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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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찾아가 보고, 자주 봤던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위의 사진은 방송에서 보여준 비봉에서 본 서해바다.. 아는 사람은 안다.. 그 짜릿한 기분을.. 카메라가 좋은거라서 그런지.. 이렇게까지 확대가 되다니..^^;;
암튼 오랫동안 묵혀있던 비봉을 김정희가 발견하고, 해석해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당시의 삼국시대의 이야기부터 당시 상황에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다큐를 보면서 고두심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껏해야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고,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가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지금이야 헬리콥터로 나르면 되지만 옛날에 이거 만들려면 정말 고생했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다큐를 보고 생각해보니.. 왜 경주를 바탕으로 한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까지와서 이런 비를 세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를 못했었는데, 조그만한 경상도의 분지인 경주를 터전으로 있다가 영토를 확장해서 서울까지 올라와 북한산에 올라가 탁트인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가 보고, 서해바다와 한강을 보면서 진흥왕이 어떤 감회로 이런 비를 세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를 못했던것 같다.
앞으로 역사 유적지나 기념물을 볼때.. 단순히 멋지다.. 유명하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본다고 생각하고 그 사물을 바라봐야 겠고, 그 동안 그러지 못했던 것들이 아쉬울뿐이다...


이건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온 진흥왕과 진흥왕 순수비...

<HD 역사스페셜>진흥왕 순수비 
[2005/09/09]
최고귀족관료 39명을 대동한 순수비 건립!!!
- 그것을 통해 진흥왕은 무엇을 노렸나?


천년 동안 묻혀져 있던 순수비의 존재,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에서 발견한 이래 현재까지 네 개의 진흥왕 순수비가 알려져 있다.
비석은 단순히 경계를 표시하는 수단이었나? 최첨단 기술로 완성된 디지털 탁본으로 검증!
통일의 초석을 다진 진흥왕의 활약이 순수비를 통해 밝혀진다.

중국어 사전에도 없는 '논 답(畓)'자의 정체는?

4개의 순수비 중 하나인 경남의 창녕비. 현재 비석의 탁본은 보호를 위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제작진은 첨단 탁본 기술을 사용, 판독을 시도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글자를 발견했다. 흔히 논 답으로 읽는 '畓'이란 한자. 이는 현재 사용되는 중국어 사전에도 없는 글자다. 그렇다면 이 한자는 진흥왕 시기, 중국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일제 시대, 소풍 간 학생들이 창녕의 화왕산 골짜기에서 발견한 것을 일본인 교장이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둔갑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창녕비, 비문에 남겨진 의문의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100년 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한 진흥왕


신라 고구려 밀약설, 순수비에 그 비밀이 있다!!!
진흥왕 당시 신라와 백제는 100여년에 걸친 나제동맹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나라가 힘을 합해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인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해 온 것이다. 551년에는 한강 유역을 나누어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신라는 그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유역을 차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진흥왕은 신라의 강역을 고구려 땅까지 넓혔다. 갑작스런 신라의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학자들은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설을 제기하는데... 황초령 비문과 문헌 기록을 통해 파헤쳐 본다. 백년 나제동맹을 하루아침에 깨어버린 밀약은 무엇이었나?

진흥왕이 '가야 괴뢰정권'을 세운 까닭은?

진흥왕 시대에 새워진 또 하나의 비 '단양적성비'에는 정복지 유민인 고구려인의 공을 치하하고 포상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또한 '도설지'라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10년 후 세워진 창녕비에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도설지의 벼슬은 10년 사이에 두 단계나 높아져 있었다.
도설지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그 후 대가야의 왕으로 봉해진다. 신라에 의한 대가야지역 - 괴뢰정권의 왕, 도설지는 누구인가? 진흥왕의 정복지 정책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되어 있는가를 도설지의 행적을 추적해 밝혀본다.

귀족관료 39명을 대동한 순수비 건립 행사

정치적 이벤트,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가?
창녕비에는 숱한 관료들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신라 귀족 관료들의 이름만도 무려 39명, 그 중에는 진흥왕 때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등 낯익은 인물도 있다. 이들은 당시 신라를 이끌던 핵심 인물. 진흥왕은 39명의 왕경 귀족들을 창녕까지 데려온 것이다. 진흥왕은 왜 순수비 건립에 이렇게 공을 들였던 것일까? 단순히 영역 표기만을 위한 것인가?
인도의 전설적인 정복왕 아소카와 동일시했던 진흥왕. 순수비를 국토 곳곳에 세운 진짜 이유를 밝힌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인쇄하기

요약

신라 진흥왕순수비의 하나. 서울특별시 종로구(鐘路區) 구기동(舊基洞) 북한산 연봉의 비봉(碑峰) 정상에 세워졌었다.

설명

신라 진흥왕순수비의 하나. 서울특별시 종로구(鐘路區) 구기동(舊基洞) 북한산 연봉의 비봉(碑峰) 정상에 세워졌었다.

윗부분이 일부 마멸되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는 154㎝, 나비는 69㎝, 비문은 모두 12행이며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있던 부근에 승가사(僧伽寺)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서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해 6월에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561년(진흥왕 22)에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의 어느 해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의 어느 해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흥왕은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으며, 555년 10월에는 왕 자신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신라시대 관등 이름의 하나인 일척간(一尺干)의 이름이 보이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보이고 있어 신라 때의 인물과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이 비는 1972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1986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졌다. 국보 제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류
역사·고고학·문화재 > 고고학, 문화재 > 한국문화재 > 국보
지리·관광정보 > 대한민국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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