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iN /성공 & 강연'에 해당되는 글 561건

  1. 감성 시계를 만드는 남자, 김기문
  2. 주부 사업가 한경희, 스팀청소기에 도전하다
  3. 황금알을 낳는 촌닭, 김홍국 7
  4. 옷 짓는 여자 김남희, 우리 것을 만들겠다
  5. 구본형의 변화 경영, 희망 프로젝트
  6. 권동칠, 토종 등산화에 날개를 달다!
  7. 굳센처녀 장정윤, 스물 일곱살의 비망록

감성 시계를 만드는 남자, 김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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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브랜드인지 국내브랜드인지 헷갈리던 로만손시계..
작은 시계회사의 영업직을 그만두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창업을 해서 현재 커다란 성공을 이룬 김기문씨...
다른부분보다도 개발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감동을 받을 정도이다.
남들은 못한다고 포기하고 기권하지만, 그는 할수있다는 자신감으로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예전에도 어디에선가 들었던 컷팅글래스가 대표적인 그의 상품이다.
하지만 복제품이 금세 태어나는 요즘의 상황에서도 거기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발빠르게 새로운 제품들을 만들고,
최고의 제품을 지향하고, 수출 다변화정책등으로 안정적 쾌도에 오른듯 하다...
아무튼 적당한 부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하는 이런 사람들이 진정 성공한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세련된 마케팅 전략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인기있는 시계로 자리매김

현지인의 취향과 체형에 맞는 상품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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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사업가 한경희, 스팀청소기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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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및 불어 능통...
IOC 스위스본부 근무...
미국 MBA취득...
5급 공무원 사무관 근무...

이런 환경에 있는 사람이 모든것을 포기하고 사업에 뛰어든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이야기이다...
뭐.. 집안에 돈이 많냐.. 그것도 아니다...
사업을 하는데 자금이 모잘라서 친정, 본가 등등의 집들을 담보로 잡히고 포기하지 않고
결국에는 성공을 일구어내는 여성 사업가 한경희씨...

이것저것에서 본받을것이 많은 여성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분에게서 본받고 싶은점은 바른 생활 태도이다...

해야 할 것은 뜸들이지 않고 바로 하고,

하지 말아야 할것은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설령 그것이 실패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

쉽고, 누구나 알지만 못하는 것을 한경희씨는 묵묵히 해내면서...

어려운 시기를 뚫고 지금의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의 길은 멀리있는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들어주었다....







"경영자, 빠른 판단. 미래 예측 중요"












작성자 경기Economy21 김중근 작성일  2003/08/29 13:45
"돈이요? 엄청 많이 벌고 싶지요. 실제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벌어서 좋은데 써야죠.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면서 '나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에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장대비가 쏟아지던 7월 중순 부천시 오정구 내동에 위치한 회사 3층 사장실에서 한경희 사장을 만났다.

회사 설립 5년차를 맞은 그녀는 아래위 하늘색 옷차림에 사춘기 소녀의 해맑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돈을 얼마나 벌고 싶은지를 묻는 뜻밖의(?) 질문에 이렇게 자신의 삶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한 자락을

펼쳐보인 그녀의 여려 보이는 모습 속에는 사업에 대한 열정과 사회를 향한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한 사장은 '똑 소리 나고 다부진'사람이었다.


- 시와 시학사 최명애 사장의 추천을 받았는데 소감은.

훌륭한 분들이 많으실 텐데도 저를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한영베스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면.

주부들이 집안 일 중 가장 힘들어하는 걸레청소를 보다 편리하고 위생적으로 할 수 있는 한국형

스팀청소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회사입니다. 다수의 발명특허와 실용신안을 취득했고, 스팀청소기

분야 국내1위의 선두기업입니다. 제품은 LG, CJ등 홈쇼핑과 삼성몰. LG-eshop. 현대. 롯데 등 인터넷쇼핑

및 특판을 통해 판매되고 있어요. 주부들의 입장에 서서 항상 새롭고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가전.생활용품 판매회사입니다.


- 요즘 근황은.

스팀청소기의 2세대 모델인 '싹스팀'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능이 향상된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올해말쯤이면 3~4 종류의 신제품 개발이 완료될 것 같습니다. 또 올해말부터는

미국과 캐나다등 북미지역에 첫 수출길이 열릴 것 같아요. 수출 규모는 연간 30억원 정도예요.


- 독특한 경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겁이 없고 고집이 센데다 모험심이 많아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했고 공직생활도 해보았습니다. 인생은 마라톤쇼.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 사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어릴 때 꿈이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었어요.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님처럼 직접 할 능력은 없는 것 같고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일하는 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지요. 공무원 시절

맞벌이 주부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저도 집안일이 힘겨웠는데 그중에서도 무릎 꿇고 손 걸레질 하는

걸레 청소는 특히나 힘들었어요. 어느 날 스팀이 나오는 대걸레를 만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생각을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어요.


- 초창기에 애로가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미국에서 경영학 공부도 하고 유통업에도 종사해보았지만 전기나 가전 쪽은 전혀 지식이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조업에 뛰어든 것은 정말 큰 모험이었습니다. 주변사람 뿐 아니라

관련분야의 전문가라고 알려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다니며 배웠습니다. 제 별명이 그래서

'걸어다니는 민폐'랍니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투자비도 처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이 소요돼 제품

출시까지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 현재 회사를 운영하면서 겪는 애로사항이 있다면.

경영은 끝없는 노력과 투자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처음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 경영 철학은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용적인 제품들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거예요. 회사의

경영이념을 'Always New'(항상 새롭게)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 5년쯤 후 회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국내 가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을 것 같습니다. 매출액은 1천억 정도. 또한 지금 진출을

준비 중인 중국시장에서도 인정받는 가전업체로 성장해 있을 거예요.


- 꿈꾸고(혹은 바라고)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함께 나누는 세상입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자식에게 유산 남기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자식을

부동산 임대업자로 살게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식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유산은 올바른 정신과 도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회사의 규모가 조금 더 커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복지체제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기부문화가 보편화되기를 바랍니다.


- 경영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나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빠른 판단과 미래 예측 능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고 일목요연하게 처리해 내는

능력도 중요하구요. 'Simple is Beautiful'(단순한 것이 아름답다)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 여가활용은 어떻게 하는지

주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산책이나 가벼운 운동을 하기도 하구요. 가족들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어요.


- 앞으로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우선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을 가진 제품들을 많이 만들어서 우리 회사를 주부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어요.

청소기 하면 한영베스트가 떠오를 정도로 말이에요. 그다음은 국내는 물론 중국시장에서 가전

선두기업으로 인정받는 거지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 다음 호에 추천하고 싶은 '내가 존경하는 CEO'는 어떤 분이며, 추천 이유는.

내일신문의 장명국사장입니다. 평생을 사회운동에 헌신하시고 아직도 의욕적으로 사회에 기여하시는

사회의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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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을 낳는 촌닭, 김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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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으로 유명한 하림의 김홍국씨의 성공기...
그냥 닭파는 회사정도로 생각했는데, 닭에 관련해서 사료, 사육, 유통, 제조, 판매 등등 전부분을 총괄하고, 우리나라 닭중에 4마리에 한마리는 하림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부지런하고, 도전적이고, 자신의 마인드를 가지고 밀어붙이는 멋진 스타일...
가끔 책을 보다가 보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을 만들고, 계란을 낳고, 그걸 팔아서 돼지를 키우고... 이런 이야기... 김홍국씨가 어릴때 실천을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고등학교때 사업자등록을 시작해서 양계 사업을 해서 지금 돈으로 약 40억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_-;;
물론 한때의 방탕한 생활로 전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재기를 하게되고, 중간중간에 IMF, 화재사고 등으로 커다란 시련을 겪게되지만 다시 보란듣이 재기하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멋지다...
암튼 이것을 듣는내내 나도 닭처럼 부지런해져야겠다라는 생각과 빨리 바른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실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농업을 1차 산업에서 3차 식품산업으로 끌어올린 국내 최초 인물. 국내 최대 규모의 닭고기 회사 (주) 하림의 김 홍국(金弘國) 사장에 대한 평가다.

거듭되는 가축 가격파동으로 빚더미에 올라 앉은 영농후계자가 독창적 경영전략으로 국내 최고의 회사를 일구었다. 동양 최대 규모의 닭고기 농장, 국내 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 코스닥 시장등록. 21세기 한국 농업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 선구자 김홍국 사장의 성공 스토리. 오늘도 세계 제일을 꿈꾸는 김 홍국의 성공시대를 만나본다.


성공 비결 1 : 나는 공부보다 닭이 좋았다!

김홍국의 닭과의 인연은 초등학교 4년때. 외할머니께서 몸보신하라고 주신 병아리 10마리였다. 정성을 들인만큼 나날이 부쩍부쩍 크는 닭들을 보며 그는 자신이 평생 해야 할 일을 발견한 것이다. 중학교 다닐때도 새벽에 일어나 돼지와 수백마리의 닭, 게다가 비닐하우스 채소까지 돌볼 정도로 악착을 부렸다.

중3이 되자 보따리 장수를 하며 자식들이 공부 잘하기만 고대하시는 어머님의 바램도 저버린채 인문계 학교가 아닌 농고를 고집하던 김홍국은 끝내 뜻을 이룬다. 이리농고에 진학해서는 벌써 ''''학생사장'''' 소리를 들어가며 양계는 물론 볏짚을 공장에 납품하는 본격적인 사업을 벌여 수완을 발휘하는데. 드디어 볏짚사업으로 번돈 거금 4천만원으로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꿈에 그리던 양계장을 갖게 된다.


성공 비결 2 : 三場통합

동양 최대의 시설을 갖춘 익산의 (주)하림 본사 공장. 달걀에서 가공된 닭고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움직인다. 그런 오늘의 하림을 일으킨 김홍국 사장도 시련은 있었다. 82년 닭값이 폭락하자 양계장을 하던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빚쟁이들을 피해 돼지막에서 잠을 자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와신상담, 어떻게 하면 밑지지 않는 양계를 할 수 있을까 해서 실천한 것이 바로 삼장통합. 농장, 공장, 시장을 한데 묶어 원가절감을 이루자는 것이 그 기본공식. 때마침 국내에 양념 닭고기 선풍도 그의 사업에 돛을 달아주었다. 이제 달걀생산에서 부화, 양계, 사료공장, 그리고 포장닭, 닭소세지 까지 최고의 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이뤄져서 시장으로 바로 유통된다. 국내 최초의 축산물 KS마크를 획득하고 일본, 홍콩에 수출하는 동양 최대의 닭고기 전문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성공 비결 3 : 기본과 상식을 실천하라

(주)하림의 회의실에는 초등학교 도덕책이 즐비하다. 도덕책에 나와있는 말만 실천한다면 세계 일류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게 김홍국 사장의 생각. 그는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실천하는 경영인이 되기위해 남들이 하기 꺼리는 화장실 청소도 솔선해서 해내는 사장. 작은 일을 잘 챙기는 것이 사장의 할 일이다라고 말한다. 거짓말 하지말고 부지런하고 약속을 지키고... IMF로 여려운 요즘. 그가 요새같은 불황을 헤쳐나가는 방법도 바로 이러한 기본과 상식을 실천하는 일이다.




하림의 아침은 빨리 시작된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벤처기업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굴뚝기업들이 9시에
출근하지만 하림은 8시에 출근한다.
본사가 익산에 있다보니 경기도 용인에 있는 직원들도 한 주에 한두 번씩
은 회의에 참석하러 내려오는데 이 때도 역시 회의시간은 8시다.
김홍국사장이 먼저 나오다 보니 힘든 직원도 있지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생각으로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다.
김홍국사장과 하림의 오늘은 도전 그 자체나 다름없다.
"먼저 꿈을 가져라.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홍국사장은 미래를 투시하고 현재 시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
는지 예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88년 당시, 업계 최고의 회사가 가진 도계능력은 하루 3만 마리였다.
전체적으로 닭고기 수요도 적었지만 규모가 커져도 대처능력이 없었다.
김사장은 앞으로 닭고기를 찾는 사람이 폭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시 치킨전문점으로 닭 산업이 이미 고성장 궤도에 들어 있었지만 90년
대 들어서는 서구의 입맛을 따라가는 외식산업의 발달로 패스트푸드점의
주문이 거세질 것으로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 20만 마리의 도계능력을 갖춘 최신 설비공장을 계획했던 것
이다.
이런 예측은 몇 년 뒤 어김없이 들어맞았지만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망상
이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일명 ''양념치킨''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하림의 사업이 급성장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주문이 너무 밀려들어 비명을 지르는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당시 김홍국사장은 아침에 일어나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자기 팔을 꼬
집어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림이 숨가쁘게 달려온 날들이 결코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닭 키우기 자체가 축산업이란 1차 산업이다 보니 워낙 가격 진폭이 컸던
탓이다.
농장이 시장 형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품의 질과 이윤창출을 구조적으로
보장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영세 양계장 수준에서 벗어나려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획기
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닭을 가공해서 식품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전
국적인 유통라인을 통해 직접 판매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 경영시스템 도입은 업계의 일대 혁신을 일궈내기 시작했다.
농장에서는 통제불가능한 닭의 가격과 유통구조를 안정적인 가공라인과
유통망을 통해 우리 나라 양계산업을 하나의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하림의 경영방침은 ''고객을 섬기는 경영'' 바로 그것이다.
소비자가 만족스러워 하는 고품질의 제품을 고객이 수긍하는 가격에 서비
스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품만족, 가격만족의 대명제는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경제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림은 2000년부터 각 사업본부별로 TIME 2001, NEW 2001, WING
2000 운동을 전개해왔다.
각 본부별 특성을 살리되 불량과 클레임, 안전사고가 없는 생산기반을 구
축해 생산성과 기업가치를 동시에 배가시킨다는 것이 이 운동의 요지다.
이를 위해 하림의 전직원들은 다시 한번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했다.
하림이 20여년을 버텨온 저력은 바로 목표를 보고 물러서지 않는 도전력
과 기본에서 출발하는 헝그리 정신이었다.
하림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서구취향의 음식문화 속에서 닭고기의 세
계 제패를 꿈꾼다.
김홍국사장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순의 우리 나라 음식취향이 고단
백, 저칼로리의 닭고기로 옮겨지는 날이 멀지 않으리라고 본다.
하림은 요즘, 식품산업의 최종 지향점인 생명공학으로의 업그레이드에 눈
을 돌리고 있다.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은 것은 현대인들의 가장 간절한 욕구이고 이것이
기능성 식품산업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챙겨 먹는 비타민이 약이 아니라 식품이라면 더욱 안
심하고 먹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제 식품산업도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단계에 까지 이른 것이다.
김홍국사장은 기업은 생명연장의 꿈을 다루는 생명공학의 기치를 내걸고
바이오테크 푸드 즉, 기능성 식품의 개발에 발벗고 나설 때라고 주장한다.
선진국들이 농업을 식품산업화하고 생명 과학화하면서 그 미래가치를 높
여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지향점도 분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림 또한 지금까지 축산물이던 닭고기를 식품으로 변모시키는데 주력했
다면 21세기에는 닭은 순수 먹거리로 포장하는 것을 넘어서 기능성 화학물
질을 추출하고 의약품이 될 수 있는 기능성을 모색하는데 무게 중심을 두
고 있는 것이다.
우선 항암작용과 면역력 증가효능이 첨가된 ''셀레노 메티오닌 닭고기''를
비롯해 발색제를 넣지 않고 고단백 저지방의 순수 닭고기 가슴살로 만든
''하얀 속살햄''과 같은 건강기여제품 개발에 주력하는 것은 물론 바쁜 현대
인들이 추구하는 편의성에 맞는 컨셉개발에 초점을 맞춰나갈 계획이다.
이는 1차 농산물을 직접 조리하던 시대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효용성을
각 가정의 식탁에서 손쉽게 가공식품으로 실현시키는 첫 출발점이 될 것이
다.
하림의 미래비젼 가운데 또 다른 한 축인 식품의약산업과 접점은 원광대
학교에 설립한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연구중인 간경화 진단시약 개발에서 찾
고 있다.
현재는 시제품 개발단계까지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닭의 담즙산을 이용한 기관지염 치료제의 경우 특허출원에 성공, 조
만간 약품으로 탄생해 기관지염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여기에 닭 날개 끝과 연골, 껍질에 많이 함유된 콜라겐을 분해해서 피부
미용을 위한 화장품의 재료로 제공하거나 류마티스성 관절염과 골다공증
치료를 위한 콜라겐 함유약품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농촌에 머무르는 김홍국사장은 농업이 살아
야 공업도 산다는 농업지상주의자다.
그래서 더욱 농촌이 소중하고 그 가치에 집착한다.
그가 말하는 소비자 지향적인 농업은 궁극적으로 농촌, 농민을 위한 농업
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나라 농업정책은 방향이 잘못된 점이 많다고 한다.
"농촌과 농민이 약하기 때문에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 자체는 좋은
것이죠. 하지만 돕는 방법에서 잘못됐습니다. 농민이 약하니까 보호해야 한
다면서 경쟁을 막아줍니다. 농민과 혹은 농민들끼리 경쟁을 못하게 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렇게 하면 농업과 농민이 끝까지 약한 존재,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남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겁니까"
김홍국사장은 농업정책에서도 ''선택과 집중''을 강조한다.
농업구조를 품목별 농기업 형태로 재편하고 집단화 규모화 할 수 있도록
자금과 정책지원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 근로자들이 자본을 축적해 농촌에 들어가 투자하는 기업가적 농업경
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의식과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게 바뀌는 순간 경제도 발전하고 선
진지역으로 도약합니다. 미국의 시애틀도 150년 전 만해도 추장이 통치하
던 미개지였습니다.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도민 모두가 근면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도와
주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면 남의 발목을 잡을 시간
도 없습니다. 지금은 빠르고 정확하게 가는 시대입니다. 각자가 선진적인
의식을 갖고 지역사회에 그같은 풍토가 자리잡으면 발전은 금방입니다"
김홍국사장은 전북발전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도 분명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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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짓는 여자 김남희, 우리 것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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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깡다구를 가진 여장부의 사업 성공기...
한복 만드는것 하나로 3년만에 매출 100억이라니...-_-;;
창업해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보다는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후에 회사를 체계적으로 잡아가는 부분에서 배울부분이 많다.


창업 3년 100억 매출 생활한복 돌실나이 김남희 사장


“우리옷 세계화에 내 인생을 걸겠다”


구경거리 생활한복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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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변화 경영, 희망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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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아는 사람이 나와서 반가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구본형씨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방송중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약간은 좀 두리뭉실하고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꿈과 비전 등을 중요시하시는 분입니다. 제 생각에는 잘못된 경우 안정된 길을 걷고있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에 혼란스러워서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본형씨가 변화나 자기경영등의 생각을 말 하지만 본인 자신의 경험담이라기 보다는 회사에서 격었고, 스스로 공부를 해온 내용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땀냄새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저는 좀 거리감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구본형씨의 책은 두권정도 읽었던것 같은데 읽을때는 그래 변해야되, 나 스스로 경영을 하면서 사는거야라고 다짐을 하게 되지만, 저의 부덕이겠지만 저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와도 같았습니다.
근데 이번 방송을 들으면서 내가 너무 어느 한쪽면만 보았거나, 안좋게 생각을 하면서 그쪽으로만 생각을 좁혀간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좋았다는 이야기지요...^^;;
북한산 탕춘대매표소 아래의 부촌에 살고 계신것 같던데, 가장 부러운 것은 구본형씨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암튼 이 방송을 듣고 연휴동안에 구본형씨의 익숙한것과의 결별을 읽기로 했습니다.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 씨가 제시하는‘사장님’되는 원칙 7가지
<!------------------->
거의 모든 샐러리맨에게 평생 직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고와 퇴출의 위험에 무겁게 눌려 있다. 직장을 나와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는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일곱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첫째,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떠남은 가혹한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기 전에 꼼꼼하게 준비한 사람들에겐 떠남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떠나라'는 말을 듣기 전에 떠나라. 그러나 준비 없이 떠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 회사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즉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회사를 버려라. 무기력과 무능함이 회사 전체를 감싸고 있을 때, 주위에 온통 유능한 상사와 동료들이 가득하여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을 때, 부패가 만연되어 관행이 되고 더러운 관계에 연루된 사람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기업문화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때 적극적인 버림이 중요하다.


둘째, 어리석은 일관성을 버려라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갈 곳을 정해야 한다. 보통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난관에 봉착한다. 교사가 퇴직하고 다른 일을 해보려 할 때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경력사항이 모두 교육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 앞에 주저앉게 된다. 20년간 은행원이었던 사람은 은행을 나오면 그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일관성에 갇혀 있을 뿐이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관성에서 탈피할 때 우리 앞에는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간 길에는 내 길이 없다

창업을 결심한 사람들의 첫 번째 질문은 거의 예외가 없다. '뭐 좋은 것 없을까?'. 그래서 모든 창업 가이드는 유망 직종을 다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맞는 유망 직종은 없다. 단지 유행 직종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나에게 맞는 유망 직종은 무엇인가?”라고.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나만의 방식이 없으면 돈과 재물도 없다. 모방과 추종은 유행의 치명적 약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가장 나다운 것만이 안정적인 나의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고 기존의 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가장 까다로운 고객, 아내를 동지로 삼아라

비즈니스의 첫 번째 고객은 자기 자신이다. 두 번째 고객은 아내다. 아내는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다.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고객들을 설득하기는 오히려 쉽다. 남편의 퇴직과 해고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내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아내의 지원을 얻는다면 사업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낙관해도 좋다. 더 나아가 아내와의 동업도 좋다. '남편은 바깥일을 하고 아내는 안살림을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라. 아내가 사교적이고 대인관계가 좋다면 영업을 하고 남편이 꼼꼼하면 안에서 기획, 관리 등의 지원 역할을 맡아도 좋다. 아내의 재능이 눈에 띄면 아내를 아낌없이 지원하라. 이것이 가족기업의 시작이다.


다섯째, 현장 확인을 통해 철저하게 준비하라

준비는 아무리 꼼꼼해도 지나치지 않다. 철저히 준비해도 현업에 뛰어들면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많은 법이다. 준비는 성공을 예비하는 것이다. 시작할 때 이미 성공과 실패가 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초보 창업자는 우선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이때 신문, 잡지, 방송에 나오는 기사나 광고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안목을 기르는 방법은 시장 변화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주요 핵심 정보는 현장에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정보의 원천이 신뢰성 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물리가 트이게 마련이다. 본인에게 맞는 유망 직종이 정해지고 나면 기본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한 후에 다른 사람이 경영하는 현장이나 유사 현장에 가서 일일이 꼼꼼하게 확인하고 보완하라.


여섯째, 비즈니스는 고객이다

비즈니스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고객이다. 고객 없는 비즈니스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이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비즈니스는 한 번의 거래가 아니다. 비즈니스는 고객과의 지속적인 관계다. 가격, 제품, 서비스, 접근성 그리고 체험은 기업이 일반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고객의 요구사항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다섯 가지 특성 요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제이다. 이 다섯 가지 분야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분야에서 허용수준을 지키되 한 분야에서 최고수준(100점 만점)인 지배수준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성공적인 기업들은 한 분야에서는 지배수준을, 다른 한 분야에서는 차별수준(100점 만점에 80점 정도), 그리고 나머지 세 분야에서는 허용수준(100점 만점에 60점 정도)을 추구해왔다. 두 가지 이상에서 지배수준을 확보하려는 것은 비용의 낭비임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사업을 구상하던 간에 제품, 가격, 서비스, 접근성, 체험의 다섯 가지 요소 중에서 무엇을 지배수준으로 만들지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일곱째, 나만의 비즈니스 룰을 확립하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면 인생은 재미없다. 자신만의 비즈니스 룰이 지배하는 작은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우선 불법과 부정, 부패를 성공으로부터 확실하게 격리시켜라. 더 나아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법과 도덕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삶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학습이나 체험을 통해 체득한 비즈니스 룰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원칙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는 기둥과 등불이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 원칙을 전복시키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당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원칙이 없다면 대세와 주류에 편승하게 되고 이것은 자신을 창조적으로 차별화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창업할 때 가장 먼저 손질하고 보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획력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지해야 하는 자신만의 비즈니스 룰이 소중한 것이다.


정리 신경원 참조 내가 직업이다(북스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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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칠, 토종 등산화에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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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만나본 무대포 정신의 사장님...^^;;
도 아니면 모 정신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잘되신것 같습니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주위에서 인정을 받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주위의 도움으로 창업을 해서 여러 어려움을 격었지만 개발에 개발을 거듭하는 도전끝에 현재의 트랙스타라는 메이커로 국내시장점유율 50%에 이제는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들은 이정도면 됬지.. 이제 이걸로 먹고사는거야라고 할때... 다시 시작하는 모습에 혀를 네둘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권동칠사장의 사회초년기 모습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싹수를 보면 그 끝이 보이는듯 합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것은 아니겠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력하고 열심히하는 사람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성공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방향없는 노력은 소용없다는것... 확고한 신념... 핏빛처럼 뚜렸한 목표...

한가지 덧붙이자면... 사양산업이란 없다는것... 언제나 최고의 자리는 없다는것... 그래서 희망이 있다는것.... 잊지 말자...


[중소기업 성공학] (주) 성호실업 권동칠 사장

형형색색 '맞춤신발'로 이끈 신발혁명

대표적인 사양업종인 신발산업에 겁없이 뛰어든 중소기업인이 있다. 은행빚 한푼 얻지 않고 공장을 돌려 1억4000만달러어치의 신발을 수출한다. '신발의 힘'은 창의력에서 나온다.

곽희자 자유기고가


    80 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한국 신발산업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부산에서는 500여개에 달하는 신발공장이 엄청난 수출물량을 소화해 내느라 밤새 불야성을 이뤘고, 각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이들 업체는 해마다 40억달러어치가 넘는 신발을 해외로 수출, 세계 신발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인건비가 급상승하자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에만 의존해왔던 많은 신발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어렵게 살아남은 기업들도 인건비가 싼 대만이나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갔다. 그 결과 현재 부산에 남은 신발업체는 80여개. 총수출액은 8억달러, 세계 신발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 가운데 대부분을 대만이 생산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신발산업의 사양화가 극명해진 지금,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 바닥에 뛰어든 작은 거인이 있다. (주)성호실업의 권동칠(權東七·44) 사장이다. 권사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일 수 없다. 신발 수출국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겠다”며 ‘21세기 신발혁명’을 야무지게 다짐한다.


부채비율 0%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388-2번지 1000여평 부지에 자리한 성호실업 마당 앞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수입해온 원단을 하역하거나, 각국으로 실려나갈 수출용 신발을 싣는 컨테이너 차량들로 붐볐다. 사무실이 있는 4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의 2층과 4층에선 중국 공장에서 재단해 온 신발 밑창들이 윗부분과 부착돼 완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등산화만도 하루에 2000켤레. 같은 크기의 컨테이너에 컬러 TV를 가득 실은 쪽보다 신발을 실은 쪽의 수출가격이 더 높다고 한다. 신발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성호실업은 88년 창업 이래 신발 외길을 걸었지만 지금껏 실패를 맛보지 않고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한 푼의 부채도 없이 출발, 설립 첫해에 500만달러 수출탑을 안았고, 이듬해엔 100% 성장해 1000만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00%를 넘는 성장세를 과시한 성호실업은 누구랄 것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간 ‘IMF 시절’에도 전과 다름없이 신입사원을 뽑았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겨 적극적인 공격경영을 펼친 것.

성호실업의 지난해 수출액은 1억4000만달러. 회사규모는 커졌지만 아직도 은행 부채비율은 0%다. 설립 10년 만에 한국 신발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선두기업으로 부상했다.

권동칠 사장은 55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2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줄줄이 다섯이고, 그는 여섯 번째다.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 당시 이들 열 식구의 ‘밥줄’은 논 여섯 마지기가 전부였다.

“하루 세 끼를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10시 반쯤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지요. 밥도 고구마나 감자가 주였고, 사이사이에 보리나 쌀이 몇 톨씩 섞인 정도였어요.”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기는 다반사였고,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가난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장남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보냈다. 대신 딸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걸핏하면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이 집 저 집을 돌며 돈 빌리기에 바빴다.

“수업료를 빌리러 스물여덟 집을 돌아다닌 날도 있어요. 이미 돈을 빌린 적이 있는 집은 아직 갚지 못해 염치가 없어 못 가고, 안 빌린 집만 골라 다녔죠.”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권씨는 그렇듯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밖에 몰랐던 20대

수업에 자주 빠진 데다 집에서도 차분하게 공부할 여건이 못 된 탓에 기초가 부족했던 그는 삼수 끝에야 어렵사리 동아대 경제학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이번엔 학비가 문제였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는데, 밤에 공부할 시간을 내려면 공무원만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산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부산시 서구청 수도과. 여기서 몇 달 일하다 동사무소로 옮겨 2년간 근무했다. 그때 봉급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댄 것은 물론, 대학입시에 떨어진 동생을 데려다 재수를 시키기도 했다. 형의 뒷받침 덕분에 동생은 경북대에 진학했다.

그는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면서 사표를 내고 공무원직을 그만뒀다. 말단 공무원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데다,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공무원 노릇이 자신의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 후 남은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중견 신발업체인 (주)세원에 해외영업 공채 1기생으로 취업을 했다. 신발과는 이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말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5분 대기조 돌격대원 같았죠. 자고 나면 총알같이 튀어나와 7시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근무 시작 전에 외국어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면서 스스로를 계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무가 끝난 후에는 거의 매일 바이어를 접대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 후 6년 반 동안 그는 일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바깥에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구내 식당에서 눈이 맞은 영양사와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끌려 결혼을 마음먹었다는 아내 성정임씨(42)는,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둔 후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남편이 ‘하숙생’이 돼버리자 말을 잃어 버릴까 봐 혼자서 책을 소리 내어 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아 선택한 남편에게 일 좀 그만하라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권씨는 철저한 영업맨이었다.

“업무에 관한 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다그쳐대니까 나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그만둔 직원도 많았어요.”

5%를 더 받아내려고 바이어들과 몇 시간씩 붙어 싸웠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매사에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장은 권씨의 능력을 인정, 그가 소신을 펼 수 있도록 누구에게보다도 많은 배려를 해줬다. (주)세원은 그가 입사할 당시 직원 1000명에 수출액이 1000만달러 정도였지만, 그가 회사를 나올 무렵엔 직원이 4000명, 수출액이 1억2000만달러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외국 업체들, 잇따라 사업 제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한 그에게 어느 날 거래처였던 영국 등산화 업체 하이텍사(社)가 함께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해 왔다.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한창 회사도 커나가고 영업책임자로서 일에 재미를 느끼던 때라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그때 거래하던 바이어 중에 하이텍은 그다지 비중 있는 회사도 아니어서 마음을 두지 않았죠.”

그러나 하이텍의 권유는 끈질겼다. 한국 업체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제대로 신발을 만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신발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가진 권씨를 붙드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하이텍은 30만 달러를 회사 설립자금으로 무상 지원하겠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거의 떠밀리다시피 독립해 나오게 됐다.

“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세원에서 뒷조사를 시켰나봐요. 그때만 해도 영업하던 사람이 공장을 차려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사정이 있나 싶었던 거죠. 뒤에 내가 정말로 회사를 차린다는 걸 알고 나서는 ‘빨리 망하고 돌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때껏 모아둔 전재산 3000만원을 공장 전세금으로 걸었다. 하이텍이 준 자금이 그때 우리 돈으로 2억 5000만원쯤 됐는데, 이런저런 생산설비를 구입하는 데 1억7000만원을 쓰고, 8000만원은 은행에 예치했다. 88년 사무직 6명, 생산직 60명의 직원들과 공장문을 열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처음부터 부채 없이 사업을 시작한 덕분에 물건을 만들어 납품한 만큼 이익금은 그대로 은행계좌에 입금됐다. 회사는 이후 5년간 해마다 100%씩 성장했는데, 그 사이에 공장에 세 차례나 불이 났다. 92년의 첫 화재 때는 창고가 불타 2억원의 피해를 보았고, 그 이듬해엔 쓰레기장에 불이 나면서 건물 일부를 태웠다. 그 몇 달 후에 다시 큰 불이 났는데, 이때 하역을 기다리고 있던 신발들을 고스란히 태워 5억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권사장이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공항에 내려서 회사에 별일 없느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불이 났다고 해요. 헐레벌떡 뛰어와 보니 공장 2, 3층이 모두 탔는데, 납품할 흰 운동화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 재로 변해 있더군요.”

출장길에 동행했던 아내는 타버린 공장이 눈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둥둥 걷고 잿더미가 된 신발들을 치우고 있더란다.

“이미 ‘상황 끝’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빨리 수습하고 새 출발하는 방법밖엔 없어요.”

권사장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이를 뛰어넘을 길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다.

매사를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헤쳐가는 사람에겐 하늘도 길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그 해 5월 스키 전문업체인 미국의 K2사 바이어가 찾아와 자신들이 개발중인 인라인 스케이트(일자형 롤러스케이트)를 성호실업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제의했다. K2사가 유수의 신발업체를 제쳐놓고 성호실업을 택한 것은 일찍부터 성호의 등산화 제조기술을 눈여겨봤기 때문.

권사장은 그 무렵 시판되던 일자형 롤러스케이트들이 모두 스키 부츠처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딱딱하고 무거운데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발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성호가 만들던 경등산화 재질을 이에 접목시키자고 제안했다. 시험 삼아 플라스틱을 경등산화 재질로 바꾸고 내피를 없애니 신발이 훨씬 가벼워진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고 발이 편했다. 결과에 흡족한 K2는 즉각 권사장과 계약을 체결했다. 제품은 성호가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권사장은 이 기술로 국제특허를 냈고, 그때껏 꾸준히 성장해온 성호실업은 K2에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를 독점공급하면서 ‘수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독자 브랜드 ‘트렉스타’ 개발

성호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라인 스케이트는 생산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국내 공장만으로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제때 대기 어려워지자 95년 중국 톈진(天津)에 대지 8000평, 종업원 25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현재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는 세계 롤러스케이트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장 곳곳을 구석구석 보여주던 성호실업의 홍보담당자는 단 한 곳만은 외부인 접근금지 구역이라며 출입을 막았다. 개발실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을 개발, 관리하는 방이라고 했다. 미국의 K2 본사 직원들이 제품의 기술 보안을 위해 그 방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성호실업은 매출의 80%를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로 올리고 있다.

창업 계기가 된 하이텍 제품 생산은 5년 만인 93년에 그만뒀다.

“노사분규가 심화되면서 인건비가 해마다 가파르게 올라갔죠. 우리 회사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이텍 제품은 중급이었는데, 임금이 계속 높아지다 보니 우리도 하이텍도 모두 타산이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옮겨가게 하고, 우리가 지원받았던 장비와 기술도 모두 이전해줬습니다.”

하이텍이 철수한 후 성호실업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자체 브랜드 개발이었다. 94년 권사장은 자체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OEM에만 의존해왔던 회사 경영형태를 새로운 생산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브랜드가 바로 ‘트렉스타(TREKSTA)’. 트렉스타는 ‘TREK(여행)’과 ‘STAR (별)’의 합성어로, ‘험난한 산행을 할 때나 눈 위를 달릴 때 길을 밝혀주는 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인건비 상승으로 외국 기업들이 임금이 싼 대만이나 동남아 국가로 하청생산 공장을 옮기자 신발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사라져갔다. 이처럼 신발산업은 이제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모두들 물러날 때, 권동칠 사장은 오히려 더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되 특수화 분야를 집중 공략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고 연구인력을 집중 투입, 질 좋은 등산화와 스노보드화를 만들어냈다.

스노보드화의 경우 그 전까지는 안쪽과 바깥쪽이 분리된 투 피스 구조로 되어 있어 신고 벗기가 불편하고 손질과 보관 또한 어려웠다.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보완, 원 피스 형태의 스노보드화를 만들었다. 투 피스 형태를 불문율처럼 고수하던 당시 스노보드화업계에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전세계 시장의 60%가 원 피스 형태로 바뀌었다. 성호의 스노보드화는 일본의 스키용품 전문업체인 나라스포츠가 판매를 대행하고 있는데, 일본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제품 개발을 선도해온 권사장은 완전 방수가 되는 등산화인 고어텍스도 국내 업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고어텍스 개발은 중(重)등산화를 경(輕)등산화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 등산화 생산업체는 10여개사. 그 중 트렉스타의 등산화 점유율은 50% 정도다. 다른 등산화에 비해 값이 비싸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있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다시 찾는다고 한다.


꿈에도 신발만 생각한다

성호에서 생산하고 있는 등산화는 모두 50여종. 그중 30여종이 국내에서 시판된다. 트렉스타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은 등산화, 스노보드화, 스케이트화, 샌들 등인데, 수출이 30%, 내수가 70%를 차지한다. 수출국은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등 10여개국. 앞으로 30여개국으로 늘려 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 성호실업은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의 이름을 딴 등산화 ‘비로봉’을 내놓았다. 가격을 기존 제품들보다 저렴한 6만원대로 낮추고, 금강산 관광객 중에 고령자가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신발 무게도 켤레당 640g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금강산 관광객의 20%가 이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권사장은 트렉스타가 고가여서 중급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97년에는 ‘레저타임’이라는 중저가 상품을 개발했다.

권사장이 여느 중소기업인과 달리 실패를 모르고 성장을 거듭해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해수욕장에 피서 가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 발만 살펴보다 오지요. 달리는 기차 바퀴를 보면 저 모양을 어떻게 신발로 옮겨 볼까, 절에 가면 탱화의 색채와 문양을 어떻게 신발에 담아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신발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신발만 잔뜩 나오는 꿈까지 꿔요.”

권사장은 “신발사업의 관건은 창의력인데, 이 창의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아이디어를 낚아챌 준비가 돼 있을 때 살이 붙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날 세 살짜리 조카의 발이 자라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신발도 발에 따라 커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게 됐다. 신발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신발은 연구단계에 있는데, 내년 봄쯤이면 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개발중인 제품은 왼쪽과 오른쪽 모양이 다른 신발이다. 따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짝 같지만 함께 놓으면 잘 어울리는 한 켤레의 신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옷은 좌·우가 달라도 전체적으로는 잘 어울려 보이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권사장은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이 뒤따르지 않으면 가뜩이나 여건이 좋지 않은 신발산업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호실업은 매년 매출액의 5∼10%를 연구개발비로 지출한다. 98년 정식 연구소 등록을 마친 성호실업 연구소에서는 40명의 연구원들이 매년 두 종류 안팎의 새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연구중인 가장 큰 프로젝트는 ‘맞춤신발’.


맞춤신발의 대중화

“4000만 국민의 발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칼처럼 길쭉한 발이 있는가 하면, 마당쇠 발처럼 넓적하고 뭉툭한 발이 있고, 발바닥이 편평한 발이 있는가 하면 오목한 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팔리는 신발들은 발 모양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사이즈만 달리한 것이에요. 그러니 발이 편할 리 없죠. 이제는 각자 특유의 발 모양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주자는 겁니다.”

맞춤신발이란, 매장에 온 소비자들의 발 모양을 컴퓨터로 스캐닝해서 공장으로 전송하면 24시간 안에 제품을 만들어 48시간 안에 소비자들이 신발을 받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캐주얼화를 만드는 영국의 클라크사나 골프화를 만드는 풋조이사가 이런 맞춤신발을 생산하고 있지만, 가격이 켤레당 1000달러 정도로 매우 비싼데다, 제작과 배달에 소요되는 기간도 2주일이나 돼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없애 값은 100달러 미만으로 하되 이틀 안에 소비자에게 택배가 가능한 맞춤신발을 대중화시킬 생각이다.

성호의 현재 기술력으로는 정상적인 발 모양을 가진 사람을 위한 맞춤신발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사고를 당했거나 날 때부터 기형적인 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직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권사장은 이에 대한 연구가 끝나는 내년 상반기에는 소비자들이 자기 발에 맞는 맞춤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품은 등산화에서 평상화까지 어떤 신발이든 다 가능하다는 것.

그는 “맞춤신발의 대중화는 신발산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성호실업에는 맞춤 신발 기술과 관련한 계약을 맺으려는 외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사장은 맞춤신발 시대가 열리는 21세기에는 1조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대비해 중국 톈진에 대지 1만5000평, 직원 2500명 규모의 제2공장을 건립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권사장은 언제나 자신이 진두에 나서 회사를 이끌었다. 직원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큰 방향만 제시하고 직원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회사를 꾸려가게 유도한다. 그랬더니 혼자 해왔던 과거 10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힘이 느껴진다고 한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권사장. 회사가 성장해도 신발산업 바깥으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그는 두 개의 꿈을 갖고 있다. 자식과도 같은 트렉스타를 국제적인 명성의 브랜드로 키워내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 최대 신발 수출국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하면 문이 열리고 길이 보인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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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처녀 장정윤, 스물 일곱살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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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의 나이로 닭꼬치장사로 나름대로 성공한 젊은 처자의 이야기...
인터뷰를 듣다가 보면 엄청난 자신감을 가진 또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배울점도 엄청많은것 같습니다. 특히 Just Do It! 이라고 할까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바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에서도 혀를 두르게 만듭니다.
총각네 야체가게의 이영석씨와 아주 비슷한 스타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저도 이만 분발해 보도록 해야 겠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처럼
(주)COF 장정윤 대표


노점상에서 닭꼬치를 한 달에 3천만원씩 팔아치우고 20대에 40여 개의 가맹점을 낸 ‘꼬지필’의 장정윤 사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성공신화를 이뤄가고 있다. 그의 경쟁 상대는 ‘맥도날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맥도날드를 넘어설 것이라 자신한다. 당찬 부산 아가씨의 자신만만 창업 성공기.

“맞아요?” “오 마이 갓” “당근이죠!” 하이톤의 낭랑한 목소리로 표준어에 아직 남아 있는 부산 사투리, 영어까지 섞어가며 얘기하는 장정윤 대표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구관조 같았다. 조금은 정신이 없고 말이 많은 것도 솔직하게 인정한 그는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게 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사업가보다는 영락없는 20대 젊은 여성이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자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될성부른 떡잎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자신의 첫 사업으로 우유배달을 시작했던 꼬지필의 장정윤(28) 사장은 그야말로 ‘될성부른 떡잎’이다. 우유를 받는 집 앞 대문마다 자신의 소개와 함께 우유를 꼭 먹어야 하는 호소문을 적은 메모를 붙이는 등 자신만의 마케팅을 그 때부터 펼쳤기 때문이다. 그 작은 메모 한 장은 신통하게도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유업계의 비수기에도 그의 고객은 한 명도 우유를 끊지 않았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 학비와 어학 연수비를 위해 우유배달에서 닭꼬치 판매로 사업을 전환했다. 그의 첫 번째 사업장은 다름 아닌 그의 모교 앞.
“저도 물론 부끄러웠죠. 지나가다 알아보는 선생님들이 뭐하냐고 물으시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인근에 대학도 있어 젊은 세대들의 유동이 많은 곳이라 욕심이 났어요.”
수레 110만원에 오븐 등 장비 50만원으로 시작. 장사를 위해서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뼈 없는 닭꼬치를 개발했고 고기 사이에 떡을 넣은 ‘쫀득꼬지’,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화끈꼬지’, 갈비양념을 맵게 만들어 바른 ‘맵싹꼬지’ 등 다양한 맛의 꼬치들을 개발했다. 모두 손님들이 일러준 양념 비법을 귀담아 들어 개발한 것들이다. 여성들도 예쁘게 먹을 수 있도록 꼬치용 막대기를 빼 은박지에 싸주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천원짜리 닭꼬치가 하루 7백개에서 천개까지 팔렸다. 한 달 매출이 3천만, 순수익은 1천만원에 이르렀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였다.
혼자 하기 벅차 친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써가며 새벽 2시까지 팔았다. 하지만 노점상의 천적은 단속반. 단속반을 피해 점심장사를 과감히 접고 오후 5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면 닭꼬치를 먹던 손님들까지도 같이 수레를 끌어 골목으로 도망도 다녔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의 밑거름이고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렇게 6개월간 힘들게 번 돈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동안은 장사는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맡겼다. 하지만 4개월 후 귀국했을 때는 이미 가게는 망한 상태. 복학 후 다시 장대표가 리어커를 잡았다.

노점상이 프랜차이즈를?
“한창 장사 잘되고 있는 데 맞은편에 30평짜리 치킨집이 생긴 거예요. 도저히 경쟁이 안 되겠더라고요. 자극이 됐는지 좀 무리를 해서 저도 어엿한 가게를 마련했죠.”
겁도 없이 사채까지 빌려 노점상에서 4평짜리 가게로 발전한 것도 역시 그답다. 콜라 서비스는 물론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번데기까지 제공했다. 물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 때부터 장사에 대해 물어오고 가맹점을 내 달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자를 하겠다며 프랜차이즈를 동업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무리한 투자에 빨리 승부를 내려는 욕심 때문에 결국 수억원의 손실을 보고 동업은 1년 만에 깨졌다.
남은 빚 정리도 모두 장대표의 몫이었다. 힘들게 빚을 정리하고 또 다시 3억원을 대출 받아 또 다른 도전으로 서울행을 결심, 그대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국에서 전국적 브랜드로 성장하고 나아가 해외 진출의 목표를 위해 서울 진입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해 부산에 물류 공장도 세웠다. 전국 모든 매장에서 같은 크기, 같은 맛의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맥도날드가 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회사가 됐는지 아세요? 바로 어디를 가나 똑같을 수 있도록 완전한 가공·물류 시스템과 매뉴얼을 갖췄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공장에서 한 번 튀겨낸 닭꼬치를 냉동 상태로 공급하는 체제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부산·경남에서만 32개 가맹점을 내고 서울에 입성, 대학로점을 필두로 목동점, 일산점 등 3곳을 오픈 했을 때 마침 조류독감이 터졌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짐을 싸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자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직원의 나이 평균은 스물넷. 대부분 부산에서 함께 고생한 초기 멤버 그대로다. 모두 그를 믿고 서울까지 올라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어 서울에 집이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본격적인 가맹사업을 펼치기 위해 하루하루 바쁘기 때문에 지금은 안타깝게도 남자 직원은 고시원행, 장대표를 포함한 여직원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상황. 젊어서일까, 직원 모두 지금의 이 힘든 상황을 재미있게 즐기며 일한다고 한다.

“성공? 제겐 아직 먼 얘기에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20대에 전국 40여 개의 가맹점을 가졌음에도 그는 아직 성공은 먼 얘기라고 말한다.
올해 4월 안에는 미국 보스턴 캠브리지 대학 앞에 꼬치빌 해외 1호점이 연다. 다음은 중국과 일본.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것은 없다는 장정윤 대표. 무엇이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를 믿기 때문에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첫 번째 꿈은 어학연수였다. 물론 닭꼬치 노점상으로 그 꿈은 이뤘다. 두 번째 꿈은 맥도날드를 넘어설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이 또한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이냐고 묻자 정대표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제 인생의 마지막 꿈은 장애우, 노인 할 것 없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그런 사업적 공단을 만드는 것과 동물보호재단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동물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우리 사람이 쓰는 모든 바디 제품에는 동물들의 비명 소리가 담겨 있거든요. 동물 임상실험을 하지 않은 바디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동물 애호가가 많아서 아마 대박 나겠죠?”

月刊<창업&프랜차이즈> www.bizhous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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