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의 나이로 닭꼬치장사로 나름대로 성공한 젊은 처자의 이야기...
인터뷰를 듣다가 보면 엄청난 자신감을 가진 또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배울점도 엄청많은것 같습니다. 특히 Just Do It! 이라고 할까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바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에서도 혀를 두르게 만듭니다.
총각네 야체가게의 이영석씨와 아주 비슷한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저도 이만 분발해 보도록 해야 겠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주)COF 장정윤 대표
노점상에서 닭꼬치를 한 달에 3천만원씩 팔아치우고 20대에 40여 개의 가맹점을 낸 ‘꼬지필’의 장정윤 사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성공신화를 이뤄가고 있다. 그의 경쟁 상대는 ‘맥도날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맥도날드를 넘어설 것이라 자신한다. 당찬 부산 아가씨의 자신만만 창업 성공기.
“맞아요?” “오 마이 갓” “당근이죠!” 하이톤의 낭랑한 목소리로 표준어에 아직 남아 있는 부산 사투리, 영어까지 섞어가며 얘기하는 장정윤 대표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구관조 같았다. 조금은 정신이 없고 말이 많은 것도 솔직하게 인정한 그는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게 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사업가보다는 영락없는 20대 젊은 여성이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자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될성부른 떡잎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자신의 첫 사업으로 우유배달을 시작했던 꼬지필의 장정윤(28) 사장은 그야말로 ‘될성부른 떡잎’이다. 우유를 받는 집 앞 대문마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우유를 꼭 먹어야 하는 호소문을 적은 메모를 붙이는 등 자신만의 마케팅을 그 때부터 펼쳤기 때문이다. 그 작은 메모 한 장은 신통하게도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유업계의 비수기에도 그의 고객은 한 명도 우유를 끊지 않았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 학비와 어학 연수비를 위해 우유배달에서 닭꼬치 판매로 사업을 전환했다. 그의 첫 번째 사업장은 다름 아닌 그의 모교 앞.
“저도 물론 부끄러웠죠. 지나가다 알아보는 선생님들이 뭐하냐고 물으시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인근에 대학도 있어 젊은 세대들의 유동이 많은 곳이라 욕심이 났어요.”
수레 110만원에 오븐 등 장비 50만원으로 시작. 장사를 위해서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뼈 없는 닭꼬치를 개발했고 고기 사이에 떡을 넣은 ‘쫀득꼬지’,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화끈꼬지’, 갈비양념을 맵게 만들어 바른 ‘맵싹꼬지’ 등 다양한 맛의 꼬치들을 개발했다. 모두 손님들이 일러준 양념 비법을 귀담아 들어 개발한 것들이다. 여성들도 예쁘게 먹을 수 있도록 꼬치용 막대기를 빼 은박지에 싸주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천원짜리 닭꼬치가 하루 7백개에서 천개까지 팔렸다. 한 달 매출이 3천만, 순수익은 1천만원에 이르렀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였다.
혼자 하기 벅차 친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써가며 새벽 2시까지 팔았다. 하지만 노점상의 천적은 단속반. 단속반을 피해 점심장사를 과감히 접고 오후 5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면 닭꼬치를 먹던 손님들까지도 같이 수레를 끌어 골목으로 도망도 다녔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의 밑거름이고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렇게 6개월간 힘들게 번 돈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동안은 장사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맡겼다. 하지만 4개월 후 귀국했을 때는 이미 가게는 망한 상태. 복학 후 다시 장대표가 리어커를 잡았다.
노점상이 프랜차이즈를?
“한창 장사 잘되고 있는 데 맞은편에 30평짜리 치킨집이 생긴 거예요. 도저히 경쟁이 안 되겠더라고요. 자극이 됐는지 좀 무리를 해서 저도 어엿한 가게를 마련했죠.”
겁도 없이 사채까지 빌려 노점상에서 4평짜리 가게로 발전한 것도 역시 그답다. 콜라 서비스는 물론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번데기까지 제공했다. 물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때부터 장사에 대해 물어오고 가맹점을 내 달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자를 하겠다며 프랜차이즈를 동업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무리한 투자에 빨리 승부를 내려는 욕심 때문에 결국 수억원의 손실을 보고 동업은 1년 만에 깨졌다.
남은 빚 정리도 모두 장대표의 몫이었다. 힘들게 빚을 정리하고 또 다시 3억원을 대출 받아 또 다른 도전으로 서울행을 결심, 그대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국에서 전국적 브랜드로 성장하고 나아가 해외 진출의 목표를 위해 서울 진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해 부산에 물류 공장도 세웠다. 전국 모든 매장에서 같은 크기, 같은 맛의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맥도날드가 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회사가 됐는지 아세요? 바로 어디를 가나 똑같을 수 있도록 완전한 가공·물류 시스템과 매뉴얼을 갖췄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공장에서 한 번 튀겨낸 닭꼬치를 냉동 상태로 공급하는 체제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부산·경남에서만 32개 가맹점을 내고 서울에 입성, 대학로점을 필두로 목동점, 일산점 등 3곳을 오픈 했을 때 마침 조류독감이 터졌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짐을 싸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자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직원의 나이 평균은 스물넷. 대부분 부산에서 함께 고생한 초기 멤버 그대로다. 모두 그를 믿고 서울까지 올라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어 서울에 집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본격적인 가맹사업을 펼치기 위해 하루하루 바쁘기 때문에 지금은 안타깝게도 남자 직원은 고시원행, 장대표를 포함한 여직원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상황. 젊어서일까, 직원 모두 지금의 이 힘든 상황을 재미있게 즐기며 일한다고 한다.
“성공? 제겐 아직 먼 얘기에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20대에 전국 40여 개의 가맹점을 가졌음에도 그는 아직 성공은 먼 얘기라고 말한다.
올해 4월 안에는 미국 보스턴 캠브리지 대학 앞에 꼬치빌 해외 1호점이 연다. 다음은 중국과 일본.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것은 없다는 장정윤 대표. 무엇이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를 믿기 때문에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첫 번째 꿈은 어학연수였다. 물론 닭꼬치 노점상으로 그 꿈은 이뤘다. 두 번째 꿈은 맥도날드를 넘어설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이 또한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이냐고 묻자 정대표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제 인생의 마지막 꿈은 장애우, 노인 할 것 없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그런 사업적 공단을 만드는 것과 동물보호재단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우리 사람이 쓰는 모든 바디 제품에는 동물들의 비명 소리가 담겨 있거든요. 동물 임상실험을 하지 않은 바디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동물 애호가가 많아서 아마 대박 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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