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인간됨과 업적에 대해서 자세히 보여준 다큐...
개인적으로 세종대왕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면이나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에 대한 방송을 찾다가 보게 되었는데, 그러한 면은 조금 적지만,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대주의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하고,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백성을 정말 살기 좋게 만들어주었다는 내용...
이외에 음악을 통해서 국가의 규격을 통일하는 톡득한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무엇보다도 세종대왕 시대가 정말 엄청난 변화를 통해서 급격하게 경제가 발전하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혀갔다는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과연 우리나라에 이러한 성군이 또 나타날수 있을지... 걱정이 될뿐이다...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 1450년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장헌(莊憲)을 폐지하여 정식
시호는 세종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흔히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오늘날 10월 9일은 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만 원권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출생
세종대왕은 1397년 당시 정안대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 뒤 1418년에 태종이 맏형이자 동복형인 양녕대군을 “법을
존중하지 않는 세자가 군주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심각한 비행[1]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충녕대군의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를 22살에 새 왕세자로 책봉하였다가 같은 해
음력 8월에 선위함으로써 세종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시 업적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정책을 썼으나 만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대외 정책
한편 대외적으로는 명(明)에 대해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외교에 성공하고 여진과의 관계는 김종서와
이천으로 6진(鎭)과 4군(郡)을 설치하게 하였다. 일본과도 초기에는 회유책을 쓰다가(→삼포 개항)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
국방의 정비
대마도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과학의 발전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현대에 와서 재구성한 모형이다.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1442년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
또,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
1431년과 1446년에 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鄭招)·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색(申穡)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의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말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태종의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임질,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번 세자의 섭정을 시도를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재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대왕의 막내아들, 세종의 6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7년 1681년에 받았다.)
세종의 능(영릉)
능은 영릉(英陵)으로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하여 있다.
세종사후 정세
세종의 안정적인 치세 이후 조선의 정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세자이자 장남인 문종이 보위를 이어받은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장손인 단종이 12살 이라는
어린 나이에 문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궁궐에는 수렴청점을 해줄 대비나 왕대비가 없는 상황에 문종이 유지를 남겼던 신하들에게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양대군등 왕족들의 세력이 팽창해 가며 정치적으로 불안함이 가중되었다.
단종의 재위 1년만 인 1453년에는 숙부이자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세 력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 세종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여 활약하였던 많은 대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국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단종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조정에서
제거되어 유배되고 숙부 안평대군은 강화도 유배 후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뒤를 이어 금성대군사건을 일으켜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과 그 세력들을 다시 한번 숙청한다.
결국 단종은 보위에 오른지 3년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형식상의 선위를 하면서 왕위를 찬탈당하였다. 이어 1456년에는
일명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우는 단종의 복위를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복위사건에 연루된 6명과 이에 관련된 70여명을 포함하여
조정에서 또 한번 대숙청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조가 왕위에 오를수 있게 주도하였던 세력의 공격으로 단종은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당하고 영월에 귀양을 가서 17세에 죽었다. 이어 금성대군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부터 선위를 받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불과 5년만에 단종을 지지했던
왕족들과 세종의 치세에서 학자와 관료로써 세종이 남긴 많은 업적들에 큰 활약을 하고, 단종을 지지한 많은 관료들과 대거 숙청되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어..."
굶주린 백성들의 왕(王), 세종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음식과 비슷하였다.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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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 젊은 임금, 세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건국한지 채 30년도 안된 신생국 조선의 상황은 비참했다. 가뭄이 끊이지 않아
강이 마르고, 농토의 반이 황폐해졌다. 이 혹독한 가뭄 앞에서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생겨났고, 인구의 27%가 죽어갔다. 굶주린
백성들의 비명 위에 선 세종. 그는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종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과학영농으로 국가 경쟁력을 키워라
왜 가뭄이 들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인가? 세종은 기우제의 비과학적 행태에 의문을 가지고, 농업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나라 경제의 중심이자 근본인 농업.
백성을 배불려 먹이기 위해서는 농업 생산력을 늘려야 했다.
그의 과학적인 사고는 자격루(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 농사 환경을 측정하는 과학 기구의 발명을 가능케 했으며, 이앙법과 같은 획기적 농법을 장려한 결과 1결당 1200두까지 생산량이 높아졌다. 그리고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통일된 농법을 집대성한 농사직설을 편찬해 반포하였다.
이전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과학 영농을 실현시킨 세종.
그는 이제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복원된 자격루의 일부>
<농사직설>
열악한 경제기반과 환경을 극복하라
1433년 세종은 전격적인 파저강 토벌을 지시한다. 걸핏하면 침범해오는 여진족을 무찌르고자 한 것이다. 세종의 치밀한 작전 명령 아래 조선군은 여진족 170여명을 참살하며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파저강 토벌을 지시한 세종에게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바로 농사짓기에 좋은 땅을 확보하고자 한 것. 두만강 건너편에는 기름진 땅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좋은 소출을 내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즉위 초부터 국내의 전 국토에 대규모 개간 사업을 벌인 세종은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4군 6진을 설치, 더 많은 경작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갔다.
세종은 열악한 경제기반과 환경을 정복활동과 개간사업을 통해 극복한 것이다.
<파저강(혼강)>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행할 수 없다. <세종실록>
가뭄 걱정으로 10여 일간 밤을 새 병이 날 정도로 백성과 고통을 함께했던 세종.
백성은 세종에게 하늘이었다.
그는 생산성의 혜택이 백성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단행한다.
지방 유력자에 의한 착취를 막기 위해
국가가 세금 거두는 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토지세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공법'을 실행하고자 한 것이다.
한 계층의 한 사람도 피해 보지 않는 공평한 법을 만들기 위해 세종은 우선 전국적인 여론 조사를 실시한다. 관리에서부터 일반백성까지, 그 사이에서 오가는 찬성, 반대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반대여론이 높은 지역의 문제점을 보완하며 공법을 완성해가는 세종.
무려 17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공법이었다.
세종 15년. 박연이 세종 앞에서 편경을 연주할 때였다. 세종이 한 음의 소리를 지적한다. 편경을 살펴보니, 먹줄 선이 덜 갈려 있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편경에서 먹줄 두께는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져올까? 제작진이 국악사를 찾아 실험해 봤다. 먹줄의 하나의 차이는 놀랍게도 반음 10분의 1! 세종은 반음의 10분의 1의 차이까지도 알아내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세자 시절부터 현악기 연주에 능통했던 세종. 그는 하룻밤 만에 종묘 제례악을 작곡하는 등.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재능을 살려, 국가의 기틀을 잡는 사업으로 음악을 재정비한다.
임금이 음률에 밝아 새로운 음악은 모두 임금이 만든 것인데,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하루 저녁에 음악을 만들었다. <세종실록 126권>
<편경은 돌을 갈아 음의 차이를 냈다.>
소리는 나라의 기틀,“소리를 세우라.”
음악 사업의 첫 시작은 ‘기준음’을 찾는 것. 그러나 ‘기준음’이 되는 ‘황종음’을 정하는 것은 중국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우리의 힘으로 ‘황종음’을 찾고자
했다.
‘황종음’은 단순한 음악의 ‘기준음’이 아니었다.
황종음을 만드는 것은 황종관인데, 이때 황종관
의 길이는 황종척이라고 하는 ‘자(尺)’가 된다.
또한 황종관에 들어가는 물의 양은 무게의 기준
이 되었다. 모든 도량형의 기준이 되는 황종음.
이처럼 소리를 바로 잡는 것은, 국가를 바로 잡
는 일의 일환이었다.
<그림 : 황종율관과 황종척>
아악이냐? 향악이냐?
사대와 자주의 사이에서
유교사회에서 음악은 백성 통치 방법 중 하나였다. 조선 초, 혼란한 음악을 정비하고자 한 세종. 이에 박연과 함께 아악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음악을 정리해 나간다. 아악은 태평성대인 주나라의 음악을 복원한 것.
<율려신서:좋은 정치와 좋은 음악에 관한 책>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과 박연 간에는 갈등이 생겨난다.
박연은 계속해서 주나라 음악을 복원하려 했 으나, 세종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음악의 기초를 정비한 뒤, ‘우리의 음악’을 만들고자 한 것.
유교적 이상에 어울리는 아악을 사용할 것인 가? 우리의 소리인 향악을 사용 할 것인가?
이것은 세종대 최대논란거리였다.
우리의 소리는 백성의 소리.
우
리 음악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세종. 세종은 아악정리를 마친 뒤, 백성들의 민요를 채집시킨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종묘제례악을
작곡한다. 국가음악의 위용은 아악에서, 풍성한 음악적 사운드는 당악에서, 조선인의 감성은 조선의 가락에서 따온 새로운 음악.
이것이 바로 세종이 작곡한 종묘제례악이었다. 종묘제례악을 완성된 것은 세종 32년. 죽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우리 음악을
세우는 것. 이것이 세종대왕의 마지막 사업이었다.
“세종과 같은 음악적 성과가 동북아시아에는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없어요.
세종이 이룬 음악적 성과는 세계적인 것 입니다.“
<송혜진 교수 인터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