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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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여행을 떠난다.

잠시 복잡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저 홀로 며칠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사람도 있다.

잠시 쉬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색다른 삶의 며칠을 즐기기 위해서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여행의 기회에 우연히 몸을 실은 사람도 있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길로 나섰다.


여행은 즐거웠다.

나는 이 즐거움이 신기했다.

새로운 풍광이 주는 기이함과 경이로움이 우리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잘모르는 다른 사람들과의 여행은 그래서 더욱 여행답다.

우리는 여정대로 움직였지만,

순간순간은 예상치 못했던 웃음과 돌발적인 소품들로 가득했다.

강촌에서의 순간순간이 특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미 작은 일에 웃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행은 삶과 유사하다.

경이로운 풍광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느낄 마음의 부족 속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즐거웠던 것은 삶의 풍광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복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늘 그 길이 어디를 향해 가는 지 궁금해한다.

새로운 샛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가지도 하지만

그 길이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길인지 두려워한다.

강촌을 여행한 것은 파리를 여행 한 것 보다 못한 것일까?

아니면 더 잘한 것일까?

내 삶은 강촌 여행일까 파리여행일까?

어디로의 여행이 그 내용을 압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로의 여행에 집착한다.

그러나 늘 실망하는 것은 ‘그 곳’ 때문이 아니라

그 여행의 내용의 빈곤 때문이라는 것을 잊고 만다.


아마 이 여행이 북구 여행이었거나 남태평양의 섬 몇 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이었다 하더라도

혹은 남도의 어느 섬 몇 군데를 비집고 다니는 여행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즐겼을 것이다.

삶의 한 순간들을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보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나는 삶 자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

주말은 즐거운 날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려고 했다.

이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것이 아마 날마다 웃음이 늘어난 이유였을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강촌 교외의 어느 강변에 있었다.

작은 구릉이 있었고 그 구릉의 한쪽 사면에는 멋진 침엽수들이 울창했다.

천천히 그 구릉을 올라 모두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 곳에는 자작나무 몇 그루가 그 별나게 하얀 몸매로 서 있었다.

바람이 지나고 바람이 그 잎사귀를 흔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누군가 조용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타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꿀 때가 있다.
내가 심려에 지쳐있을 때
그리고 인생이 길 없는 숲속과 같을 때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작은 나무 가지가 내 한쪽 눈을 스쳐 눈물이 흐를 때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는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새로 시작하고 싶다
........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이기에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인 지 알지 못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이 시를 듣다 나는 강촌에서의 시간을 시로 구성해 보고 싶었다.

나는 시인이 아니며 시를 쓴 적이 없다.

다만 늘 시처럼 인생을 산다면 멋진 일이라고 생각 해 두었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내가 가장 시처럼 산 시간이기도 해서 나는 그 때의 기록을 시처럼 기록하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 시인 아니라는 것 - 그것이 내가 시를 쓰고 싶은 가장 커다란 유혹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운 유혹이었고 세상을 다시 시작하듯 나도 시를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시처럼 이 여행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내게 ‘시처럼’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표현의 비약과 함축이다.

일일이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때로는 침묵조차 좋은 언어가 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매력적이다.

마음의 흐름, 눈빛, 이심전심의 비언어적 언어가 가능하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나는 어떤 경우 이런 삶이 가능하고,

그런 관계가 가능한 인물들이 내 삶 속에 등장하게 될 것을 꿈꿔왔다.


‘시처럼’이라는 말의 다른 하나의 의미는 생각과 상상이 현실과 같은 비중으로 삶 속으로 접근해 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녀와의 사랑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커다란 그리움으로 실재하기도 한다.

상상 또한 아름다운 실재라는 점에서 그리고 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지금은 시가 사라져 가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삶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는 곧 세상의 빛나는 언어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기계들은 비약과 함축과 침묵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즐길 수 없다.

시처럼 인간적인 것은 없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빛나는 교신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 자작나무를 타던 소년처럼 내 여행의 한 장면을 시로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부디 이번 여름의 한때는 시처럼 보내기를...

한 때 자작나무를 타던 소년처럼 모든 새로운 시작을 다시 품어보기를...

부디,

다시,

새로,

시작하는 그 아이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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