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月圍城 / Bodyguards And Assassins)
청조말에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손문이 홍콩을 방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이를 저지하고 암살하려는사람들간의 암투를 그린 영화...
1시간동안 혁명에 대해서 회의를 하는 동안 가상의 인물을 손문의 어머니의 집에 가서 만나면서 회의에 지장이 없게 만들기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
그것도 무슨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장사람들과 동네사람들이 친절한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운다...
뭐 영화내용이야 좀 그렇다칠수도 있지만, 학창시절에 배운 신해혁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듯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과 몰입도는 꽤 높은듯해서 보는 내내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지만, 보고 나면 약간은 허무할수도...^^
막판에 청국의 무사들과 싸움을 붙는 거지가 여명이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_-;;
개봉 2010년 01월 21일
감독 진덕삼
출연 견자단 , 사정봉 , 양가휘 , 여명 , 판빙빙 , 왕학기 , 왕백걸 , 리위춘 , 증지위 , 후쥔
상영시간 138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액션
제작국가 중국
제작년도 2009년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8heroes
영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된 8인 단 하루, 단 한 시간 동안의 미션이 시작된다!
쑨원이 혁명가들과 비밀리에 모임을 갖기 위해 홍콩에 도착하던 1906년 10월 15일. 미리 정보를 입수한 수백 명의
자객들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홍콩에 잠입하고, 이를 알게 된 ‘혁명가’는 막강한 자금력으로 그를 뒷받침해주는 오랜 친구 ‘대부호’를 설득해
쑨원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대부호를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인력거꾼과 자객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극단단원, 거구이지만 마음은
상냥한 두부장수, 과거의 아픔 때문에 스스로를 버렸던 걸인, 대부호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위험한 임무에 가담한 후계자까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영웅을 지키기 위해 호위대를 결성한 이들에게 평범한 모습 속에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감추고 살아 온 숨은 고수 도박꾼이 마지막으로
합류한다.
목숨을 내건 이들의 계획은 쑨원이 비밀 모임을 갖는 한 시간 동안 그를 가장한 인물을 태우고 암살자들이 둘러싼 시내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함정을 만드는 것. 하지만 8인의 호위대가 막아내야 하는 암살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영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된
이들은 암살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다.
들켜서도, 죽어서도 안 되는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단 한
시간!
타겟을 놓쳐 다급해진 암살단과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호위대 간의
숨막히는 마지막 결전이
시작되는데…!
14억을 열광시킨 리얼 액션 블록버스터!
2010년 1월, 심장을 두드리는 100% 리얼 액션이 온다!
중국 최고 톱스타들의 출연과 유례없는 스케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으며, 중국 개봉 첫 주 1억 1300만 위안(한화 약 170억원)을 벌어들이는 놀라운 흥행 열풍을 불러 일으킨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1906년 배경으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영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된 8인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리얼 액션 블록버스터다.
영웅이 홍콩에 머무는 단 하루, 마지막 1시간 동안 그를 지켰던 8인과 영웅을 노리는 암살자들의 대결이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 펼쳐지는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CG나 대역 없이 직접 온 몸을 내던지는 순도 100%의 고난도 리얼 액션을 선보인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도심 한복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는 수백 명의 암살자들과 목숨을 걸고 영웅을 지켜야 하는 8인. 견자단을 비롯하여 여명, 후쥔, 리위춘 등 중국 최고의 스타들이 위험천만한 옥상 액션씬을 시작으로 수 십 미터 높이에서의 고공 낙하 등 거침없이 몸을 내던지며 화려하고 파워풀한 액션을 선보인다. 여기에 실제 미국 이종격투기 챔피언 출신의 쿵리와 견자단이 맨몸으로 맞붙는 액션 하이라이트 장면과 도심을 질주하는 스펙터클한 추격전, 40:1의 손에 땀을 쥐는 결투까지. 오직 와이어 하나에 몸을 의존한 채 펼치는 배우들의 다이나믹한 액션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리얼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목숨과 맞바꾼 최후의 미션
리얼 타임으로 전개 되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중국의 실존인물 ‘쑨원’이 혁명을 위해 1906년 홍콩을 찾은 단 하루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한 평범하고 소박한 8명의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상이 영웅이라 불렀던 한 사람이 홍콩에 도착하기 전, 각각의 캐릭터가 미션에 합류하는 과정과 마지막 하루의 결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역사나 영웅, 대의가 아닌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한 채 영웅을 지키는 사명으로 호위대를 자처하고 나선 도박꾼부터 걸인, 극단 단원, 두부 장수, 홍콩 최고의 대부호와 그의 후계자, 인력거꾼과 혁명가까지. 은혜를 갚기 위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의 부탁으로 인해 각자의 사연을 품고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8인의 캐릭터들은 그 어떤 위대한 영웅보다 진한 페이소스와 여운을 남긴다.
여기에 마지막 1시간 동안의 숨막히는 대결이 영화 속 1초와 현실 속 1초가 동일한 리얼타임으로 전개되며, 미국 인기 드라마 [24]를 뛰어넘는 박진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세대를 아우르는 톱스타 군단과 정상급 제작진의 만남!
놓칠 수 없는 최고의 프로젝트를 위해 뭉쳤다!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이 제작하고, ‘차세대 오우삼’으로 불리는 액션의 귀재 진덕삼 감독을 비롯, <무간도>의 촬영 감독, <황후화>의 의상 감독 등 중국 정상급 스탭이 뭉쳐 만들어낸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실존 인물 ‘쑨원’을 지켰던 숨겨진 영웅들이 있었다는 가정에서 시작된 영화다.
8인의 호위단과 주변 인물들까지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배우들의 캐스팅이 하나의 도전이었던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한 작품에서 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던 톱스타들이 크고 작은 역할을 막론하고 흔쾌히 출연을 자청, 중국판 ‘오션스 일레븐’이라 불리는 역대 최강의 초호화 캐스팅을 탄생시켰다.
이소룡과 성룡을 잇는 최고의 액션 스타이자 할리우드 영화 <블레이드 2> 등의 액션 감독으로도 이름을 알린 견자단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도박꾼’ 역을 맡아 화려한 액션과 진한 감정 연기로 스크린을 압도한다. 영웅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계획을 세운 ‘혁명가’ 역은 세계적인 연기파 배우 양가휘가 맡아 무게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부드러운 이미지의 대표 스타 여명은 과거의 아픔을 감춘 전설적인 고수 ‘걸인’으로 분해 파격 변신을 시도하였다.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극의 중심을 잡는 한편, 최고의 신세대 남녀 스타 사정봉과 판빙빙은 새로운 이미지 변신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꽃미남 스타의 이미지를 버리고 충직한 ‘인력거꾼’으로 변신한 사정봉은 순수함과 강렬함이 공존하는 남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최고의 미녀스타이자 섹시 스타로 급부상한 판빙빙은 ‘내연녀’ 역을 맡아 청순하면서도 고혹적인 홍일점으로 극에 풍성함을 더한다.
이들과 더불어 중국의 국민배우라 불리는 증지위, 왕학기, 후쥔까지 가세한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신세대 스타부터 국민배우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톱스타들의 매력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다채로운 재미와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중국 영화 역사상 최초의 시도!
1:1 사이즈의 세트로 완벽하게 재현된 1906년 홍콩을 만난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1906년 홍콩 시가지의 모습을 리얼하게 재현하기 위해 총 제작비 2,300만 달러의 3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제작비를 투입하여 중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1:1 사이즈의 세트를 완성시켰다.
총 10년에 걸친 준비 기간 동안 8년의 시간을 세트 제작을 위한 자료 조사와 기획 기간으로 할애하고 6개월 동안 매일 300여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되어 탄생한 <8인 : 최후의 결사단>의 초대형 오픈 세트는 유례 없는 규모와 생생한 리얼리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진덕삼 감독이 “이 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제작진은 세트 제작과 프로덕션 디자인에 무엇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당시 홍콩 본연의 외관뿐 아니라 거주 인구, 남녀 비율, 직업군까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실제 살아 숨쉬는 듯한 공간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빽빽하게 늘어선 간판과 회색 벽돌, 전통 문양의 건물이 뒤섞인 도시와 생업을 위해 각종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화려한 거리, 그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암살단과 목숨을 건 호위대의 치열한 결투는 공간의 리얼리티가 더해져 강렬한 임팩트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혁명가, 사상가,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시자이다. 호(號)는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 광둥어: Yat-sen 얏센[1]), 본자(本字)는 덕명(중국어 정체: 德明, 병음: Démíng 더밍[*]),별명은 중산(중국어: 中山, 병음: Zhōngshān)이다. 신해 혁명의 주요 인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운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두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목차
생애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香山縣)[2] 부근의 취형촌(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도천(道川)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중국어 정체: 孫眉, 병음: Sun Mei 쑨메이[*]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 1879년: 하와이 주로 유학.
* 1892년: 홍콩 서양 의학원 졸업.
* 18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 정부 건설"을 강령으로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
* 1895년: 홍콩 흥중회를 창설. 10월에 흥중회는 광저우에서 봉기를 모의하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 해외로 망명.
* 1896년: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남.
* 1904년: 일본, 하와이, 베트남, 사이암 (지금의 타일랜드),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전파.
* 1905년: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 단체 조직.
8월: 흥중회, 화흥회(華興會)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동경에서 동맹회(同盟會)를 창건, 총리에 추대.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소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
동맹회의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서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의 삼민주의를 발표.
* 1906년 - 1911년: 해외의 모금 활동 등으로 중국 내의 여러 봉기를 지지.
* 1911년 10월 10일:무창(武昌)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신해 혁명 발발.
미국에서 12월 하순경 귀환, 17개 성 대표자들에 의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됨.
*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임시 대총통 (中華民國 臨時 大總統) 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구성.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 푸이(중국어 정체: 溥儀, 병음: Pǔyí 부의[*]) 강제 퇴위.
2월 14일: 위안스카이(중국어 정체: 袁世凱, 병음: Yuán Shìkǎi 원세개[*])와의 협약에 따라서 임시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양위하기 위해서 사임.
3월 11일: 중화민국 임시약법(中華民國 臨時約法)을 반포.
7 - 8월: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쑨원을 이사장(理事長)으로 추대.
* 1913년 3월: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력 타도할 것을 주장.
7월: 2차 혁명 주도, 실패. 일본으로 도피.
* 1914년: 동경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
* 1915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서 10월 25일에 동경에서 쑹칭링(宋慶齡)과 결혼.
*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음.
* 1917년: 서남군벌(西南軍閥)과 연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대원수(海陸軍大元帥)에 추대되어 임시약법 수호 투쟁.
10월: 러시아 10월 혁명
* 1918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5월에 대원수직을 사임,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감.
* 1919년 5.4운동.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개칭 (동맹회의 국민당 국회는 1913년에 위안스카이에 의해 해산된 바 있음).
* 1920년: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桂系軍閥) 축출.
11월: 광주에서 다시 임시약법 수호 운동.
* 1921년: 광동 신정부 수립, 임시 대총통 취임.
* 1922년 6월: 진형명(陳炯明)의 반란. 광주를 떠나 상하이로 옮김.
7월: 중국 공산당이 5.4운동 정신 계승과 반제국주의를 강령으로 상해에서 비밀리에 결성됨.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 1923년 1월 1일 국민당의 개진(改進)을 발표, 제1차 국공합작 시작.
2월: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 대원수(海陸軍大元帥)의 이름으로 군권과 정무를 총괄.
8월: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한 대표단을 소련으로 파견.
10월 소련에서 파견된 보로딘(Borodin)을 고문으로 초빙.
* 1924년 1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 황푸군관학교 설립
*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이 년간 북경 벽운사(碧雲寺)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난징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명칭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중국어 정체: 孫德明, 병음: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은 쑨디샹(중국어 정체: 孫帝象, 병음: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여 세 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중국어 정체: 載之, 병음: Zàizhī 자이즈[*]). 원래의 호(號)는 일신(중국어: 日新, 병음: Rìxīn 리신[*])이었으나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으로 바꾼다, 일신과 일선은 광동어로 발음하면 "Yat-sen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주에서 1895년 17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樵[3] 나카야마 쇼(なかやましょう)[*](중산초)[4]에서 유래한다.
정치활동 및 업적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대만)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 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 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중국어 정체: 孫眉, 병음: Sun Mei 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본토 중국 및 대만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대만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로서라기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