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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숭산스님의 걸어오신길.. 그동안의 에피소드.. 스님의 행동, 말등에 대한 제자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
잠깐만 봐도 대단하고.. 보통의 관념적인 종교적인 접근방법과 다르게 열린 마음으로 불교를 전해주고, 어려운 환경에서 미국을 비롯해서 수많은 외국에 한국불교를 전달하는 숭산스님의 길을 조금이나마 볼수 있는 책이다.
나중에 2권도 함 봐야겠다...
출판사 리뷰 |
출판사 리뷰 - 감추기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하는, 버리고 떠나는 삶 1974년 뉴욕 할렘가. 브라운대학의 한 교수가 세탁소에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의 삭발한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한국의 숭산 큰스님 아니십니까?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미국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하고 싶어 2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그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말은 안 통해도 눈빛과 태도만 보아도 되니까요.” 숭산 큰스님은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젠 센터를 꾸려가기 위해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직접 돈을 벌었다. 한국 종단의 주류 자리를 버리고 마흔여섯의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밑바닥 생활을 감수한 스님의 삶은 언제나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매번 있던 자리를 떠나곤 하는 삶이었다.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 출가할 때에도 스님의 삶은 그러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스님의 영어 실력은 물론 형편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믿고 있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성이란 서로 다른 얼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도 하나라는 것을……. 진정한 행복, 즉 물질보다 정신적인 행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70년대 미국 젊은이들을 보면서 스님은 다짐한다. ‘그렇다. 불교는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 스님은 프로비던스 도일 애비뉴에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도일 애비뉴는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할렘 거리였다. 마흔여섯이라는 나이에 한국에서 시봉만 받던 스님이 혼자 살림을 꾸려간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 더구나 영어 한 마디 못하고 지금처럼 국제화된 시절도 아닌 때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머리를 깎은 중년 남자가 혼자 살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_1권 36~37쪽 스님은 초기 미국 생활을 회고할 때 “귀머거리, 까막눈, 벙어리 생활을 한 3년 정도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당시 언어소통이 너무 힘들어, 중국에 불법을 전하러 간 달마대사도 중국말을 알지 못해 9년간 면벽수행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었던 생활이었지만, 아주 훌륭한 수행이었다”고 말했다. _1권 45쪽 “영어를 잘 못하셨는데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지요. 사실 우리는 참선수행을 통한 마음의 평화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스님의 밝고 맑은 에너지로 인해 크나큰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낯선 타향에서 오직 법과 진리를 가르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국의 청년들에게 헌신하는 모습 자체가 저희들에게는 감동을 넘어 신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_1권 48쪽 논리적이고 유연하고 폭넓은 가르침 숭산 큰스님은 당신이 이뤄놓은 것을, 사람이 아닌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조직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당대에 끝나지 않는 것이 되도록 만들었다. 우리 땅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물들, 가치관들, 아이디어들은 숭산 큰스님의 법을 통해 외국 땅에서 소중하게 환생했다. 숭산 큰스님은 미국에서 관음선종(Kwan Um School of Zen)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너희에게 줄 뿐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미국식 불교, 폴란드식 불교, 프랑스식 불교가 생겨날 것이다.” 숭산 스님은 한국 불교를 외국으로 전파하면서 핵심은 강화하되, 방법은 그 나라 방식으로 가르쳤다. 숭산 스님은 서양 젊은이들이 논리적으로 설득되어야만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방식을 고집하는 대신,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유연하고 상대적이고 폭넓은 가르침으로 젊은이들을 이끌어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직관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큰스님의 합리적이고 개방적이고 대화지향적이며 자유로운 가르침 방식은 제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니, 양코배기 아이들이 백팔배를 한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난 쟤들한테 ‘무엇무엇을 하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냥 그네들이 보거나 말거나 따라 하거나 말거나 내가 그동안 해오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 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한 아이가 물어요. 절을 왜 하느냐고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지요. 이 몸뚱이는 소아이다. 내가 절을 하는 것은 저 돌부처님이나 금부처님께 절을 하는 게 아니다. 내 몸속에는 법신이 있는데 이 법신이 바로 대아이다. 소아가 대아한테 절을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백팔배를 하기 시작하는데 곧이어 다른 아이들까지 따라 하더라고요.” 김 교수의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님이 제자들에게 “존, 넌 저기 가서 차 달여 오고, 스티브, 넌 저기 가서 과일 가지고 오너라” 하며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부모 말도 안 듣는 서양 아이들인데 이렇게 부려먹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다 도망가버리면 어쩌시려고요.” “나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는 원주, 너는 교무다 하면서 각각 책임을 주었어요. 내가 무엇무엇을 하라고 해서 그들이 따르는 것은 내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책임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_1권 58~59쪽 “하코방 같은 집에 서양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같이 생활을 하는데, 한마디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미국 애들이라지만 여자 남자 같이 수행을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까요. 그건 그렇다 치고 애들이 하나같이 한국에서 만든 승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거예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죠. 내가 법당에 들어서도 미국 아이들이 내게 아는 체도 안 하고 며칠 머물렀는데도 말 한 마디 걸지 않아 ‘참 예의 없는 서양 놈들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이 묵언을 하라고 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나중에 공항에 그 젊은 미국 아이들이 모두 승복 입고 고무신 신고 나와 나를 배웅해주었습니다. 어른을 모신다는 관념을 갖지 못한 그들이 큰스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모습이 너무 진실해 보여 새삼 큰스님을 다시 보게 되었지요.” _1권 60~61쪽 불교를 처음 접하는 미국인들은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사사건건 의문을 갖기 마련이다. 더구나 미국인들은 논리적인 허점을 발견하거나 의문이 생겼을 때,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묻고 또 묻는다. 우리처럼 ‘이것을 여쭈어보면 큰스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거리낌이 없다. 스님은 서양인들의 이러한 의식구조를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질문에 매번 정확한 답을 주었다. 그것이 또한 서양 젊은이들이 스님을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였다. _1권 61~62쪽 관음선종과 조계종의 가장 큰 차이는 제도적으로 승속의 구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가 불자도 승복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고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계를 받는다. 또 단순화된 공안으로 깨달음의 정도를 측정하는 단계별 테스트를 차례로 통과하면 선사나 지도법사의 자격을 준다. 스님은 이러한 파격성이 합리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서양인들에게 맞다고 여겼다. 미국의 젠 센터에는 스님이나 불교 신자만 오는 게 아니다. 신부, 수녀, 목사, 요가 선생, 종교학과 수강생 등 영적인 깨달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이들이 거부감을 갖거나 지레 겁을 먹고 수행을 어려운 것으로 여기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숭산 스님은 좌선할 때도 특정한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보통 참선수행을 하면 50분간 참선하고 10분간 포행(산책)을 하지만, 미국에서는 30분간 참선, 10분간 포행으로 바꾸었다. 의자에 앉는 생활이 버릇이 되어 방석에 앉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무리한 수행을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좀 더 편한 방법을 쓰자, 더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참여했다. _1권 117~119쪽 생각의 전복, ‘공안 인터뷰’: 생각을 내려놓게나, 오직 모를 뿐 숭산 스님은 간혹 어떤 말도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엔 젓가락으로 제자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며 이렇게 얘기했다.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 다 내려놓으라고, 알았나?” ‘오직 모를 뿐’, ‘너에게 30방망이를 내리겠다’ 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착하지 말며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는 의미를 담은 숭산 스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숭산 스님은 공안 공부 방식을 한국 불교 전통에 있는 법거량 방식과 혼합해 ‘공안 인터뷰’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공안은 한마디로 ‘사고의 전복’, ‘생각 바꾸기’ 훈련이다. 일상생활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켜 내가 현재 처한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꾸어가는 고도의 지적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하고 싶은데, 정신집중이 안 됩니다. 저와 아기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당신의 아이가 스승입니다.” 또 어느 날, 한 제자가 스님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왜 미국에 와서 포교를 하십니까?” “너 때문에.” 하루는 스님이 프로비던스 젠 센터에서 아침 공양을 하면서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한 제자가 스님의 이런 모습이 의아하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선에서는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고, 책을 읽을 때는 책만 읽어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다못한 제자가 물었다. “스님, 어찌 식사를 하시면서 신문을 읽고 계신가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선 아닌가요?” “식사하며 읽을 때에는 식사하며 읽기만 하게.” _1권 65~66쪽 “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는구나. 자, 너는 누구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큰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모르는 것이다. 오로지 이 마음뿐이다.” _2권 142쪽 큰스님의 웃음과 사랑 숭산 스님의 성공은 어떤 이론이나 말보다 그가 보여준 제자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언행일치의 삶 때문이었다. 서양인 제자들은 한결같이 스님의 말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가르침이며 귀감이었다고 말한다.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숭산 스님의 따뜻한 가르침, 유쾌한 웃음, 집착 없는 자비로운 사랑, 천진하고 소박한 태도를 접하고서 비로소 힘을 얻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주방 식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던 스님이 갑자기 사전을 뒤적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지, 누들(Noodle: 국수), 누들! 자네들, 누들 좋아하나?” 모두들 스님의 억양과 열정에 대한 답례의 표시로 한가득 미소를 띠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스님은 주방을 온통 국수공장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맛있는 국수를 뽑아냈다. 모두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스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에선 이렇게 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이것이 넘버 원이야! 이걸 먹고 건강해지고, 힘을 얻자고!” _1권 53~54쪽 큰스님은 어느 날 식사시간에 갑자기 당신의 그릇에 식탁에 차려진 모든 음식을 담아 넣기 시작하셨다. 김치, 땅콩버터, 계란, 딸기잼, 밥, 수프, 고추장, 콩나물 등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조리 섞는 것이었다. 다들 큰스님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마침내 한 제자가 큰스님께 말씀드렸다. “이건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생식을 하시든가 아니면 접시에 따로 담아야 합니다.” 큰스님은 이렇게 말한 제자의 접시를 흘낏 보시고는 물으셨다. “자네 음식은 마음에 드나?” “예, 저는 알맞은 양의 단백질과 야채를 섭취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군.” 큰스님은 짧게 대답하시고는 갑자기 제자와 당신의 접시를 바꾸셨다. 다시 한 번 모두가 놀란 가운데 큰스님은 크게 웃으시며 제자의 음식을 드셨다. 제자는 앞에 놓인 접시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당신의 음식을 덜어주시면서 또 한 번 크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생각을 버리게. 배고플 땐 그저 먹기만 하는 거야.” 제자는 마침내 조금씩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 나쁘지 않은데요?” _2권 117~118쪽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는 실상의 세계라면,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는 것은 실상의 세계를 깨달아 얻은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수용의 세계이다. 수용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자비의 경지다. 이것이 깨달음의 목적, 수행을 하는 목적이다. 숭산 스님은 세계 평화와 환경 문제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종교 간 화합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세계평화종교지도자회의’와 ‘세계일화대회’를 개최했으며 교황에게 종교 지도자 회의를 건의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한 국제 토론회에 수차례 참석하여 불교의 연기론과 지구의 환경 문제를 연결시켜 발표함으로써 수많은 학자들,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다. 큰스님의 이러한 실천은 제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무량 스님이 짓고 있는 한국식 절 태고사는 지어지는 과정 하나하나가 지구의 환경 문제를 고민하고 생태주의를 모색하는 데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숭산 스님의 또 다른 제자인 대봉 스님(무상사 조실)은 마지막 1년간 스승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서, 생사를 초월한 진정한 선사의 모습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마지막 시절 큰스님의 얼굴은 건강한 이들보다 더 맑고 밝았다. 큰스님은 ‘저곳을 향한 구원과 기복의 불교’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의 덕과 자비의 실천’이라 강조해온 평소 그 모습 그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몸에 집착하지 말라’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큰스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큰스님 뵙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고단해도 만났다. 만나는 게 힘들면 수많은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썼다. “산에 들어가 좋은 공기 마시며 참선수행만 했다면 스님은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당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당뇨로 고통받으시면서도 늘 제자들 걱정과 가르침을 펴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_2권 78쪽 “뉴욕에서도, 프로비던스에서도, 파리에서도 모두 큰스님이 여생을 자기네 젠 센터에서 머물며 가르침을 펴시기를 원했습니다. 미국이 병원 시설이나 치료 수준에 있어 한국보다 낫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큰스님은 당신의 마지막을 한국의 절, 화계사에서 보내고 싶어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서양 제자들에게 스님의 뿌리, 한국 선의 뿌리가 다름아닌 이곳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며 한국 선을 알려오신 스님은 다시 당신이 출발하신 지점으로 돌아오셨고, 마침내 마지막에는 전 세계에 뿌리신 꽃송이들을 한국으로 모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_2권 83~84쪽 큰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사흘 전, 수덕사의 비구니스님이 병실로 큰스님을 찾아왔다. 비구니스님은 큰스님께 큰절을 올리고 부디 한 말씀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큰스님은 대답 대신 이렇게 물으셨다. “김장은 다 마쳤는가?” “예, 다 마쳤습니다.” “김장은 다 마쳤는가? 김치는 충분한가?” 비구니스님은 다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김치를 더 담그게. 넉넉하게 담가야 하네.” 함께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의아했다. 왜 큰스님께서는 이토록 김치에 집착하셨던 것일까? 그 의문은 며칠 뒤 큰스님이 돌아가신 후 풀렸다. 큰스님께서 돌아가신 후 5일 동안 큰스님을 모신 수덕사 법당에는 수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큰스님의 배려와 그 비구니스님의 신속한 행동 덕분에 밥과 함께 김치와 반찬을 모자람 없이 그 수많은 신도들에게 대접할 수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와 신도들이 굶게 될 것을 염려하셨던 것이다. _2권 108~109쪽 “선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평상심을 말합니다. 나의 견해, 나의 생각이라는 아집에서 벗어날 때, 생사와 선악을 초월한 평상심을 갖게 됩니다. 이 벗어난다는 것은 책이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_1권 184쪽 “아무리 인간성 회복이니 도덕성 회복을 부르짖어도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먹이로 사라져갑니다. 이런 생태계, 자연 질서의 파괴가 계속되는 한 지구상에 평화는 없으며 인간성 상실의 연기법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돼지나 소가 튼튼해야 우리의 식량이 넉넉해지고 그것들이 튼튼하려면 풀과 나무가 넉넉해야 하고 풀과 나무가 넉넉하려면 땅이 기름지고 풍부해야 합니다. 꽃은 꽃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평화로워 뭇 생명체가 절대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은혜에 감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바쳐도 아까운 마음이 없을 때 진실로 평화가 옵니다. 인간성 회복도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방법, 그 길을 찾는 데 있는 것입니다.” _1권 199쪽 “어떻게 하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큰스님께서는 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로 삶이며 죽음일세.”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돕고자 하는 마음만이 깨달음이라네.” _2권 119쪽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 허무한 세상을 실체의 세계로 실체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실상의 세계를 실용의 세계로 [……] 흰 얼굴, 검은 얼굴, 노란 얼굴들 수많은 눈동자와 하나되어 [……] 아침 해 동쪽 하늘에 빛나고 아름다운 흰 구름 서쪽으로 흘러가네. _1권 207~209쪽 |
<도서 정보>제 목 : 삶의 나침반 1 : 숭산 큰스님의 웃음과 삶과 가르침
저 자 : 허문명 저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06년 4월
책정보 : ISBN : 8970634967 | 페이지 : 209 | 347g
구매처 : 오디오북
구매일 :
일 독 : 2006/9/15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책 읽은 계기>
<미디어 리뷰>
저자 : 허문명 |
현각 스님의 출가 수행기인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엮고, 숭산 큰스님의 영어 법문집 《선의 나침반》과 틱낫한 스님의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두려움의 평정》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재직 중이다. |
숭산 큰스님은, 국내에 방송매체와 단행본 등으로 널리 알려진 현각 스님,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한국식 절을 짓고 있는 무량 스님, 계룡산의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등 전 세계 5만 6천여 명의 외국인 불제자들의 스승이다. 현재 관음선종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 30여 개국에 130여 개의 선방이 있으며 1백여 명의 외국인 수행자들이 한국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지침을 바탕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생각의 전복과 마음의 혁명을 일으킨 숭산 큰스님은 폭넓고 유연한 가르침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논리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스님은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를 넘어 삶의 방향을 이끌어준 어른이자 친구였다.
식민지 시절의 독립운동,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 출가한 일, 한국 종단의 주류 자리를 버리고 마흔여섯의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밑바닥 생활을 감수한 스님의 삶은 그 자체로 선이고 감동적인 가르침이었다. 과로와 피로를 벗 삼아 종횡무진 세상을 누비다 2004년 78세의 나이로 입적한 마지막 순간까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준 자비의 경지야말로 스님이 보여준 깨달음의 궁극이었다.
화계사 주지 성광 스님 추천사로 시작되는 이 책은 1권은 숭산 큰스님이 1972년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한국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할 당시에서부터 폴란드,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를 누비며 불법을 전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2권은 숭산 큰스님의 어린 시절,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출가, 고봉선사에게 법을 전해받고 제78대 조사가 된 이야기, 한국 불교 종단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정화운동을 이끌어가고 종비생 제도, 군승 제도 등의 실시에 애써온 역사, 일본군 유골 송환 사건으로 일본에 한국 불교를 포교하게 된 계기, 그리고 마지막 다비식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큰스님의 법문,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는 제자들의 글, 연보, 국제선원 목록 등도 2권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숭산 큰스님 연보
1927년(1세) 8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창리 233번지에서 출생. 어릴 적 이름은 덕인
1940년(14세) 순천공립학교 졸업. 평양시 평안공업고등학교 입학. 독립군을 돕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4개월을 보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으로 친구와 함께 만주 국경을 넘어갔으나 친구 형님의 훈계로 귀가.
1945년(19세) 평안공업고등학교 졸업. 대동공전에 입학. 8월 15일 해방.
1946년(20세) 삼팔선을 넘어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47년(21세) 마곡사에 들어감. 《금강경》을 보고 깨친 바가 있어 출가.
1948년(22세) 고봉선사에게서 행원이란 법명을 받고 수덕사에서 안거.
1949년(23세) 1월 25일 고봉선사로부터 전법 건당. 숭산이란 당호를 받고 제78대 조사가 됨.
1952년(26세) 12월에 육군 입대.
1957년(31세) 미타사 강사로 서울 생활을 시작함.
1958년(32세) 화계사 주지로 취임.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 조계종 종의회를 구성하여 종회의원에 피선.
1960년(34세) 대한불교 신문사 초대 사장에 취임.
1961년(35세)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에 취임.
1962년(36세) 통합 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에 피선. 동국대학교 재단 상무이사에 피선.
1964년(38세) 승려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켜주는 종비생 제도 실시.
1965년(39세) 일본군 유골을 발견하고 화계사 명부전에 옮겨 49재를 지냄.
1966년(40세) 일본에 홍법원 개설.
1969년(43세) 홍콩에 홍법원 개설.
1972년(46세)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비던스 젠 센터 개설. 이후 케임브리지, 뉴헤이번 등 각지에 젠 센터 개설.
1978년(52세) 폴란드, 독일에 젠 센터 개설. 이후 영국, 스페인 등에도 젠 센터 개설.
1982년(56세) 유럽 여행 중에 교황 친견 시도. 세계평화종교지도자대회 개최.
1983년(57세) 브라질 상파울루 젠 센터 개설.
1985년(59세) 프랑스 파리 젠 센터 개설. 세계평화문화인대회에서 세계평화상 수상. 중국 방문.
1986년(60세)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화적·정신적 지도자들의 역사적 회합’에 참가함.
1987년(61세) 수덕사에서 제1차 세계일화대회 개최(이후 3년마다 개최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음).
1989년(63세) 호주 시드니의 불교학술센터 초청으로 특별법회에서 강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포교 활동.
1990년(64세)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을 위한 환경과 개발에 관한 국제 토론회’ 종교분과위원으로 초청 강연. 대만에서 포교 활동. 서울 화계사에서 국제선원 신축을 위한 불사 시작.
1992년(66세) 홍콩 국제선원 개설. 화계사 국제선원 완공, 개설.
1993년(67세) 싱가포르 젠 센터 개설.
1994년(68세) 베트남 방문.
1995년(69세)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 순례 및 포교 활동.
1996년(70세) 만해포교상 수상. 대한불교 조계종으로부터 해외 포교 30주년 감사패를 받음.
1997년(71세)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2007년까지 10년간).
1999년(73세) 화계사 조실로 추대.
2000년(74세) 계룡산에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75세)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으로 추대(2003년까지 2년간).
2004년(78세) 11월 30일 화계사에서 입적.
<줄거리>
<책속으로>
성광 스님 추천사―열정과 자유, 그리고 커다란 사랑
1. 헬로, 숭산─숭산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프로비던스의 고요한 뜰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대륙으로
불교는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
할렘 거리의 세탁기 수리공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느냐―제이콥과의 만남
영어를 배우는 ‘쑹싼’ 큰스님
웃음과 행동을 통한 가르침
백팔배를 올리는 뉴요커들
생각의 단절, 새로운 논리의 시작
함께하는 수행
관음선종의 본산이 문을 열다
편지 잘 받았다, 잘 지내니?
‘오직 모를 뿐’은 스님이 만들었나요?
큰스님의 사랑
이분이 선사가 맞는가
관음선종
스님이 된다는 것은
간화선의 전통
공안 인터뷰―사고의 전복
왓 엠 아이,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
자유란 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자유니라
너에게 30방망이를 내리겠다
여자도 깨달을 수 있나요
세계로 세계로
5분 후에 선상식당에서 예불을 드립시다
불법으로 하나되는 마음
얼어붙은 땅에도 평화와 자비를
세계는 한 송이 꽃―종교 간 화합
지구의 환경과 평화를 위하여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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