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5 - [방송 iN/다큐 iN] - 특선다큐드라마 - 워리어스 - 타고난 승부사, 나폴레옹
위의 방송은 그가 어떻게 데뷔를 했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방송은 정상에 오른후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잘 보여준 방송...
그가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자신의 야욕과 자신의 나라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았고, 독재를 한 인물로 볼수도 있다... 자기나라 병사만 300명이 죽어갔으니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가 야심을 이루어가는것을 교묘하게 국익이라는 미명아래 벌어진 일들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방송...
한인물의 흥망성쇄를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도 됬지만, 그의 역사의 굴곡에서 왜 승리를 했고, 왜 패배를 할수밖에 없었는지를 돌아보면서 또 많은것을 배울수도 있다.
워털루전투와 같은 경우만해도 본인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했고, 여건상 싸우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였을뿐인듯 했고, 러시아 침공때도 오합지졸을 가지고 군대숫자만을 믿고 참여한 전투에서 참패한것.. 이외에도 유배지에 가서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복귀를 하는 과정 등등 에서 많은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찌보면 역사를 보고, 느끼고, 배우는것이 이러한 과정은 아닐지...
<다큐 10+ - 역사>
나폴레옹의 몰락
원제: Napoleon
방송: 2008년 11월 25일 (화) 밤 11시 10분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의 최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로마의 카이사르라도 되는 양, 스스로를 신과 같은 무적의 존재로 여기게 됐고 제국을 이어나갈 아들을 원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 왕비에게 에게 ‘말메종’을 주고 매년 3백만 프랑의 생활비까지 지급하면서 이혼을 감행한 후 새 아내를 맞아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나폴레옹의 새 아내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살의 ‘마리 루이즈’ 공주였고 이로써 그는 유럽의 왕가인 ‘합스부르크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811년,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고, 오랜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또한 1812년 봄에는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프랑스를 비롯해 그의 제국 곳곳에서 차출한 60만 명의 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가 조직됐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승리를 자신하며 6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던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고 12월 5일,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남겨둔 채 서둘러 파리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유럽이 연합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가게 된다.
지난주에 이어 제2편은 나폴레옹의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EBS <다큐10+>는 나폴레옹의 전성기와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18일과 25일 오후 11시10분에 2부작으로 방송한다.
18일 ‘나폴레옹, 유럽을 지배하다’에서는 160㎝도 안 되는 작은 키에 왼손잡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유럽을 제패했는지 알아본다. 1804년 12월2일 35세의 나폴레옹은 최고가 되려던 꿈을 실현한다. 코르시카 출신의 이 젊은 중위는 혁명의 물결에 몸을 던져 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사랑하는 여인 조세핀과 결혼한 후 전장에 나가 잇단 승리 끝에 마침내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나폴레옹은 1805년 영국 침공 계획을 세우지만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에 이를 포기하고 유럽 대륙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미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25일 ‘나폴레옹의 몰락’에서는 등장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나폴레옹의 몰락 과정을 조명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제국이 커져가자 아들을 원하게 된다. 그는 조세핀과 이혼한 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19세의 마리 루이즈 공주를 새 아내로 맞아 아들을 얻는다.
1812년 보좌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또한 그해 12월5일 파리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은 권좌를 잃고 유배를 떠난다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혁명 후 혼란기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반도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부터 부분적으로 전쟁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련의 전쟁을 합쳐 대(大)프랑스 전쟁(Great French War)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는 대불(對佛) 대 동맹전쟁(Koalitionskriege)이라고 하고, 1813년 이후 독일 해방을 위한 전투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대동맹전쟁 이래 100년 이상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를 제2차 100년 전 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를 구분 짓는 정설은 없다. 1803년 5월 아미앵 화약의 파기를 경계로 보는 측이 많으나 1796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 개시를 경계로 보는 측과 1799년 11월 브뤼메 쿠데타를 경계로 보는 측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대륙과 세계각지의 식민지도 전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역사상 최초, 정확히는 7년 전쟁에서 이어진 2번째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편집] 영향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다시 복고주의, 정통주의를 원리로한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혁명정신은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 등 일부 식민지에까지 퍼져, 프랑스 혁명사상(민주주의, 근대법, 특권계급의 폐지등)이 심어졌다. 구체제의 부활 후에도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한 여러 법전은 각국에 남게 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 역사를 크게 바꿔 이후 100년간 유럽 여러 나라는 봉건영주의 영토를 단위로 하던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의도하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높아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부활하였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보나파르트 간의 심각한 대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계속되지 않고 7월 혁명에서 타도 당했다. 또한 프랑스 영역은 루이 14세 이래 계속된 영토확장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보아와 니스를 제외한 현재의 프랑스 본국영토가 결정되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영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해군을 격파하여 영국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아우르는 제해권을 획득해 패권국으로써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륙 봉쇄령에 대항해 해상봉쇄를 감행해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 무역에도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어 영국의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민족주의가 높아져,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를 시작으로 많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나폴레옹의 공격을 견디고 전후 북이탈리아를 획득하여 대국으로써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서서히 프로이센과의 대립이 깊어져 갔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까지 파견하고, 전후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운동을 봉쇄하여 유럽 구체제의 중심으로써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의 특색이 남은 국내경제는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하여 뒤쳐졌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것이 명백해진 것은 이후 크림 전쟁에서 증명되었다.
[편집] 진행 과정
[편집] 제1차 이탈리아 원정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등에 의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에 나섰다. 곧이어 그때까지 최전선에서 프랑스 군과 대치하던 사르데냐 왕국을 약 1개월 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 만토바를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구원을 위해 반격에 나섰으나 나폴레옹과 대결하여 카스틸리오네 전투(8월 5일), 아르콜레 다리 전투(11월 15일~17일), 리볼리 전투(1797년 1월 14일)등에서 패배했다. 2월 2일 만토바는 항복하고 오스트리아는 정전협정에 나서 4월 18일 레오벤 조약이 성립되었다.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캉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는 남네덜란드와 라인 강 좌측해안을 병합하고, 북이탈리아에서는 치살피나 공화국 등 프랑스의 위성국이 세워졌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편집] 이집트 원정
이 부분의 본문은 이집트 원정입니다.
프랑스군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에 대해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대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인 이집트에 대한 원정을 총재정부에 요청했다. 1798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항구를 출항해 도중에 몰타 섬을 점령하고 7월 2일 이집트의 아부키르 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해 승리를 거두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8월 1일 나일 해전에서 허레이시오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함대에게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 만다.
또한 영국이 몰타 섬을 점령하여 해상의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하던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1800년 제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801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공격했다.(코펜하겐 해전은 4월 2일에 벌어졌다.)그 결과 무장중립동맹은 해체되고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고, 덴마크는 프랑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
[편집] 제정의 성립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이 부분의 본문은 나폴레옹의 제2차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1798년 1월 스웨덴의 중재에 의해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라슈텐트 회의가 열렸지만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연기하여 대프랑스 동맹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1798년 12월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참가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1799년 오스트리아가 북이탈리아를 탈환했다. 다시 위험에 빠진 프랑스는 국민들 사이에 총재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와 11월 9일 브뤼멜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권을 장악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출하였다.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받고 궁지에 빠졌다가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호엔리덴 전투(12월 3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2월 9일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하여 캄포-포르미오의 조약 내용을 재승인 하였다. 또한 7월 프랑스는 교황 비오 7세와 콘코르다트를 맺어 프랑스 혁명이래의 대립관계를 해소했다. 영국이 홀로 전쟁을 계속했으나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으면서 강화하였다.
이후 평화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체제 회복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3월 21일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프랑스 왕족 앙갱 공이 처형당한 일이 벌어져 유럽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으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했다.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편집] 제3차 대프랑스 동맹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계획하고, 도버해협에 인접한 브르타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해 영국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전투는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7만이 바이에른에 침공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8월 하순에 브르타뉴를 출발해 9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벌어진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나폴레옹은 빈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 잔존부대와 합류하여 결전을 도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이었던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에 대해 후에 예술이라고 평가받은 지휘와 배치를 발휘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한편 해전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빌뇌브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포착되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괴멸 당했다. 다만 이 해전은 곧바로 대륙에 있던 나폴레옹의 패권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게 굴복했다.
다음해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왕,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에 즉위시키고, 7월에는 독일의 서남쪽 여러 연합체를 합쳐 친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전후로써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하게 되었다.
[편집] 제4차 대프랑스 동맹
프로이센은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으나, 라인 동맹의 성립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자, 1806년 7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예나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 후위부대를 격파하고, 아우어슈타트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이 2배의 병력을 갖추고, 다부 군단에게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 당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섰고,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이 발흥하고 있던 영국과 유럽대륙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금지시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허나, 오히려 교역 상대를 잃어버린 유럽 여러 나라측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추적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향했으나,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과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8일)가 벌어졌다. 눈바람속의 전투는 양군 모두 적지 않은 사상자가 속출했고, 결판은 나지 않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하고, 프리트란트 전투(6월 14일)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하여 격멸시켰다.
7월 7일 ~ 9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폴란드 분할로 인해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는 옛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으로 되살아났다.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를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프로이센의 옛 영지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치되고,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프로이센은 철학자 피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한다]라는 강연을 시작하고, 또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군제개혁이 실시되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에르푸르트에서 회담을 갖고,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는 일을 맡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이것으로 인해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하여 패배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할양한 것과 더불어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파리조약) 그 후 스웨덴 국왕 카를 13세는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나폴레옹은 북유럽에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베르나도트는 훗날 배신하고,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게 하였다.
[편집] 진흙탕 싸움 (반도 전쟁)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트라팔가르 해전 및 1807년 포르투갈 침공에도 함께 싸웠으나, 국내에서는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대립하였다. 1808년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유폐시키고,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민중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다. 이 반란은 삽시간에 에스파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11월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침공해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몰아낸 후, 후일을 술트 원수에게 맡기고 귀환했다. 허나 그 후에도 에스파냐 측은 게릴라전과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완강한 저항을 계속했다. 이 반도전쟁은 진흙탕 전쟁으로 변하고, 프랑스는 대군을 몰아넣었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편집] 제5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에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신속히 대응하여 에크뮬 전투(4월 22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5월 13일 빈으로 입성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5월 20일~21일 프랑스군은 빈 근교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인해 가교가 여기저기 파괴되어, 절반쯤 건너갈 때 공격을 받았다. 이 아스펜-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 자신의 지휘에 의한 최초의 패배였다. 그 후 프랑스군은 바그람 전투(7월 5일~6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10월 14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쇤부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1810년 나폴레옹은 황후 조제핀을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별하고 4월 2일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1811년 3월 20일 왕자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여 로마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되어 로마 교황 비오 7세는 유폐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병합하여 프랑스 제국의 기타, 지배하의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가 왕위로 있던 에스파냐, 동생 제롬이 왕위에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의동생 뮈라가 왕위에 있던 나폴리 왕국, 종속적인 동맹국 스위스, 라인동맹, 바르샤바 공국, 그리고 대등동맹국의 덴마크 왕국에 미쳐, 나폴레옹 절정기라고 평하게 되었다.
[편집] 러시아 원정과 몰락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히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다.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거기에다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까지 겹쳐 이러한 연속적인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폰텐느 블로우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편집] 결과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링턴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편집] 주요 전역(戰役) 및 전투
*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년~1797년)
o 로디 전투
* 이집트원정(1798년~1799년)
o 아부키르 만(灣) 해전 (1798년 8월1일)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또는제2차 이탈리아 원정 (1799년~1800년)
o 취리히 전투 (1799년 )
o 마렝고 전투 (1800년 6월14일)
o 호엔리덴 전투(1800년 12월 3일)
* 오스트리아 전역 (1805년)
o 트라팔가르 해전 (1805년 10월21일)
o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2일)
* 독일-폴란드 전역 (1806년~1807년)
o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806년 10월14일)
o 아일라우 전투 (1806년 2월7일~8일)
o 프리트란트 전투 (1806년 6월14일)
* 반도 전쟁(半島戰爭;영어:Peninsular War ; 1808년~1814년)
* 오스트리아 전역 (1809년)
o 아스펜-에슬링 전투 (1809년 5월21~22일)
o 바그람 전투 (1809년 7월5일~6일)
* 러시아 원정 (1812년)
o 보로디노 전투 (1812년 9월7일)
* 독일-프랑스 전역 (1813년~1814년)
o 라이프치히 전투 (1813년 10월16일~19일)
* 프랑스 전역 (1815년)
o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편집] 군사 부문
나폴레옹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국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서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 서는 20만 명을 넘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전쟁 중 최대일 때 프랑스군인수는 150만 명에 달했고, 나폴레옹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동원 제도를 정비한 것은 라자르 카르노였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율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의한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 명 정도의 독립행동이 가능한 작전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빨랐다.
[편집] 군사 기술
보병의 주력병기는 프린트록식 전장총이었다. 라이플도 사용되었지만, 당시 장진시간이 길고 탄환을 생산하는 공업기술도 낮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 독립된 부대로써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부대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아직 철도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군은 현지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하여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였으나 인구가 희박한 러시아나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동력이 둔화되었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기간을 통해 사용되었다. 열기구에 의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 되었다.
[편집] 나폴레옹의 전술
나폴레옹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 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를 얻었다]라고 대륙군 병사들의 말처럼 이 사상이 나타났다. 카스틸료네 전투에서 분산해서 진격하여 2배의 병력을 가진 오스트리아군의 기선을 제압한 기동을 하여 각개격파 했다. 울름 전투에서는 적 주력의 측면에서 배후로 크게 기동하여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포위해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은 아군 일부를 적 주력의 공격을 상대하고, 그 사이 주력을 이끌고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작전을 특기로 삼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프리트란트 전투가 그 성공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