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후에 과외를 시작해서 보습학원, 대형학원을 차례로 성공적으로 이끈후에 현재 메가스터리를 크게 성공시킨 손주은씨의 이야기... 이런 사람을 보면 볼수록 성공할 사람은 성공할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잡기가 능한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객인 학생을 위하고.. 죽기로 노력하는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수밖에 없었다... 학원선생에서 경영자로 넘어가면서도 다른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기로 노력한다면 뭐든지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모습등... 불도저같은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학생을 위하는 모습등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라는것도 느껴졌고... 돈을 벌어서 다른 분야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 등 기업가적인 측면에서도 보통 사람과는 생각하는 마인드가 다르다.. 다만 너무 일에만 빠져사는 워커홀릭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대충 살기보다는 뭔가 하나에 미쳐서 열심히 살아가고 성취한다는것은 아름답고 멋진 일인것 같다...
나도 한번 엉덩이로 열심히 일해보고.. 죽기살기로 다시 한번 일어서 보자!
안녕하세요, 김광일입니다. 제가 그동안 써왔던 릴레이인터뷰코너는 2000년초 inews24 출범과 동시에 첫 연재를 시작한 이래 '72회 유인택 사장'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3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간 업데이트가 늦은 점, 사과 말씀 드립니다.
유인택 사장이 바통을 넘긴 다음 주자는 최근 스타기업으로 급부상한 온라인교육사이트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사장입니다. 유 사장은 “닷컴기업의 성공모델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기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워낙 파워풀한 수익모델을 자랑해 과감하게 추천했다고 소개했습니다. 메가스터디 손주은 사장이 어떤 면에서 인터넷비즈니스 성공모델의 전형이고, 얼마나 파워풀한 수익모델을 자랑하는지, 그의 창업스토리를 소개합니다.
창업한지 단 3년여만에 연매출 650억원대, 순이익 200억원대의 폭발적인 성공신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벤처기업이 등장,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 회사는 ‘밑빠진 독’이라는 비난과 함께 벤처산업계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인터넷비즈니스분야의 닷컴기업으로 밝혀져, 그 성공비결에 벤처산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온라인교육사이트를 운영중인 메가스터디.입시전문 오프라인 학원을 온라인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입시과목별로 장안에서 최고로 꼽히는 초특급 강사들이 대거 포진, 전국 고교생 사이에선 ‘넘버 원’으로 통하는 온라인 입시학원이다.
이 회사 손주은(42) 사장 역시 강남 일대 학원가에서 최고인기를 누리고 있는 강사출신.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손 사장은 인심좋은 아저씨같은 느낌을 준다. 커다란 얼굴에 약간처진 눈매, 두툼한 입술은 그저 맘씨좋고,우직할것 같은 동네아저씨 모습 그대로다.
그의 첫 인상은 강남 일대 최고인기 학원강사라는 유명세를 믿기 어려울만큼 수수하다. 하지만 뛰어난 화술과 예리하고 날카로운 표현력, 강인한 카리스마 등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경지를 자랑한다.
그는 전국 고교생들사이에서 손사탐(손주은 사회탐구의 줄인말로 그의 별칭이다)으로 통한다. 그의 강좌는 개설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마감이 끝날만큼 인기 ‘짱’이다.
실제 그는 과외, 입시학원 등 사교육에 관한한 손꼽히는 최고전문가다. 입시강의도 강의지만, 과외경력 16년째인 그가 쏟아내는 사교육의 방향과 문제점, 대안 등은 명쾌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오프라인 강사지만, 인터넷 사업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는 여느 CEO못지 않은 열정과 비전을 갖고 있었다. 실제 손 사장은 엄청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메가스터디는 2000년 7월 설립된 신생 벤처기업.서비스개시 3년여만에 선두주자로 떠오른 온라인교육시장의 다크호스다. 2001년 43억원의 매출에 9억원의 흑자를 기록한데 이어 2002년에는 매출 205억원, 90억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올해 계획은 매출 650억원에 영업이익만 무려 200억원을 바라볼만큼 폭발적이다. 올 하반기 코스닥에 입성예정이다.
◆ 운명처럼 다가온 과외강사
“학생, 제발 2년간만 더 가르쳐줘. 어차피 유학가려면 돈도 좀 필요할텐데,한 2년만 더 가르친후 돈좀 벌어 유학가면 좋잖아. 돈은 달라는대로 맞춰볼께요”
87년 10월, 딱 6개월만 하기로 마음먹고 과외강사를 시작했던 손주은은 손을 부여잡고 통사정을 하는 학생 어머니의 애절한 요청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 어머니가 그토록 목을 메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하다는 과외선생을 숱하게 붙여봐도 늘 반에서조차 중하위권이던 고 2학년 딸이 손씨로부터 과외를 시작한 지 단 5개월만에 반에서 2등, 학년 전체석차 15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던 것.
그 일이 있은 후 학생부모는 손주은에게 죽자사자 매달렸던 것. 손주은은 경남 창원출신으로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87년 3월 2일. 평범한 학생이던 손 사장의 운명이 바뀌는 각별한 날이다.
가을 학기 졸업후 손주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국내에서 대학원을 마친후 유학을 갈것인지, 아니면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인지를 놓고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87년 3월, 이미 결혼한 손주은은 생계비를 벌 요량으로 우연찮게 대학생 과외아르바이트를 하게된다. 그 때가 바로 87년 3월 2일. 그의 운명은 이때부터 한 방향으로 엄청난 속도를 내며 질주를 시작한다.
훗날 장안의 학원가에서 ‘지존’으로 불릴만큼 최고인기 학원강사로 이름을 떨치게되는 ‘손사탐’의 역사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 딱 한학기 6개월만 하리라던 과외는 결국 첫 고객의 어머니가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2년을 더 끌게 된다.
“솔찍히 공부에 대한 열망이 그리 크지 않았죠.공부에 목을 매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88년 1월, 첫 제자의 오빠를 포함해 5명의 멤버를 구성, 두번째 과외강사에 나섰다.
이때부터 손주은은 과외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두번째 수강생들은 모 대학 분교에 다니다가 다시 재도전에 나선 3수생을 포함,일류대진학이 어려운 수준의 학생들.
계약조건은 혼자서 전과목을 모두 맡는다는 것. “한 두 과목 잘해서는 성적이 안오르죠.성적을 올리기 위해 무작정 전과목을 한다고 했죠” 자신도 배워가며 가르쳤다. 숙식을 같이 하며 매달렸다. 결과는 대성공.
분교를 다니던 친구들은 연세대, 고려대 본교에 입학했고, 첫 제자는 이화여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 해 총 10명을 맡아 9명을 대학에 합격시켰다. 소문이 나면서 그 다음해는 신청자가 엄청나게 몰렸다. 원하는 가격대의 학생 15명만을 선발, 가르쳤다.
2년간의 과외를 통해 손주은은 자신에게 과외강사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갖고있음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돈도 꽤 모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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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발견, 주머니 속의 송곳
손주은은 목포여고 9회 동창 아줌마들과 묘한 인연이 있다. 첫 과외를 한 학생의 모친이 목포여고 9회 졸업생이었던 것. 손주은의 탁월한 능력을 발견한 그 모친은 고교동창들에게 손사장을 소개시켜주면서 그는 목포여고 9회 동창생 자녀들만 집중적으로 맡게됐다.
손주은은 타고난 과외강사였다. 강사로서의 표현력, 칠판에 쓰며 정리를 하는 판서능력 등이 남달랐고, 특히 학생들을 휘어잡는 강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과외체질인 ‘명강사’였다.
아이들을 확 휘어잡은 후 머리속에 쏙쏙 들어가게 설명하는 그의 이런 천부적 소질은 그냥 나온게 아니다. 전 과목을 혼자서 가르치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에서 시작됐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과외라 하면 영어, 수학 등 특정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두 과목 가르쳐서는 성적이 안올라갑니다.전과목을 골고루 잘해야 성적이 올라가죠. 성적이 올라가야 원하는 액수의 강사료를 받을수 있거든요”
그런 발상은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모든 과목을 다 섭렵해야하기 때문에 강사로서도 매우 부담스런 방식. 결과적으로 손주은은 입시 전과목을 꽤뚫는 전문가가 되었고, 이는 훗날 최고의 ‘스타강사’로 떠오르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된다.
손주은이 강남 일대 부유촌에서 최고 인기강사로 떠오르게 된 대표적인 에피소드하나.과외기간도중 그는 늘 ‘지옥훈련’을 실시한다. 만사제쳐두고 9박10일간 공부만하는 프로그램.
하루목표를 달성해야만 잠을 재우는 일종의 극기훈련. 목표달성을 위해 72시간을 꼬박 샌 적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부모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 과목을 꽤뚫고 있는 지식탱크에, 학생들을 휘어잡는 특유의 카리스마, 그리고 탁월한 강의기법으로 손주은은 강남에서조차 모시기 어려운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 도전,그리고 가슴에 묻은 두아이
2년이 지난 90년초,손주은은 결심한대로 과외강사를 그만뒀다. 유학은 포기하고,사법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3개월만에 고시공부가 체질이 아님을 절감했다. 그러던 차에 목포여고 9회 졸업생으로부터 요청이 들어왔다.간곡한 부탁이었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길로 손주은은 본격적인 전문 과외강사의 길로 접어든다. 그해 여름, 손이 모자라 보조강사 2명을 채용했다. 급기야 90년말,학원을 차리기에 이른다. 양재동에 60평짜리 학원을 마련했다.
“학생이 늘다보니 어쩔수 없었습니다. 오래할 일은 아닌데 하면서도 일을 벌리고 말았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손주은은 인생의 승부를 몽땅 학원강사에 건 상태는 아니었다.
손주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 그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손주은으로 하여금 강의하는 일에 몸을 던지게하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세사람 모두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며칠이 고비입니다”
91년 가을, 손주은은 갑자기 닥친 불행이 믿기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가던 아내와 자녀 둘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 아들은 사고 1주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고, 9개월된 딸애 역시 위독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또한 사경을 헤매며 한달째 의식불명상태였다.
뇌에 인공장치를 넣어 겨우 생명을 부지했던 딸 역시 수차례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채 꽃도 피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9개월사이 두 아이를 잃어버린 손주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딸애 장례를 치르고 난 손주은은 그날 저녁,학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미친듯이 강의를 시작했다. 너무나 고통스런 시간을 잊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인생이 그렇게 고통스럽더라구요” 고통을 잊기위해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강의에 매달렸다.
그렇게 2년간 모든 열정을 학원에 쏟아부었다. 학원은 나날이 발전했다. 개인수입 역시 월 3000만원을 넘어설 정도로 늘어났다. 고통을 잊기위해 죽자살자 매달리다보니, 학원은 승승장구했고, 손 사장은 엄청난 돈을 거머쥐게 되었다.
◆ 거칠것 없는 세월, 손주은의 성공시대
“선생님,혼자 전과목을 강의하는 것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좋지만,선생님한테는 마이너스입니다.강사로서 수명도 금새 끝납니다. 빨리 대중강사로 전환하세요” 97년, 틀림없이 대중강사로 성공할수 있다는 후배의 끈질긴 제안에 손주은은 과감히 대중강사로 변신한다.
한달에 3000만원이상의 개인수입을 포기하고,한두 과목만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대중강사로 변신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엄청난 벽을 실감했다.
“학원을 뚫기로 하고, 직접 다리품을 팔아 강남일대 주요학원에 이력서를 쭉 넣었죠. 근데, 모두 문전박대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혔죠”
학원들이 받아주질 않으니, 대중강사로 변신할 방법이 없었다. 인맥을 동원,우여곡절끝에 강남 D학원에 자리를 하나 얻을수 있었다.
강좌를 개설한 97년 2월,신청자는 3개반에 걸쳐 고작 8명에 불과했다. 총 수강료 32만원중 16만원이 강사몫이었으니, 월 3000만원수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초라했다. 학원에서는 낙하산으로 들어온 손주은을 짜를수도 없었다.
손주은의 사업가적 기질은 이 대목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8명을 데리고 목숨 걸고 강의를 했다. 과목은 사회탐구.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110% 발휘했다. 그로부터 5개월후인 97년 7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5개월전, 8명에 불과하던 수강신청자가 무료 2000명으로 늘어났기 때문. 8명의 입소문이 빠르게 펴져 손주은의 사회탐구강의를 들으려는 수험생들의 지원이 쇄도했다.
한 달후 손주은의 사회탐구장좌는 개설하기가 무섭게 전 강좌가 마감되는 최고의 인기강좌로 떠올랐다. 급기야 손사탐 강의신청을 위해 학생들이 신청 이틀전부터 학원에서 밤새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5개월만의 대성공.그의 강좌는 그 이후 내리 3년간 매진행진을 이어가며,수험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남일대 학원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계속해 강좌개설 학원을 넓혀갔고, 학원들 또한 너도나도 인기스타 손주은의 강좌를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승승장구하던 손주은은 97년 새해 첫 날 중대한 결심을 한다. 2000년, 연매출 1000억원을 넘으면 계속 학원업을 하고, 미달하면 학원계를 떠난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계속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함을 느꼈습니다. 명예도 없고, 사회에 봉사하는 성격의 사업도 아니고, 가정도 완전히 희생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91년 교통사고로 자식 둘을 잃은 손주은.96년까지 잠수, 고통의 세월을 보낸 그는 97년 그렇듯 엄청난 청사진을 만들었다. 이미 3개의 학원을 거느리고 있던 손주은은 단순한 학원강사가 아닌 사업가로서 사업적 기반을 하나둘씩 갖춰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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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은의 승부수,대변신
“합작 법인설립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직접하는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교육전문사이트인 모 회사와 합작법인설립에 합의하고, 다음날 조인식 및 주금납입을 약속했던 손 사장은 조인식 바로 전날밤, 단독으로 온라인입시교육 전문회사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증자 몇번하면 경영권은 금새 넘어가겠더라구요.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향후 운영상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겠더라구요.다음날 모든 걸 취소했죠”
월 수천만원의 안정적인 수입에 최고 인기를 누리며 학원계 최정상에 우뚝선 손주은은 오프라인의 최정점에서 과감히 온라인사업에 뛰는 대결단을 내렸다.
2000년 7월, 손 사장은 강남에서 잘나가는 학원 강사와 원장들을 끌여들여 메가스터디를 설립했다. 자본금은 3억원. 사이트운영 및 기술지원을 위해 모 휴대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잘나가던 동생, 손성은 현 공동대표이사를 끌여들었다.
손주은이 입시전문 온라인교육사업을 구상한 계기는 97년,우연히 접한 케이블TV 홈쇼핑채널때문. “홈쇼핑을 보는순간 20년후 백화점이 없어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홈쇼핑이 엄청나게 뜰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 개념을 학원에도 적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정보화사회는 공간,시간개념이 없어질 것입니다.때문에 학원은 인터넷으로 옮겨갈 것이며,오프라인 학원은 향후 10년내 망할 것입니다”
“인터넷 강의를 이용할 경우 강의내용을 모르면 반복해 듣고, 알면 뛰어넘을수 있죠.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들을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강의현장감을 그대로 살려주고, 화질은 더욱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학원에 가는 문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온라인교육사업에 대한 손주은의 자신감은 매우 현실적이다. “강사의 질과 최고품질의 동영상을 제공하는 기술력 두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는 경쟁업체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포진해있는 강사를 보면 저는 그 사이트 강의품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본금 수십억원규모의 모 회사를 비롯해 대형 포털,모 위성방송사업자 등 전혀 신경안씁니다. 그런 수준의 강사로는 절대 저희와는 경쟁이 안되기 때문이죠”
손주은의 평가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경쟁사가 준비한 형태의 강사진을 포진해서는 절대 학생들에게 먹히지 않음을 그는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다.
직원 5명, 3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시작한 메가스터디는 그해 9월 15일 첫 서비스를 시작했다. 손 사장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철저히 연계, 처음부터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메가스터디에 신청하는 학생에 한해 오프라인 손사탐강의에 우선 등록시켜주는 특전을 부여하고,오프라인의 강의 마지막 부분은 온라인으로 제공, 온라인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도록 조합을 한 것.
기존의 경쟁업체들의 경우 강사들 참여도가 낮은 이유를 철저히 분석한 것도 그만의 성공노하우다. “강사들은 온라인에 강의내용을 올리고 난후 신경을 안씁니다.그러다보니 사후관리가 엉망이죠.업데이트가 자주안되고,문의가 들어와도 답변이 제대로 안되죠”
그는 보통의 강사들이 인터넷강의에 주력할 경우 오프라인 밥줄이 떨어질 것을 우려, 인터넷강의를 소홀히 하는 점을 감안, 과감히 주요 강사를 주주로 끌어들였다.
강남 일대 학원가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손주은 선생이 인터넷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학원 강사들사이에 메가스터디쪽에 빨리 줄을 서야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급기야 장안의 손꼽히는 초특급 강사들이 대거 메가스터디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메가스터디에는 고교학생들사이에선 이름만 대도 금새 아는 쟁쟁한 대가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대표적인 스타강사로는 손주은(사회탐구)을 비롯해, 언어영역의 이만기, 최성진 강사, 수리영역의 박장준, 소순영, 이상익 강사, 과학탐구의 이범, 현용수 강사 등이 이들. 2001년 6월, 현장동영상을 내보내기 시작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국의 수험생 회원은 무려 30만명.
서비스 첫 해인 2000년에는 고작 연 몇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2001년 7월 한달 매출이 10억원대에 이르렀다. 말그대로 대박이 터진 것. 메가스터디는 2001년 43억원의 매출에 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메가스터디는 최악의 경기상황을 보이며,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숨죽인 2002년, 군계일학처럼 떠올랐다. 연매출 205억원에 9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돌풍 그 자체였다. 단 2년여만에 선발주자를 제치고, 온라인교육시장의 절대강자로 떠오른 것.
메가스터디의 올해 목표는 매우 보수적으로 잡아, 650억원의 매출에 200억원규모의 순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메가스터디는 최악의 경기상황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신데렐라로 화려하게 떠오르고 있다.
◆ 손주은의 성공론, 그리고 꿈
그의 성공론은 간결하다.세가지 키워드중 첫번째는 ‘목숨론’.“성공하려면 사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두번째는 실패할수 있는 위험요인을 최대한 줄이는 일입니다”
그는 대중강사로서 7년간 장수를 하고있는 비결 역시 늘 다음번 강좌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치고,강의준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소개한다. 언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실패요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핵심키워드다.
세번째 요소는 변화를 빨리 읽어야한다는 ‘변화 대응력’ “학생들 색깔이 해마다 변하고 있습니다. 이젠 강한 카리스마와 감동을 주는 강의로는 안통합니다. 고객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는게 매우 중요하죠”
그는 답습만해서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반드시 경쟁사와 차별화할수 있는 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성공할수 있다고 강조한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메가스터디의 최대주주인 손주은이지만, 그는 요즘이 위기라는 뜻밖의 처방을 스스로 내린다.
“요즘 잘되다보니,조직 전체가 나태해지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분명한 위기죠” 10개 가맹학원을 직영점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주이기도 한 가맹점 학원장들이 코스닥등록시 몇 십억원의 돈을 만질수 있게 되자, 엄청 해이해져 있기 때문이죠”
손주은의 꿈은 소박하다. 엉뚱하게도 사교육이란 말의 ‘사’자(字)를 떼내는게 꿈이란다. 인터넷교육을 통해 사교육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보고 싶단다.
“현재 공교육과 사교육사이에는 확실히 대립적 관계가 있습니다. 분명 공교육이 패배감에 젖어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애써 부정하는 분위기죠. 하지만 사교육은 사회적 역기능도 크지만, 순기능도 많습니다. 인터넷교육은 특히 순기능을 더욱 극대화하는 수단입니다”
그는 그런 맥락에서 인터넷교육사업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넓여가는 또다른 꿈을 키워가고 있다. 올 연말 코스닥상장후 확보 가능한 700억원대의 자금으로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들 계획이다.
개인적으로는 젊고 유능한 인재에 투자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집중 투자할수 있는 문화재단을 세우고 싶단다.
거친 학원계에서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교육전문가 메가스터디 손주은. 그는 이제 인터넷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닷컴비즈니스의 새로운 신화를 이뤄낸 성공벤처 CEO로 우뚝 서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손 사장은 스스로 행복한 강사라고 소개했습니다.지금도 서초,송파,목동 등을 오가며 쉴새없이 강의를 하지만,그렇게 편할수 없다고 합니다. 동료강사들은 늘 힘들어하지만, 자신은 하루 10시간 강의를 해도 거뜬하다고 소개했습니다. 예전에 교통사고로 두자녀를 잃었지만, 그 이후 새롭게 두 자녀를 얻어 가정적으로도 이젠 평온하다고 말했습니다.
[한 엘리트 과외선생 성공기-손주은] 목숨을 파는 강의 장사꾼
“공부는 머리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 어린 딸 장례날엔 눈물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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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학원가 20년 생활 동안 ‘야행성’ 인간으로 돌변한 그를 만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작은 체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음성에서 전달되는 첫인상은 평범함 그대로였다. 하지만 7시간에 걸친 마라톤 인터뷰를 마치고 밤 12시가 다 돼서 자리를 떠날 때 그를 바라보는 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괴물’ 혹은 ‘거인’으로 비쳤다.
그는 정말 ‘남달랐다’. 국내 온라인 교육의 절대지존으로 등장한 메가스터디 손주은(46) 사장. 입시학원가의 대스타인 ‘손사탐’(사회탐구영역의 명강사라는 의미의 별명)이 e러닝 사업의 맹주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고비마다 운명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한 남자의 운명을 이끄는 여성이라면 그에게 그들은 ‘여신’일 것이다. 첫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의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친할머니 최무선(1992년 작고) 씨와 어머니 최성례(66) 씨다. 그중 친할머니는 손 사장이 지금도 주저 없이 살아오면서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 존재다. 이 두 사람에게서 그는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배웠다. 할머니에게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저력을, 어머니로부터 강골 기질을 이어받았다. 1961년 경남 창원군 동면 무성리에서 2남4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총명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영재임을 알아본 담임의 권유로 3학년으로 월반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여동생 은희(44) 씨는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여동생 은실(42) 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셋째 남동생인 성은(40) 씨는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의 온라인사업부문 부사장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넷째 여동생인 은정(37) 씨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목사가 됐다. 막내 여동생 은진(35) 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 커뮤니케이션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손 사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왔다. 할머니·어머니 그리고 또 다른 ‘여신’들
친할머니는 가끔 1주일씩 금식기도하는 것으로 흩어지기 쉬운 손주들의 정신세계를 바로잡아 갔다. 손 사장은 “할머니가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자동으로 공부하는 분위기로 들어갔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세에 시집온 어머니는 결혼 후 수퍼마켓, 피혁사업 등을 하며 남편과 함께 부를 일궈 갔다. 특히 겨울 한철 여러 지역에 동시에 지점을 차려 가며 벌인 피혁사업은 큰 돈벌이가 됐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 장사가 끝나면 큰 마대자루에 담아 온 돈을 세느라 바빴다.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아무리 조그만 가게를 하더라도 아랫사람 열 몫은 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을 늘 되뇌었다. 아버지 손용택(71) 씨는 양돈업과 육류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아버지가 30대 후반에 정치에 뜻을 두어 모아놓은 재산을 다 없애 버리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더 큰 부자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업가적 수완이 뛰어난 부모 덕에 여섯 자녀는 넉넉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손주은 사장의 타고난 능력은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승부사적 기질이다. 어릴 때 한창 축구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14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었다. 대학 시절 당구를 배울 때는 44시간 동안 계속 당구대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집중력은 2~3년은 공을 들여야 갖게 될 실력을 한두 달 만에 갖추는 ‘괴력’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가 과외라는 일과 인연을 맺게 해 준 재수생 시절의 연인 ‘424일간의 그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그녀는 그가 삼수 끝에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는 1981년 3월3일까지 단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난 ‘424일간의 사랑’이다. ‘손사탐’ 명성을 얻게 해 준 어느 여제자
첫 학기를 보내고 난 뒤 휴교령이 떨어져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가난했던 그녀의 2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는 다시 서울대에 도전하기 위해 삼수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단 두 달 만에 국보위에서 과외 금지조치를 내려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동안 여자친구 등록금의 2배 정도 되는 돈을 모았고, 모두 그녀에게 건넸다. 1981년 3월3일 그가 서울대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던 날,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 그녀는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고, 그는 1984년에야 가슴으로부터 그녀를 떠나보낸 뒤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다. 그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서정의 시대였다. 세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과외 선생이 천직임을 알게 해 준 첫 제자 임모 씨다. 1987년 결혼 후 손 사장은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던 동생 성은 씨를 돌보는 조건으로 부모로부터 생활비 80만 원을 지원받았다. 세 식구가 넉넉히 먹고살 정도의 액수였다. 하지만 동생이 대학에 합격해 신촌 쪽으로 자취방을 옮기자 생계가 막연해졌다. 그 무렵 그의 돈벌이 사연 하나.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5,000원어치 인스턴트 커피를 사고, 동네 아주머니에게 커피포트를 빌려 장사에 나섰다. 다른 커피장수들은 부스 속에서 손님을 기다렸지만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포트를 들고 찾아다니며 몇 배의 수익을 올렸다. 한 잔에 500원씩, 그날 두세 시간 만에 그는 무려 3만 원을 벌었다. 커피장사를 계기로 그는 이제 가장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1987년 3월2일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면서 그는 고2 여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이 여학생이 바로 임씨다. 의사의 딸인 그 여학생은 공부와 삶에 다 의욕이 없는 학생이었다. 반에서 중간도 안 되는 실력에 얼굴이 몹시 어두운 그녀는 처음 마주앉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손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와 수업을 하러 왔지만 너무 충격받았다. 내가 지금부터 딱 5분만 말할 테니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해라.”
그는 그녀에게 공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힘들여 설명했다. 그렇게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돈으로 싸서 시집보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창녀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독설’도 퍼부었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며 펑펑 울었다. 그 뒤부터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실력은 중학교 2~3학년 수준밖에 안 됐던 그녀는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수업할 때는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그녀는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참아 냈다. 과외 두 달 만에 치른 중간고사에서 그녀는 반에서 10등을 차지했다.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성적은 놀라울 만큼 나날이 향상돼 마침내 전교 10위권 안에 들 정도가 됐다. 그녀의 실력 향상은 그에게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불어넣는 확실한 계기가 돼 과외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어머니가 “한 2년 더 벌어 유학자금을 마련하라”며 그룹과외를 제안했다. 그가 부전공인 철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을 그녀의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지방대에 다니던 아들까지 학업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맡겼다. 1988년 1월 그녀와 그녀의 오빠, 그리고 다른 학생 3명으로 구성된 5인 그룹과외는 그렇게 시작됐다. 첫 제자 임씨는 그해 이화여대에 합격했고, 그녀의 오빠 역시 일류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네 번째 ‘운명의 여신’은 아내 김정미(46) 씨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내는 두 아이를 사고로 잃는 비극을 함께 이기며 그가 ‘손사탐’으로 등장할 때까지 묵묵히 동반해 준 고마운 존재다. 그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4년 만난 동갑내기 아내는 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구애에 냉정했던 그녀는 그가 밤을 새워 쓴 2m 길이의 연애편지를 받고는 감동해 그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1986년 7월 결혼했다. 내조에 충실하겠다며 교사직을 버리고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안정돼 갔다. 그러나 그 평화는 결혼 5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1991년 9월15일 일요일. 주일이면 아내는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워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가 차를 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가족들은 택시를 이용하게 됐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태운 택시가 교각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이다. 이 사고로 뇌간을 다친 아내는 한 달 만에 깨어났지만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9월22일 세상을 떴다. 생후 9개월이었던 딸은 뇌 속에 보조기구를 끼고 살아야 하는 장애아가 됐으나 다음해 5월 연이은 사고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아이 잃고 다시 얻은 두 아이
당시 그는 양재동에서 입시 전문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새벽 3시에 병원에 들러 잠든 딸아이를 면회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막 눈을 붙이려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날 오전 딸의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눈물을 삼키며 바로 학원으로 나가 강의를 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생들의 흐느낌으로 강의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 이후의 삶은 차마 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은 강의할 때뿐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그는 1주일에 60시간을 강의하는 초인적 스케줄을 소화해 냈다. 그 사이 축복처럼 다시 아이들이 태어났다. 1993년에 딸 희소, 1996년에 아들 희재를 낳으면서 그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운명의 여성들의 손에 이끌려 삶의 방향이 제시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타고난 두뇌와 열정을 엔진으로 그 길을 질주해 왔다. 전 과목 과외선생으로 한창 뛰던 36세 당시 그의 재산은 이미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1997년부터 대중강사로 나서 ‘손사탐’으로 한창 주가를 날리던 2003년에는 150억 원이 되어 있었다. 2004년 메가스터디가 코스닥에 상장되자 그가 보유한 주가총액만 1,200억 원(31%)을 넘어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룹과외 선생으로 나선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88년 1월이었다. 그해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한 그는 음악교사 출신인 아내에게 피아노 학원을 열자고 제의한다. 부부가 힘을 합해 좀 더 빨리 재산을 불려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들 사이에는 이미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전셋집을 정리하고 그간 모은 돈을 합해 2,500만 원을 들여 작은 방이 딸린 학원을 인수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 운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우연히 아들이 가정부에게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돈보다 자식 돌보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 재산을 쪼개 월셋집을 얻고 남은 1,750만 원으로 서울 삼성동에 있는 독서실을 인수했다. 150석 규모 독서실의 한 달 순수익은 150만 원. 이 돈을 활용해 서울 역삼동에 있는 80석 규모의 독서실을 또 인수했다. 2년 뒤 삼성동 독서실 운영권을 3,100만 원에 팔아 적지 않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88년 그룹과외를 처음 시작할 때 그는 1인당 전 과목 과외수업비로 월 25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5명으로 시작한 전력투구 과외가 소문나면서 곧 10명으로 불어나 수익도 두 배로 늘었다. 그는 이들을 모두 대학에 합격시켜 다음해에는 1인당 100만 원을 받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지옥훈련을 통해 9명을 합격시켰다. 그해 과외비는 그의 목표대로 1인당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모든 돈벌이는 치밀한 사업적 목표를 토대로 추진되었다.1995년 그는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 근처 빌딩 두 개 층을 얻어 ‘진리와 자유’라는 보습학원을 열었다. 송파에는 대학친구 강주승(46) 씨와 함께 ‘참배움터’라는 학원을 열었다. 1990년에 경인학원을 세운 이후 5년 만에 3개의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된 것이다. 그는 그 무렵 고3 학생 1인당 전 과목 과외비로 200만 원씩을 받아 한 달 평균수입이 3,000만~4,000만 원대에 이르렀다. 당시 강남 유명 학원가의 초특급 강사에게 들어가는 과외비는 과목당 300만~400만 원 정도, 1년에 과외비로만 4,000만~5,000만 원이 들어가는 살인적 규모의 과외시장이 열려 있을 때였다. ‘손사탐’이 된 1997년을 그는 ‘신화 창조의 원년’이라고 부른다. 그즈음 그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삶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 뒤 남은 인생의 원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31일,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방의 한 호텔에서 밤을 새우며 1997년 새해를 맞았다. 곧 닥칠 2000년이면 그의 나이 마흔,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과외선생이었고, 재산도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지만 고향에도 못 내려가는 ‘부끄러운 아들’이 돼 있었다. “과외선생 하는 아들 고향 내려오지 말라”
그는 30시간 동안 호텔방에 처박혀 식사도 거른 채 아버지의 인생 역정과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전 재산을 투자해 사립 고등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으로 취임하면 부친이 원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방법이야말로 돈으로 명예를 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지난 인생을 글로 정리해 봤다. 그러자 세 가지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만큼 떳떳하게 살지 못했다. 다른 학원과 마찬가지였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었지만 세무 문제도 깨끗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했다. 과외는 혜택받는 사람들에게는 선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으로 치부되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자식을 잃어 가면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었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정했다. 이 두 가지 생각 끝에 그는 “삶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의야말로 내 체질”이라는 소신을 굳혔다. 고등학교 때 부흥회 찬양시간을 이끌면서 목사가 되려고도 했던 그는 자신이 대중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한정 힘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었다. 그는 지금도 “강의는 내 목숨과 같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한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결론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강의와 장사”라는 것이었다. 대신 ‘깨끗한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인생과 사업을 1997년의 각성에 두겠다는 의미로 ‘ROOT 97’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Resonable(합리적으로), Organic(조직적으로), Open-minded(열린 마음으로), Together(다함께)’라는 의미였다. 그는 이 슬로건을 늘 가슴에 되새기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마다 아크릴 판에 새겨 걸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굳히자 아버지도 변했다. 그 즈음부터 아버지는 평생 거르지 않는 새벽기도 때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손 사장은 자신을 ‘장사꾼’이라고 표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1997년 벽두의 각성 이후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떳떳한 ‘투명 세무’를 지켜 왔고, 메가스터디의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다. 또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떳떳하게 경쟁하는 장사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낸 일화는 수없이 많다. 서초동에 낸 학원 ‘진리와 자유’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의 일이다. 그는 수강신청 조건으로 어머니들이 1주일에 두 번씩 자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들을 경우 자녀의 학원비를 10% 깎아 주겠다고 했다. 또 대학에 떨어질 경우 다음해에는 수강비의 50%를 깎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했다. 두 개 층 중 한 층의 절반을 음악감상실로 만들고는 어머니들을 상대로 클래식·미학·철학·국사 등을 강의했다. 또 30명의 학생 어머니들에게 돌아가면서 밤 11시에 30명분 간식을 싸 오게 했다. 이렇게 할 경우 고객인 어머니들과 자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의 강의 실력을 확인시킬 수 있으므로 학생들의 동생들까지 뒤를 이어 등록시키기 때문이다. 학원 운영하다 대중강사 일에 ‘올인’
그는 또 ‘본질’로 승부했다. 다른 학원들은 학원차량을 마련해 심야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래다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그는 부모들에게 직접 데리러 오라고 했다. 대신 그 비용으로 최상급 강사들을 영입했다. 또 평일에는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수업을 계속했다. 주말에는 오후 1시에서 새벽 1시까지 수업을 했다. 쉬는 날은 없었다. 새벽 2시30분에 수업이 끝나도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새벽 4~5시까지 혼을 낸 뒤 귀가시켰다.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은 차 안에서 몇 시가 되든 자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이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의 열정적인 수업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 역시 질긴 엉덩이로 해냈다. 그가 22시간 연속 강의로 두세 달 걸릴 국사 등 암기과목을 하루에 끝내는 수업을 했던 것은 학원가의 유명한 일화로 떠돈다. 지옥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방학 중 9박10일간 한 학생의 집을 빌려 매일 한 과목씩 암기과목을 끝내는 프로그램이다. 함께 밤을 새우며 25점 만점에 20점 이상 받아야 잠을 허락했다. 이렇게 공부시킨 학생들은 대부분 명문대에 합격했고, 강남 어머니들 사이에서 그의 몸값은 나날이 올라갔다. 이렇게 되니 ‘배짱 장사’가 가능했다. 그는 어머니들에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니 두 명씩 조를 짜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율학습을 감독해 달라”고 했다. ‘당번’에 걸린 어머니는 아침 8시까지 나와 교실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다. 모두 강남의 ‘사모님’들이었지만 자식의 일이기에 순응했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손사탐’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기회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1997년 초, 당시 그가 운영하던 학원 ‘진리와 자유’의 기획실장이었던 이모 씨는 그의 열강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원장님은 작은 학원에서 썩어서는 안 된다”며 대중강사로 나설 것을 설득했다. 이 실장은 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력서를 들고 서울 시내 유명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외면했다. 대중강사들은 모두 단과반으로 승부를 거는데 그는 전 과목 과외선생이라는 인정할 수 없는 경력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경력을 중시하는 대중학원가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다. 결국 그는 지인의 추천을 받고서야 강남의 모 학원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었다. 3개 반을 맡았는데 등록생은 모두 8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 수에 개의치 않고 열강을 했다. 그즈음 여전히 3개 학원을 운영하던 그가 대중강사 일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벌어진다. 그해 5월 검찰이 고액과외를 문제 삼아 학원을 덮쳤다. 그는 약식기소되었고, 벌금형을 선고받아 1년간 학원 운영 자격을 박탈당하게 됐다. 이것이 그가 수능 단과반 대중강사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4년부터 도입된 수능시험은 무조건 외우기만을 주입하던 일반 강사들보다 큰 그림으로 설명하는 명문대 출신의 강사들을 주류로 등장시켰다. 덕분에 과외로 실력을 다진 그는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데뷔 5개월 만에 그의 강의는 등록 첫날 2,000명의 좌석이 매진되는 대박 행진에 나서게 된다. 연간 20억 원을 버는 스타 강사 ‘손사탐’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메가스터디 출범의 계기도 사소한 것 하나 그냥 놓치지 않는 그의 현실감각에서 시작됐다. 1998년께 그는 홈쇼핑 채널을 보고 인터넷 강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한다. 이런 그에게 모 기업에서 전자칠판 방식의 강의를 제안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인터넷 강의의 성공 가능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00년에는 당시 잘나가던 정보기술(IT)업체 대표로부터 10대를 대상으로 한 ‘틴 스터디’를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해 만든 후 대표이사로 경영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몇몇 학원장을 만나 공동 출자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조인식 바로 전날 만난 투자 전문가 후배는 “증자 과정에서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차라리 직접 회사를 설립하라고 권유했다. 그것이 바로 메가스터디를 독자적으로 출범시키는 계기가 됐다. 입시 사이트 메가스터디 인기 폭발
고액 스타강사의 강의를 한 강좌에 2만~8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강점으로 5년 만에 유료회원 20만 명을 달성했다. 이런 저력을 몰아 2004년에는 코스닥 등록에도 성공했다. 2002년 매출 203억 원, 2003년 매출 460억 원, 2004년 매출 502억 원, 2005년에는 매출 710억 원을 달성했다. 메가스터디가 이렇게 빨리 기반을 다지게 된 데는 오랜 현장경험에서 나온 그의 사업전략 덕분이다. 사업 초기 다수 강사들은 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개념을 접목한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본질’이 경쟁력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손 사장은 강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원칙이 통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타강사 영입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손사탐으로 ‘등극’한 자신의 위치를 십분 활용해 이 또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보통 수강생들은 학원에서 2과목 이상을 듣는다. 스타강사의 강의 앞뒤에 배치된 강의가 일찍 마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메가스터디에 참여하는 강사에게 자신의 강좌 앞뒤 시간을 배정해주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대형 강사는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직접 섭외에 나섰다. 5명으로 시작한 온라인 강사는 현재 100명이 됐다. 그중 최상위급 10명은 연봉 10억 원이 넘는다. 손 사장의 다음 꿈은 메가스터디를 종합 e러닝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성인들까지 교육 연령대를 수직계열화하는 형태로 확대해 나가고, 이와 함께 오프라인 학원을 함께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2003년 자회사를 설립해 런칭한 중등부 사이트 ‘엠베스트’는 이미 중학생 온라인 교육시장에서 1위를 기록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7, 9급 공무원시험에서 공인중개사시험, 토익·토플, 치의대·법대 등 전문대학원 등의 온라인 교육부문으로도 사업을 확장 중이다. 2005년 3월에는 공무원 고시 전문 사이트인 ‘메가고시’와 자격증 전문 사이트 ‘패스메카’ 등 2개의 사이트를 오픈했다. 직영 오프라인 학원도 확장 중이다. 지난해 말 노량진 학원의 문을 엶으로써 모두 7개의 오프라인 직영 학원을 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00억 원 들여 교육문화재단 만드는 것이 꿈 그는 연예인과 다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회원이 7,000명에 이르는 막강한 팬클럽인 ‘손사모’를 갖고 있는 인기 스타다. 손사모가 유지되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손사모 회원인 김지원(23) 씨는 “손 선생님은 ‘정모’가 있을 때면 아무리 바빠도 나타나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연구실이나 집에 데려가 재울 정도로 세심하게 보살핀다”고 했다. 바로 옆에서 그의 성장사를 지켜보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성공한 요인으로 명석한 머리와 승부사적 기질,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을 꼽았다. 여기에 살인적인 학원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설득력,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는 용인술까지 갖췄다고 한다. 사업 확장을 위해 그는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강의를 곧 접을 것이라고 한다. “안 되면 목숨을 건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하다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추진 중인 교육사업에서 1조 원 이상의 매출이 달성되는 단계에 가면 2,000억 원 정도를 투자한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꿈이라는 손주은 사장. 이 ‘열혈남아’가 교육시장을 정복한 후 내딛게 될 다음 행보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늦은 밤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 3층에 자리 잡은 사장실을 나설 때 그의 사무실 밖에는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흩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족히 여섯 팀은 넘어 보였다. 늦은 시간 강의를 끝낸 강사들과의 면담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남들이 꿈나라를 헤맬 시간, 손 사장은 이들과 면담을 하며 밤을 하얗게 새울 것이다.
손주은 사장은… 1961년 3월 경남 창원 출생 1979년 부산 동성고 졸업 1987년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1990년 경인학원 설립 2000년 7월 메가스터디(주) 설립 2004년 12월 메가스터디(주) 코스닥 등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