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 기지촌 할머니, 누가 그들에게 낙인을 찍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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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에 우리나라 수출액 대비 10%-50%를 차지할 정도로 외화획득에 일조를 했던 기지촌...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그녀들... 지금의 그녀들을 되돌아보는 다큐...
다큐에서도 이야기하지만 공장에서 일이나 하지 몸판것은 네가 선택한것이 아니냐라는 편견... 하지만 정부에서 지원하고, 교육하고, 당신들은 애국자라고 장려했었다는 사실...
그녀들은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와서는 그녀들을 방치하고 버림받고 있다.
그와중에 낳은 아이들을 입양시킨 할머니들이 나오는데.. 본인이야 나름대로의 어려운 사정과 자식에 대한 자신의 처지때문에 입양을 보낼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막상 그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이 잘살려고 자신을 버린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한다...
결국에는 고국을 방문한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처했던 상황..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이유등을 알게되면서 조금씩 공감을 해가고.. 마침내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된다.. 어찌나 가슴이 뭉클해지던지...
솔직히 잠깐 보면서 그녀들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뀔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뀐것같지도 않고... 하지만 그녀들이 안갔다면 또 누군가가 갔을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사람들도 그 사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것이다. 동감하고, 적극적으로 도울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그녀들을 이해해 보려는 생각을 해보고.. 조금은 그녀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것이 알고 싶다(402회) 방영일 : 2006-10-21

기지촌 할머니, 누가 그들에게 낙인을 찍었나 (가제)

[기획의도]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부대 주변에 생겨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기지촌 그리고 우리에게 ‘양색시’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기지촌 여성들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동두천, 안정리, 의정부 등 전국 각지의 기지촌은 규모가 축소되고,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이 한국인에서 필리핀, 러시아 등 외국인 여성으로 대체되었을 뿐 여전히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기지촌에는 번성기였던 60년대부터 그곳에 들어와 지금까지도 기지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제는 늙고 병든 기지촌 할머니들이 있다.

기지촌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혀 평생을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할머니들. 그것은 과연 그녀들의 ‘개인적 선택’이 낳은 결과일 뿐인가. 과연 우리는 그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번 방송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아니 어쩌면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기지촌 여성문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시대가 낳은 비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늙고 병든 기지촌 출신 할머니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잊고 싶은 현대사의 그늘, 기지촌 할머니들

6.25 전쟁이 끝나고 미군의 주둔하면서 미군부대 주변에 생겨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여성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기지촌이 생겨났다. 전쟁으로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 전쟁고아가 되어, 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막연한 동경심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여성들은 주한 미군들에게는 안전하게 놀다 갈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주었고, 정부에는 미군들의 주머니에서 달러를 털어내는 ‘달러벌이전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늙고 병든 몸과 ‘양색시’, ‘양갈보’라는 세상의 차별과 멸시가 담긴 낙인뿐이었다.

2. 벼랑 끝의 평택 안정리 기지촌 출신 할머니들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70-80년대 대표적인 미군 기지촌이었던 이곳에 70여명의 기지촌 할머니들이 모여살고 있는 이곳에 최근 100채가 넘는 빌라들이 새로 새워졌다.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이 확정되면서 이곳으로 들어올 미군들에게 세를 내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지촌 할머니들이 살고있는 월세 10만원의 쓰러져 가는 집들이 개발되면서 기지촌 할머니들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3. 허락되지 않았던 기지촌 어머니들의 모성

30년 전 입양 보낸 아들의 소식을 듣는 것이 죽기전 마지막 소원이라는 서수자(67) 할머니. 젊은 시절, 기지촌 클럽에서 일했던 서할머니는 미군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미군은 귀국했고 출산 후 허약해진 몸으로 클럽에 나가 일하기에도 벅찼던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혼혈아, 거기다 양색시 엄마를 뒀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차별받았고 더구나 미군을 상대하면서 아이를 제대로 키울수 없었던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는 유일한 길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가는 친구에게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 뿐이었다고 한다. 그 후 친구와의 연락도 끊겨버리고 아이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 단서는 오로지 30년 전 미국으로 떠났던 친구의 이름뿐. 과연 서할머니는 그토록 그리던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4. 내 어머니는 양색시입니다 - 혼혈1세대의 뿌리찾기

어린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작년에 한국으로 들어온 혼혈인 정OO씨. 미국에서 좋은 양부모 아래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늘 나의 뿌리, 나의 어머니가 궁금했다는 정씨. 한 때는 기지촌 출신 어머니가 부끄럽고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립기만 하다는 정씨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흔적은 입양서류에 적힌 이름과 당시의 주소 뿐. 서류에 적힌 주소지로 직접 찾아간 제작진과 정씨는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5.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인즈 워드의 방한 이후 기지촌 출신 혼혈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넓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어머니였던 기지촌 츨신 여성들에 대한 인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취재를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기지촌 할머니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들의 개인적 선택을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봐 주고 조금은 헤아려 줄 수 있는 세상의 작은 관심과 이해였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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