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傳 -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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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토정 이지함에 대해서 책을 본적이 있어서 익숙한듯한 이지함...
하지만 도인, 기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방송...
상당한 개혁세력인듣하고, 무엇보다 백성을 위하는 모습이 대단한듯한 모습...
마포지역이 자꾸 언급되어서 시선이 가기는 했지만.. 그다지 참신한 내용은 아닌듯한 방송...












[제12회]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



▣방송 : 2007. 9. 8(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박건PD
▣작가 : 정윤미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솥갓을 쓰고, 마포강가의 흙집에 산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귀인(貴人)이었다.

▶ '토정비결'의 미스터리, 왜 이지함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미래를 점치는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것입니다."

그는 장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을 예견, 가솔을 이끌고 움직여 당대 최대의 정치적 무고사건인 청홍도 사건에서 살아남았으며,

"15년 후에는 이 나라에 피가 천리나 흐를 징조이다."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지함이 백성들의 세상사 고민거리를 풀어주고, 처방하기 위해 지은 책이라 알려진 <토정비결>. 그러나 <토정비결>에는 저자가 기록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풍속서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70%이상이 행운의 괘로써
삶에 지친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
<토정비결>. 그 저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안에 토정 이지함에 관한 진실이 담겨있다.


 

기인(奇人)으로만 기억되어야 하는가?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 토정 이지함

이지함은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갓 대신 솥을 쓰고 다녔으며, 마포강가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토정'을 지은 마포는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최초로 만나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였다. 이지함은 마포의 상인들과 어울리며 장사에 관한 살아있는 지식을 배우고, 직접 박 장사를 하여 막대한 부를 끌어 모으게 된다. 대대로 위세를 떨치던 당대 최고 사대부집안의 자손이었던 이지함.
상업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부를 버리고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에 내려간 것이다.
이지함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주민들에게 전수해주고, 축적한 곡식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 양반인 그가 장사를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빈민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를 앞지른 선진적 경제사상을 발휘하다.
쉰일곱이 되던 해, 재야에서 성리학 외의 다양한 학식을 접한 이지함에게 드디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선조의 등극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이다.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지함.
그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은, 옥 등의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을 개발, 해외에서 유통 시키자고 주장한다. 소수 지배층들이 독식하고 있는 자원을 국가가 관리해서 외국와의 통상을 통해 부를 축적하자는 것이다. 이 해외통상론은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지함은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경제사상가였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토정 이지함-

백성을 가난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지함을 21세기형 복지가로 만든다.
민중들의 가난이 유난히도 가혹했던 조선 중기, 그는
현대적 개념의 빈민구제기관 걸인청을 설립한다. 걸인들에게 단지 먹고 잘 곳을 제공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고, 그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하였다.



이지함이 죽은 후
백성들을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를 세웠다.


"현감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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