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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무슨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산만하고, 정신없고, 황당했던 그런 영화였다. 영화평을 보니 자주 등장하는 검은고양이와 흰고양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데.. 잘 모르갔다...
그저 나의 삶이 약간은 정신없더라도...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영화의 해피엔등으로 끝나는 그런 삶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Black Cat, White Cat, Crna Macka, Beli Macor, 1998)
고요한 초록빛의 다뉴브 강가. 이 곳에 터를 닦아 자손을 낳고 살고 있는 두 집시 집안이 있다. 먼저 1세대. 그르가와 자리야. 그들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사이지만 25년동안 만나지 않을 정도로 애증 관계에 있다. 다음으로 자리야의 아들인 마초. 그는 그르가의 옛 똘마니였던 다단과 역시 서로 씹고 씹히는 관계 속에서 근근히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2세대 친구간이다. 그리고 3세대. 마초의 외아들 자레와 다단의 여동생 딱정벌레 이름은 따로 있지만 난쟁이만한 키를 가진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제 이야기의 전개는 2세대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이지만 늘 놀고 먹는 한심한 백수, 마초 어쩌다 결혼식을 앞둔 하루 전, 천지신명의 도움인지 손자를 도와주려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베품인지, 자리야가 세상을 뜬다. 마초는 당장 다단에게 달려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한꺼번에 치룰 수 없다고 하지만 다단을 사망소식을 사흘 후로 연기할 것을 종용한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마초의 집 마당에선 결혼식이 치뤄지고 혼인 서약이 울려퍼진다. 난장판 분위기의 피로연. 급기야 난쟁이 신부가 도망을 치는데. 한편 일전에 사업 자금을 꾸러 온 마초의 거짓말로 친구가 죽은 줄 알고 있던 그르가. 그는 키다리 손자와 뚱땡이 손자를 데리고 친구의 묘를 방문하러 이 말으로 오고 있던 중 이었다. 오는 도중 길을 잃은 그르가의 마차는 도망치던 신부와 맞딱뜨리게 되고 이 순간 불꽃이 튀는 두 사람이 생긴다. 딱정벌레와 그르가의 키다리 손자. 둘은 운명적인 만남을 감지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데. 그르가의 등장으로 인해 한때 그의 돈을 떼먹었던 다단은 울며겨자먹기로 여동생과 키다리 손자와의 결혼을 승낙하고, 자레는 사랑하던 마을 처녀와 짝이 지워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날 밤 그르가마저 세상을 뜬다. 자 이제 자신이 원하던 짝을 되찾았던 이 두 커플은 어찌 될 것인가?
다뉴브 강에 정착해 사는 두 집시 집안의 3대에 걸친 우정과 증오, 잘못된 결혼식을 계기로 두 집안간에 벌어지는 언갖 해프닝을 그린 떠들썩한 코미디. <언더그라운드> 이후, 3년만에 내놓은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의 작품으로, 98년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집시들을 소재로, 열아홉살짜리 자레와 놀고 먹는 그의 아버지 마초, 그리고 집시 사회의 갱과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속에서 3대에 걸친 사람들의 우정과 반목, 화합은 원래는 하나였으나 분열된 뒤 불안한 미래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발칸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쿠스투리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생은 아름답고 살만한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민족과 종교의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의 비극을 겪는 발칸반도 출신의 감독이 취하는 낙관주의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끈처럼 느껴진다. 그는 증오와 슬픔에 찌든 동포들에게 진심으로 웃음과 화해와 해피엔딩을 선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를 시시때때로 출연시키면서, 검고 흰 것의 차이와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를 묻고 있다. 음악과 춤, 유머와 익살은 쿠스투리차 감독의 오랜 영화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집시 특유의 떠들썩함이 결혼식과 장례식과 겹쳐지면서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진다. 수류탄까지 터지는 결혼식이지만 기묘하게도 이 난장판은 모두에게 흥겨운 축제로 변한다. 이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조하는 감독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쿠스투리차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솔직히 흑묘백묘론 -_-이었다. 그걸 떠올리는 자신을 보면서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찌보면 흑묘백묘론 얘기가 맞기도 한 것 같다.
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일까. 사실 영화에서는 검은 고양이랑 흰 고양이가 계속 나온다.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를 볼 때마다 재수 없다는 말을 외치는데, 그 옆에는 항상 흰 고양이가 따라다니고. 그 둘은 항상 같이 붙어다니며 사이도 매우 좋은 듯하다.
솔직히 이런 식의 상징은 좀 별로이긴 하지만
1. 그 둘의 '친분관계'와,
2. 결혼식과 죽음이 겹치는 스토리,
3. 그리고 다단과 마초가 마지막에 조금 가까워지는 모습을 할아버지들이 '우정'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에서 쿠스트리차 감독은 뭔가를 엮어내려고 하는 듯하다. 이 '뭔가'는 낯이 간지러워서 그냥 생략.
그렇다고 프란츠 랑의 메트로폴리스같이 '재수 없는' 화해나 타협은 아니다.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장면을 만화로 그려놓은 포스터가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데, 그 뒤죽박죽이 매우 즐겁기도 하고 잘 어울린다. 사실 매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난잡하고 잡다한 것들이 많이 나오고 정신이 없는 영화인데, 은근히 짜임새가 있다. 이미지나 사건이나 메시지가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실제로 뭐가 많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저기가 어딜까 어딜까 생각했었는데, 영화의 장소는 유고였다. 다뉴브강가라고 한다. 나야 유고 사람도 아니고 감독과 달리 세르비아 문제에 솔직히 큰 관심을 안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사연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도 해본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실제로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유고에 있는지이다. 사실 그 전까지 집시라고 하면 막연한 이미지를 혼자서 그려보는 정도였는데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집시의 시간'을 볼 기회를 만들기로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영화 속의 총기 난사와 수류탄 오발 등인데, 영화 속에서 다단은 신이 날 때마다 총을 마구 쏘아대고, 수류탄을 던지기도 한다. 한 두 명이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지만 애초에 영화의 구성 자체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만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죽어라 죽어나가고 총알이 수만발씩 쓰이는 그런 영화를 상상하지는 마세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독특하다.
이건 총과는 상관 없지만, 자레의 할아버지가 손자의 결혼을 자신의 장례식으로 막기 위해 일부러 악기를 연주하고 무리하다가 죽는 장면이나 , 가족이 죽었는데 장례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죽음을 그닥 슬퍼하지는 않는 장면에서도 죽음에 대한 태도가 엿보인다. 그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이전까지 자기가 겪었던 것들에 대한 반작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밌는 부분이다.
다시 총으로 돌아와서.
신이 나면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해봤다. 그사람들은 총이나 수류탄 같은 것들이 너무 익숙해서 그처럼 삶의 일부분이 된 것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내 감성으로는 마음이 좀 아팠다.
가장 궁금한 장면인 '돼지가 차 뜯어먹는 장면". 영화 중간중간에 나오는데 결국 이 돼지는 차 한대의 겉면 철판을 다 뜯어먹는 데 성공한다. 이런 포스터도 있나보다. 포스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러 버전의 포스터 중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을 때 보이던 포스터가 제일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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