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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세미나 - 미국의 금융위기: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주는 교훈
  2. 경제세미나 - 한국경제 과거 50년, 미래 50년
  3. 연을 줍고나서 찾아본 방패연 날리는 법
  4. 미디어법의 쟁점부분을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18
  5.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강연 동영상 2
  6. 대한민국 길을 묻다 - 기업 생존의 길, 인간존중 - LG인화원 이병남 사장
  7. 원격데스크탑(터미널 서비스) 접속시 컴퓨터가 리부팅이 되는 경우 6

경제세미나 - 미국의 금융위기: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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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세미나 - 한국경제 과거 50년, 미래 50년

이번 강연은 저번주에 강연한 위에 강연보다 더 수위가 높은 내용의 강연...
시장경제를 신봉하시는 분인듯한데, 강연의 대부분을 모든 정책은 다 잘못됬다는 이야기로 시작... 뉴딜정책부터, 미국, 일본, 한국의 최근의 정책들까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회사는 다 망하게 해버리고, 노조의 불법운동이나 전임자 급여문제 등을 이번 기회에 다 처리를 하고, 금리인하는 별효과가 없고, 세율, 상속제을 내리라는 말씀... 한마디로 경기부향은 그만두고 잘사는 분들이 더 잘살아야 나라도 잘 살게된다는 말씀...-_-;;

요약해서 말하자면 능력 없는 놈들은 죽던지 말던지 모르겠고,
그리고 있는 사람들 괴롭히지 말아라!
국가가 잘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출혈이고,
그래야 경제는 회복된다는 말씀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없고, 국가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아야 한다는건지...

KBS.. 참 몇명 간부가 바뀐것만으로도 이렇게 라디오까지 정권과 극우파의 나팔수가 되는것을 보니...
미디어법이 직권상정으로 통과해서 조중동이 MBC, KBS를 나누어 가지면 유신시대나 5공으로 돌아갈듯...


* 세미나 주요내용

제목 : 미국의 금융위기: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주는 교훈
연사 : 윤봉준 (뉴욕주립대학교 교수)
주관 : 한국경영자총협회
일시 : 2009.2.11
- 오바마 행정부는 경기회복을 위해 약 8천억 불에 이르는 경기회복프로그램을 만들어 의회를 통과시켰다. 앞으로 미국의 경기회복이 어떻게 진화되어갈 지는 두고 볼일이나 성공적인 대책이 되려면 대공황과 일본의 장기불황에서 얻은 교훈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공사업과 금리인하에 의존해서는 안되며 개인과 기업의 한계세율을 인하하여 건전한 소비와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금융산업의 투명성을 고취하고 모럴해저드를 줄이는 규제정비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불황은 그동안 누적된 경제적 무리수를 해결하는 자연스런 치유과정이며 제조업과 금융업에서의 대량도산은 살아남는 기업과 은행에게 성장기회를 제공함으로서 생산성증대와 경제발전에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불황의 해결책은 불황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금리 인하로는 불황을 탈출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급격한 경기 하강을 막겠다"며 기준금리를 계속 내리는 한국은행의 조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리여서 주목된다. 한국은행은 12일에도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사상 최저 수준인 2.00%로 내렸다.

그러나 윤봉준 뉴욕주립대 경제학과 교수(한미경제학회장)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로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32회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미국의 금융위기: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주는 교훈'이란 특강을 통해 "성공적인 경기 대책을 추진하려면 금리 인하와 공공사업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윤 교수는 특히 일본의 1991∼2001년 10년 장기불황이 주는 교훈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장기불황은 1991∼1993년의 불황기와 1994∼1996년의 단기회복, 그리고 1997∼1999년의 극심한 불황 등 크게 세 가지 기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91∼93년의 불황기에 일본에서는 주가와 토지가격이 하락하면서 가계의 자산가치가 급감, 총수요가 줄었다. 또 은행들은 상업부동산 거품에 노출되면서 대출을 급격히 줄였고, 은행대출에 의존하던 일본기업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맞서 일본은행(중앙은행)은 재할인이자율을 90년 6%에서 93년에는 1.75%까지 낮췄고, 일본정부는 92∼93년 세 차례의 경기부양책을 통해 GDP의 6%에 달하는 재정지출을 단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93년과 94년 성장률은 각각 0.20%와 0.62%에 불과했다. 경기부양자금의 대부분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따라 비생산적인 공공사업과 경제적 생존가치가 없는 비효율적인 중소기업 보조에 투입되면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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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세미나 - 한국경제 과거 50년, 미래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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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지금 어려운데, 그동안 잘산것은 박정희대통령덕분이고, 앞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비스, 의료, 관광 등의 사업분야를 키워야 하는데, 이러기위해서는 의료관련법규와 4대강 정비등을 통해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_-;;
더욱이 지금과 같이 어려울때 상속세를 폐지해서 외국의 자본이 몰려오는것을 기대하고, 소득세의 누진적인 세율을 완화 혹은 폐지를 해야, 탈세도 줄어들고, 공무원들이 비리도 줄어든다고, 마지막으로 경직된 노동시장도 이 기회에 고쳐야 한다는 말씀....

참... 어이가 없었고, 꼭 이나라 대통령과 똑같은 말씀을 하는 듯한 느낌이...-_-;;
어떤분인가하고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아래의 박스 내용을 참고바람...
KBS가 이제는 라디오방송에서까지 정부의 정책을 대변하는 뻐꾸기방송이나 틀어대고 있다니.. 참...


* 세미나 주요내용

제목 : 한국경제 과거 50년, 미래 50년
그리고 현재의 위기
연사 : 김기환 (서울파이넨셜 포럼 회장)
주관 : 한국경영자총협회
일시 : 2009.2.11
- 우선 지난 50년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온 한국경제, 그 성공요인을 분석, 평가, 정리해본다. 이어서 향후 50년 동안 한국경제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 그 미래의 모습을 점쳐본다. 그동안 우리경제의 성공은 제조업 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에 기인하였다면 앞으로는 보다 부가 가치가 높은 서비스 산업 중심으로 경제구조가 바꿔나가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금융산업, 의료산업, 관광산업, 문화산업 등에서의 성장역할을 설명했다.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 실현을 위해서 현재 진행중인 금융 및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우리경제의 성장잠재력 제고와 함께 경제선진화를 위한 중장기적인 제도개혁 추진을 주문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가능성과 기회가 우리앞에 놓여있다고 강조한다.



http://blog.peoplepower21.org/Research/30090

'김기환 포럼'이 대한민국을 개조하고 있다

"산하 기관장을 독식해 '모피아'로 불리는 경제관료와 '법조계 삼성' 김앤장, 그 핵심에 놓여있는 '이헌재 사단'. 우리 사회의 극소수 경제관료들이 이른바 '회전문'을 통해 민간과 정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대한민국을 주무르고 있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보다 더 큰 '실세'가 있으니, 바로 '서울파이낸셜포럼(SFF)'이다. 서울파이낸셜포럼(회장 김기환 골드만삭스 고문)은 민ㆍ관ㆍ학을 막론한 금융계 인사 50~60명으로 구성된 비영리 포럼이다. 이 포럼은 2003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내놓은 10대 아젠다 중 하나인 '동북아 경제허브론'을 '동북아 금융허브론'으로 바꾸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물류파와의 장렬한 싸움에서 승리한 이들의 존재는 이제 희미해졌지만, 이들이 주창한 금융허브론은 노무현 정부 들어 자본시장통합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양 날개를 달고 '진화'를 거듭했다. 이제 금융허브론은 하나의 경제정책이나 대외정책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포괄적인 국가 개조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이런 식으로 개조해도 괜찮다'는 어떠한 위임이나 계시도 받은 바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고 있다. 극소수의 금융 엘리트와 관료들이 '조용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움직여 가는 사회, 이런 사회를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19일 오후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소장 이병천 강원대 교수) 주최로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심포지엄 '세계화 시대, 관료독주와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이 같은 내용의 주제발표를 했다.


지금 경제위기는 우리만 겪었던 1998년 외환위기와는 다르다. 미국에서 시작된 현 위기는 선진국, 후진국할 것 없이 모든 나라를 휩쓸고 있다. 우리도 금융 분야에서 먼저 타격을 입고 있다. 금융기관들의 유동성 위축은 기업투자를 어렵게 하는 등 실물 부문으로 악화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도 올해 마이너스가 예상된다.

수습대책은 크게 네 가지다. 금융경색 완화,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책 추진, 금리인하, 건설 및 가계 부문 지원 등이다.

아울러 중장기 개혁 추진도 병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시장기구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시장기구가 제대로 발휘하려면 노동시장이 유연해져야 한다. 여러 산업에 걸쳐 존재하는 진입장벽도 없애고,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도 정부가 사전에 금지한 것 외에는 모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포괄주의(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로 가야 한다. 기업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금문제 개선을 위한 세제개혁위원회도 출범시킬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지속적인 대외개방과 교육개혁, 출산율 확산이 뒤따라야 한다.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한ㆍ미, 한ㆍ중과의 돈독한 관계유지 등 올바른 외교정책도 수행해 가야 한다. 대통령과 정부 지도자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경영자들은 경영혁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 향후 50년 역사는 매우 밝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난 5000년 역사도 바꿀 수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극복할 능력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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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줍고나서 찾아본 방패연 날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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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강가에 떨어져있는 방패연...

누군가 연날리기를 하다가 줄이 끊어져서 떨어져있는것 같은데,
상태가 꽤 좋고, 오래간만에 연을 날려보고 싶다라는 생각에 챙겨왔다는...

근데 하도 오래간만이라서 어떻게 날려야 할지...




[연날리기]

<목 표>
연날리기에 적합한 여건과 기본기술 그리고 놀이방법을 자세히 배워 야외의 넓은 자연공간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뛰놀면서 심신을 단련하게 한다 또한 타인과 어우러져 다양한 연날리기 기법을 익히고 겨루면서 지혜를 얻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① 연날리기에 가장 적합한 풍속은 초속 5m정도이다.

② 연체의 구조에 있어서는 살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납짝연이 아닌지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연을 바닥에 놓았을 때, 방구멍 중앙 부분(4개의 살이 만나는 부분)의 높이(경상도 지방에서는 '고'라고 한다)는 지면에서 2-3cm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연이 납짝해서는 안되고 곱사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③ 만일 바람이 강하게 불어 연을 날리기가 곤란할 때에는 고를 더 높여 굽은 정도가 더 큰 곱사연이 되도록 해야 한다. 곱사연은 납짝연보다 연체에 닿는 바람이 적고 바람을 많이 흘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머릿줄을 윗귀에 한번 더 감아 머리살을 더 휘게 하면 된다.

④ 정확하게 매어진 목줄은, 연체에 맨 목줄이 모여진 부분의 매듭을 눕혀보면, 정확하게 양귀에 닿거나 아랫줄 구멍에 닿아야 한다. 또 연체와 45°의 각이 되어야 한다.

⑤ 연을 날릴 때의 자세는 연과 날리는 사람의 앞가슴이 늘 직선으로 맞보고 있어야 한다.

⑥ 연실도 직선에 가깝도록 팽팽하게 되어야 날리는 사람이 연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있다.


<연날리기 기본기술>

- 연날리기의 기본 기술을 알아야 상대방의 연에 접근해서 연실을 얼키게 하기도 하고 감겨 있는 연실을 풀어 내기도 하며, 따라 오는 상대방의 연을 피해 도망갈 수도 있다.

① 통줄 주기
- 연날리기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이 '통줄 주기'이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실을 감다가 갑자기 풀어 주는 것을 '통줄 준다'라고 한다. 연의 머리가 위로 향하고 있을 때 연실을 감다가 통줄을 주면 연의 머리가 조, 우, 거꾸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 때를 이용하여 모든 연의 묘기와 곡예가 이루어진다.

② 얼레질
- 억레질이란 연실을 때에 맞춰 빠르게 또는 천천히 풀어주거나 감아들이는 기술을 말한다.

③ 튀김질
- 튀김이란 얼레를 이용하여 연을 고정하는 기술을 말한다. 얼레를 잡고 있는 팔꿈치로 옆구리를 탁 쳐서 연을 상, 하, 좌, 우로 움직이고 급회전 등의 기술을 부릴 때 필요하다.

④ 높이 올릴 때
- 위로 서 있는 연을 높이 올리려고 할 때는 실을 감아 주거나 튀김질을 하면 된다.

⑤ 거꾸로 서게 할 때
- 위로 서 있는 연을 거꾸로 서게 할 때에는 연줄을 감다가 통줄을 주면 된다. 통줄을 주면 연의 머리가 좌, 우, 거꾸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연의 머리가 거꾸로 될 때 연실을 감으면 연은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

⑥ 거꾸로된 연을 위로 서게 할 때
- 거꾸로 내려가는 연에 실을 감다가 사르르 풀어주면 연 머리가 위를 향하게 된다. 이 때, 줄을 감으면 위로 올라간다.

⑦ 왼쪽으로 가고자 할 때
- 위로 서 있는 연에 실을 갇다가 통줄을 주면 연의 머리가 좌, 우, 거꾸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연의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 때에 실을 감아주면 연은 왼쪽으로 간다.

⑧ 오른쪽으로 가고자 할 때
- 위로 서 있는 연에 실을 감다가 통줄을 주면 방향을 바꾼다. 연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 때에 실을 감아주면 연은 오른쪽으로 가게 된다.

⑨ 왼쪽으로 가는 연을 오른쪽으로 가게 할 때
- 왼쪽으로 가는 연에 실을 감다가 통줄을 주면 머리를 상, 하, 오른쪽으로 돌리게 된다. 연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돌 때 연실을 감으면 오른쪽으로 간다. 연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되어 있을 때 왼쪽으로 가게 하는 법도 이 방법을 이용하면 된다.

⑩ 곡예
- 연실을 급히 감다가 왼손을 놓고 얼레를 잡고 있는 오른손을 앞을 향해 뻗으면(통줄을 주면), 연은 물구나무 서듯 거꾸로 서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쳐 내려 오는데 이 때 간헐적으르 감았다, 풀었다하면 연이 마치 절을 하듯 꾸벅거리는데 이것을 '절 시킨다'고 한다. 또는 떠 있는 연이 내려 오도록 줄을 풀어 주면 연체가 바람을 적게 받기 때문에 좌, 우로 기운다.

⑪ 병 잡기
- 연체의 구조가 잘못 제작되어 연이 바르게 뜨지 못할 때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을 병 잡는다고 한다.
㉠ 연이 한쪽으로만 갈때 병 잡는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방법은 연이 돌아가는 방향의 반대쪽의 귓살 윗 부분을 뒤쪽으로 휘어 준다.
둘째는 돌아가는 방향에 있는 귓줄을 약간 늘여 주는 방법도 있다.
㉡ 연이 빙글빙글 돌 때에는 도는 쪽 반대쪽 귓살을 많이 휘어준다.


<연놀이의 종류와 방 법>

①높이 띄우기
- 연을 얼마만큼 멀리 높이 띄을 수 있는 가를 겨루는 놀이로, 연을 500m이상 띄우면 연의 무늬가 보이지 않고, 연을약 1km가량 높이 띄우면 눈에 보일락 말락하고 그 이상이 넘으면 보이지 않는다. 연은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을 세차게 받기 때문에 연이 파손되거나 연실이 끊어질 우려가 있다.

② 재주부리기
- 글자 뜻 그대로 연의 재주를 보이는 놀이다.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서 연은 왼쪽, 오른쪽으로 또는 급전(急轉), 급강하(急降下), 급상승(急上昇) 등 다양한 궁중곡예(空中曲藝)를 부린다. 이는 연날리는 솜씨에도 달려있지만 그 보다도 우리 나라 연만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 특징이 다양한 기동성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③ 끊어먹기(연싸움)
- 대표적인 연놀이로 2개 혹은 그 이상의 연이 서로 교차하여 서로 연실을 비벼서 끊어먹기를 겨룬다. 끊어먹기 연놀이에서는 연실의 질기고 약함이 다소 승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조건들이 갖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첫째, 정확한 구조로 연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연실에 사기를 고르게 먹여야 한다. 세째, 연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끊어먹기의 요령은 다음과 같다.

* 바람의 흐름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 연과 얼레의 각도는 항상 45°를 넘지 않도록 한다.
* 상대편의 연이 바람을 잘 타고 떠 있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상대편의 연에 접근하지 않는다.
* 상대편의 연이 접근하여 공격할 때는 바람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이편의 연을 재빨리 상대편의 연실에 거는 것이 유리하다.
* 이 때 상대편 연이 머리를 돌려서 물러갈 때 거는 것은 이편에게 불리하다.
* 연이 서로 얽혀서 약500m이상 풀어 주었다고 생각되면 될 수 있는 한 연실이 땅에 닿지 않도록 조금씩 풀어서 조종한다.

연줄 끊어먹기 놀이에서 우리 조상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이긴 쪽이 진 쪽을 위해 한 턱 내는 것이 그것이다, 진 편의 연이 이긴 편을 위하여 먼 하늘로 길보를 전하러 갔다고 여겨 진편에게 한 턱 내는 아름다운 미덕의 풍습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진 편에서 이긴 편을 위해 한 턱 낸다는 것인데 이는 진 편(연줄이 끊어져 날아간 연)은 이긴 편(끊은 연)이 자기를 위해 연을 끊어 주어 자기의 액땜을 대신 해 주었다고 해서 한 턱 낸다고 한다. 여하튼 우리 조상은 옛부터 모든 것을 양보하고 남을 생각하며 빼앗고 침범하기 보다는 남을 대접하고 도와 주기를 좋아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연은 연의 형태와 문양에 따라 분류되어 그 종류가 100 여종에 이르고 있다, 형태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전통연의 99%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각 장방형의 '방패연'과 어린이들이 주로 많이 날리는 꼬리 달린 '가오리연' 그리고 사람, 동물 등 제작자의 창의성에 의해 입체감있게 만든 '창작연' 등 3종류로 큰게 나뉜다. 문양에 따른 분류는 방패연에만 해당되는데 방패연 바탕에 그린 무늬와 색깔에 따라 8종류로 나뉘어 진다.


방패연
방패연은 사각 장방형이고 연 중앙에 방구멍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구멍은 센바람을 흡수하여 연을 잘 뜨게하며 조종을 자유롭게 한다. 방패연은 몸 전체에 여러가지 무늬, 그림, 글씨나 색지를 붙인 문양(원, 반원, 사각형 등)과 문양의 색(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정 등)에 따라 다음과 같이 8종류로 분류된다.

① 꼭지연
꼭지란 연의 머리 가운데에 원형으로 색지를 붙이거나 색을 칠한 것을 일켣고, 연의 바탕이 모두 흰색일 때 오려붙인 꼭지색에 따라 연의 명칭이 징해진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꼭지연이라 하지 않고 '달연'이라 부른다.
0 먹꼭지연 : 연의 머리 중앙에 검은 색지를 등글게 오려 붙인 연
0 철꼭지연 : 연의 머리 중앙에 푸른 색지를 둥글게 오려 붙인 연
0 쪽꼭지연 : 연의 머리 중앙에 두가지 색지를 오려 둥글게 두쪽을 모아서 붙인 연
0 별꼭지연 : 연의 머리 중앙에 색지를 별 형태로 오려 붙인 연

② 반달연
반달이란 연의 머리 중앙에 반달 모양의 색지를 오려 붙인 것을 일컫고 연의 바탕이 전부 흰색일 때 오려붙인 색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
0 먹반달연 : 연의 머리 중앙에 검은 색지를 반달형으로 오려 붙인 연
0 홍반달연 : 연의 머리 중앙에 붉은 색지를 반달형으로 오려 붙인 연
0 임반달연 : 연의 머리에 긴 반달 형태로 오려 붙인 연
0 쪽반달연 : 연의 머리 중앙에 두 가지 색지를 반달형으로 오려 두 쪽을 모아 반달형이 되도록 붙인 연

③ 치마연
치마란 연의 상부는 희고 하부는 색칠을 하여, 마치 여자 치마 저고리의 색치마 처럼 상부와 하부의 색이 다른 데서 나온 명칭으로 하부의 색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
0 먹치마연 : 연의 상부는 희고 하부는 검은 색으록 칠한 연
0 청치마연 : 연의 상부는 희고 하부는 푸른 색으로 칠한 연
0 이동치마연 : 연의 상부는 희고 하부는 세로로 2등분하여 2가지 색으로 칠한 연
0 삼동치마연 : 연의 상부는 희고 하부는 세로로 3등분하여 3가지 색으로 칠한 연
0 사동치마연 : 연의 상부든 희고 하부는 세로로 4등분하여 4가지 색으로 칠한 연

④ 동이연
동이란 연의 머리나 허리에 가로로 띠를 두른 것으로, 연의 바탕이 백색일 때 동이의 모양과 빛깔의 위치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
0 먹머리동이연 : 연의 머리에 가로로 검은 색을 칠하거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홍머리동이연 : 연의 머리에 가로로 붉은 색을 칠하저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반머리동이연 : 연의 머리 좌우 한쪽만 색을 칠하거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실머리동이연 : 연의 머리를 보통 머리동이의 절반으로 가늘게 색을 칠하거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눈깔머리동이연 : 연의 머리 양쪽에 동그란 흰 점이 하나씩 있는 형태로 색을 칠하거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허리동이연 : 연의 허리 좌우에 띠를 두는 연으로 색을 칠하거나 색지로 띠를 두른 연
0 눈깔허리동이연 : 허리동이연의 검은 띠 좌우 속에 동그란 흰 점이 하나씩 있는연

⑤ 초연
'초'란 연의 꼭지 외에 전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한 것을 말하며
0 먹초연 : 연의 꼭지 외에 전체를 검은 색으로 칠한 연
0 청초연 : 연의 꼭지 외에 전체를 푸른 색으로 칠한 연
0 보라초연 : 연의 꼭지 외에 전체를 보라색으론 칠한 연

⑥ 박이연
'박이'란 연의 전체나 부분에 동그란 돈점이나 눈깔, 긴 코 같은 모양을 박은 연으로 그 박은 모양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
0 돈점박이연 : 검은 바탕의 연에 동그란 돈 모양과 같은 흰 점이 군데 군데 박혀있는 연
0 귀머리장군 긴코박이연 : 연 귀머리에 삼각형모양으로 색칠을 하거나 색지를 붙인 것을 귀머리장군연이라 하며, 긴 코 모양의 붉은 꼭지를 박은 연
0 눈깔 귀머리장군연 : 귀머리장군연의 삼각형 속에 크고 작은 흰 점이 박혀 있는 연
0 눈깔 귀머리장군 긴코박이연 : 눈깔 귀머리장군연에다 긴코 모양의 붉은 꼭지를 박은 연

⑦ 발연
'발'이란 맨 아래나 좌우 가장자리에 발 모양의 종이를 붙인 연으로 그 발의 모양과 숫자에 의해서 명칭이 정해진다.
0 사족발연 : 연의 맨 아래에 4가닥의 기다란 색지나 흰 종이를 오려서 붙인 연
0 국수발연 : 연의 맨 아래에 국수같이 가늘고 기다랗게 여러 가닥의 흰 종이를 오려서 늘여 붙인 연
0 지네발연 : 연의 좌우 가장자리에 색지를 붙이거나 빛깔을 칠한 종이를 지네발 모양으로 오려서 촘촘히 붙인 연

⑧ 기타연
기타 연은 앞에서 열거한 일정한 계통을 가진 종류의 연 외에 전국적이거나 각 지방마다 독특하게 전승되어 내려오는 모양을 가진 연을 말한다.
0 구리팔괘연 : 연의 전면을 8색으로 등분하여 색을 칠하거나 색지를 붙인 연
0 오색연 : 연의 전면을 5등분하여 청, 홍, 황, 흑, 백의 5색으로 칠한 연
0 돌쩌귀연 : 연의 전면을 상하 4가지 색지를 가지고 X자로 귀를 맞추어 붙여서 만든 연
0 소딱지연 : 먹머리동이에 흰 꼭지를 붙인 연
0 거북선연 : 연의 전면에 거북선을 그린 연(봉황연, 박쥐연, 나비연 등)
0 쌍나비연 : 연의 하반부에 쌍나비를 그린 연
0 고기비늘연 : 연의 전면에 고기비늘 모양으로 문양을 그린 연
0 접시연 : 연 중앙에 있는 방구멍을 중심으로 하여 그 구멍 가장자리에 접시 모양으로 둥글게 색을 칠하여 원을 그린 연
0 말굽연(편자연) : 연의 꼭지가 말굽모양으로 검은 색을 오려서 붙인 연
0 방상시연 : 연의 하반부 절반에서 방구멍 가장자리와 약간 띄어놓고 원형으고 돌려 먹칠을 하고 상반부 좌우 양쪽에 붉은 색으로 두 눈을 그린 연
0 상주연 : 연 바탕에 아무것도 칠하거나 붙이지 않은 흰 연
0 액막이연 : 연 표면에 送, 送厄, 送厄迎福 혹은 자기주소 성명 등을 써 넣은 연으로서 대보름날 밤에 멀리 날려 보내는 연
0 제비연 : 연의 하반부에 제비를 그린 연
0 관연 : 보통연보다 허리살이 좌우로 나와서 두 쪽귀까지 종이를 더 붙여 관을 닮은 모양으로 하고 하반부를 먹칠한 연
0 호랑이연 : 연의 모양을 干자 모양으로 만든 연
0 까치날개연 : 연의 모양을 까치 날개 모양으로 만든 연
0 방패연 : 방구멍이 없고 네모 반듯한 연으로서 한 귀퉁이를 접어 머리쪽이 되게 하고 干자 모양의 살을 붙이고 꽁지를 달고 세로 두줄의 벌잇줄과 가로 할벌잇줄을 잡은 연




연의 유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덕 여왕 1년에 비담염종의 반란이 있어서 김유신이 토벌을 담당하였는데, 어느날 하늘에서 큰별이 떨어져 여왕이 패할 징조라하여 민심이 소란하였고, 이에 김유신은 큰연을 만들어 남몰래 불을 붙여 하늘에 높이 띄우고 백성들에게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으니 여왕이 크게 승전할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그까닭에 민심은 수습되고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싸움에 크게 이겼다고 한다.

고려말의 최영장군은 몽고인들의 반란을 평정할 때 불을 연에 매달아 날려 적의 지자성을 불붙이고 병사를 매달아 적성에 침입시켜 성을 빼앗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이순신장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가까운 섬의 아군과 통신하는 신호용으로 연을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난중일기에 전해진다.

조선시대 영조대왕은 손수 연날리기를 즐겼고 전국적으로 연날리기를 장려하여서 많은 백성들이 계층별로 춘하추동 계절에 관계없이 연날리기를 즐기니 그수가 실로 엄청났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방패연을 집안에 보관하면 액운이 달아나고 행복을 가져온다고 전해 내려왔으며,
음력 정월대보름이면 생년월일, 이름을 적은 연을 높이 띄워 날려버리면 그해의 액운이 날라가 버리고 한해동안 행복을 가져온다는 "액막이연"이라는 우리 고유풍습이 있다.

지금도 백상배 전국 연날리기 대회가 경기도 용인에서 계승되고 있으며, 경남 충무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정월대보름을 기해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서울, 부산, 대구, 진주, 경산등 여러지방에서 개최하고 있다

http://www.happykite.com/mb/index.asp?BID=best_board1&aopt=view&idx=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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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법의 쟁점부분을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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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을 용산사태를 무마하는데 적극 이용하라, 촛불 집회 구속자들에게 특정판사만을 배정하고, 높은 형량과 압박을 주라고 한 부장판사 사건 등등 날이면 날마다 혈압이 급상승하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오늘 드디어 한나라당에서 날치기식으로 직권상정을 해버린 미디어법...

뭐 다양한 법안이 있겠지만 논란이 되는 부분은 크게 세가지 정도입니다.

1. 신문법을 개정해서 신문의 방송겸영을 허영하는 것
2. 방송법을 개정해서 신문사와 대기업이 방송사의 지분 소유를 허용하는것
3. 사이버 모욕죄, 인터넷 모니터링 의무화



한나라당에서는 이것이 통과되면 2만 6천개의 일자리가 창출이 되고, 선진국들은 다 이렇게 한다는것입니다.

반대의견은 일자리 창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근거가 없다는 보고서에 대한 기사도 있지만, 언론의 공공성이 홰손되고, 정부의 언론장악 및 보수쪽(진정한 보수라고 보기도 어렵지만)을 위한 개정법이라는 취지입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런 극구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공청회나 설명회도 없고,
심지어는 거짓정보를 가지고 미디어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대기업과 신문사에게 방송사지분을 허용한다는것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20%의 지분을 허용한다지만, 삼성, 중앙일보, 조선일보가 20%씩 지분을 가져간다면 바로 MBC가 이들의 손에 넘어갈수도 있는 일이고, 차후에 다른 정권이 들어선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분이 넘어간다면 소송으로 다시 돌려받을수도 없이 게임은 이미 끝난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정권과 한나라당이 야당과 방송국의 반대와 싸늘해진 민심을 보면서도 속전속결로 강행을 해서 임기전에 마무리 지으려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삼성을 비호하는 중앙일보나 정권을 비호하고 어찌보면 정권을 부리는듯한 조선일보가 공영방송인 KBS나 MBC를 접수한다면 언론의 공정성은 바로 그날로 날라가는 것입니다.



태안사태에 대한 보도건수를 보듯이 공정이 아니라, 편향되고 왜곡된 방송을 보게 되겠지요.

지금 정부는 방송을 장악하고, 대통령은 모든 면책특권을 가지고, 거의 독재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이탈리아를 벤치마킹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참...

조선일보에서 쓰레기방송이라고 한 KBS 스페셜 - 언론과 민주주의 -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직권상정후에도 대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수정을 할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놓고는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켜버리고는 경제를 위해서 어쩔수 없다고 하는건 아닌지...

이번 정권들어서 정말 한나라당이 막장으로 달리는듯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를 하기보다는,
어떠한 일을 저지르고, 왜 그러한 일들을 저지르려고 하는지를 잘 알아두어야 할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조중동만 보고, 그들이 날조한 기사들만 읽고 그게 진실인줄로 알고 있는 메트릭스속에 살고 계신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수구니 꼴통이니라고 말하기 보다는 정확한 팩트를 가지고 대화를 하고, 이해를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조금 더 알아보고, 합리적으로 설득시키고, 싸워나가면서 반드시 이런 악법은 없애야 할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사진이나 자료를 보시려면 아래의 글을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뉴스후 - 방송법 개정을 강행하려는 속내는? (사진보기)
시사메거진2580 - 묻지마 방송법


이외에도 인터넷을 단속해서 명예훼손을 친고죄에서 경찰이나 검찰에서 직접 단속을 해주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닝을 하는 법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삼성을 블로그에서 비판을 하면, 삼성에서 문제가 있다면 저를 고소를 하면 되지만,
앞으로는 정부에서 알아서 저를 고소를 한다는 겁니다...-_-;;

작금의 경찰, 검찰이 편파적으로 수사를 하는 상황에서 정부, 청와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네티즌을 압박하는 법률로 밖에 볼수 없을듯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한문 분향소를 부순 보수단체들은 그냥 수수방관하고, 분향소를 철거하는 시민 30여명을 잡아가는 이 정부, 경찰, 검찰에게 이 법은 자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네티즌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해 주는겁니다.
어째 선진국을 따라가는것이 아니라, 중국, 북한의 인터넷 통제를 따라하고 있는듯 합니다.


6월말에 직권상정이 될지, 협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고, 뉴스, 기사를 봐도 왜 이 법안이 만들어졌고, 통과시키려는 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나 경제발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나라당의 장기집권을 돕기위해서
조중동, 대기업에게 지상파 진출을 허용하고,
정부, 한나라당, 조중동을 비판하는 네티즌의 입에 자갈을 물리려는  법안으로 밖에 볼수가 없습니다.

한나라당이 믿도 끝도 없는 근거와 거짓말을 통해서 이 법안을 강제로 통과 시키려고 하고,
왜 국민들은 설명해도 잘 모르니 여론조사도 필요없다는 말을 하는지를 잘 알고,
그들의 의중을 파악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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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강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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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했던

스트브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식 강연...


짧지만 간결하고, 강력한 메세지가

평소에 스티브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이 생각났던

정말 뜻깊은 내용인듯...



01234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하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갈구하라. 우직하라.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갈구하라. 우직하라.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구하면서, 우직하게 살아가십시오.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영문 번역 원문은 http://allenjeon.tistory.com/212 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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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을 묻다 - 기업 생존의 길, 인간존중 - LG인화원 이병남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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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경영과 인간존중이라는 기본적인 맥락속에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간에 힘을 합치고 존중하며, 개개인은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해야 지금의 위기를 탈출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약간은 상투적이고, 개인에게 어떠한 실천적인 메세지를 주기보다는 커다란 틀만을 이야기했던 강연... 좀 더 개개인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나 싶다. 개이들에게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움직여라라고 말하기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법을 제시했다면 더 괜찮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던 방송...

◎ 방송 : 2009. 2. 22 (일) 밤 11:30~12:20(50분) 1TV

◎ 출연자 : 이병남 사장 (LG 인화원 사장)

금융위기가 빠르게 실물로 전이되면서 기업들이 생존의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기업들의 위기는 곧 일자리의 위기다. 유례가 드문 경제위기속에서 우리 기업들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LG 인화원의 이병남 사장.

국내에선 보기 드문 인사 전문가로서 그동안 획기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하며 ‘LG의 인재 인큐베이터’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이병남 사장이 제시하는 위기 극복 방안은 바로 ‘사람’!

생태계 속에서의 기업

 기업 생존의 길- 고객 가치 실현

 기업 경영의 근본- 인간존중

 인간존중 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이병남 사장이 제시하는 대한민국의 길

 <브리지1.>

기업은

시장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영하고자 하는 생명체다

 <브리지2>

기업은 고객과 사회에

유익함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고,

고객과 사회는

이윤이란 선물을 기업에게 되돌려 준다.

  <브리지3.>

고객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배려하는

인간존중 경영이 가장 중요하다

 <브리지4.>

배려를 통해 존재감을 심어줄 때

구성원들의 창의성이 발현되고

고객가치도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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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데스크탑(터미널 서비스) 접속시 컴퓨터가 리부팅이 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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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주 요긴하게 써왔는데,
어느순간부터 접속만 하면 접속하려는 컴퓨터가 아무런 메세지도 없이 그냥 컴퓨터가 리부팅이 됩니다.

윈도우 자체의 이벤트 로그를 봐도, 그저 갑작스런 리부팅이 있었다는 메세지만...-_-;;
인터넷을 검색을 해봐도 딱히 내경우와 같은 증세는 없고...-_-;;

가장 빠른 방법이야 다시 XP를 설치를 하는것이겠지만,
우선 원인을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아무래도 프로그램 충돌외에는 없다라는 가정아래 테스트를 시작...

처음에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죽여보고,
메신저 프로그램을 죽여도 보고,
그러다가 1시간만에 찾았는데,
엉뚱하게도 Ultramon 이라는 듀얼모니터 구성 유틸리티...

그것도 트레이에 있는 아이콘만 죽여서는 안되고,
작업관리자에 있는 2개의 Ultramon 프로그램을 죽여야 제대로 된다는...

평소에는 듀얼모니터를 거의 사용을 안해서 하나만 사용을 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중에 하나는 그래픽카드쪽 드라이버 업데이트를 안해봤는데,
이것도 마저 테스트를 해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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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카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를 했더니 Ultramon이 실행되있어도 잘된다...
나 같은 경우는 아마도 그래픽드라이버의 버그가 아니였나 싶다...T_T;;

결론
완전히 엄한 이야기지만...
터미날 서비스 사용시 대책없이 리부팅이 될경우에는
그래픽 드라이버를 최신버전으로 받아서 설치해 보십시요...-_-;;
아래 댓글을 봐도 이런 경우에 드라이버 업데이트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듯 합니다...^^

nvidia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는 여기에서 http://kr.nvidia.com/Download/index.aspx?l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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