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거의 4할에 육박하는 타율까지 치고, 도루왕이던 그가 모기업 해태의 어려움에 의해서 일본 주니치에 진출하게 되고, 데뷔년에는 성공적으로 적응을 했지만, 견제와 부상으로 인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그...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월드베이스볼로 다시금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다시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고, 구단에서는 은퇴까지 종용을 받았다고...
하지만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때문에 다시금 일어서고 싶었고, 멋진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고, 그러한 마음으로 2008, 2009년에 분발을 하게되고, 올해는 드디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쥔 이종범...
누구나 이런 어려운 시절과 시기를 겪게 되지만 이런 슬럼프를 벗어나는 힘과 근원은 그가 말했듯이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애절함과 간절함이 아니였다 싶다.
방송에서는 주로 가족과 팬에 대한 애정보답, 기대부흥의 의미로 이야기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볼때는 그 누구보다도 이종범 자기 자신 스스로 그러한 모습으로 은퇴를 하는것이 정말 용납할수 없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40대의 나이에도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이 참 멋지고, 대견스럽고, 감동스러웠던 멋진 방송이였다.
뭐 이런 감동적이고, 인간적인면외에도 다양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시간가는줄 몰랐다는...
MC : 강호동, 유세윤, 올라이즈 밴드, 신정환, 윤종신, 김구라, 김국진
게스트 :이종범,SS501
무릎 팍 도사 : 강호동 / 건방진 도사 : 유세윤 / 밴드 동자 : 올라이즈 밴드
<무릎 팍 도사- 이종범 두 번째 이야기>
지난주에 이은 이종범의 고민! “선수생활을 더하고 싶어요.”
일본 프로야구 진출 후 이야기!!
이종범이 말하는 일본 프로야구 스타일은?
부상 후 겪은 슬럼프... 그리고 슬럼프를 극복하기까지!!
WBC에서 만난 메이저리거 박찬호!!
메이저리거 박찬호에게 이런 모습이!? 이종범이 연구한 박찬호!!
기아 타이거즈를 우승시키며 부활하기까지!!
부진한 성적 때문에 은퇴제의를 받기도 했다는데~ 그때 그 심정!
이종범을 부활시킨 팬들의 응원!
바람의 아들~이종범의 야구역사를 무릎팍에서 확인 하세욧!!!
DJ: 신정환, 윤종신, 김구라, 김국진
<라디오 스타: SS501>
돌아온 DJ 정환~ 그가 멤버들에게 보내는 편지!!!
DJ 정환의 단독 오프닝을 기대하세요!!!
멤버들이 지켜 본 김형준의 예능에서의 모습~
그는 타이밍을 노린다!? 타이밍을 노리는 김형준의 놀라운 활약상!!
라디오 스타에 불어 닥친 김형준 타이밍!!!
아이돌에 관한 소문과 진상까지!
라디오 스타에서 만나요! 제~발~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3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해태 시절인 1994년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 1993년과 1997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20-20 클럽에 가까이 도달했던 시즌(혹은 20-20 클럽 및 30-30 클럽 달성을 했던 시즌)이 8번이나 될 정도로 그는 한국 프로 야구의 간판 타자이다. 거포가 가지는 매력과는 달리 경기 자체를 지배하던 대한민국 야구의 유일무이한 스타일의 톱타자 겸 야수(유격수)였다. 건국대학교 졸업 후 199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뛰어난 실력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신인왕을 다투었으나 수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해 한국 시리즈에서 독보적인 활약으로 한국 시리즈 MVP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시즌은 그의 선수 시절 가장 절정에 달한 시즌으로 그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단일 시즌 최다 안타 (196안타), 0.393 (120경기 이상 최고 타율), 단일 시즌 최다 도루 (84도루)에 19홈런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후일 4할을 못한것은 배탈로 13타수 1안타에 그친 시즌막판 세게임과 4할보다는 200안타를 목표로 했던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2]
이후 1993년 첫 우승과는 달리, 당시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던 국보 투수 선동렬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가고 없는 해태 타이거즈가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1996 시즌, 1997 시즌을 연속으로 우승하는 데 기여하였다. 유격수 시절 수비 폭이 매우 넓어서 클린 히트가 될 수 있는 타구를 따라 잡아 건드리는 것이 본의 아니게 에러가 된 것이 많았으며, 이를 본 당시 캐스터들이 '이종범 에러'라는 고유 명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격수로서 최상급의 송구 능력을 보유하여 2·3루간 빠지는 안타성 땅볼 타구를 외야 잔디까지 쫓아가서 잡은 다음 투수 못지 않은 강속구로 1루에 송구하여 타자 주자를 아웃시키는 명장면을 연출해 내기도 할만큼 그의 수비 능력은 뛰어났다.
19홈런 84도루, 30홈런 64도루(유일무이한 30-60 클럽개설), 25홈런 57도루, 20홈런 50도루, 16홈런 73도루, 18홈런 35도루, 17홈런 42도루, 그 외에도 16홈런 32도루 (방위복무로 동계훈련 못한 상태서 시즌반만 정확히 뛴 기록) 시즌까지, 홈런 한 두 개 차로 20-20을 놓친 해가 지금보다 적은 과거의 게임수에서 5시즌이나 되었다. 단일 경기 최다도루 6도루와, 선두 타자 홈런기록, 선두 타자 초구 홈런기록도 2위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문기자들은 전성기 그의 타격 성적을 이야기할때, 이종범의 수비 포지션가 유격수였다는 것은 차라리 넌센스에 가깝다고 한다.[3] 역대 유격수 포지션을 맡은 선수가 150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 내고, 0.580 이상의 장타율과 1점대가 넘는 OPS를 기록한 경우는 1994년의 이종범과 1997년의 이종범 단 두 번뿐이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스 시절
원래는 유격수였지만 1998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고 56경기째인 6월 2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선발투수 가와지리 데츠로가 던진 공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당한 뒤 9월 복귀한 이후로는 유격수에서 외야수로 수비 위치를 바꾸었다. 당시 주니치 드래곤스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의 불화는 유명했고, 그로 인해 '원형 탈모증'까지 얻게 되었다.[5] 일본프로야구 선수생활동안 부적응을 하면서 부진을 겪게 되었고, 한국프로야구시절때 뛰어났던 활약과 '야구 천재'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고, 그는 부상으로 2군을 전전하면서 재활과 부진을 거듭하였다. 이후 선수 기용 등에 불만을 품고 시즌 도중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스를 퇴단한다. 이 무렵, 해태 전 감독인 김응룡 감독이 감독으로 부임한 삼성 라이온즈로의 이적을 타진했지만, 김감독의 설득으로 2001년 여름 KIA 타이거즈로 복귀하게 되었다.[6] [7] [8]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뛰던 시절에 현재 SK 와이번스에서 활동하는 가도쿠라 겐과 동료이기도 했었다.
다시 한국프로야구로 복귀하다
KIA 타이거즈 시절
2001년에 기아자동차가 해태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가 창단되면서 이와 동시에 한국 프로 야구로 복귀하여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2003년 시즌에는 20-20 클럽에 가입하였는데(그는 이 해에 20홈런 50도루를 기록하였고 그의 50 도루는 2003년 시즌 도루부분 최고 기록이였다.) 이 기록은 당시 최고령 20-20 클럽 가입이기도 하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주장을 맡았으며 대회 종료 후 베스트 9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2006년 정규 시즌 중에는 부진의 늪에 빠졌으며,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이 해 시즌 타율은 .242에 홈런 1개, 21타점, 10도루 등 입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부진은 2007년에도 계속되어, 타율이 2할을 넘지 못하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년 60% 삭감된 2억원의 연봉에 재계약하여 재기를 다짐했었다. 이 해 5월 한 달 동안 3할 8푼 9리, 72타수 28안타 15타점의 맹활약으로 월간 MVP로 선정되었고, 1루수로 경기에 출장하여 투수 외의 전 포지션을 소화한 선수가 되는 등, 타율 2할 8푼 4리로 '부활했다'고 평가받았다.
2008년 6월 3일, 1500안타 기념패를 수상받았다.(하일성 KBO 사무총장이 수여) - 1500안타 기록은 한국에서 8번째이다. 같은날, KIA의 2루수 김종국은 1000안타 기념패를 수상받았다.
2008년까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여 은퇴 위기에 몰리기까지 했으나, 2009 시즌이 되면서 부활하였고, 마침내 2009년 6월 5일 광주 무등 경기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6회말 김상현 타석 때 도루를 성공시키면서 최소경기(1,439경기) 통산 500도루, 1,000득점 기록을 달성하였다.[9] [10] 그 전에 그가 통산 499도루를 기록한 이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난 이후에 광주에서 기록을 세우겠다"고 밝히며 기록 달성을 미룬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11] 대한민국 복귀 후 2009년에 우승을 다시 맛보게 되었다.
에피소드 [
신의 손 발언
KIA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 시절 이후 12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한 후 맞이한 2009 한국 시리즈 1차전에서 이종범은 3타수 2안타 2타점으로 8회에 결승타를 터뜨리며 팀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 경기 8회말에서 이종범은 번트 모션을 취하다 공이 던져지기 전에 배트를 거둬 들였고, 이후 당시 경기 오석환 주심이 볼로 판정하였다. 이 볼이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로 판정되면서 볼카운트가 1-1이 아닌 0-2가 되면서 이종범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고, 이종범은 정대현의 4구째 공을 적시타로 연결시켰다. KIA가 1차전을 승리로 장식한 후 이종범은 인터뷰에서 배트를 빼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 | 아마 신의 손이 있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빼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 ” |
그의 이런 발언이 이른바 '신의 손' 발언으로 보도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2]
대한민국 야구 국가 대표팀 활약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대표로 뽑혔고 주장을 맡았으며 대회 종료 후 베스트 9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보였는데, 특히 미국 현지의 A조 2라운드에서 일본과 두번째로 만난 경기에서는 8회초 1사 2,3루 상황에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승부를 결정짓는 2타점 2루타를 쳐내는등 맹활약을 했다.
기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이 중 장남인 정후 군은 광주서석초등학교 야구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포지션은 내야수, 우투좌타이다.[1] 40대가 되어가는 나이에도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고 있어 팬들을 그를 '종범신(神)' 혹은 '종범성'(성은 형(兄)을 전라도 사투리로 발음한 것이다)이라 부른다.
또 그는 1994년 같은 해태 타이거즈 선수였던 선동열과 가수 양수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Two & One을 결성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는 문화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당시 구단사정이 넉넉지 못해 보너스를 주기 위해 이벤트성으로 감독님 몰래 제작했지만 의도와 달리 욕을 먹었다"고 털어놓았다.[13]
출신 학교
주요 기록
기록 | 날짜 | 상대팀 | 장소 | 경기 내용 | 종전 기록 | 기타 |
---|---|---|---|---|---|---|
최고령 20-20클럽 33세 28일 20홈런 42도루 |
2003.9.13 | 롯데 | 부산 | 5회 2사 0-0 솔로 홈런(상대 투수:손민한) | 이순철(해태), 31세 4개월 28일 | 양준혁이 2007년 10월 5일 38세 4개월 10일로 새기록 작성 |
통산 기록
한국 프로야구 시절
연도 | 소속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희생타 |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실책 | 타율 | 장타율 | 출루율 | 비고 |
---|---|---|---|---|---|---|---|---|---|---|---|---|---|---|---|---|---|---|---|---|
1993 | 해태 | 126 | 475 | 85 | 133 | 16 | 4 | 16 | 53 | 73 | 12 | 32 | 6 | 35 | 11 | 24 | 0.280 | 0.432 | 0.331 | |
1994 | 해태 | 124 | 499 | 113 | 196 | 27 | 5 | 19 | 77 | 84 | 5 | 51 | 6 | 31 | 2 | 27 | 0.393 | 0.581 | 0.452 | 타율,안타,도루,출루율 1위 |
1995 | 해태 | 63 | 239 | 51 | 78 | 10 | 2 | 16 | 35 | 32 | 3 | 28 | 2 | 20 | 5 | 16 | 0.326 | 0.586 | 0.397 | |
1996 | 해태 | 113 | 449 | 94 | 149 | 28 | 1 | 25 | 76 | 57 | 2 | 67 | 7 | 39 | 4 | 10 | 0.332 | 0.566 | 0.425 | 도루 1위 |
1997 | 해태 | 125 | 484 | 112 | 157 | 28 | 3 | 30 | 74 | 64 | 3 | 87 | 3 | 49 | 9 | 27 | 0.324 | 0.581 | 0.428 | 도루 1위 |
2001 | KIA | 45 | 188 | 45 | 64 | 14 | 1 | 11 | 37 | 7 | 5 | 20 | 1 | 16 | 5 | 3 | 0.340 | 0.601 | 0.401 | |
2002 | KIA | 123 | 485 | 93 | 142 | 25 | 2 | 18 | 59 | 35 | 5 | 43 | 13 | 63 | 7 | 4 | 0.293 | 0.464 | 0.365 | |
2003 | KIA | 132 | 524 | 110 | 165 | 43 | 1 | 20 | 61 | 50 | 5 | 59 | 7 | 58 | 8 | 4 | 0.315 | 0.515 | 0.389 | 도루 1위 |
2004 | KIA | 133 | 493 | 100 | 128 | 29 | 0 | 17 | 52 | 42 | 14 | 53 | 17 | 50 | 9 | 8 | 0.260 | 0.422 | 0.350 | |
2005 | KIA | 118 | 430 | 69 | 134 | 25 | 2 | 6 | 36 | 28 | 7 | 47 | 11 | 49 | 8 | 5 | 0.312 | 0.421 | 0.393 | |
2006 | KIA | 93 | 339 | 41 | 82 | 18 | 1 | 1 | 21 | 10 | 11 | 24 | 5 | 43 | 3 | 1 | 0.242 | 0.310 | 0.302 | |
2007 | KIA | 84 | 253 | 23 | 44 | 6 | 0 | 1 | 18 | 3 | 14 | 13 | 2 | 25 | 6 | 1 | 0.174 | 0.209 | 0.217 | |
2008 | KIA | 110 | 317 | 38 | 90 | 19 | 4 | 1 | 38 | 9 | 12 | 32 | 1 | 26 | 11 | 5 | 0.284 | 0.379 | 0.348 | |
2009 | KIA | 123 | 385 | 63 | 105 | 21 | 1 | 6 | 40 | 11 | 18 | 41 | 5 | 50 | 9 | 3 | 0.273 | 0.379 | 0.346 | |
통산 | 14시즌 | 1512 | 5560 | 1037 | 1667 | 309 | 27 | 187 | 677 | 505 | 116 | 597 | 86 | 554 | 97 | 138 | 0.300 | 0.466 | 0.374 | 통산 타율 역대 13위, 통산 도루 역대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