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傳 - 세종대왕,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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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인간됨과 업적에 대해서 자세히 보여준 다큐...
개인적으로 세종대왕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면이나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에 대한 방송을 찾다가 보게 되었는데, 그러한 면은 조금 적지만,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대주의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하고,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백성을 정말 살기 좋게 만들어주었다는 내용...
이외에 음악을 통해서 국가의 규격을 통일하는 톡득한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무엇보다도 세종대왕 시대가 정말 엄청난 변화를 통해서 급격하게 경제가 발전하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혀갔다는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과연 우리나라에 이러한 성군이 또 나타날수 있을지... 걱정이 될뿐이다...

세종대왕과 자기계발
경제세미나 - 불황을 이기는 세종 리더십, 전경일 소장
KBS 역사스페셜 - 세종, 조선을 업그레이드하다
위대한 왕 세종 - MBC 애니메이션


[제29회] 세종대왕_2부작
          제1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방송 : 2008. 1. 26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창범 PD
글,구성 : 윤영수 작가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조선을 덮친 대기근!
갓 창업한 신생국 조선은 위태로웠다

굶주린 백성들의 왕(王)이 된
22살의 세世 종宗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굶주린 백성들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어..."
                    굶주린 백성들의 왕(王), 세종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음식과 비슷하였다.                                              <세종실록>

22 살의 젊은 임금, 세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건국한지 채 30년도 안된 신생국 조선의 상황은 비참했다. 가뭄이 끊이지 않아 강이 마르고, 농토의 반이 황폐해졌다. 이 혹독한 가뭄 앞에서 흙을 파먹는 백성들이 생겨났고, 인구의 27%가 죽어갔다. 굶주린 백성들의 비명 위에 선 세종. 그는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종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과학영농으로 국가 경쟁력을 키워라

왜 가뭄이 들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인가? 세종은 기우제의 비과학적 행태에 의문을 가지고, 농업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나라 경제의 중심이자 근본인 농업. 백성을 배불려 먹이기 위해서는 농업 생산력을 늘려야 했다.
그의 과학적인 사고는 자격루(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 농사 환경을 측정하는 과학 기구의 발명을 가능케 했으며, 이앙법과 같은 획기적 농법을 장려한 결과 1결당 1200두까지 생산량이 높아졌다. 그리고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통일된 농법을 집대성한 농사직설을 편찬해 반포하였다.
이전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과학 영농을 실현시킨 세종.
그는 이제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복원된 자격루의 일부>                          <농사직설>

 

열악한 경제기반과 환경을 극복하라

1433년 세종은 전격적인 파저강 토벌을 지시한다. 걸핏하면 침범해오는 여진족을 무찌르고자 한 것이다. 세종의 치밀한 작전 명령 아래 조선군은 여진족 170여명을 참살하며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파저강 토벌을 지시한 세종에게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바로 농사짓기에 좋은 땅을 확보하고자 한 것. 두만강 건너편에는 기름진 땅이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좋은 소출을 내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즉위 초부터 국내의 전 국토에 대규모 개간 사업을 벌인 세종은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4군 6진을 설치, 더 많은 경작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갔다.
세종은 열악한 경제기반과 환경을 정복활동과 개간사업을 통해 극복한 것이다.


                  <파저강(혼강)>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행할 수 없다.                                                   <세종실록>

가뭄 걱정으로 10여 일간 밤을 새 병이 날 정도로 백성과 고통을 함께했던 세종. 백성은 세종에게 하늘이었다.
그는 생산성의 혜택이 백성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단행한다.

지방 유력자에 의한 착취를 막기 위해 국가가 세금 거두는 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토지세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공법'을 실행하고자 한 것이다. 한 계층의 한 사람도 피해 보지 않는 공평한 법을 만들기 위해 세종은 우선 전국적인 여론 조사를 실시한다. 관리에서부터 일반백성까지, 그 사이에서 오가는 찬성, 반대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반대여론이 높은 지역의 문제점을 보완하며 공법을 완성해가는 세종. 무려 17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공법이었다.


[제30회] 세종대왕_2부작
          제2부
          소리가 하늘이다.



▣방송 : 2008. 2. 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형운 PD
글,구성 : 윤영수 작가
 

세종. 소리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절대 음감의 소유자.
단 하룻밤에 종묘 제례악을 작곡했던
대왕 세종.

그는 왜 소리에 매료되었을까?
그가 음악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절대음감 세종,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

세종 15년. 박연이 세종 앞에서 편경을 연주할 때였다. 세종이 한 음의 소리를 지적한다. 편경을 살펴보니, 먹줄 선이 덜 갈려 있었고, 때문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편경에서 먹줄 두께는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져올까? 제작진이 국악사를 찾아 실험해 봤다. 먹줄의 하나의 차이는 놀랍게도 반음 10분의 1! 세종은 반음의 10분의 1의 차이까지도 알아내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세자 시절부터 현악기 연주에 능통했던 세종. 그는 하룻밤 만에 종묘 제례악을 작곡하는 등.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재능을 살려, 국가의 기틀을 잡는 사업으로 음악을 재정비한다.

임금이 음률에 밝아 새로운 음악은 모두 임금이 만든 것인데,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하루 저녁에 음악을 만들었다. <세종실록 126권
>


                                                                  <편경은 돌을 갈아 음의 차이를 냈다.>


소리는 나라의 기틀,“소리를 세우라.”

음악 사업의 첫 시작은 ‘기준음’을 찾는 것. 그러나 ‘기준음’이 되는 ‘황종음’을 정하는 것은 중국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우리의 힘으로 ‘황종음’을 찾고자

했다.
‘황종음’은 단순한 음악의 ‘기준음’이 아니었다. 황종음을 만드는 것은 황종관인데, 이때 황종관 의 길이는 황종척이라고 하는 ‘자(尺)’가 된다. 또한 황종관에 들어가는 물의 양은 무게의 기준 이 되었다. 모든 도량형의 기준이 되는 황종음. 이처럼 소리를 바로 잡는 것은, 국가를 바로 잡 는 일의 일환이었다.


<그림 : 황종율관과 황종척>

 

아악이냐? 향악이냐?
               사대와 자주의 사이에서

유교사회에서 음악은 백성 통치 방법 중 하나였다. 조선 초, 혼란한 음악을 정비하고자 한 세종. 이에 박연과 함께 아악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음악을 정리해 나간다. 아악은 태평성대인 주나라의 음악을 복원한 것.


<율려신서:좋은 정치와 좋은 음악에 관한 책>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과 박연 간에는 갈등이 생겨난다. 박연은 계속해서 주나라 음악을 복원하려 했 으나, 세종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음악의 기초를 정비한 뒤, ‘우리의 음악’을 만들고자 한 것. 유교적 이상에 어울리는 아악을 사용할 것인 가? 우리의 소리인 향악을 사용 할 것인가? 이것은 세종대 최대논란거리였다.


우리의 소리는 백성의 소리.

우 리 음악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세종. 세종은 아악정리를 마친 뒤, 백성들의 민요를 채집시킨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종묘제례악을 작곡한다. 국가음악의 위용은 아악에서, 풍성한 음악적 사운드는 당악에서, 조선인의 감성은 조선의 가락에서 따온 새로운 음악. 이것이 바로 세종이 작곡한 종묘제례악이었다. 종묘제례악을 완성된 것은 세종 32년. 죽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우리 음악을 세우는 것. 이것이 세종대왕의 마지막 사업이었다.

“세종과 같은 음악적 성과가 동북아시아에는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없어요.
세종이 이룬 음악적 성과는 세계적인 것 입니다.“ <송혜진 교수 인터뷰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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