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남한산성 오디오북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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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라디오 소설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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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맛배기입니다~

제목 : 새 작품 '남한산성' 11월 30일부터


1. 작품명 : 남한산성

2. 작가 : 김 훈

3. 방송 시작 : 2009. 11.30(월)

4. 출판사 : 학고재

5. 줄거리:

    병자호란의 와중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의 임금 인조와

    조정신료들, 그리고 성안의 백성과 민초들.

 

    '갇힌 성안에서 뒤엉키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치욕과 자존.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는 작가의 말처럼 막막한 시간과 공간.

 

     임금이 삼전도에서 투항하기까지의 슬픈 역사를 작가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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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6년 겨울, 인조의 어가행렬은 청의 진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었다. 그후 47일.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들의 기록을 담은 김훈의 신작 장편.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렇게 다시 조국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갇힌 성 안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고 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수성守城이 곧 출성出城’이라는 헌걸찬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김훈은 370년 전 조선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프레임으로 복원하였다. 갇힌 성 안의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치명적인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무섭도록 끈질긴 질감을 보여준다.

저 : 김훈 金薰 1948 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했다. 고려대 정외과 입학 및 중퇴,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줄거리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1636 년 12월 13일 조정은 청의 대군이 청천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장계를 받고 술렁인다. 9년 전 정묘호란 때처럼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야 하는가. 분분한 논란이 이어지고 인조의 어가행렬은 황망 중에 강화행궁을 향한다. 그러나 이미 청군은 가는 길을 차단했다. 인조는 얼어붙은 송파나루에서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양주 석실에서 형 김상용이 보낸 급보를 받고 남한산성으로 출발한다. 송파나루에 닿은 그는 뱃사공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강을 건너는데, 얼음길을 잘 아는 뱃사공에게 함께 남한산성에 들기를 청하나 뱃사공이 거절하고, 김상헌은 뱃사공을 죽인다. 한편 산성 안에서 대장장이 서날쇠는 아내와 쌍둥이 아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고 혼자 대장간을 지킨다.

성 안은 춥고 식량은 모자라며, 말들은 먹을 풀이 없었다. 비와 눈이 모질게 내려 얼어 죽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말들은 굶주려 죽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삼전도에 진을 치고 성 밖을 둘러싼 채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전면전은 엄두를 낼 수 없고 몇 명씩 유군을 편성, 암문을 통해 나가 소규모 국지전만 몇 차례 치르는 상황인데, 묘당에서는 항쟁을 주장하는 김상헌과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논쟁이 포화보다 뜨겁다.

속 내를 좀체 드러내지 않던 임금은 최명길을 조용히 불러 화친의 길을 열어보도록 명한다. 최명길은 청군 진영에 가서 청의 조칙을 따를 것과 세자와 척화파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라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고 온다. 마침내 칸이 당도했다는 소문이 성 안에 돌고, 묘당에서는 최명길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조정은 산성의 힘을 과장하는 격서를 만들어 성 밖의 군사들에게 돌리려 한다. 그들의 힘을 북돋우고 원군을 불러들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첩첩 적진을 돌파해 격서를 전달할 사람은 없었다. 김상헌은 서날쇠를 찾아가 그 일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서날쇠는 격서를 돌리기 위해 성을 나간다.

새해를 맞아 인조는 세찬을 용골대에게 보낸다. 적들은 거절한다. 모욕을 당한 조정은 북문을 나가 청병을 공격한다. 무모한 도발로 오히려 조선 군사는 자멸하고 만다. 설날 아침 인조는 행궁 안에서 명나라를 향해 망궐례를 행하고, 칸은 망월봉 위에서 그 광경을 심상하게 지켜본다.

서서히 날이 풀리고 인조는 성을 나와 항복하라는 칸의 문서를 받는다. 그러나 신하 중 아무도 칸에게 보낼 답서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인조는 정오품 교리, 정오품 정랑, 정육품 수찬, 최명길을 불러 각자 글을 쓰도록 명한다. 어명을 받은 정육품 수찬은 못 쓰겠다는 글을 써 곤장을 맞고, 정오품 교리는 심장이 터져 죽고, 정오품 정랑은 선택되지 않을 글을 써낸다. 결국 최명길이 쓴 글이 적진으로 간다. 답서에 불만을 품은 청군은 남한산성 안으로 홍이포를 쏘며 겁준다.

이 때 원손과 빈궁이 있던 강화도도 청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인조는 성을 나서서 칸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로 결심한다. 끝까지 척화를 주장한 김상헌은 사직 상소를 올린 뒤 목을 매고, 인조는 1월 30일 새벽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칸에게 항복하는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가 진행된다


인물소개

주화인가, 주전인가? 논쟁의 주역 5인

작 가 김훈은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전제한다. 아울러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그가 되살린 인물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탁월한 소설적 상상력으로 살점이 붙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막 튀어나온 듯 생생한 얼굴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인조仁祖 1595(선 조 28)~1649(인조 27). 조선 제16대 왕.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재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 올라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지양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폈고, 그 가운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과 외침으로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경제가 악화되었는데도,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당쟁에 몰두했다. 청에서 서양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며느리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하였다.
정치적으로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틈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방 여러 곳에 개시開市하여 민간무역을 인정했다. 또한 군제를 정비하여 수어청 등을 설치하였다. 능은 장릉으로 경기도 교하에 있다.

영의정 김류金? 1571(선조 4)~1648(인조 26). 본관은 순천. 159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렇다 할 중앙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전전했다. 인조반정의 공로로 병조판서, 대제학 등에 봉해지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부체찰사, 이후에는 도체찰사와 몇 차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내며 인조시대 정국을 주도했다. 병자호란 때는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도체찰사의 임무 또한 소홀히 하여 비난받았다. 소현세자가 죽자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를 칭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있자, 이를 반대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 본관은 안동.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북인과 관계가 좋지 않아 이렇다 할 관직을 지내지 못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 도승지 등에 올랐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으로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가기도 했다. 정묘호란 때는 명나라에 가 구원병을 청하였으며, 돌아와 후금과의 화의를 끊고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척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시도하였다. 그 뒤 안동에 내려가 명나라와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청에 의해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6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명분을 지킨 절개 있는 척화신으로 추앙 받았으며,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대로大老'라고 존경받았다.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관은 전주. 20세인 1605년에 생원. 진사시와 문과를 모두 통과하고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진출했다. 북인들이 인목대비를 유폐하려 하자 반정계획에 참여하였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1632년부터 이조. 예조. 호조 판서와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의 화의를 주도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조판서로 홀로 청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조정에서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에게 깊은 신임을 받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주도하며 호패법과 양전.田의 실시를 주장하는 등 양란으로 피폐해진정국을 수습하였다. 임경업을 통해 명나라와 비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한 일이 발각되어 1643년 청에 끌려가 수감되었으며,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풀려났다.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1581(선조 14)~1660(현종 1). 본관은 연안延安.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형조. 공조. 병조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효종 때는 이조판서, 영의정까지 올라갔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반란군을 격퇴하였고, 수원 방어사로 있던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무사히 강화로 피신시켰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수어사를 맡아 주화론과 척화론의 논쟁 속에서도 묵묵히 산성 방위에 책임을 다하였다. 병자호란 뒤에 남한산성 재건작업을 담당했고,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뒤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사회 안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그의 집은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아 그는 청빈한 삶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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