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인 조르바 (Alexis Zorbas / Zorba The Gr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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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MR KNOW 세계문학 5)(페이퍼북) 상세보기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펴냄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호쾌하고 농탕한 자유인 조르바가 펼치는 영혼의 투쟁을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다. 번역자의 말과 작가연보를 함께 수록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오래간만에 본 흑백영화.. 이 책의 원작책도 있는데.. 아직은 안봤다는...
암튼 아버지의 유산인 광산을 다시 일으키려는 주인공이 그곳에 같이 가려는 광부 조르바를 만나서 사업을 다시금 시작하고, 둘다 사랑에 빠지지만, 두여자가 모두 비극적으로 죽고, 광산사업도 개통식날 설비가 모두 무너지면서 쫄딱 망해버린다...
침울해진 바실과 달리 조르바는 양고기가 탈까봐 걱정을 하면서 달려가고 둘은 양고기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나를 원망하지 않냐고... 아니라고... 그러다가 조르바의 그런 긍정적인 모습에 동화가 되었는지,
조르바에게 춤을 알려달라고 하고, 아까 설비가 무너지는 장면이 참 웃기지 않았느냐.. 놀라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우습지 않았느냐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며, 춤추는 두사람...
어찌보면 이게 뭐야하고 허무하게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게된다.
예전에 에디슨이 자신이 세운 연구소가 불에 타고 있자.. 자녀들에게 엄마를 불러오라고.. 이런 구경하기 힘들다고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지금의 현실이 어떻든간에 그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원망을 하던, 자조를 하던... 다만 자기 자신의 마음만은 바꿀수 있다... 울고불고 술마시고, 좌절할지.. 아니면 그안에서 희망을 보거나, 새로운 시작을 꿈꾸던지...


그리스
마이클 카코야니스
안소니 퀸, 앨런 베이츠, 이렌느 파파스

현대 그리스 문학의 제1인자라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적인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글을 쓰는 그리스계 영국인 청년 바실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놓은 광산을 다시 일으켜볼 생각을 갖고 크레타섬을 찾는다. 그러다 그는 광산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조르바를 만난다. 섬에 당도한 이들은 각각 사랑을 찾지만 그만 쓰라린 이별의 운명을 떨치지 못한다. 사업에도 실패한 두 사람. 그러나 그동안 '조르바의 세계'를 바라보았던 바실은 이제 삶이란 패배를 맛보아야만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리라 케드로바가 아카데미상 수상

Alexis Zorbas (Michael Cacoyannis, 1964)
Anthony Quinn, Alan Bates, Lila Kedrova

 그리스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라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희랍인 조르바의 작품에 자신의 곡을 덧대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음악으로부터 그리스의 정취를 느낀다 말한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는 그리스 작가의 동명 소설 작품(소설 원제는 Zorba, Greek로 국내 개봉명은 이 소설에 따랐다.)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며, 영화에서는 작가 버질과 그리스인 조르바를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버질은 그리스계 영국인으로, 시와 에세이를 쓰는 작가이며 부친이 물려준 크레타의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 한동안 폐광으로 버려두었던 크레타의 갈탄 광산을 찾아가는 길에, 그는 조르바라는 낙천적인 노인을 만나게 된다. 품행 단정하고 모범적인 외모의 버질은 생면부지의 자신에게 오랜 지기인양 관심을 갖는 조르바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은 고용주와 고용인이 되어 크레타로 떠난다.


 크레타 섬의 마을은 여러 불안을 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과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연정과 그로 인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악의와 분노가 있으며, 이 곳의 이방인으로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부유한 여관의 늙은 여주인 호르텐스 부인과 가난한 크레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바운티 호의 반란’이 바다 위의 배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갈등을 극대화했듯, 그들이 겪는 여러 갈등들은 가난하고 외진 섬 크레타에서 또렷이 부각되고 또 증폭될 수 있다. 또한,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그 자체로 어떤 조일 듯한 압박감을 줄 수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는 섬이라는 배경이 억압과 성차별에 대한 상징과 맞물려 이해되기도 하며, 외진 섬 마을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광기와 집단적 충동이 표출되기도 한다.

 "일할 때는 난 당신에게 고용된 사람이지만 연주하고 노래할 땐 나의 주인은 납니다. 난 자유롭다는 거죠."

 조르바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자신 속에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춤을 추는 사람이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센토리를 아끼며, 감정에 충실하며 즉흥적이고 낙천적이다. (조르바의 표현을 빌어) ‘재는 머리’를 가진 버질은 자신의 감성을 이성으로 다스리려 한다. 면밀하고 성실하며 질서와 안정을 좋아한다.


 “보스(Boss). 사는 것은 다 골치 아픈 거예요. 죽음만이 아니죠. 살아있다는 것은 허리띠를 풀어버리고 골치 아픈 일을 찾아 나서는 거예요.”

 일례로 조르바는 호르텐스 부인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비록 매너를 갖출지라도) 성적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버질에게도 자신의 감성에 솔직해질 것을 충고한다.
 이처럼 상반된 두 사람의 우정은 서로에 대한 흥미와 관심 속에서 깊어가고, 그 것은 이윽고 신뢰가 된다. 조르바는 감정이 극에 달할 때면 춤을 춘다. 그의 얘기 속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잃었을 때 슬픔 속에 춤을 추었다. 조르바가 버질 앞에서 추는 춤도 감정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것은 기쁨의 감정이다. 자신의 기발한 발상을 신뢰하는 버질의 우정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사고자 도시로 나가고, 버질은 그에게 기꺼이 5일의 시간과 함께 자신의 돈을 맡긴다.

 “신은 아주 커다란 동정심을 갖고 있지만 용서하지 않는 죄가 하나 있다. 여자가 남자를 침대로 부를 때 거절하는 것.”
 그러나 바람 같고 자유분방한 조르바가 도시에 나가 처음 한 일은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여성을 탐닉하며, 비싼 음식을 즐기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그 것을 숨기지 않고 버질에게 편지를 보내니 버질의 고민은 깊어가고, 그러던 중에 조르바의 춤을 흉내내보던 버질은 자신이 그 광기에 익숙하지 못함을 깨닫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연모의 감정을 품던 과부의 집으로 향한다.
 “가슴에 손만 얹어주면, 모든 여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니까.”
 과부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밤을 보낸 버질. 그러나 그녀를 연모하던 마을 청년의 자살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질투와 성욕의 왜곡된 감정은 폭력으로 표출된다. 청년의 장례식이 있던 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왔던 여인은 마을 사람들의 폭력 속에 죽음을 맞고...

 호르텐스 부인의 죽음으로 이 마을의 광기는 마지막 빛을 발하여, 연고자가 없던 이 부유한 프랑스 여인이 임종을 맞이하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은 몰려들어 그녀의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 조르바는 휑하니 비어버린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앵무새와 새장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허영심 많은 소녀의 감성을 지녔던 호르텐스 부인. 이 역을 연기한 러시아 출신 여우, 릴라 케드로바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새로운 사업의 시작. 그리고 실패.
 목재를 옮겨오는 케이블이 붕괴되자, 사람들은 허겁지겁 달아나고, 그 자리에 남은 두 사람은 음식과 술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쓸쓸하고도 가슴뭉클한 피날레가 시작된다.

 “이제 일거리도 없어졌으니 난 뭘 하나.”

 “힘내요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아뇨. 당신은 떠날 것이고 책들을 붙잡고 살 거예요... (술잔을 들며) 당신의 건강을 위해.”

 “당신의 건강을 위해. 조르바.”

 “빌어먹을, 보스. 난 말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한 가지만 빼고 다 갖췄어요... 광기. 사람이라면 약간
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하죠…… 나한테 화났어요?”

 “춤추는 법 좀 가르쳐줘요, 해줄래요?

 “춤? 지금 ‘춤’이라고 했어요? 시작합시다.”

(버질은 마지막에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조르바의 광기를 표현하던 그 '춤'을 배우게 된다.)

 근래의 영화들은 지나친 상업성 속에 이야기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으며, 혹여 주제를 쥔다 할지라도 그 주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영화의 상업성이란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한 장르이다. 또한 하나의 산업이며, 하나의 상품이다. 우리는 영화의 상업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영화의 상업성과 작품성이란 동전의 양면, 즉 함께 놓고 볼 수 없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상업성은 쉽게 말하자면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빠져들어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영화의 매력이며, 그러한 매력 속에는, 작품의 맥락과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잘 정제된 상징적 캐릭터와 대사의 배합, 그리고 납득할 수 있는 스토리를 요구하는 작품의 완성도가 담겨있다. 이 작품의 완성도는 영화의 작품성과 중요한 맥락을 이룬다. 양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 것을 돈을 길바닥에 뿌린 천박한 영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영화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후자를 격려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보다 인색한 것이 우리 관객의 본 모습일 것이다.
 나 또한 자극적인 영상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러한 작품을 좋아할뿐더러 '재미'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 생각하는 관객이다. 그런 탓에  이런 작품을 보기 전에 (상업적이고 재미있는)다른 작품에 대한 선택의 기회비용 속에 갈등하게 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선택에 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은, ‘고전’이란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선택되고 평가된 작품을 의미하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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