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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세미나 - 프로로 산다는 것 -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
  2. 북세미나 - 질문 리더십 - 단순한 질문이 혁신의 시작
  3. MBC 심야 스페셜 - 미래생존조건, 창의력을 말하다
  4. 파워인터뷰 - 씩씩 바이러스, 세계를 침투하다! - 바람의 딸, 한비야 편
  5. 이성호, 이영춘 부자(父子)의 대(代)를 이은 ‘도라지 타령’
  6. 매실 박사 홍쌍리의 희망제작소
  7. 발명왕 변무원, 기술개발만이 살 길이다

북세미나 - 프로로 산다는 것 -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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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산다는것... 그의 프로정신을 배우고 싶어서 갔지만, 그의 삶보다는 경제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왔다.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할때는 어눌하던 그가 경제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전문가로 변하는 모습이 정말 프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내 분야에서 진정한 프로로 살도록 하자!

<강의 내용>
서서히 끝까지 가보자.
통계(과학)+통찰력,경험(예술)+습관
자기역활에 최선을 다하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것이 진정한 프로
너무 빨리 가려다가 늦어질수도 있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말라.
리서치센터(RC) A-기업분석, E-거시경제, S-고객상담,권유
기자들의 분선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긍정적인면만 보거나 부정적인면만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 유의하라.
6시에 출근, 농부형 인간, 출근직후에 국제시세,정세를 분석, 회의
영국파이넨셜 time, 영국 이코노미스트(주간지)를 보라.
기관투자자들에서 매일 분석자료를 설명해주고 주문을 받는다. 150억을 주문받으면 수수료가 1500만원
헬렌켈러처럼 내일 장님이 될것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라.
아침시간의 소중함.. 아침에 2시간정도 빡세게 일한다면 하루일을 거의 다 할수 있다.
실력이 있어야 나이가 들어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직장이나 집이나 인생이나...
건강을 위해서 등산, 마라톤등을 하고 최근에는 대인관계때문에 골프를 배운다.
마라톤을 할때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나를 도와주었듣이 나도 산들바람처럼 살고 싶다.

데이터 하나하나에 웃고 울지말고 전체를 보라.. 현재의 경기전망은 괜찮은 편이다.
70-90년대의 8%의 성장률이 imf이후에 4%대로 떨어졌다. 잠재능력은 4.5% 일본은 오일쇼크이후에 저성장으로... 당연히 체감경기도 떨어진다. 적응해야 한다.
저성자시대의 차별화, 양극화 될것이다. 경쟁력이 있으면 살아남고, 아니면 죽는다. 투자↓ 고용창출↓ 실업률↑(3.5->5) 청년실업은 8-9%... 살아남는 기업은 잘될것이다. 건설업도 어렵고, 지방업체는 도산하지만 GS같은곳은 이익↑
계속 이런 양극화가 계속된다면 마르크스의 말따라 사회주의로??
미국이 4만$의 gnp라고 하지만 서민들의 실제생활은 74년수준이라고..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해야하고, 맞벌이가 늘어난다.
국민연금은 90%를 채권에 투자해서 7.6%의 수익, 8%를 주식에 넣어서 12.1%의 수익을...
경기가 하락세일 경우-주식을 팔고 채권을 사라. 이때에도 주식을 빌려서 파는 방법이나 선물등은 돈을 벌수있다. 단 선물은 위험한 제로섬게임이다.
경기가 상승세일 경우-채권을 팔고 주식을 사라. 대략 현시점.
경기가 최고점일때 - 물가불안->정부규제->가급적 현금으로 보유하라(대락 2-3개월정도)
경기가 안좋다고 말한다면 주식을 살 준비를 하라. 개미들은 반대로 하기때문에 돈을 잃는다.
주가는 똑똑하다. 주가가 ↑ 좋은일이 있지만, ↓ 나쁜일이 생긴다.(경기침체,유가상승, 북한사태 등을 예고)
금리↓ 집값↑ 단 지역적으로 차별적으로... 왜 그런지 알아라!
부동산은 베이비붐세대때문에 한차례오르막길을 걸었고, 최근에는 저금리때문에 올랐다. 부동산은 앞으로도 오를듣하지만 리스크가 높다. 그리고 버블이 심하다.
주택보급률 서울 89% 경기 97 전국 102 110까지 가면 버블이 사라질것이다. 대략 2010년경...
주가예측↓ 실제↑ 에널리스트는 퇴출된다. ↑↑ 칭찬, ↓↓ 그래도 욕...

희망, 열정, 끊임없는 노력...
담배도 안피움... 아버지는 술과 담배에 쩔어서 살았다고...-_-;;
말만하지마고 근거, 데이터를 대라.
앞으로는 대기업위주로 그것도 세계의 대기업위주로 움직이는 사회

2달인세 410만원 전액기부.. 좀 물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
15억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서 그냥 1억정도의 연봉으로 지낸다고... 그놈의 정때문에...


‘한국 증시를 움직이는 파워맨 10인’에 애널리스트로서는 유일하게 김영익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이 선정됐다. 3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빼면 증권맨으로서 이례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6위)이 그 앞을 장식했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8위)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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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분기 증시 급락을 적중시킨 김영익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의 자서전 ‘프로로 산다는 것’(사진)이 출간됐다. 2005년 4월 종합주가지수가 1000에서 920대로 뚝 떨어질 때 급등을 예견했고, 올해 2분기에는 ‘장밋빛 전망’을 깨고 급락을 전망했다. ‘낙관론자’나 ‘비관론자’라는 평가가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프로 애널리스트의 삶을 기술했다.

검정고시를 거친 지방대(전남대) 출신이 증권분석가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 비결로 그는 스스로 ‘노력’을 꼽았다.(p.108) 오전 6시에 출근하고 파이낸셜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를 정독하는 성실성이 최고의 무기라고 한다.

이 책에선 국내 신문들이 적잖이 거론된다. 그의 분석이 실린 경제신문과 종합일간지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영국 신문으로 공부한다는 그에게 국내 신문은 플레이그라운드인 모양이다.

'나를 키운 책'으로 묶인 11권도 눈길을 끈다. 경제 전문서적보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 문학서적이 주를 이룬다. 시집을 소개하더라도 철저히 '애널리스트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게 흥미롭다.

프로로 산다는 것/김영익 지음/스마트 비즈니스 펴냄/292쪽/1만2000원

교복을 입고 싶었다
때는 1970년대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주가를 분석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는, 그 시절 교복을 입어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던 얼굴 새까만 시골 촌 소년이었다.
돈이 없어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소년은, 또래 중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초라한 행색이 창피해 풀숲에 숨곤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그는 혹독한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만 시골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의 기회를 얻은 소년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한다. 비록 밥상을 책상 삼아 차디 찬 마룻바닥에서 하는 공부였지만, 배움의 열망이 그 모든 악조건을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했다.
거인을 꿈꾸다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정말 어렵게 모은 돈으로 지방대 경제학과에 입학금을 내던 그날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 중학교도 못 갔던 형편에서 야학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보고, 농고에서 비료를 다루면서도 독학을 해 대학 입시에 도전했던 그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를 그토록 충동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겪은 가난은 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내세울 만한 남다른 불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에서 자라난 지금의 젊은 세대와 달리, 그때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나보다 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다. 막연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바람 이상의 무엇, 그의 내면에는 이미 거인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하되,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마지막 지점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 그것은 증권분석가로서 현재 그의 모습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한결같은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프로란 무엇인가?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다. 그후 3월에는 잠시 1,300까지 하락했으나, 4월 들어 다시 1,400선을 넘어서고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갔다.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이번에는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경고를 계속했다.
신문들은 “1,200까지 내릴 것–최근의 주가 상승은 해외 호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견해를 실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그는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전화벨 소리가 두려울 정도였다. 회사 내에서도 영업하기 어렵다고 비난이 쏟아졌다. 주식투자자들은 주가가 떨어진다고 전망하면 싫어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석을 믿었다. 아무리 다시 분석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분석대로 주가는 5월 12일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1,46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6월 8일에는 1,220선까지 떨어졌다. 그가 다소 앞서 가기는 했으나, 그의 주가 전망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내 스스로 내놓은 결과물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확신`의 신념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좋은 환경이나 머리를 갖지 못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이력을 가지지 못한 그를 프로로 만든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굳건한 자기확신 때문이었다.
프로로 산다는 것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얼핏 `희망`만이 보이나, 사실 그들의 그림자에는 절망이 반이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때문에 그 절망의 그림자를 밟고 일어서야 비로소 성공이라 부를 수 있다. 돈, 머리, 학벌, 이런 것들이 성공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공의 요소일 뿐이다.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한 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가 된 사람이 있다.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 김영익, 우리는 그를 진정한 `프로`라 부른다. 프로는 환경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을 탓할 뿐이다.
좋은 환경을 가지지 못했다면, 좋은 희망을 가지면 된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작은 희망보다, 더 큰 프로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진정한 거인을 꿈꾸자!

전라남도의 깡촌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배웠다. “의자도 없어서 마룻바닥에 엎드려 배웠다”고 했다. 농고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했다. 전남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때가 스물두 살, 서강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한 때가 스물아홉 살, 그리고 대신경제연구소에 입사한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그의 출근 시간은 새벽 6시다. 술 마시고 새벽 2시에 들어가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소위 `아침형 인간(그의 표현에 따르면 농부형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는 또한 증권회사 재직 중에 서강대학교에서 박사과정(야간대학원이 아닌 정식과정)을 졸업했다. 스카이(SKY, 서울대․연대․고대를 말함) 출신이 대부분인 증권가에서 몇 안 되는 `지방대 출신`으로서 차별을 느꼈지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했다.
지난 2000년의 주가 급락,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그후의 반등, 2004년 5월의 주가 하락과 2005년 주가 상승 등을 줄줄이 맞히면서 그는 여의도의 족집게 스트래티지스트(strategist, 증권사 연구원 중 개별 기업이 아니라 주식 시장 전체의 흐름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사람)로 떠올랐다.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계속해서 경고했다.
그는 언론사에서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최근 5년 동안 연속해서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증권인상과 베스트 이코노미스트 부문, 스트래티지스트 부문에서 모두 1, 2위를 차지하는 프로 중의 프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2005년 투자전략실장에서 리서치센터장으로 승진했다. 동기들 중 가장 빠른 임원 승진이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예순 살이 넘어도 계속 공부를 하고 직접 자료를 쓰는 스티븐 로치(모건 스탠리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처럼 되는 것이 그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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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세미나 - 질문 리더십 - 단순한 질문이 혁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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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라는 단어와 한근태라는 사람이 끌려서 참석한 세미나... 대우출신이기도 하고, 많은 칼럼들을 보고, 간혹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한번 기회가 되면 봐야지 하고 참석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책도 아니고, 번역자도 아닌 입장이고, 준비도 그다지 잘해오진 않은듯했다. 처음에는 화려하면서 재미있는 언변으로 잘 이끌더니만 막판에는 거의 짜집기와 끼워넣기로 마무리...
좋은 책을 소개받았고, 좋은 내용을 들었지만, 인간 한근태라는 사람에게는 좀 실망을 느낀 세미나였다. 집에 와서 바로 책 주문... 빨랑 보고잡다.

<강의내용>
질문보다 지시와 통제에 익순한 우리들.. 고수는 신뢰형성을 한후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관념적으로 ~해라, ~하지말라 라는 책들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액션으로 이어지기가 쉽지않다.
질문에 따라 답변이 다르다. 아이에게 질문을 한다면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있었니? 오늘 뭐했니? 오늘 즐거운 일은 뭐가 있었니? 등등 질문에 따라서 답변은 단답식이거나 주관식으로 돌아온다.
이병철의 질문-말해봐라... 그래서... 어쩔껀데....
보통 사람들은 생각은 오만가지이지만 Output은 거의 없다.. 비효율적이고 잘못된 생각프로세서이다.

1. (나는) 왜 질문을 하지 않을까? - 몰라서, 본전이 들통날까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까봐
성공한 사람들은 궁금한것은 못참는다... 관심과 겸손의 모습이다.
질(質)->도끼 두개로 내려치면 돈이 생긴다...

2. 질문을 하면 좋은 점 - 생각이 시작이고, 생각이 정리된다.
질문은 최고의 동기부여 수단이다. 사장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지금 우리회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라고 묻는다면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

제지회사의 일례... 사장이 과장에게
자네 수준은 어느정도라고 생각하는가?
글로벌 인재가 100점이라면 당신은 몇점정도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내년에는 자네가 몇점 정도가 될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그 정도의 점수가 되려면 자네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기선언거, 개인 사명 선언서등을 작성해서 액션으로...

지시는 손과 발만 움직이면 되지만, 질문은 생각을 하게 만든후에 손발이 움직이므로, 머리와 몸을 동시에 쓰게 한다.

3. 구경꾼을 참여자로 만든다.
NCAA 감독 - 하프타임에 지시하거나 질타하지 않고, 선수끼리 복습하도록 한다.

4. 문제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수 있다.
-완벽하게 파헤쳐진 문제는 이미 반은 해결된것과 마찬가지 이다.

* 질문을 잘하기 위한 방법
1. 사전준비(rapport) 분위기 조성, 말문열기, 신뢰가 형성 -> 자신만의 팁, 노하우를 만들어라(고향, 연줄,끈)
부모님이 나에게 하는 사업이나 연애같은 질문은 가만히 들어보면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제대로 답변이 나오게 유도하지 않는다.

2. 알고자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질문은 목적을 정확하게, 솔직하게 하라. 질문아닌 질문.. 이중적인 가면이다.

3. 개방형질문은 주관식의 답변을 듣고, 폐쇄형 질문은 예/아니오를 들을뿐이다.
질문과 경청은 쌍으로 존재해야 한다. - 청((聽) 왕의 귀와 눈을 가지고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라.

4. 후속(사후)조치가 있어야 한다.

명언
*불치하문(不恥下問) - 물어보는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구하는것이 없으면, 찾을수 있는것도 없다.
* 괴짜들은 사회적 통념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답은 늘 적절한 질문이 가능했을 때 찾을 수 있다.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절대 하늘을 날 수 없다. 이밖에도 이들은 진보와 혁명을 믿고,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다.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창조적인 반대자가
되기도 한다. - 구본형 오늘눈부신하루를위하여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날수 있을까?라고 질문해보라.
*TG 전창진감독은 상대방감독에게도 우리팀의 장단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질문은 완전히 나를 바꾸어 놓았다 - 호프만
*질문은 우리를 눈뜨게 한다.
*진정한 천재는 답보다는 제대로 된 질문을 구하는 사람이다. 뉴튼이 떨어지는 사과를 만유인력에 대한 의문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호기심의 뿌리가 되는 것이 질문이다
좋은 질문은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그리고 흥미는 의식을 자극하고,의식을 눈뜨게 한다
의식으로 눈뜨게 된 흥미는 관심을 유발하고,관심을 갖게 되면 에너지가 집중된다
집중된 에너지는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다
집중력은 삶의 기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된다
집중을 통해 우리는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통달하게 된다
지성을 개발함으로 항상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넉넉해지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조직은 카리스마 리더가 아니라 질문하는 리더를 원한다
최근 리더십의 화두는 질문과 코칭이다. 이제 리더는 물고기를 잡아줘선 안 된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21세기를 헤쳐 나갈 리더라면 직원이 `물고기를 잡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액션 러닝`의 대가인 마쿼트는 이 책에서 직원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바로 질문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리더와 평범한 관리자의 차이는 바로 `질문`에 있다. 과거에는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가장 훌륭한 리더였지만 이제 성공의 핵심은 질문이다. 과거의 리더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면 내일의 리더는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성공의 비결은 “질문하는 능력”
20세기 미국을 경악시켰던 3가지 사건인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챌린저 호 폭발, 피그만 침공 실패에는 충격적인 공통점이 있다. 관계자 중에 사건이 일어날 위험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일까? 피그만 침공이 실패하고 나서 슐레진저 대통령 보좌관이 한 말에서 원인을 찾아보자. “몇 가지 소심한 질문을 하지 못한 이유는 서로 질문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실책을 거울삼아 케네디 대통령은 이후 각료 간의 질문을 적극 장려했다.
질문을 던지면 우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을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대를 신뢰한다는 표현이므로 질문을 받는 조직원 개개인이 책임감을 나누게 된다. 자연히 분열은 줄어들고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팀워크는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일터에는 열정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넘치고 비즈니스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성공할 수 있다. 적자 기업이었던 몰트아메리카스를 4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킨 더그 이든 회장은 성공의 비결을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질문하는 리더가 되기 위한 실용적인 지침서
세계적인 리더인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를 비롯하여 채드 홀리데이 듀폰 회장 등 `질문하는 리더` 22명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CEO와 조직심리학자, 컨설턴트의 경험을 담았다. 질문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 `기초편`과 `고급편`으로 나눠 기초적인 질문법부터 상황에 따라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회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부하를 두고 싶다면 2부 2장 `질문을 잘하면 일당백도 얻는다`를, 손발이 척척 맞는 효율성 높은 팀을 키우고 싶다면 3부 2장 `최강팀을 만드는 질문`을, 언제나 쓸모 있는 결론을 내는 회의를 하고 싶다면 2부 3장 `어떻게 하면 질문을 잘할 수 있을까?`를, 인사고과와 신입사원 면담을 즐겁게 하고 싶다면 3부 1장 `직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리더`를 보면 유용한 지침을 얻게 된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저서『잠들기 전 10분이 나의 내일을 결정한다』, 『40대에 다시 쓰는 내 인생의 이력서』,
『한국인 성공의 조건』등
역서로는 『We 프로젝트』, 『콜린 파월 리더십』, 『경영에 관한 재치있는 말들』,
『GE 인재양성 프로그램』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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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심야 스페셜 - 미래생존조건, 창의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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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의 중요성을 보여준 다큐... 막판에는 언제나 그렇듣이 김영세씨도 나온다.
창의력은 훈련되어서 키울수 있는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과 사색, 휴식등이 필요하다는것을 새삼 느껴본다.

'미래생존조건,창의력을 말하다'. 창의력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을 찾아 창의력은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해 본다. 또한 창의력을 요구하는 기업의 문화 등 변화하고 있는 사회 모습과 세계 시장의 현실을 짚어본다.

미래생존조건, 창의력을 말하다
“지식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도 상상력의 세계에선 풀릴 수 있다.”
                                                               - 키에르 케고르 

지식폭발의 시대, 신기술의 홍수시대.
과거 우리는 내일의 변화를 예상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바뀌는 세상,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 했
다.
이런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스티븐 존슨의 좋은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TED 강연 동영상(한글 자막, Steven Johnson: Where good ideas com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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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 씩씩 바이러스, 세계를 침투하다! - 바람의 딸, 한비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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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인터뷰내용을 보면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뻔한 대답에... 뻔한 내용이다...
하지만 들을때마다 불끈불끈 힘이 솟고, 열정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책중에서 4권을 읽고, 강연장에서도 한번보고, 나오는 방송은 되는되로 보다보니.. 어느새 잘 아는 친숙한 사이처럼 느껴진다...
이 방송을 보면서도 그런 느낌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패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거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에 나온 내용에 기타적인 내용이 좀 포함되었다.
거기에다가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이 비수를 찌른다. 테레사수녀도 자신이 좋고, 행복해서 한 일이고.. 자신도 그런것뿐이라고....
가족때문에.. 와이프때문에.. 애때문에... 난 하고 싶은것을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고... 평생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어찌보면 그것도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자...
평생을 돈벌이만 하면서 살아가면서도, 풍족하게 살아가지도 못한다는것이 억울하지 않은가?
자! 세상에 나가자! 그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씩씩 바이러스, 세계를 침투하다!
-바람의 딸, 한비야 편-

 


■ 방송 일시 : 2006년 9월 16일 토요일 밤 11시 20분, KBS 1TV

■ 담     당 : 이영준 PD  
■ 작     가 : 최우진 / 서미정

기획 의도

 

나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한계와 틀 안에서만 살수가 없다
안전하고 먹이도 거저 주고 사람들이 가끔씩 쳐다보며
예쁘다고 하는 새장 속의 삶,
경계선이 분명한 지도 안에서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새장 밖으로 지도 밖으로 나갈 것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中에서 -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의 딸’, 한비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해답을 찾아 배낭을 꾸렸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녀가 풀어놓은 보따리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선택한 오지여행. 한비야는 한반도와 주변국에 묶여있던
우리의 좁은 시야를 열어주었다. 몇 해전 국제구호활동가로 또 다른 변신을 한
그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이 해야할 책임을 몸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다른 민족을 구하기 위해 재난현장에 뛰어든 그녀의 활약상은
한국인의 영역이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증명해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닮고 싶은 ‘사회적 역할모델’의 이미지로 ‘한비야’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세계화를 외치는 지금,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형태의
성공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있는 바람의 딸, ‘한비야’ 를 본격 파워인터뷰한다.

 

방송 내용


1. 그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 100만부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20만부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 50만부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 - 50만부
한비야가 10년 째 베스트셀러 작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발로 확인하고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10년 째 서점가에는 한비야 바람이 거세다.
출판계에선 경이로운 판매력에 ‘한비야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고 말한다.


한비야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7년 간 오지여행을 기록한 책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피가 향하는 대로 세계를 다녔다는
한비야만의 여행루트는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한비야의 열정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여정을 짜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베이스캠프로 오대양 육대주,
지구 만방을 인생의 무대로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자의 마음 속에 세계지도를 새기는 그녀만의 비법이 공개된다.


2. 인생에 지각이란 없다 - 한비야의 뒤늦은 출발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 5년 차 다방 DJ는 ‘25살의 새내기 대학생이 됐다!
세계적인 홍보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커리어우먼이
35살에 스스로 퇴직했다!
자유여행가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생의 정점을 달리던 42살,
전쟁과 기아의 현장에 짐을 풀었다!


인생이란 이력서에는 정답이 없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인생의 가장 빠른 순간이다!


한비야의 삶은 독특하다. 묘한 기대와 열등감을 준다. 상식적인 선택을 벗어난 삶,
그녀의 인생에선 가지 못할 곳도 하지 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시간과 공간마저 마음대로 선택하고 디자인하는 경계 없는 삶,
그녀의 제약하는 힘은 중력뿐인 걸까?!

그녀가 세상을 무대로 감행한 ‘반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3. 48시간 대기조가 되다 - 대한민국 1호 국제구호활동가

5년 간은 숨가빴다!
첫 파견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어리둥절했고 주눅도 들었다
이라크에서는 드디어 초보 딱지를 떼고 작지만 요원으로서 내 영역도 생겼다
네팔에서는 그동안 배운 것들을 현지인에게 전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쓰나미 현장에서는 구호 정책을 세우는 데 일조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씩씩 바이러스 한비야가 아프다.
특유의 활달함과 건강함으로 지구촌을 즐겁게 해주던 그녀의 얼굴과 손에
마비증세가 왔다. 각 국에서 안부를 묻는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6년 전 시작한 국제구호활동가의 일, 지금 그녀는 그 일에 혼이 빠져있다.
구호연락을 받으면 세계 어디든 48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다. 근무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지만 출동명령을 받고 짐을 꾸리며 한비야는 생각한다.
세상에 태어나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전쟁, 질병, 기아 현장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쓰겠다는
한비야의 행복론이 펼쳐진다.
 


4. 바람(wind)에서 바람(hope)으로

"쉬고 싶을 때요? 없어요, 맨 날 바빠요"
뭐 하나를 해도 설치면서 해야 직성이 풀려요 나는 내가 설칠 때가 제일 좋아요
바람의 딸 한비야, 그녀가 설치면 희망의 바람이 분다!


집 밖을 나서면 한비야는 부자가 된다.
그녀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구호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비야가 자유여행가에서 구호전문가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여행이나 즐기던 사람이 구호를 할 수 있겠어..”,
“뭐 오지랖 넓게 남의 나라까지 돕는다고..” , “얼마나 가는지 보자..”
그리고 6년이 흘렀다. 한비야를 발견한 아이들이 뛰어와 동전을 내밀고
지하철에서 만난 여대생은 생일을 자축할 요량으로 모은 6만원을 메모와 함께 건넨다.

한비야는 분명 세상을 바꿔 놓았다.
바람(hope)을 일으키는 한비야가 꿈꾸는 세상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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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이영춘 부자(父子)의 대(代)를 이은 ‘도라지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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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미쳤다고 볼수도 있는 주인공... 3년이면 뿌리가 썩어서 죽어가는 도라지를 키워서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되는 실패로 빚만 엄청나게 늘어가고, 가족을 돌보기는 커녕.. 아들에게 손을 벌리고, 심지어는 아들의 결혼식 축의금을 가지고 사업에 재투자를 하는 등 어찌보면 기행을 해온 주인공...
결국에는 우연하게 썩은 뿌리를 짜르고 다시 심으면 된다는것을 알아내고, 거기에다가 사업포기직전에 21년산부터 약효를 발휘한다는것을 알아내고, 홍보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방만한 경영에 회사가 어려워지자, 삼성에 다니던 아들이 경영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기업경영으로 지금까지 오고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미친듯이 살아온 주인공... 현재도 돈을 벌기보다는 인류에게 뭔가를 공헌하고 싶다는 부자의 도라지 타령...
정말 꿈을 향해서 미친듯이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정말 이런사람이라는것을 느끼게된 방송이였다.
그래 나도 미친듯이 꿈을 향해서 함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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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 박사 홍쌍리의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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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가 세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도 못받고 살다가, 먼곳으로 시집을 보내진 그녀... 도망갈 궁리만 하다가 매실에 끌려서 남게되고... 잘나가는 밤농사가 광산사업으로 파산한후에 매실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그녀...
이미 폐인이 된 남편과 아버지를 뒤로한채 사업에 전념하는 그녀...
아들을 데리고, 피나는 고생을 하고, 미국으로 가서 안가본 골목이 없다고 말할정도로 발로 뛰고, 정성이 담긴 제품을 만들어서 현재 연간 세금만 2-3억을 내고 있다는 그녀...
처음에는 낮설었는데.. 보다보니 예전에 성공시대에 나온 사람임을 알았다.
연구개발분야에서는 좀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은듯하지만... 사업에 대한 집념과 영업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발로 뛰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의 고생담... 그리고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그래.. 나도 그녀처럼.. 아니 그녀를 능가하게 노력을 하자.. 그러면 될것이다. 또 안되면 어쩔꺼야.. 다시 일어나면 되지..
파이팅이다! 다시 시작하자!

홍쌍리의 매실해독 건강법
국내도서
저자 : 홍쌍리
출판 : 디자인하우스 2004.01.20
상세보기




▒  매실과 한평생을 살아온 그녀

 매실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식품제조업체로 지정받은 <청매실농원>회장 홍쌍리. 매실 하나로 새농민상, 국무총리상, 석탑훈장,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97년에는 식품 명인 1호로 선정되었고 신지식인으로까지 뽑힌 여인이다. 매실의 효능이 알려지기 전부터 20년이 넘게 매실을 식생활과 연관시키기 위한 연구에 매달렸던 홍쌍리 회장.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녀의 연구가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매실식품이 되어 세상에 나가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매실의 나라 일본에서도 그녀의 매실식품을 수입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아낙 홍쌍리가 매실의 명인이 되기까지 ... 굵은 손 마디마디마다 숨겨져 있는 그녀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  매실, 내사랑!

 도시처녀 홍쌍리는 45만평의 밤농사를 짓던 시골만석군집 큰며느리로 시집온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속에 눈물로만 지새던 그녀는 도망갈 궁리만을 한다. 그럴 때 그녀를 집에 붙들어둔 것은 다름아닌 매실이었다. 봄이면 제일먼저 꽃망울을 띄우고 여름이면 한아름 열매를 쏟아내는 매화나무밑에서 시름을 달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매실이 손의 더러운 때와 개밥그릇의 찌든 기름기까지 깨끗하게 빼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식중독에 걸린 자신이 매실고(엑기스)를 먹고 낫자 점점 매실에 빠져든다. 그래서 그녀는 밤나무를 베어버리고 매실나무를 심는다. 돈이 되는 밤나무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매화나무를 심자 시아버지의 호통은 계속되지만 홍쌍리의 매화나무에 대한 고집은 꺾지 못했고 지금의 매실농원을 이룰 수 있었다.

 ▒  열중하라

 매실은 그 맛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없어서 다만 한방에 쓰이던 약용과실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쌍리는 매실을 밥상에 올리겠다는 욕심을 낸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 전혀 안 맞는 매실을 식품으로 가공하는 것은 기존에 알려진 방법도 없었고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시도한 첫번째는 매실을 6쪽을 내어 설탕에 저리는 일. 저려져서도 사각사각하면서 그 맛과 향이 더해지는 설탕의 적당량을 찾기위해 낮도, 밤도, 새벽도 없었다. 오직 매실연구 하나에만 몰두하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쓸데 없는 짓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매실에 미친 수십년의 세월 끝에 이제는 매실을 이용한 엑기스, 차, 절임, 장아찌, 정과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매실식품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  내 음식은 작품이다

 그녀의 매실음식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후한 인심덕이었다.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줬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팔라고 손님들의 성화가 일고 쌍리역시 이왕이면 정식식품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허가가 잘 나지 않자 직접 군수를 찾아가는 당찬 기세로 제조식품 허가는 물론 전통식품지정의 기쁨까지 누리게 된다. 빚을 내어 공장을 세우면서도 매실식품을 사람들이 알아줄까 하는 걱정에 쓰러지기도 몇 번. 하지만 그녀의 매실식품은 입소문을 통해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유기농, 항아리에 저장하는 방법으로 전통의 맥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는그녀는 국가지정 명인 1호가 된 영광과 함께 매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출처: MBC 성공시대 99/7/11


매화밭을 가꾸어오는 동안,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 부르기 시작한 이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녀에게는 한이 맺힌 노래다.

"아버지 바지가랭이 움켜잡고 아버지, 대 잘 이을께요. 아버지, 명예 손상 안시킬께요. 제발 저 하는 대로 봐주십시오. 그래도 안 된다 이거야. 일꾼들 굶겨죽일 일 있냐면서... 그래서 내 술집요부만 요부가 생각하면서, 아버지 머리 감겨 드리고, 여름에는 등물 받아 드리고, 손톱 발톱 깎아드리고, 저녁에 팔다리 주물러 드리면서 이 노래를 불러 드렸어요."

그래서 꼬박 6년이 지났다.
보리가 살랑살랑 불어대는 저 언덕위에 아버지 묵으시던 거처가 있었다.
그 위에서 매화꽃밭을 내려다보면서 시아버지 말씀하셨단다.
"야야, 내 신선이 된 기분이네. 왜 내가 니를 그렇게 말렸을까.
너는 그런 머리가 어디서 나서 그런 의견을 냈노."

그러다 남편이 광산에 손을 대 3년 만에 파산하고 좋은 산은 모두 팔아 빚 갚고, 나머지 악산만 남기에 이르렀다.
악산은 그나마 팔리질 않았다.
그때가 71~ 73년 때다.
그때 여사의 일기장을 보면 1700만원이라는 빚이었는데 논 4마지기에 35만원 할 때였다. 그때가 가장 막막하고 힘든 시기였다.

" 그래도 그때는 내 혼자 안된 것, 과부소리 안 듣는 게 너무 좋은 거야. 왜냐면 빚쟁이들이 몰려와 우리 남편 맨날 술 마시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만
있는데, 그야말로 화병이 걸린 거지. 그래, 산소 호흡기로 사는 거야. 숨도 못 쉬고. 영감은 이쪽에 눕고 나는 저쪽에 누워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때 내가 정신을 차린 거지."

새벽 5시에 후레쉬 집어 들고 일꾼들한테 가서 그랬다.
"아재, 우리 일좀 해주이소" 그러면 " 여자가 새벽 부터 재수 없구다" 그랬다.
몇 달 전만해도 수야엄마 일 잘 해주던 사람들이 말이다.
그래서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군복 바지 두 벌 사서 입고 머리 짧게 깎고 모자 쓰고 산으로 일하러 갔다.
일꾼들 앞에서 수야 엄마는 그들을 앉혀놓고 패션쇼를 했다.

"아재들, 내 모습 어때요?"
그러면 " 꼭 상이군인 같다" 그랬다.
그러면 홍쌍리는 "오늘부터 나를 남자로 봐주십시오. 재수 없다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이 일을 안 하면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수야엄마, 그렇게 속을 털어놓자 드디어 일꾼들이 이해를 해주기 시작했다.

몸이 아플 때 목발을 짚어가면서도 꼭 일꾼들 앞장을 서서 이것저것 참견하고, 일을 마무리 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산엘 오르고, 그렇게 일을 했다.
속으로 5년만 기다려라. 내가 5년 뒤면 빚을 다 갚는다면서 말이다.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웃기라도 하면 동네 사람들은 그 많은 빚을 지고도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웃다가도 마을 사람 만나면 입을 막고 그랬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열매 열리는 25일을 위해 1년을 기다려 그 기간동안 매실실습을 한다.
그때는 설탕도 귀해 소금으로만 연구했다. 촌에 무슨 설탕이 있었으리라.

계속 실패의 연속이었다.
시어른이나 남편은 금이 나오나, 은이 나오나 하면서 쌓아놓은 열매를 갔다 버리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말리며 '울어매' 찾으며 울고불고 그랬다.
"이듬해가 되면 안해야 될 것인데 자꾸 하고 싶은 거야."
그것을 28년동안 했다.

개발한 식품은 주변사람들에게 "배아프면 이거 먹어봐라, 술 먹고 나면 참 좋다, 육식 먹을 때 이것 먹어봐라"하면서 개발하고 주변사람들 나눠주며, 퍼주는 것으로 보람을 샀다.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시집오니 우리집이 인간종착역이 돼있는 거야" 오갈 때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다 감싸 안았던 시아버지. 그래서 죽은 사람 제사 지내주고, 부모 없는 사람 호적에 올려 결혼시켜주고 결혼하고 나서 혼자된 사람 거들고… 지금까지도 그녀는 그렇게 인간울타리가 되어 퍼주는 사랑을 시아버지 따라 베풀고 있었다.

" 내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 사시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거야. 그렇게 나눠 먹은 것이 오늘의 내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도 며느리한테 그런다. 이 세상 다 안을 수 있는 인간울타리가 되라고.

그러다 좋은 군수를 만나 매실을 전통식품으로 인정받기에 이르고 공장도 세워 상품화에도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남들 퍼주기만 하지 말고 상품화 시켜 상표를 달고 판매해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젤 처음에는 독에 담기만 해놓고 어떻게 파는지 몰라 누가 사러 오면 우리 영감님이 오토바이 타고 하동에 쫓아가 꿀병 하나 사와가 주는 대로 받았어요. 무조건 한병씩 퍼주고 그랬어요. "


벚꽃축제, 함평나비축제 등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을 보고 홍쌍리 여사는 생각했다. "매화가 이렇게 이쁘게 피었는데,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사람을 오도록 만들자" 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곳에 와서 매화를 눈으로, 입으로 즐기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매화밭을 찾도록 매실밭을 꾸준히 일궈나갔다. 그 결과 1년에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매화꽃을 보기위해 찾아왔다. 한창 꽃이 피는 3월~4월까지 많은 사람들이 매화축제를 다녀갔다.

올해는 섬진강기차여행 코스도 만들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지금도 달이 밝고 잠이 오지 않으면 홍쌍리 여사는 뜰에 나가 2천 200개의 항아리 사이를 걸으며 혼자 중얼거린다. "너희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노. 난 이렇게 너희들이 좋은데 내 안보고 싶더냐" 하면서 말이다.

일본의 매실농원을 가서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발톱이 5개가 빠질 정도로 골짜기 골짜기를 다니기도 했다. 그녀가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한 가지에 한 번 미쳐봐라" 한가지에 미쳐서 살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매실꽃 만큼이나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홍쌍리 매실아지매의 인생역정.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이뤄놓고 보니 아쉬운 것이 있다.

홍쌍리 여사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청매실농원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광명소로 만들고 싶다는 홍쌍리 여사. 농촌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제 2의 고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소원이라는 매실아지매는 오늘도 수야엄마 만의 매화꽃 노래를 흥얼거리며 매화꽃길 사이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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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 변무원, 기술개발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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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런 사람... 이런 회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실행에 옮겨서 제품을 만들고, 특허를 내버리는 스타일... 전략, 기획.. 이런 마인드는 뒤로 접어두고, 그저 할수 있을때 당장 실행을 해버리는 스타일.... 어찌보면 내가 가장 열심히 일을 하고, 재미있게 일을 했을때의 스타일인듯하다. 지금은 자꾸만 적어만두고,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모아둔 서류만해도 장난이 아니다...-_-;;;
거기다가 사업의 분야도 한가지가 아니라.. 그냥 생각나는 데로 이다...-_-;;
처음에는 건설자재쪽을 하다가 술에 들취하는 원액부터해서 생활의 모든것이 사업아이템인회사... 회사라기 보다는 발명가 집단이라고 할까... 참 재미있기도 하고, 본받을만한 회사와 사장인것 같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실천, 실행이라는것을 보여주었던 정말 멋진 방송이였다.
그래 나도 이제 생각만 하지말고,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 요즘들어 정말 절실하게 느끼면서...


"내게 졸업장은 극장표 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극장표는 적어도 극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줬다. 하지만, 졸업장은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가 남긴 말이다. 오늘날 '기술의 혼다'를 만든 것은 이같이 철저한 실용주의와 현장우선주의였다.

변무원 젠트로 대표의 인생도 그랬다. 그는 모든 걸 몸으로 부딪쳐 가며 익혔다. 한번 손에 잡은 일이 될 때까지 현장에서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곰삭은 세월이 쌓여 코스닥 상장기업을 일궈낼 수 있었다.

# 영업 

변 대표의 어린 시절 꿈은 2가지였다. 교사 아니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고로 가운데 손가락의 일부를 잃었습니다. 제 꿈을 모두 접어야 했죠. 일단 직장생활을 하다가 40세 이전에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대학을 가는 대신 측지기사 1급 자격증을 땄다. 그는 지적기사 1급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이 자격증 덕분에 대졸 학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건설회사 소속으로 전국 각지를 다니며 측량을 했습니다. 중동건설붐이 일던 80년대초엔 이라크로 나가기도 했지요. 해외에서 제가 정말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걸 느꼈습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귀국해서 토목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에 들어갔다. 직함은 영업부장. "전 그동안 일했던 토목분야에서 인맥이 많았습니다. 우리 제품을 설계에 반영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주일에 50여군데씩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오산이었습니다. 3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건의 실적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5개월 동안 출근했다가 나와 다방가서 비디오만 봤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엔지니어지 영업은 아니구나'라고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시간도 떼울 겸 서점에 들어갔다. "제목이 '베짱이 없으면 죽어라'라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눈에 확들어오더군요. 당시만해도 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일즈에 관련한 책을 매일 1권씩 읽었습니다. 20일동안 계속 읽다보니 용기가 용솟음쳐 오르더군요."

일단 큰 거래처 한 곳을 목표로 삼았다. "1주일에 2번씩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11시반에 그 회사 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 그냥 인사만 했습니다. 처음엔 비웃음만 사다가 열 몇번째인가 방문에 드디어 명함을 두고 가라더군요."
방문이 계속되자 그 담당자는 변 대표가 모습만 보여도 귀찮고 질려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그 회사의 자재가 모자라 입주날을 맞추지 못하게 된 사건이 생겼습니다. 입주날을 맞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날짜를 맞춰 결국 자재를 댔습니다."

그러자 그 회사의 전 건설현장에서 변 대표에게 자재를 주문했다. 회사의 매출이 폭증했다. "그 때 확실히 배웠습니다. 영업은 1%의 가능성을 보고 뛰는 겁니다."

# 발명 

영업을 뛰는 와중에도 그는 엔지니어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토목자재 가운데 여러가지 특허제품을 개발했다. 콘크리트 회사에서 이사로 재직하다 1989년 꿈꿔왔던 창업에 도전했다.

"창업해서 맨 처음 개발에 도전한 것이 플라스틱으로 콘크리트 거푸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걸고 도전했습니다. 처음엔 무게를 못 이겨 자꾸 깨졌죠. 소재와 공법을 바꿔가며 계속 도전하다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때 마침 200만호 주택건설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저희 제품은 신자제로 채택됐습니다."

회사에 날개가 돋았다. "주문이 쏟아져 물건이 달렸습니다. 시골 돼지 우리에서 조립공장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폼 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이 커져가며 번듯하고 큰 공장을 만들었습니다만, 지금은 그것도 좁습니다."

물탱크 정수장 상하수장 처리시설 등 다양한 제품군으로 확대해 나갔다. 각종 자재의 기본이 되는 판넬 기술을 보유한 덕분이었다. 항상 기술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젠트로는 현재 150여개 특허권 등 지적재산권과 환경·건설 신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신기술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현장에서 바로 해봅니다.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라도 금방 알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기술개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실험실에서 1년 걸릴 일도 저희는 1달만에 해냅니다."

# 건강음료 

변 대표는 국립금오공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제4대 발명대왕상, 발명의 날 은탑산업훈장,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 등 숱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발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수처리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을 응용해 숙취해소 음료도 만들었습니다. 고추에서 알코올분해 성분을 추출했습니다. 이미 특허도 출원했습니다. 마케팅 등 준비과정이 끝나면 시장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그의 사업관은 단순명료했다. "연구개발 프로젝트은 대개 90%가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 성공하면 그것이 3,4년후 회사의 새로운 에너지가 됩니다. 인생 한번 살아보고 삽니까? 생각이 나면 일단 바로 해보면 됩니다."



“취미요? 신제품 개발이죠”

젠트로 변무원 사장이 겹경사를 맞았다. 지난달 25일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중앙회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기업인에 선정된 데 이어 같은 날 코스닥에 상장된 주식이 상한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젠트로는 설립 16년을 맞은 건설자재 전문 기업이다. 수많은 건설자재 전문 기업 중 젠트로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매년 30% 이상씩 매출이 상승한 저력과 동종 업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젠트로의 경쟁력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변무원 사장이다. 입버릇처럼 취미가 신제품 개발이라고 말하는 그의 사무실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과 임상실험 중인 기능성 음료 케이스가 즐비하다.

“젠트로는 치열한 단가 싸움은 지양합니다. 대신 기존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신제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죠.” 건설자재 전문 기업인 젠트로는 변 사장의 말처럼 기술력에 있어서 동종 업계 최고로 인정받는다. 철판으로 만들어진 거푸집이 운반이나 설치에 어려움이 있는 것에서 착안, 이를 폴리에틸렌으로 대체한 것은 건설업계에서도 유명한 일화다. 이 밖에 정부지정 신기술 3건, 특허권 79건 등 모두 150여 건의 산업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신제품 개발에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는 이 역시 변 사장이다. 여기에 모든 직원이 가진 개발자 마인드도 신기술 보유 기업의 이미지를 더 높였다.

“사장이 신제품 개발을 강조하니 연구소 직원이 아니더라도 제품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이 우리 회사의 장점입니다. 영업사원의 경우 거래처에서 불편했던 사항들을 꼼꼼히 기재해 개발 회의에서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자고 할 정도죠.” 상장 후 줄곧 상승세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상장심사를 통과한 뒤 변 사장은 상장을 주저하기도 했다.

“주가가 적어도 6000∼7000원대로 평가되리라고 예상했는데 2200원이라니 너무 저평가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새 상장을 포기할지 말지를 고민하는데 직원들 얼굴이 하나둘 스치더군요. 낮은 가격에 상장되면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으니 직원들에게 돌아갈 이익도 커지겠다 싶었죠.” 우여곡절 끝에 상장이 결정됐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주가가 오르자 변 사장의 예상대로 직원들의 사기도 크게 진작됐다. 변 사장은 최근 신규 사업으로도 눈을 돌렸다. 숙취해소와 지방분해 음료인 젠트라A와 젠트라F를 개발하기에 이른 것. 다음 달 임상실험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유통에 나설 계획이라는 그는 젠트라A 개발 후 일부러 1주일 내내 술을 마시며 자신이 임상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열정을 가진 CEO다.

■ 1952년 출생 / 원주고 졸업/ 한양대 고위경영자 과정 수료/ 국립금오공대 명예공학박사 /남광토건 부장/신광콘크리트 이사/ 특허청 제4대 발명대왕상 수상/ 제36회 발명의 날 은탑산업훈장 수상/ 환경부장관 상하수도분야 표창수상 / 자랑스런 중소기업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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