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 그리고 그런것들이 자기들이 난장이라는 틀안에 가두고 살아가는 듯한...
"나의 지구를 지켜줘"의 신비감과 현실적인 재개발이나 노동문제를 접합시킨 일명 난쏘공...
암튼 가슴이 아픕니다... 책이 슬퍼서 그러는것이 아니라... 난쟁이 아버지의 두 아들을 보면서.. 저와 제 동생이 생각나고... 저희 아버지가 난쟁이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굴래.. 이 어두움.. 이 암흑.. 그 누구도 구해주지 않을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릴수 있어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살릴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고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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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제 목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저 자 : 조세희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 1978년 6월
구매처 : 오디오북
구매일 :
일 독 : 2005/9/6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살래? 아니면 꿈과 희망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래?
<미디어 리뷰>
등단한 것은 1960년대 중반의 일이지만, 문단의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난장이 연작의 첫 작품인 《칼날》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76년 난장이 연작 《뫼비우스의 띠》 《우주공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을 발표하였으며, 1977년 역시 난장이 연작 《육교 위에서》 《궤도회전》 《은강 노동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등을 발표하였다.
1978년 《클라인씨의 병》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에필로그》를 이전의 난장이 연작과 함께 묶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하여, 문학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이룬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난장이 연작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에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에서 난장이는 정상인과 화해하며 살 수 없는 대립적 존재로 등장하고 있으며, 1970년대 한국사회의 최대 과제였던 빈부와 노사의 대립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적 접근을 통해 한국의 1970년대가 이 두 대립항의 화해를 가능케 할 만큼의 성숙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그려내고 있는 난장이 연작에 환상적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계급적인 대립과 갈등이 마치 비논리의 세계나 동화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 결과 현실의 냉혹함은 더욱 강조된다.
연작 형식은 소설 양식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면서 이야기 형식의 긴장과 이완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이같은 형식이 난장이 연작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소설이 종래의 단편 형식으로는 현실에 적절히 대응할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장편 양식으로 현실을 개괄할 수 있을 만큼의 성숙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주제와 양식과 기법에 대한 도전과 그 성과는 1970년대 문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밖의 작품으로는 《오늘 쓰러진 네모》(1979), 《긴 팽이모자》(1979), 《503호 남자의 희망공장》(1979), 《시간여행》(1983), 《하얀 저고리》(1990)를 비롯하여, 소설집으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시간여행》(1938)과 콩트를 사진과 함께 엮은 《고통의 뿌리》(1986), 희곡 《문은 하나》(1966)가 있다. |
'난장이' 는 안락한 일상 속에 잠자온 우리에게 가열한 충격이다.
그는 그 왜소하고 병신스런 모습을통해 광포한 산업시대에 접어든우리 사회의 허구와 병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꿈과 자유에의 열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진정성의 가치를발견한다. '이 가치야말로 추악한 현실에 도전하는 상상력의 힘이며,조세희의 문학에 대한 우리의 감동과 정신의 고양은 이로부터 비롯한다. 그의 고통에의 조갈,절망에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이곳의 삶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상상력의 전율적인 대결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병익(문학평론가)
조세희의 <난장이‥‥>는 대단히 비극적인 우리 시대의 소외된 신화이자,동시에 소외 초극의지의 신화이다. 현실주의적 전망이 닫혀 있던 시대, 아니 절망을 차지하고라도 현실 인식마저 미망에 휘둘려야했던 시절,조세희는 이처럼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거인'과 난장이'의 대립적 경계를해체한 초극의 지평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정녕 인간다운 삶과 공간을 꿈꾼 조세희의 소설이야말로,문학의 위의와 영광을 증거하는것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난장이 ‥‥>는 칠십년대 우리네 인문주의와 심미적 이성의 한 절정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 할수 있다.
우찬제(문학평론가)
난장이의 눈물에 대한 추억 | --- 99/12/19 고흥준(coju@hitel.net) |
- 당시 책에 근거해 '난장이'는 '난쟁이'로 표기하지 않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먼저 접한 것은 책이 아니라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시절에 보았던 영화로부터였습니다. 그때는 '난장이'가 지니고 있는 상징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시 잘나가던 여배우 금보라의 목욕 장면이 죽여준다는 무성한 소문에 이끌려 호기심 많은 친구들과 어두컴컴한 3류극장에서 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 금보라의 하얗고 보드라운 등짝과 엉덩이 감상에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에도 출연진의 하나였던 안성기 씨의 암울하던 표정이나 난장이가 벽돌공장의 굴뚝에 앉아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장면들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 비록 시선은 금보라의 엉덩이에 가있었을지라도 영화 속에서 내내 그려지던 무거움만은 어린 마음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철부지가 스무살이 되어서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대한 수상한 풍문을 접할 수 있었고,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금보라의 엉덩이가 아닌 철거반원들의 망치질과, 그 속에서도 태연하게 식사를 하던 난장이 일가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잊혀진 추억처럼 돼버렸지만 70년대 우리 문학을 되돌아 볼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조세희'입니다. <난장이>라는 폭약을 짊어지고 나타나 한국 문단을 일거에 폭발시켜버렸던 것이지요. 그의 소설은 다분히 감상적으로 나열되던 노동계의 현실을 구체화, 그리고 추상적인 사유의 공간으로 창조해냈습니다. <구체-추상>이란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 그것이 조세희가 말하고 싶은 '뫼비우스의 띠', 그리고 '클라인 氏의 병(甁)'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의 정체입니다.
한 번 비틈으로써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지는 띠, 내부가 없지만 닫힌 공간이 있는 병이 던지고 있는 화두와, 김병익이 지적했듯 똑똑 끊어지는 스타카토식 문체가 주는 명쾌한 경직성은 왜 이 소설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가를 말해주는 지표입니다.
이 연작 소설은 '난장이일가'와 '은강방직공장'이라는 이원성의 대립에서 출발하여 '신애'라는 중산층 주부의 3자적인 시점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도식은 애초의 대립상태를 유보, 혹은 객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변으로 상징되는 신애라는 인물이 중심으로 이동하며 보이는 '옹호→무관심'의 도표는 결국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단순한 사회문제의 고발이 아니라 우리 사고 방식의 순수성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에 대한 고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난장이가 아니다 ― 단정
↓
우리는 또 다른 난장이가 아닐까? ― 의구
↓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 추측
↓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우리는 난장이가 아니다 ― 재단정
이러한 소설 자체의 분열적인 성장은 한 부분에서조차 힘을 잃는 법이 없이 일관되게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단정과 의구, 새로운 추측 그리고 재단정의 상징성은 70년대 한국의 중앙부를 관통한 채 지금까지도 우리 문학의 한 기둥을 이룬 근원적인 힘인 셈이지요. 그러나 문학은 자유라든가 평등으로 치장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합니다. 제가 전에 최인훈의 <광장>을 소개하는 편지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그 이데올로기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든 문학의 주체가 되어버린다면 한껏 미화된 정신적 우월감의 방만한 토로가 있을 뿐, 치졸한 유미성향과 다를 바가 없을것입니다. 우리가 조세희의 소설을 주목하면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부분이 바로 그 점입니다. 다분히 열정적인 의식 개혁으로의 참여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소설이 주는 무거움은 노동자가 외치는 목소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현장에서 쌓은 체험과 고통을 우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조세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노동계의 억울하고 기막힌 현실을 조정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순수냐, 참여냐 하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내세웠던 가치는 '우리가 난장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 난장이가 될 수 있는가'를 역설했던 점입니다. 대립적인 관계에서 머리로 쌓은 화해와 이해는 결코 영구적일 수 없으며 그것이 문학의 애교섞인 시도로써 깨어질 수 없음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 친구가 최근 절필하고 있는 그를 일러 '조세희는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는 정말로 쓰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난장이의 소외성'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천박한 일반, 그리고 중심부를 향한 고질적인 갈망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현실에 바탕을 둔 암울한 상상력의 한계는 결국 순진한 계몽주의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을 알아버린 한 지식인의 좌절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절을 삭일 수 있는 방법은 웅변이 아니라 침묵임을, 그 침묵의 끝자락 어디쯤에 새로운 열변이 자리잡고 있음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는 그가 다시 붓을 잡고 난장이가 아닌 진정한 거인의 시대를 열어갈 날도 있으려니, 기대해 봅니다. 난장이가 꿈꾸던 이상향의 한 귀퉁이에 여러분의 마음이 가 닿는다면 그의 눈물과 끝없던 추락에로의 열망들이 그제서야 잠들 수 있겠지요.
그 날에 대한 준비로, 그리고 '난장이의 눈물에 대한 추억'을 앞세워 이 책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
<책속으로>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교육받은)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무엇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 p.110 |
의사들은 아버지가 아무도 찾아낼수 없는 병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뒤에도 무서운 동통과 싸우며 두 해나 더 살았다. 아버지는 전생애를 통해서 그의 시개 사회와 불화했던 사람이다. 신애는 남편이 같은 형통의 사람임을 잘 알았다. 좋은 책을 쓰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던 남편은 단 한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실어증 환자로 생각했다. 중오하는 돈도 죽어라 벌었으나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부모의 병을 고쳐주지도 못하면서 병원은 그가 죽어라 하고 벌어들이는 액수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늘 요구했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그에게는 울 힘조차 없었다.--- p.29 |
'울지 마, 영희야.'
큰오빠가 말했었다.
'제발 울지 마. 누가 듣겠어.'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 p.143-144 |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p.36 |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사람들은 옳게 보았다.아버지는 난장이였다.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나는 아버지,어머니,영호,영희,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식구의 모든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 P80 |
나는 아팠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직원은 신청 용지,시 접수증,주민등록등본을 철박이로 눌렀다. 그 위에 접수 도장을 쿡 찍었다. 그것을 받아 돌아서다 말고 나는 몸을 숨겼다. 줄 반대쪽으로 들어가 건물 바로 앞쪽을 살폈다. 바로 그가 승용차 앞에 서 있었다.--- p.120 |
교사는 두 손을 교탁 위에 얹었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승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 p.25 |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
[줄거리]
수도 파이프 수리공으로 생계를 잇는 난쟁이 아버지와 인쇄소 제본 공장에 나가는 어머니,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등생이었으나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 나가는 두 아들 영수와 영호, 그리고 막내 영희. 이렇게 다섯 식구로 이루어진 난쟁이 가족은 철거 계고장을 받는다. 물론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지만 가난한 철거민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입주권을 팔아서 변두리나 시외로 세를 얻어 나갔지만, 영수네는 세든 사람의 전세금을 내주려고 명희네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 입주권 값이 조금이라도 더 오를 때까지 버티고 있는 중이다.
명희는 동생 영희의 친구이자 영수와 미래까지 약속한 사이었으나, 가난에 쪼들려 다방 종업원, 버스 안내양, 골프장 캐디를 맴돌다가 임신까지 하게 되어서 자살해 버린다.
마침내 난쟁이네도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입주권이 팔려서 빌린 돈 십오만원을 갚고도 십만 원이나 남아서 대부분의 철거민들이 몰리는 성남으로 이사가기로 결정한다. 그날 난쟁이 아버지와 막내 영희는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다. 아버지는 체력이 떨어져 일을 나갈 수 없게 되면서부터 친구를 따라 써커스 무대에 선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집을 빼앗겨야 한다는 충격으로 표면화되어 집을 나가게 된 것이다. 영수와 영호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은 세 식구만 이사를 떠났다.
한편 영희는 자기네 입주권을 사간 부동산 업자이자 사업가인 젊은이를 따라간다. 영희는 젊고 아름다움을 담보로 그의 비서로 동거인으로 같은 아파트에 머물면서 입주권을 되찾을 기회를 엿본다. 그는 그녀에게 여러 벌의 옷을 사주면서 그녀의 젊고 순수한 육체와 영혼을 마음껏 유린한다.
그러던 중 영희는 그의 금고를 뒤져서 입주권과 약간의 돈을 꺼내 그 집에 들어갈 때의 복장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길로 그녀는 주택공사로 달려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모든 수속을 끝마치고, 집에 왔으나 가족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아버지는 굴뚝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는 것과 가족들은 성남으로 이사갔다는 말을 신애 아주머니한테서 듣고 영희는 쓰러진 채 깊은 잠에 빠진다. 꿈 속에서 가족들을 만난 영희는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어 버려'라고 큰오빠에게 이른다.
[인물의 성격]
아버지 → 난쟁이, 소외계층을 대표하는 인물. 성실하고 근면하나 매사에 소극적임
어머니 → 자상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긍정적 인물
영수 → 장남. 수재이나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합리적인 인물
영호 → 둘째. 형과 같은 인쇄소에 나가면서 형을 존경함.
영희 → 막내.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 인물
명희 → 영희의 친구. 가난 때문에 희생하는 물질 만능의 피해자
[이해와 감상]
◈ 작가 조세희의 실험정신이 담긴 난해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서술되는데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사건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시점에 있어서도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1장은 난쟁이의 남매 중 맏형인 영수, 2장은 둘째 영호, 3장은 막내 영희의 시점으로 각각 서술되는 복합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이 작가의 실험정신의 일단으로 보여지지만, 그것으로 인해 획득되는 문학적 성과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 이 작품의 중심 갈등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비유된다. 영수(맏이)는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대립에서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진다. 난쟁이는 선량하지만 힘이 없고, 그들은 부도덕해도 힘이 있다는 인식이다. 난쟁이의 이 가난과 불평등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삶은 3남매에게로 그대로 물려질 것이며, 그들이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욱 사회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이 못 가진 자들의 비애이며 굴레인 것이다.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없기에 항상 소외되고 위축되어 있다. 이 왜소한 자아의 모습은 '난쟁이'로 상징화되어 있으며, 난쟁이는 신체적 왜소함을 넘어서서 사회적 신분의 왜소화를 가져오게 된다.
◈ 난쟁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지섭이라는 청년은 아버지의 행동을 결정지어주는 중요한 사람이다. 지섭은 아버지에게 열심히 일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서도 삶이 이렇다면 이 땅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죽은 땅이라고 말하면서, 이 땅을 떠나 달나라로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에 아버지는 공감하고 그 삶의 지표를 지섭이 설정한 것에 맞춘다. 따라서 지섭이 꿈꾸는 세계(달나라)야말로 이 소설이 최종적으로 향해 있는 지점이 된다.
◈ 못 가진 자들도 행복을 꿈꾼다. 달나라로 가는 것을 꿈꾼다. 괴로울 때마다 달나라로 난쟁이는 작은 쇠공을 쏘아 올린다. 물론 그 공이 지구에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난쟁이도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난쟁이는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굴뚝 높은 곳에 올라 그의 꿈을 비상해 본다. 그러나 난쟁이는 나중에 그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즉 난쟁이의 비상은 곧 추락이었다. 세상은 비상을 용납하지 않고 철저히 추락만을 준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한으로 표상된다. 달나라라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물들에게서 우리는 더 큰 비극을 느낀다.
(참고 : 우리넷 현대소설 http://www.woorimal.net/hangul/hyundai%20fiction-menu.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