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의 역사와 예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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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 - 도심 무인도라이프, 사는 게 모험이지!
얼마전에 밤섬에서 무인도 생활을 하는 영화를 보고,
오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찾아봄....

박통시절에 여의도를 재개발하면서 자재사용과 함께 강의 흐름때문에 폭파를 했다는 이야기를...
선유도도 그렇고, 다 부수고 박살내고, 개발해버리면 이제는 되돌릴래야 돌릴수도 없다...
대운하도 그렇고 좀 더 개발에 신중하게 접근했으면 한다...




출처 http://kr.image.yahoo.com/hawond
조선시대의 사진이라는데, 왼쪽에 보이는것이 밤섬이고, 아래는 마포 나루터라고...
 

밤섬
 

01 개요


섬의 모양이 밤알 모양같이 생겼다하여 밤섬(栗島)이라 불리어 졌고 주민들은 1967년까지 고기잡이와 배만드는 것을 주업으로 하였으며, 뽕나무와 약초(감초)와 염소를 방목하고 살았음.
   


1968년 여의도 개발시 토사와 석재를 사용하고 현상태로 남게됨 → 자연초지로 존치
거주민 62세대 마포구 창전동 이주
   


1988년 4월부터 철새도래지로 관리
  LG 그룹에서 29,700천원 투입, 갈대, 갯버들, 버들강아지, 찔레 등 58,000포기 식재
   
 
02 역사속의 밤섬
 
밤섬은 서강(西江)에 가까웠던 탓으로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밤섬은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었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으로 섬 전체가 수십리의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명소고적]에서는 율도는 일찌기 마포팔경을 읊은 글 가운데에서도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맑은 모래가 연달아 있어서 그야말로 한강 강색과 섬의 풍치는 묘하게 어울린다라고 하였다

밤섬(栗島)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으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율도(栗島)는 조선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밤섬에서 뽕을 대기도 하였다.

밤섬에 관한 풍습은 명종실록 명종 11년 4월 조(條)에 기록하고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는데,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고려때는 귀양보내던 섬이었으며 도선(渡船)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하였다

   
03 지리·지형의 변천사
 
이주하기 전의 밤섬모습 사진
이주하기 전의 밤섬모습  
밤 섬이란 명칭이 붙은 까닭은 섬이 밤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이섬은 초기에는 고립된 섬이었으나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중도(河中島)로 발달하게 되었고, 감수기에는 여의도에 연속하게 된다. 기반암은 단단한 바위층이고, 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한 하식애(河蝕崖)는 작은 해금강이라 불렀고 절경을 이루었다.

밤섬(栗島)과 여의도의 주변에는 홍수때는 거의 침수 됐다가 끝나면 하상이 수면위에 노출되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대략 250∼300만평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밤섬은 서강쪽에 여의도는 영등포쪽에 가까웠는데, 여의도는 1916년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광복후에도 1958년 김포 공항이 세워지기 전까지 민간 및 군용기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홍수시에는 백사장이 침수되어 밤섬 고지대의 주민들의 교통이 차단되어 고립되곤 하였다. 이후 밤섬은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한강하구의 확장으로 유수를 좋게하고, 여의도 제방의 축석에 필요한 잡석채취를 위해 1968년 2월 폭파 해체된다

현재의 윤중제인 여의도의 방축을 쌓을 때11만 4,000입방미터의 잡석과 14만 7,500입방미터의 흙을 이용할 수 있었다. 폭파에 의하여 밤섬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일부 10여개의 조그마만 섬의 형태로 남았다. 그리고 20여년동안 계속된 한강 퇴적물에 의하여 섬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속의 철새도래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80년대 한강종합개발시에는 철새도래지와 어류서식지로서 보존할 가치가 크기 때문에 현 상태로 존치하게 된 것이었다.

   
04 밤섬 주민의 생활상
 
현재의 밤섬모습사진
현재의 밤섬모습  
행 정구역상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으로 되어있는 밤섬은 500년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한강물을 식수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 섬에 마씨(氏), 인씨, 석씨, 선씨 등 희성(希性)이 많은 것이 가장 뚜렷한 특색의 하나다. 폭파 당시 밤섬에는 부군신, 삼불제석님, 군웅님의 3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밤섬은 면적에 비하여 가구가 많고 농업생산은 별로 없으나, 섬사람들은 옛부터 한강 수운에 관련된 조선업, 뱃사공, 배에 물산을 실어 내리는 하역에 의존하였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큰 밤섬 아래에는 한강의 퇴적으로 작은 여러 개의 모래섬이 발달하였는데, 그 백사장은 좋은 조선장(造船場)이 되어서, 여러 백년 동안 조선업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 배만드는 기술자인 목수가 가장 큰배를 많이 제작하던 시기에는 54호(戶)였고, 일제시대에는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업은 타지방의 주문을 받는 것과, 공임(工賃)을 받고 타지방에 고용되어 가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업이 번영하던 시절에는 경기가 좋았었다. 그러나 6·25의 피해를 겪은 이후 조선업은 완전히 쇠퇴하여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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