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비밀 - 빵굽는 CEO 김영모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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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 꽤 많이 출연을 하셨고, 빵굽는 CEO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성공담을 많이 들려준 김영모 명장
이번 방송에서는 어린시절부터해서 군시절, 다시 빵집 초보로 들어가는 과정, 사업초기에 힘들었던 과정 등을 잘 들려주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나 책한권의 한구절에서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고, 그 상황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참 가슴에 와닿았는데, 항상 도전정신과 최고가 되려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만든것을 남들과 공유해서 더큰 발전을 이루려는 마음 등등 배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신분...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그의 자세하나라도 배워봐야겠다.


프랑스 훈장! 대한민국제과 기능장! 기능한국인 명장에 선정! 
타워팰리스 전용 빵집, 서초구 하면 떠오르는 것 1위, 김영모 과자점!
안철수, 이건희, 정주영과 함께‘구직자들이 존경하는 기업 CEO'에 선정된 김영모!


대형 프랜차이즈의 폭풍 속에서도 3개 매장과 하나의 샌드위치 카페로 직원
180~200여명을 두고, 연매출 100억 이상에 이르게 한 김영모 대표.
하지만 천 개의 프랜차이즈가 아닌, 천 년을 이어가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과 장인’ 김영모 대표의 성공신화를 읽어본다.

< 성공의 비밀 1. 내 이름을 걸고 빵을 만든다 >
1982년, 자신의 이름을 내 건 ‘김영모 빵집’! 하루에 네 번씩 빵을 구워가며 가장 신
선한 빵을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완벽한 제품이 아니면 절대 판매하지 않는다는 철
학으로 총 몇 톤에 달하는 빵을 버린 간 큰 빵집의 주인, 김영모 대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빵집이기에 가장 최고의 재료를 고집하고, 최고의 기계를 사용
해, 최고의 빵을 만드는 김영모 대표의 성공 비밀이 공개된다.

< 성공의 비밀 2. 카네기의 행복론...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 >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이혼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영모 대표.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배고픔과 외로움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던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반항적이었던 소년도 빵을 만들 때만은 순한 양이 되어 자신의 외로
움과 쓸쓸함을 달래 왔다. 한창 제빵 기술을 연마하던 20대, 군대에 입대해야하는 절
망 속에 빠져 있던 김영모 대표. 우연히 겉표지가 뜯어진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그의 인생을 뒤 바꿔놓은 그 책을 통해 김
영모 대표의 성공 비밀이 밝혀진다.

< 성공의 비밀 3. 최고의 레시피를 확보하라 >
프랑스 연수 시절, 구수한 빵 냄새에 이끌려 우연히 들어간 허름한 빵집에서 고집쟁
이 주인 할아버지에게 집요하게 비법을 물어 천연발효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데...
한국에 돌아와 6~7년간의 끈질긴 실험과 연구 끝에 개발한 천연발효법은 아무리 먹
어도 속이 쓰리지 않는 빵, 밀가루가 부담스러운 사람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신비
한 빵을 탄생시킨다.
현재 관리하고 있는 레시피 수가 무려 4천여 가지나 되는 김영모 대표. 그가 이야기
하는 최고의 레시피를 통해 성공 비밀을 만나본다.


외국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발붙이기 힘든 서울 강남. 이곳에 자신의 이름 하나로 승부수를 던진 이가 있다. 1982년 서초동의 6평짜리 가게에 문을 연 ‘김영모 과자점’은 맛 하나로 입소문을 내면서 지역 주민들을 사로잡았고, 1995년에 ‘역삼럭키점’, 2000년에 ‘도곡타워팰리스점’을 냈다. 책에서는 고교 1년 중퇴 후 빵집 보조로 시작, 한국 최고의 빵 장인으로 우뚝 선 김영모의 눈물 젖은 빵 인생, 그리고 빵처럼 맛있는 경영이야기가 펼쳐진다

1953년생.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강남의 최고 과자점으로 인정받으며 타워팰리스에 입성한 파티시에 김영모의 이야기는 제과계의 성공신화로 남고 있다. 프랑스 르노또르 제과학교에서 연수하고 독일 하노버대학 제과제빵과를 수료하였으며, 미국 AIB Distance Learning을 졸업했다. 1998년에는 대한민국제과 기능장으로, 2004년에는 미국 월드페이스트리컵 세계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5년에는 프랑스 월드페이스트리컵 세계대회 명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에 『김영모의 행복한 빵의 세계-기린출판사』로 구어만드 월드 쿡북 대회 디저트북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에는 기능한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7년애눈 프랑스 농업공로훈장 Merite Agricole을 받았다. 17살에 경북 왜관에서 보조로 제과일을 시작한 이후 대한민국 제과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그는 1982년 서울 서초동에 '김영모 과자점' 본점을 개업하였다. 2007년 노동부에서 심사하는 대한민국 제과명장으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2개의 지점과 함께 유럽풍 디저트 카페 '페르 에 피스' 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는 『맛있는 빵·케이크·쿠키 집에서 만들기』,『김영모의 빵·케이크·쿠키』, KBS '나의 삶 나의 보람' 두번째 이야기모음 『그 길은 아름답다』,『A Collection of Fine Baking』,『빵굽는 CEO』,『김영모의 행복한 빵의 세계』,『김영모의 파운드케이크컬렉션』,『김영모의 치즈케이크컬렉션』,『김영모의 롤케이크컬렉션』 등이 있다


강남 최고의 브랜드’, ‘타워팰리스 사람들의 전용 빵집’으로 알려진 김영모 과자점

수 년 전 서초방송 케이블 TV에서 서초구민들을 대상으로 ‘서초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김영모 과자점’이 1위로 꼽힌 바 있으며, 2000년 도곡동 타워팰리스 인근에 이 빵집이 들어서자 기존의 유명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있음에도 타워팰리스 사람들이 이 집의 빵만 먹는다 하여 ‘타워팰리스 사람들의 전용 빵집’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강남지역의 새로 짓는 쇼핑몰에 입주민들이 가장 들어서길 원하는 제과점 후보 1위는 바로 김영모 과자점이다.
이 제는 강남뿐 아니라 분당과 수지, 일산 등 서울 주변의 신도시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심지어 지방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작은 동네 빵집으로 시작한 김영모 빵집이 이제는 생활의 여유와 고급스러움을 의미하는 ‘강남 라이프’의 상징이 된 것이다.
우리 동네에 이 빵집이 있어 행복하다는 사람들. 김영모 과자점은 무엇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사람들은 왜 이 집의 빵을 사러 몰려드는 걸까? 그 해답은 바로 이 집의 주인인 김영모라는 사람에 있다. 그의 손맛과 정성, 그리고 우직하리만치 고집스런 그의 원칙이 오늘의 김영모 빵집을 일궈낸 것이다.

최고의 맛을 향해 정진하는 빵 기능인, 김영모
김영모는 최고의 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는 기능인이다. 그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 처음 손에 밀가루를 묻힌 17살부터 지금까지 35년간 이 목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수 련공 시절, 공장장이 짜는 버터크림 장미꽃과 똑같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 남들이 자는 동안 밤새도록 혼자서 연습을 하곤 했다. 잘 안되면 속이 상해 손등을 물어뜯어 그의 손등은 성할 날이 없었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은 손 기술이 굳어지는 것은 방지하기 위해 볼펜을 버터크림 주머니라 생각하고 혼자서 버터크림 짜는 손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부탁해 빵에 관한 책을 보내달라고 해서는 틈틈이 공부도 했다. 제대 후에는 한국 최고의 제과기술인 밑에서 빵을 배우기 위해 당시 시내의 가장 유명한 제과점에 이력서를 내놓고는 두 달이 넘도록 기다린 후에야 그곳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곳에서 수년 간 부공장장을 하고, 무교동의 보리수제과점에서 공장장으로 3년간 일한 뒤 1982년 서초동의 6평 가게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빵집 간판을 걸었다.

자 신의 가게를 낸 뒤 빵의 품질에 대한 그의 관리는 더욱 철저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빵이 나오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공장직원들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잘못 보관해 냄새가 배자 400개 모두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하룻밤에 다시 만들어낸 고집불통이기도 하다. 좋은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고,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외국의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난한 빵장수 시절에도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1993년 프랑스 연수여행 도중 그는 한 작은 빵집에서 천연발효로 빵을 만드는 것을 발견하고 해마다 그곳으로 달려가 빵집 할아버지에게 매달려서는 천연발효기법을 배웠다.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천연발효를 성공시켜 제품화하기까지 6년이 걸렸다. 이로써 일체의 제빵개량제나 화학첨가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효모만을 사용하는 웰빙 빵의 시대를 연 것이다.

좋은 기계에 대한 그의 욕심은 특히 대단하다. 1986년, 그는 네덜란드산 급속 냉동고와 스웨덴산 오븐,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기계를 사기 위해 1억 2천만 원을 쓴 적이 있다. 당시 시세로 아파트 세 채 값이었다. 아직 내 집 장만도 못한 채 한집에서 아내와 아이들, 공장 직원들이 함께 먹고 자던 시절이었다. 이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능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기계에 끌리기 마련이다. 일식 조리사는 최고의 회를 뜨기 위해 사시미 칼 하나에 기천만 원씩 투자하고, 목수들도 절단기며 대패기며 샌딩기에 이르기까지 1년이 멀다 하고 수천만 원어치의 기계를 갈아 치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들이 더 맛있는 회, 더 정교하고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고 싶어 하듯, 나 역시 좋은 빵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기능인이란 자신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손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그의 목표는 채소보다 신선한 빵,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빵집 브랜드를 일군 성공한 경영자, 김영모
김 영모 과자점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점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김영모 과자점을 내고 싶다며 몰려들지만, 심지어 미국의 L.A.에서도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모두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직접적인 품질관리가 어려운 조건이라면 무리하게 매장 수를 늘리지 않는다. 그래서 매장은 모두 직영형태로 운영된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이상 그 이름에 값하는 맛있는 빵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성장이나 돈이 아니라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 개업 후 매장 4개를 갖는 데 23년이 걸렸다. 평생 가야 10개를 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조금 뜬다 싶으면 우후죽순으로 점포를 늘리는 현 세태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는 천천히 굽는 빵처럼 느리게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경영자로서는? 사업가로서 그는 쉽게 돈 벌 수 있는 길을 에둘러 가는 특이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매장 안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프로경영자다. 그의 프로정신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출발하여 매장관리, 제품개발, 포장, 고객 서비스, 이벤트 행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분야에도 소홀한 곳이 없다.

다양한 제품으로 고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혀라 - 김영모 과자점이 자랑하는 것은 다양한 제품. 350종의 제품이 빼곡히 매장을 채운다. 적은 품종을 대량생산하는 체인 업체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종수다. 매장에 들어서면 손님들은 다양한 선택 앞에서 즐거운 고민을 한다.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 그런 곳이 김영모 빵집이다.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라, 시대의 달라진 코드를 반영하라 - 김영모 과자점의 다른 특색은 새로운 제품이 끊임없이 개발된다는 것. 계절마다 달마다 새로운 제품들이 선을 보인다. 얼마 전 사라졌던 추억의 빵이 복고의 옷을 입고 새롭게 선보이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구경도 못한 새로운 재료, 새로운 맛의 빵들이 시식대에 놓여있다. 불황과 호황, 여자들의 치마길이와 유행, 사회트렌드에 따라 고객들의 취향도 바뀌는데 김영모 과자점은 이런 변화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반영한다. 벤처호황을 누렸던
1999~2000년 사이에는 젠zen 스타일의 심플하고 납작한 미니멀스타일의 케이크가 고객들의 환영을 받았고, IMF보다 더한 불황이라고 하는 요즘은 바라만 봐도 머릿속이 몽롱해질 정도로 화려하고 환상적인 디자인이 활개를 치고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고급 쉬폰 케이크와 생크림에 밀려났던 롤케이크를 고정관념을 깨고 반으로 잘라 하나는 눕히고 하나는 세운 상태에서 동화적인 컨셉으로 새롭게 장식하여 히트시켰다. 그는 윈도베이커리 경영자들이 뉴스나 신문,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도 눈여겨보아 달라진 코드를 반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과학을 동원한 데이터 활용을 상용화하라 - 김영모는 작은 데이터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다. 똑같은 배합비, 똑같은 공정으로 작업을 해도 바깥 온도, 습도 등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1년 동안 작업환경을 꾸준히 체크하며 데이터를 만들어 날씨조건에 따라 최적의 작업환경을 조성하도록 했다. 손맛에 과학을 동원한 것이다. 판매수요 또한 계절별 날씨별로 데이터를 만들어 예측함으로서 적절한 생산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단골고객을 넘어 충성고객으로 만드는 고객전략 - 김영모 과자점의 고객은 충성고객이 대부분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팬카페 ‘김사모’(김영모 빵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회원 수가 650명을 넘는다. 이들은 단순한 동호인 차원을 넘어 빵맛에 대한 평가를 하고 다른 빵집, 외국의 빵들과 비교하여 장단점을 비교분석해 주고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놓는 일종의 소비자 평가단 역할을 한다. 일찌감치 고객카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단순한 마일리지 적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고객의 취향, 구매패턴은 물론 기념일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시식행사를 통해 바로 현장에서 고객의 반응을 듣고 제품에 반영하는 현장경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지역특성을 고려한 ‘타워팰리스 케이크’ ‘아크로빌 빵’ 등의 론칭을 통해 지역주민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높이려 시도했다. 직원들에게는 단순한 친절을 넘어 우선 제품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하여 도움이 필요한 고객에게 적재적소에서 충분한 정보를 줄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한 발 앞서 고객에게 다가서는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교육시켰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대기업도 배울 수 있는 유익한 마케팅 기법과 고객 전략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벤트 할인쿠폰 회수율 90퍼센트라는 놀라운 성과와 크리스마스 당일 케이크 매출 1만 개의 기록을 가능케 한 것이다.

‘가족정신’‘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김영모 과자점 사람들 - 김영모 과자점은 장기근속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우선 배울 게 많고, 경영자가 최고의 설비투자를 아끼지 않으니 일할 맛도 나는 것이다. 이곳은 전 직원이 한 가족처럼 똘똘 뭉치는 가족경영을 모델로 삼는다. IMF로 재료비 급등과 매출감소라는 위기를 맞았을 때도 ‘동고동락한 직원을 해고할 수 없다’ ‘월급을 깎을 수 없다’라는 두 가지 원칙을 지켰다. 무주택 미혼직원을 위해 인근 오피스텔을 몇 채 빌려 기숙사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현재 130명 직원 중 5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김영모 과자점을 단순한 직장이 아닌 ‘우리 가게’라 생각하고 회의 때마다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내놓고 스스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고의 직원이 되도록 노력한다.

공부보다 빵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들의 교육을 과감히 포기한 남다른 아버지, 김영모
저 자 김영모의 둘째아들은 중학교 졸업이 공식학력의 전부다. 고등학교 1학년 중퇴인 아버지보다 가방끈이 짧다. 공부를 싫어하고 장래 꿈이 아버지처럼 빵을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고는 일찌감치 학원도 과외도 시키지 않았다. 대신 외국어만은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빵의 종주국인 유럽에 가서 통역을 붙여도 통역자가 빵 전문용어를 모르니 100만 원을 들여도 얻는 건 10만 원어치밖에 안 되었던 자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으로 유학 보내 중학교를 마치게 한 다음 바로 프랑스로 가 빵을 배우도록 했다. 아버지의 실용적인 결단과 후원에 아들은 날개를 단 셈이다. 그의 아들 영훈 씨는 2003년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월드 패스트리컵 대회에서 아이스카빙 부문 특별상을 받았고, 같은 해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 제과부문에서 한국 최초의 동메달을 땄다. 그들은 함께 부자 제과 기능인의 길을 걷고 있다.

빵의 장인을 넘어 인생의 명장이 되다
김 영모는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란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사로 남다른 아픔을 겪었고 단 한 번도 가족의 따스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배고프고 외로웠던 그 시절, 유일한 위안은 학교 앞 빵집의 유리진열장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뛰쳐나와 빵집에서 일하던 청년시절, 결핵으로 직장을 잃으며 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다. 방황으로 얼룩진 세월을 보냈으나 군대에서 읽은 한 권의 책이 그의 인생을 수렁에서 건졌다. 그 후 빵에 온 마음을 바쳐 빵에 정진하고 빵으로 일어섰다.
그는 지금 타워팰리스에 사는 주민이기도 하다. 빵 하나만 팔아도 타워팰리스에 살 수 있고, 130명 직원들에게 월급주고 필요한 직원들에게는 살 집도 제공하며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빵으로 일어선 그는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 곳곳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소리 없이 빵 봉사를 해왔다. 빵의 장인을 넘어 인생의 명장이 된 김영모. 그는 그 자체로 우리시대 인생과 경영의 새로운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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