.

<강의내용>
마케팅이란 귀족과 같이 소중한 최고의 고객을 찾아 유치하고 유지,성장 시키기 위해 기업또는 조직내에서 행하는 모든 활동
강한 자부심을 활용하는 사례-오만한 마케팅, 예약, 비싼가격
하나은행의 The Advanced Solution for the better life - 토탈 라이프 케어 전략..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토탈 사무소업무
고객로열티(Loyalty)란? 고객이 경쟁사의 마케팅 활동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품이나 브랜드를 선호하여 재구매나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상태로 타인에게도 적극 소개하거나 하려는 태도를 말함
나의 충성고객은? 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인관계는 어떤가?

충성고객을 만들겠다는 목표.. 고객 전부를 충성고객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만들어라.
목표를 높게 잡고, 갭을 메꾸어라. 부족한것을 채워라.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하여...

고객 커뮤니티 구성 및 지원.. 한국내 자동차회사의 마케팅이 놓치는 부분.. 할리데이비슨처럼 동호회를 지원하면 좋을텐데..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도움을 제공하라.
남들과 같게 생각하고, 같게 행동하지 말라.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재미있고 신나게 만들어라.. 같은 서비스도 다르게 만들어라. 기존방식을 답습하는 연례행사로 만들지 말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고 느낀것을 하나라도 실천해보라...

강의에 들은것을 적다보니 내가 그동안 책을 보고, 강연을 듣고, 배운것은 많지만.. 실제로 내 일과 생활에 적용한것이 뭐가 있나라는 자괴감이 든다.. 하나라도 조금씩 내 사업과 생활에 접목해서 개선시켜 나가도록하자...
세계최고라는 목표를 향해서...
마케팅이라는 부분에서 배웠다기 보다는 삶에 대한 지혜를 배운듯한 세미나였다.

어떤 책인가?
귀족 마케팅은 극심한 양극화 시대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을 위한 필연적 마케팅 패러다임으로 대두되고 있다. 더 이상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일부 기업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이 책은 귀족마케팅이 왜 모든 분야에서 절실히 요구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최고의 고객에게 다가가는 방법과 인맥 형성의 노하우, VIP 고객을 `충성 고객`으로 만드는 기술, 맞춤마케팅으로 새로운 블루오션 시장을 개척하는 기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귀족마케팅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또한 귀족마케팅의 핵심 컨셉트라 할 수 있는 최고 고객 유치 비결의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현장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귀족마케팅의 실례를 최신의 정보로 제공한다. 게다가 `한국형`에 걸맞게 다른 나라가 아닌 철저히 우리나라의 생생한 사례를 들고 있어, 당장 이 책에서 제시하는 마케팅 기법을 적용해볼 수 있다.
충성 고객의 놀라운 힘!
조흥은행의 고객사 중에 `태창기업`이라는 회사가 있다. 주로 목재를 수출하고 판매하는 이 회사는 매출액 4,000억 원대의 탄탄한 기업이다.
태창기업이 조흥은행의 충성 고객이 된 사연은 이렇다. 창업자가 몇 년 전 작고하면서 현 회장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도 모든 금융 거래는 조흥은행과 100퍼센트 거래해라. 우리 태창이 아주 어려울 때인 1970년대 중반에 진정으로 도움을 준 은행이다. 다른 은행들은 회사가 어려워지자 태도를 싹 바꿨다. 그러나 조흥은행만은 그렇지 않았다. 비즈니스는 신뢰가 생명이다. 조흥은행이 우리에게 신뢰를 보여줬듯이 우리도 조흥은행에게 신뢰로써 보답해야 한다. 내가 죽더라도 태창이 존속하는 그날까지.”
현 태창기업 회장은 선친의 이런 유지를 받들어 지금도 조흥은행과 모든 금융 거래를 하고 있다. 태창기업을 시험하는 사건이 2003년에 발생했다. 2003년에 조흥은행이 신한은행과의 합병을 결정하자 노조에서 합병 반대를 이유로 총파업을 돌입했다.
파업은 약 10일간 지속되었고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경쟁 은행들이 조흥은행보다 유리한 거래 조건을 내세워 접근했다. 또, 해외 바이어들도 다른 은행을 통한 결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태창기업의 조흥은행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경쟁은행들의 요구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또, 해외 바이어들에게는 “조흥은행 파업으로 인한 재무적 손실이 발생하면 태창기업이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위 사례는 고객의 충성도가 높아지면 고객 일평생 동안은 물론 대를 이어 영원한 충성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양극화 시대의 필수 마케팅 기법
우리나라에서는 IMF 외환위기 발생한 중산층의 붕괴와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률의 증가 등으로 인해 소득과 소비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다. 더욱이 양극화는 개인의 소득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잘 나가는 기업은 계속 잘 나가고 비싼 주식과 아파트가 더 많이 오르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귀족마케팅은 은행이나 백화점, 수입 자동차나 명품 업체 등 부유층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일부 기업들만의 전유물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마케팅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필수적인 마케팅 방법론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기업들뿐만이 아니다. 병원, 자치 단체,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 영업인, 농가 등 무언가를 팔아야 하는 곳에서는 귀족마케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신발과 섬유 산업은 한때 세계 최고였으나 지금은 사양 산업 취급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사양 산업인가?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나 미국에서는 패션 산업이고 명품 비즈니스이다. 우리나라의 신발, 섬유 산업은 귀족마케팅을 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태된 것이다. 신발과 섬유 산업은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해주고 있다. 지금 잘 나가는 기업도 귀족마케팅을 도입하지 않으면 언젠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성동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주)빙그레 마케팅 담당, 한국능률협회컨설팅 마케팅 팀장, 경영전략 팀장, 경영지원 본부장을 거쳐 인터넷 경영 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고객경영연구소 소장이자 한국생산성본부, 카이스트 이엠덱 컨설팅 전문위원이다.
코리아인터넷닷컴의 칼럼리스트이며 귀족마케팅, 고객 만족, 고객 로열티마케팅, 신규 고객 개척 및 유지 전략 등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영업달인은 절대 세일즈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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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미나 -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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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읽고 처음 접해본 박경철씨... 처음에 세미나소식을 듣고는 나와 별로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예고편을 보고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제 세미나를 듣고 왔다.
듣고난 소감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대단한 통찰력과 안목을 가진 분을 또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재테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부셔버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 재테크.. 아니 세상을 보게 됬다고 할까?
약간은 냉소적인듯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되며.. 실제 데이타를 통해서 재미있게 풀어냈던 세미나였다.
한비야씨 다음으로 많은 인파가 몰렸었고.. 이 분에 대해서 좀 많이 접해보고 따라서 공부를 해보야겠다. 그렇다고 무슨 재테크나 돈을 벌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 통찰력등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겠다.

<강의내용>
재테크를 늘리기위한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고, 지키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역습을 노려라!
부자에 대한 갈망을 잘 활용하라.. 단 욕심은 실패의 원인이 된다.
내가 정말 재테크에 능력이 있는가?
금리에 대해서 알라!
보통 재테크 책을 쓰는 사람들은 재테크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책을 써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20년 경험의 비법.. 파랑새는 없다. 하지만 시행착오끝에 이렇게, 그렇게 하면 안되는것을 알았다(80%). 하지만 이렇게 하면 된다는 20%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책은 다만 거기로 가면 안된다라는 경고, 푯말을 박아놓고 싶은것이지...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라는 이정표는 아니며, 20년간 나의 처절한 경험에 대한 기록이다.
부는 상대적이며.. 권력형과 생존형으로 나눌수 있다.
부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 위험(risk)를 감수해야하고.. 이것은 바로 빈자의 물건이며, 희망이 없다.
재테크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20대의 85%가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한다. 노후준비의 슬픈 현실...
1억을 은행에 넣어놓으면(3%) 78년후에나 10억이 되지만, 10%의 수익률이라면 13년만에 가능, 30%라면 대박이다. 문제는 지속적이고 꾸준한 수익률을 낼수 있느냐이다. 중간에 몇번 마이너스 수익률을 낸다면?
미국은 주식 수익률이 금리보다 1%정도 높았고, 우리나라는 금리 수익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기업 기준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워렌버핏같은 사람을 보며 유혹을 느낀다. 파랑새를 찾으며... 하지만 당신이 지금 달리기를 열심히 시작한다고 황영조처럼 되는것은 절대 아니다.. 부정적인 현실을 알아라...
가치투자 - 인플레곡선 - 모맨텀(가격) 투자
계획과 기대의 조화를 맞추어서 지속적으로...
초보자가 주식으로 돈을 버는 이유... 뉴스를 보고 기대.. 달리는 말의 가속도... 초심자 의기양양.. 행운.. 시장에 대한 두려움 망각.. 저자는 현대건설에 500만원을 투자해서 현재 30만원이 되었다고...-_-;;;
가속도를 파악하는 눈->직관, 안목
시장은 신이다. 항상 옳다. 덤벼서 이길수 없다.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움직임에 대응하라. 신처럼 시장을 생각하라.
내제가치를 평가하거나 예측한다는것은 교만한것이다.
집과 임대건물이 같은 20억이라면 임대료(부가가치) 라는 부의 차이가 생긴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떤 부가가치를 가졌는가에 따라 다르다!
부가가치(기회비용)을 이해하라!
가격은 심리변수에 의해서 움직인다. 유동성
지식은 복리처럼 쌓여가서.. 이제는 신의 영역, 나노의 세계에 도전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공자시대에 비해서 낳아진것이 없다. 도리어 퇴보하는듯... 직관이 과학이라는 계량에 의해서 떨어진다.
투자는 테크닉이 아니다. 예술이고 직관이고 영감이다. 계산, 분석이 가능하다면 시장은 없다.
산업혁명때 감자밭이 양을 치기위해 바꾸어지고, 대기근이 일어나고 아일랜드 지역에서는 감자하나만 훔쳐도 교수형에 쳐해졌다. 하지만 눈치빠른 사람들은 방직업에 투자를 했다.
철도사업이 실패하고.. 자동차사업이 나오자.. 일부는 대박예감으로 투자를 해서 큰돈을 벌었고, 일부는 실폐를 예상하고 투자를 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투자를 했다.. 한때 자동차회사가 450여개까지 생겼다가 이제는 3개만 남았다.
감을 따라가다가 보면 대박이고, 분석을 하다가 보면 금리이하의 수익이 날뿐이다.
이런 기회는 10년마다 찾아온다. 석유파동, 반도체, PC, IT, 핸드폰...
블루오션을 찾아다니는것이 바로 레드오션이다. 블루오션은 직관이며 통찰력이다.
투자를 해서 부자가 된다는것은 망상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사업뿐이다. 피나게 노력하는...
안목, 통찰, 직관을 키워라.(통찰은 간과를 수반한다.)
1.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2. 독서 등으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라. 3. 자기통제 4. 자기관리능력



 
왜 시골의사인가?
북세미닷컴에서도 탐내는 저자 박경철은 누구인가?
올해로 투자론을 공부한 지 20년째인 그는 지금 투자이론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상급 전문가이지만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익은 이론가였던 첫 10년간`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5년부터 IMF 전후까지의 시장 전망, 1997년 이동통신주에 대한 장외 매집, 1998년 성장주 시대의 도래에 대한 확신, 이후 1999년 12월 마지막 날 모 유명 증권사이트에 거품 붕괴를 예측한 `성장주와의 이별`이라는 장문의 글을 남긴 것 등이 세간의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특히 이듬해 여름 매일경제TV MBN에 출연해서 던진 날카로운 메시지 때문에 방송국 전화가 불통이 되고, 며칠간 수차례의 재방송을 긴급편성 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1년 9.11 테러 직후에는 MBN을 통해 “향후 10년 내에 이 가격에 삼성전자를 살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도 높게 주장한 사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말뿐 아니라 실력으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면서도 이와 관련한 어떤 영리행위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소위 “전망을 팔아먹지 않는다”는 신념을 고수하는 거의 유일한 전문가다. 또한 그는 현재 다양한 매체들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안동 신세계 병원장, 매일경제TV MBN의 <머니 레볼루션> 진행자, 경제전문지 <머니투데이>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공익단체 등에서 맡은 몇 가지 소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골의사가 밝히는 부자들의 경제법칙
우리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시중에는 온갖 비법을 담은 재테크 책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장의 흐름과 반대로 행동하여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치는 것은 투자의 기본인 경제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자신이 구입하려고 하는 자산의 시세가 적정가인지 금리 이상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지 따져보고 투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골의사는 `부자란 이자율을 기준으로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자가 아닌 사람이 투자를 통해 부를 일구고자 한다면 부자들은 어떤 철학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며 어떻게 투자를 결정하는지 그들만의 경제학을 알아야 한다.
경제를 알아야 뭐든 하지!!
이 책은 현직 외과의사인 동시에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박경철 원장이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투자서이다. 증권가에서 그만큼 풍부한 인문학적 안목과 시장에 대한 통찰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안목과 필력은 이미 유명하다. 이 책에는 시골의사가 20여 년 동안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깨달은 부의 원리, 투자의 원칙이 담겨 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대박을 꿈꾸며 유망종목이나 개발예정지를 좇기보다 먼저 투자의 기본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부는 어떻게 형성되고, 부자들은 어떻게 투자를 결정하고 행동하는지, 2부에는 투자를 하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9가지 기본 원리, 3부에는 2010년까지의 투자 전망과 전략이 담겨 있다.
시골의사 북세미나를 하면서..
2005년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펴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긴 했지만 워낙 유명한 저자중의 한명이다. 원래 출판사에서 접근을 해서 부자경제학을 쓰자고 제안했을 때 시골의사는 ``아름다운 동행``을 먼저 출간해야만 ``부자경제학``을 쓰겠다고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지금 안동에서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단 이야기다. 그래서 부자경제학이라는 책이 더 궁금해졌고 북세미나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시골의사의 북세미나는 북세미나닷컴에서 가장 먼저 진행하는 북세미나가 될 것이다.

일      시 2006-07-05 19:00~21:00
장      소 광화문 교보문고 본사 문화이벤트홀
강      사 박경철
  현직 외과의사로 본명보다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투자전문가다. 2005년 의사로서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겪은 사연을 담아 펴낸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2》로 뜨거운 화제를 모으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원래 그보다는 `국내 최고의 기술적 분석가`이자 `증권사 직원들에게 주식을 가르치는 외과의사`로 더욱 유명하다. 특히 그가 중앙 일간지나 유력 잡지 등에 기고하는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은 유려한 필체와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실제 여느 연예인 못지않게 많은 골수팬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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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황제 노정만, 돼지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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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과 범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
열심히 일하는것? 근면? 성실? 운? 자본?
요즘 시골의사의 박경철씨의 컬럼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무엇보다도 안목, 통찰, 직관력이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지으면서 부지런하다면.. 최소한 굶지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큰것을 얻지는 못할것이다.
하지만 돼지황제 노정만씨를 보면 꾸준히 생각하고, 발전시키고, 개발하면서 점점 영역을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정말 이런것이 사업을 하는 사람의 마인드이고, 성공하는 사람의 비결이 아닌가 싶었다.
남들은 안되라고 말하지만..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그로서는 될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에 시작한것들이 특허를 낳고, 경제상황을 봐가면서 남들보다 한발빨리 돼지들을 팔아서 돼지값 폭락에 대비하는 등등.. 그의 통찰력은 그저 남들처럼 농사만 짓는.. 마냥 하나님과 동업하는 농부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물론 성실, 근면, 운도 따라와야 겠지만.. 안목, 통찰력, 직관력 없이는 소소한 성공에 그칠수밖에 없을것이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똑같은 결과밖에 얻을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부단하게 뼈를 깍는 노력을 해야만이 그 통찰력을 가질것이고.. 언젠가 빛을 발하게 될 날이 올것이다.

전국 최고의 기능성 흑돼지 키운다

2006-05-31 18:14:06

경상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함양군. 함양은 예전엔 천령군(天嶺郡)으로도 불리웠다. 함양은 천령(天嶺)이라는 이름대로 남쪽에는 소백산맥의 최고봉이며 진산(鎭山)인 지리산, 괘관산, 금원산 등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용추계곡, 화림동계곡 등 물이 맑은 곳이기도 하다.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보니 농산물이 많고, 가축, 양봉도 많으며 특히 흑돼지가 유명하다.

이곳 함양에는 분만과 운동시설 등을 갖춘 3층 규모의 초현대식 축사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천령포크’(대표 노정만)가 있다.
2004년 12월 유로하우징과 공동으로 개발해 세간의 화제가 된 ‘아파트형 최신3층 축사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1층은 새끼돼지용, 2층은 분만실, 3층은 웅돈과 어미돼지용으로 구분되어있다.
실내는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쾌적함이 유지되고 있으며, 분뇨는 지하배관시스템을 통해 자동적으로 정화조로 들어가도록 시설되어 있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이 큰 특징 중 하나다. 또한 돼지를 운반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

노 대표는 “진주산업대학교와 양돈 산학협력클러스트 사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특히 김철욱 교수께서 많은 지도편달을 해주셨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1999년에도 천령포크를 특허 등록했다. 이런 그간의 노력으로 노 대표는  2001년 농촌소득 증대와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2004년 12월 창의개발부분으로 경상남도로부터 ‘자랑스런 농업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 대표는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했고, 또 대학 졸업 후 10여년 동안 현장에서 일하며 학업도 병행해 2000년에는 ‘재래흑돼지의 유전육종과 관련한 연구’로 진주산업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도 ‘다층축사 시스템’으로 경상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등 그는 이론과 실재를 잘 접목시키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16년 전에 설립된 천령포크는 노 대표의 양돈에 대한 노하우와 이론이 결합하여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1999년 주식회사형 법인으로 전환한 천령포크는 5명의 주주로 구성된 흑돼지 전문기업으로 거듭났다. 현재는 농가에 분양하여 기른 것을 매입하는데 전체 500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천령포크에서 생산하는 흑돼지의 특징은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생산되어 맛이 좋고, 혈통이 고정되어(재래흑돼지의 유전자 고정 중, 노 대표의 전공) 있으므로 품질이 고르다는 것이다. 또한 껍질까지 부드러워 지방과 고기, 그리고 껍질이 동질감이 느껴지고 쫄깃하면서 담백하다.

천령포크의 흑돼지는 직매장과 계약매장(흑돼지 전문점)으로 팔리고 있다.
노 대표는 앞으로 문경의 약돌돼지처럼  시스템을 갖추고 사료를 차별화해 품질이 월등한 기능성 돼지를 생산하고, 천령포크의 참맛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들 계획이다. 이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현재는 옥수수, 보리, 고구마 농사를 직접 짓고 있다.

그는 “함양은 게르마늄의 고장으로 결국은 물이 좋다는 말인데 농산물에도 게르마늄의 함량이 아주 높다”며 “그 물을 먹고 자란 돼지는 더욱 맛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충북 영동지역에서  생산되는 일라이트와 자체 생산한 농후사료 및 생균제 효소사료를 첨가시켜 흑돼지의 품질을 더욱 업그레이드시켰다.
즉 일라이트와 특수 개발사료, 게르마늄 지하수를 먹인 최고의 기능성 흑돼지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라이트는 강한 음이온을 발생시키므로 세포를 활성화시킴은 물론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정균 작용도 한다. 천령포크는 DHEA과 DPEA 등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섭취 할 경우 체질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수입개방을 하더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우량종을 정성껏 길러 낸 천령포크는 육질과 성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

천령포크 다층 축사 시스템
지난해 5000여 평 부지에 건평 1200평의 3층 규모로 세워진첨단 축사엔 현재 5000여 마리의 돼지들이 입주해 있다. 1층에서는 갓 젖을 뗀 25㎏ 남짓한 새끼돼지 3000여 마리가 8개의 큰 방에서 이유식을 먹고 자라고 있다.
2층은 임신한 암퇘지를 위한 공간이다. 분만실과 운동실, 산후 조리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3층에는 먹성 좋고 힘이 센 웅돈과 종돈 600여 마리가 10여개 방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

실내는 자동 온·습도 조절기와 환기시설을 갖춰 사계절 최적의 환경이 유지된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는 돼지를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돼 있다. 축사 방향도 서남향으로 지어 햇볕이 잘 들어오고 산골짜기의 신선한 공기가 공급되고 있다.
사료도 파이프 라인을 통해 자동으로 공급된다. 가장 골칫거리인 분뇨 처리도 아파트 정화조 시스템을 도입, 말끔히 해결했다. 매일 소독과 청소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돈사를 출입하려면 방역복에다 소독한 모자, 신발, 장갑을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한다.
쾌적한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돼지의 번식도 나아지고 육질도 좋아졌다. 덕분에 여름철에 급격하게 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이 자연스레 해소돼 생산성이 30% 이상 증가했다.

주     소 : 경남 함양군 이은리 588-3
전화번호 : 055)964-2562 (사무실)
              055)962-3873 (직매장)
              055)964-2563 (FAX)  
              011-9510-3873            
홈페이지 :    odinni.com/cheonr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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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미나 - 프로로 산다는 것 -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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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산다는것... 그의 프로정신을 배우고 싶어서 갔지만, 그의 삶보다는 경제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왔다.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할때는 어눌하던 그가 경제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전문가로 변하는 모습이 정말 프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내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로 살도록 하자!

<강의 내용>
서서히 끝까지 가보자.
통계(과학)+통찰력,경험(예술)+습관
자기역활에 최선을 다하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것이 진정한 프로
너무 빨리 가려다가 늦어질수도 있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말라.
리서치센터(RC) A-기업분석, E-거시경제, S-고객상담,권유
기자들의 분선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긍정적인면만 보거나 부정적인면만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 유의하라.
6시에 출근, 농부형 인간, 출근직후에 국제시세,정세를 분석, 회의
영국파이넨셜 time, 영국 이코노미스트(주간지)를 보라.
기관투자자들에서 매일 분석자료를 설명해주고 주문을 받는다. 150억을 주문받으면 수수료가 1500만원
헬렌켈러처럼 내일 장님이 될것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라.
아침시간의 소중함.. 아침에 2시간정도 빡세게 일한다면 하루일을 거의 다 할수 있다.
실력이 있어야 나이가 들어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직장이나 집이나 인생이나...
건강을 위해서 등산, 마라톤등을 하고 최근에는 대인관계때문에 골프를 배운다.
마라톤을 할때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나를 도와주었듣이 나도 산들바람처럼 살고 싶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웃고 울지말고 전체를 보라.. 현재의 경기전망은 괜찮은 편이다.
70-90년대의 8%의 성장률이 imf이후에 4%대로 떨어졌다. 잠재능력은 4.5% 일본은 오일쇼크이후에 저성장으로... 당연히 체감경기도 떨어진다. 적응해야 한다.
저성자시대의 차별화, 양극화 될것이다. 경쟁력이 있으면 살아남고, 아니면 죽는다. 투자↓ 고용창출↓ 실업률↑(3.5->5) 청년실업은 8-9%... 살아남는 기업은 잘될것이다. 건설업도 어렵고, 지방업체는 도산하지만 GS같은곳은 이익↑
계속 이런 양극화가 계속된다면 마르크스의 말따라 사회주의로??
미국이 4만$의 gnp라고 하지만 서민들의 실제생활은 74년수준이라고..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해야하고, 맞벌이가 늘어난다.
국민연금은 90%를 채권에 투자해서 7.6%의 수익, 8%를 주식에 넣어서 12.1%의 수익을...
경기가 하락세일 경우-주식을 팔고 채권을 사라. 이때에도 주식을 빌려서 파는 방법이나 선물등은 돈을 벌수있다. 단 선물은 위험한 제로섬게임이다.
경기가 상승세일 경우-채권을 팔고 주식을 사라. 대략 현시점.
경기가 최고점일때 - 물가불안->정부규제->가급적 현금으로 보유하라(대락 2-3개월정도)
경기가 안좋다고 말한다면 주식을 살 준비를 하라. 개미들은 반대로 하기때문에 돈을 잃는다.
주가는 똑똑하다. 주가가 ↑ 좋은일이 있지만, ↓ 나쁜일이 생긴다.(경기침체,유가상승, 북한사태 등을 예고)
금리↓ 집값↑ 단 지역적으로 차별적으로... 왜 그런지 알아라!
부동산은 베이비붐세대때문에 한차례오르막길을 걸었고, 최근에는 저금리때문에 올랐다. 부동산은 앞으로도 오를듣하지만 리스크가 높다. 그리고 버블이 심하다.
주택보급률 서울 89% 경기 97 전국 102 110까지 가면 버블이 사라질것이다. 대략 2010년경...
주가예측↓ 실제↑ 에널리스트는 퇴출된다. ↑↑ 칭찬, ↓↓ 그래도 욕...

희망, 열정, 끊임없는 노력...
담배도 안피움... 아버지는 술과 담배에 쩔어서 살았다고...-_-;;
말만하지마고 근거, 데이터를 대라.
앞으로는 대기업위주로 그것도 세계의 대기업위주로 움직이는 사회

2달인세 410만원 전액기부.. 좀 물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
15억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서 그냥 1억정도의 연봉으로 지낸다고... 그놈의 정때문에...


‘한국 증시를 움직이는 파워맨 10인’에 애널리스트로서는 유일하게 김영익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이 선정됐다. 3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빼면 증권맨으로서 이례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6위)이 그 앞을 장식했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8위)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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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분기 증시 급락을 적중시킨 김영익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의 자서전 ‘프로로 산다는 것’(사진)이 출간됐다. 2005년 4월 종합주가지수가 1000에서 920대로 뚝 떨어질 때 급등을 예견했고, 올해 2분기에는 ‘장밋빛 전망’을 깨고 급락을 전망했다. ‘낙관론자’나 ‘비관론자’라는 평가가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프로 애널리스트의 삶을 기술했다.

검정고시를 거친 지방대(전남대) 출신이 증권분석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 비결로 그는 스스로 ‘노력’을 꼽았다.(p.108) 오전 6시에 출근하고 파이낸셜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를 정독하는 성실성이 최고의 무기라고 한다.

이 책에선 국내 신문들이 적잖이 거론된다. 그의 분석이 실린 경제신문과 종합일간지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영국 신문으로 공부한다는 그에게 국내 신문은 플레이그라운드인 모양이다.

'나를 키운 책'으로 묶인 11권도 눈길을 끈다. 경제 전문서적보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 문학서적이 주를 이룬다. 시집을 소개하더라도 철저히 '애널리스트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게 흥미롭다.

프로로 산다는 것/김영익 지음/스마트 비즈니스 펴냄/292쪽/1만2000원

교복을 입고 싶었다
때는 1970년대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주가를 분석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는, 그 시절 교복을 입어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던 얼굴 새까만 시골 촌 소년이었다.
돈이 없어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소년은, 또래 중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초라한 행색이 창피해 풀숲에 숨곤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그는 혹독한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만 시골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의 기회를 얻은 소년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한다. 비록 밥상을 책상 삼아 차디 찬 마룻바닥에서 하는 공부였지만, 배움의 열망이 그 모든 악조건을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했다.
거인을 꿈꾸다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정말 어렵게 모은 돈으로 지방대 경제학과에 입학금을 내던 그날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 중학교도 못 갔던 형편에서 야학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보고, 농고에서 비료를 다루면서도 독학을 해 대학 입시에 도전했던 그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를 그토록 충동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겪은 가난은 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내세울 만한 남다른 불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에서 자라난 지금의 젊은 세대와 달리, 그때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나보다 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다. 막연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바람 이상의 무엇, 그의 내면에는 이미 거인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하되,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마지막 지점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 그것은 증권분석가로서 현재 그의 모습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한결같은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프로란 무엇인가?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다. 그후 3월에는 잠시 1,300까지 하락했으나, 4월 들어 다시 1,400선을 넘어서고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갔다.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이번에는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경고를 계속했다.
신문들은 “1,200까지 내릴 것–최근의 주가 상승은 해외 호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견해를 실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그는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전화벨 소리가 두려울 정도였다. 회사 내에서도 영업하기 어렵다고 비난이 쏟아졌다. 주식투자자들은 주가가 떨어진다고 전망하면 싫어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석을 믿었다. 아무리 다시 분석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분석대로 주가는 5월 12일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1,46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6월 8일에는 1,220선까지 떨어졌다. 그가 다소 앞서 가기는 했으나, 그의 주가 전망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내 스스로 내놓은 결과물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확신`의 신념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좋은 환경이나 머리를 갖지 못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이력을 가지지 못한 그를 프로로 만든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굳건한 자기확신 때문이었다.
프로로 산다는 것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얼핏 `희망`만이 보이나, 사실 그들의 그림자에는 절망이 반이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때문에 그 절망의 그림자를 밟고 일어서야 비로소 성공이라 부를 수 있다. 돈, 머리, 학벌, 이런 것들이 성공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공의 요소일 뿐이다.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한 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가 된 사람이 있다.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 김영익, 우리는 그를 진정한 `프로`라 부른다. 프로는 환경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을 탓할 뿐이다.
좋은 환경을 가지지 못했다면, 좋은 희망을 가지면 된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작은 희망보다, 더 큰 프로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진정한 거인을 꿈꾸자!

전라남도의 깡촌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배웠다. “의자도 없어서 마룻바닥에 엎드려 배웠다”고 했다. 농고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했다. 전남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때가 스물두 살, 서강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한 때가 스물아홉 살, 그리고 대신경제연구소에 입사한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그의 출근 시간은 새벽 6시다. 술 마시고 새벽 2시에 들어가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소위 `아침형 인간(그의 표현에 따르면 농부형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는 또한 증권회사 재직 중에 서강대학교에서 박사과정(야간대학원이 아닌 정식과정)을 졸업했다. 스카이(SKY, 서울대․연대․고대를 말함) 출신이 대부분인 증권가에서 몇 안 되는 `지방대 출신`으로서 차별을 느꼈지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했다.
지난 2000년의 주가 급락,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그후의 반등, 2004년 5월의 주가 하락과 2005년 주가 상승 등을 줄줄이 맞히면서 그는 여의도의 족집게 스트래티지스트(strategist, 증권사 연구원 중 개별 기업이 아니라 주식 시장 전체의 흐름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사람)로 떠올랐다.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계속해서 경고했다.
그는 언론사에서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최근 5년 동안 연속해서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증권인상과 베스트 이코노미스트 부문, 스트래티지스트 부문에서 모두 1, 2위를 차지하는 프로 중의 프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2005년 투자전략실장에서 리서치센터장으로 승진했다. 동기들 중 가장 빠른 임원 승진이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예순 살이 넘어도 계속 공부를 하고 직접 자료를 쓰는 스티븐 로치(모건 스탠리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처럼 되는 것이 그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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