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 권투와 삶을 그린 최민식 류승범 주연의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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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엄청난 기대를 하고 봐서 그런지 엄청난 실망을 했습니다.

인생의 바닥에 떨어진 두사람의 대결이라는 설정까지는 좋았지만... 거기까지 였습니다.

근데 혹시 이 장면을 보게 된다면 아래의 글을 읽고 마지막 시합장면을 다시 한번 보시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듯 합니다.

정문술씨의 왜 벌써 절망합니까의 한부분입니다.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나는 권투를 좋아한다. 프로권투 신인왕 전에 매번 참가한다는 어느 중년의 의사처럼 내가 직접 권투를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다 할 경기라면 그저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정도의 권투 팬 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즘이야 농구다 야구다 해서 복싱 팬들이 많이 줄었지만 몇 년 전가지만 해도 문성길, 유명우 같은 유망주들의 경기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대기업에서 멀쩡하게 직장생활 잘하던 후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창업을 하겠다며 조언을 구했다. 반도체에 재활용 사업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시장조사도 자세하게 해보고 여기저기 견학도 꽤 다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네 복싱 좋아하나?"
내가 조언을 해줘야 한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자라면 권투에 임하는 복서들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복싱은 특히 기업경영과 닮아 있는 스포츠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지게 되는 기대감이나 의욕은 모두가 똑같다. 다만 절망과 고독을 함께 준비하고 잇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늦깎이 사업가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틈새를 개척하는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한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거꾸로 경영이란 그런 것이다.
성공한 선배에게 그럴 듯한 경영 노하우라도 얻어들을까 싶어 찾아왔을 그 친구가 의아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권투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스포츠라면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별로인데, 권투 하나는 무지 좋아하네."
"...."
사각 링은 복서들에게 천국이며 지옥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승리하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패배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권투이다. 물론 무승부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상대방과 싸우고 자신과 싸워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항상 승리와 패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중간한 생존에 만족하는 경영자라면 그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기술개발을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벤처기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기술개발에 차선은 없다. 벤처기업은 항상 남들보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투에 임한 복서들처럼 오직 승리 아니면 패배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작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는 경영자는 적다.
"코너에서 매니저가 아무리 약을 써보게. 매니저는 결국 아무 것도 몰라. 당장 나는 피 튀기며 싸우고 있는데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그런 소리나 듣고 있다간 한 순간에 쓰러져. 언제나 혼자라는 걸 명심하게. 외롭고 고통스럽지. 더구나 자넨 늙은 복서 아닌가? 쓰러트릴 확률보다는 스러질 확률이 더 많겠지. 자네도 사업을 하려면 권투를 자주 보게."
내가 권투경기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복서들의 주먹질이 아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승세를 타고 있을지라도 복서들의 얼굴은 항상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1라운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각각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행복한 혼자가 아니라 아주 고통스러운 혼자인 것이다. '거꾸로 경영'이란 말 그대로 동지가 없는 외로운 실험이다. 모든 것은 나의 판단과 결정에 달려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완전히 내 몫이다. 복서의 고독과 투혼을 배워야 버틸 수 있다. 복서들은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주먹을 날리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고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벤처는 고독한 것

나는 평소에 과묵한 편이다. 특히 집에 있을 적에는 거의 말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나의 모습이 있다. 권투경기를 시청할 대의 내 모습이다. 유독 권투경기를 볼 때만은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헛손질을 하거나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게 된다. 경기가 끝나면 나는 제일 먼저 화장실을 찾는다. 가족들 얼굴 보기가 무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프로권투를 보면서 쉽게 흥분하는 것은 나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한 판의 권투시합은 내가 걸어온 길고 걸어가야 할 길은 요약 판이다. 경영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외로움이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때, 경영자들은 세상에 오직 나 혼자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조언과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독을 참는 능력이라는 것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찾아내는 능력과도 같은 말이다. 쓸모 없는 고난은 없는 법이다 .어떠한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고 배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 견뎌낸 다음의 이야기이다. 나에게 경영자의 제1덕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고독을 참는 능력을 말하겠다.
창업과 관련해서 내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벤처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 벤처사업이라는 것을 아이디어와 순발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조급한 생각으로 벤처사업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모험심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적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난간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권투는 또한 우리들에게 인내가 최선이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조급한 생각으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헛손질이 많아 힘이 빠지게 되고, 결국은 케이오(K.O.)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의 기습에 당하기 십상이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정석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잽을 무시하고 큰 손짓만 좋아하는 권투선수들은 케이오 당할 확률이 높다. 욕심 때문에 허점이 생기는 것이다. 벤처사업을 한다는 친구들은 '대박 한번 터져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만으로 '대박'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꾸준한 기술축적과 인재양성에 진짜 대박이 나온다. 조급하고 욕심이 많을수록 제 스스로 쓰러질 확률이 높다.
"왜 돈 좀 벌었다고 외제차 굴리면서 룸살롱이나 다니는 젊은 친구들 있잖나. 소위 벤처사업 한다는 친구들이 재수 좋게 돈 좀 벌고 나면 다 그리 되는 거지. 언제 카운터 펀치가 날아올지 모르는 건데 말야. 사업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안도하면 안 되네. 권투나 사업이나 안정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게."
그 친구는 나로부터 구체적인 창업정보라고는 눈곱만치도 얻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 준 셈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얼마 후 실제로 회사를 차렸고 한동안은 제법 잘 나간다는 소문도 들렸다. 얼마 후 어느 강연장에 연사로 참가했다가 그를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그는 습관처럼 IMF타령을 쏟아내었다.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때 권투 얘기만 하시길래 좀 시큰둥했습니다. 이제야 사장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해주신 권투 얘기가 이런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상대를 케이오시키거나 마지막 공이 울릴 때까지 권투선수들은 안심할 수 없다. 케이오승이나 마지막 공은 기업인들에게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 죽는 순간까지 기업인은 항상 위험하다. 눈앞의 알량한 성공을 부정하고 기꺼이 고난을 기다려라.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진득한 지구력과 인내심이다.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양의 환난과 고독을 참고 견디면서도 언제나 낙관과 희망을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벤처리더인 것이다. 사업에 안정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는 순간 카운터 펀치는 예외 없이 날아든다. 끝없는 도전과 승부 욕만이 기업을 살게 한다. 벤처란 늘 고독한 것이다.


산다는것은 권투링에 올라 상대방과 싸우는것처럼 고독한것이 아닐까요?

제 목 : 주먹이 운다
별 점 : ★★★★ 8.36(3539명 참여)
원 제 : Crying Fist
감 독 : 류승완
주 연 : 최민식 , 류승범 , 임원희
장 르 : 드라마
개 봉 : 2005년 04월 01일
등 급 : 15세 이상 관람가
시 간 : 134 분
제작/배급 : 쇼이스트
제작년도 : 2005년

시놉시스  
두 남자의 눈물, 감동의 주먹 한방!
ROUND OF 강태식
왕년엔 복싱스타. 지금은 매맞는 남자.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한때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로 잘 나가던 태식, 현재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매맞아 주는 일을 한다. 도박으로 진 빚과 공장의 화재로 인해, 가진 것을 모두 날린 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리의 매맞는 복서로 나서게 된 것.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뿐. 이제, 그를 찾는 것은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들과 빚쟁이뿐인 처량한 신세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그에게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이혼을 요구해 오고, 삶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서진’이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자 태식은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잃을 것도 없는 인생 막장의 늙은 복서 태식은 다시금 희망을 품고 신인왕 전 출전을 결심하게 되는데…

ROUND OF 유상환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권투로 세상과 싸울 것이다

패싸움과 삥듣기가 하루 일과인 상환. 어느 날 큰 패싸움에 휘말려 합의금이 필요하자 동네 유지의 돈을 노린 강도 사고를 벌이게 되고 이 사건으로 상환은 소년원에 수감된다. 수감 첫날부터, 권투부 짱 ‘권록’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독방에 갇히고 순조롭지 않은 생활이 시작된다. 권록과의 싸움을 눈 여겨 본 교도 주임은 상환에게 권투부 가입을 권한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었던 것도 없던 19살의 상환에게 권투는 처음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의지와 기쁨을 깨달아 간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일 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 마저 쓰려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쇼크에 쌓인 상환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고 할머니가 하루빨리 깨어 날수 있도록 신인왕 전에 출전해 결승의 꿈을 이뤄보려는 전의를 불태우는데…

LAST ROUND
신인왕 전 결승! 드디어 두 남자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시작 된다.

드디어 신인왕 전 예선이 치러진다. 예전의 노련했던 권투 실력을 회복해가며 상대를 이겨나가는 ‘태식’과 매 경기마다 KO로 승리하며 무섭게 질주하는 ‘상환, 두 남자는 각자의 상대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마침내 신인왕 전 결승에서 만나게 된다. 독특한 이력, 막상막하의 실력과 운명을 가진 두 남자. 더 이상 물러 설 곳 없는 인생 막장의 39세 거리의 복서 ‘태식’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19세 소년원 복서 상환. 한치도 물러 설 수 없는 두 남자의 인생을 건 단 한번의 대결이 시작된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비루하고 걍팍한 길을 전전하는. 때론 위악스런 몸부림으로 그 무게를 덜어 보려고도 하는. 하지만, 소화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악스럽게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곤... 삶을 의탁할 곳이라곤 맨주먹, 그 하나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주먹이란 생의 의지뿐만이 아닌 갚아야 할 빚처럼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먹을 움켜쥡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쓰러져 가는 가세 앞에 일말의 자존심을, 그 유일한 생존도구를 지켜가려 하는. 비열한 거리 속에 치여가며 경제적 불구란 낙인 속에서 남아있는,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곤 주먹뿐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 그래도 버텨야 할 의지처란 주먹뿐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 나와 모든 것을 버린 채 외쳐댑니다. 나와 보라고 나에게 울분의 주먹을 날려 달라고. 그리고 승부를 띄웁니다. 사방이 막힌 링 안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그리고 그 주먹을 움켜쥡니다.

누구를 응원할 수도 응원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 미묘한 긴장감 속에 숨을 죽입니다. 그들을 울어버리게 만들었던 주먹이 우리에겐 울 수밖에 없는 주먹으로 다가옵니다. 극한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동하게 만든 건 주먹이고, 분연히 다시 일어서게 만들고, 돌아볼 이에게 한줄기 위안의 미소를 건낼 것 또한 주먹입니다. 그리고 경기는 시작됩니다.

끊임없이 날려버리는 연기 속에 그 삶의 무게들이 온전히 전파되어 옵니다. 단순한 기호로서가 아닌 내압과 외압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으로 다가옵니다.

그 어떤 영화보다 치열한 삶의 모습을 오롯이 담아냅니다. 그들은 인간극장을 나와 극장 속에서 인간을 만나게끔 합니다. 막바지에 치닫는, 비상구조차도 없어 보이는 인생 속에서 삶의 의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두가 그들을 지켜봅니다. 울분을 삼키게 만들었던 이도, 토악질을 하며 나락으로 잠기게끔 만들었던 이도...

가감 없는 살아있는 모습들의 포착에 몸서리쳐집니다. 복받쳐 오는 감정의 뒤안길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따라가게 됩니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을, 하지만 돌아보면 매일 같이 링 속을 돌며 연타를 당하고 있는 이 또한 나였음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 경기에 승부란 없습니다. 애초부터 둘의 경기는 내파되었던 자신과의 싸움이자 그 복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먹으로 울었던 이들을 위한 위안의 길이기도 합니다. 의지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래서겠지요...

하루하루를 타협해가며(주먹이 운다) 사는 이에게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주먹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치열한 삶으로의 종용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디서든 지켜 보아 줄 시선들과 돌아가 앉을 코너 속에서 움켜줘야 할 주먹을 느끼게끔 합니다. 거친 삶 속에서의 고된 움직임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습니다.

물러설 수 없는 두 주먹에 운 영화. 주먹이 운다 였습니다. ;)





정성일의 영화세상 |「주먹이 운다」


스포츠 영화,

이 끔찍한

대중의 희망

 

 



   링 위에 두 남자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여기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더 구구절절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것이다.

 

물러날 데 없는 두 남자

 

   42세 강태식(최민식)은 한때 북경 아마추어 복싱 은메달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술에 쩔고, 후배에게 사기당하고, 사채업자가 된 다른 후배는 돈을 내놓으라고 악착같이 쫓아다닌다. 아내와는 이혼 직전이고, 아홉 살 된 아들은 이런 아버지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집안 살림은 모두 차압이 들어온 지 오래이다. 강태식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거리에 권투 글로브를 끼고 나서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으시는 분들, 심심하신 분들, 1분에 1만원 내고 마음 놓고 저를 때려 주세요" 라고 마이크로 호객 하는 거리 복서로 사는 것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강태식에게 신인왕전은 그의 마지막 링이 될지도 모르는 도전이다. 떠나가는 아내와 아들을 붙들기 위해서 그는 여기에 모든 것을 건다.

 

   20세 유상환(류승범). 남의 자동차에서 카 오디오나 훔치고 뒷골목에서 '삥이나 뜯으며', 패싸움하러 돌아다니는 그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개망나니이다. 홀아버지 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그는 늘 인생이 안 풀린다고 생각한다. 패싸움의 합의금이 필요하자 동네 사채 영감 돈을 날치기하려다가 그만 경찰에 잡혀 소년원에 간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아버지는 사식을 넣으면서 그 안에 비타민도 몰래 넣어주고, 때마다 찾아온다. 그런 아버지가 그만 공사판에서 사고로 죽는다. 할머니도 손자만 바라보다가 쓰러진다. 감옥에서 아버지 영정 앞에 인사도 드리고, 할머니 병문안도 갈 수 있는 방법은 싸움밖에 모르는 유상환에게 하나뿐이다. 권투선수가 되어서 신인왕전을 치르기 위해 외출하는 것이다. 그 결승전을 보기 위해 할머니가 마지막 힘을 내 경기장에 온다. 이렇게 두 남자가 만난다.

 

   류승환의 네 번째 영화「주먹이 운다」는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될 두 주인공을 서로 맞붙인 영화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2시간 14분에 이른다. 그렇게 맞붙은 두 사람은 자기의 자리에서 하여튼 버텨야 한다. 최민식은 여전히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고, 류승범은 자신이 떠안은 인물의 이상한 리얼리티를 살려낸다. 그래서 최민식이 연기를 하는 동안 류승범은 마치 자서전을 재현해 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고 영화는 두 인물 사이를 오가면서 진행되고, 처음에는 느슨했던 이야기가 마지막 신인왕전에 다가올수록 에피소드에서 장면별로 점점 빠르게 교차편집된다. 대부분 거리에서 세트 없이 찍혀졌고, 카메라는 거의 모든 장면을 들고 찍어서 쉴 사이 없이 흔들리면서 인물과 함께 달리고 걷고 멈춘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육체적으로 그 살과 뼈와 땀과 피의 육신으로 찍혀진 영화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6라운드가 벌어진다. 물론 류승완은 둘 중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6라운드를 생략 없이 모두 보여준다. 심지어 2라운드는 이 장면을 대역 없이 찍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테이크로 편집 없이 링 위에서 보여준다. 땀이 배어 있고, 장면들은 정성껏 찍혀졌다. 가장 아쉬운 것은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신파조에 빠져들어서 보는 이의 눈물을 쥐어짜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거리에서 시작해서 후반부에 이르면「록키 번외편」처럼 보일 지경으로 한껏 감상에 빠져든다. 여기에 개각도 촬영과 디지털 스캔으로 모든 장면을 '떡칠' 해 놓은 다음 프레임 속도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정작 이 영화에 잡혀야 할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육신의 리얼리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 모든 악전고투가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의 영화 버전처럼 우스꽝스러운 아바타의 난투극처럼 보인다. 그냥 한 마디로 이 영화에는 라이브한 감각이 없다. 여기에 보틀 네크로 연주하는 우수에 가득 찬 슬라이드 기타 소리가 더해지고, 별 감흥도 없는 마지막 6라운드에 이르러서 음악으로 한껏 감정을 고조시키며 들 때 류승완은 무언가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류승완은 거기에 감독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처량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고작해야 두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의 위로와 그래도 여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왔으면 된 거 아니냐는 덧없는 희망의 메시지가 더해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눈물을 흘릴수록 보는 나는 점점 더 우스워진다. 물론 그것은 가짜 희망이며, 세상과의 공존으로 위장한 세상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다. 그게 뻔한데도 거기 매달리려고 할 때 보는 사람은 안쓰러워진다.

 

한국 영화가 스포츠에 매달리는 이유

 

   그러다가 문득 지난 일년 동안 한국 영화가 스포츠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한국 영화에서 스포츠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소재이다. 사람들은 영화와 스포츠를 서로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했으며, 우리는 그렇게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면서도 그걸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나는 아직 2002년 서울-나고야 월드컵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그 어떤 뉴스도 들어본 적이 없다. 혹은 박찬호에 대한 영화화 기획은 어떤 자리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다. 박세리에 대한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난 일 년간 갑자기 스포츠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 전해에 링에서 '죽은' 김득구를 다룬「챔피언」이 그 신호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반칙왕」도 넣어야 할까?) 그런 다음 일제 강점하 조선시대 최초의 야구단에 관한 (풍속도에 가까운)「YMCA 야구단」이 만들어졌고, 그러고나서 1980년대 프로야구 만년 꼴찌였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전설(?)적인 좌완투수 감사용을 그린「슈퍼스타 감사용」이 등장했다. 그리고 일본 땅에서 몸뚱이 하나로 국민영웅의 자리에 오른, 천황 다음으로 유명했던 사나이 '리키도잔' 의 프로레슬러로서의 삶을 담은「역도산」이 거의 1백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중들이 좋아한 영화는 소품의 규모로 훨씬 소박하게 만들어진 자폐 증세의 마라토너였던 소년 배형진 군의 자서전적인「말아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주먹이 운다」는 실화나 실존인물을 다루지 않은 첫 번째 스포츠영화이다.(그러나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소재가 된 강태식의 모델은 실제로 일본의 동경 거리 한복판에 있었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어느 영화가 성공했느냐가 아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대중들이 어느 종목을 좋아하느냐는 것이 아니다. 일단 스포츠 영화 안으로 들어오면 피할 수 없는 구조가 생겨난다. 아무리 이야기를 피해가도 그 종목의 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모든 스포츠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자기의 종목 안에서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경기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그 주인공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다. 모든 시합은 결국 승패가 갈리고, 아무리 연장을 하더라도 하여튼 끝나야 한다. 그 안에서 주인공이 무엇과 마주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일까? 왜 대중들은 결국 어떻게 해도 같은 이야기를 스포츠라는 틀 안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것이 지금 스포츠 영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상투적 담론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 반대이다. 차라리 대중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그 룰 자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룰 이면에 무엇인가 인간적인 휴머니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룰 자체가 세상에 대한 이상이라면 세속적인 휴머니즘은 룰 안에서 이성적인 휴머니즘과 겨뤄야 하는 것이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이 복싱이건 마라톤이건, 혹은 야구이건 레슬링이건, 그 안에서 견디기 위해서는 룰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예외 없는 일반의 질서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보고 싶은 세상인 것이다.

 

   스포츠 경기장은 세상의 압축이거나 상징이 아니다. 그 반대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협잡과 불평등과 사기와 예외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정치는 원칙도 없고, 집값은 불평등으로 우리를 거리에서 떠돌게 만들고, 명예교수라는 분은 우리가 일제 강점하 식민지에 살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우냐고 자발적으로 기고를 하고, 10대들은 모여서 소돔과 고모라를 방물케 하는 파티를 하고, 조폭을 방불케 하는 일진회가 학교를 장악해도 학교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스포츠 영화와 끔찍한 희망

 

   이것이 한심해 보이는 까닭은 법도 질서도 없다는 탄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만일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무조건 경기장에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냉정하게 보이는 까닭은 예외도, 사정도, 과정도, 그 어떤 노력도 인저오디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결과만 있다. 물론 두 세상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안에 참여할 때에만 룰의 적용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여자들이 룰을 만들어냈지만 일단 참여하면 그 룰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한 쪽은 가진 자의 예외가 모두의 일반이 된다. 다른 한 쪽은 예외를 반칙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 대신에 스포츠를 보는 것은 경기장 안에서 원칙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보다 늦게 달리면 뒤에 들어와야 한다. 분하겠지만 그건 할 수 없다. 아무리 불쌍해도 열을 세도록 일어나지 못하면 실려나가야 한다. 동정이 가지만 그건 할 수 없다. 그걸 영화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은 주인공이 불평등한 세상 속에서 공정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 자신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반칙으로 인해 항상 손해를 보고 있다는 부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세상의 불평등으로 인해 소외받고 있는 두 사람, 강태식과 유상환은 오직 링의 룰을 그들 자신의 세계로 인정한다. 그들의 정정당당함은 링 위에서만 존중받는다. 그러므로 스포츠 영화의 유행은 우리 사회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공정한 룰의 세계를 소망하는 희망의 징표로 보아도 될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건 우리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는 공존을 위한 만남이어야 한다. 경기장에 올라가면 결국 승패가 가려진다. 진 자는 침묵해야 하며, 이긴 자는 모든 권리를 갖는다. 그것이 룰이다. 여기에는 어떤 동정도 없으며, 어던 눈물도 없으며, 어떤 대화도 없다. 진 자와 이긴 자로 나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결코 그렇게 진 자와 이긴 자로 나뉘어서는 안 된다. 혹은 진 자와 이긴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스포츠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절반은 이 세상을 단순하게 명확하게 보고 싶어한다. 거기에는 진 자와 이긴 자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경기장이 되어가는 우리들의 세상이다. 그 세상이 참혹한 것은 원칙도 없는 반칙이 난무하는 경기장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경기장이라면 원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공존의 방법은 없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포츠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라는 현실(이라는 반칙)의 경기장에서 보는 (온갑 사연에도 불구하고 룰을 지켜야 하는) 드라마의 경기장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매일 돈을 받고 매를 맞으러 거리에 서는 강태식일지도 모른다. 혹은 버림받아서 물러날 데 없는 유상환일 수도 있다. 그런 당신과 당신이 만나서 경기장에서 승패를 결정지어야 한다. 하지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란 결국 없는 것일까?「주먹이 운다」를 보는 나의 마음은 끝내 어떤 감동도 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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