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 동냥을 해서라도 야구를 하고 싶었고, 어린 나이에 야구를 시작했지만, 야구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다는 양준혁 선수... 부모님이 상당히 고생을 하셨다는데, 그나마 어느정도 성공을 하니 부모님이 아파서 제대로 효도도 못했다는 그...
낚시를 좋아해서인지 낚시터에 가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평생을 2인자로 살아온 어찌보면 기구할수도 있는 그의 야구 인생...
이인자라는 자리가 응어리가 지는 그런 자리였지만, 자신은 조연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에 살아왔다는 솔직한 이야기도...
먼저 은퇴하는것이 아직 현역인 이종범에게 미안하고, 한화 송진우선수가 더 오래해주었으면 했던 바램도 이야기하고,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가 됬을때 큰 충격과 고통을 겪었지만, 해태 선수들이 이사짐을 날라주기도 하고, 선후배관계의 다른면을 보면서 끈끈한 우정을 느낀 좋은 경험이였다고
선수협의회(선수협)을 주도해서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데, 구단의 방해로 무마될뻔한 위기에서 죽음을 각오하면서 다른 선수들을 독려해서 선수협이 탄생이 됬는데, 그가 FA가 된 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선수들과 사람들은 양준혁이 자신을 위해서 선수협과 FA를 만든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구단주들이 만든것인데, 그때문에 본인은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고 고백...
선수협사태때문에 갈곳이 없어서 뉴욕메츠에 최대 70만달러의 계약을 받고 미국으로 갈뻔한 사연과 서류도 공개하고, 마지막으로 신으로 불리기 보다는 그저 1루까지 열심히 뛰었던 선수고 기억되고 싶다는 그...
내년에는 지도자 수업을 받으러 미국 뉴욕 양키스로 간다고 하는데, 지금보다 더 멋진 지도자의 모습으로 돌아와주길 바랍니다~
양준혁(梁埈赫,[2] 1969년 5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타격 폼이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만세 타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고 ‘양신’(梁神)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하다.[3]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후 1991년 삼성 라이온즈가 1차 지명을 포기하였고, 이어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상무 야구단에 입대했다. 병역 결정을 위한 신체검사 당시 상근 예비역으로 판정을 받으면서 1년 간의 현역병 생활 이후 방위병으로 전환해 복무했다. 쌍방울로부터의 지명을 거부한 이듬해인 1993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첫 해에 타율 0.341로 타격왕에 오르고, 이종범과의 경쟁 끝에 신인왕에도 올랐으며, 대한민국 프로 야구 사상 신인으로서 타격왕을 차지한 유일한 선수이다. 그해 130안타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16년 연속 100안타 기록을 달성하였고, 1996년(151안타)과 1998년(156안타)에는 최다 안타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4] 2002년과 2005년, 2008년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해 그를 보고서 “배트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5]이라고 말하기도 했다.[6]
2005년 6월 25일, 13시즌 만에 1772개의 안타를 쳐서 장종훈의 개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하였다.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장종훈에 이어 ‘기록의 사나이’란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이어 2007년 6월 9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 지금까지 골든 글러브를 모두 8차례 수상했다. 프로 야구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1993년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데 이어 1998년과 2001년에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 최다 수상을 했다. 2008시즌에는 1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처음으로 시즌 도중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7] 1994년, 2002년과 2005년, 2008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15시즌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 내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한때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를 떠나 1999년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와 2000년 ~ 2001년 LG 트윈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001 시즌이 끝난 뒤 친정 팀에 복귀하여 처음으로 한국 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2008년 준 플레이오프 때 포스트시즌 최고령 홈런을 기록하였다.[8] 2009년 5월 9일에는 대구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기존 장종훈이 가지고 있던 한국 프로 야구 통산 역대 최다 홈런 기록(340개)를 경신하였다.
양준혁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통산 기록은 통산 안타수와 통산 홈런수라고 한다. 특히 통산 홈런의 경우 시즌 홈런 1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홈런 갯수로 1위를 기록했다는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 놀랐다고 한다. 매 시즌 꾸준히 20개 정도 홈런을 꾸준히 쳤던 게 누적이 되어서 이런 기록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별개로 가장 의미를 두는 기록은 통산 사사구 기록이라고 한다. 타자로서 출루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타자가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는 사사구와 출루율이야말로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부문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9][10]
그는 야구 선수 시절 최고의 순간으로 2002년 한국 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확정 지었던 순간을 꼽았다. 양준혁으로선 아마추어 시절부터 통틀어 소속 팀이 우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삼성으로서도 1985년 전·후기 시즌 통합 우승을 한 것 외에 단기전 한국 시리즈를 통해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 있고, 더 많은 감격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FA를 통해 극적으로 친정 팀에 돌아온 첫해이기도 했거니와 팀내 선배로서 힘겹게 후배 선수들을 이끌며 일궈 낸 값진 우승이었기에 그 보람이 더 컸다고 한다.[6][9][10]
2010년 7월 26일, 그는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고,[11] 2010년 9월 19일 홈구장인 대구구장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치렀으며, 이날 상대팀인 SK 와이번스의 선발 투수 김광현을 상대로 삼진 3개를, 구원 투수 송은범에게 2루수 앞 땅볼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두 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으며, 한국 프로 야구 아홉 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