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이후.. 정말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노론들.. 영조가 정조에게 왕을 물려준다고 할때... 못하게 막느랴고 승지가 글을 쓰는것을 막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런 시련속에 왕에 오른 정조... 하지만 군대권은 거의 노론이 장악하고, 거의 사병과 같은 수준...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어서 점점 키워가면서 그 세력을 키운다...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갈때 옆에서 음식을 가지고 약을 올리는 자들이 조정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어쩔수 없이 보고만 있었던 그... 그가 드디어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다고 했다고.. 그리고 한달뒤에 죽었다고 한다... 그냥 딱 생각이 든것이.. 암살 혹은 독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정말 취임식때 했었다고 하는데.. 방송에서도 그냥 대충만든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꽤 많이 반영을 한듯하다.
암튼 그때나 지금이나 붕당정치로 중요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더욱 피폐해져가는 나라꼴이 그저 가슴아플뿐이다...
뭔가 시원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은 없는것인지...
조선은 바로 이뒤를 시작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으니... 오늘 이명박대통령의 취임식인데.. 잘했으면 한다...
[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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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어진
개혁군주 武人 정조대왕
어진을 그릴 때 정조는 군복을 입고 세번의 어진을 그렸는데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는게 없고
지금 어진은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이다.
그래서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4,000여 권의 책을 만든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식을 지녔던 정조는 성리학, 문학, 과학, 의학에 이르기 까지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규장각 문신들을 가르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이유로 성군으로 온화하게 그리다 보니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다.
KBS 한국사傳 "무인 정조대왕"에서 캡쳐
선원보략(조선시대 구황실 족보)에 나오는 정조의 무섭게 생긴 모습이다.
원손 시절(8세)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
숙모님 앞
상풍(商風, 가을 바람)에 기후(氣候)가 평안(平安)하신지 (숙모님의) 문안(問安)을 알기를 바라며
(숙모님을) 뵈온 지가 오래되오니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봉서(封書,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정조가 12세에 쓴 글
"진선폐사위지경"은 맹자에 나오는 글귀로
왕에게 좋은 것은 권하고 나쁜 것은 막아주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면서 당시 신하들을 의미심장하게 꼬집어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포도대장 구선복이 뒤주에 8일을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조롱하고 있다. (캡쳐화면)
이산은 이 장면을 몰래 숨어서 보았다.
"존현각 일기(세손 때 일기)"에 뒤주에 갇혀서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힘없어 어찌 할 수없는 자신을 한스러워 하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1775년11월 영조51년, 영조가 82세 되던 해에
모든 신하들 앞에서 세손 이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고 하교를 내리는데 노론의 홍인한은 승지의 기록도 찢어버리고 승지가 듣지도 못하게하는 횡포를 부린다.
존엄한 왕명도 거부하는 냉엄한 현실을 이산은 일찍부터 경험한다.
명의록 '존현각일기'가 기록된 책
★ 존현각 일기
*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것은 지금 당하는 핍박을 후세에 전하여 알게하기 위해서다.
* 임금을 만날때도 몸을 구부리지 않았고 신발끄는 소리를 탁탁내며 전혀 삼가고 두려워는
뜻이 없었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 사관이 기록을 못하는 지경이었다.
홍인한의 권세가 나라보다 더 대단했다.
노론의 생각은 "죄인지자 불위군왕 -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 없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면 옛날의 연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어떻게든 세손 이산을 막아야 겠다고 다 같이 뜻을 모으는 것이었다.
1776년 3월 10일 많은 신하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이산은 왕위에 오른다.
왕이된 이산의 일성은
寡人, 思悼世子之 子也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초, 자객이 3번에 걸쳐 궁궐을 침입했는데 정조의 침실까지 온 적도 있었다.
역모와 도둑도 들었다.
구선복으로 말하면 손으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먹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떨리고 얼굴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정조실록-
하지만 그가 병권을 쥐고 이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두렵고 달걀을 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
정조는 노론의 나라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장용영고사
무예를 기르치는 정조 (재현) KBS 캡쳐
정조는 총 37번의 무과를 치르는데,
18세기 조선의 전설적인 일당백의 무사 백동수 외 30명으로 정조의 호의 군대 "장용영" 만들어
하루에 3,000발의 활을 쏘게하고 사도세자가 완성한 십팔기로 무장케 한다.
그 때까지의 군대는 권문세가가 거느린 가병이었다.
군대가 임금의 손을 떠나 사병화되어 있어 유사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군대여서
가병(家兵)의 폐단과 다문(多門)을 염려하였다.
무예도보통지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기와 마상무예 6기를 합하여 집대성한 책이다.
목판본. 4권 4책. 규장각 도서.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白東修) 등에게 명령하여
업하게 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 간행된 《무예신보(武藝新譜)》의 내용을 합하고 새로운 훈련종목을 더한 후
이용에 편리한 체제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영은 18,000명으로 늘려 나가며 10년을 넘게 군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무인군주가 되었다.
어사고풍첩(정조의 활쏘기 기록)에 정조는 활의천재 신궁이였다.
145m의 표적을 5발을 1순으로 10순 그러니까 50발을 쏘아 50발을 다 맞췄다.
표적이 너무 커 작은 부채,곤봉,편곤에 쏘는데도 작은 부채는 5발쏘아 4발, 곤봉에10발쏘아
10발을 다 맞췄다고 한다.
요즘 국궁 선수들은 50발을 다 맞추는 경우가 1년에 한번쯤 나오고 선수 개인으로 보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라 한다.
특히 진법에 관심이 많아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편찬해서 규장각 학자 정약용,이덕무 등도 진법을 익혔다.
뛰어난 무예 실력으로 군권을 장악한 정조는 평생 숙원사업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명당 "현륭원"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죽게한 심환지,김종수,이병모 등 노론대신들을 묘앞에 세우고 정조는 오열하니 노론 신하들은 두려움에 떤다.
잔디와 흙을 움켜잡고 울며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실록1794)
정조 화성 행차도
노론은 종로 북촌에 권문세도가를 형성하여 살면서 권력만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
상권을 쥐고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을 곤궁케 했다.
정조 18년 수원 팔달산에 올라 수원성(6Km)을 지으라 하고 수원을 요즘의 신도시, 상업도시로
발전시켜 노론세력의 바탕을 약화 시킨다.
수원성에는 장용외영 6,000명을 상주 시키며 요새를 만든다.
연거도 (정조의 야간 훈련을 그린 그림)
정조19년 6,000여명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하여 전시도 아닌데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를 조련하고 호령하며 노론세력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품고있는 깊은 뜻을 펼쳐나간다.
정조 어필
정조필파초도
정조필국화도
국화도 낙관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
모든 하천을 비추는 달빛과 같은 존재
정조 자신을 달빛에, 신하들을 구름에 비유...
임금이 백성에게 직접 온정을 베푸는 정치를 꿈꾸었다.
임금 밑에 간신배들이 끼어들어 백성을 곤궁케하고 핍박하는 정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라의 은혜을 주고싶었다.
구름이 끼지 않은 환한 달빛을 백성들에게 비춰주고 싶음을 뜻하고 있다.
* 천하동례(天下同禮) - 임금도 사대부의 하나라는 노론의 사상
도끼로 궐문 기둥을 찍고 혈서를 쓰며 노론은 반기를 든다.
"임금이 거만하게 성인으로 여기며 신하들을 깔보고 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1800년 정조24년 5월30일
오회연교(五晦筵敎)
- 오늘의 하교는 참다 참다 나온 것.
아버지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을 것이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노론세력을 척결하겠다.
신하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한달 뒤 1800년 6월28일,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49세로 정조는 죽는다.
남인들 사이에선 독살되었다 했다.
정조, 그의 꿈은 이렇게 멈춘다.
상께서 승하하던 날 삼각산이 울고 고을에서 벼가 하얗게 죽어 버렸다. (정조실록)
임금 아래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정조!
노비제를 혁파하고 서얼 차별을 없애는 등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며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개혁군주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토록 갈망하던 세상의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국군 전통 의장대 ,정조시대의 십팔기 무술 재현
재현사진 ; KBS '한국사傳 무인정조' 캡쳐
참조 ; 한국사傳 ' 武人 정조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