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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부처님 오신날 특집으로 한 방송인데, 부처님의 일생중에 이 방송은 출가를 해서 막 득도를 해서 해탈을 하는 과정까지를 그린 방송...
뭐 신화, 설화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지만, 나는 석가모니 부처이니 나를 믿으라라는 그런 일방적인 말이 아닌, 지금 이순간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살아가라는 멋진 가르침으로 마무리를...
KBS 수요기획 - 법련사 외국스님들의 소망
MBC 스페셜 다큐 부처님오신날 -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교 법회중 용어
불교tv - <부처님오신날특집>美콜롬비아대 MBA학생단을 위한 현각스님의 영어법문
불교TV - 현각 스님 초청 법문
불교TV -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 현각스님 강연(회광반조)
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스님 화계사 특별법문
아침마당 - 현각스님, 내 인생의 세고비 - 인생은 남을 위해 사는 거야 (사진보기)
현각스님 초청강연회 -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영상)
개인적으로 불교신자도 아니고, 무교이지만, 불교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종교로서의 가르침이라가보다는, 하나의 철학적인 의미로 접근을 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듯하다.
뭐 어찌보면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나 천주교의 사랑이라는 의미에서부터의 접근이라면 얼마든지 배울만한 점이 많지만, 최근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눈살찌푸리게 하는 행동들이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이 곧 길이요, 생명인듯한 말들은 정말 꼴보기 싫다...
순간순간을 살아라라는 말도 너무 좋지만, 내 말이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내가 한말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직접 실천해보라는 붓다의 말이 가슴에 와다았고...
내 삶에 있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진리를 하나씩 실천에 옮기고, 몸소 행하는 그런 삶을 만들도록 하자!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란 말은 종족의 이름으로 '능하고 어질다'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 10가지의 존칭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를 칭하는 호칭이다.[1] 샤카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샤카무니'(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또는 한자 음차인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불리고, 줄여서 '샤카'(산스크리트어: शाक्य) 또는 한자 음차인 석가(釋迦)라고도 한다. 아명은 싯다르타 고타마(산스크리트어: सिद्धार्थ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팔리어: Siddhattha Gotama, 한자: 悉達多 喬達摩)로 '고타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기도 한다. 성(姓)인 '고타마'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라는 뜻의 '붓다(불 · 부처)'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하기도 한다.[2]
샤카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생애
역사적 배경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 성(가비라성)을 중심으로 샤카 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카 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카필라 성,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 정치 또는 귀족 정치(혹은 과두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왕이라고 하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탄생
싯다르타의 탄생을 표현한 부조.
슈도다나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경전이나 전설에 의하면 왕비가 6개의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구리성)로 향하던 중, 기원전 624년경 음력 4월 8일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뭇가지에 매달려 섰을 때 오른손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한다.[1] 경전에는 이때 하늘에서 오색 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가릉빈가'가 아름다운 소리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였으며, 또한 구룡이 나타나 몸을 닦아 주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왕자는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 갔고, 그 걸음 걸음 마다에는 연꽃이 피어 올랐으며, 이후 왕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는 "우주만물(물체,감정 등)은 오직 내 안에서 존재(동일한 것이 어떤이 에게는 기쁨으로, 또 어떤이 에게는 슬픔으로)하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인지라 내 스스로가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이는 불교 철학의 핵심이며 모든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리다. 간혹 불교에서 조차 이를 존재의 귀함, 또는 석가모니의 귀함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교의 기본교리에서는 그 존재가 석가모니 일지언정 특정 존재자체에 대해 귀하고 덜 귀하다 이야기 할수 있는 교리는 없다.
유년 시절과 결혼
싯다르타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을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슈도다나는 아들의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었는데 이는 소원 성취라는 뜻이다. 그는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진리에 관해 명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궁전 안의 안락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궁전을 나와 밭갈이 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 쇠약한 노인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으며, 나서 병들어 신음하게 되고 죽어야 하는 생로 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석가의 이러한 우울한 심정을 눈치챈 부왕은, 혹시 그가 그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위안을 주려고 골리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Yaśodhara)와 혼인하게 하였다.[1]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싯다르타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하여 이름을 '라훌라(Rahula)'라 지었다.[3]또 부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주야로 향연을 베풀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가 되었다.
출가
고뇌하는 싯다르타 왕자를 표현한 반가사유상.
그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우쳐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29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밤,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하고 출가를 하였다. 싯다르타의 출가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여 끝내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왕국을 떠나가게 한 것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도(道)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정열이었다. 불전에 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는 노(老)·병(病)·사(死)·사문(四門)의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그의 강렬한 자각을 의미한다. 당시 인도에는 도를 닦으려 하는 자는 출가하는 풍습도 있어서 아들 라후라를 얻어 후계자에 대해 근심하지 않아도 된 싯다르타는 29세가 된 어느날 밤에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고행
시종과 헤어진 후 싯다르타는 그로부터 7년간 바라문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해탈의 길을 구하였으며, 단식과 고행을 하였다. 정신을 통일하기 위하여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를 계속하는 등 온갖 고행을 계속하였으나, 해탈을 구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성지를 찾아 수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삭발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구걸을 하면서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하여 갔다.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ha, 王舍城)는 당시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의 행자(行者)로부터 요가를 배웠으나 정신적인 만족이 없었으므로 다시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네란자나 강(Nairanjana, 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한때 부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였으나, 석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부왕은 석가의 환국을 단념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1] 이 기간이 6년 동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때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다섯 사람의 수도자가 떠나갔으나[4] 그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촌의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법좌를 정한 다음 결가부좌를 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불타의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왕(魔王)들과의 싸움을 그린 불전에 잘 나타나 있다.
깨달음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불전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35세되는 해의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月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煩惱)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정적(絶對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 즉 정각(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자, 즉 불타(佛陀)가 된 것을 의미한다.
포교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그는, 보리수 밑에 대좌하여 7일 동안 12연법을 달관하고 모든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싯다르타는 한동안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 이러한 법락(法樂)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우선 지난 날에 같이 고행을 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修行者)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鹿野苑)을 방문하였다. 그들 다섯 사람은 고행을 그만둔 싯다르타를 경멸하였으나 드디어 싯다르타 설법에 감화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생겨 이로부터 전도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싯다르타는는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입장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타가 성도를 한 후 최초로 행한 설법(說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법륜을 전(轉)한다 함은 법을 설파하고 그 실현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하여 불타의 제자인 5인의 비구(比丘)가 나타나게 되어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 성립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설법한 다섯 비구가 법륜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
초전법륜은 싯다르타의 입멸(入滅)에 이르기까지의 45년 간에 걸친 부단한 설법의 시작이었다. 불타는 라자그리하와 슈라바스티(Sravasti, 舍衛城)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說法)을 해나갔다. 불타의 가르침은 심원한 것이었으며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이나 비유 또는 인연 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차차 제자가 불어나서 경제적으로 싯다르타를 돕는 독실한 귀의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라자그리하의 비파사라 왕을 교화하고 그로부터 가란타의 동산을 헌납받아 거기에 건축하였는데, 이것이 승가람(승려가 불도를 닦는 곳)의 시초로서 죽림정사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는 이곳을 근거로 하여 많은 제자를 모으고, 후에 사위성에 기원정사라는 대가람(큰 절)을 세워 사부중의 완성을 보았다.
입멸
싯다르타의 죽음을 표현한 부조.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싯다르타는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 시(市)에서 받은 공양(供養)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을 앓더니 드디어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북쪽에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편 후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것을 유언한 뒤 조용히 입멸하였다 한다. 이 날은 기원전 544년 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月의 만월의 밤)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파를 세우고 봉양하였다.
탄생과 사망 시기
불기의 계산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해가 아닌,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드신 해부터 계산하는데, 이는 큰 스승을 추념하는 의미에서 부처님과 함께하지 못한 안거(安居)의 해부터 계산한 것이다. 1950년 세계불교도 협의회(WFB)가 창립된 이후, 1956년에 상좌부 불교(스리랑카와 동남아)국가들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에서 부처님의 반열반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과 반열반을 (b.c.e.624년-544년=80세)로 보는 것으로, 현재 모든 불교국가 및 U.N(국제연합)에서 통일불기(佛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불기2544년(=서력2000년), 불기 2554년(=서력2010년), 2564년(=서력2020년)등이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샤카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생애
역사적 배경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 성(가비라성)을 중심으로 샤카 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카 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카필라 성,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 정치 또는 귀족 정치(혹은 과두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왕이라고 하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탄생
싯다르타의 탄생을 표현한 부조.
슈도다나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경전이나 전설에 의하면 왕비가 6개의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구리성)로 향하던 중, 기원전 624년경 음력 4월 8일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뭇가지에 매달려 섰을 때 오른손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한다.[1] 경전에는 이때 하늘에서 오색 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가릉빈가'가 아름다운 소리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였으며, 또한 구룡이 나타나 몸을 닦아 주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왕자는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 갔고, 그 걸음 걸음 마다에는 연꽃이 피어 올랐으며, 이후 왕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는 "우주만물(물체,감정 등)은 오직 내 안에서 존재(동일한 것이 어떤이 에게는 기쁨으로, 또 어떤이 에게는 슬픔으로)하는 것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인지라 내 스스로가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이는 불교 철학의 핵심이며 모든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리다. 간혹 불교에서 조차 이를 존재의 귀함, 또는 석가모니의 귀함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교의 기본교리에서는 그 존재가 석가모니 일지언정 특정 존재자체에 대해 귀하고 덜 귀하다 이야기 할수 있는 교리는 없다.
유년 시절과 결혼
싯다르타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을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슈도다나는 아들의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었는데 이는 소원 성취라는 뜻이다. 그는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진리에 관해 명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궁전 안의 안락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궁전을 나와 밭갈이 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 쇠약한 노인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으며, 나서 병들어 신음하게 되고 죽어야 하는 생로 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석가의 이러한 우울한 심정을 눈치챈 부왕은, 혹시 그가 그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위안을 주려고 골리 왕국의 공주 야쇼다라(Yaśodhara)와 혼인하게 하였다.[1]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싯다르타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하여 이름을 '라훌라(Rahula)'라 지었다.[3]또 부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주야로 향연을 베풀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가 되었다.
출가
고뇌하는 싯다르타 왕자를 표현한 반가사유상.
그는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우쳐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29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밤,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하고 출가를 하였다. 싯다르타의 출가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여 끝내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왕국을 떠나가게 한 것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도(道)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정열이었다. 불전에 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는 노(老)·병(病)·사(死)·사문(四門)의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그의 강렬한 자각을 의미한다. 당시 인도에는 도를 닦으려 하는 자는 출가하는 풍습도 있어서 아들 라후라를 얻어 후계자에 대해 근심하지 않아도 된 싯다르타는 29세가 된 어느날 밤에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고행
시종과 헤어진 후 싯다르타는 그로부터 7년간 바라문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해탈의 길을 구하였으며, 단식과 고행을 하였다. 정신을 통일하기 위하여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를 계속하는 등 온갖 고행을 계속하였으나, 해탈을 구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성지를 찾아 수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삭발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구걸을 하면서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하여 갔다.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rha, 王舍城)는 당시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의 행자(行者)로부터 요가를 배웠으나 정신적인 만족이 없었으므로 다시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네란자나 강(Nairanjana, 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한때 부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였으나, 석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부왕은 석가의 환국을 단념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1] 이 기간이 6년 동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때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다섯 사람의 수도자가 떠나갔으나[4] 그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촌의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법좌를 정한 다음 결가부좌를 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불타의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왕(魔王)들과의 싸움을 그린 불전에 잘 나타나 있다.
깨달음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불전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35세되는 해의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月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煩惱)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정적(絶對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 즉 정각(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자, 즉 불타(佛陀)가 된 것을 의미한다.
포교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그는, 보리수 밑에 대좌하여 7일 동안 12연법을 달관하고 모든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싯다르타는 한동안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 이러한 법락(法樂)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우선 지난 날에 같이 고행을 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修行者)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鹿野苑)을 방문하였다. 그들 다섯 사람은 고행을 그만둔 싯다르타를 경멸하였으나 드디어 싯다르타 설법에 감화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생겨 이로부터 전도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싯다르타는는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입장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타가 성도를 한 후 최초로 행한 설법(說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법륜을 전(轉)한다 함은 법을 설파하고 그 실현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하여 불타의 제자인 5인의 비구(比丘)가 나타나게 되어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 성립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설법한 다섯 비구가 법륜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
초전법륜은 싯다르타의 입멸(入滅)에 이르기까지의 45년 간에 걸친 부단한 설법의 시작이었다. 불타는 라자그리하와 슈라바스티(Sravasti, 舍衛城)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說法)을 해나갔다. 불타의 가르침은 심원한 것이었으며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이나 비유 또는 인연 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차차 제자가 불어나서 경제적으로 싯다르타를 돕는 독실한 귀의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라자그리하의 비파사라 왕을 교화하고 그로부터 가란타의 동산을 헌납받아 거기에 건축하였는데, 이것이 승가람(승려가 불도를 닦는 곳)의 시초로서 죽림정사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는 이곳을 근거로 하여 많은 제자를 모으고, 후에 사위성에 기원정사라는 대가람(큰 절)을 세워 사부중의 완성을 보았다.
입멸
싯다르타의 죽음을 표현한 부조.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싯다르타는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 시(市)에서 받은 공양(供養)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을 앓더니 드디어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북쪽에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편 후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것을 유언한 뒤 조용히 입멸하였다 한다. 이 날은 기원전 544년 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月의 만월의 밤)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파를 세우고 봉양하였다.
탄생과 사망 시기
불기의 계산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해가 아닌,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드신 해부터 계산하는데, 이는 큰 스승을 추념하는 의미에서 부처님과 함께하지 못한 안거(安居)의 해부터 계산한 것이다. 1950년 세계불교도 협의회(WFB)가 창립된 이후, 1956년에 상좌부 불교(스리랑카와 동남아)국가들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에서 부처님의 반열반 2500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과 반열반을 (b.c.e.624년-544년=80세)로 보는 것으로, 현재 모든 불교국가 및 U.N(국제연합)에서 통일불기(佛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불기2544년(=서력2000년), 불기 2554년(=서력2010년), 2564년(=서력2020년)등이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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