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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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저자가 쓴 일상생활속에서 느낀 감정을 잘 써내려간 수필인데, 나이가 꽤 든 올드미스인듯한데, 그래서 그런지 꽤 많은 공감이 갔다는...-_-;;
58년 개띠니.. 한비야씨와 동갑인데... 이런 여자를 보면 안됬다라는 생각이 우선 선입견으로 드는 것은 사실인데, 책에서 필자는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꽤 강하게 이야기를 한다. 외로움같은 이야기도 거의 없이...
과연 진짜일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뭐 그건 그녀의 인생이니...
암튼 이런책을 읽다보면 나도 이런 수필집을 한권 내봤으면.. 그리고 그러기위해서 더욱 성숙한 생각, 생활, 문체를 가졌으면 하고 바래본다...


<도서 정보>제   목 : 목소리의 무늬
저   자 : 황인숙
출판사 : 샘터
출판일 : 2006년 8월
책정보 : 페이지 298 / 454g  ISBN-10 : 8946415711
구매일 :
일   독 : 2007/8/16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책 읽은 계기>



<미디어 리뷰>
이 책은 “새와 나무, 고양이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인 황인숙이 3년여 만에 펴내는 신작 산문집이다. 황인숙은 이 책을 통해, 남들보다 명민하고 섬세한 직관을 가진, 그래서 더 치열하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자신이 만난 사람과 풍경들, 사물과 사건들을 접하는 동안 느낀 감상과 인상들을 세심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 목소리는 시시때때로 변주되면서, 삶이 지니는 다종다기한 표정들을 실감있게 전달한다. 시인이 묘사하는 일상은 ‘시인’의 신성神性이 거의 완전하게 거세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보편적이다. 시인은 다른 이와 똑같이 체중계의 줄어든 눈금에 환호하고, 간절한 기원을 담아 로또복권을 구입하며, 재미있는 만화책에 빠져 밤을 새기도 하고, 학교에서 울려퍼지는 확성기 소리에 항의하는 전화를 걸기도 한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든 쉽게 눈에 띌 만한 친근하고 낯익은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유사한 삶의 무게를 체감했을 독자라면 이러한 시인의 일상을 엿보는 동안 느껴질 동질감 때문에라도 적지 않은 재미와 위안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 특유의 섬려한 직관과 감성이 이러한 일상적 풍경들이 범속하고 남루한 것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준다. 시적인 직관에 의해 변주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아우른다. 삶이 보여주는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찬미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아리아처럼 우미하고, 자신이 옹호하는 가치와 신념을 표명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세레나데처럼 수줍고,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일들을 소개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왈츠’처럼 경쾌하다. 이처럼 다양한 목소리의 무늬는,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옹호라는 그녀의 일관된 신념의 호위를 받으며 호소력 짙은 색채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저자 : 황인숙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등이 있고, 산문집 《나는 고독하다》, 《육체는 슬퍼라》, 《인숙만필》 사진에세이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나 어렸을 적에》 등을 펴냈다. 1999년 동서문학상을, 2004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줄거리>



<책속으로>
모든 첫사랑은 연약하다
모든 첫사랑은 연약하다/변태식욕자/눈두덩이 파랄 자유/로또는 나의 힘/마일드한 커피 이야기/개 이야기/당신 개의 그림자라도 되고 싶어/목소리의 무늬/섬진강 이야기/오늘부터 나는/음악과 소음 사이/지난여름의 재즈다이어트/사물들/선물/식탁 나의 책상/밥과 술/목소리/아드레날린 러시

나의 검은 고양이
나의 이웃/멸치에서 시작된 일/중년 소년/체리주빌레/11월 이야기/신경쇠약 직전의 봄날/검정콩과 하얀 바람/나의 검은 고양이/나의 수더분한 나비부인/보고 싶은 승화에게/여자들/올케는 힘이 세다/집시처럼/친구/헬스장에서 생긴 일/언니/새와 고양이

장미의 벼락 속에서
깊어가는 여름날의 더운 이야기/야누스데이/가을이 가기 전에/그렇게 좋은 걸까?/마지막 버스/부엌에서 신문읽기/봄의 소리 왈츠/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안녕, 쓸쓸한 나이/장미의 벼락 속에서/꿈을 꾼 후에/지구촌, 해방촌/함덕에서 보낸 한 철/모네와 고흐의 여름/마드리드의 밤은 깊어/리스본의 첫 아침/이제 막 돌아오다/자본주의에, 혹은 자본에, 지다/추석 즈음/사랑의 여름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출입문 옆에 달린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대면서 보니 18시 40분이었다. 내 뒤에 바투 누군가도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댔다. 얼핏 초록색 스웨터가 삐져나온 누르스름한 외투 소매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창 맛있더라. 나 막창 처음 먹어봤거든. 막창이라는 게 그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어. 구워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 등갈비랑 막창 시켰거든. 처음에는 등갈비만 시켰었는데 은영 씨가 그러더라. 저번에 두 분이 오셨을 때 등갈비 2인분 시켰었잖아요. 야, 다 기억하더라!"
이십 대 초반 남자의 목소리였다. 우직하고 굵은 목소리로 그는 막창과 은영 씨 얘기를 순정하게도 했는데, 뒷얘기가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버스는 어느덧 정류장에 섰고 문이 열렸다. 서대문 경찰청 앞이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날은 어두웠다. 나는 서대문 사거리를 향해 걸었고 그는 어느 쪽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의 통화 내용이 들린 처음에는, 젊은 놈이 무슨 식충이같이 먹는 얘기를 저렇게 열성적으로 하나 한심했는데 곧 우습고도 애틋하고 풋풋하게 느껴졌다. 술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대나 떡볶이도 아닌 바로 막창에, 그 건강한 성년의 음식에 이제 막 맛을 들이고 저렇게 감동하는구나! 나도 막창에 막 연정이 생기려 했다. 나는 그가 호감과 존중심에 차서 은영 씨를 은영 씨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제 돈으로 식당을 드나들게 된 지 얼마 안 된 듯한 그가 그 어린 신사의 마음과 언행을 길이 변치 않았으면 싶었다.
- <목소리의 무늬> 중에서

한 친구로부터 그의 동네에 가족 없이 혼자 살던 가난한 노총각이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유서에 남겼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너무 외롭다. 술 먹자는 사람은 많아도 밥 먹자는 사람은 없더라.'
이 세상에 자기가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걱정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가슴 휑한 일일 것이다. 사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노릇이 아니다. 때로 먹는 모습은 얼마나 추하며 씹는 소리는 얼마나 상스러운가. 귄터 그라스의 소설 <넙치>를 보면 원시인들은 지금 인류와 정반대로 배설을 함께 하고 먹을 때는 혼자 외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먹이의 안전 확보 때문만이 아니라 식사 행위의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대개 친하지 않은 사람과 밥을 먹을 때에는 별 즐거움 없이 짐승처럼 배나 채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술은 쉽게 같이 마시지만 밥은 쉽게 같이 먹지 않는 것이다. 복이 넘치게도 내게는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맛있는 음식은 더욱 좋아한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나를 떠올리면, 그 자신은 먹는 걸 별로 즐기지 않아도, 같이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떼어놓지 못하나 보다.
- <밥과 술> 중에서

내 이웃인 고양이 얘기를 해 볼까? 2년여 전부터 내게 불편한 버릇이 생겼다. 식당에 갔을 때 생선이나 고기가 남으면 주섬주섬 챙겨 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불편하냐 하면 그 행태가 어딘지 구접스러울 뿐 아니라 식당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던 그것들이 가방에 넣는 순간부터 돼지밥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뭇시선 속에 스타일을 구기면서도 챙긴 음식이 그득할 때면 가슴이 뿌듯하다. 내가 사는 집 뜰을 드나드는 고양이들의 행복한 야옹거림이 귀에 선하기 때문이다. 노랑 얼룩 고양이 두 마리와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단골손님이다. 그들은 내가 있으면 절대 얼씬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뜰에 먹이를 놓은 다음 발소리를 죽이고 옥상 난간에 가서 내려다보곤 한다. 운이 좋으면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조심스럽게 먹이에 다가가는 걸 볼 수 있다. 곁을 안 주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가 어깨를 너부죽이 수그리고 내가 준 먹이를 먹는 걸 보는 흐뭇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요새는 얼룩고양이들이 눈에 띄지 않고 검정고양이만 보이는데 어쩐지 그동안 알고 있던 검정고양이 같지가 않다. 전의 검정고양이는 더 야성이 강하고 날씬했는데 요즘의 검정고양이는 뚱뚱하고 덜 몸을 사린다. 예컨대 어쩌다 마주치면 급히 몸을 피하다가도 내가 "요요요요" 하거나 "고양아, 이거 먹어!" 하고 안타깝게 부르면 2미터 어떤 날은 1미터 거리를 두고 멈칫 선다. 그전에는 내가 그러면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순식간 사라졌는데. 걔가 2년 동안 살도 찌면서 나름대로 나를 자기 이웃으로 인정하게 된 건가?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집주인 부부는 나도 그들에게 그럴 것이듯 내 안전을 걱정하고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할 것이다. 서로 속을 털어놓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지만 든든하다.
-<나의 이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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