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말'
한때 난 꿈꾸는 걸 포기했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심지어는 성공이 두려워서
네가 꿈을 버리지 않는 아이인 걸 알았을 때
나 또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지
계절은 변한다
인생의 겨울에 와서야 삶을 알게 되었구나
내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거다
-윌리엄 포레스터-
포레스터가 자말에게 보내는 유서의 일부분이자, 동생의 싸이홈(http://cyworld.com/bestjava)에 인사말로 적혀있어서 기억이 났던 대사입니다.
꿈을 꿀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생기고 젊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꿈이 없다고 말할 때 이미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한동안 닫았던 마음. 대중속의 고독을 느끼며 어지러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의 발견은 삶을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파인딩 포레스터
원 제 : Finding Forrester |
감 독 : 구스 반 산트 |
주 연 : 숀 코너리 , 안나 파킨 , 롭 브라운 , F. 머레이 아브라함 , 버스타 라임스 |
각 본 : 마이크 리치 |
촬 영 : 해리스 새버디스 |
음 악 : 빌 브라운 |
편 집 : 발디스 오스카즈도터 |
미 술 : 제인 머스키 |
장 르 : 드라마 |
개 봉 : 2001년 05월 26일 |
등 급 : 12세 이상 관람가 |
시 간 : 136 분 |
수입/배급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
제작국가 : - |
제작년도 : 2000 년 |
시놉시스 | |
세상에 빛나는 영화는 많아도 당신에게 빛을 주는 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 |
세상을 등진 남자와 세상으로 막 나오려는 소년 두 사람의 아름다운 조우가 시작된다! 길거리 농구를 즐기는 흑인 소년 자말 월러스(롭 브라운 분)는 농구에 대한 특별한 재능으로 인근 명문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스카웃된다. 하지만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을 몰래 지켜보는 낯선 시선을 느끼게 되고 베일에 쌓인 그 이상한 남자의 방에 몰래 침입한다. 그 아파트의 괴팍한 노인은 세상에서 사라졌던 위대한 작가 포레스터(숀 코너리 분)였다. 자말은 실수로 자신의 가방을 놓고 나오고, 포레스터는 자말의 가방속의 글들을 통해 평범함을 뛰어넘는 문학적 재능을 본다. 그리고, 포레스터는 문학적 재능을 지닌 자말을 문학세계로 이끌어 주기로 하는데... 지난 수년간 한번도 문을 열지 않았던 자신만의 세계에 자말을 받아들인 포레스터. 포레스터는 엘리트 사회에서 방황하는 소년을 이끌어 주고, 소년은 자폐적으로 변한 포레스터를 다시 세상과 이어주면서 둘의 우정은 점점 깊어간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자말은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포레스터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던 작가 포레스터임을 알게 되는데... |
초안은 마음으로 쓰고 머리로 수정하라
주류 컴플렉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포레스터라는 은둔하고 있는 작가를 '찾는' 과정을 나타내는 제목일 수도 있고 그 작가가 자폐적인 성향을 벗어나 '포레스터'라는 자아를 찾아 나선 것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굿 윌 헌팅으로 많은 감동을 주었던 구스 반 샌트 감독의 작품이어서인지 굿 윌 헌팅의 분위기가 짙었습니다. 굿 윌 헌팅이 '윌'이라는 불우한 환경속에서 상처받으며 성장한 한 천재의 자아 찾기에 촛점을 맞추었던 것처럼 파인딩 포레스터 역시 '자말'이라는 한 영특한 흑인 청년이 백인 주류 사회 속에서 받는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을 한 축으로, 포레스터라는 작가가 스스로의 세계속에 갖혀 살던 것에서 벗어나 참된 우정을 배우는 과정을 다른 한 축으로 얘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굿 윌 헌팅에서 맷 데이먼과 로빈 윌리엄즈의 관계처럼 파인딩 포레스터 역시 영화의 큰 흐름을 우정에 맞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것에서 이 영화는 다소 민감한 문제를 안고 출발합니다.
인종 문제, 그것은 희고 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메인스트림' 대 '아웃사이더'의 문제입니다..
흑인 청년 자말은 뛰어난 글쓰기 재능 때문에 자신이 나고 자란 브롱스(흑인 빈민가)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중반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동네 흑인 친구들로부터 모종의 따돌림을 받는 장면은 이른바 '메인스트림'에 속하지 못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주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겪는 정체성 상실을 그려줍니다. 주인공 자말은 백인들로부터는 피부색과 출신 배경 때문에 차별받고 흑인들로부터는 그들을 버리고 주류의 품에 안긴, 일종의 배신자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회(또는 작게 어떤 '집단')의 주류에 속할 출신 배경을 갖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은 태생적 한계를 안은 채 주류 속으로 위장 취업을 하거나(그 과정은 결코 녹녹치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운명으로 체념하며 계속해서 차별받는 쪽에 서는 선택지밖에 없는 것인가의 문제.
미국 합참 의장을 거쳐 부시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진출한 콜린 파월을 볼 때, 아무래도 '공화당 속의 콜린 파월'은 별로 어울리는 그림은 아닙니다. 콜린 파월은 다른 백인보다 더욱 보수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 같기도 하구요.(나도 너네들 편이란 걸 제발 믿어줘!) 다수 속에 억지로 자기를 끼워 맞추는 당사자의 심리는 어떤 것일지도 궁금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의 인종 문제만은 아닙니다. 어떤 크기의 집단이든 유사합니다. 내가 주류에 속할 배경을 갖지 못했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마틴 루터 킹이 될 것인가, 콜린 파월이 될 것인가"
아니면 뫼르소가 될 수밖에?
영화는 흑인 청년이 훌륭하게 주류의 품에 안착하는 것으로 결말을 내립니다. 그 과정에는 역시 '착한' 백인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자말은 물려 받은 포레스터의 집에서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합니다. 창 밖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풍경이 반복 재생되고 있습니다. 흑인 아이들 몇몇이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콜린 파월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자신은 주류에 편입했지만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할렘'으로 다시 되돌아 가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 영화는 이 문제를 깊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배경으로 가볍게 보여주고 갈 뿐입니다.
글쓰기, 평론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몇 대사가 참 괜챦았었습니다.
"초고는 마음으로 쓰고 재고는 머리로 쓴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구상한 다음 쓴 글보다는 영화속의 포레스터처럼 무아지경에서 정신 없이 자판을 두드리며 쓰고 나중에 찬찬히 '머리'를 써서 다시 추스려가는 것이 더 좋은 글, 더 감동적인 글을 쓰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명작가로 등장한 포레스터는 평론가들을 아주 탐탁치 않게 얘기합니다. 그가 첫 작품만을 남긴 채 은둔에 들어갔던 것은 개인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평론가들이 함부로 작품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싫어서였기 때문입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필요악입니다. 좋은 평론을 찾는다는 것은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다 그렇습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작품을 냉소적으로 씹어 줘야만 자신의 예리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없는 평론가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어디서 듣고 온 것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이름들과 국적불명의 용어들을 섞어가면서,
" ... 하려는 시도는 참신했으나, ... 하다 만 느낌이다"
는 식의 글을 날립니다. 급기야 평론의 영역을 넘어서 스스로 소설가가 되기도 합니다. 작가도 모르는 그 작품의 제작 배경을 얘기합니다. 작가 본인은 알지 못하는 어떤 작품에 틀림없이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호언합니다. 이들은 작품을 이야기하기보다 자신의 지식을 뱉어놓기에 전전긍긍합니다.
그런 평론가들에 손사래를 치는 포레스터의 모습은 창조하는 쪽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굿 윌 헌팅에게서 감동을 느꼈다면 이 영화는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