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iN /성공 & 강연'에 해당되는 글 561건

  1. ktv 전쟁사 2차 세계대전-승리의 조건 & 승리의 대가, 전쟁을 통해 배우는 성공
  2. 몽상가 이충섭의 묵사발인생 역전기
  3. 올인원으로 승부하라! - MP3 플레이어의 명품 프로젝트
  4. 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켜라! - 스팀청소기 세계 진출기
  5. 임정환, 나사왕국을 세우다
  6. 머니 콜렉터 FILA 휠라코리아 윤윤수, 고래를 삼킨 새우가 되다!
  7. 신빈곤층 실태보고 추락하는 사람들

ktv 전쟁사 2차 세계대전-승리의 조건 & 승리의 대가, 전쟁을 통해 배우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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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받아 놓은 KTV의 전쟁사중에 2차 세계대전사중에서 승리의 조건과 승리의 대가를 보았습니다.

승리의 조건은 2차대전 시작부분, 승리의 대가는 2차대전 막판과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전쟁다큐나 동물의 왕국같은것을 보다보면 전쟁이나 사는거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른이나 애나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격과 규모만 다를 뿐...

시작하자 마자 아주 멋진 말이 나오더군요...

전쟁이 끝나면
승자는 자신들이 이긴 방식을 다음던에도 사용하면 다음 전쟁에서도 이기게 될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패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린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예전의 낡은 방식은 거부한다.

이런한 공식에 의해서 1차대전의 승자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기존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차대전의 패자였던 독일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후에 2차대전이 개전되자 마자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도 엄청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격은것 만큼은 안되지만 프랑스도 독일에 5년동안 점령당하면서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대가는 책으로 봤던 "삶의 의미를 찾아서"와 TV시리즈인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영향으로 상당히 이해가 잘 가더군요...

암튼 앞으로는 전쟁다큐도 자주 찾아서 보게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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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 이충섭의 묵사발인생 역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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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시작한 사업에서 큰 실패를 보고 집도 날리고, 13년전에 빛만 1억 5천만원...-_-;;
갈곳이 없어 재개발동네에 숨어 살다가, 죽으려고 친구가 준 돈으로 소주에 수돗물을 안주삼아 먹다가 죽으려던 주인공...
빚이 많아서 어쩔수 없다는 하소연을 하지만, "그럼 평생 그렇게 살꺼냐"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전한다.
처음에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장사를 하는것을 보고 시작한 묵장사...
첫날부터 남들은 베터랑도 하루에 5상자를 파는것을 순식간에 팔아치우고, 보통 하루에 50상자를 팔아서
2년만에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_-;;;

그리고 점차 성장해서 판매상을 거쳐, 제조까지 시작해서 이제는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고, 장인정신을 가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어려움은 화가 될수도 있고 복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이충섭씨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왔고, 남들을 따라하기 보다는 남들과 다르게 하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보란듯이 깨고 일어난것이 정말 감동적이였습니다...


"묵사발 인생 묵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묵사발 된 인생을 묵으로 보란듯이 일으킨 사람이 있다. 국내 1위의 묵 전문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이충섭(41) 사장. 그는 유복한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볼트 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은 서울 장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막내인 이씨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 아무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런 이씨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다닐 무렵이다. 평소 놀기 좋아하는 둘째형에게 부모님은이 사업을 맡긴 것이다. 돈은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둘째형이 사업을 하면서 어느새 그 많던 재산도 다 날리고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게 됐다.

충격을 받은 이씨의 부친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사업 실패로 13평 작은 집에서 열명 남짓한 가족들이 모여 살았죠. 등록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이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완구회사 경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7개월 가량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틀에 박힌 생활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죠.”요정에서 웨이터 생활도 하고 구두닦이, 때밀이 등 먹고살기 위해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군대 제대 후 이씨는 건강보조 식품회사에 영업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지금의 부인 강민정(36) 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장님 딸이라 부담은 있었지만….”

친구와 동업한 무역업 부도로 자살기도

안정된 직장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만다. 친구와 무역업을 동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친구가 해외 영업을 담당하고 저는 국내 영업을 담당하기로 하고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사업자금이 필요했던 이씨는 집문서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사귀고 있던 강씨에게 경리 일을 맡기는 등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지만 1년 만에 부도가 났다. “사업이란 것이 열정만 가지고는 안되더군요”부도가 나자 사채업자들은 이씨의 집에 찾아가 갖은 협박을 하게 되고 급기야 뇌경색을 앓고 있던 부친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자살을 결심하고 보름동안 술만 먹었습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더니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여기저기 방황하던 그는 아내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강씨가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결혼하자고 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처지였는데….”

처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나온 부인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입은 옷 그대로 숟가락 하나만 갖고 여관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이씨 부부는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시장에서 묵을 파는 부부를 봤다. “몇 시간 동안 지켜봤더니 장사가 꽤 잘 되더군요. ‘바로 이거다’생각하고 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양복을 입고 머리에는 무스를 바른 채 묵 장사에 나섰다. 마케팅 전략으로 묵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 팔았다. 하루 50만원씩 벌어들이면서 1년 반만에 5,000만원의 빚을 다 갚고 본격적으로 묵 사업에 뛰어들었다. “허리를 다쳐 트럭 노점상을 그만두게 됐죠. 할 수 없이 노점상에게 묵을 대주는 중간 유통상을 시작했습니다.”결혼 3년 만에 이씨는 처갓집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양복입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묵 팔아

중간 유통상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 왔다. 유통업이 잘 되자 묵을 대주던 제조업자가 본인이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이다. 이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든다. 직접 묵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씨는 전국의 묵집이란 묵집은 다 돌아다니며 비교 검토해 강원도 화천에 묵 공장을 세웠다. 직접 여러 가지 묵을 개발한 이씨는 새로운 판매처도 개척한다.“거래처를 개발하려 백화점에 갔는데 처음엔 쳐다 보지도 않더군요. 1년 가까이 끈질기게 따라 다닌 후 입점할 수 있었습니다.”이씨의‘묵’은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기존의 유명 메이커 제품이 하루 10만원 가량의 매상을 기록하는 데 비해 이씨의 제품은 하루 100만원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이씨는 다른 유명 백화점에도 납품을 할 수 있었고 모정식품은‘묵’판매 1위를 기록하게 됐다.

이씨는 지금 3개의 공장을 거느리면서 4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명실상부한 사장이 됐다. 열정을 중시하는 그는 록 그룹 출신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기업문화도 독특하게 가꾸어 나가고 있다. 회사 한쪽에 록 그룹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 정도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씨는 조암면 시우리에 대지 1,200평, 건평 200평 규모의 묵 요리 전문음식점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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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원으로 승부하라! - MP3 플레이어의 명품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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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를 처음접한것은 1996년도... 정말 신기하면서 좋다는 생각을 했었고... 처음으로 mp3플레이어를 가진것은 2000년에 사람들 50명을 가입시켜서 경품으로 받은 거원 esound 32메가 짜리... 그 다음에 잡지사 다니는 후배의 조작으로 경품으로 받은 mpeye의 256메가 짜리... 지금은 그냥 mp3폰으로 대체...
왜 이런 구차한 이야기를 나열하냐 하면.. 나는 그동안 와~ 좋다.. 더 좋은 기계없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업그레이드를 해왔다...
근데... 코원의 사람들은 좋다라는 생각뿐이 아니라... 그 좋은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된 사람들이다...
그것도 최고의 기능, 성능을 가진 기계를...

이 방송을 듣기전에는 아이리버가 정말 명품이고 제일 좋은줄로만 알았는데, 코원이라는 회사가 어찌보면 후발주자이기는 하지만 정말 명품에 정말 필요한 All-in-one 제품을 만들고 있는것 같다...
처음에는 제트오디오를 만들어서 기술력으로 인정을 받은후에 그 기술로 mp3p를 만들어서 세계를 재패해가며 매년 100%의 성장을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기 그지 없다...
그리고 항상 정도를 걷기위해서 노력하면서도 시장의 상황이나 미래를 잘 파악해서 발전해 나가는 모습도 정말 배울만 하다...
근데.. 그런 우려도 있다.. 코원처럼 잘되서 성공을 해야 미래를 잘 본다고 하는것이지.. 실패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많은 mp3p제조업체를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암튼 여기에서 성공한것은 이유가 없을수도 있지만, 실패한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라는 말을 가슴에 세기고 나나 내 주위에서 실패할만한 이유를 찾아서 없애도록 노력해야 겠다.. 성공할때까지...



[제91편]

                          올인원으로 승부하라!

           - MP3 플레이어의 명품 프로젝트


  방송일시 : 2005년 9월  30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PD: 손원수  작가: 조선미


 휴대용 오디오 시장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일본. 그 일본의 아성에 도전해 당당히 1위로 인정받은 한국의 벤처 기업 코원시스템. 코원시스템이 만든 MP3플레이어가 단일상품으로는 월간 판매량 1위를 기록! 워크맨의 종주국인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코원은 일본시장뿐 아니라, 세계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97년, MP3플레이어를 세계최초로 개발하면서 한국은 첨단 디지털오디오의 종주국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일본이 주도해온 세계 오디오시장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MP3 플레이어 시장에서 한국의 코원시스템은 전세계 최고의 명가(名家)로 꼽히고 있다.


▶  세계 최강의 소프트웨어, 제트오디오의 신화

 1995년 컴퓨터 한 대로 대학교 동창이 손을 잡고 창업을 시작했다. 무엇하나 두려울 것이 없었던 젊은이들의 야심찬 도전은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부터 시작됐다. 당시 컴퓨터상에 쓰여 지는 오디오와 비디오 관련 파일의 형식이 갑작스럽게 늘어나 복잡하고 다양해진 상황. 파일마다 재생방식이 달라 원하는 것을 보고 듣기 위해서는 매번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해야만했다. 이를 해결해 줄 만능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1997년 7월, 이들의 첫 번째 야심작 <제트오디오>가 2년여의 진통 끝에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기능과, 비디오 플레이어 기능까지 갖춘 제트오디오는 PC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발이었다.

 제트오디오는 국내보다 해외시장을 염두 해두었다. 개발이후 어떻게 제품을 알리느냐가 중요해졌다. 수억원이 들어가는 홍보비용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코원은 온라인상에서 마케팅을 벌이기로 했다. 당시 미국에서 온라인 IT 전문 사이트인 ZDNET, CNET 등에 테스트용 버전을 한 달 동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올려놓았다. 네티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시장에서 명품으로 인정받은 제트오디오 하지만 국내시장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인기만큼 매출은 오르지 않았다. 이는 정품을 사지 않고 해킹으로 프로그램을 무단복제해 가기 때문이었다. 해킹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목에 거는 오케스트라, MP3 업계를 평정하다 (CW200)

 회사 설립 후 1년. 당시 인터넷은 전화선을 이용한 천리안 서비스가 유일했다. 어느날 우연히 천리안에서 MP3 파일을 다운받은 박남규 사장. MP3 플레이어 시장의 가능성을 직감했다.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를 동원해 철저한 분석에 들어갔다. 당시 시중에 나와 있는 MP3 플레이어 모델들은 겨우 10곡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 디자인이나 음질 역시 형편없었다. 침체된 시장을 일으킬 수 있는 획기적은 모델을 고민하던 코원은 장장 6개월간의 자료조사 끝에 코원시스템이 기획한 제품은 ALL IN ONE! 고객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하나의 기기에 담아보자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만한 크기의 라디오를 만드는 일조차 쉽지 않은 상황.

 제품 크기를 줄이기 위해 부품을 개발하는 힘든 과정을 거치고 드디오 CW200이 출시됐다. 고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최대 온라인쇼핑몰인 아마존과 IT 전문평가단 CNET 리뷰 등, 미국 내 소비자 및 전문가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 코원시스템의 새로운 기획은 극찬을 받았다. CW200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홍콩에 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 워크맨의 종주국, 일본시장에 도전하라! (하드형 M3, X5)

 한국과 미국에 걸쳐 승리를 했던 코원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워크맨의 종주국, 일본시장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수입품에 대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대형유통업체들은 한국에서 온 벤처기업의 물건에 무관심했고 특히 플래시 메모리 형태의 제품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당시 일본의 MP3 시장은 우리와는 달랐다. 초소형의 플래시메모리 형태의 제품이 인기인 우리시장과 달리, 당시 일본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두거운 하드형태의 제품들이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 1조 2천 억 가지의 음색, 아날로그 사운드를 구현하라!

 2003년 12월. 경쟁업체가 내놓은 MP3 플레이어가 판매고를 올리며 약진에 약진을 고듭하던 중. 양사는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코원시스템으로서는 경쟁사의 약진에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시장의 붐을 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회심작 아이오디오4는 출시 전부터 3천여대의 예약판매고를 올리며 폭발적인 인기로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출시된지 15일반에 버그가 발견되고 판매된 전 제품 리콜을 실시한다. 넉달이 지난 후에야 위기 상황이 일단락 됐으나 엎치락 뒤치락 해오던 경쟁업체는 이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엇다. 코원시스템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강의 음질을 구현하는데 남은 힘을 모두 쏟았다. 디지털이지만 아날로그의 음색이 살아있는 MP3를 위한 코원의 도전은 계속되고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 남는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말이다.
 
급속도로 변하는 정보기술(IT)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지난 10년 동안 매년 두배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박남규 코원시스템 사장(41). 박 사장의 유연한 사고와 겸허함은 날이 갈수록 의사결정이 어려워지는 이 시대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전범이 될 만하다.
 
# 초고속 성장기업
 
코원시스템은 아이오디오(iAUDIO)라는 브랜드로 각광받고 있는 MP3플레이어 전문업체다.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최근 사명을 거원시스템에서 코원시스템으로 바꿨다.
 
"1995년 설립 이래 단 한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고 매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지난 해에는 40만대의 MP3플레이어를 판매했지만 올해에는 100만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코원시스템은 최근 `한국의 고속성장 기업50'(Korean Technology Fast 50)에서 유일하게 3년 연속 수상 기업으로 선정될 만큼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01년 84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02년 168억원으로 늘어났고 2003년 264억원, 2004년 785억원으로 매년 약 2배 이상 성장해 왔다.
 
코원시스템은 올해 매출액 1550억원과 국내 시장점유율 20%를 달성해 MP3플레이어업계에서 2위에 도약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주력해온 국내 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활발한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 법인에 이어 일본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중국에도 생산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소를 개설했다. 유럽에도 올해 안에 지사를 설립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한국을 비롯, 미국,유럽, 일본과 중국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해외 수출에 매진할 계획이다.
 
# 기술기업의 꿈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석사 출신인 박 사장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코원시스템을 설립했다. 그는 벤처업계에서는 많지 않는 편인 LG전자 연구원 출신이다. 그렇게 일찍 창업을 결행한 배짱과 용기가 부러워 창업을 결심한 계기를 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미국의 애플사나 HP사처럼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을 일구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금은 없지만 기술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박 사장은 그 꿈과 비전을 현재 미국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대학 동창생인 정재욱 사장과 공유했다. 궁극적으로 가야할 방향은 멀티미디어 사업으로 설정했지만 초기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시작했다.

창업 당시 투자한 돈은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돈 2000만원이 전부였다. 그 돈도 대부분 사무실 얻는데 쓰고 집에서 사용하던 컴퓨터와 기타 장비로 사업을 시작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일단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느긋함이 제 성격의 장점"이라며 답을 대신했다.
 
# 행복한 CEO
 
박 사장의 프로필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깔끔한 프로필 만큼이나 그의 비즈니스 여정 또한 순탄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시련이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 이야기할 만한 우여곡절은 없더군요." 자신의 인생과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이 정도로 담담히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CEO`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역경과 난관을 이겨낸 기업인의 성공 스토리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롭겠지만 당사자가 겪었을 고통까지 이해해주는 것은 아닐테니까.
 
40대 초반에 매출 1000억원짜리 회사를 일궜다면 `성공`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저는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정한 `성과`를 이뤘다는 정도의 표현에는 동의하겠습니다." 겸손한 대답이지만 한편으로는 박 사장의 성취욕이 이 정도로 만족할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도 들렸다.

"5년 후인 2010년에 매출 1조원을 기록하는 것이 현재의 목표입니다. 그 때쯤이면 성공했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박 사장이 자신의 경영자적 자질은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물었다. "저는 늘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비자의 감각을 읽어내는 직관력이 경영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보다는 조화와 타협을 중시하다보니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경영자의 그릇의 크기와 포용력에 달려 있을 테니 그 또한 `능력`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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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켜라! - 스팀청소기 세계 진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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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엄길청의 성공시대에서도 소개된 한경희씨의 스팀청소기 이야기...
오래간만에 들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무일푼에서 창업을 한지 6년만에 세계 시장 점유율 60%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것에 찬사를 보낼수밖에 없고,
끊임없는 제품의 수정, 보완...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 졌다고 해도 사람들이 무조건 구매를 할리가 없다...
그것을 이겨내는것이 마케팅이라는것이지만.. 이외에서 하늘의 도움.. 운도 따라야 할것이다...
암튼 블루오션을 개척해서 40명의 직원이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바라본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시행착오를 격는 모습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겼다고 할까...
아니.. 내가 감히 그들과 비교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의욕이 느껴진다.. 파이팅이다!
 

[제 92편]

        『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켜라!

         - 스팀청소기 세계 진출기』

 

▣ 방송

   2005년 10월 7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PD : 김상우       작가 : 박소희


▣ 기획의도

  평범한 한 주부의 아이디어가 세계시장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세계 최초, 바닥용 스팀청소기 개발에 성공한 한영베스트. 이들은 지난 한 해 15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데 이어 올해는 천 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카펫용 스팀청소기의 본고장 독일을 비롯하여 미국, 일본 시장 등으로 그 무대를 넓혀 가며 전 세계 청소혁명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렇게 스팀청소기 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선 '한영베스트'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 제작내용

 1. 세계 최초의 스팀청소기를 개발하라!

 입식생활을 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좌식 생활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보송보송한 바닥 청소는 언제나 주부들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다. 물걸레 청소로 살균소독까지  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래서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물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던 한경희씨는 새로운 형태의 청소기를 고안하게 되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스팀다리미에 걸레를 붙이고, 봉을 달아 스팀청소기를 만들자고 생각한 것.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제품을 완성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청소기는 다리미보다 더 많은 양의 스팀을 요구하기 때문에 스팀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더군다나 흡착력과 밀림력을 갖춘 걸레개발과 걸레 부착 방식 등 각각의 구성요소들 또한 새로운 방식을 요구했다. 결국 스팀청소기 개발은 맨땅에서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2.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고의 애프터 서비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스팀청소기 '스티미'가 탄생했다. 하지만 유통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한영베스트. 이들은 좋은 제품만 만들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갈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소한 이 제품을 소비자들은 선뜻 바라봐 주지 않았고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판매에 발 벗고 뛰었으며 조그만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고객의 집을 방문했다. 중소기업에게 취약한 애프터 서비스 부분을 강화한 것이다. 또한 고객들의 불편사항을 모두 귀 기울이고 보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청소까지 해주며 최고의 애프터 서비스를 선사했다. 이러한 직원들의 정성에 소비자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3. 세계시장을 향한 도전

 소비자들의 불편사항을 보완하여 재 탄생한 '싹스팀'. 밤낮 없이 연구, 개발한 직원들의 노력이 진가를 발휘하며 싹스팀은 한국 시장에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또한 다다미를 사용하는 일본과 웰빙 열풍으로 카펫 걷기에 나선 유럽까지 그 시장이 넓어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한영베스트는 더욱 박차를 가해 전 세계시장에 뿌리내리는 그 날까지 힘차게 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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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환, 나사왕국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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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이는 그림이 직렬나사라는것인데 보통 볼트, 너트라는 개념을 깨버린 나사라고 한다.
이 나사 하나만으로 하루에 매출이 1억이란다..
거기에 최초로 옛날에 콜라나 소주병 두껑을 막는 기계를 만든 사람도 임정환사장이라고 한다.
지금 나이가 칠순인데도 그의 열정은 변함없이 여전하다.

돈을 번것도 번것이지만 성실함과 일에 대한 집중력, 빠르게 시제품을 만들어 내는 모습에서 존경심을 표하게되고,
그가 골프를 치지 않거나, 회사를 상장하지 않는등의 회사를 경영하는 원칙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
이외에도 파트너를 대하는 자세, 필요한 물건은 꼭 팔린다는 자부심등 배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왠지 모르게 미래산업의 정문술회장이 생각나는 사람이였다.

지금 당장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즉각적이고 머리로도 많이 생각하지만 , 빨리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배워야겠다.

다만 너무 일에 바쪄서 다른부분에는 신경을 못쓰는부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보기 좋은 모범사례인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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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오직 나사만 만들었다

임정환 명화금속 사장(66)은 지난 50년간 오직 나사만 만들어왔다.

한가지 품목으로 5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인데 무려 반세기를 단일 아이템으로 견뎌왔다는 건 수수께끼중 수수께끼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뜻밖에도 쉽게 풀린다.

그는 처음엔 건축용 나사를 생산했다.

그 다음엔 자전거용 나사를 만들었다.

환경이 바뀌자 이번엔 자동차용 나사를 만들었고 또 컴퓨터용 나사를 개발해냈다.

현재는 항공기용 나사까지 만든다.

누구라도 경기 시화공단에 있는 명화금속 공장안에 들어가서 첫번째 놓여있는 나사생산기계를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 자그마한 기계가 1분에 7백개의 직결나사를 쏟아낸다.

1초당 10개 이상의 나사가 쏟아지는 셈이다.

선진국 나사생산기보다 분당 5백개를 더 산출해낸다고 한다.

이 기계는 임 사장이 직접 개발한 것이다.

이 '직결나사 전용생산기' 외에도 임 사장은 지난 50년간 나사기계분야에서만 1백56개의 특허를 개발,획득했다.

그래서 임 사장을 두고 흔히 '나사박사'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나사박사로 성공하기까지의 역정은 기막힌 드라마다.

1952년 중학교 1학년이던 그는 서울 영등포 상의용사회관 뒤에 있는 고주파라는 엔진공장에 취업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간 각종 나사를 만들며 살았다.

일본사람이 경영했던 이 회사는 기계분야에서 높은 기술수준을 갖추고 있었으나 1백여명의 종업원 가운데 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임 사장 뿐이었다.

그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2시간을 걸어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잠잘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잠을 4시간 이하로 자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하루 4시간 이상 잔적이 한번도 없다고 얘기한다.

그는 요즘도 잠을 자다가도 꿈에 독특한 나사를 개발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 메모하고 도면을 그린다.

이처럼 그의 머릿속은 항상 제품개발에 쏠려있다.

얼마전 임 사장은 안산에 있는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가서 낚시찌를 보다가 갑자기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낚시찌처럼 쉽게 박히면서 절대 빠지지 않는 그런 나사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난 것이다.

그는 당장 낚시도구를 접어들고 공장으로 향했다.

이 아이디어를 기초로 그는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를 나사 하나로 고정시킬 수 있는 나사를 개발해냈다.

50년간 쌓아온 노하우로 개발해낸 '블라인드 리벳'이란 이 나사는 현재 시화공장에서 연간 4억개씩 생산되고 있다.

이 제품은 성능과 정교성이 뛰어나 독일의 에조트,영국의 에코파스트 등으로부터 주문이 계속 밀려오는 중이다.

또 중국에서 건축붐이 일어나면서 건축용 나사에 대한 주문도 쇄도해 이 회사 2천8백평 규모의 공장은 하루 24시간 나사를 쏟아내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치구 전문기자
 
자료원:한국경제

꿈속에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 명화금속, 임정환 사장

역경이 클수록 강해지지요. 지금과 같은 불황기가 바로 강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평생 나사만 만들고, 나사만 생각하며 살아온 임정환(67) 명화금속 사장에게는 ‘나사 공화국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강한 기업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고 강조하는 그에게 “회사가 어려운 이유는 경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경기가 어려울 때 깊이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기업은 환경이 어려운 곳, 어려운 시기에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다 른 기업들은 경기가 나쁘다며 울상을 짓지만 명화금속은 수출도 내수도 좋다. 9월 현재 내수는 1백29억원으로 목표치의 99%를 달성했고, 수출 역시 2백34억원으로 목표치의 94%에 이른다. 외환위기 직후인 98년을 빼면 환경이 어렵거나 좋거나 관계없이 연 평균 15∼20%의 고성장을 지속적으로 달성해 왔다. 그야말로 ‘강한 기업’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직 ‘나사’라는 한가지에만 몰두했습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나사를 많이 만들까만 생각했지요. ‘집중력’, 그것이 강해질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인 생역정을 들여다보면 임사장의 말에 전혀 과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가 공장 직공에서 ‘나사 공화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나사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는 1936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남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6세가 돼서야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런 이력을 가진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렇듯 그 역시 다음 해 서울로 올라와 작은 공장의 말단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이 ‘첫 직장’이 나사와 관련된 기계 공장이었으니 이 정도 한우물을 판 사람도 흔치 않다. 그가 “나사 인생 50년”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 단 공원에서 ‘나사 대통령’까지. 이 표현 하나가 그의 50년 인생살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때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 첫 계단은 학교였다. 거칠고 고단한 공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무려 8년이란 긴 시간을 중·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졸업하는 데 바쳤다. 물론 야간이었다. 공장직원 1백명 가운데 야간 학교를 다닌 것은 물론 졸업한 학생은 임사장이 유일했다.

잠을 덜 자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었어요. 누구에게나 똑같은 24시간이었으니까요. 새벽에 보리밥 한 덩어리를 물에 말아 먹고 공장에 가면 기계만이 날 반겼지요. 그때 기계가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장을 마치면 학교로, 그리고 집으로….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말자고 맹세했지요.”

25세 때인 61년 그는 학교와 공원을 마치고 마침내 젊은 기업인의 생활을 시작했다. 범양금속을 설립해 자신만의 ‘나사인생’을 시작했던 것이다. “돈도 학력도 없던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임사장은 “살길은 오직 나사를 잘 만드는 일뿐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가난을 물리칠 길은 멀어 보였다. “남이 만들지 못하는 나사를 만들겠다”는 일념은 좋았지만 빛을 보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하찮은 물건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말한 그는 “좀팽이처럼 자질구레한 짓 좀 그만하라”는 아내 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73년 각종 전자제품 등에 나사를 박고 꼭지를 떼어내는 ‘블라인드 리벳’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면서 ‘나사왕’ 등극의 길로 올라섰다. 나사 일을 시작한 지 거의 20년, 사업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뒤였다.

이 제품으로 그는 이후 10년 동안 리벳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후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아지자 연구 성과도 커졌고 숱한 신제품으로 시장을 섭렵했다.

‘뒤틀린 나사’… 세계 최고

임사장에게 ‘나사왕’ ‘나사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것도 그가 늘 나사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개발해 낸 나사 종류가 8백여종, 나사 관련 특허가 1백80종에 이른다.

언제나 메모지와 펜을 끼고 다니며 이미지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지로 옮긴다. 많은 경우 그 아이디어는 새로운 나사로 드러난다. 심지어 “꿈도 나사꿈만 꾼다”는 그다. 잠자리에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제품화된 적도 여러 번이다.

‘직 결나사’는 그 많은 나사 중에서도 임사장이 자랑하는 최고의 제품이다. 나사의 기능은 본래 두 개의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볼트·너트형’이 1세대라면 드릴로 구멍을 뚫고 나사를 밖는 ‘일체형’이 2세대, 드릴처럼 직접 물건을 파고 들어가는 ‘직결나사’가 3세대다. 직결나사 시장에 관한 한 그의 회사는 이미 세계 최고다.

“철판을 직접 뚫고 들어가 스스로 두 물체를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나사의 끝이 뒤틀려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이 ‘뒤틀림 나사’는 장인들이 거의 손으로 깎아 만드는 식이어서 만들기도 어려웠지만 만들어도 값이 여간 비싸지 않았지요. 이것을 명화금속이 자동화시켜 처음으로 기계로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게 있다. 나사를 잘 만들고 싶은 생각에 급기야 나사를 만드는 기계까지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일생의 자랑거리’로 삼는 공장을 들어가 보자. 무엇보다 1천평에 이르는 공장 부지에 4열 횡대로 늘어선 나사 기계에 기가 질린다. 하루 5천만개의 나사를 쏟아내는 기계들은 한 시대를 웅변하며 명화금속의 역사를 대변한다. 맨 안쪽 기계들은 8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테면 임사장이 만든 첫번째 ‘자식’들이다. 이들은 분당 평균 1백50개의 나사를 생산해 낸다. 90년대 만들어진 두번째 줄의 기계들은 분당 2백50개의 나사를 토해내고, 최근 만들어진 맨 앞쪽 기계들은 분당 4백개의 나사를 찍어낸다.

명화금속의 역사는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의 역사’와 같다. 임사장은 “향후 분당 7백개까지 생산해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아 무도 만들지 못하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력,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기계까지 만들어내는 집념, 그 제품을 만들어내자 이번에는 생산성을 높여야겠다는 경영능력…. 명화금속은 임사장이 있는 한 그의 말대로 “어떤 불황도 이겨낼 수밖에 없는 강한 기업”일 것 같다.


누구라도 한 우물을 팔수 있다. 대신 먼저 파라.


출처: 이코노미스트 2003.10.10


   (주) 명  화  금  속  

                어떤 회사인가?

1961년 설립, 8백여 종의 나사를 생산 중인 (주)명화금속은 독자개발한 직결나사로 세계 무역장벽을 뚫은 중소기업.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된 이 직결나사는 말 그대로 철판을 스스로 뚫고 들어가는 나사로, 기존의 철판에 홈을 파고 나사를 끼워넣어야 했던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특히 나사 자체에 곡선 비틀림각을 주어 스스로 드릴처럼 철판을 뚫고 들어가면서 나사밥이 바로 배출되는 방법을 개발, 현재 독일, 미국, 일본 등 세계 30여 개국에서 명화금속의 직결나사를 수입하고 있으며 상암월드컵경기장과 인천공항에도 사용되는 등 건설시공에서 필수품으로 쓰이고 있다.  

 열일곱 소년공 시절부터 나사를 만들어온 임정환 회장은 자다가도 나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 메모를 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나사박사’. 그가 평생 기록해온 수십권의 노트는 (주)명화금속을 180종의 특허를 보유한 나사왕국으로 자리매김시켰으며, 지난 2002년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신지식인’ 에 선정된 바 있다.  50여 년 산업현장에서 기계와 씨름해 온 그의 목소리에는 국내 중소기업에 대한 애정과 기업은행에 대한 신뢰가 깊게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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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콜렉터 FILA 휠라코리아 윤윤수, 고래를 삼킨 새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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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없는 그가 서울대 치대에 합격했지만 적성에 안맞는다고 중퇴하고, 외대에 들어갔다가 친구때문에 퇴학을 당하고 군대에 들어가서 백으로 카투사에 들어가서 영어실력을 쌓고 제대를 하지만 30세에 그가 들어갈곳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어렵게 들어간 한진의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아내를 만나서 자리를 잡고, 미국 대기업 구매담당자, 화승 이사, 신발 무역업 등으로 기반을 잡은게 겨우 10년이였다. 그러다가 FILA에서 스카웃제의를 받고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셀러리맨중에 한명이 되었던 그가 이제는 경영부실이였던 본사 FILA를 역으로 사버려서 고래를 삼킨 새우간 되어버렸다.
혹자는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송중간중간 들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말 성실과 노력으로 이만큼 이루어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성실, 노력했다고 다 성공하는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은 모두 노력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나도 한번 해보자... 10년안으로 한국에서 가장 세금 많이 내는 사람...

KBS 글로벌 성공시대-400만 마일의 사나이, FILA 휠라코리아 윤윤수, 밑바닥부터 고난속에서 성공한 그의 성공비결은?

휠라 코리아 윤윤수(52)사장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지난 95년 1백대 종합소득세 납세자의 의료보험료 납부액 순위에서 그가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 회장들 사이에서 3위를 차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올해는 연봉이 정확히 얼마나 됩니까. 『지난해 18억원보다 약 1억원 늘어나 19억원 정도입니다』 어림해서 따져보니 한 달에 약 1억6천만원, 하루에 약 5백20만원씩 벌어들인다. 약 1억원 안팎인 국내 시중은행장이나 대기업 사장의 연봉도 윤사장의 월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세금만 10억원

―소득세다 주민세다 해서 국가에 내는 세금만 해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금을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습니까.

『작년 한해만 약 10억원을 냈습니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낸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자기 소득 밝히길 꺼리는데 사장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의외입니다.

『저라고 밝히고 싶어서 밝히겠습니까. 돈 많이 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만큼 도와달라고 손 내미는 사람도 많아지는 법이니 누구든 골치아프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왕 알려진 이상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는 연봉을 적당히 줄여서 얘기해야 되겠네요.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투자법인은 뭘 숨기고 감추고 할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세무공무원들이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깨끗하고 투명한 돈이라는 사실도 증명되는 셈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연봉이 얼마냐는 것보다 연봉이 얼마인지 밝힐 수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 와서는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가정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처지의 젊은이들이 절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사장 자신 결혼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30만원짜리 단칸셋방을 구해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지금까지 이사만 무려 9번을 다녔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양지차지요. 돈도 많이 벌고 해서 지난 봄에 서초동 우성아파트 50평짜리에서 90평짜리로 옮겼습니다. 복층으로 된 아파트인데 컴퓨터를 전공하는 아들녀석이 미국 UC데이비스에 유학가 있어 우리 두 부부와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생 딸 하나가 살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큽니다』

윤사장은 광복되던 해인 지난 45년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윤사장이 태어나면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고등학교 2학년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형님이 한분 계시지만 초등학교 선생으로 계셨기에 윤사장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 처지는 되지 못했다.

물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나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빠르게 자수성가한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윤사장은 이런 경우에 속하지도 않는다.

KBS 글로벌 성공시대-400만 마일의 사나이, FILA 휠라코리아 윤윤수, 밑바닥부터 고난속에서 성공한 그의 성공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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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빈곤층 실태보고 추락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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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빈곤층 실태보고 추락하는 사람들
2 그늘속의 아이들 가난이 대물림된다
3 대기업과 중소기업 동반성장의 조건
4 6%의 눈물 비정규직 노동자

현재 우리나라의 빈곤층, 추락하는 사람들, 비정규직에 대해서 잘 보여준 다큐...
다만 아쉬운점은 적절한 대응책이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적절한 대응책이 있다면 왜 실현하지 않았겠는가...
대응책이 없으니 문제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들을 채우기 위한 양은 일정하니...
누구는 많이 가져가고, 누구는 가져가지 못하고... 하지만 못가진 자들은 더 가져가려고 데모와 농성을 하고, 이런 프로그램으로 하소연을 하고, 가진자들은 가진자데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이러다가 예전에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난게 아닌지..하는 공감대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의 해결책은 위와 같은 문제제기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더욱더 양극화현상으로 계층간의 갈등만 심화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만 든다. 그렇다고 문제가 뭔지는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시위를 하는 철없는 대학생들처럼 누가 들어도 맞는 말만 하거나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이상주의식 발상은 안될것이다.

위 프로에서도 간혹 언급한것처럼 서로 양보해야 할것이다.
단적으로 비정규직노동자만 하더라도 정규직으로 바꾸어서 회사가 이익이 난다면 누가 그러지 않겠는가?
왜 그런지 파악을 하고 회사도 어느정도 양보를 해야하고, 기존의 노조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미국의 자동차회사나 파산신청에 이른 델파이처럼 되고 말것이다.
공생이냐.. 공멸이냐..

신라말, 고려말등의 역사를 봐도 그렇지만 자신의 가진 기득권만을 지키려고 하다가 세상이 망한후에
빈손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그런 우를 넘해서는 안될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

하지만 힘들것이다... 누군가가 어느정도 강제적으로 집행을 하기도 해야겠지만.. 서로 양보를 하지 않는이상...

우선 나부터 잘되고.. 잘 배풀고.. 서로 양보하고 아끼지 않는 이상.. 나라탓을 하면 어쩌고... 세상탓을 하면 어찌하리...

2005 부산 APEC의 성공적 개최, 세계 경제대국 12위, 국민소득 2만달러... 대한민국의 화려한 경제성장 이면엔 지하철 사물함에 보관해온 생필품을 어깨에 지고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노숙자들과 세계화의 볼모돼 쌀 시장 개방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농민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별철폐를 외치며 농성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KBS는 `특별기획 양극화 사회-희망의 로드맵`을 테마로 다큐멘터리 4부작과 토론 3부작을 편성, 대한민국 사회 양극화의 단면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6일 방송된 1편 <新 빈곤층 실태보고 - 추락하는 사람들>편에서는 빈곤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며 지금 사회에 등장하고 있는 신빈곤층은 자신의 실수나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의 환경변화 때문임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이슈라는 것.

박모씨네 4식구는 1톤 트럭 안에서 추위와 맨 몸으로 맞서고 있다. 라면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공원 내 화장실에서 세수해 온 지 100일이 넘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트럭 안에서 5mm 차창을 바람막이로 의지해 잠을 청하며 가족들은 혹독한 겨울을 나야만 한다. 불과 1년 전 까지만 해도 이들은 번듯한 수퍼마켓을 운영하면서 40평도 넘는 아파트에서 살았던 당당한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작년 5월, 박씨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결국 수퍼마켓도 문을 닫게 됐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모든 것을 잃게 됐다.

아이들이 학원이나 과외로 바쁘게 보내고 있을 시간, 세 명의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바로 재활용품과 빈병을 주우러 다니는 것. 차곡차곡 모아놓은 빈 병을 팔아 번 돈은 고작 950원이 전부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용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는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운 모자가정의 대표적 사례다.

고경순(35)씨는 남편의 사업실패로 이혼을 해야 했고 덤으로 신용불량자라는 멍에까지 져야했다. 시에서 나오는 지원금과 자활기관에서 일하는 것으로 근근이 생활해나가고 있지만 양육과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방송에 출연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대명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신빈곤층의 등장 원인으로 IMF외환위기 이후 산업구조 개편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화를 꼽았다. 특히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임금노동자의 상당수가 저임금근로노동자로 전락했고, 임금부문의 고용이 감소하면서 자영업의 공급과잉과 미취업자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것. 이같은 노동시장의 변화 외에도 질병과 가족해체로 인한 여성가장의 증가 등 다양한 요인들이 신빈곤층을 등장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은 가장의 질병으로 인한 막막한 생계, 구조조정에 따른 실직, 모자가정 등 다양한 신빈곤층 사례를 통해 의료와 주거, 교육과 자활 부문에서 부실한 사회복지의 현실을 꼬집는다.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생긴 일이라면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마땅히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특히 미약한 사회안전망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위험요소로 작용할 것임을 강조한다.

방송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조명한다. 특히 경기 고양시의 희망지킴이 천사운동본부나, 서울 중구청의 1직원 1가정 보살피기 시스템과 최소생계비 200%까지 버는 세대까지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전산망은 막무가내식의 지원을 넘어 보다 체계적이고 차별화된 사회안전망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

방송은 계속해서 2편(7일밤 10시) ‘그늘 속의 아이들-가난이 되물림 된다’, 3편(8일밤 10시) ‘56%의 눈물-비정규직 노동자’, 4편(9일밤 10시) ‘대기업과 중소기업-동반성장의 조건’ 을 방영하며, 이어 12월9∼11일까지 사흘 동안 밤 10시20분부터 다음날 오전 1시20분 동안 3시간에 걸친 토론 프로그램을 끝으로 `KBS 특별기획 양극화사회-희망의 로드맵`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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