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추적 - 왜 ‘58년 개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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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유명한 58년 개띠들...
왜 그들이 유명해졌고, 그들의 애환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고등학교 입학때 본고사가 없어지고, 뺑뺑이가 시작된 사람들...
나와는 큰 관계는 없는 사람들이지만 방위시절 참 말썽이 많았던 58년 개띠 예비군들...

프로그램에서 58년 개띠중에 ktf 부사장과 노숙자인 사람을 보여주는데...
참..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물론 노숙자라고 폐인처럼 산것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됬는지...
암튼 정신차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는 13살 차이인 58년 개띠들..
13년후의 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고, 걱정된다...


방송 : 1월 4일(수) 밤 11:05~12:05
기획 : 박흥로(보도제작 2부)
취재 : 배재학, 최선호(보도제작2부 2113-4224)
신년특집 <뉴스추적>에서는 2006 병술년 개띠 해를 맞아 치열한 경쟁과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곡진 삶을 보내온, 현대사의 산 증인 ‘58년 개띠’를 대해부하고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왜 ‘58년 개띠’인가?>
‘57년 닭띠’, ‘59년 돼지띠’라는 말은 없는데, ‘58년 개띠’라는 말은 주변에서 흔히 쓰인다. 인터넷을 통해 동호회를 검색 해봐도 년도와 띠를 매개로 하는 모임은 ‘58년 개띠’모임이 유일하다.
58년 개띠들은 전쟁 후 베이비붐이 정점에 달했을 때 태어나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입시제도의 큰 변화를 겪었다. 대학시절 긴급조치와 서울의 봄, 광주항쟁 등 우리 현대사의 대 변혁을 겪었는가 하면, 사회초년병이던 지난 80년대 초반에는 ‘복부인 시대’로 알려진 ‘부동산 폭등시대’를 거치기도 했고, 지난 97년 말에는 IMF사태가 터지면서 사오정, 삼팔선과 같은 말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평균적 58년 개띠’ 행복의 조건은….>
58년 개띠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취재진은 통계청과 사회학교수 몇 명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평균적 58년 개띠’ 추적에 나섰다.
인천에 사는 김순태씨.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기관사로 취직해서 현재는 철도청 안전관리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재산, 학력, 가족관계, 월 소득 등에서 ‘평균적 58년 개띠’인 김순태씨는,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사회적 명성을 누리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58년 개띠’, 굴곡 많은 인생의 그가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사의 굴곡을 정면에서 바라봐야 했고, 아직도 남은 짐을 지고가야 하는 58년 개띠. 어쩌면 이들의 행복조건과 대한민국의 행복조건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어디를 가나 사람에 치이는 일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숙명이었다」
 
  「58년 개띠(1958년 출생자들을 지칭-편집자 注)」 동갑내기 4인의 人生流轉(인생유전)을 그린 작가 殷熙耕(은희경·46)의 장편소설 「마이너리그」에 등장하는 작중 인물의 한 독백이다. 대기업 중견 간부인 金모(47)씨는 어느 날 아내가 읽던 이 책을 우연히 펼쳐 들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고 말했다.
 
  [58년 개띠 金씨의 人生流轉]
 
  金씨는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1970년대 사건들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1958年生이다. 콩나물 교실, 국민교육헌장, 10월유신, 긴급조치, 베트남戰, 교련실기대회, 올드팝송, 이소룡, 임예진 등 그 시대를 읽는 문화 코드가 金씨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영화 「친구」를 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가 광복 후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면, 6·25 戰後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는 단연 「58년 개띠」를 꼽는다. 왜 「58년 개띠」가 戰後 세대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을까. 「57년 닭띠」도 있고, 「59년 돼지띠」도 있는데 말이다. 그 궁금증을 풀기에 앞서 마흔일곱 살 金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봤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金씨는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서울로 이주, 종암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53년 휴전협상 직후 벌인 출산장려운동 덕분에 1960년대 초 서울의 골목 골목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이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서울 시내 학교는 초만원이 되었다. 60명씩 꽉꽉 채운 학급이 한 학년에 20여 학급씩 되어 2부제·3부제 수업을 해도 교실이 모자랐다. 金씨가 다닌 종암초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金씨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수업을 하는 오후반이었다.
 
  金씨는 반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었다. 교사인 아버지는 金씨가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중학교에 진학하길 바랐다. 2남1녀 중 장남인 金씨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밤낮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金씨가 5학년이 되던 1969년 중학교 입시 제도가 無시험 평준화로 바뀌었다. 6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확인해볼 틈도 없이 「뺑뺑이 세대」가 된 것이다. 1971년 金씨는 추첨을 통해 집에서 멀지 않은 동대문중학교에 입학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시영버스를 타고 통학했던 金씨의 귀에는 아직도 車掌(차장) 누나의 『오라잇』 소리가 쟁쟁하다. 金씨는 단발머리에 목소리가 씩씩하던 그 차장 누나가 알고 보니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기억까지 잊지 않고 있다.
 
 
  학교도 회사도 경쟁률 최고
 
  58년 개띠 동창생들은 버스 차장뿐만 아니라 방직공 선반공으로도 수없이 진출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산업 역군이 된 것이다. 金씨와 한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동창생 중 3분의 1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학교 교정은 까까머리 아이들로 차고 넘쳤다. 金씨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경기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수험생활에 돌입했다. 언론에서는 「명문高(서울高·경기高·경복高) 입학 문이 해가 바뀔수록 좁아진다」며, 金씨가 입시를 치를 즈음에는 경쟁률이 최고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金씨는 가수 사이먼과 가펑클, 楊姬銀(양희은·53)과 金敏基(김민기·54)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성적은 늘 반에서 1, 2등 자리를 지켰다. 이변이 없는 한 서울 시내 명문高 진학에 무리가 없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高入 시험을 목전에 두고 이변이 발생했다. 정부가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마저 평준화한다고 발표한 것. 金씨는 또다시 학교 선택권을 빼앗긴 채 공 굴리기에 운명을 맡겼다. 그 결과 깡패 소굴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인근 학교로 추첨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교 생활을 했다.
 
  金씨처럼 명문高 진학을 준비했던 친구들은 『교육 정책이 왜 하필 우리 때부터 바뀌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편에서는 입시 제도의 변화에 대해 「실력만으로 명문高에 진학할 수 없는 권력자의 아들을 위한 배려」라는 소문이 끝도 없이 떠돌았다. 개중에는 『우리 때는 대학도 평준화될 것이다. 머리 싸매고 공부할 필요없다』며 정부의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을 조롱하는 친구도 있었다.
 
  1977학년도 大入 시험은 인구학자들이 예견한 대로 광복 이후 최다 학생들이 응시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예비고사를 여유 있게 통과한 金씨는 1차에서 낙방하고 2차에서 합격, 또다시 일류 그룹에 진입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교육 제도의 변화로 중·고등학교를 평범한 학생으로 지낸 金씨에게 이제 남은 도전은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류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 한 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金씨는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그리고 현재 재직 중인 무역 종합상사의 공채 시험에 응시, 대학 입시보다 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수출이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당시 무역 종합상사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직장이었다. 소위 말하는 SKY大(서울大·고려大·연세大) 출신들이 점거하다시피 하는 곳이 무역 종합상사였다. 金씨처럼 중위권 대학 출신이 입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중·고등학교 평준화 세대에 중위권 대학 출신인 金씨의 회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부서장은 출근 첫날부터 『중·고등학교는 어디를 나왔느냐』,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질문으로 金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 쉽게 氣가 꺾일 金씨가 아니었다. 學緣(학연)·地緣(지연)의 고리 없이 100% 실력으로 들어온 그가 아니던가. 가장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는 데 金씨는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입사 동기 중에는 비록 추첨이었을망정 명문 중·고등학교를 거쳐 일류대를 졸업한 친구들이 많았다. 일류 코스를 밟은 선배들에게 무시당하긴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뺑뺑이 세대라는 이유로 크고 작은 동문 모임에서 제외되었다. 人的 네트워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1958년생들은 學緣의 깊은 고리가 훨씬 약화된 첫 세대였다.
 
 
  IMF 외환위기에 직격탄 맞은 세대
 
  회사內 승진 경쟁은 입시나 입사 경쟁보다 더 치열했다. 金씨가 대리, 과장, 부장을 거치는 동안 절반의 동기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들은 중소 기업체로 再취업하거나 창업을 통해 자영업자로 나섰다. 입사 당시 가장 유망했던 종합상사는 정보화 사회가 到來(도래)하면서 가장 낙후된 분야로 전락했다. 金씨는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고 영어 강좌를 들었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임원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던 1998년 12월 생애 가장 충격적인 한파가 몰아쳤다. 외환위기로 인한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진 것이다. 부장급 임원진에 다수 포진해 있던 金씨의 동기들에게 IMF는 「쓰나미」만큼이나 위력이 큰 재난이었다. 각 기업마다 구조조정 작업에 돌입, 40代 고액 연봉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金씨의 입사 동기들이 가장 많이 퇴출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社內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연공서열의 파괴로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때가 되면 승진이 되는 선배 세대처럼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는 명예퇴직·조기퇴직의 철퇴를 맞기 십상이었다. 무한 경쟁 체제에 이어 이번에는 서바이벌 게임에 적응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金씨는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덕분에 40代 중반의 나이에 중견 간부로 승진했고, 억대 연봉자가 되었다. 선배 세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고속 승진이다.
 
  그러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봉이 높은 만큼 부담도 크다. 金씨는 최소한 50代 초반까지는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기 유학 중인 두 딸의 교육비 때문이다. 두 딸의 학비와 생활비가 한 달에 1000만원 가까이 된다. 金씨가 받는 억대 연봉은 대부분 두 딸의 교육비로 들어간다. 그러느라 金씨 자신을 위해 투자한 돈은 한 달에 몇만원씩 내는 생명보험료 외에 한 푼도 없다.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달리 고령화 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돼 노후 복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노후 문제의 직격탄을 맞을 세대 역시 40代라고 한다. 그럼에도 金씨는 노후 준비를 위한 투자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몇 년 후면 대학에 입학할 딸들을 경기가 어렵다고 불러들일 수 없는 까닭이다.
 
  노후를 생각하면 고민이 많다.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 시골로 내려갈 계획이지만 지금껏 누려온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이 알면 「배부른 소리한다」고 핀잔할 일이지만 金씨는 요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 시국 얘기 대신 앞으로 살 일을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金씨의 47년 인생에서 느낄 수 있듯 戰後 40代의 대표격인 「58년 개띠」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또한 출생자 수가 많아 어디 가든 줄을 서고 경쟁해야 했다.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
 
 
  왜 「58년 개띠」인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戰後 신생아 출생 수치는 1955년부터 늘기 시작해 1958년에 절정을 이룬다. 戰後 베이비붐 세대의 중심에 「58년 개띠」들이 서 있는 셈이다.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이화女大 사회학부 咸仁姬(함인희·46) 교수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전쟁 후 多産(다산)의 시대에 출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인구학적으로 엄밀하게는 1955~1961년 출생을 범위로 하고 있다. 이 세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상징되는 조국 근대화와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정치사적으로는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유신의 시대를 중요한 역사적 경험으로 내면화시켰다.
 
  베이비붐 세대는 수적 多數(다수)라는 사실만으로도 기존의 사회 구성과 질서, 가치관, 사회 시스템에 부담을 안겨 주었다. 이들 세대가 지나갈 때마다 길을 넓혀야만 했다. 한 예로 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는 시점마다 한국의 교육 제도가 크게 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기존의 것을 전환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중인 셈이다」
 
  1958년생은 어디서나 튄다. 사회 각계 각층에 박혀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 사상 최고의 입학난과 취업난을 뚫고 살아남은 까닭에 경쟁력이 높고 강한 탓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교육 제도뿐만 아니라 주거 문화도 바꾸었다. 이들이 결혼할 무렵 신혼부부들의 주거지를 위해 분당과 일산에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58년 개띠」는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 아닌가 싶다. 일례로 국회에 가도 가장 쉽게 만나는 나이가 1958년생이다. 제17代 국회의원은 2004년 8월 현재 총 272명. 이 중 沈在哲(심재철) 한나라당 기획위원장, 閔丙木豆(민병두) 열린당 기획위원장을 포함한 15명이 58년 개띠이다.
 
  미국에 체류 중인 秋美愛(추미애) 前 민주당 의원도 1958년생이다. 秋 前 의원은 1958년생에 대해 『너무 앞서가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세대』라고 규정했다. 또한 『일류 중·고교를 다니지 않아 엘리트 의식이나 권위의식이 약하다』고도 했다.
 
 
  『40代는 함께 묶일 수 없다』
 
  언론은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많은 수가 퇴출당한 40代에 대해 「그만두기에는 너무 이르고,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세대」라는 다소 씁쓸한 표현을 썼다. 40代를 뭉뚱그려 표현한 말이지만 실상은 「58년 개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나 다름없었다. 386세대의 맏형인 40代 초반과 개발연대의 막내인 40代 후반을 구획하는 정중앙에 1958년생들이 자리한 까닭이다.
 
  정보화 사회가 본격화된 이후 386세대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외치며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태도를 보였고, 40代 후반은 적응을 포기하고 개발연대의 主流세대인 50代 쪽으로 기우는 양상을 보였다. 40代 중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양쪽에 발을 디딘 세대였다.
 
  1958년생인 한양大 정보통신학부 韓賢洙(한현수) 교수는 「58년 개띠」에 대해 『수적으로 워낙 많으니까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어느 시대건 40代는 「샌드위치 세대」, 「허리 세대」, 「낀 세대」로 불린다. 혹자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똑같다는 의미에서 「하프(Half) 세대」라 칭하기도 한다. 기혼자라도 다시 반쪽(Half)이 되고 싶은 세대, IMF 외환위기의 어려움(Hard)을 뼈저리게 겪은 세대, 컴퓨터, 인터넷, 외국어 회화 등을 미처 익히지 못해 복잡하고 분주한 머리(Head)에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모든 일을 서둘러 성취하고자 조급(Hurry)해하지만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Hesitate)하는 세대, 가정과 직장을 먼저 생각하고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인간성(Humanity) 풍부한 세대라는 뜻에서 「H세대」라 일컫는 이도 있다.
 
  고려大 사회학과 朴吉聲(박길성·48) 교수는 『한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경험을 포착하기 위해 세대를 40代로 묶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즉 한국의 젊은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 「N세대」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朴吉聲 교수의 구분법을 따르자면 한국의 40代는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로 구획할 수 있다.
 
  베이비붐이란 전쟁 후나 불경기 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상황에서 인구의 자연 증가율이 현저하게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1960년 사이에 베이비붐 현상이 일었다. 이 시기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미국 사회의 소비 문화를 주도해 왔다.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를 일컫는 「딩크족」은 이때 생겨난 용어다.
 
 
  베이비붐 세대
 
  일본 역시 1948년을 전후해 베이비붐이 조성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를 「단카이(團塊)」 세대라 한다.
 
  우리나라는 6·25 이후 1955~1961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붐 세대라 한다. 우리 나이로 올해 44세에서 50세에 이르는 세대인 셈이다. 2003년 통계청이 발표한 주민등록상 인구에 의하면 전체 4838만 명 중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는 모두 567만 명이다. 그러니까 2005년 현재를 살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는 560여만 명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이 인원은 남한 전체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한다. 朴吉聲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정치적 지향에 있어서 386세대의 진보적 성향과는 구별되면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보수주의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세대 갈등의 영역에서는 위로부터는 권위에 눌리고 아래로부터는 기세에 밀리는 끼어 있는 세대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민주화를 향해 거세게 저항한 세대였지만 실패와 좌절의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386세대에 대해서는 『1980년대를 변혁의 이념으로 뚫어 왔고, 아래로부터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과 집합적 분출을 주도적으로 경험한 세대이며, 앞선 운동세대와는 달리 민주화라는 결실을 성취해 본, 어떤 의미에서 민주화 실험의 성공 세대』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는 같은 세대로 묶을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386세대
 
  『386세대는 가장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의 시대였던 朴正熙 군사 독재 시대에 성장하여 新군부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야말로 절망의 조건 속에서 희망을 실현해 낸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세대죠. 정치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386세대는 부각될 수밖에 없는 뿌리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 근대화와 유신시대를 통과하며 순응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성향으로 다듬어졌다. 반면 386세대는 민주화 투쟁을 펼치며 관념적이고 민중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朴吉聲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한 한국의 40代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40代는 과밀·과잉의 통과의례를 거친 세대입니다. 50代나 30代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혹독한 경쟁을 치렀지요. 그렇기 때문에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의 경쟁력은 굉장히 높습니다. 반면 낙오한 사람은 경쟁력이 약화돼 어려운 삶을 지탱해 가고 있죠.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세대가 바로 40代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한국만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에요』
 
  朴교수는 『한국의 40代는 20代에 고도의 산업화를 지켜봤고, 30代에는 민주화를 체험했으며, 40代에는 新자유주의와 맞닥뜨린, 사회 발전의 각기 다른 측면을 짧은 시간에 겪은 세대』라고 말했다.
 
 
  [40代를 읽는 코드]
 
 
  기형적인 가족관계, 「기러기 아빠」
 
  짧은 시간에 이뤄진 급속한 변화는 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우선 산업 근대화로 절대적 빈곤은 해결됐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 한국의 빈부 격차는 이 세대가 40代에 접어들면서 그 간극이 더욱 벌어졌다.
 
  혹독한 경쟁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사람은 더욱 강해지는 법. 외환위기 이후에도 자리를 지킨 사람은 퇴출자가 많은 만큼 빠른 속도로 승진했다. 쉽게 말하면 40代는 구조조정의 이득을 보는 세대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보는 세대가 된 것이다.
 
  유학전문 교육기관들에 의하면 자녀들을 가장 많이 조기 유학 보낸 세대가 40代이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부인까지 딸려 보내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무법인 志誠(지성)의 吳世勳(오세훈·44) 대표 변호사는 『주변에 기러기 아빠가 엄청나게 많다』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 또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아이들을 유학 보내는 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정착해 가는 것 같아요. 저는 딸만 둘인데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왜 아직도 유학을 안 보냈느냐고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곤 해요. 「기러기 아빠」로 사는 게 非정상적인 것인데도 하도 많으니까 오히려 主流가 돼 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한국의 40代만 갖는 특징이 아닌가 싶어요』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는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가족 관계를 기형적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자녀들을 유학 보내려 하는 40代 아빠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吳변호사는 『40代가 겪은 세상의 변화 속도에 대한 두려움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초등학생 아들을 유학 보낸 鄭菜基(정채기·43) 강원관광大 교육학과 교수에게 들었다.
 
  『우리 세대는 컴퓨터에 약하고 외국어에 약해요.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요. 40代 남성들이 부인들의 극성 때문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조기 유학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건 자신이 당한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자식에게만큼은 되물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저부터도 내 자식이 영어 실력 때문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지는 건 싫거든요』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40代 사이에는 빈익빈 부익부 증상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 달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을 해외에 송금하며 「기러기 아빠」로 지내는 家長(가장)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인 궁핍으로 아내에게 이혼 소송을 당하는 家長도 있다. 한국 男性學연구회 회장이면서 남성의 전화 상담사로 봉사하고 있는 鄭菜基 교수는 『최근 들어 이혼 상담 전화가 부쩍 늘었다. 그중 75%는 40~50代 남성들로 부인이 이혼을 요구한 데 대해 놀랍고 두렵고 억울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태반이다』라고 했다.
 
  「남성의 전화」 李玉以(이옥이·54) 소장은 『실직 후 가족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40代 남성이 많다』고 했다. 또한 『예전과 달리 요즘 젊은 여자들은 아이가 있건 없건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걸 가장 참기 힘들어 한다』고 했다. 그로 인해 40代에는 이혼율도 높고 사망률도 높다는 것이다.
 
 
  이혼율과 자살률 최고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3년 한 해 동안 이혼한 사람은 남녀 합쳐 총 16만7096명이다. 이 중 남자는 40代 초반이, 여자는 30代 초반이 월등하게 많았다. 남자는 42세(7867명), 41세(7651명), 40세(7548명), 43세(7386명) 순으로, 여자는 32세(7875명), 34세(7830명), 33세(7768명), 31세(7417명) 순으로 이혼을 많이 했다. 학력별로는 남자의 경우 고졸자(9만442명)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대졸자(3만3347명)가 많다. 여자는 고졸자(9만6446명), 중졸자(2만7280명), 대졸자(2만3005명) 순으로 많다.
 
  鄭寀基 교수는 40代에 이혼율이 가장 높은 것에 대해 1990년대 들어 득세한 페미니즘의 등장을 주요 요인의 하나로 꼽았다. 후기 산업 사회에 진입하면서 남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사이, 여자들은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향상시킬 방법을 공부했다.
 
  40代 남성들이 정보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한국 전통의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0代 남자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朴吉聲 교수는 40代 남성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일지 모르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前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전통성과 근대성의 중첩 세대인 40代 남성은 베이비붐 세대건 386세대건 50代 못지않은 권위주의와 보수적 성향이 강합니다. 여성들이 빠르게 근대성을 수용한 반면 남성들은 그러질 못했죠』
 
  30~40代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페미니즘 물결은 디지털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남자들에게 「찻잔 속의 태풍」과 같았다. 鄭寀基 교수는 40代 남자들이 아무 준비 없이 맞닥뜨린 페미니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존 방식과 전략에만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은 生의 복병이었습니다. 따로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던 남자들이 이론으로 무장된 여자들에게 맞설 재간은 없었죠. 가부장적 권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아내들의 반란에 할 말을 잃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뒤늦게 공부한 누나나 여동생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오빠나 남동생에게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일방적으로 야단치는 격이었죠』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에 의하면 남자는 40代가 되면 남성 호르몬이 줄고 여성 호르몬이 늘어난다. 반면 여자는 여성 호르몬이 줄고 남성 호르몬이 늘어난다. 이 때문에 40代에 이르면 가정에서의 남녀 역할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감수성이 예민해진 남편은 아내나 아이들의 일상적인 타박에도 상처를 받고, 통 크고 괄괄해진 아내는 한없이 약해진 남편을 답답해한다. 생리적으로도 충돌이 많을 시기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더해질 경우 집안은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여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급기야 전업 주부였던 여성들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家長 중심의 전통적인 가정에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실직한 家長은 아이들에게까지 소외당하며 코너에 몰렸다. 한국 사회엔 여성을 늘 피해자로 봐온 까닭에 여성 문제나 고민을 상담해 줄 여성단체는 많으나 남성단체는 많지 않다. 남자들로서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鄭寀基 교수는 『40代 남자들은 부모를 찾기도 어려운 세대』라고 말했다.
 
  『40~50代는 도시 핵가족의 첫 세대입니다. 농촌의 마지막 세대인 60代가 부모를 부양하며 살았다면 40代는 부모를 버리고 도시로 떠나온 세대죠. 부모를 버렸으니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으리란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인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많이 외로운 세대지요』
 
  40代는 이혼율뿐만 아니라 자살률도 높다. 2003년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총 사망자 24만5817명 중 자살자 수는 1만932명이다. 이 중 40代가 2227명으로 가장 많다. 20代는 1326명, 30代는 1936명, 50代는 1603명이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자 수는 최근 3년 사이 1.5배 이상 증가했다. 2000년도 40代 자살자 수는 1302명이었다. 통계청은 자살률 증가 원인으로 경기 침체를 꼽았다.
 
 
  보편화된 40代 퇴출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이번 기사를 위해 기자는 국내 5大 기업 홍보 담당자에게 「현재 근무 중인 40代 직원과 임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묻는 공문을 보냈다. 그 결과 돌아온 대답은 『社內 기밀상 공개할 수 없다』는 것과 『정년 문제와 관련된 사안이라 함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SK텔레콤만 『업무 특성상 평균 연령이 젊은 편』이라며 『총직원 4200명 중 40代는 700명(17%)이며, 부장급 이상 간부는 280명이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대기업들은 하나같이 직원들의 연령별 분포를 밝히기 꺼려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균 연령이 너무 젊어 정년이 빠를 것이라는 오해를 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한 전자회사 간부는 『평균 연령을 언론에 공개할 경우 좋은 人材들이 지원을 꺼려 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40代 퇴출의 부작용들
 
  IMF 외환위기 이후 각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40代 중견 사원들이 대거 퇴출된 데 대해 한양大 정보통신학부 韓賢洙(한현수·47)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40代 퇴출은 정보화 사회를 역행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 사회란 지식과 人的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충분히 활용될 때 발전할 수 있어요. 경험이 없는 20, 30代로는 지식 기반 사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회가 정보화되고 글로벌화될수록 40代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습니다. 40代가 신규 사업 개발에 앞장서야 청년 실업도 극복할 수 있어요. 예전 40代와 요즘 40代는 체력적으로도 많이 다릅니다. 40代 퇴출은 우리 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아닌가 싶어요』
 
  韓교수는 『40代 퇴출은 전통 산업을 위축시키는 일이다. 경제가 발전하려면 전통 산업과 IT 산업이 병행,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영 방식은 미국식도 일본식도 아닌 기형적인 행태로 발전하고 있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큰 기업이 없어져 40代 경험을 활용한 투자보다는 연봉이 많은 사람을 잘라내는 기업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투자하지 않는 한 청년 실업률은 날로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韓교수는 40代 퇴출 방지를 위한 방안으로 임금 피크제 실시를 추천했다. 기업들의 임금 피크제 실시는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보험센터 琴在昊(금재호·49) 소장도 강조한 바였다. 琴소장은 『임금 피크제는 경기 불황과 고용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代案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40代가 돈을 쓰지 않는 한 경기 불황은 장기화될 것이고, 청년 실업 역시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임금 피크제 이야기에 앞서 한국의 40代들이 고용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꼽았다.
 
  『한국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은 병역 때문에 고용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통 건강한 남자라면 병역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게 27세입니다. 55세를 정년으로 잡는다 해도 경제 활동이 가능한 시간은 겨우 25년 정도예요. 25년 동안 벌어서 집 사고, 가정 꾸리고, 아이들 교육비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죠. 私교육 천국인 우리나라에서 25년 벌어서는 겨우 아이들 교육비나 충당할 뿐 노후 대책은 생각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40代가 되면 불안해질 수밖에요. 미국의 경우 65세까지 고용이 안정되어 있어 최소한 40년 동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민 각자가 私교육비를 좀 줄이면 되는 것 아닐까. 韓賢洙 교수는 『대학에 몸담고 있지만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불안하기 때문에 私교육비를 줄이는 일은 어렵다』고 말했다. 私교육비를 줄이려면 변별력이 확실한 입시 제도와 투명한 교육 정책 수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 제도는 작은 실수 하나가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 정도로 불안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私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탈길에 서 있는 수레바퀴
 
  40代가 불안해하는 건 고용문제뿐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나라 남자들은 평생 벌어 아이들 교육비로 쏟아붓기 때문에 노후를 준비할 여력이 없다.
 
  최근 발표한 매킨지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전돼 인구 구조상 2026년이 되면 젊은 층 1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1988년의 경우 4명당 1명의 노인을, 2003년도에는 3명당 1명의 노인을 부양했다.
 
  외국계 보험사 ING생명에서 재정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李秀庭(이수정·40)씨는 노후 복지와 관련해 한국의 40代 중반들을 가장 걱정했다. 그는 『40代 중반의 중산층은 조기 유학 열풍을 몰고온 당사자들일 만큼 자식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그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들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해 노후가 보이지 않는 세대다』라고 했다. 그는 현재 40代들이 노후를 맞을 시 문제점을 이렇게 말했다.
 
  『제가 노후 문제로 재테크 상담을 하는 회원 중에는 40代 중소기업 사장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의 수입을 조기 유학 보낸 자녀들에게 쏟아붓고 있다는 점입니다. 경기 불황으로 수입이 줄었는데도 중도에 불러들일 수 없으니까 어렵게 융통해서 이전과 같은 액수의 돈을 보내고 있는 거죠.
 
  우리 부모 세대는 보험을 드는 생각으로 자식에게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식에게 투자해도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런데도 투자를 멈추지 않는 그분들을 보며 저는 비탈길에 세워 놓은 수레바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한국의 40代는 노후에 벌어질 사태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려 들지 않는다. 은퇴 후의 삶을 돌아보기에는 자신들이 이미 너무 많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李秀庭씨는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그들이 답답해 가끔 『은퇴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 대답을 못 한다고 한다.
 
  『40代 중산층은 戰後 한국 사회의 소비 주체로 살아왔어요. 부모 세대가 일궈 놓은 열매를 따 먹으며 편안하게 교육을 받아 문화생활을 누릴 줄 알았죠. 고령화 사회인 만큼 이분들은 은퇴 후에도 30년 정도 더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질적으로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월급의 반도 안 되는 연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분들이죠. 은퇴 후에도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마 지금 받고 있는 월급만큼의 돈이 필요할 겁니다』
 
 
  『40代는 자녀에게 짐이 될 것』
 
  李秀庭씨는 『40代들이 자녀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 자녀에게 짐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은 중진국인 상태에서 고령화가 되어 사회 복지 시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앞으로 준비해야 할 복지 시설에 대한 부담은 지금 40代의 자녀들이 질 수밖에 없다.
 
  李秀庭씨는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젊은이와 노인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면서 『40代는 지금 하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점검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低금리 시대지만 지금이라도 투자 마인드를 갖고 노후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40代의 노후 문제를 琴在昊 소장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임금 피크제를 통해 지속적인 고용 안정을 꾀하면 고령화로 인한 노후의 짐을 자연스럽게 덜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주요 소비층인 40代의 소비 욕구를 얼어붙게 만든 고용 불안을 해소함으로써 소비 경기를 살리고, 서비스 산업의 고용 창출을 통해 청년 실업을 줄이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국민연금 적립금이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내리라는 보도는 언론에서 針小棒大(침소봉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봐요. 연금 문제를 거론할 때 등장하는 인구 전망도 잘못돼 있습니다. 2030년부터 인구가 급격하게 줄기 시작할 거라고들 하는데, 출산 가능 인구가 있는 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은 준비 안 된 노후에 대해 경고성 메시지를 주는 것보다는 국민연금으로도 기본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게 더 급하다고 생각해요』
 
 
  경제 성장률 5%에 걸린 목숨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4년 11월 현재 실업자 동향은 전체 77만9000명 중 청년층(15~19세)이 36만 명(7.3%)으로 가장 높고, 20代가 33만1000명(7.1%)으로 그 다음으로 높다. 40代는 13만5000명(2.1%)으로 의외로 낮은 편이다. 2003년과 별 차이가 없다. 이에 대해 琴在昊 소장은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청년 실업과 40代의 실업은 나란히 비교하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표면적인 수치만으로 세대별 실업률을 분석해서는 안 돼요. 40代 실업률이 낮은 건 家長이라는 이유로 질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고, 청년 실업이 높은 건 부모라는 안전망이 있어 질적으로 많이 가리기 때문입니다.
 
  40代는 자영업자들이 가장 많은 세대입니다. 최대 위기에 빠져 있는 그들은 실업자 이상이죠. 정부가 신용불량자 구제에 나설 계획이라면 청년층보다는 40代 자영업자들부터 먼저 구제해야 할 겁니다. 청년 신용불량자들에게는 부모가 있지만 40代 신용불량자들에게는 정부가 아니면 해결해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琴소장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고용 안정을 꼽았다. 그는 고용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률이 최소 5% 넘어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고용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琴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노동시장은 매년 37만~38만 명씩 늘고 있는 생산 가능 인구(15세 이상) 중 상당수에게 일자리가 제공돼야 안정된다.
 
  『경제 성장률이 4% 이하로 떨어지면 사회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을 계층은 40代 후반입니다. 서비스업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많기 때문이죠. 한국은 제조업의 경우 생산성이 높은 데 반해 서비스업은 생산성이 아주 낮습니다. 그 때문에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 인수합병 작업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실업자가 양산될 겁니다. 서비스업은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외국 기업에 넘어갈 확률이 아주 높지요. 일례로 리서치 업체의 경우 이미 대부분 외국계 기업이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琴소장은 『現 정부가 늦게나마 분배 위주의 정책에서 성장 쪽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는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우선이냐」 하는 논쟁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논쟁과 같다』며 『성장과 분배는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기자는 이번 기사를 위해 사회 각계 각층에 있는 40代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 빠뜨리지 않고 던진 질문이 「40代를 나고 있는 현재의 소감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나이 40이 되면 뭔가 앞이 보일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라는 축도 있었고, 『불혹이라고 하기에 부동심 같은 게 생겨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도 끈 떨어진 연처럼 마음을 못 잡고 있다』는 축도 있었다. 개중에 가장 많은 대답은 『세상에 나말고도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축이었다.
 
 
  『40代가 되니 세상 이해』
 
  법무법인 志誠의 吳世勳 대표 변호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30代에는 1인4역을 소화하느라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 때문인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죠. 이해한다 해도 겉 따로 속 따로일 때가 많았고요. 그런데 나이 40이 되고 나니 「세상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사람은 없다」는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게 되더군요』
 
  吳변호사가 국회를 떠나온 지도 어느덧 1년이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정치권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어야 타협점을 모색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여당인 열린당과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40代 소장파 의원들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일하지 않고 운동만 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순결할지는 모르지만 직업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실은 없고 이상만 품을 우려가 있죠. 반면 일만 해 온 사람은 업무상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많이 만나죠. 일의 유연한 진행을 위해 현실과 타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부패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도덕적 우월성과 일에 대한 프라이드는 늘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상대가 걸어온 길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경멸하기보다는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민주화는 상대적 보편성을 인정할 때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吳변호사는 『한때 「진보」는 무조건 「개혁」이고 「보수」는 무조건 「수구」로 모는 사회 분위기에 높은 벽을 느꼈다. 그러나 아주 느린 속도지만 「진보」와 「개혁」, 「보수」와 「수구」는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는 쪽으로 변해 가는 것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게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간의 봉합되기 어려운 갈등도 시간이 지나면 해소되리라 믿습니다』
 
  그는 現 정부 들어 더욱 극심해진 세대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도 와해되리라 믿고 있다. 50代와 30代,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을 이어줄 40代 국회의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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