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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역사속에 설화와 같은 인물로만 알았고, 삼국유사에 나온 이야기나 전해주나 싶었는데, 처용에 대해서 기원부터 실제 있었던 이야기였는지 찾아보고, 이후에 우리나라의 역사나 사람들의 삶속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데, 그저 신화속에 인물정도가 아니라, 지금도 그 설화의 영향력이 지대한듯....
그나마 지금은 과학적으로 인해서 역병이나 전염병등에 대해서 의학발전으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듯...
나도 우리집 대문에 처용의 초상화나 한장 붙여볼까...^^
[제4회] 귀신 쫓는 사나이, |
▣방송 : 2009. 7. 25(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손현철 PD
삼국유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처용(處容) 설화 |
“신라를 공포에 떨게 한 역신(疫神)” 왕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병의 비밀은? |
▲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의 모습대로 만든 처용탈 |
역 신(疫神)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鬼神)으로, 고대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병관련 기사는 18번이나 등장하며, 왕도 그 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선덕왕(제37대 왕, 재위 780∼785)과 문성왕(제46대 왕, 재위 839∼857)은 질진(疾疹)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왕의 목숨을 앗아간 질진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라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역신의 정체를 추적해 본다. |
▲ 조선시대 <진신화상첩> 중 곰보자국 난 초상화 |
“왜 경문왕(景文王)은 산수유를 심었나?” 역병(疫病)이 만들어 낸 시대적 배경 |
▲ 산수유 나무와 그 당시 약사불신앙의 확산을 보여주는 경주남산삼릉계석조약사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신라의 경문왕(신라 제48대 왕(재위 861∼875))은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이다. 설화에 따르면 경문왕은 복두장이가 비밀을 퍼뜨린 대나무숲을 베고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그는 왜 산수유를 심게 한 것일까? <삼국사기>를 보면 경문왕 시대에 역병이 제일 많이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한의학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산수유가 얼굴에 난 종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경문왕이 산수유를 심은 것은 역병이 창궐했던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경문왕 다음인 헌강왕(신라 제49대 왕(재위 875∼886))대에 처용이 등장한다. |
“춤과 노래로 역신을 물리친 처용 ” 처용의 힘은 어떻게 이어져 왔나? |
▲ 처용설화에서 헌강왕이 처용을 처음 만났다고 알려진 처용암 |
처 용이 역신을 물리친 춤과 노래의 힘은 우리 문화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조선 궁중의 나례(儺禮), 즉 귀신 쫓는 의식에서 처용무(處容舞)는 가장 중요한 춤이었다. 그 밖에 민간에서는 굿의 한 형태로 손님굿이 전해진다. 손님굿은 손님이라고 지칭되는 천연두(天然痘), 역신, 마마를 잘 대접하고 만족시켜 떠나게 하는 구조로 ‘처용가’의 구조와 비슷하다. 이처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처용의 힘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 동해안 별신굿 중 손님굿 |
“지금까지의 화랑(花郞)은 잊어라” ‘화랭이’의 등장과 처용의 관계는? |
▲ 신라인들이 명문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천전리각석(국보 제 147호) |
신
라의 화랑은 처음부터 전사(戰士) 집단이 아니었다. 화랑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춤추고 노래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러한 화랑집단의 풍속은 신라 멸망 후에도 꾸준히 전승됐다. 지금도 경상북도에서 화랑의 풍속을 계승한 노래하고 춤추는
남자무당들은 스스로를 ‘화랭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1천년 전 화랑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화랑집단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을 통해, 처용은 화랑 계통 주술 집단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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