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남녀 차별이 심한 집안에서 오로지 공부로 버티어 서울에서 여고까지 마쳤지만 서진규에게 현실은
가혹하리만치 냉혹했습니다. 변변한 직장 하나 잡지 못해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미국에서
가정부를 찾는다는 광고 하나를 보고 미국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되면서 돈을 벌고 생활은 나아져갔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 남은 허전함은 여전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또래
친구들처럼 그녀는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가는 대로 평범하게 따라간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에 얻어맞고 좌절에
쓰러진 적 많았습니다.
이후 갓 낳은 딸의 미래를 위해 여군에 입대했습니다. 스물 초입의 젊은 아가씨들 틈에서 그들보다 족히 열 살은 많은 그녀가 견딘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으나, 포기는 곧 죽음이라는 각오로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15년 만에 대학 여섯 군데를 거쳐 하버드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를 거치면서 일약 의지의 한국인이자 롤모델로
떠올랐습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신의 삶을 밑천으로 서진규는 현재 전국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꿈과 미래를 밝혀주는
촛불, 즉 사랑의 메신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Universe rewards action!
1948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제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다가 1971년 가정부를 모집한다는 직업소개소의 광고를 보고 단신으로 도미했다. 1975년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미 육군에
자원입대한 후 미국, 한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근무했다. 1972년 퀸스칼리지를 시작으로 여섯 군데의 대학을 거쳐 1987년
입학 15년 만에 메릴랜드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마흔 세 살에 하버드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군인과 학자의 길을 함께 걷다 199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리고 나이
예순을 한 해 앞둔 2006년 하버드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Motivational
Speaker(동기 부여 연사)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연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쓰고 있다. 펴낸 책으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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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싶다
서 진 규
미하버드대 박사과정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이렇게 초청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좀 보기는 안 좋지만 안경을 벗고 강연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제 눈과 여러분의 눈이 마주칠 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보기 싫은 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은, 요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주로 조깅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조깅을 하다 보니 그냥 생각만 하게 되더라구요. 시간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이왕이면 검도좀 배워보자, 운동도 하고 또 체력도 키우고 더불어 살도 빼고 또 기술도 하나 늘리고자 하는 마음에 요즘 다니기 시작했는데 좀 껍적거렸던 모양입니다.
제가 혼자서 거울 앞에서 “머리” “머리” 하면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마스크를 쓴 유단자들이 좀 자기네들보다 더 잘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지 그냥 실수하는 셈 치고 제 이마를 그냥 그대로 들이쳐 버렸습니다. 지난주에 그랬는데 아직까지도 멍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제 얘기 중에 “매 맞는 아내”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매 맞는 아내”의 모습이 아마 그때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도 좀 효과가 있는게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데요.
강연 다니면서 질문을 많이 받아요. 군을 제대하고 또 하바드까지 가냐, 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 그만큼 열심히 살았으면 됐지!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것도 마다않고 이렇게 나흘동안에 여섯군데 강연을 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궁금해 하는데요 사실 53살 나이에 한번에 한가지만 하고는 가발공장에서 하버드 못갑니다. 한꺼번에 두가지 세가지 일을 같이 하고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물론 그런 과정속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것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알려드리고 싶은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그렇습니다.
시간이 항상 부족한데요 간단하게 책을 좀 읽어드리고 그리고 제 옛날 얘기와 더불어서 그 삶속에서 그때 그때 얻었던 철학을 몇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인생 50이면 황혼으로 접어드는 길목인데 이제 박사는 해서 뭐하니?
그만 애쓰고 여생을 즐겨도 되지 않니?“ 내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공부에 열중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나는 지금 내 자서전에 마지막 장을 쓰고 있는거야!” 그랬다! 나도 여생을 편하게 즐기며 살고 싶다는 충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액수로 보일지 모르지만 연금과 그 동안 저축해둔 돈이면 여생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내겐 지난 50년 동안 지켜온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다. 꿈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삶을 통해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지만 꿈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다 보면 길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작으나마 분명하게 존재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 하나의 힘은 미약할 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의 누군가가 그랬고 또 그 앞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외롭게 흐르는 한방울의 물이 서로 만나고 모여 물길을 이루고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지 않는가?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 왔다.
지금 세상이 조선시대보다는 차별이 줄었다면 그건 누군가 힘겹게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한 대가라고 믿는다. 역사는 강한자를 위해서만 흘러서는 안 된다. 역사는 약한자들을 위해서도 흘러야 한다. 그 역사의 길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다. 그리고 나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참이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가발공장에서 가발통을 붙들고 눈물을 지으면서 좌절하고 있었을 때 주변에 어느 누가 “서진규”를 보면서 얘가 나중에 작으나마 미군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세계 수재들이 모이는 하바드에 가서 석사는 물론 박사까지 도전을 하고 그리고 딸까지도 하바드를 졸업시키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 상상을 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 이중에 어느분이 또다시 엄청나게 세계를 변화시킬 그런 분이 계시지 않을까? 저는 크게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분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제가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얼굴을 이 모양을 해 가지고도 이렇게 오늘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께요. 많은 분들이 저에게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군 생활을 하다니 참 장하다. 거기다가 하바드까지!
그런데 저는 그 분들께 이런말을 해 드려요. 선생님! 저는 미국생활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미국 생활이 한국 생활보다는 오히려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제가 할려고 했을 때, 제가 빽 그라운드가 어떻건 부모가 어떻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자건 남자건 상관이 없었고, 동양인이건 백인이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당당한 실력으로 당당한 자세로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을 때 대가가 왔습니다. 길이 열렸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아니 더 힘든 일을 해도 대가가 있을때는 힘이 덜 듭니다.
한국에서는 같은 노력을 해도 꼭꼭 막혀 있었습니다. 어릴때 오히려 힘이 더들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도 내가 갈곳이 없다 그런 좌절까지도 느꼈습니다. 사실, 제가 미국에 가서 특별히 변한 사람은 아닙니다. 한국에 있거나 미국에 있거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까 구청장님이 말씀 하셨는데 미국에 계시는 상원의원님 여기 와서 강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분도 고아셨는데 양자로 미국까지 가서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들에게는 세계 어디 가서나 지지 않을 엄청난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정말 인재들 많습니다. 제도만 조금 바꾸어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실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길만 열어주어 똑같이 경쟁만 붙여 준다면은 아마 한국은 지하자원은 없지만 세계강국이 될것입니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은 아마 상대도 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ale기 때문에 이렇게 바쁘고 피곤해도 이 얼굴을 해 가지고 열심히 전국을 쫓아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동래군 월내리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가 태어나기 몇달전부터 앓아 누우셨어요. 엿 공장을 하는 아주 가난한 엿장수의 집이었는데 큰 일꾼이 앓아 누우니 집안이 난리가 났죠. 그래서 저희 친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살림을 맡아 해 주셨어요. 시골에선 대부분 그렇죠.
식구들이 아이를 받지 않습니까. 저희 할머니가 저를 받아 주셨는데 제가 태어나니까 그 할머니의 환영사가 “이 까짓 쓸데없는 가시나 낳으려고 온 집안 식구를 그렇게 고생 시켰노?” 조그만 아이인데도 굉장히 서글펐던 모양입니다. 막 울더랍니다. 그러고서 죽지는 말라고 콧구멍 뚫어주고 입 닦아주고 하더니 낡은 포대기에 뚤뚤 싸가지고 윗목으로 쓱 밀어버리셨답니다.
사흘을 안씻겼답니다. 아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아세요? 겉에서부터 딱딱하게 굳어간대요, 저희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더운물좀 데워 주십시오 해서 씻기는데 그때 벌써 피부는 거북이 껍데기, 머리는 딱딱한 돌덩어리. 그래서 물에 몇 시간을 불리니 겨우 벗겨지더란 겁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니는 저희 집에서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시던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막내아들이죠. 그 아들을 위해서 저를 위해 찾아오신 삼신할머니한테 물 떠놓고 밤낮으로 비셨답니다. “우야든지 우리 야 사관학교 입학 해 가지고 훌륭한 군인이 되게 해 주이소” 바쁜 삼신할머니 휙 지나가면서 들으니 뭐 사관학교 뭐 군인 그러니까 “아! 야를 군인 만들라꼬 저 노친네가 그렇게 비는갑다” 아마 나도 우리 할머니 덕분에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었던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참 고마운 할머니입니다.
저희 작은아버지도 사관학교에 입학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시는 “김종필 명예총재” 저희 작은아버지는 그 김종필씨와 같은 8기생입니다. 5.16을 기억하시는 분, 군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 얼마나 막강했습니까. 그들 중의 한 분이 저희 작은아버지입니다. 군이 막강하던 그 시절에 승승장구 하셔서 별 하나까지도 올라 가셨죠.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야심이 있고 아무리 사회가 그 사람을 밀어주고 기회를 줘도 또 실력이 있어도 체력이, 건강이 뒷받침을 안해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군이 막강하던 그 시절에 별 하나까지 갔던 작은 아버지는 군복을 벗고 54살에 돌아가셨습니다. 물거품이죠
서 진규는 어떻습니까? 지금 53살이죠! 말씀드렸듯이 6군데 강연에 책을 쓰고 편집하고 또 박사논문 준비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미․일 관계”, “한국 동란의 발발과 기원에 미친 일본의 영향” 등등 굉장히 바쁩니다. 읽을 책도 많고 그러면서 또 검도도 배우다 이렇게 얻어 터지기도 하고, 거기다가 판소리도 배우고 있습니다.
외국에 가서 한국문화를 발표할 기회가 있을 때 좀 알리고 싶어서, 이렇게 바쁘게 쫒아다니면서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건강과 체력이죠. 일이 바쁘다 보면 제일 먼저 양보 하는 것, 제일 먼저 잊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건강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하지, 나중에 먹지, 그러다 보면은 나도 사라지고 내가 돌볼 자식도 사라지고, 그리고 남편도 사라져 가죠. 부인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됩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건강 꼭 지키십시오.
처음에는 어머니가 저를 굉장히 괄시를 하셨지만 이제는 제가 어머니께 영웅입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부처님께 빌어도 저를 위해서 제일 먼저 비시고 보약도 지어주실려고 애를 쓰시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한테 참 고마운거는 어릴 때 보리밥을 많이 먹였어요.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다 그렇죠. 아버지께 먼저 쌀밥 떠 드리고 그 다음에 오빠, 밑으로 남동생 셋, 다 떠주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밑바닥의 누룽지나 아니면 보리밥이나 차지하게 되지요.
제가 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제가 얼마나 멍텅구리였냐면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꼴찌를 면치 못했습니다. 제 이름자도 못 써가지고 저희 어머니하고 식구들이 다 걱정을 했어요. “쟈는 나중에 우예 살아갈 지 참말로 걱정이다카이.” 이럴 정도였습니다.
학교를 가는데도 저는 오전반 오후반 분간을 못해요. 오전반인줄 알고 열심히 쫒아가면 오후반이고, 오후반인줄 알고 가보면 오전반이어서 애들 다 가버리고 없어요. 그러면 저는 또 시치미 딱 떼고 갔다 온 척하죠. 학교는 제일 많이 가본 사람이지만, 결석도 제일 많고 결국 학교 성적이 나쁜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때 제천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버지가 초등학교는 못 나오셨지만 한글은 깨우치셔서 말단 공무원이되셨습니다. 보일러 실에서 일을 하셨는데 월급이 정말 쥐꼬리만큼이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노름벽이 있어 쥐꼬리만한 월급도 빈 봉투만 달랑 달랑 들고 오시는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집안은 싸움이 나고, 결국 저희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생활전선으로 나서는데 하필이면 왜 술장사입니까? 열세살이 된 여자아이에게는 엄마가 술장사 하시는게 굉장한 열등의식으로 다가오더라구요. 누가 볼까봐 누가 알까봐 몰래 나갔다 몰래 들어오고. 그러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고뇌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언니가 시집을 갔는데 하필 그 신랑이 왼팔을 쓰지 못하는 불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부모님이 생활비를 대 주는 계기가 되었구요. 거기다가 또 저희집에 막내 동생이 태어났어요. 지금은 40이 조금 넘었는데 정신연령은 4~5살, 쉽게 말해 저능아죠.
그런저런 이유로 어머님은 매일밤 신세 한탄을 하시며 술을 드시게 됩니다. 술 드시고 집에 들어오시면 요강에 토하고, 울면서 신세한탄하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천의 겨울은 굉장히 추운데 새벽 5시에 밥을 하러 나가야 됩니다. 13살짜리 아이 이야기이죠. 밥 뿐만이 아니라 7식구 빨래도 해야 됩니다. 개천의 물은 얼어있어요. 고무장갑이 없으니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애요. 막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탄스럽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열악하고, 속상하고 남이 부럽고 그러면서 같이 나눠서 하면 훨씬 수월할텐데 왜 나만 시키느냐고 엄마께 말씀드리면 “니는 가시나 아이가?” 라는 말만 합니다.
그럼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일어나고 그 분노와 함께 반항이 일어납니다. 엄마에 대한 복수 “나도 언젠간 꼭 성공하고 말리라” 그때되서 가시나도 머시마 못지 않게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꼭 증명해 보이고 말리라, 언젠가는 후해할 겁니다. 속으론 분노를 느끼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복수심․분노․반항․목표가 없었더라면 공부는 여전히 꼴찌를 맴돌면서 그냥 그렇게 허송세월 하다가 늙었을 겁니다. 그 분노와 반항이 나에게 목표를 심어줬고 그 목표가 나에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찾기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내가 성공해야한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것을 느끼고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겁니다. 스스로 깨달은 공부, 그래서 공부가 재미있었기에 초등학교 6학년때는 전교 2등으로 졸업을 합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너나할것없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죽을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재력의 몇백분의 일도 못 쓰고 떠나요., 참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재력을 쓸 기회가 안와주기도 하지만 또, 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용기가 없어 문을 열지않고 그 짜여진 제도 안에서만 해답을 찾고 또 짜여진 제도안에서 바깥으로 한발만 내밀어도 겁을 내서 나가지 못해요. 그래서 결국은 그 잠재력이 없어지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50살이 넘어서 발견한 잠재력이 3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작가의 소질입니다. 제가 지은 책이 25만부가 팔렸습니다. 베스트셀러 1위가 된것입니다. 만약에 겁을 먹고 도전을 안했더라면 저에게 있는 작가소질은 그냥 그대로 사라졌을 겁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는 것까지도 파악할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제게 이런 강사의 자질이 있는걸 몰랐습니다. 그런데 해 보니까 되더라구요
사실 군인들한테도 강연을 많이 했었습니다. 강연시간은 군인들에게는 자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안 자요, 얘기를 듣고 눈동자가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눈동자가 광채가 나는 군인들이 보여요. 그들은 한국뿐아니라 세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제가 굉장히 행복해 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죠. 도전을 안 했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안경을 안끼고 콘텍트 렌즈도 없습니다. 53살이죠, 48살에 갱년기라는 것을 겪었습니다. 시력감퇴라는 것이 오는데 돋보기를 끼지 않고서는 글을 읽을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군에서 일을 할 때는 사실 1시간이상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는데 하버드에서 1차시험 때인데 책을 300권 읽어야 했어요. 시간이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2~3시간 연속으로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데 신체적인 거부 반응이 옵니다. 골이 아프고 토하려고 해 포기할 뻔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수를 바꾸어 해결될 일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돋보기 자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니 어떻게 책을 읽고, 시험에 통과하고, 박사학위를 땁니까?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나중에는 돋보기를 벗어 버렸습니다.
안과병원에는 가지도 않고 혼자서 개발하고 끝가지 밀고 가다 보니깐 눈에 힘이 들어가서 카메라 조리개처럼 조절을 해요. 지금은 안경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잠재력 그것을 짜여진 제도의 틀속에서만 해답을 찾았더라면 아마 저는 계속 돋보기에 의지하면서 살았겠지요. 인간의 잠재력 그것은 정말 무궁 무진 합니다.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본인들입니다.
제 어머님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은 저에게 일을 많이 시켰던 것입니다. 여자니까 살림은 다 해야한다. 그러면서 그 추운 겨울에도 완전히 훈련을 시켰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주 강인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죠. 완전히 야생화처럼 그렇게 강인한 아이로 자랐기 때문에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누구와 경쟁을 해도 지질 않아요.
제 오빠는 쌀밥을 먹고 자랐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 폐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겨우 살아났죠. 그리고 나중에 저희 형제들 제가 다 미국으로 데려다가 자리잡아주고 그 아이들까지도 대학에 갈수 있게끔 해주고 또 부모님도 미국까지 모시고가고 다 잘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 하나를 강하게 키워 놓으니깐 그 아이가 온 식구들을 다 도와주고 있잖아요.
저는 제딸을 키울때도 그러한 방법을 활용했습니다. 아이가 10살때부터는 용돈을 적게주고 군화를 닦게 했어요. 처음에는 형편 없더니 하다보니깐 나중에는 군화를 번쩍번쩍 닦아 놓더라구요.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 갔을 때 관사에서 돌아다니면서 제 군화를 보여주고 이거 엄마 구두인데요 제가 닦았어요 하면서 다 모아가지고 온거예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와서는 구두를 닦아 달라고 하더라구요. 11살 짜리가 사업을 하는겁니다. 그리고 그일에 자신이 생기니깐 나중에는 옆집의 잔디도 깍아주고, 세차하고 커서는 남의집 아이를 봐주고 또 대학에 가서는 식당 웨이트리스등을 하면서 자기 용돈을 버는겁니다. 그리고 또 깨달은 것이 있죠 일에 대해서 겁이 없어요, 자신이 생긴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러한 노동을 “평생 하고싶지 않은 일이다”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해서 이 아이는 이런 일을 평생 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하고 그 결론은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입니다.
초등학교땐 꼴지를 하던 아이입니다. 그러던 아이가 하버드를 졸업했지 않습니까. ROTC 4년 연속 1등을 해가면서 학비도 벌고 또 부족한 것은 돈을 꿔서 학비를 충당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혼자 학비를 다 마련했습니다.
그 아이가 특수한 아이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미국아이들이 그렇게 자라고 있습니다. 부자집 아이들도 이렇게 허드렛일을 하면서 겸손도 배우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뒷받침을 해줄 조건이 되질 않죠, 아이들 혼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좋은 대학은 공부만 잘해서는 안됩니다. 공부도 잘해야 되지만 스포츠도 잘해야 되고, 외국어 2개 정도는 유창하게 해야 하고 또, 선생님의 추천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아이들이 다 할 수 있어야 좋은 대학에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뭘 배우는 줄 아십니까?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이 모든 것을 내가 성취할 수 있는가? 스스로 배우게 됩니다.
한국에 와서 제가 참 가슴아프게 생각한 것은 한국의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너무 온실속의 화초처럼 키운다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의 시야가 너무 좁습니다. 꼭, 이 아이들의 미래가 내 옆집아이, 이웃집 아이하고만 경쟁을 하고 학교에 있는 아이들하고만 경쟁을 하고 그것이 그 아이의 미래인줄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제화시대입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얼마나 빨리 국제화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경쟁상대는 "Time management"를 배워가면서 모든 일에 충실하면서 강하게 키워진 그 아이들이 바로 여러분 자녀의 경쟁자들입니다.
미국의 대학원에서는 한국의 어느 학교를 나왔건 그 학생의 태도와 실력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너무 좁게 키우다 보니 아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러다보니 국제경쟁에서 뒤떨어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유학생들은 미국에 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면에서 말입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저는 어머님 덕분으로 강한 분노와 반항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가서 강연을 할 때는 “멋진 반항아가 되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 치고 반항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반항심이 강하죠, 그런데 기성세대들은 그 반항을 누르려고만 하죠, 누르면 옆으로 튑니다. 그것을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를 했을 때 그 반항심은 아이들에게 좌절하지 않는 엄청난 힘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반항심을 잃지마라 다만, 이왕이면 멋진 반항아가 되라”라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제가 부산에서 강연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신창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았는데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신창원과 서진규는 닮은데가 참 많다. 신창원과 서진규는 둘다 나름데로 잘생긴 편이다. 신창원과 서진규는 엄청나게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엄청난 반항아들이다. 신창원도 나중에는 자서전을 썼고 서진규도 자서전을 썼다. 신창원과 서진규는 이 사회의 잘못된 폐단과 억울한 차별들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늘의 신창원과 서진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창원은 지금 자유가 없는 감옥에 있다. 몇일전에 신문에 났더라구요, 22년 6개월형을 받았죠. 그러나 서진규는 세계의 자유인이다. 세계 어디든 갈수 있다. 갈수 없는 곳은 북한뿐이다. 그런데 이북도 내가 동포들을 위해 돈을 주겠다고 하며 뭉칫돈을 들고 들어가면 그냥 열어 줍니다. 결국 서진규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습니다. 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죽을 수 있고 지금 현재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군에서 연금으로 한달에 2,000불이 나오고 있습니다. 박사공부하고 있는 학비도 군에서 지원해주고, 병원도 무료로 쓸 수 있습니다. 집도 있고 땅도 있고 있습니다.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일이 좋아서 마음데로 뛰어다니면서 강연하고 글을 쓰고 박사학위도 따고 다 할수 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요? 신창원과 서진규,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우리는 남자나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남자는 단 한사람도 없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이구요. 우리는 다만 어렸을 때 선택을 달리 했을 뿐입니다. 신창원은 그때그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과 환경에 그대로 맞서고, 그대로 반발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보기엔 신창원은 영웅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억누르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덤벼들고 반발했기 때문에 영웅처럼 보이죠. 그러다 보니 법에도 맞서 평생을 법에 쫒겨 다니는 삶을 살게 되었죠. 저도 신창원의 자서전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어릴적 꿈은 장군이 되는거였습니다. 그가 경찰을 피해서 작전을 짜고 기묘하게 피해 다니는 것을 보면 20년경력의 군인으로서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해 보더라도 그는 정말 전략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고 어쩌면 훌륭한 장군도 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신창원의 소원이 뭔지 아세요? 감옥에 갇혀있지 않고 밖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단 몇일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그의 소원입니다.
서진규는 멋진 반항아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때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 나에게 차별을 가하던 사람들, 그들에게 그냥 대안없이 맞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맞서면 저에게 돌아오는 건 매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엄마가 매를 들었을 때 잘했거나 잘못했거나를 떠나서 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빌었습니다. 옆의 아이들이 볼 때는 아마도 비겁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순간 저는 미래에 대고 맹세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는 꼭 성공할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사회의 잘못된 폐단을 막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두고 보싶시오, 꼭 성공하고 말 겁니다.”라고 말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면서도 안으로는 실력을 쌓기 시작하여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저를 지원할 수 있도록 모범생이 되었습니다.
제천에서 견딜 수 없었을 때 저는 서울로 도망을 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나 그냥 단순히 보따리를 싸서 도망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김강자서장님도 안계셨기 때문이죠. 저는 올바른 길을 통해서 서울의 고등학교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집에서는 보내줄 리가 없죠. 그런데 저는 실력을 쌓아서 우등생이 되었잖아요? 선생님들이 저를 믿고 밀어주지 않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선생님들의 권위가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산 위까지는 올라가 있었어요. 지금은 땅파고 밑으로 밑으로 자꾸만 내려가고 있죠. 선생님들이 집에와 부모님들을 설득하는데 어떻게 부모님들이 계속 반대만 합니까? 그리고 행운이였는지 저희 작은아버지가 서울에서 대령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서울로 가서 풍문여고 모범생에다 반장도하고 그런데로 꿈도 키우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가난은 했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서 밝은 미소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이 사회는 남녀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차별, 권력에 따른 차별까지 있어 이 멍텅구리는 갈곳이 없더라 구요. 시골에 내려와 살림이나 하다가 시집이나 가라 하더군요.
그래도 무릎을 꿇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수도없이 다짐하고 결심을 했는데요. 나는 꼭 성공을 하겠다고, 나는 꼭 성공해서 괄시를 받는 이 아이도 뭔가를 할 수 있다. 그것을 꼭 보여주고 말겠다. 결국 서울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발공장의 여공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디.
가발통을 붙들고 일을 할라치면 눈물이 있는데로 쏱아져요. 정말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되는건가? 아 정말 왜 이리 힘이든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했습니다. 육영수회관 이란 데서 6명이 먹고 자고 하는데 그게 하루에 40원씩이예요. 그런데 그돈을 못벌어 밥을 꽤 많이 굶었습니다.
엑스트라 라는 것도 해봤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는 여러 사람들이 밥을 사주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얻어먹다 보니 민망해져 마음속으로 다짐을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는 꼭 성공할겁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을 해서 이 사회를 올 바른 길로 이 끌어 나가는데 앞장설것입니다 라고 혼자 스스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곳을 찾아간 곳이 관악골프장의 식당종업원 이었습니다. 식당종업원을 할 때는 또 다른 좌절이 오데요. 가발공장에 있을때는 제 주변사람들이 거의 공장직공 아니면 식당종업원 이었죠. 완전히 한국사회에서 밑바닥을 쫙 깔았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골프장에 가 보니까 우리는 밑바닥이지만 정말 한국의 공중을 덮고 있는 사람들이 와서 그 골프장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사람들한테 우리는 완전히 종이었습니다. “야 이거 가져와”, “야 저거 가져와”, “야 일 좀 빨리해”등등.. 저보다 어린아이들이 저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는 쉬운 말로 벨이 꼴려서, 오기가 솟아서 더 이상은 못 견디겠더군요. 훨씬 더 힘이 들더군요,
그런데 거기서 또다시 “두고봐라 나는 언젠가는 성공할 꺼다. 성공해서 너희들 앞에 당당하게 설 꺼다” 라는 오기가 저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제마음을 밀어 주더군요.
그러는 와중에 이렇게 꿈만 꾸지말고 현실과 좀 연결해보는게 어떻겠느냐하는 생각이 들어서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일에 한시간 정도 아마 영어공부 해 보신분들 많이 계시겠지만 한 주일에 한시간 배워서는 그렇게 늘지 않아요.
미국사람들 일요스폐셜을 보신분은 알겠지만 헨리와 윌마가 있죠, 그 사람들한테 영어를 배우는데 이게 잘 늘지가 않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다는 그 자체 이것이 나의 꿈과 현실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연결을 해주는 엄청난 힘을 주더라구요.
이렇게 영어를 배우다가 저는 우연찮게 첫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집 아들에 좋은 대학을 나오고, 그당시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태권도 유단자로 미국에서 2년 동안 태권도를 가르치고 와서인지 저희 영어선생님과 대화를 하면 얼마나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지 “와! 참 정말 멋있다, 환상적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면서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가고 나는 그 사람과의 오손도손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사람은 소식을 뚝 끊어 버립니다. 저의 꿈은 무너지고 저는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나라의 막강한 차관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기도 하고, 밤길을 정처없이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죽자. 인간이 태어날때 아무 선택을 할 수 없었듯이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도 아무런 선택이 없다. 난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삶이 너무 힘들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단 한사람 그사람마저도 이세상은 빼앗아가 버린다. 그냥 죽자.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죽음에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까? 약을 먹고 죽을까? 어떻게 죽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전혀 기대도 안 했던 것이 눈에 띄더군요.
미국 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직업소개소의 광고였습니다. 아! 어쩌면 이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당시 메달릴 데가 없으니 거기에다 매달렸습니다.
윌마와 헨리가 미국은 평등사회여서 가난한 집 아이나 끈이 없는집 아이나 누구나 하면 된다고 한느데! 어쩌면 이것이 나의 길이 아닐까? 그래 한번 가보자 그렇게 해서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0살입니다. 여러분의 동생이나 자녀가 이제 20살 여자 아이에 불과한데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아는 사람도 없이 돈도 없이 미국의 신문 광고를 보고 식모로 가겠다 하면 보내주겠습니까? 지금도 사기꾼이 많지만 그때는 더 심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가지마라, 너 같이 어리숙한 아이들 데려다가 식모가 아니라 창녀로 팔아먹을 그럴 사람들이야, 너는 가면 창녀가 돼. 가지마라..” 저도 사실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이제 20살의 어린 여자아이입니다. 무서워서 밤마다 이불 뒤집어 쓰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렇게 사는 거 보단 낫다. 한번 가보자. 너는 이 세상에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는 이 세상을 올바른 세상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러니깐 가라.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가라. 그리고 겁내지 마라. 왜냐하면 너에게는 죽음이라는 비상구가 있다. 그 비상구는 네가 미국에 갈때 함께간다. 그리고 비상구의 열쇠는 바로 네가 쥐고 있다. 무엇이 겁나느냐! 너는 이미 여기서 죽으려 했던 목숨이다. 우리는 다 죽는다 가봐라 가서 해보고 정말로 창녀로 팔려가서 못 견디겠다 싶으면 열쇠로 열고 빠져나와라. 그러면 끝이다. 그러나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지금 포기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다음엔 겁날게 없더라구요. 부모님을 설득하여 부모님이 꿔다주신 100불이란 돈으로 뉴욕행 비행기표를 가지고 떠납습니다.
1971년 3월 9일 식모라도 배워야 했기 때문에 저의 선생님 헨리와 윌마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식모의 일이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내가 미국에서 살아 갈수 있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는 그 목표 아래 성심껏 일했습니다.
무슨일이든지 그 사람들이 시키기 전에 저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은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그리고 인간도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였습니다.
제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니 그 사람들이 감탄을 하더군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미국가는 케이스 그것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너를 미국에 데려가마, 그리고 대학까지 보내주마. 너는 정말 훌륭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부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무슨 일을 하고 계시든 성실히 하십시오. 남이 보거나 말거나, 상관이 보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 충실히 했을 때 그 결과는 자기가 상상도 못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제가 뉴옥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은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그 직업소개소도 형제가 하고 있는데 사실이었죠. 다만 수속하는데 2년이 걸렸기 때문에 저를 식모로 쓰려고 했던 곳은 남미 사람이 대신하더군요. 처음에는 굉장히 황당했었는데 그 소개소에 있는 사람이 괜찮다고, 오히려 잘됏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정말 잘 됐어요. 왜냐면 저는 3년동안 한달에 300불 받고 일을 해줘야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직업소개소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주는데 그게 아리랑이라는 식당, 뉴욕에서 최고로 좋은 한국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느네 한달에 수입이 71년당시 1,000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에서도 아주 괜찮은 수입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한국 골프장에서 식당종업원 했던 그 시절이 경력이 되었다는 겁니다. 뜻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도움을 받는 그런 케이스가 되었죠. 그렇게 해서 저는 1년반만에 꿈에도 그리던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유학생들 중에서 엄청난 갑부의 아이들은 집에서 돈을 펑펑 대줍니다. 그 아이들은 돈으로 좋은 자동차 사고 거리에 있는 좋은 술집은 그 아이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가정에서 공부 잘해서 유학온 아이들 있죠. 그 아이들은 정말 죽도록 고생하고 있습디다. 공부도 영어 때문에 많이 딸려요. 그런데다 보내주는 돈은 택도 없이 부족합니다. 거기다가 유학생은 미국에서 일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불법으로 취업을 할 수 밖에 없죠. 한국이나 미국이나 악덕고용주는 어디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학비는 공립이라도 유학생에게는 사립과 똑같이 듭니다. 굉장히 비싸요. 서진규라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우습게 봤습니다. 하지만 식모로 이민간 여자라도 이민간 사람은 미국에서 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결국 한달에 1,000불씩 벌었잖아요.
학비도 다른 유학생들에 비하면 3분의 1밖에 안듭니다. 저는 부자유학생이었죠.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밥도 사주고, 학용품도 사주고, 작은 돈은 그냥 주기도 하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저는 180cm에 80kg의 멋진남자를 만납니다.
한국에서 온 합기도 7단. 그사람한테 푹 빠집니다. 주위에서는 반대를 많이 하죠. 그 사람 영어도 못하고 또 기술도 없고 합기도 가지고는 미국에서 생활하기가 어렵다라고요. 너는 이미 학교도 2년 다녔고 미래도 창창하지 않느냐. 그런 네가 왜 그 사람과 결혼할려고 하느냐. 주변사람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머니 눈에 보이는게 없더라구요. 아리랑 식당에서 일을 할 때는 외교관도 저에게 청혼을 하고,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청혼이 들어오고 하는 별 난리가 났는데도 그 사람들 다 마다하고 이 사람만 좋은 거예요.
이미 아이도 하나 있고, 또 결혼하기 전에 바람도 피웠는데 그걸 가지고 제가 화를 내니 그대로 두들겨 패더라구요. 그때는 이것보다 더 심했죠. 그랬는데 저를 때리는 그 주먹까지도 사랑스러워 보이더라구요. 사랑의 힘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조언 다 뿌리치고 그냥 그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건 사랑은 날이 갈수록 엷어집디다. 손찌검이 왔을 때 사랑의 베일은 한꺼번에 확 벗겨져 버립니다. 그 사람의 진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진짜를 보면서 저는 황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사람은 “마누라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마누라는 최소한 1년에 3~4번은 맞아야 제 자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신념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불평했을 때 그럽디다. 한국 남자치고 마누라 안패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저는 매를 맞으면서 한번 참고, 두번 참고하다가 나중에는 이 사람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구요. 다른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데요. 대부분은 때려놓고는 그 사람 앞에서 잘못했다고 울면서 막 빌고, 잘때는 또 꼭 껴안고 자고 항상 그것 때문에 또 다시 돌아서고 그러면서 맨날 맞고.. 어느날은 내가 그런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커녕 나 자신도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그 사람들을 구해 주느냐는 혐오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을 피해서 도망간 곳이 미군이었습니다.
1976년 11월 9일 군용버스에 타고 알라바나에 도착했습니다. 저희 딸이 태어난지 딱 8달 되었습니다. 11월 10일 훈련이 시작 되었습니다. 저의 나이 28살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입대하기 한달전에 임신한 줄 모르고 예방주사를 맞다가 유산이 되어 저는 그당시 만신창이의 몸이었습니다.
그때는 여군단이 있었는데 저와 같이 훈련을 받던 200명의 훈련병들이 다 저보다 10살이 어린 나이였고, 동양여자는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다들 “우향 앞으로 가”하는데 저만 좌향앞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저만 벌을 받으면 괜찮은데 군에서는 꼭 단체로 기합을 받잖아요. 여러번 반복되다보니 아이들이 저를 미워하더라구요.
얼마나 황당하고 고통스럽고 미안합니까? 그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저의 몸은 만신창이 아닙니까 체력이 떨어질데로 떨어진겨죠. 구보를 하는데 숨이 턱이 차도록 뛰고 또 뛰는데도 못 따라 갑니다.
떨어질수는 없기에 뛰고 또 뛰다가 결국은 숨이 차 죽을 것 같아면 걸어갑니다. 터덜터덜 걸어가면 그 아이들이 다 멀어져 가는데 그 뒤 남겨진 먼지 속에서 혼자 걸어가는 그 갈대같은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가다가 지치면 그냥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서 웁니다. 그렇게 울때는 왜 그렇게 8달된 딸이 보고 싶던지...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걸을 수도 없으면 그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딱 죽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쓰러지지 마라. 일어나라. 네가 거기서 쓰러지면 네가 구하고자 했던 그 사람들 누가 구해줄꺼냐. 너는 지면 안된다. 일어나라 너의 딸을 위해서라도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너는 일어나야 한다. 또 뛰어라” 결국 일어나서 또 뜁니다. 뛰다가 쓰러지고 또 뛰다가 쓰러지고 이를 악물고 뛰어서 두달 훈련을 받고 졸업을 할 때는 200명 중에 1등으로 졸업을 합니다.
인간의 잠재력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표가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감을 얻고 한국에 와서 근무를 하면서 일을 잘 했다고 표창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교 도전을 하죠.
왜냐하면은 한국 사람들을 설득하기위해서는 사병보다도 장교의 힘이 크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32살,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그 사이에 저는 남편과 또 다시 합쳤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장교도전을 합니다.
이번에는 남녀가 같이 합니다. 보병훈련을 받는데 중대에서는 1등을 못했지만 우리 소대에서는 1등을 했습니다. 저와 같이 훈련을 받던 아이들은 다 저보다 10살아래의 어린아이들이었고 그리고 25명이 다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서진규는 4년반동안 사병생활을 하면서 체력을 다졌기 때문에 체력은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지만 그 아이들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죠.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32살에 소위 임관을 하는데 50명의 우수한 미군 장교속에서 졸업할때 이 32살의 아줌마가 1등상과 지도자상까지 모조리 휩쓸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의 긍지와 한국인의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분들은 나이 때문에 주저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분들께 이런 얘기를 해 드립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응시했을 때 28살이었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어요. 다시 응시를 한때가 32살입니다. 그 당시에는 10살 12살짜리가 시집가고 장가가던 때입니다. 32살은 할아버지였죠. 그런데 그 분이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도전을 했기 때문에 한국이 그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우리모두의 영웅, 한국의 영웅으로 남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막습니까? 그리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일, 배우고 싶은걸 배우는 동안엔 얼마나 큰 행복이 있는지 아세요? 비록 당대에 영웅이 안돼더라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죽는다면 후에 자손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왜 포기를 하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53살이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죠. 제 강연을 듣고 희망을 갖고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장교가 되고 나서 한국에서는 중대장을 했죠. 대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역의 전문가 지원을 했습니다. 지역전문가가 되면 엄청난 혜택이 있어요. 그 지역의 고급 언어를 가르쳐주고, 그 지역을 답사할 기회를 주고, 또 학원에 가서 석사 공부할 기회를 주죠. 월급 다주면서 4년반 동안 교육을 시켜줍니다. 굉장히 매력있죠.
저는 동북아를 지원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여기에 해당하죠. 자신있다고 지원을 했는데 떨어졌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워싱톤으로 달려가서 존대말로 공손히 물었습니다. “왜, 안 됩니까? 동북아 지역 전문가는 왜 여자를 써본 적이 없습니까? 미국은 평등 사회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그분이 “미국은 평등사회입니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 전문가가 가서 같이 일해야 할 파트너들은 남존여비 사상에 푹 젖어있는 한국 남자들과 일본 남자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국 여자라는 핸디캡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아니였습니까? 일본 사람은 한국인들을 무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여자를 뽑아 보내겠습니까?” 하더라구요.
그러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은 사실이다.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등한 주권국가 이다. 내 나라를 위해서 협상을 하는데 상대가 여자면 어떻고 백인이면 어떻고 일본사람, 흑인이면 어떠냐! 당신이 할 일은 남자를 믿어주듯이 저를 똑같이 믿어만 주라. 그 후에는 나한테 맡겨라.” 하루에 걸텨 설득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동안 일본어 공부를 했습니다. 졸업을 하려면 읽기․듣기․말하기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아직까지 학교가 생긴지 48년만에 그 세가지 시험에 모두 만점을 맞은 사람은 서진규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기록을 남겨놓은거죠. 그리고 서진규는 계획을 짭니다. 성공할 계획이요. 그래서 하버드를 넘보는 겁니다.
하버드대학의 인문학과와 경영학과 두군데 지원을 했습니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두군데 다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한군데 밖에 못가는 거에요. 제가 말씀드렸죠. 하버드의 학비가 굉장히 비싸다고요. 한군데에 포기 싸인을 하는데 떨려서 이름이 안 써져요. 이게 꿈이냐, 생시냐! 가발통 붙들고 울면서 제일 꼴찌대학의 뺏지만 봐도 눈물을 흘렸는데 어떻게 세계 수재들이 다 모인 하버드를 한군데를 못간다고 포기 싸인을 해야 되느냐 정말 떨렸습니다.
하버드에 다니는 세계 수재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아세요?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공부를 합니다. 대부분이 20대입니다. 저는 40대 초반의 세익스피어 한번 읽어보지 못한 아줌마 아니에요. 게임이 안됩니다.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니까 됩디다. 그래서 2년 후에는 A학점을 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닙니까?
그리고 서진규는 또 도전을 하죠. 자신이 생겼으니까요. 박사학위 한번 해보자! 하버드 박사학위는 하늘의 별따기라더라. 그런데 지금까지 해 왔던게 됐지 않느냐 한번 해봐라! 그리고 첫해는 떨어졌어요. 그런다고 제가 포기함니까? 포기하지 않죠. 또 다시 도전합니다.
2년째, 제 희망학과는 국제외교사학과 인데 32명의 세계 수재들이 우리과로 지원을 했습니다. 거기서 딱 2명만 뽑힙니다. 거기서 50%는 이 44살의 한국아줌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박수를 보내주셔도 됩니다.
그런데 저는 군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군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일본으로 떠납니다. 그때는 이미 남편과 헤어지고 딸과 저 둘만 살고 있는데 그 딸이 제가 하버드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행복해 하는걸 보고 나도 하버드를 가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그 꼴찌 학생이 하버드를 가기위해 밤잠도 안자고 모든 것을 열심히 준비합니다. 뜻하지 않았던 횡재죠. 저는 사실 그 아이한테 평생 공부하라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딱 한번 회초리를 들어본 기억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고, 조언을 해주되 선택은 그 아이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하버드를 가고 싶답니다.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고 싶답니다. 제가 그렇게 했더니 그 아이는 제가 지켜보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학교에서 홍일점 야구선수, 학교신문 편집장, Future Business Leader of America Organization, 두군데서 2년 연속 학생회장, 학교를 졸업할때는 1등, 1995년 이었죠.
신문에서들 보셨을 겁니다. 제스인 최. 미국에서 250만명의 고등학생이 해마다 졸업을 하죠. 그 중에서 141명이 뽑혀서 대통령상을 타지 않습니까? 그 해에는 한국계가 셋이 있었조. 그중의 한명이 제스인 최. 바로 제딸 아닙니까? 자랑스럽죠.
그리고 또 일본에 갔을 때 제가 최초의 여성연락장교 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감짝놀랐습니다. 유창한 일본말과 하버드의 석․박사과정. 일본 사람들을 하버드하면 땅에서 깁니다. 만능열쇠죠. 모든 사람들이 협조를 해주고 군에서 이 서진규를 모른다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고 멋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가 제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사실 지금 여러분들 앞에 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중에서 또 누군가 엄청난 인물이 미래를 꿈꾸면서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일본에서 신났던 일이 있죠. 75세 정도 되신 재향군인회 회장이란 분이 저를 자기 별장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딸과 같이 갔는데 그 보수적인 일본지역 유지들이 저와 딸을 제일 상석에 앉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앞에서 무릎 꿇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있는 겁니다.
그순간 저는 저희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1941년 일제 시절. 아버지는 강제 노동자로 탄광에 끌려가서 일을 하셨습니다. 탈출을 기도하는데 다시 잡혀서 홋가이도로 끌려가 일본군 활주로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장질부사를 앓다 겨우 살아나셨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될 때까지 완전히 노예처럼 살다 오셨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마음 속으로 외칩니다. “보십시오. 아버지! 얼마나 통쾌하십니까? 아버지를 노예처럼 부리고 멸시하던 그들이 오늘 아버지의 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저를 보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하십니까 아버지”.
저는 저희 딸을 쳐다보며 말을 합니다. “성아야! 이것이 바로 성공의 맛이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가발통 붙들고 좌절했을 때, 미군에 들어가 구보에 뒤떨어져 먼지 속에서 울면서 너를 부르고 있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 싶었을 때, 포기하지 않고 참아 왔던 그 노력의 댓가가 바로 이것이다. 멋진 반항아의 결실이 이것이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나의 선택이었다. 너도 한번 해봐라!
저희 딸이 저를 생각하면서 쓴 글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조각그림 맞추기 게임이고 우리는 그안의 조각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유년기를 보내면서 자신이 어느 조각이며 다른 조각들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알아내려 애쓴다. 그런 다음엔 전체의 그림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자 한다. 하지만 조각들을 다 맞추기 전까지는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전혀 알수 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조각그림 맞추기와 같았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힘과 목표 그리고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게 엄마는 그칠줄 모르는 힘의 원천이었다. 심지어 나는 엄마에게는 인간적 약점이라고는 없다고 믿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의 엄마를 보고 있다. 엄마도 두려움, 의심, 외로움을 느끼신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계시지도 않다. 또 실수도 하신다. 그러나 묘하게도 엄마 역시 여느 사람들처럼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오히려 엄마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것은 엄마가 이러한 모든 인간적 면모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모습이 되기까지 엄마는 언제나 자신을 이겨냈고 이기적인 충동과 싸워 왔으며 오랜기간을 끊임없이 노력해 오셨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언제나 긍정적인 자세를 지닌 분이었다.”
성아가 일요스페셜에서 그랬죠. “나는 엄마의 복제 인간이 되는게 꿈이었다고...” 저에게 그보다 더 좋은 더 큰 행복의 성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꿈을 가지고 노력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았던,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그 이상의 꿈이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한국도 그런 사회로 만들어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진짜 엄청난 행복을 느낄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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