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도 이준기가 나오는 플라이 대디의 일본판.. 물론 책으로 유명해졌고, 그다음에 일본판 영화가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노래방에서 폭행당한 딸의 가해자가 복싱선수에 아버지는 유력정치가라 찍소리를 못한 아버지.. 칼을 들고 복수를 하려고 가지만 다른 학교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졸라 맞고,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 당신딸때문이 아니라.. 당신자신이 상처받아서 그런다는 말에 발끈하고 가해자에게 도전하기로 하고, 회사도 휴직하고 피나는 훈련을 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것이 요시카 피셔의 나는 달린다. 기초로 돌아간다는것... 필요없는것들은 모두 버리는것..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가 도전하기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거기에 던지는 사부의 멋진 말들, 결국에는 버스와 달리기에서 이기는 모습, 마지막 승부에서 이기고 날아가는 모습.. 참 멋진 영화였고...
나도 그처럼.. 진정한 내 모습을 찾아서 날고 싶다.
플라이, 정호, 플라이!
멋진대사 |
멋진대사 - 감추기
딸아이는
날아! |
재와 다이아몬드 |
재와 다이아몬드 - 감추기
http://totuta.egloos.com/542697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마지막 결투씬에서 주인공이 되뇌이는 시(詩)인데, 평생 시와는 담쌓고 살아온 나같은 사람도 약간 감동시키는 그런 맛이 있었다. 욕망(아니면 희망도 좋고)을 달성하고 난 다음에, 무엇이 오는가 라는 질문에 간단하게 허무라고 답해버리면 정말 허무하다. 그런 소리는 아예 하질 말란 말이다. 욕망의 달성은 죽음이요, 그 다음은 재탄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사실 어렴풋이 해오기는 했지만.. 더 말도 안되는 소리 나오기 전에 각설하고, 이리저리 뒤져보니, 원래는 이 시가 키프로스섬의 시인데, 아마 원본은 뭐 옛날 그리스어쯤으로 씌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게 폴란드소설에 인용되고(재와 다이아몬드), 그게 또 영어로 번역되고, 일어로 바뀌고, 결국은 한국말로 번역된건데, 도대체 몇번의 번역을 거친건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혹시 원작자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전혀 다른 뜻이었던건 아닐까? 영어와 일어버젼(해석도 잘 안됨)만 놓고봐도 한국어 버젼(국내판 플,대,플에 수록)은 번역이 어째 좀 부실하게 된 것 같은데.. 우쨌든 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 횃불처럼, 그대의 몸에서 불꽃이 튈 때 그대는 아는가, 내 몸을 태우며 자유가 된다는 것을 가진 것을 던져 버려야 할 운명이란 것을 남은 것은 재와 폭풍처럼 심연으로 떨어질 혼미임을 영원한 승리의 새벽에, 재의 바닥 깊이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남는 다는 것을 松明のごとく、なんじの身より花火の飛び散るとき なんじ知らずや、わが身を焦がしつつ自由の身となれるを 持てるものは失われるべきさだめにあるを 残るはただ灰と、 嵐のごとく深淵に落ちゆく混迷のみなるを 永遠の勝利の暁に、灰の底深く 燦然たるダイヤモンドの残らんことを From you, as from burning chips of resin, Fiery fragments circle far and near : Ablaze, you don't know if you are to be free, Or if all that is yours will disappear. Will only ashes and confusion remain, Leading into the abyss? - or will there be In the depths of the ash a star-like diamond The dawning of eternal victory! - From Cyprian Norwid, "Prolog," Tragedia fantastyczna |
감독 : 나루시마 이주루
출연 : 오카다 준이치, 츠츠미 신이치, 마츠오 토시노부
스즈키상은 당황스럽다. 곱게 길러왔던 귀여운 딸은 노래방에서 웬 놈에게 두들겨 맞아서 병원에 입원했고, 가해자의 아버지는 차기 총리 유력 후보에, 가해자는 인터하이 복싱 챔피언이다.(흥미롭게도 가해자의 이름은 이시하라石原이다. 현 도쿄 도지사의 이름.) 만족스러운 가정을 일구었다는 믿음이 깨어지는 그 순간, 이상한 고교생 박순신(우리의 오카다 준이치)가 옥상에서 날아오르고,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스즈키상은 비로소 현실을 알게 된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 フライ、ダディ、フライ〉의 구성은 쿵푸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 쿵푸영화에서 클라이맥스는 단연 마지막 결투이겠지만, 내러티브를 결정하는 것은 결투 시퀀스가 아니라 공부(功夫)의 과정이다. 공부는 단지 적과 대적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복수란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이제 아버지 스즈키상이 해야할 일은 명백하다. 가족의 행복과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동일시하던 믿음을 스스로 부수고 주변을 인지하는 것. 그는 수련을 통해 이길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이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난 아버지들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귀한 아들’로 자라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바깥의 세계와 소통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딴에는 남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일들이 역설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집안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육아와 교육은 아내에게 전임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정심을 느끼는 것과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고립을 자초하면서 살아왔던 아버지들의 상황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된다. 아버지를 동정하는 것에서 머무르거나,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그릇된 반동적 권위를 세워주지 않는 대신, 이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련이 필요하고 그 때 아빠는 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