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 만화로 읽는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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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렵다... 만화라고 해서 약간은 우습게 봤는데, 정말 난해하고, 복잡하고, 심오한듯합니다...
어찌보면 짧은 책속에서 이 세상의 권력과 저항... 광기, 섹스... 너무 많은것을 설명하는듯 하지만 핵심을 찔러주고,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것이 많이 잘못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난옛일을 나의 현재 관점에서 보고 비판한다는것이 얼마나 우매한 생각인가라는 생각이 듭었습니다.

미셀 푸코... 아주 유명한 학자이자 지성인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동안 이런쪽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처음 들어봤고, 이런 분야의 책을 언제 또 손에 잡을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시간동안에 대단한 학자이자 지성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에 따르는 이론의 모순이나 사적인 흠도 많이 보입니다.
역자의 후기는 캡쳐한것이 잘 안보여서 맨 밑에 덧붙입니다.



<도서 정보>제   목 : 미셸 푸코 - 만화로 읽는 삶과 철학
저   자 : 리디아 앨릭스 필링햄 (지은이), 모슈 슈서(그림), 박정자 (옮긴이)
출판사 : 국제
출판일 : 1995년 11월
구매일 :
일   독 : 2005/8/12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것이 무엇일까?
내가 제대로 설명할수 있는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요지경... 그러나 설명될수 있다! 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범주안에서만...


<미디어 리뷰>
현대 프랑스 철학계의 주도적 인물, 푸코의 사상을 만화로 엮어냈다.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등의 저서로 문화, 사회 현상의 이면에 은폐된 권력의 문제를 파헤친 그의 사상을 일반인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미셀, 오 미쎌...^^*]

푸코, 동성애자라 특이 취향(?) 보다는 68혁명 때 학생의 편에 서 있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내 머리에게 크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어설픈 내게, 한 방울의 지식이 목말라 하는 내게, 문화적으로 부국인 듯한 프랑스의 68혁명은 10월 혁명과 같이 하나의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실체 접근이 이루어지지만 앞 못 보는 이가 코끼리를 더듬 듯 하여 어깨너머로 듣은 지식의 나부랭이, 스스로 성(城)을 만들어 튼튼한 아집을 형성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셜 푸코』'만화로 읽는 삶과 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한 사람의 과정을 놓고-그가 동쪽 방에서 먹고 서쪽 방에서 잠을 자고, 7살에 본 강 위의 아가씨에 반한 이야기라든가 죽음 끝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그가 생산한 '책'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 선거 벽보용(用)에 붙은 학교 약력이 그 부분은 정말 미미합니다. 그의 사상적 노고가 집대성한 책을 통한 접근은 공사(公私)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큰 방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를 나누든 작은 방에서 학생의 점수를 맺기든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절대 명제에서 출발을 합니다.

"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 버린다면, 앎이란 무얼 뜻하는걸까? 그건 아무래도 일단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게 참이다'라고 정한거 아니겠어.(10쪽)"

아는 것이 힘이다. 그렇다면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자연(自然)의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보다 사람과의 관계에 선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힘도,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진실된다고 다수에게 강요하는 힘센 소수들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11쪽)" 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적은 지식으로 힘을 쓸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절대 진리인가?'

푸코는 "절대적 진리라는 생각 자체를 없애 버린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답을 찾고 있습니다.

" 인간에 대한 앎이나 사회과학 또는 푸코가 말하듯이 인간과학 분야에도, 무엇이 진실인지를 결정하는(진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또 그런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12쪽)" 그렇다면 "왜 한줌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추종하는가? 이는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과 동일하다고 생각됩니다.

푸코는 "광기, 질병, 변태에 대한 정의가 시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20쪽)"는 가정을 검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대에 따름에 대한 다름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누군가의 의해 조종(-한줌밖에 안되는 사람)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기와 문명』에서는 어떻게 광기가 한 집에서 살지 못하고 두 집 살림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진료소의 탄생』에서는 개인의 사물화에 대해, 이는 푸코의 제자를 많이 양산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몇 몇 분야에서 탁월한 이야기를 끌어낸다. 『여자들이 의사의 부당의료에 속고 있다』와 『헬로우 블랙잭』 등의 책이 있습니다.

『사물의 질서』에서는 담론……. 내겐 조금 힘겨운 부분^^;

『감시와 처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힘의 권력. 즉 예전에는 칼로 찢어 공개 처형을 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지만 "그러나 18세기에,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정부를 위해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고 철학자들이 비판하고 나서는 한편, 고문과 사형의 현장을 구경하러 나온 군중들도 점점 더 통제불능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뭔가 조취를 취해야만 했다.(123쪽)"

푸코는 이를 "규율"이라고 부른다. 그 원리는 공간배치, 행동에 대한 철저한 통제(특히 시간표를 이용하여), 반복 훈련은 "정상으로 만들기 위한 평가"의해 줄 세워집니다. 뭔가 떠오르는 생각…….

"
그 아이디어는 이렇다. 각각의 사람들은 작은 방에 격리 수용되고, 그들은 중앙 탑의 한 사람에 의해 계속적으로 감시를 받는다. 반지 모양 건물의 원 둘레에 칸칸이 분할된 이 방들은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므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중앙 탑의 감시자에게 자세히 보인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중앙의 감시자를 볼 수 없고, 옆칸의 다른 수감자도 볼 수 없다. 벤담은 이 기본적인 개념을 공장, 학교, 막사, 병원, 정신병자 요양소 그리고 특히 감옥에 쓰이도록 고안했다.(130쪽)"

또한 여름과 겨울에 있는 방학!! 놀랍도록 잘 지켜지는 방학의 시간표. 몇 시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고 몇 시에 무엇을 한다는 생활계획표. 우리의 친절한 선생님은 스스로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고서 이러한 주문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사고에 대한 무개념적 접근인지……. 하지만 둘 다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사고를 인지하고 있으면서 생활계획표를 주문한다는 것은 푸코가 말하는 "힘센 소수"라는 기득권적 권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개념적 접근이라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기득권에 줄 선 아름다움 선생님으로 불려 질 것입니다.

둘 백년 이 지나는 사이에 정상과 비정상이 갈리고, 정상은 비정상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서로를 나누는 힘이 되고, 일상에 숨어서 내 세계관을 구속하여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게 한다는 점입니다.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을 잠시 빌리면, 내 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자에 대한 동경과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낮은 눈빛.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회에서, 우리는 달콤한 사탕을 하나 지기위해 수백 명이 뛰어든 것입니다. 사탕을 어떻게 더 많이 만들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미지에 대한 욕심. 그리고 "규율"로 위장된 권력자들의 폭력. 약한 자의 소리를 비정상적인 구호로 보는 현재의 나 시선 등은 지금까지의 권력을 더욱 튼튼한 동아줄로 엮게 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헤게모니를 깨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에 대한 개념을 상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제로섬 게임이라는 무대위에 놓여있다는 커다란 시선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가져봅니다.

나는 푸코가 어디에서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쓴 책과 이런 알림에 대한 고민을 왜? 왜, 어려운 작업을 핸가에 대하여 궁금할 뿐입니다. 학생들이 기득권자에 맞설 때, 선뜻 자기의 방을 내어준 교수. 그의 실천적 지식에 대한 행위가 궁금합니다.



<책속으로>
이것들은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기를 죽이고, 소외시키고, 지적 호기심의 의욕을 꺾어 놓았던가? 마치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암호라도 말하듯 그렇게 생소한 용어들을, 학술 논문이 아닌 일반 도서에서 그냥 생경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오역까지 겹치면 글의 모호함은 극에 달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이론은 이 모호함의 안개 속에 갇혀 완전히 구름잡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독자는, 특히 젊은 독자들은 권위 있는 대학의 권위있는 교수의 글이니, 글이 잘못됐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문제는 자신에게 있으며,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독서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끝내 글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최소한 어려운 책을 읽는다는 성취감이 어떤 고급 문화와 접촉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에 응분의 만족감을 준다. 이것이 어려운 이론서를 쉽게 베스트셀러로 만들거나, 정확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극도의 모호한 문체를 즐겨 사용했던 한 문학평론가를 1백 년만에 한 번 나올까말까하는 천재로 만들어 놓은 비밀이다. (<역자후기> p. 161)--- p.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같지 않은 다른 모든 것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정상은 기본항이고, 정상적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 -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은 언제나 쉽게 구별이 되고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똑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훑어 본 뒤 푸코는 이 모든 가설에 도전장을 냈다. 광기, 질병, 변태에 대한 정의가 시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었다.--- p.19-20
비정상적 인간들을 추방했지만 그들이 우리 문화에서 덜 중요하게 된 건 아니다. 정상인은 비정상과의 비교 속에서만 규정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상 비정상을 통해서 정상을 규정한다. 비정상을 통해서만 우리는 정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비록 비정상이 추방되고 숨겨졌지만, 그외의 나머지 사라들, 다시 말해서 정상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강박적으로 비정상인들을 연구하고 조사했다.--- p.21


역자후기

그 어려운 푸코를 만화로 그렸다니, 말만 들어도 재미있다.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마치 외국어에서 모국어로 번역하듯, 난해한 말에서 쉬운 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나는 푸코의 생애와 사상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가시화해 놓은 이 책을 보고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내가 이 만화를 번역했던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언어의 모호함과 다의성이 문학에서는 미적 감동의 원천이지만 문학을 벗어난 이론서에까지 문체라는 미명하에 그것이 조장되고 찬양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려운 글은 그 자체가 억압적인데, 민중 지향적인 지식인들이 민중은 한 줄도 이해할 수 없을 고답적인 글을 쉬운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도 없이 마구 어렵게 써 나간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이다. 최신의 서구 이론들을 번역하거나 소개하는 저서에서 특히 그것이 문제이다. 푸코, 데리다, 라캉, 구조주의, 해체주의, 기호학, 포스트모더니즘.......... 이것들은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기를 죽이고, 소외시키고, 지적 호기심의 의욕을 꺾어 놓았던가? 마치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암호라도 말하듯 그렇게 생소한 용어들을, 학술 논문이 아닌 일반 도서에서 그냥 생경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오역까지 겹치면 글의 모호함은 극에 달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이론은 이 모호함의 안개 속에 갇혀 완전히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독자는, 특히 젊은 독자들은 권위 있는 대학의 권위있는 교수의 글이니, 글이 잘못됐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문제는 자신에게 있으며, 따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독서를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끝내 글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최소한 어려운 책을 읽는다는 성취감이 어떤 고급 문화와 접촉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에 응분의 만족감을 준다. 이것이 어려운 이론서를 쉽게 베스트셀러로 만들거나, 정확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극도의 모호한 문체를 즐겨 사용했던 한 문학평론가를 1백 년만에 한 번 나올까말까하는 천재로 만들어 놓은 비밀이다. 뛰어난 감성으로 우리의 미적 취미를 세련시키는데 기여하는 문학가들의 예술 작품이 아니라면, 글이란 가능한한 쉬워야 한다.
   하이데거가 1935-1936 학년도에 프라이부르대학에서 했던 강의서(프랑스 번역본 제목<사물이란 무엇인가?>, 독일어 제목 <형이상학의 기본적 문제들>)를 읽고 내가 느꼈던 감동과 선망도 그런 것이었다. 과연 대 철학자는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풀어 놓는구나.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플 것 같은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개념을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평이한 질문에서부터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밟고 올라가 마침내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그 솜씨가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강의를 할수만 있다면... 그러나 철학은 철학이었다. 뒷 부분으로 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어려워져 철학 비전공자인 나의 호흡을 가쁘게 했다. 어려운 이론은 아무리 쉽게 설명하려 해도 한계가 있고, 결국 그것은 난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그 책은 동시에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 교양인이 고도의 지적인 담론을 이해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것은 학습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아무런 학습의 기초가 없는 사람을 단숨에 이해시킬 쉬운 글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앞 단계의 어떤 앎의 축적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지식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순전히 감정적인 이미지 마저도 학습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뿔난 도깨비의 이미지를 꿈 속에서, 혹은 환상 속에서 보았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의 소산이기 보다는, 그가 어릴때부터 들어온 도깨비에 대한 지식의 소산인 것이다. 가장 감정과 닿아 있고, 가장 비합리적인 상상마저 학습의 기초 위에 얹혀져 있다면 고도의 합리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문적 이론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반원을 그리며 야금야금 땅을 넓혀가는 어린시절의 땅 따먹기 놀이에서처럼 하나의 개념, 하나의 용어를 이해할 때마다 지식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간다. 이것이 학습이다. 이 학습의 부분을 우리나라의 지식인 사회는 소홀히 했다.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용어는 독자도 모두 알고 있다는듯이 다짜고짜로 생소한 말을 드리대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학자의 직무유기이며, 나쁘게 말하면 자기가 다루고 있는 분야를 높은데서 내려다 보며 총괄적으로 조망할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적 논술을 고집스럽게 대학입학 자격고사의 시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 같으면 그것이 별 무리가 없지만, 고등학교에서 철학의 기초도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저술 형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영어(혹은 불어)로 intelligible이 플라톤의 이데아계(또는 초감성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역자가 제아무리 해체니 기호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해보았자 그것은 글자 그대로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가 경직되어 있고, 학문의 기본 자세로서의 비판 의식도 결여되어 있는것은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다른 무수한 이론들과의 관계를 알게 해주며, 따라서 그 이론에 대한 객관적, 상대적 이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 사회에 두텁게 내리깔린 거품을 걷어 내려면 쉽고도 정확한 개념 설명을 통한 학문의 대중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직도 학문의 상아탑을 주장하는 순수주의자가 있다면, 왜 사르트르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의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철학이 종주국 독일을 누르고 비교 우위를 누리며 유망한 수출 품목으로 막대한 인세를 벌어 들이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을 가지고 사르트르나 푸코가 그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며 세계적 석학으로 떠오른 이유는 그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이론들을 대중화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좀더 대중적으로 접근이 쉬운 문학의 길을 통한다든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실천을 통해서였다. 여하튼 그것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설득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었다. 사르트르는 에세이나 언론 매체의 기고문, 또는 소설이나 연극 등을 닥치는대로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파했다. 그것은 전통적 철학자라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 그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기상천외한 매체가 철학의 운반 수단으로 등장했으니, 만화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이론을 대중화하여, 아무리 고답적인 학문이라도 그것을 원하는 모든 泳宕湧?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푸코와 만화의 그 엉뚱한 결합이 유쾌하기 그지 없다. 학식 눞은 교수들만이 근엄하게 논하던 푸코의 담론이 이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책방의 만화 코너에서 만화책을 뒤적이는 어린 아이들의 곁으로 내려온 것이다.
   푸코의 철학은 강렬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어서 만화라는 매체에 가장 잘 어울리는듯 하다. 중세의 프레스코화에 자주 비교되는 <광기의 역사>가 그렇고, 벨라스케즈의 그림 분석으로 시작되는 <말과 사물>이 그러하며, 끔찍한 차열형(車裂形)에 처해진 다미앵 재판기록과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개념을 중심축으로 하는 <감시와 처벌>이 그러하다. <초보자를 위한 푸코>(FOUCAULT FOR BEGINNERS)라는 원제 그대로 이 만화는 푸코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해 그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조차 모르는 독자를 상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푸코는 도대체 누구인가? 60년대까지 사상의 거장으로 막강한 지적 권력을 누렸던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에서는 기호학적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 프로이트를 새롭게 해석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 정상의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 드디어 70년대 이후 그 넷 중 푸코가 선두를 달리는것을 우리는 보게된다.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푸코는 일상적 관심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에 몰두하는 전통적 철학자가 아니다. 그의 책 중에는 유일하게 <말과 사물>만이 인식론을 다루고 있을뿐 <광기의 역사>는 광기와 미친 사람들을, <진료소의 탄생>은 대학 부속병원을, <감시와 처벌>은 형벌 제도와 학교, 공장, 군대, 병원, 감옥등의 건물 형태와 규율을, 그리고 <성의 역사>는 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를 강하게 흡인하는 재미있는 주제들이다. 감옥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흔히 겪는 학교, 병원, 군대에서의 비합리적이고 억울한 경험들이야말로 푸코의 대중적 인기의 근원이다. 그리고 성에 대한 폭발적 관심이나, 동성연애가 당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급격한 사회 변화 역시 푸코의 지위를 한층 더 공고히 다져주는 요인이다. 별로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 주제들을 관통하는 중심 개념은 권력이다. 이것 또한 개인의 권리 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누구도 외면할수 없는 큰 관심사이다.
푸코는 광기와 성의 철학자이지만 무엇보다도 권력의 철학자이다. 그런데 그의 권력론은 딱딱하고 근엄한 정치사상 이론이 아니다. 그는 엉뚱하게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라는 격언을 들으며,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 될 것을 독려받는다. 그런데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를 배우면 역사의 내용을 알고, 생물을 배우면 동물과 식물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앎이란 모든 종류의 학문과 지식을 뜻한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을수록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을 갖게 되므로 과연 앎이란 힘이다. 그러나 앎이 힘이라는 것은 그런 소극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세상사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고, 완전히 가치 중립적일것 같은 학문들이 사실은 모두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또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봉사한다. 그런데도 그것이 외관상 학문의 엄격함을 띄고 있다는 것이 더욱 교묘하고 위험하다. 또 한편, 안다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옆집에서 어제밤 부부 싸움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고, 쿠르드족 지도자 오찰란이 체포된 사실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기관이 어떤 장관, 어떤 금융기관장의 뇌물 수수 사실을 아는것도 역시 앎 이다. 그러니까 앎은 정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보란 우리가 재미있는 첩보 영화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듯이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정보는 마치 땅 밑바닥부터 파고 들어 가 마침내 그 위의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리듯이 한 나라를 서서히 붕괴 시킬수도 있고, 평생 출세가도를 달려온 한 야심만만한 엘리트 관료의 일생을 단숨에 망칠 수도 있다. 앎은 이처럼 힘을 생산한다.

알고 있는 쪽이 알고 있지 못하는 쪽보다 월등한 힘을 행사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상대방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상대방에 대해 엄청난 통제력을 갖고 있을것이 틀림없다. 이 힘이 권력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순진한 격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뜻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순 우리말인 `힘'과 한자말인 `권력'이 분리되어 각기 일상적인 힘과 정치 권력을 뜻하고 있지만, 영어(power)나 불어(pouvoir)에서는 그것이 매한가지 말이다. 푸코의 권력 이론을 정치 권력으로만 좁게 해석하여 계급 투쟁이론과 결부시키려 시도했던 일부 학자들의 오류도 거기에서 생긴 것이다. 푸코의 권력은 국민을 정보의 올가미 속에 얽어 넣어 완전히 통제하려는 정치 권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힘의 관계를 뜻한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아버자를 죽이는 아들의 사례가 가끔 보도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살인에 이를 정도의 엄청난 억압과 저항 관계가 가정 내에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이 권력 관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권력의 장에는 지배 엘리트와 백성이라는 단 두 개의 덩어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체제 단체와 그것을 억압하는 정부 사이에는 권력의 지배 관계가 있지만, 바로 그 반체제 단체 안에서도 지도부와 평당원 사이에는 권력 관계가 있다. 몇년 전 운동권 대학생의 총 리더가 같은 대학생들의 엄중한 경호 속에 피신해 다니며, 똑같은 대학생들인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님' 이라는 깍듯한 존대말로 지칭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란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되는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뭉친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행위 치고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권력 관계이다. 직장에서라면 상사와 아랫사람의 관계가 역시 권력 관계이고, 천주교의 사제단이나 추기경, 불교의 종정, 이 모든 기관이 막강한 권력의 자리이다. 중요한 매체를 소유한 문학평론가와 그 앞에서 꼼짝 못하는 작가 지망생 사이에도 지배와 종속의 적나라한 권력 관계가 있다. 무릇 세 사람만 모이면 그 중에는 나머지 두 사람을 지도하려는 한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고, 거기에는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권력은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에게만 관련되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고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권력은 인간들의 모든 관계 속에 내재해 있다. 이처럼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망을 형성한 권력 관계를 푸코는 모세 혈관에 비유하고, 그러한 권력을 미시 권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권력이 총칼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총 칼 든 사람 앞에서 우리는 공포에 떨며 무조건 복종한다. 그런데 힘에는 물리적 힘도 있지만 정신적 힘도 있다. 물리력 앞에서의 복종은 어디까지나 면종복배(面從腹背)일뿐 진정한 복종은 아니다.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존경하며 자발적으로 하는 복종이야말로 진짜 복종이다. 푸코 이전까지 사람들은 정신적인 힘을 과소평가했다.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인지 모른다. 푸코가 처음으로 정신적인 힘을 평가한 사람은 아니다. 1920-1930년대에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헤게모니 라는 용어로 이미 그것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물리적 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신념 체계와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가치를 받아 들이고 그것을 공유하도록 피지배자들을 설득하는 힘에 그 요체가 있다고 했다. 이 힘이 바로 헤게모니이다. 그러니까 소수가 다수에게 지도력을 발휘하고, 자신들의 가치나 신념을 다수에게 부과하는 방법이 바로 헤게모니이다. 우리 역사의 조선 왕조가 세계에 유래없이 5백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것도 강력한 유교 사상과 선비 정신이 피지배층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피지배층이 더 이상 지배계급의 정신적, 도덕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이것은 권위의 위기, 다시 말해서 헤게모니의 위기가 되고, 이때 혁명이 가능해 진다. 그람시는 지도력과 지배를 구분하는 레닌의 이론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15세기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군주론>에서 깊이 영향을 받았다. 군주의 교육을 위해 쓰여진, 그리고 권모술수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을 유포시킨 이 책에는 구구절절이 군주가 민심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군주는 항상 민중을 자기 편으로 잡아 두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역경에 처하면 구제방법이 없다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했다.
그러나 푸코가 정신적인 권력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그람시나 마키아벨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제왕학도 아니며, 한 지배 계급을 타도하여 다른 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기 위한 전략도 아니다. 그는 다만 좀더 근원적인 권력 관계를 폭로하여 인간을 모든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을 뿐이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론은 고고학과 계보학이다. 푸코를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고고학이니 계보학이니 하는 말에 심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고고학이라면 경주의 천마총이나 공주의 무령왕능 같은 발굴 현장이 떠오르고, 계보학이라면 명문가의 인사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의 족보가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다른 의미가 이 용어들에 있는것일까? 푸코는 이때까지 자명하고 보편적인 진실로 여겨졌던 모든 지식과 체계를 그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어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다는 의미에서 그에게는 전복적(顚覆的) 철학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그의 글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왔고 의외성이었다. 전혀 철학같지 않은 주제와 전혀 철학같지 않은 참신한 용어 사용이 폭발적인 대중 사회인 현대에 들어 맞았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고고학과 계보학도 그중의 하나이다. 색색의 지층과 흙먼지를 연상시키는, 철학하고는 한 가닥도 닿아있지 않을것 같은 고고학이라는 용어로 그는 독자들의 강한 관심을 끌어 들였다. 마치 선사 유적지를 발굴하여 아득한 옛 시대 인류의 흔적을 더듬듯이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관습이나 제도들을 그 형성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지층의 미세한 차이를 검토하고 거기에 어떤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것이 푸코의 고고학과 계보학이다.
그 첫번째가 광기에 대한 발굴이다. 우리의 조선 시대를 한번 생각해 보자. 심한 저능의 바보나 실성한 사람은 그 가정의 문제일뿐 그들을 따로 모아 한데 가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정상인과 전혀 구별되지 않은채 사이 좋게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가끔 동네 개구장이들의 놀림을 받기는 해도 마을 전체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감쌌고, 보통 사람과 다른 그의 행동 마저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 들이며 무심하게 평화스럽게 살았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서양에는 중세 때부터 우리가 영화 벤허에서도 보았듯이 문둥병 환자들을 격리 시켜 한데 수용했던 시설이 있었다. 전염성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단순히 그 모습이 혐오스러워서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켰던 것이다. 인류의 재앙이었던 이 문둥병이 왠일인지 14세기에 갑자기 사라졌다. 전에 나환자를 가두던 수용 시설이 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뿐 곧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5세기부터 바보들의 배라는 이상한 배가 유럽의 강물 위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부랑인이나 저능아, 혹은 실성한 사람들, 요컨대 생활 능력이 전혀없어 가정이나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가득 태운 이 배는 포구에서 포구로 하염없이 강물을 따라 표류했다. 그중에는 버젓한 가정에서 선장에게 돈을 주고 집안의 골칫거리룰 떠맡긴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데카르트와 파스칼을 탄생시킨 고전주의 시대 17세기가 도래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깎은 듯한 기하학적 정원이 들어서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사상이 서양 역사의 근대 시대를 연 세기였다. 이 시기에 갑자기 프랑스에서는 대대적으로 사람을 가두는 현상이 일어났다. 범죄자는 물론이고, 그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던 사소한 위반자나 실성한 사람들이 갑자기 수용 시설에 갇히기 시작했다. 전에 집에서 간호를 받던 환자들도 수용되었는데 그중에는 간질 환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극빈자도 있었다. 파리 시민 1백 명 중 한 명 꼴로 감금되었다니 그 가둠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짐작할수 있다. 그렇다면 극빈자, 환자, 광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푸코는 17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서구 사회가 인간을 정상, 비정상으로 가르고, 모든 비정상인을 함께 가둬 일반 정상인들로부터 그들을 격리시켰다는데 주목했다. 이때 정상, 비정상을 가르는 잣대는 이성이며, 광기는 곧 비정상으로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비이성인가? 그리고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정상이라고 부르고, 소수의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을 비정상이라고 부른다. 애꾸의 나라에서는 두 눈 가진 사람이 불구자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가 조금만 옷을 이상하게 입어도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저 사람 미쳤어'라고 말하지 않는가? 정상, 비정상의 분리가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얼핏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거기에는 극도의 비합리적인 몽매성이 있다. 그런데 합리성을 가장한 몽매성이 왜 갑자기 17세기에 솟아났는가? 푸코는 그것이 근대 부르주아 권력의 대두와 관계가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자기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둠으로써 일사불란한 권력의 행사가 가능해 진다. 여기서 광기가 남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추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광기가 정신병이며, 따라서 엄격한 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푸코는 그것이 문화의 소산이며,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발명품이고, 남들도 모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억압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이것이 광기에 대한 그의 고고학적 방법의 성과이다. 17세기 이래 근대 문명은 모든 남다른 행동이나 남다른 생각을 이성의 이름으로 단죄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가장 자유스러운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문학, 예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남다른 행동을 보이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위험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어떤 식으로든 제재와 파문이 가해졌다. 푸코가 특히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사회적 검열에 민감했던 것은 그가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인습을 위반하려 애썼던 사드, 룻셀, 바타이유, 클로소프스키등의 작가들에게 강한 애정을 느꼈으며, 르네 샤르의 싯구중 `그대의 남다름을 계발하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discours는 이야기, 담화, 담론, 연설, 훈시, 인사 등의 뜻이었다. 문맥으로 보아 담론이 가장 비슷한 의미인 것 같았으나 이것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담론이라는 말에서는 서너 사람이 화롯가에 둘러 앉아 담소를 즐긴다는 인상이 느껴지는데, 그 책들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구의 말, 사상, 혹은 이론이라고 해야할 자리에 어김없이 discours를 썼다. 만족스럽지 못한채로 나는 가끔은 담론, 또 가끔은 사상, 이론, 말 등으로 이 단어를 번역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담론에 대한 독학자의 탐구를 시작했다. 우선 언어학에서의 담론은 소리로 말해졌건, 글로 쓰여졌건간에 우리의 모든 언어행위를 뜻한다. 언어학자 방브니스트에게서 담화(discours, 이때는 또 담화라고 번역된다)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를 전제로 하는 모든 언술 행위를 뜻한다. 그는 이것을 일체의 자전적 언어 형태를 배제하는 언술 양식인 `역사적 이야기(r cit historique)'와 대비시켰다. 철학에서는 사고의 언어적 표현이며 따라서 직관의 반대말이다. 푸코의 담론은 바로 이 두 가지를 합친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하면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을 언어?표현했을 때(말이건, 글이건간에) 그것이 담론이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해보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한 대상의 인식이 바로 담론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술 행위는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담론이 언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어 중에서도 감정적인 외마디 소리가 아니라 정신적인 판단과 추론 작용의 결과로 나온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모 현장의 짤막한 구호도 담론이고, 마르크스의 방대한 <자본론>도 담론이다. 소리나 문자로 되어서 우리가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인간의 모든 생각들, 그것이 담론이다. 푸코 자신의 말을 빌면 말과 생각 사이에 있는 것, 기호(記號)라는 옷이 입혀진 생각, 또는 말들에 의해 가시적으로 된 생각 (<담론의 질서>)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화제나, 개인간의 계약서, 대학 화장실에 붙어 있는 스티커의 구호, 대통령의 담화문, 성경 말씀, 법조문 등이 모두 담론이고,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칸트의 사상들이 담론이며, 수학, 생물, 경제학 같은 학문의 분야 하나하나도 모두 담론이다. 이처럼 담론은 학문, 이데올로기, 지식 등을 포괄하는 아주 편리한 단어이다. 어느 철학자의 저서나, 평생의 사상, 또는 그가 기자와 가진 인터뷰중의 한 구절을 각기 복잡하게 다른 말로 할 필요가 없다. 담론이라는 한 마디 말로 그것을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말이 푸코의 철학 체계를 떠받치는 중심 개념이 된 것은 그것이 권력을 실어 나르는 운반 수단이기 때문이다.
에피스테메가 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은 이 담론을 통해서이다. 17세기에 권력이 광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했을 때에도 그것을 믿받침하는 것은 담론이었다. 한 사회의 주도적 인물들의 담론은 다른 사람들의 담론을 제한한다. 세상의 모든 사회는 누구나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언론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독재국가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푸코는 담론이 가진 통제의 기능을 외부통제와 내부통제로 나눈다. 첫째로 담론의 외부적 통제에는 금기, 진실에의 의지등이 있다. 성이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다. 금기라는 준엄한 벽이 그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 분야에서건 시사적 정보의 차원에서건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생각나는대로 마구 할 수 없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라는 차가운 반응이 우리를 무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담론의 내부적 통제는 좀 더 학문적 차원이다. 그것은 주석(註釋), 저자, 말하는 사람에 대한 제한 등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분야의 권위있는 학자는 원전에 대한 주석을 통해 담론의 방만한 퍼짐을 제한하고, 저자가 불분명한 원전들을 여러 기준에 따라 특정 저자에 귀속시킴으로써 그 외의 담론들을 배제한다. 흥미로운 것은 말하는 사람을 제한하는 세 번째의 규제 장치이다. 한 개인은 어떤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어느 특정의 담론의 서열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담론의 모든 영역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고대사에 관련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이 정통파 사학자들로부터 적대적 경멸을 받는 것은 진실에의 의지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제한이라는 이중의 통제 방식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는 주눅들린 서문으로 자신의 저술을 책으로 출판하는 모든 저자들은 푸코의 이름도 모르면서 이미 담론의 통제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화 <어린 왕자>에서 자기 나라 고유 의상을 입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혹성의 발견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지 못한 터키 천문학자의 이야기도 담론의 내부적 규제의 한 좋은 예이다. 이 두 예화는 말하는 사람의 소속(계급, 사회신분, 종족, 국적, 이해관계, 출신 대학등)을 문제 삼아 그의 언술을 사회 집단에서 배제하는 경우이지만 거꾸로 언술 자체를 문제 삼아 언술 주체를 배척하기도 한다. 어떤 이념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그 이념에 배치되는 말을 한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이 거부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단이라는 말로 정통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관행은 광신 집단의 행동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상과 이념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성격이다. 그렇다면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금기로 가로 막고,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오만하게 말하는자가 누구인가? 여기에 권력의 문제가 떠오른다. 힘 있는 자의 담론이 사회를 지배한다. 힘이 곧 정의다,라는 격언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과 함께 푸코의 체계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심 기둥이다. 힘이 곧 정의라는 사실을 우리는 정치 권력의 장에서는 입이 아프게 질타했으나, 담론의 장에서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나 무슨 이야기든지 할 수 있는 사회인듯 해도 실제로는 엄격한 금기와 제한이 우리의 말을 막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명 말고 그 어느 문명이 이처럼 담론을 존중하고, 담론에 명예를 부여하고, 그것을 철저히 해방시키고, 보편화 했던 시대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 외면적인 말사랑(logophilie)밑에는 두려움이 감춰져 있는 듯하다.(...) 모든 사회 안에는 이 사건, 이 말해진 물체, 이 모든 언술의 분출, 거기 있을 수 있는 모든 폭력적인 것, 불연속적인 것, 전투적인 것, 무질서한 것, 위험한 것, 이 끊임없이 뒤죽박죽인 담론의 웅웅거림에 대해 일종의 암묵적인 두려움, 말에 대한 깊은 공포(logophobie)가 있는 듯하다'(<담론의 질서>)라고 푸코는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권력의 가장 적나라한 행사는 죄수에 대한 형벌권의 행사이다. 이 분야에 대한 푸코의 세밀한 고고학은 그 완벽한 고증과 해석이 가히 독자의 전율을 일으킬 정도이다. <감시와 처벌>은 1757년에 루이 15세의 시종 다미앵이 왕의 어깨를 칼로 살짝 건드린 죄로 파리의 광장에서 잔혹하게 고문을 당한후 말 네 마리에 몸이 묶이어 사지가 찢기는 장면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한다.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죄수를 공개적으로 고문하고 이어서 잔인하게 죽인 후 그 시체를 공시하는 것은 근대 이전의 형벌 제도의 관행이었다. 죄수의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사람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광장에 몰려들어 죄수에게 고문이 가해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범죄에 대한 분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공개 처형은 사람들이 앞으로 저지를수 있는 모든 범죄에 대한 예방이면서 동시에 주민들의 축제였다. 그리고 그 공포와 함께 왕의 막강한 힘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권력의 과시였다. 이 떠들석한 형벌의 관행이 1830년대경부터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춰져 은밀한 장소로 옮겨졌다.
종래의 학자들은 이것을,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푸코는 여기서도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가설을 제시한다.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하기 위해서가 아니가 끔찍한 처형 장면이 죄수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시켜 오히려 권력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광장에 몰려들어 처음에는 주먹을 휘두르며 잔인한 살인자에게 고함을 지르던 군중도 형리로부터 끔찍한 고문을 받는 죄수의 모습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살인에 대한 분노는 그 범죄를 유발시킨 사회적 모순이나 권력의 압제 같은 것으로 돌려지게 된다. 이것은 권력에게 있어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권력은 떠들석한 과시에서부터 은밀한 영역으로 숨게 되었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처벌은 범죄의 종류에 관계 없이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낯익은 투옥의 제도가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새롭고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옥은 죄수가 재판을 기다릴 때까지, 혹은 빚쟁이가 빚을 갚을 동안 잠시 머무는 장소였을뿐, 그 자체가 형벌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죄수를 가만히 감옥에 가둬 놓기만 하는 것이 무슨 벌이 되며, 또 단순히 한 번 감옥에 갔다 오는 것만으로 어떻게 착한 사람이 될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푸코는 규율(discipline)에서 찾는다.
1830년대에 파리의 한 감옥은 죄수들의 일과를 꼼꼼하게 규정해 놓았다. 여름에는 아침 5시, 겨울에는 6시에 일과가 시작된다. 하루에 9시간 일하고, 2시간은 학습에 바쳐진다... 기상 북이 울리면 조용히 일어난다. 두 번째 북이 울리면 옷을 입고 침상을 정리한다. 세 번째 북소리에 맞춰 줄을 서서 예배당으로 향한다... 이것이 규율이다. 이제 권력은 야단스럽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일과표만 챙기면 되었다. 규율이란 어떤 규범(norm)과 규칙을 정해 놓고 모든 사람들을 그 규범에 종속시킴으로써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중고등학교에서 머리 길이, 옷모양 등을 정하여 그것을 위반하는 학생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이 바로 규율이다. 규범은 강제의 원칙이며, 그 목적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규격화(normalization)에 있다. 그리고 누가 규범을 어겼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감시를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감시와 규격화는 근대 권력의 필수적인 도구이다. 흥미로운 것은 푸코가 이 규율적 권력의 모델을 흑사병의 창궐 시기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17세기의 대대적 감금 현상이 중세기의 문둥병의 격리에서 그 사회적 배척의 모델을 찾았듯이, 규율적 권력은 14-15세기에 유럽에서 1천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흑사병에서 그 도식을 빌려왔다. 강한 전염성의 흑사병이 일단 발병하면 그 도시에는 전면적인 금족령이 내려진다. 주민들은 일체 집 밖에 나오지 못하며, 거리를 다닐 수 있는것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한 관리들 뿐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식품을 배급해줄 뿐만 아니라 누가 명령을 어기고 집에서 나오는지, 또는 환자가 새로 발생했는지를 감시하고 기록한다. 당국은 도시의 지도를 놓고 바둑판처럼 그것을 분할하여 각기 책임자를 임명하고, 전염병 환자의 수에 따라 통제를 좀더 철저히 해야할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등급을 매긴다. 이처럼 재난의 시기에 병력이나 경찰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시가지를 지구별로 나누어 행정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야말로 규율적 권력의 이상적인 모델이다. 바둑판 같은 지역분할(불어로 quadrillage)을 통해 모든 것에 등급이 매겨지고, 감시의 시선이 번뜩이며, 엄격한 기록이 행해지고, 온 도시가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않는 것, 이것은 그대로 근대 권력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국가가 아니겠는가? 나환자들의 추방이 순수 공동체에 대한 꿈이라면 흑사병의 금족령은 규율사회에 대한 꿈이다. 19세기의 서구 사회는 인간에 대한 권력 행사인 이 두 방법을 한데 합쳤다. 이것이 근대 권력의 탄생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단순한 지각행위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인간의 통제에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은 군대였다. 모든 감시체계 건축물의 효시는 군막사이다. 야전장의 군막사는 통로의 방향과 텐트의 배치를 통해 병사들을 정확하게 감시할 수 있는 시선의 망을 구축했다. 그러니까 규율적 권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배치다.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판옵티콘(Panopticon, 한 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건물 전체의 내부가 다 보이도록 설계된 건물)을 고안한 것도 군막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2-3층으로 된 반지 모양의 원형 건물 원 둘레 부분을 칸칸이 분할하여 한 사람을 수용할만한 독방들을 만든다. 원형 건물의 안쪽에는 중앙탑이 세워져있다. 중앙탑에는 감시자가 한 사람 있어서 몸만 한 번 돌리면 손쉽게 원형 건물의 감방들을 모두 훑어 볼수 있다. 그러나 독방에 수감된 사람들은 중앙의 감시인을 볼 수가 없다. 외부에 면해 있는 감방들은 밖으로부터 빛을 받아 방안의 모습이 환히 중앙탑에서 보이지만 아무것으로부터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중앙탑은 어둡기 때문에 그 안에 누가 있는지 감방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감방이 옆면으로 칸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수감자들 상호간에 서로를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죄수들간의 뒤섞임은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의 관계는 철저히 차단된다. 벤담은 이 기본적인 건축의 개념을 공장, 학교, 군막사, 병원, 정신병 요양소, 그리고 감옥에 적용할 것을 권장했다. 푸코는 여기서 근대 권력의 전형을 본다. 독방에 갇힌 사람은 감시인에게 완전히 보이지만 그는 감시인을 볼수가 없다. 한편 감시인은 죄수를 완전히 보지만 자신의 모습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시선의 불균형, 비대칭성이 있다. 우리의 지각행위는 보다-보이다 의 짝을 이루고 있는데 판옵티콘은 이 시선의 한 짝을 해체해 버렸다. 내가 볼 수 없는채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나를 매우 불리한 지위에 놓는다. 더욱 교묘한 것은 중앙탑이 죄수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 안에 감시인이 항상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죄수들에게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만 주면 그것으로 이 권력 기구는 자동으로 작동된다. 감시의 시선은 보이는듯 할 필요는 있으되 반드시 있는지 확인될 필요는 없다. 시선은 확인되지 않을때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판옵티콘이야말로 단순히 시선 하나로 가동되는 이상적인 권력 장치이다. 이때 시선은 앎과 직결된다. 죄수를 바라보는 감시인은 죄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감시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죄수는 감시인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시선의 불균형은 앎의 불균형을 낳고, 앎의 불균형은 권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앎은 담론이 되어 사람들을 억압하는 교묘한 수단이 된다. 이 시선의 개념을 푸코는 근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공공 건물에서 발견한다. 감옥, 병원, 작업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복도를 따라 일렬로 배치된 학교 교실들, 문이 반쯤만 달려 위, 아래로 학생들의 다리와 머리가 보이도록 고안된 학교 화장실등이 모두 감시의 공간화인 것이다.
푸코가 시선과 관련하여 고대와 근대를 비교한 대목은 그의 권력 이론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희랍·로마 시대를 스펙타클(구경거리)의 시대, 근대를 감시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스펙타클의 시대인 고대(영어로 antiquity, 불어로 antiquit 는 희랍·로마 시대를 뜻한다)에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공연자의 연희를 관람했으므로 그 때는 다중이 소수를 바라보던 시대였다. 고대의 원형극장은 그런 풍습에 딱 들어 맞는 건축양식이었다. 군중이 박수치며 공연물을 관람하는 행위와 함께 공공의 생활이 형성되었고, 축제가 이루어졌으며, 사람들 사이에는 감각적인 친밀성이 생겨났다. 과격한 축제 속에서 가끔 유혈적인 사태가 일어나는 일이 있어도, 이 의식들 속에서 사회는 활기를 얻고, 거대한 공동체의 일체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이와 반대로 소수가 (아니면 한 사람이) 다중을 바라보는 시대이다. 벤담의 판옵티콘 속에서 간수 한 사람이 원형 건물 감방에 갇힌 수많은 죄수들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소수가 다수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때의 다수는 감각적 친밀성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는 개인들이다. 죄수들 상호간의 관계가 차단되었다는 것은 이제 인간이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공동체가 중요했을뿐 개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근대의 규율적 권력이 개인을 창조했으며, 그것을 권력의 대상으로 삼고, 또 도구로 사용했다. 이제 개인은 각기 하나씩 모래알처럼 흩어져 권력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마치 판옵티콘의 독방에 갇혀 중앙탑의 감시를 받는 죄수들처럼 인간 상호간의 소통이 없이 어떤 보이지 않는 시선의 감시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은 정보의 대상일뿐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크게 보면 사적 개인들과 국가의 관계이며, 좁은 의미에서는 직장이나 학교, 군대등 모든 공공기관에서의 권력관계이다. 현대인은 관중석에도, 무대 위에도 있지 않고, 오로지 판옵티콘의 기계 장치 속에 들어 있다는 푸코의 말에서 우리는 차가운 시선이 번뜩이는 감시의 사회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가 흐르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을 읽을수 있다. 현대 젊은이들이 무대 위의 가수들이나 운둥장의 선수들에게 열광하는 것 역시 이와같은 사회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 Krzysztof Pruszkowski가 찍은 푸코의 사진


▶ 성가대 소년 시절


▶ 푸아티에에 있는 생-스타니슬라스 고교 2학년때의 학생기록부, 1940-1941학년도


▶ 위의 사진 뒷장에 미셸 푸코는 "에이스 중의 에이스"(일류중의 일류)로 표기되어 있음. (글을 쓴 사람은 뤼세트 라바테)


▶ 교수자격시험(agr gation)을 준비하기 위해 미셸 푸코는 가능한 모든 주제에 관해 10여개의 예상 문제를 작성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것은 "무의식"에 대해서이다.


▶ 조르쥬 되메질, 1949년


▶ 1977년의 어느 하루.(사진 Mich le Brancilhon)


▶ 스웨덴에서 자기 제규어 차 앞에 선 미셸 푸코, 1958년.


▶ 웁살라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1957년.


▶ 루이 알뛰세르, 1976년.


▶ "철학자 푸코" 심포지엄을 주재하던 1988년 1월의 조르쥬 캉길렘.


▶ 미셸 푸코가 앙리 구이에에게 보낸 편지, 1961년 5월 4일. 왼쪽 상단에는 앙리 구이에가 푸코의 박사학위 논문 발표중 써놓은 메모.


▶ 1961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광기와 비이성>.


▲ 마네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을 패러디하여 캐리커추어로 그린 <구조주의자들의 점심>. 왼쪽부터 미셸 푸코,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모리스 앙리가 그린 이 그림은 1967년 7월 1일자 캥제느 리테레르지에 실렸다.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누이 프랑신느와 함께


▶ 1983년 10월, 버클리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푸코. 학생들이 선물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미국의 유명한 푸코 연구가 폴 레비노우.


▶ 조르쥬 뒤메질이 1984년 6월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쓴 푸코 조사(弔辭).


▲ 아버지, 누이와 함께 스키장에서


▲ 1944년 푸아티에의 고등사범준비반(Hypokh gne) 시절. 제일 위쪽에 서있는 사람이 미셸 푸코


▲ 생-스타니슬라스 고교 3학년때의 학생기록부, 1942-1943학년도.


▲ 푸아티에 앙리 4세 고교 초등부 6학년 시절.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미셸 푸코, 1935-1936학년도


▲ 1966년 <말과 사물>이 나온 직후의 푸코.


▲ 1972년 2월, 피에르 오베르네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푸코의 옆에 있는 사람(사진의 오른쪽 제일 아래)이 장 주네이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사르트르의 모습이 보인다.


▲ 1972년 1월 18일, 미셸 푸코는 알렝 조베르, 클로드 모리악, 장-폴 사르트르, 미셀 비앙, 질 들뢰즈, 다니엘 드페르 등과 함께 방돔 광장에 있는 법무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사진 한 중간의 약간 후면 왼쪽이 푸코, 그의 옆이 사르트르).


▲ 1981년 12월 22일,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폴랜드 국민을 지지하는 집회.푸코의 옆에 있는 여자가 배우 시몬느 시뇨레.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 1983년 자기 집 발코니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 보며.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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