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 낯선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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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판 이상의 날개라고 불리우는 이인성씨의 낯선 시간 속으로 라는 소설... 말 그래로.. 정말 어렵습니다...
거기에다가 영화 메멘토식으로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보니 정신이 없네요...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_-;;
또 내용에 그때... 그사람... 그... 그일... 이런 식으로 지칭을 하다보니... 더더욱... 난감...
그래도 그 와중에 주인공 나의 처절하다고 할까.. 애절하다고 할까... 나의 사색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도서 정보>제   목 : 낯선 시간 속으로
저   자 : 이인성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 1983년 6월
구매처 : 오디오북
구매일 :
일   독 : 2005/8/26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나... 나는 누구일까... 정말 나일까? 내가 바라는 모습의 정말 나?


<미디어 리뷰>
이인성
1953년에 태어나 서울대 인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1980년 계간 『문학과지성』봄호를 통해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중편 4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첫 소설집『낯선 시간 속으로』이후, 그는 연작소설집『한없이 낮은 숨결』장편『미쳐버리고 싶은,미쳐지지 않는』소설집『강 어귀에 섬 하나』를 펴냈다.


오늘의 젊은이는 어떻게 절망하고 고뇌하며 자신의 삶에 모험하는가,전통적인 소설 작법에 도전하는 실험적 문체를 통해,현실의 그림자로서 깊은 바닥으로 배회하는 젊은 소설가,그의 피로 응어리진 자아 성장의 기록.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의 '나'에게
'너'는 '너'가 아니라 분열이었나?
 ◇이인성
1974년 겨울, 하고 소설은 시작했고, 내가 소설 속의 너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이었다. 내가 너를 만나기 전이나, 그리고 만난 후나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비 오는 날 동옥을 찾아가는 원구를 손창섭에게서 만났고, 모래의 여자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남자를 아베 고보에게서 만났고, 뉴욕에 있는 집을 사흘에 걸쳐 찾아가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만났다. 또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술집을 도망쳐 나온 백화에게서 삼포 가는 길을 배웠고,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꼬마 술꾼에게서 처세술개론을 배웠으며, 이제하의 친구 유자에게선 미술을 배웠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수없이 많이 있겠지만 만나고 나서도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이 있다. 여러 번 만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베케트는 나에게 자신의 첫사랑을 소개해 주면서 그녀의 이름이 륄리라고 했다가 루루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아무렇게나 불렀는데, 그녀의 성은 종이 쪼가리에다 적어 놓지도 않아서 까먹었다고 했다. 탁월한 작가인 베케트가 첫사랑의 이름을 잊어먹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나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베케트는 계속해서 자신의 첫사랑을 소개하면서 그녀를 노파로도 볼 수 있고, 또 어린 소녀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베케트에게 물었다. 나에게 첫사랑을 소개해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하고. 그러나 그것이 나의 못난 질문임을 알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들이 셜록 홈스에 나오는 왓슨 박사를 두고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말하지만, 나에게 왓슨 박사는 밀짚을 가득 채운 익살꾼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낯선 시간 속으로’의 ‘나’는 베케트가 소개해 준 첫사랑보다 더하다. 나는 지금까지 ‘너’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나’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쓸고 갈 무렵 “내 귀가 ‘손들엇!’ 하고 소리쳤다”고 말한다. 자신의 귀가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쳤다니?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가? 다시 읽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나? 낯선 시간 안에서의 ‘너’는 ‘너’가 아니라 분열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 알겠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그’일 수 있고, 또 당신들에게는 ‘너’일 수도 있는 것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하나의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동시에 ‘너’와 ‘그’가 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너’는 ‘너희들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나,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나. 아니다, 그는 전혀 내가 아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 수상한 제3자를 나로 믿어버릴 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보지 못한 그 내가 아닌 나에 대해 조바심을 느낀다…. 아니, ‘나는 지금 여기에 진정 나로서 있는 것일까’ 라고 말하는 것이구나.

나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자부를 했다. 그러나 내가 1992년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 처음 만난 낯선 시간의 ‘너’를 잊을 수는 없다. ‘너’는 내게 아직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힘들 때마다 만나는 사람이 바로 ‘너’다. 왜냐하면 ‘너’는 나에게 그 어떠한 해답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가 1974년에 헤매던 미구시의 바다는 2004년의 바다와 똑같다. ‘너’가 자살을 하려고 방황을 하다가 삶의 힘을 느껴 서울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나는 ‘너’를 통해 힘을 느낀다.

내게 있어 ‘너’는 ‘나’이며, 동시에 ‘우리’거나 ‘그들’이다.

만약에 ‘너’가 ‘너’이기만을 고집했다면 우리는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너’가 ‘너’이기만을 고집했다면 나 또한 ‘나’만을 고집했을 테니까. 그러나 ‘너’는 ‘너’임을 포기하고 대신에 내게 상상이라는 꿀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너’가 좋다. ‘너’는 나를 억압하지 않고, ‘너’임을 포기하여 결국은 무수히 잘게 부서져 수많은 존재자들로 우뚝 섰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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