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신만의 부를 누리고 살수도 있지만, 불합리한 현실을 참지 못하고, 모든것을 버리고, 인도인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간 간디의 이야기..
간디하면 떠오르는것이 비폭력무저항주의.. 대표적인것이 단식이다... 물론 영국이 자유민주주의 나라이므로 어느정도 설득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과연 일본이였다면...-_-;;
암튼 많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겪었지만 비폭력무정항주의라는 철저한 원칙하게 그의 투쟁이 시작된다. 이 투쟁은 굳이 영국에 대한 투쟁뿐이 아니라. 분열되는 자국민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였다. 암튼 철저한 원칙주의자라는 말이 뇌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본인이 믿는 흰두교도에 의해서 암살되어서 신을 외치다가 세상을 떠난 간디...
누가 뭐래도 원칙을 가지고, 지켜가는 사람들은 반대의 의견도 많겠지만.. 언제나 타인에게 귀감이 되는것 같다.
그리고 책 내용중에 간디가 금식, 단식에 대해서 조언을 해준부분이 있다. 금식이나 단식의 효능, 효과가 엄청 좋다는 추천의 말과 더불어서, 금식이나 단식을 할때 음식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귀에 탁 들어왔다. 금연을 금주를 한다는 사람이 담배와 술을 떠올리면서 성공할수 있을까? 뭔가를 끊겠다거나 하지 않겠다는것은 육체를 통제하는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신을.. 자신의 마음을 다시리는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간디자서전 도서요약본 |
간디자서전 도서요약본 - 감추기
마하트마 간디 지음 인도인들에게는 ‘위대한 혼’(마하트마)으로, 우리에게는 ‘비폭력운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간디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비폭력, 금욕, 자치, 무소유, 공동체 등 진리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갔던 간디의 삶과 사상이 잘 담겨 있다. ▣ 저자 마하트마 간디 ▣ Short Summary ▣ 차례
조혼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마 세 번은 약혼을 했던 듯하다. 나는 내 약혼자로 선택이 되었던 두 소녀가 차례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세 번 약혼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희미한 기억에 세 번째 약혼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때였던 듯싶다. 어른들은 나보다 두세 살 위인 내 둘째형과, 한 살 위인 사촌형과 나를 한꺼번에 모두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는 데도 우리 의견은 물론 우리의 행복은 고려되지도 않았고, 순전히 그들 자신의 편의와 경제문제로 결정된 일이었다. 비극 육식이 좋다는, 그것이 나를 튼튼하고 담대하게 만들 것이라는, 그리고 온 국민이 만일 육식을 한다면 저 영국인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작정하고 우선 고기 먹는 실험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조용한 곳을 찾아 냇가로 가서 구운 빵과 가죽같이 질긴 염소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밤새 무서운 가위에 눌려 혼이 났다. 잠이 들락말락하노라면 곧 산 염소가 뱃속에서 매매 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렇게 한 1년을 지속한 후 나는 고기를 먹는 것은 필요하고, 전국적으로 음식 ‘개혁’을 일으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제 부모를 속이는 것은 고기를 안 먹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검소한 생활 방패가 된 나의 수줍음 변호사 면허와 나의 고민 결국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1891년 6월 10일에 변호사 면허를 얻었다. 그리고 11일에 고등법원에 등록했으며, 12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공부는 했건만 나의 무력과 두려움에는 끝이 없었다. 내게 변호사 노릇을 할 자격이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면허 얻기는 쉬웠으나 법정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배우지 못했다. 흥미를 가지고 『법률 금언집』을 읽었으나, 그것을 내 직업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몰랐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도법에 관해서는 전혀 배운 것이 없었다. 또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터럭만큼도 아는 것이 없었다. 소송장 쓰는 것조차도 배우지 못해서 앞이 캄캄했다. 도대체 이 직업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이런 의심과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몇몇 사람들과의 면담을 통해 실망 속에 조그만 희망의 누룩을 넣어가지고 나는 영국을 떠나 기선 아삼 호로 뭄바이에 상륙했다.
생애 첫 충격 그러나 그는 “설마 그때 알고 지낸 것을 악용하러 여기 온 것은 아니겠지요?”라는 듯한 굳어진 태도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본론을 끄집어냈고, 결국 그를 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경호원을 불러 나를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나는 화가 나 어쩔 줄을 모르며 그곳을 떠났다. 나는 그를 고발하고자 했으나 아는 변리사에게 독약같이 쓴 조언을 듣고 그것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절대로 그런 잘못된 자리에 나 자신을 두어서는 아니 되며, 다시는 절대로 우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 해서도 아니 된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다짐했고, 그 후 나는 이 결심을 깨뜨린 일은 한 번도 없다. 이 충격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쿨리의 신세 나는 이 두 법의 효력을 체험해야 했다. 한번은 경찰관 하나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나를 떠밀고 발길로 차서 거리로 내몰았다. 내가 왜 이러느냐고 항의하기도 전에, 마침 말을 타고 그곳을 지나던 코츠씨가 소리쳐 나를 불렀다. 그는 경찰관을 고소하고자 했으나, 나는 그런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경찰관을 꾸짖었다. 경찰관은 내게 사과를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용서해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도인에 대한 나의 동정은 더 깊어졌다. 이 법규 문제로 후에 영국 주재관을 만난 다음, 필요하다면 하나의 시험 케이스를 만들어볼 만하지 않느냐는 토론을 했던 일이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인도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글을 통해, 귀를 통해 들었을 뿐 아니라 체험으로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자존심이 있는 인도인에게는 남아프리카는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내 마음은 점점 더 갈수록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사태를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탈 인도 국민의회 나는 첫 출발에서부터 공공사업은 빚을 지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일은 다 그렇지 않았는지 몰라도 금전에 관해서만은 누구든 약속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때까지 자기 입으로 내겠다고 한 회비를 곧 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나탈 인도인들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수중에 자금이 없이는 사업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나탈 인도 국민의회는 빚을 진 일이 없었다. 회의는 보통 매달 한 번, 필요한 때면 매주 한 번씩 열리곤 했다. 전 회의의 회의록을 읽고,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했다. 사람들은 공식 토론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고, 말을 간단하고 요령 있게 할 줄도 몰랐다. 나는 회의 진행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고, 그러면 그들은 잘 지켰다. 식민지 출생의 교육받은 인도인에 대한 봉사와 남아프리카와 영국에 있는 영국인과 인도 국내에 있는 인도인들에게 나탈의 실정을 알려주는 등의 의회의 활동의 결과로 남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인도인 친구를 얻게 되었고, 인도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동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또한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앞에 하나의 분명한 행동노선을 제시해주었다. 3파운드의 세금 진리는 끝내 이기고야 말았다. 인도인의 고난은 그 진리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에 대한 비상한 인내, 부단한 노력이 아니고는 그같은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 공동체가 만일 그 투쟁을 중단했더라면, 국민의회가 투쟁을 그만두고 세금을 불가피한 것으로 알고 항복해버렸다면 이날까지도 원한의 세금은 계약노동자에게 부과되었을 것이고, 남아프리카의 인도인과, 그리고 전체 인도인의 영원한 치욕으로 남았을 것이다.
자녀 교육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공립학교에서 교육시키기로 했다면 그애들이 오직 경험의 교육, 즉 부모와의 끊임없는 접촉에서 얻어지는 훈련은 얻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현재처럼 그들의 일에 대해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서 영국이나 남아프리카에서 인위적인 교육만을 받았더라면 그들이 오늘날 그 생활에서 보여주는 듯한 그러한 소박함과 봉사의 정신을 가르쳐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비록 학문 교육은 그들이나 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나의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볼 때 그들에 대한 내 의무를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브라마차리아 나는 극기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따로 자기 시작했다. 나의 결심을 말했을 때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일로 기진맥진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최종 결심은 1906년에 가서야 겨우 되었다. 나는 단식을 하였는데, 브라마차리아를 외적으로 돕는 데 단식은 음식을 선택하고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이다. 감각이란 너무도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려면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음식을 먹지 않고는 힘을 못 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제어할 목적으로 단식을 하는 것은 의심 없이 매우 유효한 것이다. 아기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녀 양육과 공공 봉사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내 확신이 되어갔다. 그로부터 20년,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내 마음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보어 전쟁 부대는 6주간 복무 후 해산되었다. 우리의 일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그 당시 많은 칭찬을 받았고, 인도인의 위신은 올라갔다. 신문들은 “우리도 제국의 아들이로다”라는 후렴구가 붙은 칭찬의 노래를 실었다. 불러 장군은 자기가 위급했을 때에 우리 부대가 한 일을 칭찬했고, 지휘관들은 훈장까지 탔다. 백인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았다. 전쟁 중에 맺어진 백인과의 관계는 참 아름다웠다. 시련에 처한 신앙 나는 쿠네의 치료법에 따라 마닐랄에게 하반신 목욕을 시키기 시작해서, 목욕통 안에 3분 이상 두지 않고 계속 오렌지 주스에 물을 타서 먹이며 사흘 동안을 계속했다. 그래도 열은 내리지 않고 40도까지 올라갔으며, 밤에는 계속 헛소리를 했다.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계속하며 나만의 치료를 고수했으며, 그 애는 40일 동안을 물 탄 주스와 과일즙으로 지냈다. 이제는 겁날 것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악성 열병이었는데도 휘어잡을 수가 있었다. 지금 마닐랄은 우리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다. 그 애가 완쾌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지, 물 치료법 때문인지, 아니면 음식을 주의하고 간호를 잘했기 때문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구나 제 믿음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 나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내 명예를 건져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늘까지도 변함이 없다.
반성의 결과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무소유)나 사마바바(samabhava: 한결같음, 평등관) 같은 낱말들이 나를 괴롭혔다. 평등한 마음을 어떻게 길러가며 지켜가느냐가 문제였다. 대답은 즉시 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이’를 따를 수 없다. 법을 존중해야 된다는 내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나는 그것을 종교 안에서 발견했다. 나는 무소유에 대한 『기타』의 교훈을 이런 의미로 이해했다. 즉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피천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흙, 물 치료법의 실험 그러는 동안에 채식식당을 운영하던 한 친구가 내 손에다 저스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쥐여주었다. 그 책에서 나는 흙 치료에 관한 것을 읽고 즉시 실행해 보았는데,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이 치료법은 깨끗한 흙을 찬물로 이겨서 깨끗한 베 헝겊에다 넓게 펴 가지고 그것을 배에다 붙이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잘 때에 붙이고 밤중이나 아침에 깨게 되면 떼어냈는데, 그 효과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다. 나는 일생에 두 번 아주 중병을 앓아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1천에 999는 음식 조절, 흙, 물 치료, 또는 그와 비슷한 가정요법으로 나을 수 있다. 조금만 아프면 곧 양의요 한의요 하며 의사에게 달려가고 식물성, 동물성의 가지가지 약을 삼키는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몸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종 노릇을 하는 동안에 자제하는 힘을 잃어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되고 만다. <인디언 오피니언> <인디언 오피니언>은 내 생활의 일부요 거울이었다. 매주 나는 신문의 기고란에 심혈을 기울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사티아그라하’의 원리와 실천에 관해서 해설을 했다. 10년 동안, 그러니까 1914년까지 내가 감옥에서 억지로 쉬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내 논설을 싣지 않고 발행된 <인디언 오피니언>은 한 호도 없었다. 실로 그 신문은 나에게는 자제의 수련장이 되었고, 친구들에게는 내 사상과 끊임없는 접촉을 해나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아마 <인디언 오피니언>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발행인과 독자 사이에 긴밀하고도 순수한 유대를 맺어놓자는 것이 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신문은 내게 계급과 인종을 초월한 인간성 연구의 기구가 되었다. 사티아그라하의 탄생 정신적 딜레마 나는 대영제국을 통해서 나와 내 동포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했다. 전쟁에 종군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늘날로 나는 그러한 견해에 결코 모순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진리에 헌신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관습에 따라서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수정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신이 잘못임을 알았을 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고백하고 속죄해야 할 것이다.
아슈람의 창립 겸손이 속에 품고 있는 참뜻은 자기 말살이다. 자기 말살은 곧 모크샤(Moksha: 구원)이다. 그러니 그 자체만으로는 지킬 조건이 못 되는 동시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다른 계율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모크샤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 겸손, 즉 무사(無私)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모크샤를 갈망하는 마음, 곧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겸손 없는 봉사는 이기주의요, 자기 중심주의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합해 스물다섯 명이었다. 이것이 시작 당시의 아슈람의 모습이었다. 밥은 모두 공동취사장에서 먹었고, 한가족으로 살려고 애를 썼다. 파업과 단식 그렇게 한 결과 사방에 선의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공장주들도 이에 감동되어 해결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나수야벤의 집이 토의장소가 됐다. 아난드샨카르 드루바가 이 사태의 중재자로 지명됐다. 그리하여 내가 단식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파업은 중지되었다. 파업을 시작한 지 21일 만에 해결을 보았다. 공장주들은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직공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었는데, 21일 동안 엄격한 규칙을 지킨 사람들이 과자 분배과정에서 무질서함을 보이는 희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는 너무 혹독한 가난과 기근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지로 만든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이는 그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돌아볼 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자선가들은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도록 할 생각은 않고 동냥만 주고 있다. 히말라야적 오산 대체로 사람들은 법을 어겼을 때의 벌이 무섭기 때문에 그 법을 지킨다. 도덕률에 관계되지 않은 법인 경우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마지못해 하는 복종은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데 필요한, 자발적인 순종은 아니다. 사티아그라하를 하는 사람은 사회의 모든 법을 이지적으로, 또한 자기의 자유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성한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킨다. 이와 같이 사회의 모든 법을 성실히 지키고 난 후에야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법은 선하고 옳으며, 어떤 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것이라고 능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어떤 특정한 법에 대해 명확한 조건 아래서 시민의 불복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 내 잘못은 이러한 필요한 한계들을 잘 알지 못한 데 있었다. 나는 씨?들이 이러한 자격들을 스스로 갖추기 전에 시민의 불복종에 나서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이 내가 보기엔 히말라야같이 큰 것이었다. 씨?들이 시민의 불복종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면 그것이 속에 품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난 다음이라야 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규모로 시민의 불복종을 다시 행하려면 먼저 사티아그라하의 엄격한 모든 조건을 철저히 이해하는, 잘 훈련되고 순결한 심정을 가진 사람의 무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이 씨?들에게 이 모든 조건을 설명해주고 불철주야로 경계해야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안녕히 내 경험은 내게 진리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아힘사의 실천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도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잠깐 볼 수 있었던 잠시 동안의 진리의 광선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진리의 광채를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저 태양 빛의 광휘보다 가늘고 희미한 빛뿐이다. 그러나 내 모든 실험의 결과로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즉 진리의 완전한 모습은 ‘아힘사’의 완전한 실현이 있은 후에야 나타난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정화의 길은 좁고 험하다. 완전한 정화에 이르려면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절대적으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사랑과 미움, 친밀함과 소원(疏遠)함의 대립이 이어지는 세속의 흐름을 초월해야 한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노력은 하면서도 아직도 내 속에 그 세 겹의 정결이 되어 있지 못함을 안다. 세상의 칭찬이 내게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때가 많다.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나는 나를 무(無)에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피조물 중의 맨끝에 세우지 않는 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힘사는 겸허의 궁극점이다. 1891년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 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에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가 생겨났다. 이는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후 사태가 보여 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찾아냈으며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1915년에 모국에 돌아온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 국민 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인도 민중이 갖고 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촌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反英)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 회의는 자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 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 회의파, 이슬람 동맹, 영국 정부 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고,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反)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인도인 가운데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간디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정치 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종교였으며 평생 평등과 비폭력의 사상을 일관되게 지켰다. 간디의 저서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표현되어 있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근대 국가에 대한 불신, 폭력에 대한 전면 거부는 기술 문명의 폐해와 평화의 위협으로 가득찬 현대 세계에서 점차 높이 평가되고 있다. ▣ 간디 연보 |
<도서 정보>제 목 : 간디 :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
저 자 : 카트린느 클레망 저
출판사 : 시공사
출판일 : 1998년 2월
구매일 :
일 독 : 2006/2/11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원칙을 갖고, 원칙대로 살자!
뭔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 뭔가를 생각하지 말고, 그 뭔가를 하기로 했다면, 그 뭔가만을 생각하라!
<미디어 리뷰>
카트린 클레망 (Catherine Clement) - 1939년 파리 출생.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철학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1965년부터 14년간 소르본느 대학에서 얀켈레비치 교수의 조교수로 일했으며 1978년부터는 파리 제1대학(팡테옹-소르본느)의 전임강사가 되었고, 1982년에는 외무부 산하 프랑스 예술가활동협회(AFAA)의 협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인도 뉴델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프랑스-인도 예술제 대표로 활약하였고, 1991년부터는 오스트리아 빈 대사로 근무하였다.
잡지 「마탱 드 파리(Matin de Paris)」의 문화부장을 거쳐「라르크(L'arc)」, 「르 마가진 리테레르(le Magazine Litte'raire)」을 통해 난해한 현대 철학을 경쾌한 소설 형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를 다룬 <악마의 창녀>,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랑을 그린 <마르틴과 한나> 등이 있다.
어린시절의 간디,청년기의 간디,장년기의 간디,노년의 간디 등 그의 모습에서 배어나오는 그의 정신이 살아있게 표현되어있다.그리고 그가 지켜내려했던 인도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할것도 우리가 느껴야할것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할것이 무엇인지 뚜렷히 알수 있었다.
간디에 대한 심도깊은 서적은 아니지만 이 책으로 충분히 간디를 알수 있으리라 생각된다.간디의 사진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허름한 옷과 깡마른 간디,베틀을 짜는 간디..그는 그의 생각을 몸소 실천하는 사상가였다.매스컴에 나오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어떠한가...그의 높은 이상에 숙연해졌다.
<책속으로>
1. 방탕했던 청년시절
2. 진리의 실험, 그리고 변화하는 간디
3. 할아버지가 되는 법
4. 영광의 노년기
5. 슬픈 계절
6. 순교자
7. 기록과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