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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읽었던 향수의 저자의 사랑에 대한 보고서나 에세이라고 할까?
이 사람은 언론에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잠수를 타서 책으로만 독자를 만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색의 깊이가 상당하다.
동성애에 눈을 뜬 교수, 괴테, 예수, 그리고 죽은 부인을 구해서 지옥에서 올라오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영원히 이별한다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글이 그다지 난해하지는 않으나 오디오북으로 읽어서 그런지 좀 헷갈렸다.
오래간만에 베르테르의 이름도 들어봐서 반가왔고,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러 지옥까지 갈수 있을까? 가서 구한다고 해도 과연 오르페우스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곰곰히 해본다.
사람의 마음이란.. 분노의 마음으로 확인할수도 없는 상대의 마음을 속단하고 나 혼자 흥분하고, 열받고.. 결국에는 나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다. 어른으로 산다는것에서 읽은 것처럼.. 그래봐야 나만 손해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용서하고, 이해하자.. 나를 위해서...
<도서 정보>제 목 : 사랑을 생각하다(원제 Uber Liebe und Tod)
저 자 :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강명순 역
출판사 : 열린책들
출판일 : 2006년 2월
책정보 : ISBN : 8932906645 | 페이지 : 104 | 234g
구매일 :
일 독 : 2006/7/18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미디어 리뷰>
저자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쥐스킨트는 1949년 뮌헨에서 태어나 암바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뮌헨 대학과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청년 시절 여러 편의 단편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예술가의 고뇌를 표현한 남성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1983)를 발표하고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냄새>에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한 남자가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 『향수』(1985)를 발표하며 문학적 성과와 더불어 <레마르크 이후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 중 이렇게 성공한 이는 없을> 정도의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향수』는 8년 이상 독일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머무르며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금까지 천만 부에 이르는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다른 대표작들과 함께 현대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쥐스킨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 된 이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하는 것으로 유명한 쥐스킨트는, 지금까지도 모든 문학상 수상(구텐베르크 문학상, 투칸 문학상, F. A. Z 문학상 등)을 거부하고 인터뷰와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며 작품을 통해서만 독자와 소통해 오고 있다. 쥐스킨트의 다른 작품으로는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심도 있게 묘사한 『비둘기』(1987), 평생을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기묘한 인물을 그린 『좀머 씨 이야기』(1991),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1995), 시나리오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1996)가 있다. |
『향수』,『좀머씨 이야기』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신작 에세이집. 9년만에 선보이는 이번 작품에서 쥐스킨트는, 특유의 투명하고 차분한 어조로 인류의 보편적 주제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과 포옹하는 죽음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연인의 죽음에 유예를 청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 하데스로 내려가는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이 사랑에 대한 쥐스킨트의 단상은,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그 모순들을 지나 스탕달과 괴테, 클라이스트와 바그너로 이어지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또한 죽음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예수와 죽음에 유예를 구하고 예술로서 그것을 승화시키려 했던 오르페우스를 비교함으로써 <사랑>과 <죽음>의 결합을 생산적인 과정으로 이끌어 나가는 예술의 힘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짐작할 수 없었던 쥐스킨트의 내면세계가 에세이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은둔하는 쥐스킨트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 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9년 만에 발표한 최신작 『사랑을 생각하다』는 허구의 세계 바깥에서 쥐스킨트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에세이이다. 이 작품에서 쥐스킨트는 특유의 투명하면서도 차분한 어조로,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보편적 주제인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사랑과 <포옹하는> 죽음의 관계란 또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연인의 죽음에 유예를 청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 하데스로 내려가는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이 사랑에 대한 쥐스킨트의 단상은,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그 모순들을 지나 스탕달과 괴테, 클라이스트와 바그너로 이어지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또한 죽음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예수와 죽음에 유예를 구하고 예술로서 그것을 승화시키려 했던 오르페우스를 비교함으로써 <사랑>과 <죽음>의 결합을 생산적인 과정으로 이끌어 나가는 예술의 힘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 이처럼 일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풍부한 고전의 인용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사랑에 대한 사색은, 날카로운 입매의 사진 속 작가의 모습과는 또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며 소설을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짐작할 수 없었던 쥐스킨트의 내면세계가 에세이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은둔하는 쥐스킨트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 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책속으로>
사랑에 대한 이 모든 언급은 기이하고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은 인간이 줄 수 있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잠재적으로 야만적으로 만드는 감정을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느끼고 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랑이란 결국 일종의 병이 아닌가?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병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끔찍한 병.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은 독이 아닐까? 양이 얼마냐에 따라 가장 큰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그런 독 말이다. 도와주소서, 소크라테스여, 도와주소서! --- p.39~40 |
사랑과 죽음의 이런 불행한 결합은 ─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에도 쓰여 있듯이 ─ 이미 16세기 초, 처음으로 조형 예술에서 중세의 어둡고 순결한 죽음의 무도(舞蹈)를 충만한 에로틱의 무도로 변화시켰을 때에 시작되었다. 그 후 그러한 현상은 죽음에 대한 애호로 나타났고 ─ 아직 사드가 나타나기 이전인데 ─ 문학에서는 사디즘적인 특징으로 이어진다. 비참하게도 성기능을 상실한 사람의 발기에 대한 신화가 생겨난다. 프랑스어 〈작은 죽음petite mort〉이라는 말은 오르가슴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근본적으로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처음 들을 때 독창적이고 달콤하게 들린다. 하지만 두 번째 들으면 정말로 기분이 불쾌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성숙할 대로 성숙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죽음에 대한 사랑, 에로틱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사(情死)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 p.47~50 |
이렇게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 p.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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