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역 사거리 부근의 질병관리본부(일명 보건원) 앞에 있는 양천리라는 이정표...
의주 <-> 부산이라는 이름 모를 돌맹이가 도대체 무슨소리인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녹번역과 불광역사이의 하이마트가 있는 언덕을 양천리 고개라고 했고,
그 고개를 기준으로 북한산과 인왕산 방면을 독박리, 밑의 녹번동, 대조동족을 양천리라고 불렀다고...
그리고 지금의 진흥로에서 구기터널로 올라가는 길이 어릴적에는 개천이였는데,
그곳에서 북으로 의주, 남으로 부산까지의 거리가 천리여서 양천리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 양천리고개梁鐵峴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 19번지 38호 일대 대성주유소 앞 작은 고개를 예전에는 양천리고개, 한자로 양철현(梁鐵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산쪽 동네를 독박리, 아랫동네를 양천리 또는 아래양천리라 불렀다. 현재 녹번1파출소 앞에 개울이 있었는데, 이
곳을 경계로 북으로는 의주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가 똑 같이 1,000리가 된다 하여 일명 양천리(兩千里)고개라고도 하였다.
현 보건소 옆 녹번2파출소 자리에 양천리 이정표가 있었으나 파출소를 신축할 때 없어졌다 한다.
(현재 다시 생겼다는....)
■ 산골고개綠礬峴 (녹번동)
홍은동사거리에서 통일로를 통해 은평구 녹번동으로 가려면 넘어야 하는 고개를 예전부터 산골고개 혹은 녹번이고개라 하고,
한자로 녹번현(綠礬峴)이라 하였다. 은평구 녹번동 산1번지 일대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산천조(山川條)에는,
녹번현(綠礬峴)은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다. 석벽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캐다가 약으로
사용한다. 중국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1만명이 열지 못할 곳이다.’고 하였다.
하였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녹번현에 대하여,
모래재 북쪽에 있다. 이 재의 석벽에서 자연동이 산출된다. 이것을 채굴하는 사람들이 쇠정으로 석벽을 파 헤치면 돌 사이에
은싸라기 같은 것이 나오는데 파란 빛의 광채가 난다. 뼈 부러진 사람이 먹으면 신기하게 효험을 본다. 미음과 함께 그 부스러기를
날로 먹는데, 먹을 때 꼭 낫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 원래 뼈 부러진 데에 좋은 약인데, 지금은 다른
병에도 좋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에서는 옛부터 속칭 산골(山骨)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였고, 숲이 우거지고 험준하여
소름이 끼칠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한다. 산골은 입방체의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기 때문에 구리로 착각하여 자연동(自然銅)이라 부르기도
하고, 한자로 녹번(綠礬)이라 하였다. 1700년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녹번현(綠礬峴)으로 표기되었다.
산골은 뼈에 금이 간 상처에 접골제로서, 또 보혈강장제로서 효험이 있다 하였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산골을 캐어다 약용으로
파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 건국 초 서울지역에 도성을 쌓을 때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돌을 나르다 허리를 다치거나 뼈를 다치면
“산골고개에 가서 산골을 먹고 오라.”고 하였다 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 산골고개에서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제천을 건너야 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이 개천에서 몸을 씻고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성에 들어가면 횡재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다 한다.
현 녹번동의 동명은 이 고개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부 북부 연은방(延恩坊)의 일부로서
녹번이 나므로 ‘녹번이’라 하였다. 그런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미흘산계(未屹山契)
녹현동(碌峴洞)과 양철리계(梁鐵里契)의 번현동(磻峴洞)을 병합하여 녹번리(碌磻里)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로 편입되어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녹번리로 되었다가 다시 1950년 3월 15일 녹번리에서
녹번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골고개 주위에 있는 현 홍은1동 지역은 의주로변에 있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제일 먼저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홍은고가차도
밑으로 마을이 제일 먼저 형성되어 「본동」이라 하였으며, 풍림1차아파트를 포함해서 그 아래 지역을 「환희동」, 풍림2차아파트와
홍은1동 새마을금고 사이를 「보은동」, 벽산아파트 주변을 「실락동」이라 했다. 또 홍은파출소가 있는 일대를 「청량동」이라 했는데,
지금부터 30여년 전만해도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오래 거주한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한다.
한편 녹번현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방어진지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해 10월에 프랑스함대가
두번째 침입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이어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점령하자 당시 양주목사 임한(林翰)이 이 곳 녹번현에 진을 치고
15일 동안 도성을 수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음력 3월 3일, 9월 9일이면 산골을 먹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이 때
동네아이들도 한 몫을 하여 산골고개에서 나오는 우물물을 퍼다 주거나 홍제천을 건너다 주고 돈을 받곤 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전에는 북한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사람이나, 배추·무우·호박 등을 팔려고 영천시장 쪽으로 가는 사람 등 산골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요기를 하기 위해 찾던 주막거리가 고개 밑(미미예식장∼홍은동사거리)에 이어져 있었다. 주막에서는 팥죽과 인절미·술
등을 팔았는데, 길 건너편에는 물물이집이라 부르던 설렁탕집들이 있었다 한다.
■ 관터고개館基峴 (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의 고개를 관터골 왼쪽에 있었으므로 관터고개, 한자로 관기현(館基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고개가 있던 마을을 관터골, 한자로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관터골, 즉 관동(館洞)의 명칭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관동(館洞)의 명칭이 보인다. 관동은 원래 불광동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불광동의 연혁을 살펴본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되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북서(北署) 연은방(延恩坊) 불광리계(佛光里契)와 갈현계(葛峴契) 일부의
불광리(佛光里)·박석동(薄石洞)·사정동(射亭洞)·관동(館洞) 일대였다. 그 후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편입되어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가 되었으며,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에 속하여 은평출장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9년 10월 1일 은평출장소가 은평구로 승격되자 불광동은 은평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까 갑오개혁 때 불광리의 일부였던 관동(館洞)은 이 일대에 관(館)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관(館)이란 조선시대에 공용여행자의 숙식과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해 각 주·현의 대로(大路)에 50리마다 설치하였던
국영 여관시설을 말한다.
■ 양천리고개梁鐵峴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 19번지 38호 일대 대성주유소 앞 작은 고개를 예전에는 양천리고개, 한자로 양철현(梁鐵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산쪽 동네를 독박리, 아랫동네를 양천리 또는 아래양천리라 불렀다. 현재 녹번1파출소 앞에 개울이 있었는데, 이
곳을 경계로 북으로는 의주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가 똑 같이 1,000리가 된다 하여 일명 양천리(兩千里)고개라고도 하였다.
현 보건소 옆 녹번2파출소 자리에 양천리 이정표가 있었으나 파출소를 신축할 때 없어졌다 한다.
■ 칡고개葛峴 (갈현동)
현재 갈현1동사무소 뒷편에 위치한 고개 언저리에는 예전에 칡뿌리가 많았으므로 이 고개를 칡고개 또는 갈고개라 하고 한자로
갈현(葛峴)이라 하였다.
지금의 은평구 갈현동(葛峴洞)의 동명은 이 고개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갈현(葛峴)은 갈고개(葛古介)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 연은방(延恩坊) 갈현계(葛峴契)였다. 그런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나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갈현계(葛峴契)를 갈고개계(葛古介契)로 소개하고 있다.
이 칡고개는 한성부 행정구역의 경계지점이었다. 즉 조선 개국 초부터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북한산 기슭의 우이동과
가오리(加五里)·뚝섬·양화진·수색·칡고개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일컬어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였다.
칡고개는 서울과 의주 방면을 잇는 길 가운데 한 고갯길로서 보부상(褓負商)과 파발(擺撥) 및 중국의 사신들이 다니던
길목이다. 중국사신들이 지금의 구파발을 지나 서울로 오려면 먼저 칡고개를 넘어 박석고개·산골고개·무악재 등 큰 고개들을 넘어야
했다. 예전 칡고개에는 수백년 묵은 거목들이 많아 숲이 울창하였으며, 특히 칡넝쿨이 무성했다 한다. 주민들은 칡뿌리를 캐 약제로
팔거나 줄기를 벗겨서 햇볕에 말려 갓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 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할 때는 식용으로 대용하였다 한다.
■ 도깨비고개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에서 불광동 쪽으로 가는 고개를 도깨비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 이곳에 도깨비가 많이 나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깨비고개는 이곳 외에 종로구 연건동에도 있었다. 도깨비는 전설이나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전해온다.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하였다.
■ 벌고개罰峴 (갈현동)
은평구 갈현 2동의 옛 자연부락인 궁말에서 서오릉으로 넘어 가는 갈현동 308번지 일대의 고개를 벌고개라 하며, 한자로
벌현(罰峴) 또는 봉현(蜂峴)이라 하였다.
벌고개의 명칭 유래는 풍수지리상 이 고개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과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인 경릉(敬陵)의 청룡(靑龍)에 해당되는데, 지반이 낮고 약하여 사람이 지나다니면 더욱 낮아질 염려가
있다 하여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만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큰 벌을 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로 해서 벌고개(罰峴)라 하던
것을 후세에 발음상으로 같은 벌고개(蜂峴)라 한 것이다.
경릉은 사적 제198호로서 서오릉(西五陵) 중의 하나이다. 소혜왕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陵制)도 왕릉의 형식을 갖출 수도 있었으나 덕종이 세자로 승하하였고, 또 부왕인 세조의 박장주의(薄葬主義: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는 것)와 소혜왕후의 소원에 따라 세자묘제(世子墓制)로 하였다. 그 후 추존한 임금도 능으로 모시는 예에 따라 석물(石物)도
왕릉·왕후릉 모두 화강석으로 능제(陵制)대로 하였다.
■ 파일재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 86번지 일대의 고개로서 비가 오면 대단히 질어지고, 빗물로 해서 길바닥이 파였기 때문에 파일재 또는
패일재로 불리었다 한다.
■ 까치고개 (증산동)
은평구 증산동 217∼222번지 일대로서 수색과 증산동을 잇는 고개를 까치고개라 하였다. 고개 양쪽으로 높은 산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다 큰 나무가 울창하여 까치가 유난히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까치고개라 불리었다. 고개 주위에는 장자나무와 서낭당이
있었다.
이 고개의 특징은 여름에도 바람이 많이 불고 겨울에는 수색 쪽에서 센 바람이 불어닥쳐서 넘나들던 사람들이 넘어질 정도였다
한다. 이 고개는 경의선 철로 부설 때 많이 깎여 평지화 되었다.
■ 박석고개薄石峴 (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479번지 일대, 불광동에서 갈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나는 이 근처에 궁실(宮室)의 전답이 있어서 전답을 오가는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게 하려고 돌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이 고개가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위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지맥이 깎아지 않게 보호하기 위하여 박석을 깔았던 데서 연유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 고갯길은 중국사신의 내왕로였는데, 고갯길 자체가 울창한 숲언덕길로서 사철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게 되자 조정에서 이 고개에 길을 닦고 상석(床石) 크기의 돌을 깔았으므로 박석고개가 되었다 한다. 고개마루
왼편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중국사신이 이곳을 지날 때 성황당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박석을 깔았던 고갯길이나 성황당은 1968년에 시행된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은
넓은 아스팔트길이 된 통일로가 달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