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라디오극장 -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반응형
독립운동을 돕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여장부 윤희순의 실제 스토리...
무장봉기도 하기는 했지만 주로 계몽운동과 같은 교육분야와 농사짓는 방법등으로 중국사람들을 교화하지만...
일본의 끈질긴 압박으로 자식을 비롯해서 주위의 대부분이 허망하게 죽아가고, 본인도 그렇게...
이 내용은 그녀가 쓴 일기를 바탕으로 그녀의 손자가 우연히 중국에 있는 친척과 연락이 되어서 할머니의 묘소를 어렵게 찾아내서 결국에는 국내로 이장시키는것을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일제침략기가 오래된 과거의 일이 아니라고.. 잊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가슴 아프게 글을 마친다...
이제는 오랜 과거가 된듯한 일제시대... 그리고 그 시대에 고생당했고, 고생을 시킨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과연 우리가 그들을 용서 할 수 있을까? 잊을수 있을까?
용서할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잊지는 말아야 할것이다!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왜놈 대장 보거라'는 경고문을 쓰고
   아녀자들을 독려하여 의병들을 도왔다.
   또 을사늑약 체결이후 1907년에는 직접 전장에 나가 남장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두 아들과 독립군으로도 활동하였다.   

출처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편집 : 무궁나라 www.mugunghwa.or.kr


# 라디오 극장
#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 극본 : 이상락
# 연출 : 임종성
# 기획의도
-남북화해와 협력시대를 맞아 우리민족의 근원적 정서와 감정이 담겨 있는 문학작품, 또는 한국을 빛낸 인물을 각색, 방송하여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식의 공유를 확대코자 함.
-87주년인 삼일절을 맞아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몸 바쳤던 선열들과 그 후손들의 처절했던 삶을 통해 잊혀져 가고 있는 독립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함

# 줄거리
윤희순은 서울 출신으로 16세 때 고흥유씨 집안의 제원(濟遠)에게 출가하여 유홍석의 며느리가 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더불어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춘천유림과 더불어 의병활동에 투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하는데, 이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 <병정의 노래>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춘천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시아버지 유홍석이 육촌동생 유인동생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쟁을 벌이는 동안 윤희순은 부녀자들과 협력하여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빨래를 하는 등 뒷바라지에 힘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빌미가 되어 고종이 퇴위했으며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해 정미의병이 봉기하게 되는데, 시아버지 유홍석이 유영석, 유봉석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통솔하여 가평에서 혈전을 벌일 때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고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탄환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등 보급투쟁을 전개한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며 먼저 만주로 이주하자 윤희순도 이듬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들어가 의병 재거(再擧)를 도모한다. 그러나 1913년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남편 유제원 또한 독립운동을 꾀하다 같은 해에 죽고 2년 후에는 의병지도자 유인석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투쟁하는데, 맏아들인 유돈상이 일본경찰의 고문 끝에 순국한다. 때에 걸쳐 독립운동 뒷바라지를 해오던 윤희순은 맏아들이 죽은 지10여일 뒤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윤희순의사의 유해는 1994년에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연
윤희순 - 성선녀
유홍석 - 조명남
일본순사 - 김경수
해설 - 김도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