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청동시대 (Rodin - The Age of Bro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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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로댕 전시회 - 서울시립미술관
로댕 신의 손 전시회 - 아트샵 직수입 청동상 판매

2008/07/30 - [Feel 통/추억 iN] - 루브르박물관전 & 반고흐에서 피카소까지
2년전 위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보고 그냥 푹 빠졌던 작품...
이번 신의 손, 로댕 전시회 - 서울시립미술관 에 청동시대가 또 왔다는 이야기에 광화문에 나간김에 또 들려본 로뎅의 신의 손 전시회

원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떠나서 보면볼수록 그 매력에 푹빠지게 되고, 뭔가 어둠속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참 그 신선한 느낌이 돗보이는 작품인데, 전시회 초입에 전시가 되있는데,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는데, 전시회장 밖에서보 슬쩍 보이는데, 10배줌으로 늘려서 몰래 촬영을....-_-;;


아래는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 로댕 연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영화 에 나오는 청동시대의 사진들...





더 많은 청동시대 사진 보기




그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18개월동안 수없이 그림을 그리고, 스케치하면서 드디어 프러시아 전투에서 패배한 한 병사의 울부짖음을 살아있는 활력과 생생한 사실감을 가지고 표현한 <패배자>(나중에 < 청동시대>로 명칭이 개칭 됨.)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석고 주형을 이용한 간접 주조가 아닌 직접 모델 피부에 석고 주형을   발라 떠낸 직접 주조 방식을 택한 작품으로 나중에 브뤼셀에서 1877년 전시했을 때   그 당시 여론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살아 있는 모델의 부분에서 직접 형을 떠서 그대로 조각에 사용하는 문제의 기법은 간혹 스튜디오에서는 사용되었지만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의 전시는 많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작업행위는 그 당시에는 예술가에 있어서 매우 불명예스러운 행동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로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의가 그의 편이 될 때까지 그 당시 그에 대한 비난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던 Le Etoide belge지(誌)에 끊임없이 항의를 보냄과 동시에 작품제작 당시에 모델을 촬영해놓았던 사진을 함께 첨부하여 작품과 모델사진과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설득을 으나 이내 실패로 돌아갔고, 그리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Paris Salon전에 출품하여 처음에는 그의 작품을 심사하던 심사위원들도 <청동시대>를 합법적인 작품으로 받아 들이는 듯 하다가 이내 취소한다는 의견을 내어 끝내 그의 작품은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려야 하는 쓴 맛을 맛보았던 것이다.

당시 로댕은 벨기에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델사진을 살롱위원회에 제출하며 그와 같은 혐의(!)를 벗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위원회는 이러한 자료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진 자료를 관심있게 보았더라면 사진 자료의 모델과 작품과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위원회에서는 끝내 이마저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로댕이 처음으로 취했던 투쟁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내 로댕은 이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 그리고 심한 좌절감에 휩싸여 살롱과 결별한다.
로댕이 <청동시대>에 부드럽고도 강렬한 표현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조소작업에 기울인 노력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물은 당시 아카데미의 고루한 예술적 관점과는 별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청동시대>는 젊은 육체를 통해 여명기(黎明期)의 인간들에게 인간의 본성에 진실한 사실성을 불어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1880년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에 <설교하는 성 요하네>라는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프랑스 정부가 드디어 <청동시대>를 구입함.)

'주조 스캔들(인체 복제 행위)'은 로댕을 평생 따라다녔지만, 로댕을 알리는 데에도 어느 정도 일조는 하였다. 로댕의 후원자이자 예술가였던 알베르-에르네스트와 Carrier- Bellouse 등을 비롯한 동료 조각가들이 쓴 탄원서로 명예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로댕에게 첫 작품을 의뢰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로댕에게 넓은 제작실과 8,000프랑이 정부로부터 지원이 되었는데 정부의 의뢰작은 파리 장식 미술관에 설치될 청동 대문으로,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그 유명한 <지옥의 문>이었다.

이 <지옥의 문>을 제작하는데 로댕은 무려 3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바치게 된다.  이 작품에는 에술가 로댕의 우주적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함축이 되어 담겨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지옥의 문>은 로댕이 죽은 후 1926년에야 주조가 되어 로댕 미술관에 전시하게 된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rodin87/history5.html

1880년, 브론즈
크기 : 높이 180㎝
서명 : 왼쪽다리 A.Rodin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감상하고 돌아온 로댕이 벨기에에서 완성한 '청동 시대'는 1870년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너무 완벽하게 인체를 표현하였다고 하여 살아 있는 인체를 그대로 형을 떠낸 작품이라 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던 작품이다. 모델은 오귀스트 네이 라는 젊은 군인이었다. 이 작품은 1877년 1월 처음으로 브뤼셀의 예술 서클에 '패자' 또는 '상처입은 병사'란 제목으로 출품되었었다. 이 브론즈의 전신상은 그 당시에 프러시아와 1870년 전쟁을 벌인 프랑스의 패배를 나타냈었다.




로댕의 작업실 엿보기라는 글을 보면 원래는 왼손에 창이 있었는데, 그 창을 빼버렸다는 이야기도...
만약 창이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과연 지금의 청동시대의 느낌이 날까?

그리고 아마 7개정도의 작품이 청동으로 존재하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전시회에 가면 석고로 만들어진 작품, 두개가 동시에 서있는 모습 등 예전의 진기한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다.


신의 손, 로댕 전시회 - 서울시립미술관
로댕 신의 손 전시회 - 아트샵 직수입 청동상 판매
루브르박물관전 & 반고흐에서 피카소까지

http://blog.naver.com/aggim75/5622525
위 사이트에 가니 청동시대 축소판이 있더군요...
저런거 하나 구해서 책상위에 두고두고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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